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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한국 근대고고학의 등장과 전개 : 1880-1910년대 국내 신문을 중심으로

        김병철 목포대학교 대학원 2021 국내석사

        RANK : 247807

        지금까지 한국 근대고고학의 연구는 소량의 자료로 인해 최근에서야 시도되고 있는 실정이다. 한국 근대고고학의 연구는 1970~1980년대의 ‘고고학 개론서’ 제작 중 18세기 말~19세기 초 조선을 방문한 서양인의 기록과 1910년대 전후 고고․인류학을 전공한 일본 관학자들의 연구 자료 등 당시 소량의 자료를 통해 처음 논의가 되었다. 1990년대 본격적인 한국 근대고고학의 연구를 시작하였는데 대부분 일제강점기 고고학 발굴 사례와 연구 결과로 집중되었다. 한편, 2000년대부터 한국고고학계 차원에서 당시 생존한 한국고고학 1세대 원로학자의 초창기 활동과 ‘한국고고학 개설서’를 출간하면서 연구하였다. 2010년대 근․현대 매체와 기록물 등 다양한 소재와 함께 각 주제별로 연구가 되었고, 2020년 한국고고학에서도 ‘근대’를 본격적으로 연구하였다. 이러한 점을 근거로 본 연구는 근․현대를 대표하는 4대 매체(잡지ㆍ신문ㆍ라디오ㆍTV) 중 18세기 말~19세기 초 영향력이 가장 높은 국내 신문(『한성순보』ㆍ『독립신문』ㆍ『황성신문』ㆍ『대한매일신보』ㆍ『매일신보』)을 선택하였고, ‘고고학’ 관련 기사를 수집하여 정리를 하였다. 따라서 본 연구는 ‘한국고고학사’를 목표하여 ‘한국 근대고고학의 등장과 전개’라는 주제로 1880-1910년대 국내 신문을 중심으로 살펴보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먼저 ‘신문’이라는 자료에는 ‘고고학 기록 정보’를 많이 가지고 있다. 하지만 유적ㆍ유구ㆍ유물 등 기존의 고고학의 기본적인 물질 연구 대상과는 다르기에 고고학적 개념을 다음과 같이 적용하였다. ① 유적(遺蹟, Site) → 신문(원문), ② 유구(遺構, Features) → 신문 기사(스크랩), ③ 유물(遺物, Artifacts) → 신문 기사의 내용, ④ 연대측정-절대연대 → 신문 기사의 날짜 두 번째, 수집ㆍ정리한 신문에 대하여 『한성순보』ㆍ『독립신문』ㆍ『황성신문』ㆍ『대한매일신보』ㆍ『매일신보』의 현황 및 검토를 하고, 기사의 ‘면’과 ‘단’의 배치를 분석하여 각 신문사마다 연대별로 국내와 해외기사의 배치의 변화가 다르다는 점을 살펴보았다. 그리고 기사 내용에 대하여 ‘지역별 검토(국내ㆍ해외)’, ‘분야별 검토(고고학ㆍ박물관ㆍ문화재ㆍ인류학)’, ‘고고학적 시대구분’, ‘기사종별 검토 및 특징(일반ㆍ기획 기사)’, ‘인물별 검토(한국인ㆍ서양인ㆍ일본인)’, ‘연대별 용어 사용’ 등 다양한 연구 방법으로 분석하였다. 세 번째, 앞선 다양한 분석들을 통해 다음 3시기로 구분이 되는데 이를 ‘고고학’ 및 고고학과 혼용된 ‘역사학’, ‘미술사학’, ‘인류학’, ‘박물관학’ 등 자료와 비교, 대조를 하면서 연구하였다. Ⅰ기(1884~1899년)는 ‘근대고고학의 등장’하는 시기로, 해외 일반 기사를 통해 ‘고고학’ 및 고고학과 혼용된 ‘역사학’, ‘인류학’, ‘박물관학’ 등 근대 학문을 알게 되지만 조선에는 아직 도입되지 않았다. Ⅱ기(1900~1909년)는 ‘근대고고학의 전개Ⅰ’ 시기로, 국내 기사에서는 당시 일제에 맞서기 위해 고대 고구려의 역사 연구를 통한 역사 의식 고취에 실증 자료로 유물, 유적 등 고고학 용어가 사용되는 점을 볼 수 있었지만 1907년 조선의 통치권이 넘어가 1908년 통감부 설치 탓에 대한제국 ‘제실박물관’의 인사들은 일본인으로 채워지는 점을 볼 수 있었다. 해외 기사에서는 각국의 다양한 소식 중 해외박물관 건립과 함께 동양의 유물 수집 관련 내용을 볼 수 있다. 관련하여 한국 유물의 유통과정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고, 일본 ‘제실박물관’ 답사기를 통해 일본 제국주의가 반영된 식민 정치적인 박물관 모습과 영국의 인도를 식민지화하는 과정 속에 ‘고고학’의 정치적인 활용에 대해서도 간접적으로 볼 수 있었다. Ⅲ기(1910~1919년)는 ‘근대고고학의 전개Ⅱ’ 시기로, 1910년 조선을 강점한 일본제국이 1900년대부터 시작한 ‘조선고적조사’ 사업과 관련된 일본 고고ㆍ인류학자들의 연구 활동에 대해 볼 수 있었다. 특히 집안ㆍ평양ㆍ개성ㆍ서울ㆍ부여ㆍ공주ㆍ경주ㆍ김해 등 고도 중심의 연구를 문화적으로 조선식민의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기획 기사를 각 주제별로 여러 기사를 대중 홍보 목적으로 『매일신보』에 여러 편으로 보도하였다. 이상을 종합하여 1880~1910년대 국내 신문을 중심으로 ‘근대고고학의 등장과 전개’에 대해 살펴보았다. 한국에서의 고고학은 1880~1890년대 해외 기사를 통해 인식을 하였지만 아직 도입되지는 않았다. 1900년대 ‘고고학’은 관련 용어를 사용했지만 1910년대 대부분 일본 고고ㆍ인류학 전공의 관학자들의 조선 식민 정치적으로, ‘신문’이라는 매체를 통해 홍보하는 역할로 당시 ‘고고학’을 활용한 점을 볼 수 있었다. 본 연구를 통해 기존 고고학에서 다루지 않는 ‘신문’ 자료로 ‘한국고고학사’를 살펴본 점은 한국고고학의 학문의 시작점을 찾는 가장 중요한 역할이라고 볼 수 있다. 따라서 고고학에서 잘 다루지 않는 소재와 주제에 대해 수집ㆍ정리하여 연구를 한다면 앞으로 한국 근ㆍ현대고고학의 연구 및 학사에 더 발전된 연구가 될 것으로 전망한다. So far, Research on Modern Archaeology in Korea has only been attempted recently due to a Small amount of Data. It was first presented through Small amount of Data at the time, including records of Foreigners visiting Joseon in the late 18th & early 19th centuries or Research data by Japanese Government Scholars majoring in Archaeology & Anthropology around before & after 1910s, While producing ‘An Introduction ot Archaeology’ in the 1970-1980s. It had begun ‘the Research on Modern Archaeology in Korea’ at the 1990s, but most of them were focused on Japanese Colonial Era Archaeological Excavations and Findings. Meanwhile, It has been studied published on ‘Korean Archaeology Overview’ and the Early Activities of The First Generation Elder Scholars of Korean Archaeologists who survived at the time in the 2000s. It was studied on each Subject along with various Materials such as Modern and Contemporary Media and Records in the 2010s. In the 2020, It was Studied in earnest ‘Modernity’ in Korean Archaeology. Based on these Points, This Study Selected the most influential Korean Newspapers(『Hanseong Soonbo』, 『Independent Newspaper』, 『Hwangseong Sinmun』, 『Korean Daily News』 and 『Daily News』) among the Four Major Modern & Contemporary Media(Magazine, Newspaper, Radio and TV). Therefore,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ocus on Korean Newspapers in the 1880-1910s under the theme of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with the aim of ‘Archaeological History in Korea’. Firstly There is a lot of Archaeological Record Information in the ‘Newspaper’. However, the Archaeological Concept was applied as follows because it was different from the basic Materials of Archaeology such as Site, Features and Artifacts. ① Site(遺蹟) → Newspaper(Original Text), ② Features(遺構) → Newspaper Articles(Scrap), ③ Artifacts(遺物) → Content of Newspaper Articles, ④ Dating-Absolute Solidarity → The Date of The Newspaper Article Secondly Korean Newspapers for collected and Organized have been the current status and review. And through the arrangement of ‘Face(Myeon)’ & ‘column(Dan)’ of scrapped Articles, it was examined that there were changes by each Newspaper company, by Age and by Category. In addition, the contents of the Article were analyzed by various Research Metods such as ‘regional(Korean, Overseas)’, ‘Field(Archaeology, Museum, Cultural Property, Anthropology)’, ‘Archaeological Period Classification’, ‘Category’, ‘Person’ and ‘Using Terms by Period’. Finalily Through the various analyzes above,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is divided into three periods. And It was studied by Comparing and Contrasting it with studial Data such as 'History', 'Art History', 'Anthropology' and 'Museology' mixed with 'Archaeology' and Archeology. Period Ⅰ(1884-1899) was a peiod of ‘Emergence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and through General Overseas Articles, It would learn about Modern Studies such as 'History', 'Art History', 'Anthropology' and 'Museology' mixed with 'Archaeology' and Archeology. But It has not yet been introduced to Joseon. Period Ⅱ(1900-1909) was a peiod of ‘Development Ⅰ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In Korean Articles, it was found that Archaeological Terms such as Artifacts and Historical Sites used as Empirical Data to counter the Japanese Colonial Rule. But In 1907, Joseon’s sovereignty was transferred and establishment of the Government-General in 1908, the personnel of the Korean Empirial Museum were filled with Japanese. Also, various news Article from each country can be found about the construction of an overseas musem and the collection of Artifacts from the East. In this regard, it was possible to indirectly see the distribution process of Korean Artifacts. In addition, it can be indirectly seen that Archaeology is used politically through Articles from Japan and India. Period Ⅲ(1910-1919) was a peiod of ‘Development Ⅱ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In Article, The Japanese Empire, which occupied Joseon in 1910, was able to see the research Activities of Japanese Archaeologists and Arthropologists related to the ‘A Study on the Investigations of Historical Sites’ project that began in the 1900s. In particular, various Articles supporting the Legitimacy of Joseon Colonists were reported in the 『Maeil Shinbo』 for the Purpose of Public Relations such as Pyongyang, Kaesong, Seoul, Buyeo, Gongju, Gyeongju and Gimhae. As above, this Study has been considered ‘The Emergence and Development of Modern Archaeology in Korea’ focusing on Korean Newspapers in the 1880-1910s. Archaeology in Korean was initially recognized by Foreign Articles, but has not yet been introduced. After that, Archaeology in Korea has been used as a term related to Archaeology, but it has been used politically in the Joseon by Scholars majoring in Japanese Archaeology & Anthropology in the 1910s. This study exmined the History of Archaeology in Korea as a ‘Newspaper’ material that is not covered by existing Archaeology. This point can be seen as the most important role in finding the Startin Point of Korean Archaeology. Therefore, if research is collected, organized and Conduct on Materials and Subject that are not often covered by Archaeology, it is expected to be more advanced in the Research and Academic History of Modern and Contemporary Archaeology in Korea.

      • 디지털고고학 활성화 방안 연구 : 유럽 사례를 중심으로

        최인화 부산대학교 2022 국내박사

        RANK : 247807

        디지털고고학(Digital Archaeology)은 다양한 기술을 고고학 조사, 연구, 기록, 보존, 복원, 활용 등에 적용하는 것을 말하며, 유럽 등 국외에서는 고고학의 한 분야로 활발하게 연구가 진행되고 있다. 본 연구는 디지털고고학을 선도하고 있는 유럽의 최신 연구 성과와 정책, 제도, 교육 현황 등을 분석하고, 이를 국내에 적용할 수 있는 방안을 검토하고자 하였다. 또한 국내의 디지털고고학 현황과 비교 검토를 통해 우리나라의 고고유산에 더욱 효과적이고 체계적인 디지털 기술 적용 방안과 관련 정책・제도의 방향을 제시하는 것을 목표로 하였다. 분석 결과, 유럽의 디지털고고학은 대학 등 고고학 관련 교육기관과 학계, 연구자를 중심으로 조사, 기록, 복원, 시각화, 전시 등 여러 분야에 다양한 기술을 적용한 연구가 활성화되어 있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관련 정책과 제도, 예산 지원, 교육 또한 체계적으로 뒷받침되어 디지털 기술이 적용된 다양한 프로젝트들이 활발하게 진행되고 있었으며, 연구 성과물 역시 다채롭게 도출되고 있었다. 이런 결과물들은 문화유산에 대한 유럽 공동 네트워크 구축과 산학협력, 일자리 창출, 경제 성장으로 이어지는 긍정적인 효과가 있음을 확인하였다. 반면 국내의 디지털고고학은 여전히 고고학의 기술적 보조 수단으로 인식되고 있으며, 유럽과 비교하여 적용되는 기술과 연구가 제한적이었다. 본 연구는 이러한 분석 결과를 기반으로, 디지털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고고유산에 활용하기 위한 구체적인 방안을 ‘고고학 조사와 연구’, ‘대중을 위한 활용 방안’, ‘정책과 제도’, 세 가지로 구분하여 고찰하였다. 첫째, ‘고고학 조사와 연구 활성화 방안’으로는 더욱 다양한 디지털 기술을 활용하여, 현재까지 진행되지 못했던 여러 가지 고고학적 분석과 해석을 시도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유럽의 사례를 토대로 검토한 국내 적용 방안으로는 ‘라이더를 활용한 지표조사’, ‘원격탐사(항공사진)를 활용한 고도(古都) 등 유적 변화 연구’, ‘3D 스캔을 이용한 유물 등 정밀 조사’, ‘3D 모델링을 활용한 유적 복원과 시각화’, ‘머신러닝을 활용한 유물 자동 검색’, ‘딥러닝을 활용한 유물과 유구 자동 인식’ 등이 있다. 둘째, ‘대중을 위한 디지털고고학 활용 방안’은 기술 중심보다는 문화재의 성격과 대중의 눈높이에 맞는 적합한 기술을 적용하는 것을 제안하였다. 이를 위해서 문화재가 담고 있는 역사와 사람들에 대한 스토리텔링과 문화 소외 계층, 대중의 온・오프라인 참여 확대 등 디지털 대중고고학의 기본 방향을 제시하였다. 대중을 위한 디지털 기술 적용 방안으로 ‘가상현실을 활용한 인터랙티브 체험 콘텐츠’, ‘증강현실을 이용한 문화재 내부 복원’, ‘혼합현실을 활용한 실감 콘텐츠’, ‘3D 스캔, 모델링, 프린팅의 다양한 활용과 통합 플랫폼 마련’, ‘멀티미디어를 활용한 스토리텔링과 생활상 재현’, ‘몰입형 공간 퍼포먼스를 활용한 초실감 콘텐츠’, ‘온라인 콘텐츠 등 다양한 대중 참여 확대 방안’ 등을 제안하였다. 셋째, 디지털고고학 관련 정책과 제도에 관해서는 현행 정책과 제도의 현황과 문제점을 분석하고, 이에 대한 개선 방안을 검토하였다. 정책 개선방안은 크게 6가지 실행방안과 12가지 중점 추진 과제를 제안하였는데, 고고정보 통합 아카이브 구축 등 데이터 통합과 접근성 증대, 데이터 품질 제고, 디지털고고학 및 관련 분야 연구 장려, 전문 인력 양성, 대중 참여 확대 방안 등이 있다. 정책과 제도는 함께 운영되어야 더 큰 시너지 효과를 기대할 수 있으므로, 검토한 정책에 따른 제도 개선방안 7가지를 함께 제시하였다. 제도 개선 주요 내용으로는 디지털고고학 정의와 범위, 디지털 데이터 및 아카이브 구축, 기술별 데이터 표준과 기준 마련, 데이터 및 콘텐츠 모니터링과 평가, 저작권과 재사용 등 정보 공개, 전담 조직과 인력, 예산에 관한 사항 등이 있다. 디지털고고학의 활성화를 위해서 고고학계의 관련 분야 연구와 관계 부처의 정책과 제도 그리고 재정적 지원, 대학의 전공자 교육 등이 모두 유기적으로 연계되어야 한다는 결론을 얻을 수 있었다. 앞으로는 유럽의 여러 사례와 같이 디지털 기술을 더욱 효과적으로 활용하여, 고고유산을 체계적이고 효율적으로 조사, 연구, 보존, 복원, 전시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고고학자료를 활용한 교육콘텐츠화 방안 연구

        신경숙 목포대학교 2014 국내박사

        RANK : 247807

        본 연구는 고고학 자료를 활용한 교육콘텐츠화 방안에 대한 연구이다. 고고유산이 가지고 있는 유적과 유물에 대한 지식과 기능을 이해하고 고고학 자료에 대한 새로운 유산적 가치를 체험과 교육활동 등의 교육콘텐츠로 연결시키고자 한 것이다. 이를 위해 대표적인 고고학 자료인 화순고인돌유적 교육콘텐츠를 분석하고, 국내외에서 진행되고 있는 교육콘텐츠와 비교분석을 통해 교육콘텐츠를 통한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국내외 고고유적 박물관, 대학박물관, 문화재전문기관, 학교 등 교육기관 교육콘텐츠 분석 결과, 박물관에서는 대상별, 수준별 교육이 적극적으로 활용되어야 하며, 유적현장에서는 발굴체험과 같은 창의적 공간으로, 학교 등 교육현장에서는 방문교육이나 방과후학교 등의 특성화 교육콘텐츠를 운영할 필요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외국의 교육콘텐츠 활용사례 비교분석에서는 모두 대상별, 연령별 차별화된 교육이 이루어지며, 무엇보다도 모든 데이터는 실험고고학적인 자료에 바탕을 두고 진행하였다는 점이다. 이는 고고학 자료를 교육콘텐츠화 할 때, 그 콘텐츠가 역사성을 갖고 생명력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고고학의 핵심가치에 대한 연구가 선행되어야 함을 보여주는 사례라 할 것이다. 고고학 자료의 교육콘텐츠 실태 분석을 통해 콘텐츠 개발의 기본원리와 목표, 유형과 구조 등의 기본구상을 마련하였다. 교육콘텐츠화의 최종 목적은 고고유산의 가치 확대를 통한 정체성 확보에 두고, 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반영한 핵심가치 강화 연구와 인프라를 이용한 효율적 활성화 도모, 그리고 활성화를 위한 실행시스템 구축을 실행목표로 설정하였다. 다음으로 화순고인돌유적 교육콘텐츠의 실태분석을 통해 향후 교육콘텐츠 개발과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화순고인돌유적에서 진행된 대표적인 교육콘텐츠는 선사체험과 고인돌축제라 할 수 있으며 2002년 이후 지속적으로 진행되어 오고 있다. 2005년부터 시작된 선사체험 교육콘텐츠는 청동기시대 사람들의 생활모습을 주제로 고고학적 연구 성과와 실험고고학적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진행되었고 총 221회에 22,516명이 참여하였다. 실태분석 결과 3기로 나눌 수 있으며 1기는 화순고인돌축제 이후 진행된 교육콘텐츠로 가족단위 중심의 선사체험이며, 2기는 1기의 가족중심에서 학교 등 단체로의 교육콘텐츠가 확대되면서 초등학교 체험학습 중심의 콘텐츠가 진행된 것을 볼 수 있다. 3기는 <가족과 함께하는 시간여행>과 <체험하며 배우는 고인돌 문화학교> 등의 대상별 교육콘텐츠가 정착하는 단계로 구분하였다. 분석결과를 종합하면 화순고인돌유적 선사체험에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는 대상은 초등학교 학생들이며, 가족의 경우 광주에서 가장 많이 참여하고 있는 것으로 분석되었다. 이러한 분석결과와 국내외 관련기관에서의 실태분석 비교를 통해 화순고인돌유적 교육콘텐츠 개발과 활성화 방안을 마련하였다. 첫째, 교육콘텐츠의 개발과 운영에는 에듀케이터(Educator)와 전문강사, 그리고 자원봉사자로 구성된 전담 기획운영팀과 관련기관과 전문가 등과의 지속적인 피드백을 통해 교육콘텐츠가 개발되고 운영되어야 한다. 둘째, 교육콘텐츠 기획과 개발시 가장 먼저 고인돌과 고고학에 대한 지속적인 연구 성과와 실험고고학적 자료를 지속적으로 업데이트 되어야 하는데 이들의 연구성과에 따라 교육콘텐츠가 새롭게 이해되고 해석될 수 있기 때문이다. 셋째, 교육콘텐츠 활용을 위한 인프라구축으로 야외박물관으로서의 화순고인돌유적과 고인돌 문화공원과 선사마을 조성으로 교육콘텐츠 적용을 위한 기반시석을 마련하여야 한다. 넷째, 효율적 활용인데 분석 결과를 토대로 교육콘텐츠를 개발하고 다양한 계층과 대상으로 세분하여 적용하여야 한다. 가족단위의 경우 가족 간의 협동과 문제해결, 문화에 대한 이해를 기반으로 콘텐츠가 개발되어야 하며, 초등학교와 중학교 대상 교육콘텐츠의 경우도 학교 교과과정과 연계되거나 또래 집단과의 교감 및 이해, 그리고 협동을 중심으로 탐구학습 형태의 콘텐츠가 마련되어야 한다. 화순고인돌유적 교육콘텐츠를 통한 활성화는 전담 기획운영팀을 통한 교육콘텐츠가 기획되고 개발되어야 하며, 이러한 기획의 바탕에는 고고학적인 연구 성과와 실험고고학적인 연구결과들이 지속적으로 업데이트가 되어야 한다. 또한 교육콘텐츠 개발과 적용은 대상별, 계층별로 세분화시켜 적용되어야 하며 이들 교육콘텐츠는 전통문화 이해의 저변을 확대하는 평생교육기관으로서 지속적으로 운영되어야 한다. 마지막으로 역사와 문화에 풍부한 정보를 담고 있는 고고학 자료는 다양한 교육활동과 통합적 교육방식, 지속가능한 발전 교육측면에서 접근함으로써 일반 대중의 가치관, 사회관 형성에 도움을 주어 가치를 재창조하는 창조적 인간으로 성장하도록 그 방향을 설정하여야 한다.

      • 考古學과 ICT 融合活用 硏究

        안형기 고려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박사

        RANK : 247807

        정보 통신 기술로 알려진 ICT 기술은 우리 사회를 급속도로 디지털화하고 있다. 학문, 산업 등 여러 분야에서 지속적으로 영향을 끼치고 있으며 고고학의 경우도 예외는 아니다. 현재 디지털 장비들의 도입은 고고학 연구와 현장조사의 질적 · 양적 발전에 상당한 기여를 하고 있다. 2000년대 초중반 이후 급속도로 도입되기 시작한 디지털 기기를 활용한 조사 및 연구방법들의 활용사례는 점차 늘어나고 있는 추세이다. 고고학과 디지털의 융합은 지속적으로 시도되고 있으며 이러한 현상은 앞으로 더욱 심화될 것으로 보인다. 그렇다고 해서 기존의 고고학 연구방법이나 조사방법이 비판받거나 급격히 변화해야만 된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다만 현재와 같이 디지털 기술들이 도입되는 현상이 앞으로도 계속되는 이상 고고학계에서 디지털 기술이나 IT · ICT에 대해 조금 더 적극적인 관심을 가져야 할 필요성이 있는 것이다. IT와 ICT와 같은 디지털 분야에 대해 이해하고 관련 기술들을 어떻게 고고학에 응용할 수 있는지에 대해 연구하는 분야를 소위 ‘디지털 고고학(Digital Archaeology)이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이다. 디지털 고고학은 고고학 분야에서 사용되어지는 디지털 하드웨어 및 소프트웨어, 그리고 그것을 이용해서 작성된 고고학적 결과물, 콘텐츠, 제작과정과 이러한 작업들을 실시하기 위해 수반되는 연구들까지 포함한다. 이에 따라 최근 유적이나 유물의 3차원 디지털 스캔이나 VR, AR을 활용하여 고고학과 ICT 기술을 융합하기 위한 많은 노력이 시도되고 있지만 아직까지 일선 발굴기관이나 연구소, 관련 학과에서는 학제적인 공조나 기술도입, 교육에 대한 노력은 부족한 편이다. 따라서 고고학과 ICT 같은 디지털 기술을 어떻게 융합시키고 함께 발전시켜야 할지에 대한 고민이 필요하다. 그러나 ICT 기술의 경우 초기 도입비용이 많이 발생한다는 단점이 있으며, 현재 고고학계에서도 ICT 기술에 대해 연구할 만한 인력은 부족한 편이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고는 인문학인 고고학이 ICT와 같은 상이한 학문과 어떻게 융합될 수 있는지 고민하기 위해 작성되었다. 이 글의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이 크게 세 개의 단락으로 요약할 수 있다. 먼저 ICT의 정의와 디지털 기록의 이해에 관해 서술하였다. ICT는 우리가 흔히 접하는 IT(Information and Technology)에 커뮤니케이션(Communication)을 포함시킨 의미로 해석할 수 있다. 문화재 분야도 예외는 아니어서 매년 다양한 분야의 IT · ICT 기술이 고고학 · 문화재 · 박물관 등에 접목되고 있다. 박물관은 증강현실(AR)이나 가상현실(VR)과 같은 ICT 기술을 도입하여 관객들에게 흥미를 유발하는 전시를 도입하고 있으며, 고고학 현장에서도 3D 스캔이나 사진실측, 드론과 같은 기술들을 이용해 발굴된 유적이나 유물을 콘텐츠로 활용할 수 있는 디지털 기록물로 제작하고 있다. 이러한 상황변화에 알맞게 디지털 유산이라는 개념이 새롭게 등장하였다. 고고학, 역사학 등에서 의미하는 디지털 유산을 정의한다면 발굴된 유구와 유물을 포함한 유적 전체의 디지털 자료와 관련된 실측도나 그래픽 결과물, 영상물과 같은 디지털 기록물, 그리고 과거 아날로그로 기록된 자료들로부터 디지털화된 것 일체를 의미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두 번째로 고고자료를 바탕으로 디지털 기록의 생산과 관련된 내용이다. 문화재청과 국립문화재연구소와 같은 정부기관에서 주도된 디지털 기록 사업은 고고학계에도 많은 영향을 주었다. 이에 2000년대 이후 많은 매장문화재 발굴기관에서는 발굴된 유적이나 유구를 대상으로 디지털 기록 및 디지털 기록물을 획득하려고 시도하였다. 본고에서는 디지털 기록의 확보수단으로 사진실측 및 2D 도면을 기반으로 한 3D 모델링에 대해 알아보았다. 또한, 지형도를 이용하여 제작한 디지털 기록과 고지형환경분석을 이용하여 과거의 지형복원 활용방법에 대해 소개하였다. 이와 같은 지형 복원을 바탕으로 과거 지형의 전체적인 지형을 복원할 수 있기 때문에 유적의 발굴 · 보존 · 정비 · 복원 · 활용의 중장기계획 수립 및 정책연구 기반을 조성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마지막으로 고고학과 ICT 기술의 융합에 대해 소개하였다. AR(증강현실), VR(가상현실), 3D 프린터, 빅 데이터 등 최신 ICT 기술이 어떻게 고고학 분야에서 응용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특히 ICT 전문가나 관련 교육을 받지 못하더라도 손쉽게 ICT 관련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는 기술과 장비, 방법 등에 대해서 중점적으로 소개하였다. ICT 기술을 이용한 고고자료의 활용은 대중들의 고고학에 대한 이해를 더욱 촉진시킬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고고학과 ICT 기술 융합의 목표인 문화콘텐츠 및 고고자료의 문화콘텐츠화 방안에 대해 살펴보았다. 먼저 문화콘텐츠의 정의와 고고학 관련 문화콘텐츠에 대해 알아보았으며, 고고자료를 소재로 한 문화콘텐츠의 확산을 위한 방법을 고민해 보았다. 먼저 대중고고학을 이용하여 일반인들에게 적극적인 접근을 할 필요가 있으며 고고학 소재의 콘텐츠에 고고학계가 자문과 같은 행동을 함으로써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방법이 있다. 다른 하나의 방법은 전문적인 고고학 지식을 가지고 ICT 기술과 같은 디지털 분야를 활용할 수 있는 인재의 육성이다. 이를 위해서는 대학 교육의 다양화를 이야기 할 수 있다. 기존의 학제를 유지하는 동시에 2 트랙 전략으로써 IT · ICT와 같은 과목을 학습하여 새로운 기술에 대한 이해와 동시에 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는 능력과 사고를 기르는 것이다. 이것은 체계화된 고고학적 이론 교육을 바탕으로 IT · ICT의 실용적 지식에 대해 교육을 받음으로써 인문학적 소양을 바탕으로 다양한 문화산업에 적용할 수 있는 콘텐츠를 기획하고 제작할 수 있는 능력을 키우기 위함이다. 이런 2 트랙 전략은 고고학뿐만 아니라 새로운 분야로 도전할 수 있는 동기를 학생들에게 부여해 줌으로써 고고학 관련 전공자들의 졸업 후에 있어서 폭넓은 진로설정 및 취업선택을 가능하게 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디지털 기술을 교육받은 고고학 전공자가 있다면 디지털 데이터 획득 및 연구과정에서 고고학자들이 충분한 영향력을 발휘할 수 있으며, 학제 간 통합 · 융합연구를 위한 상호보완적인 피드백으로 더욱 발전적인 교육과 연구를 지향할 수 있을 것이다. 최근 들어 일어나고 있는 대중고고학에 대한 관심은 우리나라의 고고학은 그동안의 발굴조사에 치우쳤던 것에서 벗어나 새로운 역할을 찾아야만 한다는 것에 대부분의 고고학자들의 암묵적인 동의라고 볼 수 있다. 이런 상황에서 ICT 기술은 고고학에 대한 대중의 관심일 끌 수 있는 강력한 수단이며, 고고학에 대한 흥미를 지속시킬 수 있는 방법은 콘텐츠일 것이다. ICT라는 새로운 기술을 가져도 그 밑바탕에 고고학적 요소가 있어야만 수준 높은 콘텐츠를 생산할 수 있다. 따라서 고고학계도 이를 위해 적극적으로 체질을 변화시켜야만 된다고 생각한다. 발굴전문기관들은 다양한 프로그램을 통해 대중들과 소통하여 고고학이라는 학문적 활동을 이용하여 얻은 지식과 가치를 널리 퍼트려야 할 것이다. 고고학계도 기존의 박물관 위주였던 콘텐츠 제작에서 벗어나 다양한 문화콘텐츠를 개발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할 것이다. 또한, 학교에서는 고고학적 지식과 ICT 기술을 가지고 문화콘텐츠 발달에 기여할 수 있는 인재를 양성하여 다양한 분야에 고고학적 지식을 가진 재원을 공급해야 한다. 대중성을 갖추지 못한 학문은 사장될 수밖에 없다. 고고자료의 문화콘텐츠 개발은 대중들에게 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무엇인가를 알릴 수 있는 효과적인 수단이자 고고학을 중흥할 수 있는 새로운 기폭제가 될 수 있다. 앞으로 고고학계의 다양한 논의와 관심, 그리고 관련 분야에 대한 연구와 투자가 요구되는 시점이다.

      • 신문 저널리즘으로 본 한국고고학의 흐름과 대중화

        조혁연 충북대학교 대학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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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금까지 한국고고학은 일반대중을 만날 수 있는 통로로 ‘신문 저널리즘’을 상대적으로 선호해 왔다. 그러나 한국고고학계에는 이를 다룬 학위논문이나 학술서가 존재하지 않고 있다. 신문에 난 고고학 기사는 ‘타자가 기록한 한국고고학 일지’로 볼 수 있어, 객관성 확보 차원에서도 이를 살펴보는 것이 필요하다. 이번 논문은 여러 신문 중 ‘조선일보’를 중심으로 살펴봤다. 이는 역사가 가장 오래 됐고, 인터넷 키워드 검색 환경을 가장 잘 갖추고 있기 때문이다. 조선일보는 1920~2007년까지 ‘16만건’ 정도의 기사를 생산했다고 자체적으로 밝히고 있다. 이중 고고학과 관련된 기사를 전수적으로 추출하기 위해 검색창에 아래 키워드를 입력했다. X축에는 유물, 유적, 고분, 패총, 왕릉, 청자, 금관, 성곽 등 50여개 키워드를 입력했다. 반면 Y축에는 선사, 구석기, 신석기, 청동기, 고려, 조선 등 시대성을 지닌 키워드를 입력했다. 이런 방식을 취한 결과, 대부분의 기사들이 가상의 X, Y축에서 만나는 것으로 확인됐다. 이렇게 추출된 기사를 데이터 값을 얻기 위해 발굴, 파생, 기타 기사형 등 크게 3형식으로 분류했다. 그리고 발굴은 연대에 따라 다시 일제강점기-1950년대-1960년대-1970년대-1980년대-1990년대-2천년대(2000~2007) 순으로 배열했다. 이는 고고학 물질에는 시간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또 지역성을 알아보기 위해 서울, 충북, 전북, 경북, 등 15개 광역단체로 분류했다. 이는 고고학 물질에는 장소성이 있음을 전제로 한 것이다. 그 결과, 조선일보 1920년대 신문 발행 이후 총 3001건의 고고학 내용을 기사화한 것으로 조사됐다. 이는 총 노출수 16만여건의 대략 1.8%에 해당하는 수준이다. 이중 발굴기사 1천38건, 파생 127건, 기타-기사형 1천836건 등으로. 기타-기사형이 발굴보다 798건 더 많았다. 이를 종합하면 곡절이 있었음에도 불구, 신라가 260건으로 1위, 그 다음은 고려(111건), 백제(104건), 조선시대(76건) 순으로 나타났다. 지역 역시 시대와 흐름을 같이 해 경북이 296건으로 1위를 차지했다. 기사유형은 단순전달, 기타, 화제형 순서로 많은 가운데 학술형은 4위를 차지했다. 신문 저널리즘에 노출된 고고학 관련 기사는 한국고고학 80여년사의 흐름을 상식선에서 반영하고 있으나 그 행간에는 의미 있는 사례가 많이 관찰됐다. 고고학 기사가 1면 톱기사로 가장 많이 올라간 때는 박정희 전 대통령 통치기간인 1970년대인 것으로 나타났다. 따라서 신문에 보도된 내용으로만 보면 1970년대가 한국고고학의 최성기였던 것으로 조사됐다. 그러나 당시 발굴과 보도 태도는 외양성, 공예성, 명품성 위주의 발굴을 지나치게 추구하면서 문화해석·복원에 게으른 면을 노출시켰다. 특히 당시 조선일보는 정치권력을 자발적으로 의식하면서 고고학 현장에 과도하게 개입했고, 외양이 화려한 명품유물만 너무 부각시켰다. 한국고고학은 90년대를 기점으로 무덤유적에서 빠져 나와, 생활유적 발굴을 중시하기 시작했다. 신문 저널리즘도 이 시기를 전후로 이른바 비주얼 편집으로 전환하기 시작했다. 이는 고고학을 재미있는 학문, 세련된 학문, 생활적인 학문이라는 인식을 심어주면서 대중화에 기여했다. 그러나 한국고고학은 난해한 용어, 한문투 표현 등 상아탑 안에 그대로 안주하면서 그들만의 리그, 그들만의 토론회, 그들만의 조사위원회라는 소리를 듣고 있다. 궁극적으로 한국고고학이 국민들의 사랑을 받으려면 어린이부터 성인까지 그 저변이 더욱 확대돼야 한다. 그래야 한국 사회가 필요로 하는 학문, 현재의 학문으로 거듭날 수 있다. The archaeology in Korea has met the public through‘Newspaper Journalism’ relatively more than any other type of media journalism. However, the Korean archaeology has never had theses or academic books dealing with it. Therefore, it is the time to study archaeology journalism to achieve the popularization of archaeology. Especially, the articles on archaeology in newspapers can be regarded as a typed journal of Korean archaeology so that it is needed to strengthen relativity by studying archaeology journalism. The selection of Chosun-ilbo for this study is because it is the oldest newspaper in Korea and also has a well-organized internet keyword-searching tool. Chosun-ilbo self-confirmed that it had released 160,000 articles from 1920 to 2007. To implement a complete survey among them, I put the 50 key-words related to remains such as historic sites, cultural properties, crowns, castles, and celadon porcelain on the axle X(horizontal) of the searching window, and words related to era or times such as Koguryo, Packje, Shinla, and Chosun on the axle Y(vertical). Such empirical tests resulted that the most of the articles are met in the hypothetical space between X and Y. Some omitted articles were returned to the other axle to realize the unification of data in X and Y. Then, those data were categorized to three parts such as the type of excavation, the type of derivation, and the type of other articles to get scores of data. In addition, the type of excavation was re-ordered in turns of times such as Japanese Occupation period, 1950s, 1960s, 1970s, 1980s, 1990s, and 2000s(2000-2007). There is an assumption that Archaeological materials have characteristics of time in themselves. With respect to the regional aspects, data were categorized to 15 metropolitan areas such as Seoul, Chungbuk, and so on, which was assumed that archaeological materials have characteristics of place. These tests showed that Chosun-ilbo released total 3001 articles related to archaeology since 1920s, which represents 1.8 % of total articles of this newspaper. Among them, the type of excavation explained for 1038 articles, the type of derivation for 127, and the others for 1836. Therefore, the others represent 798 articles more than the type of excavation. Meanwhile, in terms of orders based on times, articles related to Shinla were 260, the most, Korea 111, Backjae 104, and Chosun 76. In terms of region, articles related to Kyungbuk were 296, the most, and it is consistent with those related to times. With respect to types of article, simple delivery of information, others, topics, and finally academic type in order. Articles related to archaeology exposed to Newspaper journalism reflect 80 years old history of Korean archaeology in the level of general knowledge, but at the same time, show some meaningful examples implicitly. The time in which the most archaeology articles were taken to headlines on newspapers was 1970s - Mr. Jeonghee Park󰡐s era. Therefore, if simply based on the frequencies of article release, the period was the best for Korean archaeology. However, in that time, unfortunately reports of newspapers focused more on material aspects than cultural interpretation and restoration. Most of all, Chosun deliberately tried to intervene activities of Korean archaeology for political issues and emphasized only masterpieces too much and external aspects. As a result, it is still blamed in the name of newspaper archaeology. Especially, it is necessary to consider more seriously whether the archaeology fields should be influenced by the politics. In addition, many statistical evidences are observed in terms of intervening of regional sentiments to articles on archaeology. The Korean archaeology began to lay stress on excavating living remains, with staying away from focusing on tomb-remains from the 90’s. Newspaper journalism took a visual editing method to reflect such change. These contributed to the popularization of archaeology by making the public accept archaeology as a attractive, accomplished, and life-friendly study. However, the Korean archaeology is blamed for its isolation from the public because it has enjoyed such as its obscure terms, Chinese style of expression, and too many foot-notes for itself. It has been told that it exists and studies for itself. In other words, it has lack of channels to communicate with the public. It is necessary that the base for Korean archaeology should be more enlarged from little kids to adults so as to be loved by the public. Only if so, the Korean archaeology can be developed to what Korean society need, and the contemporary study.

      • 문화유산을 활용한 지역축제 활성화 연구

        정원기 목포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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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91년 지방의회의 부활을 시작으로 지방화시대를 맞이하면서 각 지자체에서는 지역의 문화를 알리면서 관광산업의 경쟁력을 높이기 위한 수단으로 지역축제를 시도하게 되었다. 지방자치단체가 시도한 수많은 지역축제 중 고고학 발굴성과를 기반으로 한 축제들이 전국 곳곳에서 성공을 거둠으로서 고고학 관련 축제도 문화유산 활용방안 중의 하나로 자리 잡고 있다. 여기서는 고고학 자원을 활용하여 시도되는 고고학축제의 실패와 성공사례를 통해서 경쟁력 있는 고고학을 만들고, 지역경제에 도움이 되기 위해서 지방자치단체와 학계 그리고 지역민의 관점에서 어떠한 정책적 기반이 요구되는지를 살펴보는 것에 금번 연구배경이 있다. 이번 연구의 현지조사 대상은 전국 1,200여개의 지역축제 중에서 고고학 자료를 이용하여 시도하고 있는 12개 축제로 압축한 다음, 고고학전문가의 자문을 받았거나 직접 참여하고 있는 ‘전곡리 구석기축제’와 ‘화순 고인돌 축제’ 그리고 ‘강진 청자문화축제’ 등 3개소를 선정하여 현지방문을 통해 조사하였다. 현지 조사된 3개소는 잘된 사례와 잘못된 사례의 심층 분석을 통해 관주도 시각이 아닌 공동체적 시각으로 합리적이고 실행 가능한 정책적인 대안을 다음과 같이 제시하였다. 첫째, 고고학 주간을 선포하여 문화유산의 중요성을 지역민에게 알리고 지역문화의 우수성을 알리는 계기로 삼아야 한다. 둘째, 문화유산 교육정책을 체계화시켜 초등교육부터 차근차근 문화전문 인재를 육성하고 공교육의 확대와 함께 일반적인 대중교육을 병행하여야 한다. 셋째, 대규모 축제참가자를 체험을 통해 동시에 만족시켜줄 수 있고 고고학적 가설을 검증할 수 있는 실험고고학 프로그램을 도입하여야 한다. 넷째, 문화유산을 활용한 지역축제 활성화를 위해서는 자치단체-학계-지역민의 유기적인 협조체계를 완성시켜 상호 Win-Win-Win의 결과를 도출시켜야 한다. 다섯째, 지방자치단체장의 전횡을 막기 위한 방편의 하나로 지방자치단체 조례를 지정하여 축제의 안정화를 기하여야 한다. 여섯째, 축제주관의 형태를 두 단계로 정하여 1단계는 관주도로 추진하여 기반시설 확보와 축제의 안정화를 기한다음 2단계 안정기에 접어들면 민간주도로 축제를 전환시켜 지역민이 중심이 되어 축제를 이끌어 가야한다. 일곱째, 고고학축제의 광역화를 추진하여 참가자에게 한반도의 고대문화를 이해하기 쉽도록 축제를 통합하여 기획하여야 한다. 마지막으로 미래지향적인 축제가 되기 위해서는 고고학에 문화콘텐츠를 접목하고 관광상품을 개발하여 지역경제 활성화에 도움이 되어야 하겠다. 이 논문에서 제안되는 문화유산 활용시스템 개선방안과 고고학 관련 지역축제의 활성화 방안들이 미력하나마 고고학의 보조적인 연구방법의 하나로서 기여되기를 바라며 국민을 고고학 속으로 초대하여 물질적 자료를 어떻게 보존하고 활용할 것인가에 대한 연구는 우리 모두의 과제라고 할 수 있다. Since the re-introduction of local council in 1991, each local government has attempted to hold local festival to spread out local culture and to develop competitiveness of tourism industry. Many local festivals, archaeology festivals based on excavation results achieved success in many areas, and thus became one of favorites. Here, the study background is to examine through failures and successes to develop competitive archeology, and to explore any basis of policy to assist local economy, local government, academics and local residents. Among 1,200 local festivals, 12 festivals utilizing archaeology resources and finally 3 festivals including 'Yeoncheon Jeongok-ri Paleolithic Festival‘ , 'Hwasun Dolmen Festival' and 'Gangjin celadon Festival' were selected and investigated. Upon investigating three festivals, in-depth analysis of good and bad cases is made to suggest applicable alternatives with communal views and government - led view. First, it is important to spread out local culture's merit to local residents by appointing an archaeology week. Second, it is important to nurture cultural asset specialized personnel from element education and general education should be accompanied to expand public education. Third, experimental archaeological program shall be introduced to satisfy participants and to verify archaeological hypothesis. Fourth, Win-Win-Win should be induced by organically cooperating between local government - academics - local residents to utilize cultural heritage. Fifth, festival's stability shall be maintained by appointing ordinances of local government as a means to prevent abuse of the head of local government. Sixth, two stages of festival organization should be promoted. The first stage The first stage should be initiated by local government to stabilize festivals and to secure infrastructure, and the second stage should be transferred to private initiatives. Seventh, festival should be integrated and planned to understand ancient culture of Korean peninsula to progress metropolitan of archaeology festivals. Finally, culture contents should be attached to archeology to develop future oriented festival, and it should be helpful to vitalize local economy by developing tourism products. It is hoped that the suggested cultural heritage utilization system and archeological festival should contribute to supplementary research method of archaeology and it is our task how to keep and utilize physical materials by inviting people into archaeology.

      • IT기반 고고자료 활용방안 연구

        정상훈 忠南大學校 大學院 202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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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논문은 IT기반 고고자료 활용방안으로 디지털고고학이라는 틀안에서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기술을 중심으로 종합적으로 분석하였다. 아직은 생소한 디지털고고학이라는 학문이 무엇인지 살펴보고 국내 실정에 맞게 설명하고자 하였다. 더불어 고고학 자료를 활용한 증강현실 콘텐츠의 부재로 인해 실제 제작을 통해 향후 제작 가능성을 검토하였다. 우선 현재 통용되고 있는 디지털고고학의 기술 분류는 자료의 수집부터 전시교육 단계까지를 계단식으로 분류하였다. 이를 국내 디지털고고학의 상황에 맞게 자료의 수집 및 분석단계와 자료의 가공 및 활용 2단계로 구분지었고, 세분화를 통해 각 단계별 기술 분류를 재시도하였다. 특히 활용 측면에서 고고학 자료를 체험형 콘텐츠로 규정하고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콘텐츠가 위주로 분석·시도하였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콘텐츠가 어떤 기술을 통해 어떻게 고고학 자료에 적용되는지 살펴보았다. 특히 매장문화재를 대상으로 하는 사례는 국내외 사례를 조사하였다. 국내 고고학 자료 가상현실 콘텐츠는 국보급의 주요 유적을 대상으로 하는 3D VR, 일반 유적을 대상으로 하는 파노라마 VR 그리고 기타 3D나 영상 VR 등으로 구분된다. 발굴조사유적의 경우는 제작비용과 시간으로 인해 대부분 파노라마VR을 선호하고 있는 것으로 파악되었다. 증강현실 콘텐츠는 3D로 제작되어야 하는 점으로 인해 가상현실 콘텐츠에 비해 많은 시도가 이루어지지는 않았다. 국내 증강현실 콘텐츠는 모두 사찰을 기준으로 제작이 되었고 인터랙션 체험이 가능한 회암사지 콘텐츠를 제외하면 모두 관찰 위주의 콘텐츠를 제공하고 있다. 가상현실 콘텐츠는 발굴조사유적을 대상으로 하는 경우, 어떤 플랫폼을 결과물을 보여줄지 여부, 3D모델을 활용하는 경우 등의 예를 들어 제작에 대한 제언을 시도하였으며, 증강현실 콘텐츠는 고고학 자료를 이용한 사례가 전세계적으로 드문 경우라 <내 손안의 고고유산>이라는 제목으로 어플리케이션 제작을 직접 시도하였다. 가상현실과 증강현실 콘텐츠 활용방안에 대해서는 직접적인 활용에 대한 예시보다는 콘텐츠 데이터의 특성, 콘텐츠를 사용하는 장소와 이용자의 특성, 최종결과물이 보여지는 기기에 대한 고민과 콘텐츠 활용 목적에 따라 활용 방안이 달라질 수 있다는 점을 명시하였다. 결론적으로 디지털고고학의 체험형 콘텐츠인 가상증강현실 콘텐츠의 장단점과 향후 가능성을 확인하였다. 빠르게 변화하는 디지털트렌드에 발맞추어 고고학 자료를 활용한 디지털콘텐츠가 필요하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This thesis comprehensively analyzes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technologies within the framework of digital archeology as an IT-based archaeological utilization plan. I tried to find out what digital archaeology is, which is still unfamiliar, and explain it according to the domestic situation. In addition, due to the absence of augmented reality content using archaeological data, the possibility of future production was reviewed through actual production. First of all, the technical classification of digital archeology currently in use classified the stages from data collection to exhibition education stage. This was divided into two stages: the data collection and analysis stage and the data processing and utilization stage, in accordance with the situation of domestic digital archeology, and a re-attempt to classify technology at each stage through subdivision. In particular, in terms of utilization, archaeological data were defined as experiential contents, and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contents were mainly analyzed and attempted. We looked at how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contents are applied to archaeological data through which technology. In particular, domestic and foreign cases were investigated for buried cultural properties. Domestic archaeological virtual reality content is divided into 3D VR for major ruins of the national treasure level, panoramic VR for general ruins, and other 3D or video VR. In the case of excavation research sites, it was found that most of them preferred panoramic VR due to the production cost and time. Due to the fact that augmented reality content has to be produced in 3D, not many attempts have been made compared to virtual reality content. Domestic augmented reality contents are all produced based on temples, and all provide observation-oriented contents except for Hoeamsaji contents where interaction experience is possible. For virtual reality content, suggestions for production were attempted, for example, in the case of excavation research ruins, which platform to show the results, and in case of using 3D models. Since this is a rare case worldwide, I tried to create an application under the title <Ancient Heritage in My Hand>. Regarding the method of utilizing virtual reality and augmented reality contents, rather than examples of direct utilization, the utilization method will vary depending on the characteristics of content data, the location and user characteristics of content use, the device on which the final result is displayed, and the purpose of content utilization. It was stated that it can. In conclusion, the advantages and disadvantages of virtual augmented reality contents, which are experiential contents of digital archaeology, and future possibilities were confirmed. It seems clear that digital contents using archaeological data are needed to keep pace with the rapidly changing digital trend.

      • 韓國 古代 律令의 考古學的 硏究

        산본효문 釜山大學校 2005 국내박사

        RANK : 247791

        중국을 중심으로 한 고대 동아시아 세계에 있어 성숙된 古代國家의 완성은 明文化된 法制의 확립과 그에 따른 중앙집권체제의 성립, 각종 통치제도의 정비 등의 측면과 밀접하게 관련된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면 물질문화의 면에서도 그 전 단계까지의 漸移的인 변천과는 달리 어느 정도의 劃期性이 나타날 것으로 예상되며, 그 시점 이후의 자료를 추출하고 종합적으로 분석함으로써 당시 정치상의 제도적인 측면이 조명될 것으로 추측된다. 본 연구는 물질자료로 남기 어려운 고대 정치제도의 제 측면을 고고학적인 방법으로 복원하는 것을 최종적인 목적으로 하였다. 구체적인 연구 대상 시대와 지역은 삼국 통일을 전후하는 시기의 한반도로, 특히 6~7세기대 멸망 직전 시기의 백제와 통일을 추진하고 달성한 신라·통일신라로 설정하였다. 이 시점은 중국과의 교류·교섭이 특별히 활발해진 시기로서 각종 문화현상과 더불어 정치제도적인 측면에서도 중국의 영향이 크게 작용된 단계이다. 특히 체계적인 法制인 律令의 시행을 큰 특징으로 하는 隋唐帝國의 성립은 백제·신라의 국내 통치방식에 적지 않은 영향을 미친 것으로 생각되며, 그러한 사정은 고고자료에도 반영되어 있을 가능성이 높다고 판단된다. 본 연구에서는 ① 중국의 정치제도 가운데 구체적으로 어떤 부분이 한반도 각국에 수용(繼受)되었는가, 바꾸어 발하면 중국의 직접적인 영향을 받은 부분은 무엇인가 하는 傳受主體(중국측)의 연구시각, ② 정치제도를 수용한 한반도 각국이 그것을 어떻게 자국의 사정에 맞게 取捨選擇하고 개편해서 이용했는가 하는 繼受主體(한반도측)의 연구시각, ③ 그 수용 방법과 양상에 한반도를 포함한 동아시아의 각 국가마다 어떤 차이가 있었고 그 차이가 무엇에 기인하는가 하는 客體比較的인 연구시각이라는 세 가지 관점을 유지하면서 논의를 진전시켰다. 물질자료를 우선적인 분석 대상으로 하는 본 연구에서는 당시의 복합적인 고고학적 양상에 대한 검토를 토대로 律令의 일단을 도출하기 위해 (1)考古學的 分析→(2)文獻史料·時代狀況과의 對比→(3)政治相 復元이라는 연구 순서를 밟게 되었다. 현존하는 물질자료의 검토를 전제로 한 경우, 해명 가능한 내용 중의 하나가 유물이나 유구의 계층성에 근거를 둔 官制와 그 관련 부분에 대한 고찰인데, 고고학적 연구가 가장 유효적으로 이루어질 수 있는 분야라고 판단된다. 律令을 기초 통치방식으로 채택한 국가(소위 律令國家)의 가장 큰 특징이 다수의 관위 보유자(官人, 官僚)와 그것을 통치하기 위한 官僚機構의 존재이기 때문에, 官制는 律令의 근간을 이루는 가장 중요한 항목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관점에 입각하여 본론에서는 官制의 실태를 비교적 뚜렷하게 나타내는 墳墓, 土器, 服飾, 都城 등의 고고자료에 대한 고찰을 시행하였다. 우선 第Ⅰ章「律令硏究의 史的前提와 考古學的 方法」에서는 실질적인 분석과 고찰에 앞서 당시의 정치상을 연구하는데 있어 알아 둘 필요가 있는 역사적 전제와 연구사를 정리하고 고고학적인 방법과 그 유효성에 대해 언급하였다. 본 연구가 중국에 기원하는 법체계인 律令을 검토 주제로 채택된 만큼 그에 대한 기초적인 지식과 특성에 대한 정리는 불가결하다. 따라서 현재까지 한국 내에서 이루어진 관련 연구에서는 그것을 어떻게 이해하고 국내 자료에 적용시켜 왔는지를 알아볼 필요가 있을 것이다. 또 그 과정에서 아직 해결을 보지 못하고 있는 부분이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을 추출하여 그것에 대한 접근 방법으로서 고고학적 연구의 가능성을 제시하였다. 第Ⅱ章「墓制와 社會規制」에서는 律令에 포함되는 喪葬과 官位 관련 편목의 존재를 전제로 크기, 부장품 등 분묘를 구성하는 각 속성을 계층화시켜 피장자의 위상과 관등제의 실질적인 대비를 시도하였다. 여기서는 한반도의 사례 뿐만 아니라 중국이나 일본의 묘제 상황과도 비교함으로써 백제·신라에서 시행되었던 官制와 喪葬制가 동아시아 속에서 어떤 특징을 가지고 있는지, 거기에 중국 법제의 영향을 인정할 수 있는지에 대해 살펴보았다. 또 한반도에서 이 시기 고분의 구조가 간략화되고 고분군의 규모가 급격히 축소되어 가는 현상과 그 배경에 대해서도 고찰을 가하였다. 第Ⅲ章「器物과 文書行政」에서는 일정한 시기에 한반도에 등장하는 특정한 기물(기종)의 정착과정과 그 배경, 그리고 토기양식의 전환이 나타내는 사회·정치적 변화에 대해 검토하였다. 특히 중국의 금속기나 도자기 등의 영향으로 출현한 것으로 여겨지는 臺附器種의 전개를 검토함으로써 중국식 생활습관의 도입 시기나 사용 계층을 추측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된다. 또 문자 사용의 본격화를 나타내는 것으로 추정되는 定形硯의 출현·보급 양상을 검토함으로써 成文法 시행에 불가결한 文書行政의 보편화 양상을 검토하였다. 第Ⅳ章「服飾과 身分表象」에서는 역시 律令에 포함되는 衣服과 官位 관련 편목의 존재를 전제로 장신구나 복식에 나타나는 신분 표상과 계층성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관등을 나타내는 유물로서 문헌에도 기록된 백제의 관식이나 중국과의 관련성이 확실시되는 소위 唐式?帶 등에 대한 분석을 통해 백제 및 신라 관제의 특수성에 대해 접근함과 더불어, 동아시아 각국에서 볼 수 있는 보편성에 대해 살펴보았다. 第Ⅴ章「都城과 領域」에서는 중국의 법제 도입으로 인한 사회변화의 무대가 된 도성과 국가의 領域意識에 대해 검토하였다. 여기서는 관제를 비롯한 새로운 통치조직의 도입이 도성의 형성에 미친 영향을 살펴보고 새로 생긴 다량의 관료계층의 거주지역으로서 도성이 어떻게 기능했는지에 대해 추론하였다. 또 官位·官職制, 土地制度, 地方統治體制 등과 깊은 관련을 가지면서 형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국가의 영역의식과 실질적인 영토 확장 정책을 개관하여 삼국시대 각국의 발전단계와 다른 요소들과의 상관관계를 살펴보았다. 마지막으로 결론 부분에서는 앞에서 검토한 내용을 토대로 백제 및 신라지역에서 도입된 중국식 통치방식의 실제를 추론하였다. 부분적인 해석에 그치는 감은 부정할 수 없으나, 중국에서 발달한 律令과 한반도에 도입된 律令의 공통점과 차이점을 밝히고 당시 한반도에서 시행된 법제의 繼受性과 固有性을 분리 추출하는 작업으로 마무리를 하였다. 분석의 결과 중국의 주변 국가들의 律令은 어떤 한 시기에 수용된 것이 아니라 律令受容, 律令施行, 律令編纂 등의 단계적 과정을 거쳐서 이루어졌음이 밝혀졌다. 우선 律令受容段階에는 律令이 체계적인 法典으로서 도입되지는 않았으며, 자국을 통치하는 방법으로서 유효성이 있다고 판단된 한정적인 요소만을 부분적·단편적으로 수용·실행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도입된 律令的 요소는 원초적인 固有法의 일부를 보완하는 형태로 시행되었던 것으로 짐작된다. 다음 律令施行段階는 계속해서 중국 律令의 영향을 받아 어느 정도 체계화된 統治시스템이 시행된 단계라고 할 수 있다. 이 시기에는 변화하는 국제정세에 대응할 필요성과 늘어나는 자국민과 영토를 효율적으로 통치하고 관리할 필요성이라는 外的·內的 요인으로 인해 체계적인 법령의 제정이 요구된 시기로 규정할 수 있을 것이다. 律令編纂段階는 중국 주변에 위치하는 각 국가마다 서로 다른 여러 상황이 표출되는 단계라고 할 수 있다. 그 상황에는 중국의 律令을 그대로 자국의 통치기구로 채택하여 중국의 직접적인 통제를 받아들이는 경우, 중국의 律令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면서 자국 내의 사정에 맞게 일부 조문을 改撰해서 시행하는 경우, 律令을 참고로 자국 내에서 새로운 통치제도를 創定하는 경우 등을 상정할 수 있을 것이다. 이 부분에 대해서는 편목이나 조문이 잔존하지 않은 한국의 경우 검토하기가 어렵지만, 이 때 자국의 정치제도에 걸맞는 律令을 創定했느냐 하지 않았느냐 하는 문제가 이후 중국과의 관계를 결정하는 중요한 轉機가 되었을 수도 있다. 고고자료를 통해 본 律令 수용 양상을 비교해 보면 백제와 신라 사이에서 약간의 차이를 볼 수 있으며, 그러한 차이점은 당시 국제정세에서의 양국의 입장의 차이와 깊이 관련되어 있는 듯하다. 즉, 백제의 경우 관제가 묘제에 가장 뚜렷하게 반영되어 있고 중국과의 외교를 통한 생활양식이나 문서행정의 전환양상을 엿볼 수 있는데 반해 복식제에는 중국적인 특색이 멸망시까지 나타나지 않고 있다. 신라의 경우 묘제에는 세밀한 신분적 서열이 반영되지 않았는데 복식·도성제 등에 중국적 요소가 뚜렷하게 보이고 있다. 이러한 차이는 중국에서 받은 영향의 크기, 또는 얼마나 깊은 연계성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반영하는 듯하다. 백제의 경우 중국적인 문물이나 제도적인 측면을 지향하고 있긴 하나 마지막까지 중국의 정치적 영향을 거부했던 듯한 감이 있다. 그에 반해 신라는 적극적으로 중국의 제도와 정치적 영향을 받아들이고 그것을 이용하면서 한반도 내부에서의 자국의 지위를 유지하고 통일사업을 진전시켰음이 고고자료에 나타나고 있다.

      • 國家形成期の武器と武裝

        우재병 大阪大學 1998 해외박사

        RANK : 247759

        본논문은 국가형성기의 사회구조의 변화를 파악하는 데에 유효한 몇 가지 고고학상의 지표중, 군제나 관료제의 도달 수준을 반영하는 고고자료의 하나인 무기 ·무장체계에 관한 연구이다. 특히 1~5세기 동아시아세계의 한 지역으로서의,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을 중심으로, 양 지역의 국가형성기에 나타나는 무기 ·무장체계의 변천과 그 배경에 대하여 논하였다. 제1장에서는, 우선 고고학적 방법에 의해 국가형성을 논하는 과정에서, 국가단계와 그 이전 사회의 차이를 고고자료에 의해 인식할 수 있는 지표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특히 금후 일본열도와 한반도의 고고자료에 의해서도 접근이 가능한 국가형성의 지표인 교역시스템, 군사편성과 관료편성, 취락과 묘제에 대하여, 동아시아 제 지역에서의 연구성과를 기초로, 고고학적 분석을 시도하였다. 다음으로 국가형성과정을 인식할 수 있는 이들 제 지표 중, 군제와 관료제 분석의 한 방법으로서, 본논문에서 취급하는 무기 ·무장연구가, 특히 4~5세기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 있어 국가형성의 고고학적 연구에 공헌할 수 있는 가능성에 대하여 검토하였다. 이 결과, 첫째, 교역시스템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기 위해서는 우선 교역물자의 공간이동을 확인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점에 대하여 논하였다. 또 광역의 교역시스템에 있어 특정지역의 탁월한 성장에는 철과 소금등 한정된 자원으로의 우월한 접근이 배경에 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더욱이 이들 이동물자로의 접근과정에서 생긴 불균형이 집단의 성쇠와 관련되는 점에 주목하고, 교역시스템이 집단간 정치관계의 성립에 중요한 요소로서 작용하는 점을 강조하였다. 둘째, 군제나 관료제을 고고학적으로 분석하기위해서는 우선 진시황능 병마용갱이나 고구려 고분벽화등 군사편성과 문무의 관료편성을 명료히 인식할 수 있는 고고자료의 분석이 선행되지 않으면 안된다는 점을 논하였다. 특히 진시황능 병마용갱에서 출토한 진용갑의는 이미 진대 중국에는 고급군리 ·중급군리 ·하급군리 ·어수 ·일반보병 ·기병이라는 직위와 병종에 의한 고도로 계층화된 군사편성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반영하는 고고자료로서 중시된다. 또 덕흥리고분벽화등 고구려고분벽화는 관모류나 신의 형식차에 의해서도 직위의 고저를 구별할 수 있는, 4~5세기 고구려에 있어 관료평성의 위계질서가 반영된 고고자료로서 주목하였다. 셋째, 취락의 고고학적분석이 촌락내의 생활단위 파악뿐만이 아니라 전체적인 사회구조의 해명에도 이어지는 작업이라는 점에 주목하였다. 특히 환호취락은 사회구조의 변천과 정치구조의 성장과도 밀접한 관련을 갖는 고고자료라는 점을 강조하였다. 묘제의 고고학적 분석은 취락의 분석과 마찬가지로 사회구조를 해명하는 과정에서 불가결한 접근이다. 특히 일본 고분시대의 묘제연구에 있어 축적된 묘제의 변천에 사회의 계층화와 정치구조의 변화가 민감히 반영된다고 하는 연구성과를 중시하였다. 넷째, 4~5세기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은 군제와 관료제의 도달수준을 명료히 파악할 수 있는 자료가 적기 때문에 4~5세기 고구려고분벽화에 보이는 병종과 직위에 의한 군사평성을 참고로 하면서 고분부장의 무기 ·무장을 분석하는 작업이 필요하다는 것을 강조하였다. 제2장에서는 우선 한대 이후 중국대륙에서 성행한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중, 1~5세기 일본 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서도 출현하고 성행한 소환도의 형식학적분석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 분석을 기초로 양지역 소환도중 1세기경에 있어 단도나 도자의 출현의 경우는, 중국대륙에 있어 3세기의 후한해체와 삼국대립을 배경으로 나타난 실전용의 선진적 무기뿐만아니라 중국대륙의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과시하는 위신재로서의 역할을 수행하였다고 추정하였다. 또 5세기경에 현저해지는 소환대도의 형식변화는 광개토왕비문에서 읽을 수 있는 고구려를 중심으로 하는 한반도를 둘러싼 정치 ·군사적 긴장에 기인하는 점이 크다고 추정하였다. 즉 빈번한 전쟁을 통하여 고구려에서 성행한 기마전의 도입이라고하는 무기 ·무장체계의 변화에 동반하여, 기마전과 철제갑주로 무장한 전투에서 보다 효과적인 소환대도가 출현하고 성행하였다고 생각된다. 이와같이 양 지역에서의 소환도변천의 획기가 동아시아 세계내의 정치적동향과 긴밀히 연동한다고 생각되는 점은 특히 중요하다. 제3장에서는 우선 소환도와 더불어 한대 이후 중국대륙에서 성행한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중 하나이고,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서도 출현하고 성행한 철검의 형식학적 분석을 행하였다. 그리고 이것을 기초로 양지역 철검중 기원전후에 출현한 철검은 한대 중국의 영향으로 나타난 새로운 무기체계의 도입이었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단 한국동남지역에 있어서는 기존의 세형동검의 특징을 이어받은 철제단검이 출현하고 성행하였지만 일본사부 지역의 경우는 이 기존 세형동검의 특징을 이어받은 철제단검과 더불어 한과 왜국과의 직접적인 교류 루트를 시사하는 한계철제단검이 거의 동시에 성행하기 시작하는 경향이 보인다. 양 지역에서의 3세기경의 장검의 출현은 중국에 있어 후한의 해체과정과 삼국시대의 성립에 동반하여 장검과 소환대도등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의 유출과 사용에 대한 한의 강한 통제가 완화된 것을 의미하는 것으로 해석하였다. 특히 일본서부지역의 경우는 전방후원분 출현직전의 정치상황하에서 중국대륙에서 성행한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이고 중국대륙의 정치세력과의 연결을 과시할 수 있는 장검과 소환대도등의 위신재를 갖는 것으로서 소지자의 정치적 권위를 보다 강하게 표현할 필요성이 높아진 것이 아니었는가라고 추정하였다. 5세기에 나타나는 장검의 형식변화는 제2장에서 분석한 소환도의 형식변화와 연동하는 것이다. 특히 일본서부지역에서는 이 시기에 장검의 규모면에서 규격화와 정형화가 현저해 지고, 수장의 고분에 장검등 철제무기를 다량 부장하는 현상이 나타나지만 그것이 이 시기 동아시아 제국간의 정치 ·군사적 긴장과 관련한다고 추정하였다. 이렇게 제3장에서는 양지역에서의 철검의 출현과 변천은 동아시아 세계의 정치적상황과 긴밀히 연동한다는 점을 분명히 하였다. 제4장에서는 우선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서 나타난 1~5세기 무기 ·무장체계 전체를 개관한 뒤에, 무기 ·무장체계중에서 도검의 의미를 검토하였다. 한국동남지역에 있어서는 1~2세기 철제단검과 소환단도의 성행기에는 옻칠한 혁제갑이나 목제갑이 성행하였다고 생각된다. 3세기에는 새로운 소환대도와 장검이 출현하고 성행하지만 아직 철제갑옷은 아직 확인되어 있지 않다. 그러나 이제까지 출토한 4세기 철제갑옷은 초현기의 예로서는 너무나도 발달한 외관을 갖는다. 이점을 중시하면 금후 발굴조사의 성과에 따라 3세기대 유적에서도 혁제나 목제의 갑주 뿐 만이 아니라 철제갑주의 출토도 알려질 가능성이 있다. 즉 소환대도나 장검등 선진적 무기체계의 출현과 선진적 무장체계인 철제갑주의 출현이 연동해서 나타난다고 생각된다. 4세기가 되면 철제갑주가 본격적으로 출토되기 시작한다. 단 4세기에는 종장판혁체주 ·계갑등 고구려고분벽화에도 보이는 기병용갑주도 출현하지만, 주된 철제 갑주는 종장판병유단갑등의 보병용갑주이다. 마주 ·마갑등 본격적인 기병용갑주의 성행은 5세기이다. 또 4세기에 이어 보병용철제단갑도 성행한다. 이 기마용갑주의 성행과 더불어 소환대도의 형식에도 변화가 나타난다. 즉 명료한 관을 가진 세경타입의 70-80cm정도의 소형 ·중형소환대도가 성행한다. 이 종류의 대도는 적당한 규모와 벨시의 손에 미치는 충격감소라고 하는 이점을 갖는다. 따라서 기마전과 철제갑주로 무장한 보병전에서는 특히 위력을 발휘하였다고 생각된다. 일본서부지역에서는 야요이시대 중기후반에서 후기에 걸쳐 철제단검과 소환단도의 성행기에는 주로 목제갑이 출토한다. 또 이 야요이시대 목제갑에는 전투용갑 뿐 만이 아니라 의례용갑도 존재하였다고 추정된다. 고분시대개시기에는 소환대도의 본격적인 출현과 더불어 철제갑주가 새롭게 나타난다. 고분시대전기 갑주 출토양상에서 특히 주목을 끄는 것은 소찰혁체주처럼 중국대륙의 계보를 가진 것과, 종장판 ·방형판혁체단갑처럼 한반도남부의 계보를 가진 것과 병존하는 것이다. 5세기 고분시대중기가 되면 보병용철제단갑은 기종의 다양화와 제작상의 규격화 ·정형화가 현저해진다. 또 마주 ·마갑 ·계갑등 기병용갑주도 새롭게 출현한다. 이 기병용갑주의 도입과 더불어 세경타입의 소형 ·중형대도가 성행한다. 5세기의 규격화 ·정형화한 기종의 보병용철제단갑의 성행은 이 단계의 중무장한 보병집단이 존재하였다는 것을 시사하는 것이다. 그러나 마주 ·마갑 ·계갑등 기마용갑주 출현의 경우는, 현상에서 철제갑주로 무장한 보병집단을 기병용갑주로 무장한 인물이 지휘하는 상황을 상정하고, 중무장한 기병집단의 출현으로 보기보다는 기마전의 도입과 적을 위협하는 새로운 위신재의 출현으로 평가하였다. 이 결과 이들 선진적도검이나 갑주를 중심으로 하는 양지역에서의 무기 ·무장체계 변화의 획기가 긴밀히 연동하는 것도 인정되었다. 제5장에서는 첫째, 한국국가형성의 초기단계인 청동기시대에서 철기시대로의 변천과정에 있어 사회구조의 변혁에 대하여 무기 ·위신재의 소유체계 변화에 주목하여 고찰하였다. 이 결과 무기 ·위신재 소유체계의 변화는 국가형성과정에서의 사회구조변혁과 밀접하게 연동하는 점이 인정되었다. 즉 비파형 동검단계에는 상위계층묘에 있어 청동기는 비파형동검 1점만을 부장하는 경향이 강하였다. 그러나 세형동검단계가 되면 청동무기부장에 있어 수량증가와 종류의 다양화 경향이 나타난다. 또 이단계에는 다뉴경등 의식형위신재로 분류하는 일군의 청동기가 출현한다. 동부등 청동공구류의 부장도 현저해진다. 이 들 부장품의 변화는 부장품의 수량과 종류를 제한하는 공동체적 사회규제의 해체과정과 상위계층으로의 재화집중경향의 하나로 해석 하였다. 이에 반하여 철제단검단계가 되면 한의 영향에 의한 철제무기의 부장이 현저해진다. 그리고 전단계에 성행하였던 다뉴경등 의식형위신재는 쇠퇴하고 전한경등 한의 권위를 이용하여 상위계층의 정치적기반을 강화하는 새로운 권력형위신재가 출현한다. 상위계층부장품에는 생산도구 철기화와 양적 증가경향도 현저해진다. 공구의 증가는 공공노동에 대한 상위계층의 역할이 한층 강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한다. 농구부장에 대한 사회적 규제의 해체는 상위계층의 역할강화가 농업생산까지 미치는 것을 반영한다. 둘째, 일본국가형성 초기단계인 야요이시대에서 고분시대로의 변천은 고분시대 개시문제를 중심으로 국가형성과정의 정치 ·사회구조 변혁과 관련지어서 논하였다. 정형화한 전방후원분의 출현에 상징되는 고분시대개시에 동반된 정치 ·사회구조의 커다란 변혁이 있었다는 것이 인정된다는 점은 중요하다. 셋째, 이제까지 분석한 1~5세기경의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 있어 무기 ·무장체계의 변화와 철이나 위신재의 유통체계 변화를 중심으로, 양 지역에 있어 국가형성과정의 특질에 대하여 논하였다. 이 결과 기원전후 시기로부터 양지역에서는 세형동검에서 철제단검으로의 변화에 대표되는 무기의 철기화 현상이 인정되었다. 이 단계에 나타나는 또 하나 주목되는 변화는 전한경등 한의 영향에 의한 새로운 위신재의 유통시스템 출현이다. 또 한의 고도한 정치체제와 계층구조의 영향은 양 지역에 있어 이 단계 사회변혁의 계기가 되었다고 생각된다. 그리고 이러한 한의 영향에 의해 나타난 철기문화는 이윽고 새로운 철의 생산지 ·공급지로서의 한국동남지역, 철의 소비지 ·수출지로서의 낙랑군과 일본서부지역등을 연결하는 광역의 철 교역시스템을 성립시켰다. 그러나 낙랑군을 중심으로 성립한 이 광역의 철 교역시스템은 최대의 소비지인 낙랑군이 4세기 전엽에 붕괴된 것에 의해, 낙랑군과 한국동남지역, 일본서부지역을 연결하는 기존 광역의 철 교역시스템에 커다란 변동을 가져왔다. 이러한 상황하에서 한국동남지역의 정치세력은 이지역 정치권력의 성장과 경제적 성장의 기초가 된 철의 안정적인 수출지 ·소비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일본서부지역과의 교섭을 한층 중시하게 되었다. 또 일본서부지역의 정치세력도 낙랑군의 붕괴등 불안정한 국제정세 속에서 안정되 철의 공급지를 확보하기 위해서 한국동남지역과의 교섭에 적극적이었다.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인 철제단갑의 제작 기술을 일본서부지역의 정치세력에 제공하는 것은 한국동남지역의 정치세력으로서는 어쩔 수 없는 대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이와같은 배경을 가진 고분시대 전기의 철제갑주 제작기술은 재편성된 광역의 철교역시스템의 최대의 수출지 ·소비지가 된 일본서부지역에 있어 고분시대중기 철제단갑의 기종다양화와 제작상의 규격화 ·정형화의 기술적 기초를 제공했을 것이다. 5세기에는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서 철제단갑의 성행과 더불어 마주 ·마갑 ·계갑등 기마용갑주가 본격적으로 출현한다. 이것은 철제단갑으로 무장한 보병과 마주 ·마갑 ·계갑으로 무장한 기병이라는 병종에 의한 무장체계의 성립을 시사하는 것이다. 또 이 5세기 철제갑주의 변화와 더불어 나타나는 무기 ·무장체계의 변화중, 또 하나 주목하여야 할 점은 철제갑주로 중무장한 보병전과 기마전에서 보다 유효한 세경타입의 중 ·소형 소환대도의 성행이다. 이 종류의 대도의 성행이 양 지역에서의 철제단갑의 성행과 기마용 갑주의 도입과도 연동하는 것은 광개토왕비문으로부터 읽을 수 있는 400년 전후의 한국동남지역을 둘러싼 정치 ·군사적 긴장을 반영하는 것이다. 특히 이 단계의 국제적인 정치 ·군사적 긴장은 중앙권력의 중심묘역에서의 대도와 장검, 철제갑주등 전진적 무기 ·무장의 다량부장에 보이는 것처럼 일본서부지역의 중앙권력에 의한 동아시아제국에 대한 대외적인 정치 ·군사력의 과시에 이어지는 것이다. 고분시대전기에 있어 중앙권력의 정치구조는 소환대도와 장검, 소찰혁체주등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의 도입을 중시하여, 중국대륙의 정치세력과의 긴밀한 관계를 나타내는 위신재로서, 일본서부지역 내부에서의 대내적 정치적 권위의 과시에 이용하였다. 고분시대 전기의 이러한 양상과 비교하면, 선진적 무기 ·무장체계의 도입을 기초로 하여 대외적과시를 중시하는 고분시대 중기에 있어 중앙권력의 정치구조는 크게 다르다. 이상과 같이 본 논문에서는 국가형성의 고고학적 지표가 될 수 있는 자료와 분석방법을 기초로 하여 소환도와 철검을 중심으로 일본서부지역과 한국동남지역에 있어 국가형성기의 무기 ·무장체계의 변화를 분석하고 그 의의에 대하여 논하였다. 무기 ·무장체계의 변천은 그 사회의 대내적 ·대외적 정치구조 변혁을 반영하는 것이며, 국가형성과정을 고고학적으로 해명하기 위한 매우 유효한 고고학적 지표가 될 수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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