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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방 후 지방에서의 법학교육 태동에 관한 연구 : 조선대학의 사례를 중심으로

        이영록(Lee, Young-lok) 조선대학교 법학연구원 2021 法學論叢 Vol.28 No.2

        이 글의 목적은 조선대학을 중심으로 해방 후 지방에서의 태동기 법학교육의 실제를 드러내고, 그 특징 및 역할과 의의를 규명하는 데 있다. 이를 통해 우리 법학교육사가 시기적으로는 해방 이전의 근대에, 지역적으로는 서울 중심의 시각에 치우져 있는 점을 교정해 보고자 했다. 조선대학의 사례를 통해 알 수 있었던 점은 해방 후 지방에서도 일제강점기 이래 이어져 온 법학교육에 대한 수요와 선망이 매우 크게 존재했다는 사실이다. 그런 수요에 부응하고 나선 것이 지역의 법조실무가들이었다. 이 점은 비슷한 시기 법학교육을 시작한 영남의 동아대학의 경우에도 나타나지만, 특히 조선대학의 경우는 극적이었다. 실무가들이 주도한 법학교육은 교과과정이나 수업내용에도 반영되었다. 일제강점기 경성제국대학의 법문학부의 영향이 전반적으로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상대적으로 실천적 실용성을 가미한 교과과정을 운영하였다. 그러나 법학의 실천성에 밀착하려는 이런 초기 학풍은 전쟁으로 인한 교육 기반의 붕괴, 무엇보다도 겸임일 수밖에 없는 법률실무가 교수들의 불가피한 이탈로 의미 있는 학문적 숙성으로 이어지기 전에 중단되고 말았다. 그 외에도 지방에서의 법학교육은 해방 후 갈 곳을 잃은 젊은 법학 엘리트들에게 연구와 교육을 계속할 수 있는 자리를 제공하는 역할을 담당하였다. 이로써 그들이 향후 우리 법학계의 대표적인 법학자들로 자라는 데도 일조할 수 있었다. 나아가 사회 곳곳에서 법학적 지식으로 사회 발전에 기여한 수많은 졸업생들을 배출함으로써, 열악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지역대학으로서 주어진 시대적 소임을 담당할 수 있었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uncover the reality of legal education in the beginning period after the national liberation, centered on Chosun University, and to illuminate its characteristics, roles, and significance. I tried to correct the tendency in historical researches on legal education in Korea which had been tilted to pre-liberation period in time, and Seoul area in region. What I found was that in the provincial areas there was a very large demand and desire for legal education which had continued since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It was the local law practitioners who responded to such demand. It led to the characteristics of the relative practicality in the curriculum. And local law colleges provided the opportunity for research and education to young legal scholars, who could not have escaped stalling their careers after the national liberation, but would become prominent law scholars later. Besides, numerous graduates from law colleges in province contributed to the rebuilding of the nation with their legal knowledge in various fields of society.

      • KCI등재

        연변조선족자치주 조선족의 “사회적 지지”가중국 사회 적응에 미치는 영향

        이소영 ( So Young Lee ) , 선봉규 ( Bong Kyu Sun ) 조선대학교 동북아문제연구소 2015 동북아연구 Vol.30 No.2

        This study analyzes the effects of the relationship between social support and local community adaptation of Korean-Chinese. Therefore we conducted a survey targeting ethnic Koreans at Yanbian Korean Autonomous Prefecture, and collected 250 copies from which 218 were used for statistical analysis. Results of research are as follows. First, unofficial social support based on trust between relatives and acquaintances among ethnic Koreans helps more to adapt into Chinese society rather than official community support. Second, ethnic Koreans adapt well to the community in everyday life, however social adaptation through local community participation and activities are not significant. Third, if ethnic Koreans adapt faster in terms of social support level, they also adapt in terms of social community support as well. Forth, both official social support and unofficial social support are influenced by education level and Chinese fluency, but especially unofficial social support is affected the most. 중국조선족은 현재 이주의 도시화와 글로벌화를 경험하면서 낯선 사회에서 새로운 문화에의 적응이라는 문제에 직면해 있다. 특히 조선족 집거지가 집중되어 있는 연변지역은 조선족의 유출과 한족의 유입이 복합적으로 일어나면서 새로운 사회관계를 형성해야 하는 등 전통적으로 일궈온 생활양식의 전환을 요구받고 있는 상황이다. 이 연구는 중국조선족의 사회적 지지와 중국 사회 적응의 양상을 살펴보고, 이 두 변수 간의 영향관계를 분석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이를 위해 연변조선족자치주에 거주하고 있는 조선족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250부를 회수하였으며, 그 중 218부를 통계분석에 활용하였다. 통계분석은 빈도분석과 분산분석, 상관관계 및 회귀분석을 실시하였다. 이 연구의 분석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연변조선족은 가족 및 지인 간의 신뢰를 기반으로 한 비공식 사회적 지지가 공식 사회적 지지보다 지역사회 적응에 도움이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연변조선족은 일상생활 영역에서 지역사회에 잘 적응하고 있으며, 지역공동체의 참여 및 활동을 통한 사회 적응은 활성화되어 있지 않은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연변조선족은 사회적 지지가 높을수록 지역사회 적응이 잘 되는 것으로 나타났다. 넷째, 연변조선족의 지역사회 적응에 있어 교육수준과 중국어수준이 공식 · 비공식 사회적 지지에 영향을 받으며, 그 중 비공식 사회적 지지가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 것으로 나타났다.

      • KCI등재

        일본 강점기 일본인 교사 야스다 야스노리(安田保則)의 교육저술과 교육활동

        한예원 조선대학교 인문학연구원 2019 인문학연구 Vol.0 No.58

        This study examined educational writings and activity of Yasda Yasnori a Japanese teacher in Gwagju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rule(安田保則, 1885〜?). He was born in Nomi-gun, Isikawa, Japan and was graduated from a teacher school in Isikawa. He came to Korea and worked as a teacher of a public school in 1915 and from 1918, he was engaged in diverse educational activities in Jeonnam and Gwangju for about 30 years. He published 『Working for Education in Korea(朝鮮敎育に安住して)』(1927) which recorded the status of education in Korea at that time while working as a teacher of an elementary school and a middle school. Then he published 『Construction of Factitive Education and Consequence(作爲敎育の建設と歸趨)』(1931) about trend of all-round education for ‘Gwangju-style Factitive Education.’ He compiled 『(Gwangju)Hyangtodokbon(鄕土讀本)』(1937) which explained the necessity of education on the conditions of Korea at that time while teaching Japanese people at Gwangju Simsang Public School. This study examined two writings mentioned above and his educational activities and perspectives. ‘Factitive Education’ accepted work, labor and feasance of children as educational methods to remove disadvantages of nobility education for intellectualist and realize harmony between body and mind, which was influenced by Arbeitsschule of Germany. He wrote about educational theories including specific educational methods and activities while working as a teacher in Gwangju. It was hard to understand Gwagnju- style factitive education as there were only a few studies on it, but this study has meaning in that it presented an outline of it. 이 글은 일본 강점기 광주(光州)지역의 일본인 교육자 야스다 야스노리(安田保則, 1885〜?)의 교육저술과 교육활동을 살펴본 것이다. 야스다는 일본의 이시카와현(石川縣)의 노미군(能美郡)에서 출생하였고, 이시카와현 사범(師範)학교를 졸업한 뒤, 1915년 조선총독부의 공립학교 훈도(訓導)가 되어서 조선으로 건너와 경성에서 활동하다가, 1918년부터 30여년간 전남과 광주의 교육기관에 근무하였다. 주로 현재의 초등학교에 해당하는 ‘보통학교’, ‘심상초등학교’와 중학교에 해당하는 ‘실업학교’ 등에서 근무하면서 조선교육의 현황을 『조선교육에 안주하여(朝鮮敎育に安住して)』(1927년)로 출간하였고, 이어서 당시에 주목받던 심신(心身)의 전인교육을 수용하여 ‘광주식 작위교육’이라고 이름 붙이고, 『작위교육의 건설과 귀추(作爲敎育の建設と歸趨)』(1931년)로 출간하였다. 뿐 만 아니라 조선의 현지 사정을 교과내용으로 삼은 『(광주)향토독본(鄕土讀本)』(1937년)이라는 교재를 편집하였고, 또한 자신이 교장으로 있던 광주중앙심상고등소학교에서 실제로 시행하였던 교육과정을 『우리 학교 체육에 관한 종합연구(我が校体育の総合研究)』(1938년)라는 서명으로 발간하였다. 본고는 이러한 4권의 저술 중, 앞의 두 권을 발굴하고 그 내용을 소개하고자 하였다. 특히 야스다가 ‘광주식 작위교육’이라는 이름으로 정리한 교육내용을 개략적이나마 소개하여, 차후 일본 강점기 재조 일본인 교육자들의 교육활동이 본격적으로 조명되기를 기대한다. 이러한 일본인 교육자들의 조선에서의 교육활동을 고찰함은, 우리 근대교육 시발점의 교육 활동을 이해하는 데 크게 도움이 된다. 또한 국권 회복 이후의 초기 한국교육을 이해함에 있어서도 없어서는 안 될 작업이라고 생각된다. 나아가 일제 강점기의 교육관련 저술에 대한 종합적인 분석은 한반도 미래교육의 방향잡기에 좋은 가이드라인 될 수 있을 것이다.

      • 鴨綠絶響 : 申叔舟與 倪謙

        王碩筌,曺喜武 조선대학교 외국문화연구소 1997 外國文化硏究 Vol.20 No.1

        申叔舟(1417-1475), 字泛翁, 朝鮮近代漢學家로서 漢語에 능통해 詩賦를 잘짓고 外交業務에 종하했으며, 朝鮮王朝의 著名한 學者로서 《訓民正音》 제작에 참여했고, 《東國正韻》을 主編했다. 깊은 학문과 높은 지위에도 불문하고 항상 예의바르고, 겸소하였기 때문에 국왕과 많은 사람들의 사랑과 존경을 받았다. 倪謙(?-1479), 字克讓, 中國明代學者, 詩詞歌賦에 뛰어남. 1449年 9月 明나라를 대표해 朝鮮에 파견됨. 倪謙은 영리하고 文章力이 좋아서 朝鮮 派遺 당시, 즉석에서 글을 수정없이 지어 많은 사람들을 놀라게 했다. 景泰皇帝때에는 文華殿側室에서 內官에게 《國風》을 강의하기도 했음. 明王朝의 정세가 변함에 따라 倪謙은 관직에서 물러나 1479年에 죽었다. 申叔舟와 倪謙은 明나라를 대표해서 파견된 외교관과 漢學에 깊은 지식을 갖은 朝鮮王朝의 대표한 接待者로서의 만남이지만 서로의 깊은 학문과 인품으로 쉽게 잊을 수 없는 친구가 되었다. 倪謙은 간략하게 썼지만 역사상 韓中關係의 중요한 활동을 쓴 紀行文인 《朝鮮紀事》과 기행을 시로 엮은 《遼海篇》 4券을 썼는데, 朝鮮에서 만난 친구중 申叔舟를 제일 칭찬을 많이 하였다. 申叔舟 또한 倪謙을 시종일관 잊지 못하다가 1462年 世祖를 따라 북경을 갔으나 관직에서 물러난 倪謙을 만나지 못했다. 申叔舟와 倪謙의 숭고한 우정은 萬世에 흐르는 鴨綠江과 같이 남아있을것이다.

      •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나타난 안면 표정 연구

        이은혜(Lee, eun-hye) , 박홍수(Park, hong-su) 조선대학교 조형미술연구소 2012 조형미술논문집 Vol.12 No.2

        초상화는 동서양을 막론하고 일찍부터 발달해 온 미술 장르 중의 하나이다. 우리나라의 초상화는 오랜 역사를 지니고 있지만 초상화가 가장 성행하고 발달하였던 때는 조선왕조때라고 말할 수 있다. 조선은 ‘삼강오륜(三鋼五倫)’을 근간으로 삼아 국가 사회질서의 기틀을 유지하였기 때문에 그 이념과 성격을 이해하는데 초상화만큼 도움이 되는 시각예술도 드물 것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우진비엔피, 2011, p.6 이라 사료된다. 조선의 초상화는 모범이 되는 역사 인물을 대상으로 추모하고 넋을 기리는 제의적이고 교훈적인 성격을 지니기에 주로 왕, 충신, 사대부, 선비 등 한 시대를 풍미한 특정 인물을 그려냈다는게 특징이다. 그 중에서도 그 수효나 예술성에 있어서, 그리고 조선 시대 양반 사회의 성격을 여실히 보여준다는 점에서 사대부 초상화를 단연 주목할 만하다. 이씨 조선 500년 동안 그려진 초상화들은 시기별로 도상과 표현법에서 차이를 보여 시대 양식을 드러낸다. 조선시대 초상화에는 그려진 연대나 작자를 표시하고 있지 않은 것이 많아 시기별 도상과 표현의 변화를 파악하는 것은 초상화의 제작시기를 가늠해 볼 수 있는 방법이 되는데 이 중에서도 초상화에서 가장 중요한 얼굴 부분 표현법의 변화를 짚어 보는 것은 초상화를 이해하고 감상하기 위한 국립중앙박물관 『초상화의 비밀』우진비엔피, 2011, p.200 가장 첫 번째 순차가 될 것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조선 후기 초상화에서 특정 인물상이 어떻게 전개되었으며, 그 인물의 세부적인 안면 표정을 관상학적 측면으로 대입하여 인물의 내면세계와 사회적 위치에 따른 기품, 생애, 그리고 작가의 표현방식과 기법상 현대미술과 상이하거나 공통된 고유한 특징들을 구체적으로 모색하는데 있다. Keywords : 조선시대 초상화, 초상화 안면 표정 A portrait of Joseon Dynasty period, A face in a portrait

      • KCI등재

        正式导师制度对大学生创业意图的影响关系中 : 师生间信赖的调节效果和自我效能感中介效果的研究

        王志成, 刘玉勋, 韓仁洙 조선대학교 동북아문제연구소 2016 동북아연구 Vol.31 No.2

        중국경제가 어려위지면서 고용 없는 경제 성장으로 고용률이 감소추세에 있으며 청년층 실업이 심각해지고 있다. 대학 졸업생들이 취직해도 자기 원하는 일짜리를 구 하는 것을 하늘에 별이라고도 할 수 있다. 이러한 대내외인 환경 속에서 대학 졸업생 들의 취업난의 문제를 해결하지 못하면 “중국꿈”(China Dream)을 이루기 어렵다. 이러한 상황에서 본 연구는 중국 대학교졸업생을 대상으로 정식적인 멘토링 (formal mentoring)이 대학생의 창업의지(entrepreneurial intention) 에 미치는 영향 을 실증연구를 통해 구명하려는 목적을 지니고 있다. 정식적인 멘토링이 창업의지에 미치는 과정에서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매개효과도 분석하였다. 또한 정식적 인 멘토링이 대학생의 창업의지에 미치는 영향과정에서 신뢰(trust)의 조절효과를 분 석하였다. 실증연구를 위해서는 중국 동북재경대학교, 서북대학교, 강소대학교와 남방항공대 학교 졸업생들을 대상으로 설문조사를 실시하였다. 분석결과는 정식적인 멘토링이 창 업의지에 미치는 과정에서는 자기효능감(self-efficacy)의 매개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 타났다. 또한 정식적인 멘토링이 대학생의 창업의지에 미치는 영향과정에서 신뢰 (trust)의 조절효과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본 연구 결과는 중국대학교의 졸업생들이 창업의지가 강화(하는 기대)하기 위해서 는 정식적인 멘토링의 행사가 중요하다는 점을 시가(제시)해주고 있다. 중국대학교 관리자들의 정식적인 멘토링 역량을 제고하기 위해서는 권한위양을 위한 관리체제의 정비와 청업(창업)에 대한 교육이 필요하다 주제어 : 공식적 멘토링, 창업의도, 중국, 신뢰, 자기효능감 The Effect of Formal Mentoring on Entrepreneurial Intention in Chinese University : Mediating Role of Self-Efficacy and Moderating Role of Trust Wang, Zhi-Cheng(Nanjing Audit University) Liu, Yu-Xun(Zhaoqing University) Han, In-Soo(Chungnam University)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investigate empirically the impact of formal mentoring on entrepreneurial intention in Chinese university graduates. The mediating role of trust and the moderating role of self efficacy in the relationship between formal mentoring and entrepreneurial intention was also tested. The questionnaire survey was administered to the Chinese university graduates. The results showed that, first, formal mentoring had a significant relationship with entrepreneurial intention of Chinese graduates. Second, it was found that trust mediates the relationship between formal mentoring and entrepreneurial intention. Third, a moderating role of self efficacy was identified in the relationship between formal mentoring and entrepreneurial intention. Finally, some practical recommendations for developing formal mentoring and self efficacy for students who want to create business are suggested.

      • KCI등재

        조선시대의 분묘제도에 관한 연구

        김성욱(Kim, Sung-wook) 조선대학교 법학연구원 2009 法學論叢 Vol.16 No.2

        최근에 친일행위자의 재산을 국가로 귀속시키는 법률이 제정되었지만, 다양한 이유로 국가귀속이 되지 않고 있다. 특히 친일행위자의 후손들은 조선시대에 조성된 분묘 주위의 임야는 당시의 군주로부터 하사받은 조상소유의 부동산이므로, 일제강점기에 친일대가로 취득한 것이 아니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런데 그러한 주장은 부당하다고 생각한다. 왜냐하면 조선시대에는 개인이 산림을 배타적으로 점유할 수 없는 사점금지의 원칙을 법규범에 의해서 확고하게 정립시키고 있었기 때문이다. 조선시대의 법규범에 의하면, 당시의 임야소유권은 주권자인 군주 또는 군주로 대표되는 국가에 귀속하고 있었고, 개인은 분묘설치의 경우에 한하여 임야를 제한적으로 이용할 수 있을 뿐이었던 것이다. 이러한 조선시대의 국유산림은 일제강점기에 근대법이 이식되면서 일제정권에 의해서 개인의 사적소유권의 객체로서 전환되었다고 볼 수 있다. A Special Law about the Property Reversion of Anti National Actors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lately was passed in the National Assembly on 29, Dec. 2005. The apparatus of the nation were composed by the law. The government body is going to investigate the Property of Anti National Actors under the Rule of Japanese Imperialism. And if it is proven that ownership was acquired unfairly, it will be take them back to the State. Of course, Somebody who has a complaint can institute administrative judgment or administrative litigation. The government body published an interim announcement recently that the descendant of Anti National Actors instituted administrative judgment. The point of the claim was the existence of ancestorial graves. I think that the claim of the descendant of Anti National Actors is unreasonable. Because the Chosun Dynasty(Yi dynasty) was stipulated in its law prohibition of exclusive private property right to woodland(sajomkeumji 私占禁地), which means all the woodland belongs to the nation or the king as a sovereign by law. However, the woodland of State Ownership was converted as an object of private ownership by Japanese Imperialism Government under Japanese Colonization. Then, what the descendants of pro-Japanese collaborators are arguing is unfounded, namely the argument that their title of the property was passed onto them during Japanese colonial rule sustaining the same identity.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separate the discussion of the fact that the precedent grave existed and the question of the price.

      • KCI등재

        東北三省 抗日運動의 成長

        金弘明 조선대학교 동북아문제연구소 1996 동북아연구 Vol.2 No.1

        1894年 淸日戰爭의 結果 朝鮮에 대한 宗主國이었던 淸은 그동안 朝鮮半島에서 진행되어 온 日帝의 영향력을 追認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 이래 형식적인 독립을 지탱해 온 조선은 1905년 乙巳保護條約, 1907년 丁未條約, 1910년 韓日合邦條約을 거침년서 점차로 일제의 노골적인 착취와 억압의 대상으로 마침내는 이의 식민지로 전락하고 만다. 이 시기를 전후해, 그리고 日帝의 移民政策에 의해 수많은 流亡民이 國境을 넘어 中國의 東北地區로 옮겨왔다. 日帝의 모진 탄압과 잔학한 살육에도 불구하고 朝鮮에서 抗日運動은 지속되었다. 그러나 그것은 改良主義의 水準에서 일어난 간헐적이고 局地的인 성격을 넘어설 수 없었다. 半島에서의 抗日運動이 어렵게 되면서 그 中心은 中國으로 이동 하였으며, 특히 武裝鬪爭의 준비와 전개는 朝鮮의 境界밖에 위치한 中國의 東北地域에서 가능하게 되었다. 그것은 1885년 이래의 義兵運動이 1910년에 들어서면서 壞滅하였고, 따라서 일부 殘留勢力은 國境을 넘어 延邊 또는 沿海州에서 根據地를 마련하면서 시작된다. 이 글은 朝鮮이 滅亡함에 따라 抗日武裝鬪爭의 發源과 成長은 中國 動北3省에서 전개된 그 투쟁의 과정과 성격을 중심으로 살펴보려는 것이다. 北境의 抗日運動은 대체로 6段階로 나누어 볼 수 있으며, 곧 ① 1910년경부터 1920년 "庚申年大討伐에" 이르기 까지 ② 1926년 3府 정립시기까지 ③ 1927년 시작된 "대한독립군"과 조선혁명군"의 1934년에 이르는 항일시기, 그리고 ④ 1922년네서 시작하여 1931년에 이르는 抗日武裝力量의 준비시기 ⑤ 1931년부터 시작하여 1940년에 이르는 抗日遊擊隊시기 ⑥ 1940년 이래의 쏘련 國境에서의 투쟁시기이다. 앞의 3단계는 資産階級주도의 민족주의의 기조위에서 전개된 歷史를 그리고 뒤의 3단계는 民衆에 기초를 둔 民族主義의 기조위에서 전개된 歷史를 살펴본다. 그러나 여기서는 이러한 운동이 있게 된 일련의 條件으로서 東北으로의 日帝의 勢力擴張과 東北의 經濟的 變化를 검토하면서 20年代 前後의 抗日武裝鬪爭을 간단히 검토하는데 그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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