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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唐中期儒ㆍ佛논의에 대한 일고찰

        장병한(Jang, Byeong Han) 한국불교연구원 2010 佛敎硏究 Vol.32 No.-

        한유와 종밀은 바로 당나라가 쇠락의 길로 접어들기 전의 격동기에 살았다. 유ㆍ불ㆍ도가의 사상 논쟁과 정쟁이 이어졌고, 불교는 자종교 내에서의 선과 교의 대립을 빚고 있었다. 이때 한유의 도가와 불가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부흥 의지는 그의 「오원」을 비롯한 「논불골표」에 잘 표출되어 있고, 종밀의 삼교 회통의 논리 체계는 그의 「원인론」에 잘 반영되어 있다. 이들 저작에는 당 중기 儒ㆍ佛논쟁과 관련하여, 특히 ‘人’說즉 人性ㆍ人道ㆍ修道에 대한 상호 논의가 집중적으로 전개되고 있다. 한유와 종밀은 동시대를 살았지만, 직접적인 교유관계나 논쟁을 벌인 적은 없다. 다만 종밀의 스승인 징관을 매개로 하여 상호간의 학문적 성향과 신상의 정황은 충분히 파악하고 있었을 것으로 추측할 수 있다. 그리고 한유의 「오원」과 종밀의 「원인론」의 선후 문제에 있어, 한유의 도ㆍ불에 대한 비판과 유학의 부흥 의지를 담고 있는 「오원」에 대한 대응적 차원에서, 불교학의 대표격인 종밀이 특히 天地人三才가운데서도 ‘人’說을 중심 화두로 하여 「원인론」을 저작한 것으로 추론할 수 있다. ‘人’說의 상호 논의에 대한 관점 비고와 관련하여, 한유와 종밀의 유가와 불가 논쟁에는 인간의 본원 문제가 중심화두가 되고 있다. 이는 이전 시대 즉 위진남북조 시대와 수나라의 지배 사상이었던 도가와 불가에 대한 전반적인 반성과 개혁의 차원에서 인간의 본원을 다시 한 번 탐구해 보려는 노력의 일환에서 비롯한 것이다. 이에 한유의 人性ㆍ人道ㆍ修道의 이론 체계에는 전통 유학사상의 차별적 정서가 깊게 반영되어 성삼품론을 주장한 반면, 종밀의 불교학적 인성이론 체계에는 􋺷화엄경􋺸에 기초하여 보편적이고 무차별적인 청정자성의 불성인 여래장을 내세우고 있다. 그렇지만 종밀의 이와 같은 三敎회통의 기획적 의미에서는, 종밀이 불교의 敎와 禪의 회통을기획했지만, 결과적으로 자종교와 자종파에 대한 우월의식에 기초한 자파 교리의 재정립에 목적을 두는데 치우친 면이 없지 않으며, 유ㆍ불ㆍ도 삼교회통의 논지 전개에도 또한 무리한 교리간의 통합을 추진한 면이 없지 않다는 것이다. 따라서 종밀이 􋺷화엄경􋺸의 여래장사상을 중심으로 하여 교선 일치와 삼교 회통을 기획했지만, 결국 시대적 흐름에 크게 부응하지 못하였던 것이다. 이후 당말을 거쳐 북송 五子와 남송의 주자에게 계승되면서, 불교학은 지배이념에서 물러난 반면, 유학은 점차 동아시아의 통치이념으로 그 자리를 굳건하게 마련하게 된다. 특히 남송의 주자는 이전 한유의 성삼품설을 계승하여 氣質之性의 淸濁粹駁의 차별적 인성론을 주장함과 동시에 종밀의 화엄사상 즉 淸淨自性한 불성인 여래장사상 체계를 반영하여 보편적인 本然之性을 내세우게 된다. 이러한 주자의 본연지성과 기질지성의 이원적 분리의 인성론 체계는 이후 동아시아의 지배적인 이념으로 자리 잡게 된다. 여기 주자의 인성론 수립에는 전시대 한유의 유학 부흥 의지와 종밀의 삼교 회통 노력이 크게 작용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이로 볼 때, 당 중기 한유와 종밀 의 유불 논쟁이 가지는 동아시아의 종교 사상적 의미는 매우 크다고 할 수 있으며, 또 이러한 논쟁의 중심에 놓여 있는 「오원」과 「원인론」이 가지는 자료적 가치 또한 매우 주요하다고 할 수 있다. Han Yu(768〜824) and Zong Mil(780∼841), who lived in Tang's mid-period 8th century to the early and middle 9th century, were born right after AnShi's Rebellion (755∼63), and died before and after the Hui-chang Persecution of Buddhists (842). These two scholars lived in the tumultuous era of Tang when the Chinese dynasty experienced the Hui-chang Persecution of Buddhists and then the Huang Chao Rebellion (875∼884) before it fell. Amid continued arguments and confrontations over Confucians, Buddhists and Taoists, Han Yu well expressed his criticism of Taoists and Buddhists, as well as his Confucian determination for revival, in his books, Wu Yuan (Five Principles) and Lun Fogu Biao (Memorial on the Buddha's Relics). Zong Mil's logic of three religions' harmony is well expressed in his book, Yuan ren lun (Inquiry into the Origin of Humanity). It is believed that Han Yu's Wu Yuan triggered the Zong Mil's Yuan ren lun to respond to it. In these two books, Confucian and Buddhist doctrines sharply confront each other over the contemporary "humanity" theory. Humans' fundamental issues lie at the heart of arguments of Han Yu and Zong Mil over Confucians and Buddhists. Han Yu, based on Confucian thoughts, deeply embraces unique sentiments of humanity, human way and discipline, while Zong Mil's Buddhist science upholds equality and fairness, namely, the thought of indiscrimination. As times shifted from the end of Tang, to Northern Song and Southern Song, Zong Mil's thoughts of indiscrimination and equality faded from the dominant thoughts, while Han Yu's discriminate Confucian thoughts were transferred to the Five Masters of Northern Song, and Cheng Zhu Neo-Confucianism of Southern Song, firmly establishing itself as the dominant thought of East 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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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침대윤(沈大允)의 『서집전(書集傳)』 "탕(湯),무(武) 방벌(放伐)"論에 대한 변정(辨正) 의미(意味)- 심대윤의 『서경채전변정(書經蔡傳辨正)』의 분석을 중심으로 -

        장병한 ( Byeong Han Jang ) 충남대학교 유학연구소 2016 儒學硏究 Vol.35 No.-

        심대윤(1806~1872)의 『서경채전변정』은 저자 나이 54세(1859, 己未)에 지은 것이다. 이 해는 최제우(1824~1864)가 1860년에 東學을 唱導하기 바로 直前의 시기에 해당한다. 『채전변정』 가운데, 특히 <湯誓>·<中훼之誥>·<武成>편에서 펼치고 있는 즉, 채침의 ‘탕·무 방벌’론에 대한 심대윤의 변정 양상에는 그의 天民의식에 기초한 정치사상적 혁명론이 예사롭지 않게 전개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심대윤은 변정에 앞서 이의 기초 사상격인 ‘實學的 人性論’에서는 ‘與人同利’의 公利論만이 도덕적 義로서의 實學에 귀결될 수 있음을 주장하였고, ‘大同的 王道論’에서는 大衆 卽 人民들을 정치적 동반자로 포용하여 함께 화합해 가는 즉 ‘與衆同行’론을 주창하였다. 이에 기초한 채침의 ‘탕·무 방벌’론에 대한 심대윤의 변정에서는, 1) 堯·舜·禹의 禪讓과 湯·武의 방벌은 그 大義적 입장에서 보면 같은 것으로, 탕왕의 방벌은 天命과 天理를 따른 것으로 한 터럭의 人欲의 私意가 개입되지 않은 즉 公利의 원칙에 따른 것이다. 2) 채침이 형식적인 문장의 내용만을 곧이곧대로 받아들여 탕·무의 거사를 폭력적인 것으로 치부하는 그와 같은 편향된 시각에 대해, 심대윤은 형식적인 문장은 빈껍데기 로서 성왕의 虛利에 속하기 때문에 버려야 하며, 탕왕과 무왕이 당시 大義에 기초한 방벌을 통해 혁명을 수행했기 때문에 일의 알맹이 즉 實利를 획득하여 천자의 자리에 오를 수있었다. 3) 채침은 무왕이 臣下의 신분으로서 천자인 殷의 紂王을 정벌한 것으로 해석하며 무왕의 탈법적 왕위 찬탈을 합리화 시키는 문제에 대해, 심대윤은 하늘의 福善禍淫의 道는 善惡의 如何에 따라 환히 드러나는 것으로, 천명이 끊어지고 백성을 虐待하였으니, 紂는 필연적으로 亡하게 되어 있었던 것이고, 무왕이 스스로 ‘以臣伐君’의 죄를 실행한것은 아니라고 변호한다. 위와 같은 심대윤 혁명론의 전개는 명말 청초 맹자의 혁명사상을 부활시켜 군주 전제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을 가했던 黃宗羲(1610∼1695)와 통치자가 民을 잘 다스리는 정치를 하지 못하여 민의 怨望을 사게 된다면, 그와 같은 통치자는 제후들에 의한 옹립으로서의 후대와 帝命에 의해 다시 變置되어야 함을 주장했던 조선 후기 丁若鏞(1762~1836)의 정치사상에 근접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된다. 심대윤은 『채전변정』에서 “지금 후대의 제후로서 만약 왕을 정벌할 자가 탕·무의 시대적 상황과 명분에 견주어 이를 법 삼아 혁명을 일으킨다면, 이 또한 탕·무의 道를 실천한 것이다.”고 선창하고 있다. 요컨대 심대윤은 당시 19세기 중반에 즈음하여, 과거 맹자의 탕·무 방벌론을 현실의 실천적 유가 혁명론으로 승화 시킬 것으로 제안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란 우연과 필연이 둘이 아니다. 역시 『채전변정』이 저술 된 다음 해인 1860년에 최제우는 東學을 창시하게 되고, 이의 정신을 계승한 최시형은 마침내 1894년에 동학 농민전쟁으로 이어가게 된다. 이런 역사적 맥락에 비추어 보면, 심대윤의 혁명론은 당시 19세기 중반 조선국의 한 在野 學者의 단순한 이상에 그치는 것이 아니고, 21세기 현시점을 관통하여 먼 미래의 언젠가에 그 실현 가능성을 항상 열어놓고 있다는 것에서, 그것이 차지하는 정치 사상적 의미가 결코 적지 않다고 할 수 있겠다. Sim Dae-yun(1806~1872)``s academic system is linked with Yangming School``s spiritual world which was embraced by Hagok Jeong Je-du (1649∼1736) and Ganghwa School. It was around in 1860 when Suun Choe Je-u(1824~1864) launched Donghak (Korean Neo-Confucian academic movement) that Sim Dae-yun began to write the Corrective Commentary on the Cai Shen``s Compiled Books (蔡傳辨正, "the Corrective Commentary on Cai Shen"). In the 1860s, the Joseon society was embroiled in serious confusion and crisis. Whereupon, Sim Dae-yun reconstructed Mencius``s Theory of Tang-Wu Revolution in line with the then situations and published it in his Corrective Commentary on Cai Shen. In the despotic feudal dynasty system under the Neo-Confucian order, the theory had been long forgotten. In the preface of the Corrective Commentary on Cai Shen, he mentions his motivation behind the writing; He wanted to correct Cai Shen``s damage or distortion of the true intention of the former kings of Yao Shun Yu Tang Wen Wu regarding the Theory of Tang-Wu Revolution. He further said in the corrective commentary: "If a feudal lord in the coming times intends to subjugate and revolt against a king citing the same situations and causes - that Tang-Wu faced - as the justifiable reason, then he will practice the way of Tang-Wu." As such, he proclaimed that the revolutionary legitimacy of the Confucian sage-kings should be inherited and practiced in the reality of recent times. History does not see that coincidence and inevitability are two different things. The following year, Choe Je-u emerged and launched Donghak, which Choe Si-hyeong inherited, eventually leading to the outbreak of Donghak Peasant War in 1894. In light of this historical fact, Sim Dae-yun``s discussion of the Theory of Tang-Wu Revolution, mentioned in the Corrective Commentary on Cai Shen, is simply not an ideal of a non-mainstream scholar in Joseon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but instead it opened the possibility of that theory being realized in the far future beyond the 21st century; given this, the implication of his political thoughts is hugely signific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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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白雲 沈大允의 『禮記正解』에 관한 일고찰

        장병한(Jang Byeong-han) 한국양명학회 2009 陽明學 Vol.0 No.23

        우리나라 19세기 초ㆍ중반에 살았던 白雲 沈大允(1806?1872)은 평생 在野에 머물면서 經學과 歷史 공부에 전념하여 다량의 관련 저술을 남기고 있다. 백운의 학적 연원은 하곡 정제두의 양명학에 시초하여, 중국 청대 18세기 晥派의 巨匠으로서 반성리학자인 대진의 사상에 닿아 있을 뿐만 아니라, 백운보다 한 세대 앞서 살아간 茶山 丁若鏞(1762?1836)의 학적 체계와도 일련의 관계를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는 19세기 실학적 체계성을 가진 마지막 양명학자로서 경기도 안성을 중심으로 하여 소규모 학단을 이끌면서 양명학의 맥을 이어가고 있었다. 백운의 『三禮』 관련 주해서에는 『禮記正解』ㆍ『儀禮正論』ㆍ『周禮刪正』이 있다. 이 가운데 『예기정해』는 人本主義的 사상에 기초하여 19세기의 새로운 근대적 예학 체계의 패러다임을 제안하고 있다. 백운은 여기에서 宋이후 성경으로서 의문시 되어 왔던 『예기』가 聖人의 경전이 아니고 漢儒들이 멋대로 견강부회한 것으로 진단한다. 그래서 먼저 『예기』 원문에 대한 經文과 非經文의 변별 작업을 통해 修己安民의 경전적 근거로 삼고자 했다. 그리고 백운은 기존 관학의 중심에 있었던 ”禮記』註解書 가운데 漢의 鄭玄 注와 唐의 孔穎達의 『예기정의』는 선왕의 예를 奇異한 것으로, 또 宋의 주자의 예설과 元의 陳澔의 『예기집설』은 역시 선왕의 예를 虛荒된 것으로 만들었다고 비판하였다. 아울러 그는 이들 주해서로 인하여 선왕의 예가 人間의 常情과 常理에서 멀어지게 되었다고 진단하였다. 이에 백운은 그의 〈정해〉 곳곳에서 이들 주해서에 대한 변석을 가하고 있다. 백운이 살았던 19세기 전후반 시기는 지루한 17-18세기의 禮訟과 黨爭의 시기는 지나고, 사대부들 사이에서는 繁文, 縟禮, 虛禮虛飾과 같은 예속의 병폐가 만연하고 있었다. 그리고 학문풍조 또한 성리학적 측면에서의 空理空談과 더불어 禮學的 측면에서도 天道와 天理 중심의 禮 의식이 보편화 되고 있었다. 백운은 이와 같은 19세기 중반의 예교 질서의 피폐함과 허례허식의 유행적 상황을 국가 사회의 위기로 진단하고, 이에 대한 대응과 극복의 일환책으로서 『예기정해』를 저술하였다. 백운은 여기에서 19세기 人本主義的 禮 本義 정신 즉 “禮는 義=實利에 기초하여야 한다.”, “禮에서의 公益과 私益은 그 輕重이 같아야 한다.”, “禮는 虛禮虛飾을 제거하고 誠意를 얻는데 있다.” 등을 주창하여, 19세기의 새로운 예학질서 체계로서의 패러다임을 제안하였다. BaekUn Sim Dae Yoon(1806-1872) had studied hard Chinese classics and history. he studied from the doctrines of Wang Yangming, studied by Hagok Jae Doo Jeong, and had not only some relation of Dae Jin ideology, but also some relation of Da San Jung Yak Yong(1762-1836). he led some group of academy at the end of his life, as The last korean Yangming school which has the system of practical science. BaekUn estimated that Records of Ritual(예기) is not old book but work book which Han Dynasty times and Dang Dynasty times’ scholars interprete at random. therefore he reestablished pure classic of “in order to govern people, the leader should make himself develop in the view point of humanity”(修己安民) First, courtesy is established on the base of utilitarianism. Second, courtesy is established on the base of equal treatment between the public interest and the private interest. Third, courtesy is established on the basis of loyalty through exclusion of empty formalities and vanity. In conclusion, BaekUn wants to establish society in which have helped each others(大同社會) through reestablishing pure classi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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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霞谷 鄭齊斗와 白雲 沈大允의 經學 비교

        장병한(Byeong Han Jang) 한국양명학회 2007 陽明學 Vol.0 No.18

        霞谷 鄭齊斗(1649-1736)와 白雲 沈大允(1806-1872)은 대략 150여년 시대의 간격을 두고 살았지만, 이들은 학연과 혈연으로 인해 소론ㆍ양명학파ㆍ강화학이란 세 가지 연을 함께 하면서 살았다. 특히 19세기 중반 安城에서는 이미 落拓한 少論의 후예들 즉 沈氏, 東萊 鄭氏, 柳氏, 李氏 등이 하곡의 강화학파의 정신세계에 기초하면서 백운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마지막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 백운이 逝去하면서 그 맥은 끊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經學에 있어 하곡과 백운은 朱子의 성리학적 학문태도와 방법에 대한 비판과 변석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논의 전개 양상은 많은 부분 달리하고 있다. 예컨대 『大學』 ‘格致章’의 해석에 있어, 하곡은 王陽明의 공부론에 입각하여 ‘致知’ 즉 ‘至善의 발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物物마다에 있는 그 事를 바로 잡는 格物 공부를 역설하고, 格物은 誠意의 일(事)이고 致知는 誠意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백운은 양명학과는 많은 정도의 거리를 둔 즉 독자적인 경전 해석체계를 전개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학 본원 경전에 근거하려는 崇經의식에 기초하여 孔子의 실천적인 道 즉 ‘忠恕’를 ‘格致’章의 본원적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근대 양명학자로서 크게 공헌하였으며 백운의 저술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경학 사상을 극찬하기도 했던 鄭寅普(본관: 東萊, 爲堂, 1892- ?)는 앞서 일본 학자 다까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가 『조선유학사』에서 ‘백운 심대윤의 학문적 원류가 하곡 정제두에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위당은 『양명학 연론』에서의 〈조선 양명학파〉 그룹에는 백운을 소속시키지 않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정황이 있을 수 있지만, 위당이 백운의 反性理學的 思惟세계와 어느 정도 양명학과 실학의 사상 체계에 대한 端緖에 많은 부분 학문적 魅了를 가졌지만, 백운을 조선의 양명학자로 규정하기에는 일정 부분 無理가 따른다는 판단이 있지 않았는가 한다. There has been estimated l50-year-long gap between the era of Hagok Jae Doo Jeong(1649-l736) & that of Baekwoon Dae Yun Shim(1806-l872), however they had to live with surroundings of soronㆍyang-myeong-hak factionㆍgang-hwa-hak due to different academic connection and blood connection. In particular, soron's descendants such as Mr. shim, Mr. Dongrae Jeong, Mr. Ryu, Mr. Lee who had failed in an nomination had been inheriting mainstream of modem last gang-hwa-hak faction based upon Hagok's gang-hwa-hak faction's spiritual world centered by Baekwoon in Ansung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However, its mainstream had been cut off due to demise of Baekwoon. Nevertheless, Hagok and Baekwoon had, criticism and interpreting about methodology and academic attitude to seong-ri-hak of Juja, in common, but they were totally different from their concrete logic development in light of Chinese classics. For example, from the aspect of interpretation of the Great Learning 'gyeok-chi-jang', Hagok interpreted 'gyeok-mool-chi-ji' based upon Yang Myeong Wang's learning theory, on the contrary Baekwoon had a strong willingness to develop interpreting system of scriptures independent from that of yang-myeong-hak, further he described 'choong-seo' of the Confucius practicing morality as fundamental meaning of 'gyeok-chi-jang'. By the way, In Bo Jeong(a place of origin: Dongrae, Widang, 1892- ?), once spoke highly of thoughts of Baekwoon's Chinese classics as a scholar of modem yang-myeong-hak, didn't include Baekwoon in the group of 〈Joseon yang-myeong-hak faction〉 in his book of yang-myeong-bak-yeon-rom even though Japanese scholar, Dakagashi Doru (Gyo Hyeong Goh, 1878-1967) asserted that original academic mainstream of 'Baekwoon Dae Yun Shim had been from Hagok Jae Doo Jeong' in the jo-seon-yu-bak-sab. There might have been several reasons for that, but it is, in my opinion, more likely that Widang were academically fairly interested in many parts about thinking system of yang-myeong-hak and practical learning and speculative world of seong-ri-hak of Baekwoon, however he judged that it was rather unreasonable to look upon Baekwoon as Joseon's yang-myeong-hak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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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江右 南冥 道學의 性格 규정 일고찰

        張炳漢(Jang, Byeong-Han)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7 人文硏究 Vol.- No.53

        김충열이 『학기류편』의 「학기도』 분석을 통해 남명의 도체 즉 心과 誠을 주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학기도」와 함께 有機的인 관계 속에서, 더 나아가 편찬자의 意圖的인 伏線의 潛在性까지 깃들어 있을 「학기」의 선편의식을 고찰해 보았다. 남명 또는 남명학 (남명에서 정인홍에 이르는 학문체계)으로서의 「학기」 선편 의식 구조에는 기존 성리학에서의 性卽理ㆍ天卽理와 같은 理學의 거대 질서는 많은 부분 약화되고, 그 대신 心과 誠이 중심이 되는 즉 ‘性郞誠’, ‘聖郞誠’, 先天學=心學 등이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 기존 성리학 질서에서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太極卽理 및 정자의 天卽理가 우세했다고 한다면, 「학기」에서는 주렴계의 「통서」와 誠論, 장재의 氣와 神 소옹의 心學이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본원 유학으로서의 『맹자』ㆍ『주역』ㆍ『중용』등의 사상이 강력하게 또한 작용하고 있다. 주지하듯, 「학기」의 선편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성리대전』에 속해 있다. 남명학의 원류인 『학기류편』의 「학기」는 남명이 25세 전후부터 『성리대전』에 침잠하여 ‘述而不作’의 원칙에 근거하여 주요한 내용만을 箚記한 것이다. 남명의 首弟子 정인홍이 이를 전수 받아 문인들과 함께 스승 死後에 『학기류편』을 편찬하고, 그 서문에서 “이 책은 선생(남명)이 다만 덕을 닦기 위한 것이고 후일을 기약한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필자는 정인홍의 이 말을 역설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남명은 『성리대전』을 근간으로 하여 『근사록』의 체제에 따라 기존의 성리학의 이기론적 모순 구조와 性郞理의 관념적이고 공허한 이론과는 차별되는 즉 다른 도학의 개념으로서 자신 실천적 공부론의 요체인 敬ㆍ義의 도체가 될 수 있는 “氣와 神(鬼神), 心과 誠”을 수립하여 독자적이고 새로운 도학 체계를 기획하였다. 이러한 강우 남명학의 새로운 도학 체계는 당시 16세기 朱子 性理學의 확장을 통한 정치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 하고 있던 강좌 퇴계학파의 학풍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공허한 이론에 빠져드는 것으로 인한 국민 사회적 폐해성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경학적 대응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thesis is focused on what is “Seonpyeon” or “Seongi recongnition” of “HakGiYuPyeon” from which NamMyeong school was originated. A large part of “Seonpyeon” of “HakGi” belongs to “SeongLiDaeJeon (Collection of Neo Confucianism).” “HakGi” of “HakGiYuPyeon”, the origin of NamMyeong school is the book Nam Myeong wrote by coping the major parts of “SeongLiDaeJeon” under the principle of “SulEiBuJak(Accept as it is)” since he was 25 year old or so. Nam Myeong’s best student Jeong In-hong succeeded this and published “HakGiYuPyeon” with other writers. The core concept of then-established Neo Confucianism that “Confucianism is the principle” almost disappeared here while most discriminatory structure of the “Theory of Principle and Psycho”,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as the cosmology of Neo Confucianism, was eradicated or resolved to become equal structure between the principle and the psycho. Further more, it sent a signal that it was on the verge of transition from “the Theory of Principle and Psycho” into “Essence Function Theory”. Therefore, the great orders of “principle-centered studies”, such as “Confucianism is the principle” and “the heaven is the principle,” were dropped in his “HakGi” Seonpyeon recognition structure of Nam Myeong school. Instead, mind and sincerity emerged as important concepts. The concepts included “nature is sincerity,” “divineness is sincerity” and “Seoncheonhak is mind philosophy.” If Juryeomgye’s theory, “TaeGeukDo Seol”, and “TaeGeuk(The Greate Absolute) is the principle” and Chuang Tzu’s theory, “the heaven is the principle.” were dominant in then established Neo-Confucianism, Juryeomgye’s “TongSeo” and sincerity theory, Chang Tsai’s energy and diety, and Shao Yung’s “Sohak” prevailed in “HakGi.” In “HakGi”, “the Works of Mencius”, “Classic of Changes” and “the Doctrine of the Golden Mean” took strong presence. As seen here, Nam Myeong school is a practice-oriented philosophical Taoism, centering on mind and sincerity. It is fair to say the school was created to overcome the negative social influence of 16th century’s dominant Toegye school which was dominating political and social hegemony by spreading Zhuxi’s Neo­Confucianism but was going so ideological and non-prac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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