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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宣祖에 대한 현창과 그 의미

        정해은 조선시대사학회 2013 朝鮮時代史學報 Vol.66 No.-

        Examined in this article is how King Seonjo came to be honored as the ‘Renaissance king’ after his death, and what was the meaning of such effort of the time. The kings of the Joseon dynasty were honored and commemorated in various forms and fashions after their deaths, so in that regard the honoring of Seonjo was not at all an unusual thing. Nonetheless, the reason it is extensively examined in this article is because Seonjo was “reevaluated” as a “king who saved Joseon after winning the Imjin Wae’ran war.” With the interests of King Injo and those of the Westerners faction meeting with each other, King Seonjo came to be portrayed in a new light, as a hero for the Joseon dynasty, who achieved the survival of the country and maintained loyalty toward Ming. In other words, he was newly decorated as a role model for the rest of the country. This new evaluation of him continued to spread, as the Joseon people’s sentiment of inheriting Ming and its legitimate traditions continued to grow, after Ming’s fall. Commemoration projects of King Seonjo continued to become more active. During the reign of King Injo, a musical score(樂章) alone for King Seonjo’s chamber at the Dynastic Shrine(宣祖室) was cre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King Seonjo was designated with a Seshil chamber, and even Seonmyo Bogam(宣廟寶鑑) was published. Wa’ryong-sa(臥龍祠), in the Yeong’yu(永柔) area of the Pyeong’an-do province, where Seonjo remained before returning to the Capital, continued to be expanded in the reigns of kings Hyeonjong, Sukjong and Yeongjo, as a central stage of demonstrating ‘Loyalty.’ All these efforts of the time show us that the memory of King Seonjo was being strengthened with new images of himself as a savior of the country and loyal vassal to Ming (in the eyes of following kings), and as a model of loyalty, in the eyes of the public. This new image of King Seonjo continued to be strengthened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이 글은 선조가 사후에 ‘중흥’의 국왕으로 부각되는 양상을 추적하고 그 의미를 조망한 연구이다. 조선시대 국왕들은 후대에 각종 형태로 추숭을 받았다. 그러므로 선조에 대한 현창이 특별한 현상이라 말할 수 없다. 그럼에도 이 글에서 선조를 특별히 주목하는 이유는 선조 추숭이 임진왜란을 극복하고 조선을 구한 임금으로 초점을 맞추어 진행되었기 때문이다. 선조는 인조와 서인세력의 이해와 맞물리면서 중흥과 사대의 공을 이룬 국왕으로 추앙되어 후대의 모범이 되는 국왕으로 거듭났다. 이것은 명 멸망 이후 조선에서 ‘중화계승의식’이 확산되는 속도와 궤를 같이하면서 퍼져 나갔다. 선조에 대한 현창 사업도 활발해졌다. 인조 대에 종묘의 宣祖室을 위한 단독 樂章이 제작되고, 숙종 대에는 선조가 세실로 정해지고 『宣廟寶鑑』까지 편찬되었다. 그리고 선조가 환도하기 직전에 머물던 평안도 영유에 세운 와룡사가 현종, 숙종, 영조 대를 거치면서 ‘충’을 실현하는 본산으로 확대되었다. 이러한 양상은 선조에 대한 기억이 위로 국왕들에게는 조선을 구한 공열과 사대의 표상으로, 아래 民에게는 충을 실천해야 하는 본보기로서 거듭났음을 잘 보여준다. 그리고 새롭게 형성된 선조의 이미지는 17세기를 관통하여 18세기까지 지속 또는 증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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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세기 후반 윤휴의 「제장전(諸將傳)」연구

        정해은 순천향대학교 이순신연구소 2020 이순신연구논총 Vol.- No.33

        이 논문은 윤휴가 기록한 「제장전」의 저술 배경과 특징을 검토한 글이다. 「제장전」은 임진왜란시기 이순신과 함께 활 약한 무장들의 활약상을 기록한 글이다. 윤휴의 아버지인 윤 효전은 이순신의 서녀(庶女)를 첩으로 맞이해 그 사이에서 윤 영을 낳았다. 윤영은 이순신의 서(庶) 외손이자 윤휴의 서형(庶兄)이 된다. 이 인연으로 윤휴는 서형 윤영과 이순신의 주 변 사람을 통해서 정보를 수집하고 안방준의 글도 참조하여 「제장전」을 지었다. 「제장전」에는 정운·송희립·이억기·류형·정사립·이완·진무성·안위·김대인·원균 등 무 장 10명이 올라있는데, 이순신과 함께 수행한 활약상에 초점 을 맞춰 서술하였다. 윤휴와 윤형은 형제 사이를 뛰어넘어 학 문 및 사상적으로 영향을 주고받았다. 윤휴는 청을 치자는 북 벌론자였고, 윤영도 북벌을 위해 청의 지형과 군사 제도를 연 구하고 병법도 익혔다. 북벌을 주장한 윤휴는 「제장전」을 지어서 조선의 무비(武備)를 역사적으로 입증하면서 동아시아 강자로 자리 잡은 청에 대응하고자 하였다.

      • 중학교 국어과 매체언어 교육 방안 연구

        정해은 국어교과교육학회 2013 국어교과교육연구 Vol.22 No.-

        디지털 매체의 직접적인 영향으로 우리의 언어생활에서 매체언어 능력은 중요한 소통 능력으로 자리 잡았고, 국어교육에서는 이러한 능력을 향상시 키기 위한 체계적이고 실제적인 매체언어 교육이 필요하다. 이에 본고는 중 학교 국어과 매체언어 교육의 구현 양상을 살펴보기 위해 2011 중학교 교육 과정을 분석하고, ‘내용 성취 기준에 대한 해설’에서 추출한 학습 요소를 근 거로 검정 교과서 4종을 선별하여 매체언어 관련 단원을 비교․분석하였다. 2011 중학교 교육과정에서는 ‘듣기․말하기’, ‘읽기’, ‘쓰기’ 세 영역의 성취 기준에 매체언어가 통합되어 드러났다. 관련 성취 기준이 실행된 단원 의 학습 활동을 ‘교육과정 반영의 충실성’과 ‘통합 영역을 고려한 수용과 생 산 활동의 타당성’, ‘매체 자료의 적절성과 다양성’ 측면에서 비교․분석한 결과 이 세 가지 기준을 모두 충족시킨 교과서는 전혀 찾아볼 수 없었다. 동일한 교육과정을 바탕으로 집필되었음에도 매체언어 교육에 대한 인식 과 접근 방식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는 교과서의 문제를 해결하기 위 해 본고는 교육과정이 충실하게 반영될 수 있고, 통합 영역의 성격을 고려 한 수용과 생산 활동이 타당하게 이루어질 수 있는 학습 활동과 이러한 활 동에 적합한 매체를 제시하였다. 본 연구가 ‘교육과정-교과서-교실 현장’ 이 균형을 이루고, 매체언어 능력을 향상시킬 수 있는 바람직한 매체언어 교육의 방안이 되길 기대해 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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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병자호란의 상흔과 ‘의순공주’의 탄생

        정해은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20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Vol.0 No.41

        This study set out to investigate the background behind Lee Ae-suk becoming a Gongnyeo with the title of "Princess Uisun" and moving to Qing and her perceptions among the later generations. Her father was Lee Gae-yun, and her mother was from the Ryu family of Munhwa. She was known to be an illegitimate daughter, but it is not true. Her move to Qing was an outcome of interests among her father, King Hyojong of Joseon, and Dorgon, Qing's practical ruler. Her return to Joseon was not an outcome of Qing Shizu's reciprocity, but his intention to abolish the system set up by Dorgon. Later generations summoned Princess Uisun in many different forms, changing her life in their memories or creating new stories according their respective circumstances. There was an "explanation in her defense" that she would never initiate of such work. The presence of Lee Ae-suk is not found in them, and it represents scars of the defeated nation and discrimination that she had to suffer as a woman. 이 논문은 이애숙이 가짜 공주인 ‘의순공주’라는 작호를 띠고 공녀가 되어 청으로 간 배경과 후대 인식을 살펴본 글이다. 이애숙의 아버지는 이개윤이며 어머니는 문화 류씨다. 서녀로 알려지기도 했으나 사실이 아다. 1650년(효종 1) 이애숙이 16세에 청으로 끌려간 배경에는 아버지 이개윤, 조선 국왕 효종, 청의 실질적인 통치자 도르곤의 이해관계가 자리하고 있다. 서얼 종친의 처지를 타개하려던 아버지, 정권 유지를 위해 대청관계의 평화를 바란 효종, 조선 조정의 척화 분위기를 억누르기 위한 도르곤의 이해가 맞물리면서 혼사가 이뤄진 것이다. 의순공주 이애숙은 청에서 만 6년 동안 지내다가 1656년에 돌아왔으며 1662년에 사망하였다. 28세였다. 청으로 간 그 해에 도르곤이 사망하고, 1651년에 도르곤이 임금 자리를 넘보았다는 죄로 부관참시가 되자 의숙공주 이애숙도 적몰되어 누루하치의 손자인 박락에게 보내졌다. 1652년에 박락마자 사망하자 혼자 지내다가 청 세조의 허락으로 환국할 수 있었다. 의순공주 이애숙이 조선으로 돌아온 배경에는 도르곤의 유제를 청산하기 위해 도르곤의 실정(失政)을 드러내고자 한 청 세조의 의도가 컸다. 후대에 의순공주는 여러 형태로 호출되었다. 도르곤에게 소박을 당해서 그의 부하에게 보내졌다는 이야기, 오랑캐와 혼인하느니 차라리 정절을 지키기 위해 자결했다는 내용을 담은 ‘족두리묘’ 이야기, 청으로 가기 직전에 조선 조정에 횡포를 부린 정명수를 혼내준 일화 등이다. 일제강점기에는 본인의 선조가 의순공주를 청으로 보내는 일을 결단코 주도하지 않았다는 후손의 ‘변무’도 나왔다. 이처럼 각자 처한 상황이나 위치에서 의순공주의 삶을 변형하거나 새로운 이야기를 창안했으며 변명도 나온 것이다. 이것이 사람들이 본인 의사와 상관없이 역사의 격랑 속에 휘말린 의순공주 이애숙을 기억하는 방식이며, 패전국의 여성으로서 ‘오랑캐’에게 ‘시집’간 여성이 겪어야 했던 사회적 냉대이자 역사적 평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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