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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본 중세의 내전과 왜구 : ー 무로마치 막부의 왜구에 대한 공식 해명 ‘포도(逋逃)’를 중심으로

        조혜란 한국방송통신대학교 대학원 일본언어문화학과 2021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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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왜구 문제는 <여몽연합군의 일본 침입>과 함께 13 ~ 16세기의 동아시아 국제관계 및 교류의 역사를 규정하는 핵심적인 연구 과제이다. 이러한 왜구 연구는 근대 이후 근년에 이르기까지 일본이 주도해 왔다고 할 수 있다. 일본학계는 왜구를 전기왜구(14~15세기 초)와 후기왜구(16세기)로 구분하고, 전자는 일본인들이 주로 한반도를, 후자는 중국인들이 중국대륙을 무대로 활동했다고 주장해 왔다. 그런데 1980년대 말부터 이러한 주장에 변화가 나타난다. 즉, 일본학계는 전기왜구의 실체도 사실은 일본인이라기보다는 고려(조선)인이었다든가 또는 고려인과 일본인이 연합한 세력이었다고 하는 주장을 내세우기 시작한 것이다. 그리고 지금은 이러한 주장이 학계의 정설로 자리 잡고 있다. 이에 대하여 한국과 중국 연구자들은 왜구의 주체가 일본인이라고 하는 기존의 입장을 견지하고 있다. 이처럼 한・중・일 3국의 연구자들은 왜구의 사회적 실체와 민족적 구성 및 발생 배경에 관하여 각각 인식을 달리해 왔다. 이러한 일본의 왜구 연구는 최근에 적지 않은 문제를 지니고 있음이 드러나고 있다. 그 중 가장 핵심적인 것은, 왜구 문제를 논하면서 해당 시기 일본의 국내정세, 특히 한반도와 지리적으로 인접한 규슈 지역 군사정세와의 상관관계를 고려하지 않은 점이다. 오히려 일본학계는 왜구 발생의 배경 및 그 실체를 고려(조선)의 국내정세에서 찾고 있다. 이와 같은 기존 인식들의 상이(相異)를 극복하기 위해, 우리는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 우왕3년(1377)에 언급한 ‘포도(逋逃)’라는 용어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고려에 왜구의 침구가 가장 극심했던 1377년 6월, 고려에서는 안길상을 일본에 파견하여 항의하자, 무로마치 막부가 고려에 침구하는 왜구의 실체를 가리켜 ‘포도(逋逃)’라고 해명했다. 이는 당시 일본의 국내정세와 관련해 고찰할 때 매우 시사하는 바가 크다. 14세기 말 당시 왜구는 한반도뿐만 아니라 중국에도 침구했으므로 명(明)나라 역시 일본에 사신을 파견하여 왜구 금압을 요청했다. 그런데 무로마치 막부는 명나라에 대해서도 공식적인 외교문서에서 왜구의 실체를 ‘포도(逋逃)’라고 칭했다. 무로마치 막부의 입장에서 ‘포도(逋逃)’란 자의(字意)대로, 체포를 피해서 도주한 사람들을 의미한다. 왜구와 포도는 마치 동전의 양면과 같이 서로 대응하는 관계였던 것이다. 왜구의 또 다른 칭호인 ‘포도’에 주목한 선행연구로는 「여말 ~ 선초 왜구 발생의 메카니즘 ー 왜구의 실체에 관한 용어 분석을 중심으로」(이영, 2012)가 있다. 이 선행연구는 포도라는 용어를 최초로 한국 학계에 소개하는 한편, 포도 발생과 배경에 대하여 밝힌바 있다. 그러나 해당 논문은 구체적인 고찰이라고 하기에는 부족한 감이 없지 않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포도’라는 용어가 등장하는 시대적인 맥락에 주목해 왜구의 한반도 침구가 당시 일본의 국내정세와 구체적으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살펴보고자 한다. 무로마치 막부가 1377년에 왜구를 포도(逋逃)라고 공식적으로 언급한 이래 이 용어를 우리는 한・중・일 모든 사료에서 확인할 수 있었다. 물론 포도라는 용어만으로 왜구 침구의 배경과 원인을 모두 설명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다만 ‘포도’라는 용어를 통해 우리는 왜구 발생의 메커니즘에 다가갈 수 있을 것이다. 본고 <Ⅱ장>과 <Ⅲ장>에서는 헤이안(平安) 시대 쓰시마노가미(対馬守) 후지와라노 지카미쓰(藤原親光)가 고려로 도항해온 사례와, 고려 우왕3년(1377)에 고려를 침구한 왜구, 즉 무로마치 막부가 이들을 ‘포도’라고 칭했던 사례를 비교 분석하였다. 그 결과, 다음의 두 가지 공통점을 발견할 수 있었다. 첫째는, 규슈 지역의 내란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는 점이다. 둘째는, 공권력에 대항해 싸워 패한 무리들이 대마도와 이키(壱岐)라는 변경의 섬을 근거지로 삼아 왜구 활동을 전개했다는 점이다. <Ⅳ장>에서는 이러한 분석에 부합하는 고려 말 ~ 조선 초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고려 말의 경우, 우왕6년(경신년, 1380)에 왜구들이 500척의 선단을 이끌고 진포구(鎭浦口)로 침구해 온 사례가 대표적이다. 경신년 왜구는 규슈탄다이(九州探題) 이마가와 료슌(今川了俊)이 정서부(征西府, 九州의 南朝勢力)를 군사적으로 진압하는 최종 단계에서 발생했다. 즉, 료슌은 1379년 가을부터 남조의 근거지인 기쿠치(菊池)에 진을 치고 ‘효로제메(兵糧攻め)’, 즉 ‘적의 병량이 소진되기를 기다리는 작전’ 중이었다. 이런 가운데 료슌은 규슈의 남조 세력들이 병량을 구하기 위해 한반도나 중국으로 침구해 가는 것(왜구)을 막기 위해 작전을 실행에 옮긴다. 즉, 그는 1380년 6월 중순, 규슈의 내해(內海)인 아리아케카이(有明海) 일대의 남조계 수군들이 ‘왜구화(倭寇化)’되는 것을 막기 위해 료슌은 그들의 배를 압류하려고 했다. 그러나 남조 수군세력은 이미 사라지고 난 뒤였다. 그로부터 불과 십 여일 뒤인 같은 해 7월, 금강 하구의 진포구에 500척으로 이루어진 왜구의 대규모 선단(船團)이 나타난다. 그들이 금강하구에 출현하기 전에 대마도를 거쳐서 왔을 것임은 3년 전인 우왕3년(1377) 3월에 우인열이 보고(報告)한 “왜적이 대마도(對馬島)로부터 바다를 덮고 오는데, 돛과 돛대가 서로 바라보고 있을 정도입니다”라는 것을 통해서도 추정할 수 있다. 이처럼 규슈의 남조계 수군들이 공권력인 무로마치 막부의 체포를 피해 대마도를 거쳐 고려에 침구해 왔다는 점에서 이들 또한 포도(逋逃)의 한 사례로 볼 수 있다. 한편 조선 초 쇼니씨(少弐氏)의 경우를 보자. 당시 일본에서는 남북조 쟁란이 종식된 후 왜구 활동이 진정되어 가고 있었지만, 규슈에서는 여전히 쇼니씨와 오우치씨(大内氏, 막부 측) 사이에서 전투가 단속적(斷續的)으로 일어나고 있었다. 그리고 쇼니씨는 전투에 패할 때마다 자신의 휘하 소씨(宗氏)에게 의지하여 대마도로 도주했다. 이렇게 되자, 대마도 소씨는 조선에 식량을 요청했다. 당시 조선에서 이러한 요구에 응해 식량을 준 것은 그들이 왜구로 돌변하는 것을 방지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 조정은 왜구 침구의 주요 원인이 규슈지역에서의 내전 발발이라는 사실을 깨닫고 이 문제를 근본적으로 해결하려고 시도하기도 했다. 즉, 쇼니씨를 토벌하려는 오우치씨에게 사절을 파견하여 쇼니씨 토벌을 만류한 것이다. 이에 응해 오우치씨는 오랜 적인 쇼니씨를 사면해 줄 것을 막부에 요청했고, 쇼니씨는 사면되었다. 즉 조선에서는 왜구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외교력을 발휘하여 대마도와 규슈의 호족까지도 관리했던 것이다. 쇼니씨 사례는 앞에서 살펴본 지카미쓰의 그것과 유사하다. 즉, 지카미쓰의 경우도 공권력인 헤이케(平家)의 체포를 피해 고려로 도주했지만 왜구로 변질되지 않았다. 그리고 그가 귀국할 때 고려 국왕으로부터 진귀한 보물을 하사받기까지 했다. 이처럼 지카미쓰 사례와 쇼니씨 사례는 공권력의 체포를 피해 대마도로 도주했다는 점에서 ‘포도’라고 할 수 있지만 왜구로 변질되지 않았다는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고려(조선)와 대마도가 친선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또 다른 조선 초의 사례로 세종23년(1441)에 아카마쓰 노리시게(赤松則繁)가 조선으로 도주해 왜구가 된 사건을 들 수 있다. 이 사건은 앞의 사례와 달리 교토에서 발생한 반란, 즉 아카마쓰 미쓰스케(赤松満祐)가 6대 쇼군 아시카가 요시노리(足利義教)를 암살한 ‘가키쓰의 난(嘉吉の乱)’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즉, 이 사건 직후 막부 토벌대의 공격을 받고 몰락한 아카마쓰 집안에서 미쓰스케의 동생 노리시게(則繁)가 토벌을 피해 규슈로 도주한 것이다. 그는 교토에서 자신의 근거지인 하리마(播磨), 그리고 하리마에서 또다시 막부군의 체포를 피해 규슈(筑前)로 도주한다. 이어서 당시 치쿠젠의 슈고였던 쇼니 노리요리(少弐教頼)의 도움을 받아 대마도를 거쳐 조선으로 달아나 약탈 등 왜구 행위를 자행한다. 노리시게의 경우, 규슈가 아닌 교토에서 내란이 발생했지만 대마도를 관할하는 쇼니씨의 도움으로 한반도로 가서 왜구 행위를 자행할 수 있었으므로 ‘포도(逋逃)’의 조건에 부합한다. 한반도로 침구한 모든 왜구를 ‘포도’라는 용어로 다 설명할 수는 없지만, 고려 말 ~ 조선 초의 시기에 발생한 왜구들 중에는 규슈의 내란에서 촉발된 포도(逋逃)의 사례가 상당수 포함되어 있었음이 확인된다. 이상과 같이, 본고에서는 왜구 발생의 메커니즘을 일본의 공식적인 외교문서에 나타나는 용어인 ‘포도’라는 단어를, 일본의 내란이라는 당시의 시대적 배경과 관련지어 고찰하였다. 그 내용을 정리하면 다음과 같다. 규슈에서 내란이 발생하고 그 내란에서 패한 무리들이 공권력(막부)의 체포를 피해서 대마도로 도주, 그곳을 근거지로 하여 한반도를 침구한 것이 왜구이다. 抄 録 日本中世の内戦と倭寇 ー 室町幕府の倭寇に対する公式解明「逋逃」を中心に 趙 惠 蘭 CHO HAE-RAN 韓国放送通信大学校大学院 日本言語文化学科 (指導敎授 : 李 領) 倭寇問題は13~16世紀にわたる東アジアの国際関係および交流の歴史を理解する上で、核心的な研究課題といえる。その中でも倭寇の社会的実態と民族的構成および発生背景に関して韓国·中国と日本の間に見解が異なるため、論争が活発に行われている。韓国と中国では、倭寇は日本人海賊を意味するが、日本の学界では倭寇は日本人だけでなく、中国人及び韓国人も含まれていると主張してきた。このような韓·中·日3国の研究者による倭寇に対する認識の違いを克服するためには、倭寇問題に関する新たなアプローチが切実である。その一環として、本稿では倭寇を「逋逃」の観点から新たに考察した。 「逋逃」という用語は、室町幕府が公式的に外交文書で「倭冦」の代わりに使用した言葉である。つまり、「倭寇」を「逋逃」と表現したものである。「逋逃」とは、室町幕府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人々という意味である。「逋逃」という用語は、韓·中·日3カ国の文献史料にあまねく現れる。勿論逋逃という言葉だけで、すべての倭寇寝具の背景や原因が究明できるとは思われない。しかし、逋逃という用語を通じて私たちは倭寇発生のメカニズムの一面を分析することができる。まず、逋逃という用語を理解するために対馬の守藤原親光の高麗渡航の事例と 室町幕府で初めて倭寇について逋逃と釈明(解明)した禑王3年(1377)倭寇侵寇の事例を比較分析する。 両者の共通点は、公権力の逮捕を避けて韓半島に逃走したという点と、両者とも対馬を根拠地にしたり、対馬を利用できる勢力であったという点である。ところが親光は高麗で略奪行為をせず、高麗末の倭寇は略奪行為を行った。このような相違点の背景には、当時の高麗と対馬が親善友好関係にあり、高麗末の倭寇の場合は、麗蒙連合軍の日本侵攻により外交関係が回復できず、敵対関係が維持されていた事情がある。 倭寇を逋逃という用語で説明するために次のような背景を検討すべきだと思われる。第一に、九州地域で公権力と反公権力の間の内戦が発生し、それが背景になった。第二に、公権力により追われた勢力が対馬·壱岐へと逃走した。ところが対馬·壱岐に逃走するためには、対馬·壱岐を根拠地とできる勢力や、対馬·壱岐を利用できる勢力の助けを借りなければならないということだ。このような前提条件に沿った事例として、逋逃という脈絡で高麗末期と朝鮮初期の事例を考察する訳である。 一方、高麗末、庚申年(1380)に発生した倭寇は九州探題の今川了俊が征西部を制圧する最終過程で発生した。了俊が有明海一帯の南朝系水軍が倭寇化するのを防ぐために彼らの船を差し押えようとしたが、南朝水軍勢力はすでに韓半島へと逃走していた。彼らは、公権力である幕府(了俊)を避け、韓半島に逃走したのである。したがって南朝水軍勢力は公権力の室町幕府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という点で「逋逃」とみなすべきである。 また、朝鮮初期の少弐氏の場合は、当時、日本て南北朝動乱が終息するにつれ、倭寇活動は沈静化していた。しかし九州では依然として少弐氏と大内氏の間で合戦が繰り広げられていた。これにより、少弐氏は戦闘に敗れるたびに、自らの指揮下でにいた宗氏に頼って対馬島に逃走した。ところが少弐氏が対馬に逃走してくると、対馬の宗氏は頻繁に朝鮮に糧食を要請し、朝鮮では彼らが倭寇にならないように糧食を与えるなど、包容政策を行った。朝鮮の朝廷はここからさらに一歩進み、少弐氏を討とうとする大内氏に使節を派遣し、少弐氏討伐を引き止めた。 結局大内氏は少弐氏の赦免を幕府に要請し、少弐氏は赦免された。つまり、朝鮮では倭寇問題を解決するために外交力を発揮し、対馬と九州の豪族までを管理していたのである。 少弐氏の事例は公権力を避けて対馬に逃走してきた点で逋逃と言える。ところが、彼らは朝鮮に糧食を要請するなと、朝鮮の助けを受けていた。これは、前述の親光事例と類似しているといえる。親光も公権力である平家の逮捕を避けて高麗に逃走したが倭寇活動はせず、彼が帰国する際に高麗国王から宝物を下賜された。九州で戦乱が発生し、公権力の逮捕を避けて対馬に逃走したのが逋逃といえるが、この段階で高麗(朝鮮)へ侵寇する倭寇になったり、そうならなかったりしたのである。 また、もうひとつの朝鮮初期の事例として、赤松則繁が朝鮮へ逃走した事例がある。「逋逃」という用語を説明するための第一の背景が九州地域の内戦だった。ところが1441年、京都で6代将軍·足利義教が暗殺される「嘉吉の乱」が発生した。将軍を暗殺した赤松満祐の弟則繁は将軍暗殺後、朝鮮に逃走した。この事件は九州地域ではなく京都で起きた反乱だが、則繁はいかにして朝鮮に逃走したのか。それは筑前守護少弐氏の助けで可能だった。則繁の朝鮮における逃走経路を見ると、則繁は京都での将軍暗殺に主導的な役割を果たし、自分の根拠地の播磨に逃げ、ここからさらに幕府軍を避けて筑前へ逃走した。そのあと筑前守護少弐氏の助けで対馬を経て朝鮮に逃走したものとみられる。このように、畿内地方の豪族といっても九州に逃走して少弐氏ー蘇氏とつながれば、倭寇に変質しかねない蓋然性を示す事例といえる。と言うわけで、赤松則繁も幕府軍の逮捕を避けて逃走したという点で逋逃といえる。 以上のように、室町幕府が倭寇に代わる用語として用いた「逋逃」を中心に、高麗末及び朝鮮初期、倭寇発生のメカニズムについて考察した。このような試みが、韓·日·中3国の研究者の倭寇認識の違い(社会的実体と民族的構成および発生背景)を克服するために一助となることを期待する。倭寇の発生における東北アジア三国の状況と外交的能力、または状況を管理するための努力などに関するさらなる研究を今後の課題にした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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