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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沈能淑의 紀行詩 연구

        장효현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3 고전과 해석 Vol.15 No.-

        小楠沈能淑(1782∼1840)은 한문장편소설 <玉樹記>, 詩文集後吾知可, 백 과전서적인 雜錄文時를 남기고 있는데, 그동안의 연구는 한문장편소설 <玉樹 記>에 집중된 감이 있다. 이 글에서는 심능숙의 紀行詩의 특징적 양상을 살펴 보 았다. 심능숙 가문의 세습 봉토가 경기도 金浦에 있어, 심능숙은 일생의 상당 부분을 이 김포의 私邸에서 지내면서, 때로는 부친 沈允之의 任所를 따라 지방에 머물며 여러 지역을 여행하면서 史蹟趾에서 과거의 歷史에 대한 감회를 읊기도 하고 자신 의 호쾌한 기상을 표현하기도 하였다. 26세 때인 1807년에 지은 <登三角山白雲 臺>와 27세 때인 1808년에 지은 36韻의 <遊狎鷗亭>은 심능숙의 ‘豪爽不羈’한 기 상을 잘 보여준다. 심능숙은 사상적으로 매우 자유로운 脫俗의 태도를 보였으며, 특히 우리 민족 고 유의 사상으로서 맥을 이어 온 仙家에 지대한 관심을 기울여 많은 시와 산문에서 仙家에 대한 관심을 표출하였다. 1802년에 우리나라 仙家의 淵源이라 할 三郞의 遺跡을 직접 探訪한 후 시를 남기고 있는 바, 부친의 任所인 황해도 文化에 머물러 지내던 이 시기의 기행 시에는 심능숙의 仙家에 대한 관심이 도처에 엿보인다. 1803 년에 부친을 따라 任所인 전라도 古阜에 내려가 있을 때에 우리나라 仙家사상을 정비한 權克中의 유적을 살펴 보았고 그때 얻은 권극중의 參同契註解와 遺集을 아껴 보관하였다 하는데, 이 시기에 지어진 시에는 그의 仙家취향이 뚜렷이 드러 난다. 1800년 부친을 따라 그 任所인 황해도 文化에 내려가 있으면서 高麗王朝의 수 도였던 松京에서는 쇠망한 고려왕조의 역사를 반추하는 시들을 읊었고, 檀君의 神 蹟이 도처에 남아 있는 九月山에서는 檀君에 대한 감회를 시로 남겨 주었다. 1810 년에 김포의 私邸에 小楠軒을 지어 머물던 시기에, 端宗의 妃定順王后가 묻힌 思陵을 지나며, 또 단종의 비가 머물러 있으며 강원도 寧越에 유배 가 있는 단종을 東望峰에 올라 그리워했던 처소인 淨業院을 방문하고서, 그 비극적 역사에 대한 감회를 시로 남긴다. 정순왕후를 定順聖妃로 표현하며 舜임금을 따라 殉死한 二 妃에 비기는 데에서 심능숙의 節義觀을 엿볼 수 있다. 이로부터 10여년이 지난 뒤 인 1825~1829년의 시기에 梅月堂金時習의 유적을 방문한 자리에서 일련의 시를 통해 다시금 端宗의 비극적 역사에 결부되어 있는 生六臣매월당의 節義를 되새긴다. Simneungsook wrote Korean classical novel Oksoogi(玉樹記) in Chinese character, and hundreds of poems and proses in Chinese character. Various world of poems which was produced by Simneungsook, reflects the experiences of the poet. Especially Simneungsook wrote many travel poetry which was produced through his various experiences of journey. He expressed his intrepid spirit in travel poetry. And Simneungsook had the liberal acceptance of various ideas, especially had the interest in fairy-idea. He wrote many poems and concerning fairy-idea. Many poems which Simneungsook wrote reflect the interest in fairy-idea, so there are many motifs of fairy-idea in them. And Simneungsook expressed his deeply moved emotion in travel poetry, when he had a journey to the historical cites. Especially he expressed his faithful mind when he visited to tragical historic cites. Former some researcher produced the results about world of poems which was written by Simneungsook. But she takes it as only the products of poet's fun and joy. I emphasize, in this study, that many poems Simneungsook wrote reflect various experiences and deeply moved emotion of the po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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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徐有英 文學의 硏究 補論

        장효현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9 고전과 해석 Vol.29 No.-

        In this Article, I supplement earlier study on Seo-yooyung with several materials. <Jeokbyuk-Jipja-Chup(赤壁集字帖)> is sole material which was handed in descendant of Seo-yooyung. It is the collection of poems, which was made at Jeokbyuk(赤壁)’s meeting by five poets including Seo-yooyung. Seo-yooyung abandoned the state examination and secluded long time as same as Park-gyusoo(朴珪壽). The reason was death of Ikjong(翼宗) who gathered conscientious intellectuals to go against the political power of Kim’s family. Seo-yooyung started for his new post as governor of Uiryung(宜寧) at 1865. He was pressed for people’s pain by the burden of tax and authority. Jung-taewun(鄭泰元), in the letter, praised writing skill of Seo-yooyung, but he boasted his concern for Confucian Classics inwardly. Seo-yooyung was exiled to Samdeung(三登) at 1868, and retired to hometown Geumgye(錦溪) at 1870. We can find that he lived until 1876 by record of Seungjeongwun(承政院). 이 논문은 필자가 수행했던 서유영 연구에 대한 補論의 성격을 지닌다. 크게 네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赤壁集字帖>은 서유영의 후손가에 전해 오는 유일한 서유영의 文跡이다. 서유영을 포함한 다섯 명의 문인이 각기 시를 지어 만든 시첩이다. 둘째, 서유영은 과거 시험을 포기하게 되는데 그 결정적 계기는 안동 김씨 세도정권을 제어하고자 하다가 갑자기 서거한 孝明世子(翼宗)의 죽음이다. 서유영은 효명세자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군신 관계의 만남이 완성되지 못한 것을 안타까워한다. 셋째, 서유영은 1865년 경상도 의령 현감에 부임하게 되는데, 이때 그가 사회 구조적 폐단에 시달리는 백성을 보며 괴로워하는 모습이 정태원 등 그 지방 문사들의 기록 속에서도 확인된다. 넷째, 서유영은 1868년 가을 암행어사의 탄핵을 입어 평안도 三登으로 유배를 다녀온 뒤 낙향하여 생을 마감하는데, 몰년에 대한 정확한 기록을 확인할 수 없다. 다만 최근 학계에 보고된 바, 1876년까지는 생존했던 기록을 확인할 수 있으므로 그의 몰년은 1876년 이후라고 봐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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