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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교육사상에 관한 고찰

        이권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6 일본사상 Vol.0 No.31

        The 1880 Education Order of Japan had reinforced Confucianism focused on ‘loyalty and filial piety’ rather than the universal educational values like seeking the truth or empowering individuality. Additionally, The Imperial message on Eduction in 1890 provided a crucial factor to the educational tendency of that era in Japan. Mori’s nationalism and the actions he had taken during those days are therefore one of indispensable parts which have to be investigated on the history of educational systems and thoughts. This essay is aimed to consider the basis and the feature of what Mori Arinori had sought through his thought and action represented by nationalism. How his nationalism had been established shall be examined at first, and the spectific process of the establishment of his educational scheme will be secondly examined. His thought was presented as a gymnastic form called ‘military gymnastics at that time. So I will check how this practical curriculum had derived from his educational thought in order to investigate what he had sought. Through the consideration of this dissertation, a tiny clue which can help to reveal the origin of recent Japanese’ scheme in terms of Nation-State and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scheme and the educational history will be provided. 메이지 초기, 일본 근대국가 형성기에 활약한 여러 인물 중에 모리 아리노리(森有禮)의 존재는 특이하며 또한 걸출하다. 모리에게는 문명개화와 서구주의의 기수, 절대주의의 화신, 근대 합리주의자, 국가주의자, 뛰어난 선각자 등의 다양한 수식어가 따라붙는데, 혹자는 일본이 낳은 서양인이라 했고, 혹자는 국체(國體)의 존엄을 모독한 적자(賊子)라 평가하기도 했다. 또한 그는 진보주의와 보수주의를 넘나들며 정치·종교·학술·산업·관습 등의 다방면에 걸쳐 개명적이고도 혁신적 사상을 피로하며 외교관료·계몽가·교육가·사상가로서 활약했다. 그중에서도 일본 최초의 문부대신의 자리에 올라 근대교육 제도 및 사상적 기틀을 만들었다는 점에서 일본 근대교육 형성기에 있어 그가 남긴 족적은 실로 크다. 1880년 개정교육령(改正敎育令) 시행 이후 일본의 교육은 진리 탐구나 개성의 신장이라는 근대교육의 보편적 가치 실천보다는 ‘인의충효(仁義忠孝)’ 사상을 최고의 덕목으로 여기는 유교주의적 교육정책을 강화해 나간다. 그리고 1890년 ‘교육칙어(敎育勅語)’의 공포는 이를 공고히 하고 절대화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그런 의미에서 모리의 개별 학교령(學校令)과 국가주의 교육사상, 그리고 그 실천이 갖는 교육제도사 및 교육사상사적 의미는 각별하다 할 수 있다. 본고는 모리 아리노리가 교육을 통해 지향하고자 했던 근대 국민국가의 내실과, 국가주의 교육이란 말로 대표되는 모리의 교육사상 형성의 연원과 특징을 고찰하는데 그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모리 아리노리의 사상 형성의 궤적과, 그의 사상이 교육을 통해 어떻게 구체화되었고, 병식체조(兵式體操)로 대표되는 사상의 신체화(身體化) 과정을 통해 구현하고자 했던 모리의 국가주의 교육사상의 궁극적 목적이 무엇이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고자 한다. 이를 통해 근대 일본인의 국가와 세계를 인식하는 특정적 사유체계 형성과 교육의 관계를 규명하는 작은 실마리라도 찾을 수 있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신국가 건설과 문화국가론의 전개— 패전후 일본, 해방후 한국 —

        이경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3 일본사상 Vol.- No.44

        이 글에서는 제국 일본의 형성기에 수용된 문화국가론을 염두에 두면서 패전후 일본과 해방후 한국에서 전개된 문화국가론을 비교․분석하였다. 메이지 시대 후기, ‘문화국가’는 국민의 복리 및 행복 증진을 위한 국가의 적극적 개입을 중시하는 국가개념으로 수용되었다. 일본이 제1차세계대전에 참전한 1910년대로 들어서면서 문화국가론은 군국주의의 정당화에 동원되었고, 중일전쟁 이후에는 법치국가의 한계를 극복한 국가개념으로서 전시체제를 지탱하는 논리를 강화해 갔다. 제2차세계대전이 끝난 후, 평화의 중요성에 눈뜬 대부분의 현대국가는 ‘문화국가’를 표방하였다. 하지만 군국주의를 정당화했던 제국의 문화국가론은 패전후 일본에서도 해방후 한국에서도 딱히 문제되지 않았다. 일본의 문화국가론은 군국주의와 국방국가에 공급해온 동력을 단번에 중단하였고, 문화국가는 이름표도 떼지 않은 채 민주국가와 평화국가의 엄호에 나섰다. 그 변신의 신속함 때문인지, 신국가 건설의 시급함 때문인지, 전전의 ‘문화국가’에 대한 망각을 의문시하는 물음은 제기되지 않았다. 한국에서는 거국적인 ‘문화국가’가 표방되지 않아서인지, 제국 일본에 대한 기억도 제국의 문화국가론에 대한 기억을 깨우지는 못했다. 한편, 일본과 한국의 ‘문화국가’론은 동시대성 속에서 각각의 사상적 시차를 보이기도 하였다. 일본에서는 1946년, 고야마 이와오가 <<문화국가의 이념>>을 발표하였다. 평범한 ‘문화국가’론과 선을 그은 그의 저서는 ‘문화국가 건설’의 이름으로 전시기 ‘근대의 초극’론을 반복하였다. 한국에서는 1947년에 김구의 <<백범일지>>가 출간되었고, 2000년대 들어서 그의 저서는 문화국가론으로 새롭게 조명되었다. 뒤늦게 재조명된 그의 ‘문화국가’론은 ‘국가’와 ‘문화’의 관계에 관한 사상적 단초를 제공하는 동시에, ‘민족주의’라는 사상적 시차도 함께 드러냈다.

      • KCI등재

        한일사상과 문화, 그리고 21세기 한국 문화도시 - 신명, 평화, 자연스러움 -

        정혜선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09 일본사상 Vol.0 No.16

        본 연구 목적은 ‘한국과 일본의 사상․문화비교’를 통해 한국도시정체성을 근원적으로 분석하여, 이를 기반으로 21세기 한국문화도시의 컬쳐노믹스로서 가능성을 문제제기 차원에서 고찰함에 있다. 현재 글로벌차원의 초경쟁적 환경이 도래하면서, 수준 높은 문화 없이는 어떤 도시도 경쟁우위를 창출하기 힘든 시대가 되었다. 한국의 서울도 고유한 문화로 특별한 브랜드가치 있는 도시를 만들어 경제를 선도하겠다고 하면서 컬쳐노믹스를 내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서울의 시정을 살펴보아도 ‘서울의 매력’이 막연하게 주장되거나 ‘디자인도시’ ‘한강르네상스’라는 외면적인 아름다움과 쾌적함이 강조되는 것이지, 도시를 하나로 묶어낼 통합적 이미지가 분명하지 않다. 한편, 로마, 런던, 파리, 뉴욕 등 세계 거점도시들은 고유문화의 이미지를 바탕으로 전 세계에 자신의 매력을 발산하면서 컬쳐노믹스로 전환하고 있다. 파리하면 그 도시 고유의 자유스러움과 인간들이 금방 떠오른다. 파리는 그런 정체성을 바탕으로 예술의 도시를 만들었고, 관광의 도시가 되었다. 나아가 미래에 장소, 문화, 경제가 공생하는 파리의 브랜드를 더욱 확장할 계획을 세우고 있다. 이제 도시는 ‘지리적 장소’가 아니라 ‘이미지’이며 마음속의 ‘공간’이다. 도시 이미지가 주는 풍부한 상징은 경제와 공생하게 되며, 결국 장소, 문화, 경제가 복합된 개념이 브랜드로 표시되어 가장 신뢰도 높은 상품으로 다가오는 것이다. 한국도시는 컬쳐노믹스를 이룩하기 위해서, 먼저 자신의 정체성을 찾아내야 한다. 유명한 세계도시를 모방하거나 마치 문화재 관광사진을 찍어내는 것처럼 표피적으로 한국적 정체성에 접근해서는, 매혹적인 이미지를 창출할 수 없다. 그리고 아무리 문화예술 공연을 늘리고, 한강르네상스 등의 프로젝트를 한다 할지라도, 한국적 정체성에 대한 심층적 접근 없이는 탁월한 성과를 기대할 수 없다. 외면적 쾌적함은 그저 세계 유명도시에서 접할 수 있는 하나에 불과하여, 인간의 감성을 깊이 끌어낼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문학적인 자금의 투입이 기획되고 있는 이 시점에서도, 한국의 정체성문제는 도시관광학, 건축학 등 실용학문에서 단편적으로 논의되는데 그치고 있으며, 인문학계에서도 깊이 있게 다루고 있지 않다. 그렇다면 문화도시를 가로지르는 정체성은 어떤 것일까? 그 매력은 어디에서 나올까? 오랜 역사 속에서 축적해 온 사상과 문화를 빼놓고는 말하기 어렵다. 사상과 문화에는 오랜 세월이 지나면서, 그 지역의 생각, 미의식이 담겨있고, 이는 어떠한 인위적인 화려함보다도 그 자체로 강한 감동과 울림을 준다. 한국의 매력도 오랜 세월 형성되어 온 사상과 문화에서 찾아야 한다. 한국의 정체성 안에는 인류보편적인 것을 기반으로 하고, 동양의 특징을 반영하면서도, 동시에 한국적 세계가 생생하게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세월에 녹아져 자연스럽게 뿜어져 나온 것이기에, 모방 불가능하며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경쟁력을 지닌다. 더구나 한국문화 안에는 ‘기능과 분석’의 근대적인 것을 뛰어넘어 ‘영성과 자연’, 그리고 ‘평화’라는 21세기를 열 수 있는 자산이 풍부하게 자리하고 있다. 이러한 한국 고유의 특징은 일견 알기 쉬운 듯이 보이지만, 핵심을 짚어내기가 무척 난해하다. 필자는 일본역사를 전공해오면서, 한국과 일본이 정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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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지타 도코 『홍도관기술의』의 사상 연구 — 유학(儒學)의 관점에서 —

        김지훈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1 일본사상 Vol.- No.41

        『홍도관기술의(弘道館記述義)』는 일본의 유학자 후지타 도코(1806-1855)가 미토 번(水戸藩)의 번교(藩校)인 고도칸(弘道館)이 세워졌을 당시, 번주(藩主) 도쿠가와 나리아키(徳川斉昭)의 명을 받고 그 교육 취지를 올린 글이다. 후지타 도코는 일본 사상에서 매우 중요한 인물로 후기 미토학(水戸学)을 대표하는 인물 중 한 사람이며, 그의 사상은 사이고 다카모리(西郷隆盛)·요시다 쇼인(吉田松陰) 등, 메이지 유신과 관련된 중요 인물들에게 영향을 주어, 현대 일본의 정치사상에까지 이어지고 있다. 『홍도관기술의』는 후지타 도코의 대표 저작으로, 그의 사상을 알아보기 위해 가장 중요한 자료 중 하나라 할 수 있다. 『홍도관기술의』의 저술 배경에는 신도와 유교의 합일, 문과 무의 병행이라는, 미토 번의 사상적 배경이 있다. 이것은 도쿠가와 나리아키를 중심으로 한 미토 번의 번교 교육 방침이기도 했다. 도코는 유교를 따르긴 하나, 중국에서 탈피한 일본 중심적인 구도를 강조한다. 도코는 일본 태양신의 정통성을 이어받은 천황 가(家)를 높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존왕양이의 구도를 주장하며, 황실을 높이는 것을 문의 영역이고, 이적을 물리치는 것을 무의 영역이라 하며 존왕양이가 바로 문무합일이 됨을 말했다. 도코는 아버지 후지타 유코쿠의 「정명론」에서 나타난 관점을 계승, 발전시켜 군신론을 주장했다. 아무리 권력이 강해도 일본의 왕은 천황가이며, 그것은 불변의 것으로, 천황은 천지신에 대한 제사로 위엄을 드러낸다고 한다. 이러한 천황가는 일본의 국체로, 천황을 높이는 것이 바로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신도와 임금에게 충성하는 충(忠)의 합일이 된다. 도코는 불교를 배척하는 태도를 보였는데, 도코는 일본 고유의 것이 아니기 때문이라고 말한다. 이것은 중국에서 온 유교와 다른 태도인데, 아마도 세속적인 성격이 비교적 약하며, 부모와 군신을 비롯한 인간관계에서 벗어나 궁극적으로 해탈을 추구하는 불교는, 천황을 높이고 천황과 신하의 관계를 확실히 하며 일본 고유의 것을 강조하는 도코의 사상과 대치되기 때문으로 보인다. 이와 같은 후지타 도코의 사상은 유가의 정명론·주자학적 대의명분론이 일본에서 미토학을 거치며 절대적 군신관계가 강조되며, 국수주의·민족주의적 경향이 강해져 존왕양이 사상으로 전개되었음을 보여준다. <Kodokangijutsugi(弘道館記述義)> is an article written by Japanese Confucian scholar Fujita touko(藤田東湖), who received the order of Tokugawa nariaki(徳川斉昭), the monarch of Mito Domain(水戸藩), and posted the educational purpose of Kodokan(弘道館) when Mito Domain’s Clan school(藩校), Kodokan, was established. The writing background of <Kodokangijutsugi> is the ideological background of Mito Domain: the unity of Shinto(神道) and Confucianism, and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文) and the policy of militarism(武). Fujita touko emphasizes the Japanese-centered structure that broke away from China. Fujita touko advocated the ideology of Sonnojoi(尊王攘夷) to elevate the family of the emperor, who inherited the legitimacy of Japan’s Solar deity(太陽神), and defeat external enemies, and said that raising the emperor is literature’s domain, and defeating barbarians is the policy of militarism’s domain. He said that the ideology of Sonnojoi becomes the parallelism of literature and the policy of militarism. Fujita touko inherited and developed the viewpoint that appeared in <Seimeiron(正名論)> of his father Fujita yukoku(藤田幽谷). No matter how strong the power, the king of Japan is the emperor, and that is unchanging. And the emperor shows his majesty by offering sacrifices to the gods of heaven and earth. Such an emperor’s family is Japan’s National polity(國體), and it is a union of Shinto, which emphasizes that raising the emperor is unique to Japan, and Loyalty(忠), a Confucian who is loyal to the king. Fujita touko showed an attitude that rejected Buddhism, because it was not unique to Japan. This is a different attitude from Confucianism from China. Perhaps it is because Buddhism, which has a weak secular nature, is opposed to the idea of Fujita touko, which emphasizes the uniqueness of Japan and establishes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king and the subj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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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요시다 도고(吉田東俉)의 조선 연구

        윤소영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5 일본사상 Vol.0 No.29

        요시다 도고(吉田東俉, 1864-1918)는 대표적인 일본근대지리학자이자 역사학자이다. 그의 대표저술로는 『대일본지명사서』(1907, 총13권)와 『日韓古史斷』(1893), 『倒敍日本史』(14책), 『日本朝鮮比較史話』(1924) 등이 있다. 종래 요시다 도고에 대한 한국에서의 연구는 『日韓古史斷』(1893)을 중심으로 분석하여 한국사를 왜곡한 식민사학을 대표하는 역사학자로 파악하는 것이었다. 요시다 도고의 연구업적은 고대사 뿐 아니라 근대사와 한일비교사에 이르는 방대한 연구성과가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동안의 연구에서는 고대사에 국한한 경향이 있다. 이 연구는 그동안 주목되지 않은 『倒敍日本史』, 『日本朝鮮比較史話』 등의 저술을 통하여 근대한일관계사를 중심으로 요시다 도고의 조선인식과 그가 조선인 유학생에게 끼친 영향을 검토하고자 한다. 일반적으로 식민사학에서는 고대에 일본이 한국을 식민화했으며 일본은 본가, 한국은 분가로 지배-종속관계에 있었다고 파악한다. 또한 근대 한일관계에 대해서는 일본이 한국의 독립을 지켜주었는데 한국의 동양평화를 교란시켰기 때문에 동양평화를 지키기 위해 일본이 한국을 병합했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요시다 도고는 고대 한일관계는 한반도 남부의 인종과 일본 북서부의 인종이 한 민족이며 인위적인 장벽이 없이 서로 정치와 문화를 교류하던 관계에 있었다고 본다. 그리고 중세와 근세 한일 문화의 차이를 ‘편문’과 ‘편무’ 문화로서 그 특징을 설명했다. 한편 근대 일본은 조선을 장악하기 위해 교묘한 술책을 쓰면서 일본의 국익을 지키고자 했다고 밝히고 일본의 한국 식민화 정책에 대해 한국인들의 거센 반발이 있었다고 서술했다. 그는 고대의 우호적인 한일관계에 비추어 향후 문화공동체로서의 한일의 우호적인 관계형성과 국세 발전을 희망하면서 자칫 일본인들이 신영토를 차지했다는 기세로 함부로 한국인과 갈등을 초래하지 말아야 한다고 경고했다. 한편 그는 와세다대학에 유학한 최남선, 현상윤, 이병도 등에게 역사연구를 위한 자료 연구법과 역사연구방법론, 한일문화론 등에서 큰 영향을 끼쳤다. 그들은 주체적인 관점에서의 ‘조선’연구의 필요성을 인식했고 각각 ‘조선학’분야의 대가로서 한국 근대지 형성에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요시다 도고는 일본의 한국 식민지배를 긍정하면서도 우호적이었던 고대 한일관계를 거울삼아 한일 간에 역사적으로 거듭된 ‘애증’의 연쇄를 극복하고 문화공동체로 거듭나야함을 역설했다. 이러한 점에서 그를 이상주의적 역사가로 평가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Yoshida Togo吉田東俉 is a modern Japanese representative geographer and is a historian. His representative writings include Japanese Place Name Dictionary 『大日本地名辞書』(1907)、Nikkan Koshidan (Ancient Histories of Japan and Korea) 『日韓古史斷』(1893),UpsidedownJapaneseHistory『倒敍日本史』,Historical Anecdote of Comparison between Japan and Korea 『日本朝鮮比較史話』. The Korean researcher analyzed a study of Yoshida's 『日韓古史斷』 mainly. When the book distorted Korean history, Korean researchers criticized it. This study examines Yoshda's Korean recognition mainly on the historical concerned on modern Korea day through the『倒敍日本史』and『日本朝鮮比較史話』which did not attract attention so far. In additoin, I consider the influence that he gave to Korean students. Generally, Japan rules Korea in the colonization historical study insist that Korea was a colony of Japan in the ancient times. In addition, though Japan helped with independence of Korea in the modern times. But she was disturbed Oriental peace, therefore Japan annexed Korea for the peace of East. However, in Yoshida, as for the relations, a race of the south side of the Korea Peninsula and a race of the northwestern part of Japan consider the relations to have been one race on ancient times. He insists that both interchanged culturally politically. He characterized Korean and Japanese culture as one is inclined to literature, and the other is inclined to millitary power each on Middle Ages and early modern day. He pointed that Japan of modern times protected Japanese national interest while lecturing on a good artifice and invaded Korea. He said that the Korean resisted aggression of Japan intensely. He recognized it was necessary to make Korea the colony on development of the Japanese state of the nation. But followed the friendly relationship in the ancient times of the two countries, he insisted that we should intend a culture community. And he warned Japanese people must not bring about a tangle with Korean people on the pretext of Japan gained a new territory. On the other hand, he had a big influence on Choi Nam-Sun崔南善、Hyun Sang-Yun玄相允、Lee Byong-Do李丙燾 which studied in Waseda University in posture and the study methodology of the history study, the point of view of the Korea Confucianism study. I think that Yoshida was an idealist who prayed for building the relations to be reconciled with each other across the chain of "love and hatred" that Korea and Japan continued historicall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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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구의 외부 ‘태동(泰東)’과 ‘아시아’의 내부 ‘일본제국’ 사이에서 -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의 ‘아시아론 -

        전성곤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4 일본사상 Vol.0 No.26

        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논리 속에는, 인도 불교, 중국 유교와 도교를 중심으로 ‘아시아와 일본’의 관계성 속에서 구축한 ‘아시아론’이었다. 아시아의 정수를 수입하고 여러 주변국의 문물을 받아들여 서구에게 박해를 받지 않으며 근대까지 그러한 아시아적인 것을 보존한 일본은 ‘아시아의 박물관’이며, 그 미술이나 사상은 아시아적 양식의 총합이라고 오카쿠라는 상정했던 것이다. ‘아시아는 하나다’라는 사상 논리를 지탱시킨 것은 결절점으로서의 일본이었다. 그리고 오카쿠라는 서구의 식민지정책아래 허덕이고 있는 조건에 의해 아시아를 하나의 전체로 제시하고, 서구의 문명에 의해 수탈되는 객체로서 아시아를 서구와는 별개로 그러나 포괄적인 원리를 내걸면서 하나의 통일체로 ‘구축’한 것이다. 이를 적극적으로 수용한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의 정수와 일본정신을 연결시켰다. 아시아문화의 집합체로서의 일본을 설정할 수 있는 논리를 오카쿠라를 통해 학습하면서, 그것이 ‘일본정신’으로 재편성되는 논리를 ‘시대적 구분’과 ‘인도와 중국’의 식민지화를 중첩시키는 담론 속에 끼워 넣으면서, 아시아의 가능성을 일본에서 찾는 담론을 발견해 낸 것이다. 특히 서구의 식민지지배에 허덕이는 ‘아시아는 하나’인데, 그러한 아시아의 다문화를 새로운 ‘제국’으로 통합하고 융합하는 테제를 찾아간다. 그것은 바로 다양한 아시아 문화의 정수를 총합한 일본이 그 가능성을 갖고 있으며, 그 정수는 역시 일본정신 속에 존재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일본의 부흥을 위해 필요한 사상성을 ‘일본의 전통’에 투영시키고 아시아의 혁신 에토스를 ‘일본정신’ 속에서 체현해 낸 것이다. 다시말해서 아시아 문화의 ‘정신적 유전자’인 국체(國體)가 일본에서 배양되었는데, 바로 그것이 일본정신의 본질이며, 이러한 일본정신을 부흥시켜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그리고 그 원천을 아마테라스 오미카미(天照大神)에서 찾았고, 일본민족=일본문화를 통합해가며 일본정신의 세계성을 해석해냈다. 시대적 상황을 등에 업고 일본정신의 에토스는 성립해 왔던 것이다. 그러한 ‘다문화 제국’의 ‘새로운’ 가능성이라는 명목은, 간토대지진이라는 위기상황에서 오카와 슈메이의 ‘인위적인 의도’로 재현된 ‘정신=사상’논리였던 것이다. 오카와 슈메이는, 오카쿠라 덴신이 주장한 ‘아시아’ 개념을 ‘일본정신의 구조’ 속에서 찾았고, 그 아시아적 정수의 존립형태인 ‘국체’를 합성시키면서 일본정신이 곧 아시아정신이라는 논리를 재구성해냈던 것이다. 결국 ‘일본정신=아시아정신’으로 재구성되고, 동양을 상대화하지 못하는 ‘서구정신=개별정신’을 ‘일본정신=아시아정신=세계정신’으로 전복시켜 일본중심주의적 ‘권위’를 제시하는 ‘아시아 정체성’을 만들어 냈다. 특정한 일본정신에 귀착하는 일본적 구조 그 자체가 이러한 논리 속에서 여실히 드러나고, 아시아의 부흥에 아시아전통=일본전통을 강조하는, ‘일본인의 국민화’ 그리고 ‘일본인의 아시아화’로 시그널을 확대하면서, 오카쿠라 덴신과 오카와 슈메이는 아시아 본질론을 부각시킨 ‘다문화 제국주의=아시아 국민’ 논리를 생산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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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기 재조일본인 2세 여성의 조선 체험과 식민지주의 - 모리사키 가즈에(森崎和江)를 중심으로-

        송혜경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8 일본사상 Vol.0 No.35

        재조일본인 연구에 있어 그 대상에는 1세대, 혹은 2세대의 세대론 혹은 일정한 패턴으로 수렴할 수 없는 다양한 회로가 존재한다. 특히 회고담이나 작품 등을 통하여 드러나는 그들의 사상은 조선에서의 경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지만 대부분의 경우 사후적으로 깨닫고 현재의 시점에서 의미부여한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당시 조선에서의 연령, 거주지, 가족관계, 계층 등의 분석은 그 대상의 회로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단서를 제공한다. 1927년 대구에서 태어나서 17년간 조선에서 생활한 모리사키는 일본인이 식민지에서 낳은 ‘조선 태생 일본인 딸’이다. 나의 원형은 조선에 의해 만들어졌다고 하면서도 지배민족으로서 식민지에서 감수성을 키운 것에 대한 고뇌한다. 태어나면서 침략자인 것을 ‘원죄’로 인식하는 것이다. 일본으로 돌아간 이후 노동자 계급, 여성 등에 대한 활동과 저술은 식민지 조선에서의 체험을 기반으로 하고 있다. 모리사키는 식민지 태생의 여자 아이로서 성적 모멸감도 당하지만 이를 통해 지배와 피지배의 관계가 반드시 고정적이 아니라고 생각하게 된다. 또한 조선인 여성 하급 계층인 ‘오모니’와의 만남을 통해 ‘감성’을 키우는 계기를 만든다. 그러나 감각적으로 연결된 오모니와의 관계가 실은 식민권력을 매개로 해서 성립된 것임을 깨닫고 조선 민중으로까지 시선을 돌리게 된다. 또한 식민지 지배에 대한 책임을 일본의 민중과 생활의식에서까지 추구한다. 모리사키의 경우, 재조일본인 2세의 보편적인 의식으로 수렴되지 않는, 일본민중에 대한 책임에서 식민지 인식과 식민지 지배 책임을 추구하는데 그 특이성이 있다고 하겠다. Kazue Morisaki (1927-), a “Japanese girl born in Chosun” was born in Daegu, Chosun and lived in Chosun for 17 years. She thinks her identity was made in Chosun but feels guilty of being born in Colonial Chosun as a Japanese intruder. Her writings about blue-collar workers and women after going back to Japan are mainly based on her experience in Chosun. The fact that she was a daughter of a teacher who taught Chosun people in Gyeongju, where the Chosun’s history is well-preserved means a lot to her identity. Morisaki, as being a Japanese girl born in Chosun, experiences sexual humiliation by a Chosun boy but through this she considers the status between dominance and under-dominance can be changed. In addition to this, she builds up her poetic sensibility by spending time with her Chosun nanny called “ohmuny”. However, after realizing the relationship between her and “ohmuny” was made through a colonial relationship, she widens her point of view towards the Chosun people. Furthermore, she requires the responsibility to Japanese people as being an intruders of Chosun. Morisaki, therefore, clearly thinks that Japan needs to feel guilty about colonial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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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근대 일본의 전시기 칙어교육에 관한 고찰 — 학교의식과 의식창가(儀式唱歌)를 중심으로 —

        이권희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1 일본사상 Vol.- No.41

        본고는 제국주의, 군국주의의 길로 치닫는 전시기 일본의 사상적 정체성 확립에 공교육이 어떻게 관여하고 이를 이용했냐는 문제의식 위에서, 1894년의 청일전쟁, 1904년의 러일전쟁, 1931년 만주사변, 1937년 중일전쟁, 1941년 아시아·태평양전쟁으로 이어지는 일련의 전쟁을 수행함에 있어 국민의 사상과 총력을 한 데로 집약시키기 위한 기재로써의 침략 사상 이데올로기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근대 일본의 국민교육의 실태를 살펴보고자 하는 데 목적이 있다. 구체적으로는 충군애국 사상을 비롯한 다양한 국체 이데올로기 형성에 주도적 역할을 담당했던 도덕교육의 실태를 교육칙어를 중심으로 살펴보고, 교육칙어의 사상을 보급하는 장으로서의 학교의식과 그곳에서 불러야 했던 의식창가의 교육사상사적 의미를 고찰하고자 하는 것이다. 전시기 일본의 충군애국 사상의 형성과 이를 무의식적으로 신봉하며 자행한 근대기 일본의 전쟁에 관여한 공교육의 문제, 나아가서는 전쟁을 수행하는 데 있어 국민 전체의 적극적인 협력 자세를 끌어내기 위한 통합된 이데올로기 형성의 장으로서의 학교의식의 메커니즘을 규명함으로써 ‘근대 일본의 국민교육과 침략주의 사상’ 형성이라는 커다란 문제의식을 풀어낼 수 있는 작은 실마리를 찾을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This paper discusses the role of public education in establishing Japan's ideological identity during the period of imperialism and militarism, and discusses the Sino-Japanese War in 1894, the Russo-Japanese War in 1904, the Manchurian Incident in 1931, and the Asia-Pacific War in 1941. Specifically, we will examine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school rituals and songs sung in various national sports ideologies, focusing on the educational edicts, which plays a leading role in the formation of loyalty and patriotism ideology. By understanding the formation of Japan's loyal and patriotic ideology in wartime, the public education problem involved in Japan's war in modern times, and the integrated ideology of the whole nation in the fight against the war, we can solve the big probl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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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식민지기 출판매체에 나타난 재조일본인 예기의 표상 — ‘미인(美人)’과 ‘보균자(保菌者)’의 경계 —

        이가혜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21 일본사상 Vol.- No.41

        본고는 재조일본인 사회의 대표적인 종합잡지인 『조선공론』의 시각자료 및 기사를 대상으로 재조일본인 사회가 견지한 재조일본인 예기에 대한 상반된 표상을 분석함으로써 그 저변에 깔린 이념의 충돌과 그 의미를 분석하였다. 『조선공론』은 잡지의 후반부를 중심으로 예기의 사진과 그 정보를 소개하는 란을 따로 두거나 대대적인 예기인기투표를 진행하고 그 순위표를 게재하는 등 화류계 동향에 대한 지대한 관심을 보인 잡지였다. 특히 1915년에 개최된 예기인기투표(藝妓人氣投票)의 경우 중복투표 시스템을 도입하여 막대한 판매수익을 올렸으며, 이때 ‘미인’으로서의 예기 표상을 발신하는 주체는 주로 개인이 아닌 출판사의 기획에 의한다는 특징을 보인다. 이처럼 남성 중심적이고 지배계급 위주의 미디어에서 가시화된 ‘미인’표상이란 매체의 주요 소비자인 남성들이 추구하는 여성상을 유지함으로써 독자의 흥미과 관심을 유발하기 위한 전략의 산물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개인의 오락과 취미의 측면에서 소비되어 오던 예기의 ‘미’는 사회의 풍기문란, 가정에의 위협이라는 공적인 영역의 매춘과 연계됨으로써 ‘미인’으로서의 예기는 소거되고 오로지 건전한 재조일본인 사회 형성을 위협하는 ‘보균자’의 이미지를 입게 된다. 이처럼 동시기에 동일한 지면을 통해 발신된 ‘미인’에 대한 찬사와 ‘보균자’를 항한 겸열의 시선은 매체를 주도하는 재조일본인 남성 지식인의 사적/공적 영역에서의 상반된 욕망이 발현된 결과라 볼 수 있다. ‘무취미(無趣味)’한 조선에서의 유일한 오락으로서 예기의 ‘미’를 소비하며 안정적인 식민지 경영을 위한 사적 생활에서의 심신의 안정을 도모하는 한편, 공적 영역에서는 건강한 재조일본인 사회를 형성하고자 한 1910년대 재조일본인 사회가 견지한 성에 대한 이중규범으로 말미암아 재조일본인 예기라는 존재는 ‘미인’과 ‘보균자’를 왕래하는 경계인으로 표상되는 것이다. This thesis analyzed the conflicting representation of Japanese geisha in colonial Korea that was held by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targeting the visual materials and articles of 『The Chosen Koron』 which was a representative general magazine in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The Chosen Koron』 showed a great interest in the trend of prostitution by establishing a special space for introducing the photo and information of geishas, taking a large-scale popularity vote for geishas, and then publishing the ranking list in the latter part of the magazine. Especially, the geisha popularity vote held in 1915 introduced the multiple-voting system, which made a huge profit on sale. And at that time, the subject who sent the representation of geisha as ‘beauty’ was not an individual, but the publisher’s planning. Like this, the visualized representation of ‘beauty’ in the male-centered and rulling class-oriented media might be the product of strategy to arouse the readers’ interest by maintaining the image of woman pursued by men who were the major consumers of the medium. However, the ‘beauty’ of geisha that was consumed in the aspect of personal entertainment and hobby was connected to the prostitution in the public realm such as social demoralization and threat to family. Thus, after the geishas as ‘beauty’ were eliminated, they only had the image of ‘carrier’ that could be a threat to forming the sound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In other words, the praise for ‘beauty’ and censorship of ‘carrier’ shown in the same medium during the same period, reveal the aspect of double standards related to sex held by the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of the 1920s that aimed to consume the ‘beauty’ of geisha as the only entertainment in Joseon without hobbies, and also to form the sound society of Japanese settlers in colonial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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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후 일본의 ‘반지성주의’와 마이너리티 - 양정명과 도미무라 준이치를 중심으로 -

        곽형덕 한국일본사상사학회 2018 일본사상 Vol.0 No.34

        이 글은 전후 일본의 마이너리티에 대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을 양정명과 도미무라 준이치의 사례를 중심으로 분석한 글이다. 재일조선인 양정명과 오키나와인 도미무라 준이치는 1970년에 각각 분신자살과 도쿄타워 점거사건을 일으키는 것으로 일본 내의 민족 차별과 전쟁 책임방기에 항의했다. 양정명의 분신자살은 자기 존재에 대한 비극적이고도 처절한 심판이었다. 양정명은 전공투 투쟁을 통해 일본 사회를 민주화시켜 자신을 둘러싼 민족 차별 문제를 해소시키려 했다. 하지만 학생운동이 퇴조하자 그는 자신의 갈 길을 잃었다. 귀화를 했지만 일본인으로 살아 갈 수 없고, 조선인으로서의 삶을 꿈꿨지만 그마저도 부정된 그의 삶은, 1970년에 끝났다. 하지만 우리는 양정명의 죽음을 그저 추도할 수만은 없다. 왜냐하면 그것은 끝나버린 과거가 아니라 현재에도 계속되는 헤이트스피치와 뿌리 깊이 이어져 있기 때문이다. 도미무라 준이치는 1970년 7월 도쿄타워에서 인질사건을 일으켰다. 그는 법정에서 일본 천황(天皇)의 전쟁책임과 일본제국주의의 전쟁책임을 정면으로 비판했다.도미무라의 도쿄타워 인질 사건은 일본을 역사의 재판에 세우기 위해 스스로 피고가 되기 위한 전략적 선택이었다. 일본 내 마이너리티를 향한 반지성주의적 경향은 전후민주주의가 융성하던 시기에도 뿌리 깊게 남아 있었다. 혁명의 에너지가 꺼져가자 일본인과 소수민족 사이의 구별선은 이전보다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1970년, 양정명과 도미무라 사건은 마이너리티를 향한 일본 사회의 차별과 식민주의적 위계가 소멸되지 않았음을 알리는 외침이었다. 그것은 끝난 과거의 목소리가 아니라 메아리로써 현재의 우리들에게 전달되고 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tendency of ‘Anti-intellectualism’ with focusing on the case of Yang Jungmyung and the case of Junichi Tomimura after post-war Japan. Yang Jungmyung, a naturalized Japanese citizen, and Tomimura Junichi, an Okinawan, had protested the national discrimination and abandonment of Japanese war responsibility in Japan. Yang Jungmyung’s suicide was a tragic and sorrowful judgment of self-existence. Yang endeavored to democratize Japanese society through Zenkyoto student movement in order to escape from national discrimination in Japanese society. But when the student had movement collapsed, he lost his way. Although he was naturalized as Japanese, he was not able to live as a Japanese. Yang set himself alight and died in 1970. We are not able to just commemorate the memory of Yang’s death. This is because it is not the ending past. It is not difficult to say that hate speech against zainichi Korean which brought Yang’s death has threw its shadow in Japanese society. Tomimura Junichi caused the hostage case in Tokyo Tower in July 1970. In the courtroom he criticized the Japanese Emperor for war responsibility and colonialism of Japanese imperialism. Tomimura’s Tokyo Tower hostage case was a strategic choice to become a defendant himself in order to put Japan on trial of history. The anti-intellectual tendency toward minorities in Japan remained deeply rooted in the period of postwar democracy. When flame of the revolution was blown out, the distinction between Japanese and ethnic minorities became very clear. Yang Jungmyung and Tomimura Junichi’s outcries illuminate that the discrimination of Japanese society towards minorities and the colonial hierarchy had not been over. Their outcries are not an ending voice from the past, but an echo that is being conveyed to the prese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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