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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내촌(耐村) 강홍립(姜弘立)의 신원과 복권

        이덕일 열상고전연구회 2019 열상고전연구 Vol.68 No.-

        강홍립은 1619년 조선과 후금(청)이 싸운 심하전역에서 패전 후 항복한 장수로 인식되고 있다. 그런데 강홍립은 광해군과 미리 짜고 항복했다는 인식이 퍼지면서 조선 시대는 물론 지금까지도 부정적으로 인식되고 있다. 강홍립에 대한 부정적 인식은 두 단계의 과정을 거쳐 이루어졌다. 하나는 패전 당시의 인식이다. 평안감사 박엽은 군량 공급에 소홀했던 자신의 책임을 전가하기 위해서 사실과 다르게 조정에 보고했다. 또 하나는 숭명반청을 명분으로 인조반정이란 쿠데타를 일으켜 집권한 서인들의 태도였다. 그러나 서인들은 청나라와 전개한 두 차례의 전쟁에서 패전한 후 청나라를 상국으로 삼았다. 그러면서도 속으로는 청나라를 부인하는 모순된 행위를 계속했다. 이런 모순된 상황을 합리화하는 방안으로 강홍립이 일부러 청나라에 항복했다고 비난했다. 그러나 강홍립은 항복하라는 광해군의 밀지를 받지 않았다. 또한 강홍립은 포로로 있으면서 광해군은 물론 인조에게도 청나라의 현실을 전달하면서 조선을 전화(戰禍)에서 벗어나게 하려고 노력했다. 1627년의 정묘호란 때 후금군이 황해도 평산에서 멈추고 남하하지 않은 것은 강홍립이 중재한 덕분이었다. 그래서 비변사는 강홍립이 “나라를 잊지 않았다”고 칭찬하고 부원수였던 정충신은 “강홍립 덕분이 수만 군이 물러나서 모든 백성들이 그 은혜를 감사한다”고 칭찬했다. 이 전쟁 때 고국에 정착한 강홍립은 곧 사망했다. 그러나 이후에도 조선은 숭명반청 정책을 바꿀 생각을 하지 않았고, 1636년에 다시 병자호란이 발발했다. 이때는 강홍립도 사망한 후였으므로 인조는 직접 청나라 군영으로 나가서 항복해야 했다. 두 전쟁의 참패에도 불구하고 서인들은 계속 정권을 유지했고, 겉으로는 청나라에 사대하면서도 강홍립을 비난하는 것으로 자신들을 절개 있는 것으로 포장했다. 서인(노론)이 조선 후기 내내 집권하면서 이런 인식이 현대인들에게도 그대로 투영되고 있다. 강홍립은 나라의 명으로 원치 않는 전쟁에 나가서 최선을 다했고 패전 후에도 나라를 위해 모든 노력을 다했다. 이제 그를 나라를 위해 생애를 바친 애국자로 재평가될 때가 되었다. Kang Hong-lib is considered as a surrendered General in 1619 after losing the battle at Simha, between the Joseon Dynasty and the post-Jin(後金) Dynasty. However, Kang Hong-lib has been accused of having surrendering after receiving a secret order from King Kwangh-hai since King In-jo’s rebellion. The negative perception on General Kang has been accepted not only during the Joseon Dynasty, but also until now. This thought was made in two stages. First, it was a report by Park-yeop, the governor of the Pyong-An Province. He made in a false report to pass on his mistakes to Kang Hong-lib. Park-yeop couldn’t deliver the troops in time. The second reason was the attitude of the Seo-In Party. They seized power in a military coup called ‘Injo-Banjeong’ in the pretext of pro-Ming Dynasty. But after losing the two wars against the Qing Dynasty, the Seo-In Party served the Qing Dynasty as the Emperor’s nation. But inwardly, they denied the Qing Dynasty, which was a contradiction. To rationalize this contradiction, they accused Kang Hong-lib surrendered deliberately to the Qing Dynasty. But Kang Hong-lib did not secret received the order by the King Kwang-hai. Also while being a prisoner, Kang Hong-lib secretly reported to the King on the situation on the Qing Dynasty. He tried to get Joseon Dynasty out of the war disaster. During the war of 1627, the Qing Dynasty’s army stopped at Pyongsan, Hwanghae Province, because of Kang’s intervention. So the Office of Border Defense(비변사) praised him for not forgetting home country. Jung Chung-shin, The deputy commander, praised him, “Thanks to him, a great number of soldiers stepped down and all the people are grateful for his grace.” Kang Hong-lib settled in his homeland during this war but died soon after. Even after this war, however Joseon Dynasty did not change its policy of pro-Ming Dynasty and anti-Qing Dynasty, and the war broke out again in 1636. This time was after Kang’s death, King InJo himself had to go to the Qing Dynasty military camp to surrender. Despite the crushing defeat of the two wars, the Seo-In Party remained in power. They tried to conceal their incompetence by criticizing Kang Hong-lib. As they continued to take power even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is perception was also introduced to the present people. Kang Hong-lib went to an unwanted war by the King’s order but did his best. It’s time to reevaluate him as a patriot who dedicated his life to his count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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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일의 민족독립운동에 관한 몇 가지 문제

        이덕일 국제뇌교육종합대학원 국학연구원 2010 선도문화 Vol.8 No.-

        1. 서일의 기초 사상 형성 과정의 문제 서일(徐一:1881~1921)은 중광단(重匡團)과 대한정의단(大韓正義團), 북로군정서(北路軍政署) 등을 이끌었던 저명한 독립운동가이다. 그러나 그의 행적을 추적하는 일은 큰 어려움에 봉착해있다. 무엇보다 1차 사료의 부족이 가장 큰 문제이다. 비교적 이른 시기인 1921년에 사망한데다 일제가 1942년 11월 만주 영안현의 대종교 간부들을 일제 검거하는 임오교변(壬午敎變) 당시 서일의 집도 수색을 당해 모든 자료를 빼앗겼던 것이 큰 요인이다. 이런 사정을 감안하더라도 1910년~1920년대 초 만주의 독립운동을 이끌었던 서일의 행적에 관한 연구는 심히 미약하다고 할 수밖에 없다. 최근 들어 몇몇 논문들이 나오기 시작한 것이 바람직한 상황인데, 이글에서는 서일의 독립운동 관계에서 풀어야할 몇 가지 문제에 대해서 살펴보기로 하겠다.

      • KCI등재
      •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1) 번역 및 비판

        이덕일 바른역사학술원 2018 역사와융합 Vol.- No.2

        조선총독부는 한국 강점 후 한국사를 반도사의 틀로 가두는 역사 왜곡에 나섰다. 한국사에서 대륙사와 해양사를 삭제해서 반도사로 축소한 후 그 북부에는중국의 식민지인 한사군이 있었고, 남부에는 일본의 식민지인 임나일본부가 있었다고 주장했다. ‘한사군=한반도설’의 핵심은 ‘낙랑군=평양설’이었는데, 일본인학자들은 이를 위해서 여러 논문을 쓰고 고고 유적·유물을 조작했다. ‘낙랑군= 평양설’을 주장한 주요 논문의 하나가 이나바 이와기치(稻葉岩吉)의 「진장성 동단 및 왕험성 고(秦長城東端及王險城 考:1910년)」이다. 이나바는 이 논문에서 낙랑군 수성현이 황해도 수안군이라고 주장했는데, 이 논리는 한국 국사학계의 태두로 불렸던 이병도의 『한국고대사 연구(1976)』에 그대로 채용되었다. 또한 동북아역사재단은 국고 47억원을 들여서 『동북아역사지도』를 제작하면서 낙랑군 수성현을 황해도 수안군으로 표기했다. 2015년 대한민국 국회에서 동북아역사재단에 그 근거를 물었을 때 이병도의 『한국고대사연구』의 148쪽을 근거로 제시했다. 이나바 이와기치는 위 논문에서 낙랑군 수성현은 황해도 수안군이고, 진(秦) 나라 만리장성의 동쪽 끝이 황해도 수안군에서 시작한다고 주장했다. 이나바는이런 사실이 『한서 지리지(漢書 地理志)』에 나오니 ‘의심할 것이 없다’고 주장했는데, 『한서 지리지』에는 황해도 수안군은커녕 한반도에 대한 기술 자체가 없다. 모두 이나바 이와기치가 한사군을 한반도에 있던 것으로 왜곡하기 위해서 만든창작인데, 일체의 사료적 근거가 없는 가짜 역사가 지금까지도 한국 고대사학계에 그대로 수용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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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낙랑군(樂浪郡) 조선현(朝鮮縣)의 위치 - 낙랑군 조선현의 평양설 및 대동강설 비판

        이덕일 바른역사학술원 2017 역사와융합 Vol.1 No.1

        한사군 중에서도 낙랑군의 위치는 오랜 쟁점이었다. 낙랑군 조선현을 어디로비정하는가에 따라서 한국 고대사의 모습이 크게 달라지기 때문이다. 현재 중국은 낙랑군 조선현을 지금의 평양일대라고 비정하고 있는데, 이는 조선총독부 및조선의 일부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주장한 것이었다. 이에 반해 조선 후기의 다른 유학자들은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주장했는데, 이는 역사학을 전공한 독립운동가들에게 계승되었다. 이 두 주장 중 어느 것이 진실인가 하는 것은 낙랑군이 존재하던 시기에 쓰여진 당대의 역사서가 기준이 되어야 할 것이다. 낙랑군 조선현을 현재의 평양으로 보게 된 것은 12세기 경 고려 후기 사대주의 유학자들이 은나라 사람 기자가주나라 무왕을 피해 간 곳을 지금의 평양으로 여긴데서 비롯되었다. 기자는 서기 전 12세기 사람이니 사후 2400여년 후에 평양에 온 것으로 인식되었던 것이다.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위만조선의 도읍지가 섰고, 그 자리에 낙랑군이설치되었다는 것인 현재의 통설이다. 그러나 『한서』 「지리지」는 기자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선 것은 낙랑군 조선현이고, 위만 조선의 도읍지 자리에 선 것은 요동군 험독현이라고 군(郡) 자체가 다르다고 서술하고 있다. 중국의 여러 고대 사료들은 낙랑군이 고대 요동에 있었다고 서술하고 있으며, 특히 낙랑군 조선현은 명·청 때의 영평부, 즉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에 있었다고 말하고 있다. 그리고 그 북쪽 70리에 장성이 있다고 말하고 있다. 낙랑군조선현은 지금의 하북성 노룡현 북쪽에 있었고, 그 북쪽에 장성이 있었다. 낙랑군 조선현은 지금의 평양에 있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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