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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손에 전달되는 충격력 완화를 위한 경찰 삼단봉에 관한 연구

        한기봉,하정훈 한국경찰연구학회 2023 한국경찰연구 Vol.22 No.2

        In order for police officers to suppress criminals during their duties, there are various suppression equipment, but in general, they are often suppressed using a three-stage rod. Three-stage rod Peak, which is currently distributed and used by police officers, is used with inconvenience because the impact force generated during the strike is greatly transmitted to the police officer's hands. Accordingly, this study proposed a three-stage rod with enhanced impact force mitigation function transmitted by hand. Police equipment with safe and excellent performance will increase the work efficiency of police officers, which will lead to securing the safety of the people. As a result of comparing and analyzing the police three-stage rod used by the existing police and the police three-stage rods proposed in this study through computer simula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 impact force of the police three-stage rods proposed in this paper was reduced by hand. When hitting an object with the proposed police three-stage rod, the impact transmitted to the intermediate rod through the upper rod can be mitigated in the process of passing through the elastic rod, 경찰관이 임무 수행 중에 범죄자들을 제압하기 위해서는 다양한 진압장비가 있으나 일반적으로 삼단봉을 사용하여 진압하는 경우가 많다. 현재 경찰관들에게 보급되어 사용되고 있는 삼단봉은 타격 시에 발생 되는 충격력이 경찰관 손에 크게 전달 되어져 사용하는데 불편함을 지닌 채 사용 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에 본 연구는 손으로 전달되는 충격력 완화기능이 강화된 삼단봉을 제안하였다. 안전하고 우수한 성능을 지닌 경찰장비는 경찰관의 업무 효율을 높이고 이는 국민의 안전을 확보하는 결과로 이어질 것이다. 기존 경찰에서 사용하는 경찰 삼단봉과 본 연구에서 제안한 경찰 삼단봉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 비교 분석한 결과, 본 논문에서 제안한 경찰 삼단봉이 기존 삼단봉보다 손으로 전달되는 충격력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였다. 제안한 경찰 삼단봉으로 물체를 타격할 때 상단 봉을 통하여 중간 봉으로 전달된 충격은 탄성체 봉을 통과하는 과정에 완화할 수 있도록 하여 손잡이 봉으로 전달되는 충격력이 완화되는 효과를 확인하였다.

      • KCI등재

        볏짚제품 제작의 기법과 의미변화

        엄정웅(M.A Um, Jeong-Ung) 비교민속학회 2014 비교민속학 Vol.0 No.53

        전통사회에서 봉새기는 볏짚으로 만든 용기로써 곡물을 퍼 담거나 보관하는 용도사용 되었으며, 1960년대까지만 해도 일반적인 농촌마을의 농부들은 봉새기를 제작?사용하였다. 하지만 산업화의 진행에 따라 1970년대 이후 신소재 제품이 등장하면서 봉새기의 제작과 사용은 점차 쇠퇴되어갔다. 조사대상지인 경북 문경시 문경읍 고요1리도 여느 농촌마을과 마찬가지로 봉새기의 제작과 사용의 쇠퇴되어갔다. 이런 현상이 지속적으로 진행되던 중, 문경시는 석탄산업의 쇠퇴로 인한 경제침체와 인구유출 현상을 해결하기 위해 1990년대 중반이후 관광산업에 투자하게 되었다. 이를 계기로 고요1리 노인회 회원들의 의지가 문경시의 정책과 상호작용 하면서 1999년 짚공예회가 결성되었고, 볏짚제품 만들기 전통이 재등장하게 되었다. 짚공예회 회원들은 볏짚제품을 다시 만들면서 봉새기를 제작하는데 이렇게 제작된 봉새기는 과거의 것과는 분명히 다른 기술적?문화적 맥락을 가진 것이었다. 전통사회의 봉새기는 아무리 작더라도 곡물 몇 되는 보관할 수 있도록 만들어 졌다. 하지만 현대사회에서 다시 등장한 봉새기는 과거의 것을 그대로 재현한 것과 어린아이의 손바닥만큼 작게 축소시킨 것이 공존한다. 과거의 것을 재현한 봉새기는 제작기법이 달라지지 않았지만 축소형 봉새기를 만들면서 봉새기 제작기법이 달라진다. 축소형 봉새기를 만들기 위해서는 대개 전통사회의 제작기법을 생략하거나 변형, 간소화 하여 봉새기를 만들었을 때 형태만 유지되도록 한다. 한편 봉새기 제작의 기법적인 측면뿐만 아니라 사회문화적인 의미도 과거와는 달라진다. 전통사회의 농부의 입장에서 봉새기 제작은 삶을 영위하기 위한 것이었으며, 머슴의 입장에서는 생활필수품을 만듦과 동시에 주인과의 계약을 이행하여 세경을 받기 위한 것이었다. 또한 청장년층 남성들이 제작의 핵심주체였으며, 농업력과 기후, 필요에 따라 제작자가 주도적으로 실천할 수 있었던 하였다. 그러므로 전통사회의 봉새기 제작은 생업활동과 많이 연관되어있는 것이었다. 하지만 현대사회에 등장한 봉새기 제작은 부업, 교육자료, 관광자료화 되고, 70대 이상의 노인들이 기법실천의 핵심 주체가 된다. 또한 소비자의 취향과 제작자의 의도가 상호작용하면서 제작되는 봉새기의 크기나 개수, 그리고 제작 장소와 제작시기가 과거와는 달라진다. 이러한 현상은 사회?경제의 변화에 따라 현대사회에서 볏짚제품의 실용적인 기능이 사라지고 그 외에 다른 가치들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이는 지방정부차원의 지원과 고요1리 짚공예회 노인들의 의지가 상호작용하였기 때문에 나타나는 것이며, 지방정부의 지원 없이는 현상이 지속되기 어려운 실정이다. 요컨대 봉새기 제작의 기법과 의미의 변화는 거시적인 사회?경제 변화 속에서 고요1리 노인들의 적응을 통해 나타났다. 이들은 상황에 따라 봉새기 제작기법을 단절시키기도 하였고 전통적인 봉새기 제작기법을 기반으로 하여 그것을 변화시키기도 하였다. 이렇게 다시 나타난 전통은 완전히 새로운 것이 아니라 지속과 변화가 공존하는 양상을 보인다.

      • KCI등재

        삼단봉으로 대상을 가격했을 때 손에 전달되는 충격력에 관한 연구

        한기봉,하정훈 한국경호경비학회 2022 시큐리티연구 Vol.- No.72

        This study intends to suggest a supplementary point in the situation where there is insufficient research on safer and more efficient use of the samdanbong, which is used by security guards, the police, and even the general public for self-defense and situation-solving in emergency situations. We propose a three-stage rod to reduce damage from the impact force transmitted to the hand when using the three-stage rod. The three-stage rod proposed here alleviates the impact force transmitted from the intermediate rod by inserting an elastic body into the portion connected between the handle rod and the intermediate rod among the rods constituting the three-stage rod. In order to verify this, as a result of comparative analysis of the existing triple rod and the proposed triple rod through computer simulation, it was confirmed that the impact force transmitted by hand in the triple rod proposed in this study was reduced compared to the existing triple rod. 본 연구는 경비원과 경찰, 일반 국민들까지도 긴급한 상황에서 호신 및 상황 해결을 위하여 사용하고 있는 삼단봉과 관련하여 보다 안전하고 효율적인 사용에 대한연구가 미비한 실정에서 이에 대한 보완점을 제시하고자 한다. 삼단봉을 사용하여 물체를 타격할 때 손에 전달되는 충격력으로부터 피해를 줄이기 위한 삼단봉을 제안한다. 여기서 제안한 삼단봉은 삼단봉을 구성하는 봉 중에손잡이 봉과 중간 봉 사이에 연결되는 부위에 탄성체를 끼워 설치함으로써 중간 봉으로부터 전달되는 충격력을 완화 시켰다. 이를 검증하기 위해서 기존 삼단봉과 제안한 삼단봉을 컴퓨터 시뮬레이션을 통해비교 분석한 결과, 본연구에서 제안한 삼단봉이 기존 삼단봉보다 손으로 전달되는충격력이 줄어드는 것을 확인하였다.

      • KCI등재

        1920-30년대 일본 봉오도리(盆踊)의 부활과 성행 과정으로 본 민속 춤 문화 -히로시마현 사례를 중심으로-

        미야우치 사키 비교민속학회 2022 비교민속학 Vol.- No.75

        본 논문은 일본 전후(戰後)부터 지금까지 무형문화재가 된 봉오도리가 아닌, 전국 어디서나 볼 수 있는 ‘흔한’ 봉오도리에 대한 연구의 일부이다. 봉오도리는 현재까지 일본 곳곳에서흔히 볼 수 있는 오봉 때 빠질 수 없는 연중행사인데 그 기원이나 역사적 흐름, 특히 현재실시 상황에 대해서는 충분히 밝혀져 있지 않다. 그러므로 현재 봉오도리를 검토하기에 앞서, 본 논문에서는 지금의 봉오도리 문화에 큰 영향을 미친 1920-30년대 봉오도리의 존재양상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제2장에서는 근대 이전부터 근대 1930년대까지 봉오도리의 역사적 흐름에 대해 분석한다. 메이지시대의 봉오도리 금지령에 따라 한때는 봉오도리가 그 모습을 감췄다고 하는데 당시 서양인의 기록물을 중심으로 이 시기의 봉오도리 문화에 대해 밝히려고 한다. 봉오도리가 크게 성행한 1920-30년대에 대해서는 잡지 기사나 지식층의 분석 등을 인용하면서그 과정에 대해서 자세하게 검토한다. 제3장에서는 이 시기에 실제로 봉오도리가 얼마나, 어떻게 행해져 있는지에 대한 분석을 히로시마와 식민지조선을 비교하면서 검토하도록 한다. 히로시마는 당시 봉오도리가 유난히 활발한 지방도시로 유명했으며 각 지방단체가 제작한 기록물에도 봉오도리에 대한 기술이 잘 남아 있기에 분석 대상으로 삼았다. 또한 아무 연고도없는 식민지조선이라는 땅에서 봉오도리가 성황했던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봉오도리 문화의 특색이 더 두드러지게 나타날 것을 예상하여 비교 대상으로 삼았다. 실제로 당시 신문 보도에는 많은 봉오도리 관련 기사가 실렸다. 현대적 시각에서 보면 한마디로 봉오도리라고 해도 안무, 가사, 옷차림 등 너무나도 다양한 종류가 지역별로 존재하는데, 그렇다면 과연 봉오도리란 무엇인가? 봉오도리에는 어떠한공통점이 있는가? 현재까지 남아 있는 봉오도리를 민속학적으로 연구하기 위해서는 먼저 그역사적 배경, 특히 1920-30년대의 봉오도리 문화 형성 과정을 자세하게 분석할 필요가 있다. 이는 근대화나 현대 도시화를 겪은 한국, 중국, 대만을 비롯한 아시아에서의 (민속) 춤문화를 비교하는 데에도 도움이 되리라고 생각한다.

      • KCI등재

        「봉오동부근전투상보」를 통해 본 봉오동전투

        이상훈(Yi, Sang-hun)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0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0 No.72

        봉오동전투는 그 중요성로 인해 다각도로 연구되어 왔다. 하지만 관련 자료와 현지 조사의 제한 등으로 전투사적 연구는 미진한 편이다. 본 연구에서는 먼저 일본측 기록의 전거가 되는 「봉오동부근전투상보」의 의문점들을 살펴보고, 그를 바탕으로 봉오동전투의 현장을 복원하고자 하였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전사상자의 소속, 계급, 성명, 부상 부위까지 기록되어 있어, 신빙성 높은 자료로 평가되어 왔다. 하지만 주제별로 편성된 목차에 오류가 있고, 시간별로 일본군 병력수 기록에 차이가 있으며, 사상자 현황에도 오류가 있다. 또 부상자 후송에 의문점이 남아 있으며, 일부 장교의 활동 부재도 확인되고 있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는 여러 차례 가필이 있었으며, 시간에 쫓겨 급히 정리된 문서로 파악된다. 봉오동전투 당시 독립군 주력부대는 봉오동 상촌의 삼차로를 기준으로 동산, 서산, 북산을 중심으로 배치되어 있었다. 일본군이 삼차로 일대에 들어서자, 독립군이 일제 사격을 가해 큰 피해를 입혔다. 독립군의 공격을 받은 야스카와 소좌는 당황했다가, 독립군 주력이 배치된 쪽이 아닌 남쪽 735고지를 향해 전진하라고 명령을 내렸다. 일본군의 목표가 독립군 섬멸이라는 점에서 볼 때, ‘토벌’이나 ‘공격’ 명령이라 보기 어렵다. 일본군은 독립군의 매복 공격에 피해를 입고, 남쪽으로 철수를 감행했던 것이다. 「봉오동부근전투상보」에 보이는 야스카와 소좌의 명령서는 공격명령서가 아니라 퇴각명령서였음을 알 수 있다.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is a very important battle in korea independence movement history. But a field survey is difficult to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It’s lacking in related material.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is a battle report of the Japanese army. There are a lot of various moot points in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Therefore it isn’t possible to believe it just as it is.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gathered at Sang-chon(上村) of Bong-o-dong(鳳梧洞). The Japanese army came under the fire from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and lost. A target of the Japanese army was an extermination of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But the Japanese army didn’t attack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Bong-o-dong battle report(鳳梧洞附近戰鬪詳報)」 isn’t an aggressive order and is a retreat order. It’s clear that an Korea Independent Army(獨立軍) won at the Bong-o-dong Battle(鳳梧洞戰鬪).

      • KCI등재후보

        배소와 봉소의 명칭에 대한 문제점 고찰

        조석연(Cho Seogyeon) 한국국악교육학회 2016 국악교육 Vol.42 No.42

        이 논문은 소(簫)의 다른 말인 배소(排簫)와 봉소(鳳簫)의 명칭 문제에 관한 글이다. 고려 이후 소의 유입에서부터 조선시대 『악학궤범』과 『세종실록』을 거쳐 1930~40년대까지 우리나라에서는 ‘소’라는 명칭이 대표적으로 사용되었으며 봉소와 배소는 소의 보조적인 용어로 기록되었을 뿐이다. 하지만 현재 배소와 봉소는 소의 별칭일 뿐 아니라, 각기 종류가 다른 악기를 가리키는 악기 명칭으로 사용되고 있다. 소의 근원적인 생성설화가 봉황과 연결되어 있어 ‘봉소’라는 용어는 낯설지 않으며, 그러한 이유로 관대만을 엮어 만든 고대의 소를 가리켜 봉소라 기록한 문헌이 존재한다. 더불어 『악학궤범』과 『세종실록』의 악기 설명에도 ‘소’라 지칭하는 기록이 나오며, 도설에 기록된 봉소라는 명칭 외에도 훨씬 더 많은 기록이 ‘소’라 지칭하고 있다. 『악학궤범』에 소개된 소는 커다란 가(架)에 쌍날개형인데, 이러한 악기를 설명한 문헌인 『원사』에서는 이 악기를 가리켜 ‘배소’라 칭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이 악기의 모습을 그려내고 있는 『어제율려정의후편』도설에도 이 악기는 ‘배소’라는 이름으로 기록되어 있다. 하지만 『악서』의 봉소 도설에 ‘봉소’라는 명칭으로 등장하는 악기는 관의 수가 도합 18개라는 점과 가(架)의 형태로 미루어보아 『악학궤범』에 기록되어 있는 소와는 전혀 다른 악기를 가리키고 있다. 따라서 ‘봉소’라는 호칭을 『악학궤범』의 소와 같은 쌍날개 가형에만 국한시키는 것은 잘못된 점이라 지적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중국 문묘에서 쓰이는 악기를 설명한 『산동통지(山東通志)』와 『복건통지(福建通志)』에서는 소에 대한 설명을 하는 가운데 배소와 봉소라는 이름을 동시에 사용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봉소와 배소를 동일한 악기로 지칭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결국 이러한 사항들을 종합하여 볼 때, 배소는 관대만을 엮어 만든 악기를 뜻하고 봉소는 관대를 봉황모양의 나무틀 형태에 꽂은 악기라고 주장하는 기존 학계의 이분법적 분류는 잘못된 것이며, 배소와 봉소는 단지 ‘소’를 지칭하는 또 다른 별칭이라 말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paper focuses on the naming problems of ‘Baeso’ and ‘Bongso’, which are mere the other names of the musical instrument ‘So’. From the introduction of So during the Koryo Dynasty, throughout the Chosun Dynasty and until the 1940s, in our country the name So was in general use. And the other names Baeso and Bongso were registered only as an additional name. But at present Baeso and Bongso don’t mean only a byname of So. They go one step farther and refer to each different types of musical instrument. Nowadays man used to assert boldly, Baeso designates only the musical instrument made of in a row connected several pipes and Bongso means the musical instrument which connected pipes were sticked into Bonghwang-shaped wooden frame. But after all the analysis of the related historical records we can verify that this dichotomous classification is obviously wrong and Baeso and Bongso is just a different way of calling So. The use of dichotomous classification of Baeso and Bongso without clear and conspicuous grounds may affect the forming of common misconceptions and stereotypes about Baeso and Bongso. And this may cause diverse academic confusions. Establishing of the name of musical instruments based on convenience and necessity will be very helpful and necessary. And that’s exactly why we should be discretion within the establishing of the name of musical instruments and the use of them.

      • KCI등재

        독립군 무장기지 ‘봉오동’에 대한 새로운 접근과 평가 - 최진동·최운산 형제의 역할을 중심으로 -

        김영환 육군군사연구소 2022 군사연구 Vol.- No.154

        1920년 6월 7일 시행된 봉오동전투는 경술국치(庚戌國恥) 이후 10여 년 동안 만주 및 간도 지역에서 축적된 항일무장투쟁 역량을 바탕으로 일본 정규군을 상대로대승을 거둔 최초의 전투였다. 지금까지 봉오동전투에 대한 일반적인 인식은 일본군에 맞서 승리를 거둔 전투가 이루어진 ‘공간’으로서 봉오동에 초점이 맞추어져 있었다. 그러나 봉오동은 1909년 전후하여 이주한 최진동, 최운산 형제가 주변의 광활한 토지를 매입 또는 개간하여 축적한 부(富)를 바탕으로 건설한 독립군 무장기지였으며, 봉오동전투의 승리는 최진동 형제가 봉오동에서 10여 년 동안 철저하게 준비한 결과였다. 특히 1920년 5월 19일 결성된 ‘대한북로독군부’는 최진동, 최운산 형제의 경제력을 바탕으로 결성된 연합 무장독립군단이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봉오동 독립군 무장기지에 관한 공식적인 역사 기록은 거의남아있지 않으며, 소수의 독립군과 그 후손들의 기억을 통해 전승되어왔다. 그 결과봉오동은 1920년 6월 7일 일본군과 전투가 벌여 승리를 거둔 ‘공간’이라는 석고화된기억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왔다. 따라서 ‘독립군 무장기지’로서 봉오동에 대한 재평가가 시급하다 하겠다. 본 연구는 최진동, 최운산 형제 유족의 증언, 봉오동전투에 참전한 독립군의 회고록 등을 바탕으로 봉오동에 독립군 무장기지가 건설되는 과정을 밝히는 한편, 봉오동 무장기지의 흔적을 위성사진을 통해 식별함에 따라 봉오동을 새롭게 평가할 수있는 계기를 마련할 수 있었다. 아울러 1920년 6월 7일 시행된 봉오동전투 승리의이면에는 최진동, 최운산 형제의 각고의 노력이 있었음을 밝힐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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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화엄승 鳳潭의 『벽암록』 비판 -『鐵壁雲片』을 중심으로

        정영식 한국선학회 2013 한국선학 Vol.36 No.-

        華嚴과 禪의 관계에 대한 기존의 논문들이 양자의 相通性을 주로 다룬 것에 반해 본 논문은 양자의 차이를 논한 것이다. 일본 에도시대의 화엄승인 鳳潭(1654~1738)은 『鐵壁雲片』에서 圓悟克勤 (1063~1125)의 『碧巖錄』을 비판하고 있는데, 근본적인 이유는 원오가 澄觀·宗密의 사상을 계승 하고 있다는 것이었다. 비판의 요점은 크게 세 가지인데, 첫째는 ‘원오가 주장하는 靈知는 善의 측 면만 지닐 뿐 惡을 포섭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碧巖錄』에서 원오는 실제로 靈知의 淸淨性만을 주로 강조하지만, 敎宗에서 청정법신을 極則으로 삼는 것을 비판하고 있기 때문에 봉담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둘째는 ‘깨달음을 지향하는 간화선은 엉터리이다. 왜냐하면 모든 중생은 태어날 때 부터 깨달아 있기 때문이다’고 해서 證悟를 부정하고 本覺思想의 입장에 선다. 또 ‘간화선은 分別 智를 부정하지만, 분별지야말로 究竟覺에 이르는 길이다’고 한다. 그러나 간화선은 수행의 과정에 서는 분별지를 버려야 하지만, 깨달은 후에 획득되는 영지는 분별지마저 포섭한 것이므로 봉담의 주장은 타당하지 않다. 셋째는 ‘간화선은 화엄의 五敎判 중에서 大乘終敎에 해당되는데, 대승종교 란 如來藏思想을 가리킨다. 그런데 간화선은 여래장사상 중에서도 空如來藏만을 가리키는 편협한 이론이다’고 봉담은 비판한다. 한편 敎判에 있어서는 원오의 선은 法藏의 五敎判 중에서 大乘終敎 의 단계에 지나지 않으며, 사상적으로는 天台宗 山外派와 유사하다고 한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봉담의 원오이해가 반드시 정확하지는 않다. 특히 ‘원오의 靈知는 징관·종밀을 계승한 것이다’는 기본전제에 있어서 의문이 남는다. 봉담은 화엄승이면서도 천태사상의 영향을 크게 받고 있기 때문에 화엄의 영향이 큰 원오와의 사이에는 넘을 수 없는 장벽이 존재했다고 생각 된다. Whereas previous papers regar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Hwaom sect and the Zen sect mainly addressed commonness between the two, this paper discussed differences between the two. Houtan(鳳潭,1654~1738) who was a Hwaom Buddhist monk in the edo period in Japan criticized 『Biyan lu(碧巖錄)』 written by Yuanwu-keqin(圓悟克勤,1063~1125). A basic reason of the criticism is that Yuanwu succeeded to the thoughts of Chengguan(澄觀) and Zongmi(宗密). Key points of the criticism are largely three. The first one is that the spiritual understanding (靈 知) argued by Yuanwu has only the aspect of good and cannot embrace evil. However, Houtan’ s argument is not valid because, although Yuanwu mainly emphasized the cleanness of spiritual understanding in 『Biyan lu(碧巖錄)』, he criticized depraved sects’ act of regarding clean Buddha as a supreme rule. Second, Houtan denies enlightenment and stands for the thought of fundamental understanding indicating that ‘Ganhwaseon(看話禪) that pursues enlightenment is nonsense because all people has been enlightened from the moment of birth’. He also argues, ‘Although Ganhwaseon denies discernment, discernment is the way to reach ultimate enlightenment’. However, Houtan's argument is not valid because although discernment should be abandoned in the asceticism of Ganhwaseon, the spiritual understanding obtained after being enlightened embraces even discernment. Third, Houtan criticizes, ‘Ganhwaseon corresponds to mahayana sect among the five sects of Hwaom and mahayana sect refers to the thought of hidden Buddha. And Ganhwaseon is a narrow-minded theory that refers to only empty hidden Buddha out of among the thought of hidden Buddha.’ Meanwhile, Houtan says that the sect of Yuanwu’s Zen is only at the level of mahayana sect among the five sects of Fazang(法藏) and Yuanwu’s thought is similar to that of Sanoei sect under Chentae order. In conclusion, Houtan's understanding of Yuanwu is not completely correct. In particular, his basic premise that ‘Yuanwu’s spiritual understanding succeeds to Chengguan(澄觀) and Zongmi(宗密)’ is doubtful. A barrier that cannot be crossed is thought to have existed between Houtan and Yuanwu because Houtan was greatly affected by Chentae thought although he was a Hwaom Buddhist monk and Yuanwu was greatly affected by Hwaom.

      • KCI등재

        <이대봉전>의 여성 주도적 혼인 서사의 양상과 의미

        서혜은 동양고전학회 2020 東洋古典硏究 Vol.0 No.81

        이 논문은 현전하는 22종의 <이대봉전> 이본을 대상으로 <이대봉 전>에 제시된 여성 주도적 혼인 서사의 양상과 의미를 고찰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대봉전>의 이본은 결말의 형태에 따라 세 계열로 분류할 수 있 다. 1계열의 결말은 이대봉과 장애황의 혼인으로 종결되며 2계열의 결말 은 이대봉과 장애황이 각각 남선우와 북흉노의 재침을 척결한 후 이대 봉이 두 명의 공주와 혼인하는 서사로 종결되며 3계열의 경우 이대봉이 왕회와 그의 아들 왕석연을 비롯하여 진택열·진사웅과 격렬하게 대결하 여 승리하는 서사로 종결된다. 1계열에 속하는 이본이 가장 많기에 당대 <이대봉전>의 독자층은 이대봉과 장애황의 혼인 서사에 대한 관심이 컸을 것으로 짐작한다. 이대봉과 장애황의 혼인은 장애황의 주도로 성사되기에 <이대봉전> 을 여성 주도적 혼인 서사로 전개되는 작품으로 규정한다. <이대봉전> 의 여성 주도적 혼인 서사는 장애황이 남장을 하여 실절과 늑혼 위기를 극복하고 상소와 수륙재를 통해 이대봉과의 혼인 의사를 표명하며 간신 왕회의 처형을 요청한 후 이대봉과 재회하여 몰락한 가문의 명예를 회 복하고 혼인하는 과정으로 전개된다. 이처럼 <이대봉전>은 장애황의 주도적인 활약에 의해 이대봉과 혼인하는 서사로 종결된다. 그러므로 <이대봉전>의 여성 주도적 혼인 서사에는 조선시대 여성의 정치적 역 량과 한계가 동시에 표출되어 있다. 또한 여성에게 남성의 이미지를 부 여하여 충·효·열과 같은 유교 이념을 극대화하고 여성의 혼인에 대한 보수적 시선이 투영되어 있다. This paper is study on aspects and meaning of female-led wedding narrative in <Yi-Dae-Bong-Jean>. After review versions of 22type, classified into three categories. The most versions of <Yi-Dae-Bong-Jean> are ended with Jang-Ae- Hwang and Yi-Dae-Bong’s marriage narrative. And Jang-Ae-Hwang’s heroic performance is highlighted in <Yi-Dae-Bong-Jean>. If so her heroic performance is a mean of marriage with Yi-Dae-Bong. Therefore <Yi-Dae-Bong- Jean> is novel of female-led marriage narrative. Jang-Ae-Hwang and Yi-Dae-Bong are engaged. But Yi-Dae-Bong and his father are exiled. Because Wang-Hoe plot to do harm Yi-Dae-Bong’s father. His father’s name is Yi-Yig. After Yi-Yig and Yi-Dae-Bong are exiled, Wang-Hoe plans marriage his son and Jang-Ae-Hwang. But Jang-Ae-Hwang dressed as a man and made her escape. Therefore Jang-Ae-Hwang takes the initiative to overcome marital conflicts. And she is the initiative to marry express. Jang-Ae-Hwang showed off her heroic abilities and Emperor acknowledges her heroic abilities. But Jang-Ae-Hwang confesses that she is a woman. And she requests Yi-Yig, Yi-Dae-Bong’s innocence of and Wang-Hoe’s execution. Therefore Jang-Ae-Hwang takes the initiative to marry express. Besides Jang-Ae-Hwang forms the foundation for marriage proactively. Jang-Ae-Hwang and Yi-Dae-Bong want to execute Wang-Hoe All of them each directly. So she met Yi-Dae-Bong again at the place of Wang-Hoe’s execution. The female-led marriage narrative in <Yi-Dae-Bong-Jean> is projected conservative perspective about women. Because Jang-Ae-Hwang’s political strategy is excellent. But her political strategy is used as a means of marriage. And Jang-Ae-Hwang’s masculine attire is maximized Confucian ideology. Therefore woman’s marriage is conservatively shaped.

      • KCI등재

        양촌 권근 시를 통해 본 고려후기 중국 사행(使行)의 일 단면: 「봉사록(奉使錄)」의 시를 중심으로

        하정승 포은학회 2020 포은학연구 Vol.25 No.-

        Keun Kwon(Yangchon,1352-1409) is one of representative poets in the latter part of the Goryeo Dynasty. A collection of his works, <Yangchonjib> includes 1000 poems, which shows that he acted as a poet actively and enthusiastically. He was Mokeun’s disciple and after his office, he became a key figure in the school for his life. Yangchon went to diplomatic Trip twice. The first trip happened in 1389( King Gongyang 1) and the second trip happened in 1396(the first king of the Joseon Dynasty, Yi Seong-gye 1). The record of the first diplomatic Trip is <Bongsarok> in <Yangchonjib>. <Bongsarok> includes 126 poems, which is a vast quantity. The contents of this book are as follow ; the author's thoughts on various experiences, travels, Chinese culture and systems that he had seen and felt on the trip. Yangchon’s <Bongsarok> set an example for other books ; <Yeonhangrok>, <Jocheonrok>, etc. The subjects of poems of the diplomatic Trip in <Bongsarok> are as follow ; the vastness and splendor of the Chinese culture system, admiration for the long history, the expectation of seeing the emperor directly, friendship with Chinese literary men, joy and contemplation as a traveler, responsibility for work, longing for family and homeland, reflection on life. Yangchon emphasized frequently that Koryo was a civilized country and he was a cultural man who has cultivated Confucianism and Chinese literature himself. This aspect is one of the great features of poems about the diplomatic Trip in the late Koryo Dynasty. In fact, the tradition of poems about the diplomatic Trip in the history of Chinese literature in the Goryeo Dynasty dates back to Kim Busik and Jinwha’s poems. After them, the traditoion of poems about the diplomatic Trip was connected to Jung Mongju → Kim Kuyong → Lee Sungin → Jung Dojeon. Keun Kwon succeeds them and was succeeded by Lee jik. From this perspective, Keun Kwon can be evaluated as a bridge between poems of the diplomatic Trip in Koryo Dynasty and Chosun Dynasty. 양촌 권근은 고려후기를 대표하는 문인이자 학자이다. 그의 문집인 양촌집에 전해지는 시가 무려 1,000여 수나 된다는 사실은 양촌이 얼마나 적극적으로, 그리고 활발하게 시인으로 활동했는지를 여실히 보여준다. 그는 목은 이색의 문생으로 환로에 오른 뒤 평생을 줄곧 목은계 사인의 핵심 인물로 활동하였다. 양촌은 모두 두 번에 걸쳐 중국 사행을 갔는데 첫 번째는 1389년(공양왕 1) 사행이고, 두 번째는 조선조 개국 후 1396년(태조 5) 사행이다. 이 중 1389년 사행의 기록이 양촌집에 수록된 「봉사록」이다. 「봉사록」에는 약 126제의 시가 수록되어 있어서 우선 그 분량이 상당히 많으며, 내용적으로도 여행에서 보고 느낀 각종 견문, 여행의 감회, 중국문물 및 제도에 대한 저자의 생각, 유적지에서의 영사(詠史)등 후대 조선조에서 기록된 수많은 연행록들과 비교해 볼 때 그 체제나 내용이 거의 대동소이하다. 이는 양촌의 「봉사록」이 후대 조선조의 수많은 ‘연행록’, ‘조천록’들의 선편(先鞭)이자 모범이 되었음을 보여주며, 양촌 「봉사록」의 문학사적인 의의를 말해준다. 물론 고려조 문학사에서는 양촌의 「봉사록」 이전에도 대(對) 중국 사행문학이 있었지만, 그 분량과 체계 면에서 양촌의 「봉사록」을 따라가지 못한다. 「봉사록」에 수록된 시를 시체(詩體)로 분류해보면 율시가 가장 많은 양을 차지하고 그 외 절구와 고시 등 매우 다양하다. 「봉사록」 소재 사행시의 특징을 살펴보면 중국의 문물제도의 광대함과 화려함, 유구한 역사에 대한 찬탄, 황제를 직접 알현하는 것에 대한 기대감, 중국 문인들과의 교유, 길고 긴 사행 여정에서 목도한 것들에 대한 다양한 견문, 여행자로서의 기쁨, 사행 업무에 대한 책임감, 사행 길의 고단함, 가족과 고국에 대한 그리움, 인생에 대한 성찰과 반성 등이 주를 이룬다. 이러한 내용들은 이후 우리 문학사에서 전개된 수많은 연행록 관련 기록들과 그 궤를 같이한다. 특히 양촌은 곳곳에서 ‘거동궤, 서동문’의 ‘동문동궤’ 의식을 강조함으로써 고려가 문명국이고 본인 역시 유학과 한문을 수양한 교양인임을 밝히고 있다. 이점은 고려후기 문인지식층이 지닌 소위 ‘동인의식(東人意識)’이나 ‘문명의식’과도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고려후기 사행시의 중요한 특징 가운데 하나라 할 수 있다. 양촌의 「봉사록」을 동시대 다른 문인들의 사행시와 비교해 보는 것은 매우 재미있고 유익하다. 본고에서는 그 비교 대상으로 이색, 정몽주, 이숭인, 정도전의 시를 들어 양촌시와의 비교를 전개해 보았다. 이를 통해 시인들마다 같은 문물을 노래하더라도 섬세한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이를 통해 양촌시의 고유성, 혹은 문학적 특징이 좀 더 명확하게 드러날 수 있게 되었다고 생각한다. 사실 고려조 한문학사에서 중국 사행시의 전통은 멀리 김부식의 재송(在宋) 기간 지어진 시편들과 진화(陳澕)의 「봉사입금(奉使入金)」으로 거슬러 올라간다. 김부식과 진화 이후로 이색→정몽주→김구용→이숭인→정도전으로 이어진 사행시의 전통은 권근을 거쳐 조선초엽의 형재(亨齋) 이직(李稷)으로 계승된다. 이같은 관점에서 보자면 권근은 고려조의 사행문학과 조선조의 사행문학 사이의 가교 역할을 한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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