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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원의 철학(Perennial Philosophy)에 대한 켄 윌버의 비판 : 한국종교사상에서의 대안을 모색하며

        허훈(Hoon Heo) 경희대학교 인류사회재건연구원 2021 OUGHTOPIA Vol.36 No.2

        ‘영원 철학(Perennial Philosophy)’은 전(全) 세계적으로 회자되고 있다. 하지만, 동아시아에서의 영원철학 연구는 헉슬리(A. L. Huxley)의 저작만을 번역·출간하는데 머물고 있다. 이에 영원철학의 범주에 아시아권의 인물이나 사상은 거의 거론되지 않는다. 그러나 한국 근대에 출현한 종교 사상들 특히 동학(1860)은 영원철학의 핵심교의 (That Art Thou, “그대가 그것이다.”)를 종지(宗旨)로서-‘인내천(人乃天)’으로-직접 표방한다. 동학은 그 누구도 영원철학으로 언급한 바 없지만, 헉슬리가 대표적인 영원철학의 표본으로 삼은 힌두교보다 거의 온전하게 영원철학의 정의에 근접해 있다. 또한, 켄 윌버(Ken Wilber, 1949~)에 따르면, 영원의 철학은 크게 두 가지의 결함을 갖는다. 하나는 “소여(所與)의 신화”의 함정에 빠져 있다는 것”이고, 또 다른 하나는 고래의 영원의 철학에는 “근대적인 ‘진화(進化)’의 관념이 부족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한국 근대에 출현한 동학과 김일부(金一夫, 1826∼1898)의 정역(正易)사상, 그리고 증산(甑山, 1871~1909)의 원시반본(原始返本) 사상은 현재 영원의 철학이 안고 있는 주요 결함에 대해 모종의 대안을 제시한다. The Perennial Philosophy has been spoken all over the world. However, Research on it in East Asia is limited to the translation and publication of Aldous Huxley’s works. Therefore, in the category of Perennial philosophy, Asian figures or ideas are rarely mentioned. However, among the religious ideologies, especially Donghak(東學, 1860) which appeared in the modern era of Korea, directly advocates the core doctrine(=That Art Thou, You are That) of the Perennial Philosophy as the Tenets of Donghak, that is, “Innaecheon(人乃天, humanity is Ultimate Reality)”. Donghak has never been mentioned as an Perennial philosophy, but it is almost completely closer to the definition of the Perennial philosophy than the Hinduism, which Huxley has used 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Perennial philosophy. Also, according to Ken Wilber(1949-), the Perennial philosophy has two major flaws, one is “the myth of the given”, and the other is that the Perennial philosophy was “lack of the modern concept of ‘evolution’.” However, Donghak(東學, Eastern Learning) and Kim Il-Bu(金一夫, 1826–1898)’s Jeong-yeok(正易, A Correct Theory of Changes) ideology, and Jeung-san(甑山, 1871–1909)’s Wonsibanbon(原始返本, Seeking Out the Original Root) ideology which emerged in modern Korea, offer some kind of alternative to the major flaws of the Perennial philosoph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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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論文) : 1930년대 상하이 극장의 민족지형

        장동천 고려대학교 중국학연구소 2013 中國學論叢 Vol.39 No.-

        早期上海電影業被外國人掌權的事實給後來的上海電影業帶來了巨大的影響.尤其1920年代好萊塢重新調整電影産業幷把他推廣到東亞電影業以後, 這就直接影響到了在中國進口電影最多的上海影院.從1930年代開始, 美國的電影超越了歐洲幷且占據了上海影院的百分之八十以上.從1920年代中葉起, 改建爲豪華影院的屛幕上美國電影占據了絶大多數, 而且根據進口電影的供應量城市裏的電影院也隨之被劃分爲幾個等級.這時在上海去電影院的行爲象征著最新流行的時尙擧動, 因此隨著影院的等級觀衆也被賦予了文化身분上的等級.當時的上海不僅是最大的電影消費城市, 而且還是美國電影占有率最高的城市.因此從進口影片的多樣性的觀點來看, 1930年代上海的觀衆與以往的觀衆相比, 能選擇的影片的範圍反而被縮小了.雖然電影業的基礎在租界最爲發達, 但是與其他城市相比因爲未能得到政府的保護, 所以好萊塢産業的攻勢則更可以視爲對上海制片人的威脅.盡管如此, 在1930年代中國電影通過從所未有的發展, 影院的民族形勢也開始發生了變化.中國電影之所以能有如此顯著的進步不僅是因爲有左翼人士的參與, 而且還是因爲包括話劇在內多種藝術體裁的作家與批評家對電影有了新的認識.因爲有了他們, 電影業才獲得了如此大的發展.但是從劇場的內在與外在的原因來看, 不容忽視的是這發展不僅是通過從事影業的中國企業的努力奮두而獲得的, 而且這發展還是由於受到了好萊塢的影響-卽使這是效果論的觀點-中國的電影市場才能得到重新調整幷且進行現代化的.從影院的民族形勢的角度來分析, 若把到1920年代中葉的時期以宏觀的觀點稱作在西方的多數流浪性電影從事者獨呑了影院的情況下, 多數的小國産企業在電影業艱難地生根發芽的時期的話, 那麻1930年代則可以稱爲面對巨大的、組織化的美國影片的物流網, 國産企業通過多方面的嘗試使民族文化得到成長的時期.本文通過民族的對立局面, 卽從宏觀的角度來看, 以外國與中國電影從事者之間圍繞著影院而發生的衝突的角度, 分析了1930年代的上海電影業的情況-美國電影業獨呑影院的同時在電影業出現了民族電影發展的現象.在本文中, 兩者的對立與矛盾關系則通過對電影院認識的轉換、供應商的重新調整與電影院的等級化、以及以政治變化爲基礎的國産企業的進步等層次加以敍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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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스또옙스끼의 〈영원한 남편〉에 나타난 ‘영원성’의 문제 연구

        조혜경(Cho Hye Kyung) 한국노어노문학회 2010 노어노문학 Vol.22 No.1

        본 논문은 도스또옙스끼의 단편소설(рассказ) 〈영원한 남편Вечный муж〉에 나타난 ‘영원성’의 문제를 두 가지 차원에서 접근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두 가지 차원 중 하나는 등장인물의 차원이다. 소설의 제목에도 언급되고 있듯이 아내에게 배신당한 남편인 뜨루소츠끼는 자신의 아내의 정부였던 벨차니노프로부터 ‘영원한 남편’이라 불린다. 이야기가 전개됨에 따라 벨차니노프는 뜨루소츠끼의 정체를 알고 싶어 하고 자신의 정의에 때론 의문을 품고 또 때로는 혼돈스러워 하는 모습을 보인다. 왜냐하면 벨차니노프는 자신이 사랑의 삼각구도에서 영원한 승자이기를 바라며 그가 배신당한 ‘영원한 남편’의 자리에 머물러 있기를 바라지만 뜨루소츠끼는 때로는 순수한 낭만주의자로, 또 때로는 우스운 광대로 나타나며 벨차니노프의 심경에 혼란을 야기시키고 그의 맘을 흔들어 놓는다. 그리고 그러한 벨차니노프의 심적인 동요와 방황은 뜨루소츠끼에 관한 거의 비슷한 내용을 가지고 있는 두 번의 꿈과 그와의 에피소드, 이를테면 술에 취한 뜨루소츠끼가 자신에게 키스를 해달라는 요구, 그가 밤에 요강을 찾아 그에게 다가오는 장면, 그가 칼을 들고 벨차니노프를 헤치려 하는 장면, 마지막으로 기차역에서의 우연한 만남 등을 통해 드러난다. 여기서 벨차니노프가 정의한 ‘영원성’의 개념은 니체의 ‘영원회귀설’에서의 영원성, 즉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이전 것의 반복에 불과하며 최종적인 목표를 가지지 않는다는 내용과 연관되는 것으로서 벨차니노프에게 뜨루소츠끼는 사랑의 삼각구도에서 변하지 않는 ‘영원한 남편’일 뿐이다. 소설의 구성 차원에서도 영원성 혹은 반복성은 부각된다. 각 장은 독립된 제목을 가지는 독자적인 장들로서 1, 5, 6, 12장을 제외한 모든 장이 뜨루소츠끼에 관한 벨차니노프의 생각, 묘사 등이 주를 이루며 각 장의 마지막 부분은 예외없이 뜨루소츠끼에 할애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제목과 각 장을 나란히 배열해 놓고 보았을 때 ‘영원한 남편’이란 제목과 마지막 17장인 ‘영원한 남편’ 장은 2장(‘벨차니노프’)부터 16장(‘분석’)까지의 내용을 감싸고 있다. 따라서 소설은 ‘영원한 남편’으로 시작해서 ‘영원한 남편’으로 끝나는 셈이 된다. 더군다나 사건이 진행됨에 따라 벨차니노프는 뜨루소츠끼의 관찰자가 아니라 점차 그의 모습 속에서 자신의 모습을 포착하고 양자의 대립성보다 유사성에 주목함으로써 ‘영원한 남편’에 대한 그의 집착과 강박증의 정도가 심해진다. 그런데 마지막 17장에서 우연히 만난 뜨루소츠끼가 결혼을 하여 다른 보금자리로 가기 위해 벨차니노프를 떠나가 버림으로써 후자는 사랑의 삼각구도에 ‘영원히’ 혼자 남게 되고 만다. 결국 소설에서 ‘영원성’은 타자와의 관계에 있어 자신의 존재 기반 혹은 우월감을 확인하고자 하는 벨차니노프의 내면의 은밀한 욕구를 반영한 것이며 그러한 욕구는 자신보다 열등하다고 믿었던 타인의 변화에 당혹스러워하는 ‘고독한 연인 혹은 정부(情夫)’의 일그러진 모습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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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한긍정과 힘의 반복으로서의 존재론

        정영수(Jeong Young-Su) 서강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10 서강인문논총 Vol.0 No.27

        삶과 사유는 분리할 수 없다. 사유는 삶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삶은 또한 인간을 위한 것이어야 한다. 니체는 왜 근대 인간들의 삶이 연약해져 ‘마지막 인간’에 이르게 되었는지 그 이유를 사유했다. 어떻게 사유가 ‘고귀한 인간’즉, 위버멘쉬를 향한 인간의 삶을 개선시킬 수 있을 것인가? 니체의 사상에서 ‘영원회귀’라는 개념은 아주 필수적이면서도 중요한 개념이다. 보통의 사람들은 말할 것도 없이 근대의 철학자들에게 이는 쉽게 이해하기가 어려운 개념이었다. 왜냐하면 그들은 ‘영원회귀’에서 ‘동일성’과 ‘반복’이라는 중요한 개념이 ‘힘에의 의지’와는 말할 것도 없이 ‘인간의 자유’나 철학적 윤리학에서의 실천 개념들과 결합될 수는 없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영원회귀란 이 시간, 장소, 사건, 그리고 나를 향한, 나와 더불은, 내 안과 내 앞에 있는 모든 것이 반복된다는 사상이다. 이것은 저주인가? 지옥인가? 아니면 능동적 기쁨이며 즐거운 사건인가? 첫째는 연약한 자들의 태도이지만 둘째는 강한 자들의 태도이다. 왜 끝없는, 무한한 반복이 능동적이고, 즐거운 반복이 되는지를 탐구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적이다. 필자는 반복(repitition)은 수동적인 양태이면서, (생성의) 반복(recurrence)은 능동적인 양태임을 주장한다. 왜 수동적인가? 이는 우리의 운명에 작용하는 영원회귀의 의미를 이해할 직관적 지식을 우리가 지니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필자는 이를 설명하고자 한다. 또한 필자는 인간의 운명이 슬픔과 원한, 불행이 반복되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우리는 살도록 운명지워졌으며, 따라서 우리의 운명은 의욕해야 하는 것임을 주장한다. 우리는 반복되는 즐거운 능동성으로 우리의 비극을 사랑해야 한다. 반복은 돌아옴, 다시 태어남, 다시 긍정하는 것이다. 이는 지겨운 반복만은 아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니체의 진실성은 인간 존재가‘영원회귀’를 통해서 개선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데 있다고 주장한다. 왜냐하면, 인간의 삶은‘피안의 사유’ 즉, 신의 나라, ‘쓸데없는 개념’ 즉, 작은 이성, 그리고 ‘전도된 가치’ 즉, 선악에 젖어있기 때문이다. 이것들은 심각한 질병들인 바, 니체는 몇 가지 치료제를 제안한다. 위버멘쉬는 우리의 목적이 되어야 하며, 힘에의 의지는 삶을 가꾸는 필수적 방법이 되어야 한다. 따라서 그는 망치로 수행하는 ‘가치의 전도’를 제안한다. 영원회귀는 이 위버멘쉬를 향해가는 노정에서 핵심적 사유로 기능한다. 몇몇 연구자들은 이 사유가 과학적 근거가 없기 때문에 논리적이지도, 이성적이지도 않다고 주장한다. 약간의 철학자들은 이 사유는 단지 자아나 마음수련을 위한 윤리적 의미나, 기껏 해석학적 의미밖에 없다고 말하며, 따라서 중요한 철학적 의미는 없다고까지 주장한다. 그러나, 근래에, 이 영원회귀를 둘러싼 철학적 설명들이 다양해지고 있다. 근래, 이러한 태도들은 과거보다는 보다 적극적이고, 창조적으로 변해가고 있다. 이 논문에서 필자는 ‘영원회귀’의 개념이 니체의 다른 주요 개념인 ‘힘에의 의지’와 결코 분리될 수 없다는 것을 주장한다. 필자는 영원회귀는‘시간’에 관한 형이상학적 관점이지만, 힘에의 의지는 ‘공간’에 관한 물리적 태도라는 것을 말한다. 영원회귀는 끝없는 우주론적 시각으로부터의 관점이지만, 힘에의 의지는 마음으로부터의 발산이며, 영원회귀적 태도로부터의 실천이다. 필자는 이것이 니체에게서 아주 유용하면서도 심원한 핵심적 개념이라고 확신한다. 따라서, 첫째로, 필자는 니체의 ‘영원회귀’에 관해 약간의 설명을 행한 뒤, 왜 이것이 니체에게서 최고이자, 심원한 철학적 개념인지를 설명하고자 한다. 둘째로, 필자는 이 사유에 관한 연구 역사를 약간의 연구자들을 통해 제공하고자 하며, 특히 짐멜, 뢰비트, 하이데거로 대표되는, 물리적, 윤리적, 우주론적, 형이상학적 관점을 설명하고자 한다. 덧붙여, 근래의 반-물리학적, 반(신)-형이상학적 탐구자를 소개할 것이다. 주로, 들뢰즈로 대표되는, 이 연구자들은 니체의 광범한 철학적 영향력아래에 있었던 철학자들이다. 이를 통해, 필자는 영원회귀에 관한 오랜 해석들 중의 몇 가지는 잘못된 해석일수도 있음을 주장하며, 이에 반해 근래의 과학적 가설들이 영원회귀에 관한 약간의 긍정적 태도를 지니고 있음을 설명한다. 다음으로, 필자는 세계를 대하는 우리의 관계와 마음수련이, 니체가 위버멘쉬로 가는 노정으로 긍정한 이 ‘영원회귀’라는 사유실험을 통해 변화할 수 있는 지를 논증한다. 이를 통해, 필자는 첫째, ‘순간’을 다루는 바, 이는 ‘과거’와 ‘미래’을 향한 출발점으로서의 모멘트인이 시간과 장소(공간)이다. ‘순간’은 개별자들이 극단적으로 차별되는 서로 다른 길을 향해가는 유일한 모멘트이다. 둘째, 필자는 우리의 터전이며, 우리의 관계물인 ‘세계’를 살펴본다. 우리는 우리앞의 사물들과 소통하며, 그것들과 마주하고 있다. 때때로, 우리는 그들에 맞서 투쟁해야 한다. 우리는 그들의 힘에 둘러싸여있도록 운명지워져 있다. 이것들 모두가 우리의 ‘세계’이다. 여기서 필자는, ‘영원회귀’가 ‘힘에의 의지’를 지지하는 중요한 추동력임을 입증하고자 하며, 힘에의 의지를 완성하게 하는 유일한 지짓대임을 제안하고자 한다. 셋째, 필자는 우리의 존재, 삶, 자아로서 ‘존재자’를 다룬다. 니체는 신체로부터 분리된 독립적 의식으로서의 순수한 ‘자아’를 부정했다. 여하한 순수 ‘반성’이나 ‘개념’은 여하한 홀로의, 고유한 자아에 존재하지 않는다. 자아란 의심스럽고, 믿을 수 없는 관념이다. 니체의 자아는 인간의 정서나 정념 등으로부터 독립할 수 없는 많은 보충적인 것들로 엮여있다. 필자는 여기서 자아에서의 힘에의 의지란 독립된 주체나 영웅으로 확언되는 것이 아닌, 타인이나 다른 사물들과의 관계를 인식하는 것이며, ‘힘에의 의지’란 우리가 구현된 이 관계를 보다 명백히 하고, 상승시키는 것임을 인식하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덧붙여, 우리는 이 관계들이 무한히, 끝없이 되돌아오고, 소생하며, 재현될 것을 적극적으로 요구해야 한다. 그리고 이런 태도는 무한히 영원한, 반복의 시야로부터만 가능하다. ‘영원회귀' 개념은 이런 존재자를 완성시킨다. Life and thought are indivisible forms. Thought ought to be for life. Life ought to be for man, too. Nietzsche had thought that reasons why modern manly lives were so feeble that they had becoming at ‘last man’. So how thoughts can improve manly lives toward ‘Noble man’s. viz Ubermensch? 'Eternal Recurrence' is very necessary, absolutely important concept of Nietzsche’s thought. It had been difficult to understand easily to modern philosophers not to mentions of ordinary people. Because they had been thinking that 'the sameness' and 'the repitition' of which important concept in eternal recurrence are never associated with 'man's freedom' and practical theory in Philosophical Ethics, much less 'Will to Power'. Eternal recurrence is the repitition of this time, place, event, and everything before, in, with, to me. Is that a curse? Is that a damnation to you? and a hell? Or is that a positive bless and a joyful event? First is an attitude of feeble persons but second is of strong. The reason Why boundless, timeless repitition is becoming at positive, joyful recurrence is the purpose of this paper. Repitition and recurrence are dual mode of Nietzsche's eternal repeat. I argue that repitition is a passive mode to ours, but recurrence is a positive. Why passive? Because, we doesn t have any intuitive knowledge to understand their meaning for our destiny. I would explain that. I, too, argue despite our destiny is repeated with sorrow, resentment, unhappiness, we are destined to live, therefore, ought to will our destinies. And, we ought to love our tragic with repeated joyful positiveness. recurrence is re-coming, re-born, re-affirming. It's not a boring repitition. With this paper, I will say that Nietzsche's sincerity was, maybe, that our existence should be improved through his thinking, namely 'Eternal Recurrence . For manly lives had been wet in Beyond Thought , viz The nation of God, in 'Useless Concept', viz little reason, in 'Reversed Value' viz Good and Evil. They are serious diseases, Nietzsche suggest to ours some remedies here. Ubermensch should be our purpose, will to power should be our necessary method for forming lives. For that, he suggest 'value overturn' with hammer. Eternal recurrence is the core thought on man's road toward becoming Ubermensch. Some researchers comments that it's not a logical, reasonal thinking, for any scientific grounds had not been found at them. Other Philosophers said that it has only ethical meaning for self or mind control, at the most hermeneutical meaning, and, it hadn't any important philosophical meaning. But, at this times, philosophical explanations are varied at this 'Ethernal Recurrance'. Nowadays, this attitude had been changing more positive, more creative than last period's. In this paper, I argue that the concept 'Ethernal Recurrence' is never divided with 'Will to power' which is Nietzsche's main concept, too. I would say that first is metaphysical perspective to 'Time', second physical 'Space'. First is the view from endless cosmological eyes, second the emanation from mind, the pratice from that attitude. I confirm this concept is the best useful and profound core thought of Nietzsche. Therefore, first, I give some explanations about Nietzsche's 'Eternal Recurrence' and then, explain why it should be his best, deepest philosophical concept. Second, I would give some explanation about it's history through some researchers whose points are physical, ethical, cosmological, metaphysical viewpoints, especially, Simmell, Luwith, and Heidegger. Added to these, I will introduce recent anti-physical, anti(new)-metaphysical researchers. They are, mainly, philosophers whose thinking are under Nietzsche's extensive philosophical influence, especially Deleuze. Through and with these, I insist some old interpretations, maybe, would been wrong insistences and against these I suppose recent scientific propositions have some pro-attitude to eternal recurrence. Next, I argue how our relati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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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Immortality in Romanticism : An Exploration of its Origin in Victor Hugo's Plays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 희곡에 나타나는 영원성의 근원에 관한 연구

        Kim, Jung-hyo 한국미학회 2003 美學 Vol.35 No.-

        낭만주의 문학의 서장을 연 프랑스의 작가 빅토르 위고의 희곡 『에르나니』(1830)에서 사랑하는 연인, 에르나니와 도나솔은 독약을 마시며 "보다 나은 다음 세상"에서 만나기를 기약한다. 이 두 연인들은 사회의 불공평과 강압적 요소들이 자신들의 사랑을 방해한다고 믿으며 죽음으로 완성시키려는 사상을 보인다. 이러한 낭만주의 주인공들이 갖고 있는 사상은 『에르나니』 뿐만 아니라 위고의 또 다른 작품 『루이 블라』(1838)에서도 나타난다. 에르나니와 루이 블라가 사랑을 위해 죽음을 불사하는 극적 구성은 위고의 낭만주의적 기술뿐만 아니라 "보다 나은 다음 세상"의 이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러한 '영원성(永遠性)'의 사상은 위고의 등장인물에 국한되지 않고 19세기 낭만주의 비극의 주요 모델이 되었다. 이 글은 빅토르 위고의 낭만주의 비극에 나타나는 '죽음 다음의 세상', 다시 말해, 작품의 중심사상이 되는 영원성이 어디에서 근원하고 있는지를 고찰하고 있다. 사실 빅토르 위고는 자신의 작품에 나타나는 영원성이라는 사상을 구체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를 거의 드러내지 않은 까닭에 그 근원을 분석한다는 것은 애매할 수밖에 없다. 따라서 이 글은 빅토르 위고의 작품에 나타나는 영원성의 근원이란 주제를 ①빅토르 위고의 개인적인 가족사와 ②19세기 프랑스 사회에 끼쳤던 동양영향과 밀접한 관계를 맺은 사회, 문화적 분위기를 중심으로 접근하고 있다. 한 작가의 사상을 탐구하기 위해서는 그 작가의 내적 환경과 외적 세계에 대해 무시하고 논의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원래 낭만주의 선언을 서문에 실었던 희곡 『크롬웰』(1827)은 아버지 레오폴드 위고에게 헌사 하는 작품이었지만, 그는 이듬해에 갑자기 숨을 거뒀다. 1830년에 발표된 『에르나니』를 기점으로 빅토르 위고 개인에게 많은 일들이 생겼다. 아버지와 어머니를 잃고 사랑하는 자신의 딸과 아들과 거의 평생을 돌봐주었던 가정부와 사별하면서 위고는 삶과 죽음의 존재란 문제에 대해 깊은 고민을 하게 되었다. 빅토르 위고는 『에르나니』를 발표한 뒤, 자신의 가슴 속에서 가톨릭의 믿음이 없어졌음을 고백했다. 특히 장녀 레오폴딘의 익사(溺死)사고는 '위고의 첫 번째 정신적 죽음'이라고 할 만큼 충격적이었으며 자신의 삶에 대해 새로운 시각을 갖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 위고는 점차 사후세계와 영혼에 대한 글을 많이 발표하였으며 결국 "죽음에 대한 허무주의"를 '영원성'으로 극복하고자 했다. 즉, 죽음이 없다면 인생의 의미도 찾기 어렵다는 위고의 사상은 이처럼 개인적 경험에서 출발하였다. 위고의 낭만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영원성이란 주제는 사실 기독교적인 차원에서 나온 것이 아니라 당시 유럽의 지식인들 사이에서 일어났던 동양사상과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다는 것도 흥미롭다. 이러한 점은 에드워드 사이드의 『오리엔탈리즘』에서 위고를 "동양풍에 매우 열정적인 사람"이었다는 지적에서도 어렵지 않게 찾아 볼 수 있다. 특히 위고는 화가 외젠들라크루와, 고티에 같은 당시 동양에 관심이 높았던 지인들과 많은 접촉을 했다. 위고 자신도 『에르나니』를 발표하기 한해전에 "그 어느 때 보다 동양의 열품이 우리를 감싸고 있다"고 피력했다. 위고는 일종의 '코멘스먼트(commencement)'에 비유하며, 죽음을 인생의 끝이면서 또 다른 삶의 시작의로 여겼다. 죽은 뒤 우리의 몸은 땅과, 나무와, 꽃과, 계곡과 산야와 같은 자연계로 다시 회귀한다는 그의 주장은 동양의 윤회사상과 흡사하다. 이러한 사상은 위고의 낭만주의 작품에 등장하는 주요인물이 자신들을 자연의 일부분이거나 그 자체로 묘사하는 대목과 일치하고 있다. 의식적이든 무의식적이든 19세기 유럽에 유행처럼 불었던 동양사상의 영향은 위고의 낭만주의 희곡에서 보이는 영원성의 토대를 제공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했음을 알 수 있다. 이상과 같이 위고의 모든 작품에서 영원성이란 주제가 담겨져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의 대표적인 낭만주의 희곡, 『에르나니』와 『루이 블라』에는 '죽음 다음의 세상'이란 '영원성'이 중심사상을 이루고 있다. 사랑과 죽음과 삶이라는 단어들이 일체화하거나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는 빅토르 위고의 사상은 그의 전 생애에 걸쳐 사랑하던 가족들과의 사별이라는 개인적 경험과 19세기 프랑스에 불었던 동양사상과 그에 대한 관심을 가졌던 지인들과의 교류에서 형성되었음을 부정할 수 없다. 끝으로 방대한 주제와 접근의 산만성으로 인해 영원성의 구체적 개념과 사상, 다른 낭만주의 작품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에 대한 분석이 제외되었음은 아쉬움으로 남는다. 이것은 또 다른 차원의 연구대상이며 현대적 의미로서의 영원성, 혹은 반(反)-신고전주의와 빅토르 위고의 영원성에 대한 고찰과 같은 좀더 세부적인 낭만주의 연구를 위해 이 글이 도움이 된다면 위안이 될 것이다.

      • KCI등재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성의 의미

        손상용(Son, Sang-Yong) 서울대학교 철학사상연구소 2015 철학사상 Vol.56 No.-

        본 논문은 인간에게 있어서 영원성의 의미를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를 통해 밝혀보는 것을 목표로 한다. 영원성이란 개념적으로는 시간을 초월한 무(無)시간적인 것이다. 필자는 이러한 영원성을 실존철학에 맞추어 그 의미를 해석해보려고 한다. 이러한 해석을 위해 실존철학의 선구자인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사상을 고찰할 것이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사상에는 영원성이라는 공통요소가 발견되기 때문이다. 우선 키에르케고르의 저서 『불안의 개념』과 『죽음에 이르는 병』을 통해 그의 영원성의 의미를 밝혀본다. 그리고 니체의 저서 『차라투스트라는 이렇게 말했다』에서 묘사되고 있는 영원회귀 사상을 통해 그의 영원성의 의미를 밝혀볼 것이다. 키에르케고르와 니체의 영원성의 의미를 밝혀낸 후, 양자의 영원성의 의미를 시간이라는 요소를 통해 고찰할 것이다. 왜냐하면 영원은 시간이 끝없이 이어지는 것으로 생각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어서 양자의 영원성의 의미를 비교분석하여 공통점을 찾아내고자 한다. 만약 두 철학자의 영원성의 의미의 공통점이 발견된다면, 그것은 인간에게 있어서 실존적 영원성으로 자리 잡을 것이다. 왜냐하면 키에르케고르와 니체는 인간이 실존함이라는 것을 그들의 사상으로 보여주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 철학자의 영원성의 의미는 차이점을 가지고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無)의 의식인 불안, 절망 그리고 극단적 니힐리즘의 극복하는 방법을 다르게 제시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차이점을 분석하여 양자가 인간 자신을 어떠한 존재로 바라보고 있는지 검토할 것이다. 마지막으로, 지금까지 논의된 영원성을 바탕으로 현대인들의 모습을 고찰할 것이다. 그들에게 왜 영원성이 결여되어 있으며, 영원성은 어떤 의미를 가지며, 어떻게 해야 이 영원성을 회복할 수 있는지를 검토하고자 한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clarify the meaning of eternity for human beings through Kierkegaard and Nietzsche. Eternity is a conceptually transcendent thing that cannot be measured by time. My aim is to analyze eternity based on existential philosophy. For this analysis, I consider Kierkegaard and Nietzsche, pioneers in existential philosophy, because eternity is a common element found in their ideas. First of all, I researched Kierkegaard’s meaning of eternity by studying his The Concept of Anxiety and The Sickness Unto Death. And I investigated Nietzsche’s meaning of eternity by examining the eternal return described in his, Thus Spoke Zarathustra. After I demonstrated the meaning of eternity for the two philosophers, I clarified the meaning of eternity for each of the philosophers by discussing time. This is because eternity seems to be endless in terms of time. Subsequently, I explicate the common grounds of the two philosophers by comparing their meanings of eternity. If a common ground is to be discovered between the two philosophers’ ideas of eternity, it is the existential eternity of human beings. This is because Kierkegaard and Nietzsche demonstrated that human beings are existence through their thoughts. However, the two philosophers’ meanings of eternity differ in their methods of overcoming the consciousness of nothingness: anxiety, despair and radical nihilism. After I examined this difference, I examined their viewpoints about the human self. Finally, I explain the form of modern human beings based on the eternity discussed until now. I analyze why humans lack eternity in themselves, what meaning eternity has for them and how they can recover eterni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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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논문 : “세상의 영원성”에 관한 Thomas Aquinas의 사상

        김이균 ( Yi Kyun Kim ) 한국중세철학회 2007 중세철학 Vol.0 No.13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의 영원성도 그것의 시간적 시작도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이는 신(神)만이 소유한 불변성에 귀속시킬 수 있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영원성’(aeternitas)과 시간적 무제약성의 뜻으로 세상에 귀속시킬 수 있는 파생적 의미에서의 ‘영원성’을 명확히 구분한 결과다. 이 구분을 전제할 때, ‘세상의 영원성’(aeternitas mundi)은 결코 신과 함께 영원함(coaeternu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로부터 시간적 제한 없이 실존해온 세상을 지시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의 영원성과 창조성이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함을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신은 자신의 절대적 전능성과 자유로운 의지로 ‘영원한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옳다. 자신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 토마스는 ‘영원한 창조’의 모순성을 주장하는 반론들, 특별히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현실태의 무한적 다수성’과 관련된 보나벤뚜라의 반론들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방 스텐베르겐(F. Van Steenberghen)과 보난세아(B. M. Bonansea)와 같은 학자들은 토마스의 논지에 나타난 일관성과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보나벤뚜라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비록 보나벤뚜라가 주장한 논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토마스의 주장은 여전히 일관성 있고 보나벤뚜라에 비해 보다 설득력 있는 입장임을 이 연구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창조’의 비모순성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토마스는 이 주제에 대한 이성적 진리와 계시 진리 사이의 조화를 확신한다. 비록 세상의 영원성도 시간적 시작도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도외시한 ‘적합성’(convenientia)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 항상 실존해오지 않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 신의 선성(Bonitas)에 보다 적절함을 이성적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당연히 그리스도 교의 계시 진리와 조화를 이룬다. Thomas Aquinas maintains an agnostic position on the issue of the world`s eternity; neither the world`s eternity nor its temporal beginning can be rationally proved. This conclusion stems mainly from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two senses of `eternity`: the strict sense of `eternity` can be attributed to immutability which God alone possesses, and `eternity` attributed to the world meaning temporal infinitude. From this distinction, it is clear that `eternity of the world` does not mean co-eternal with God, but merely the world without temporal finitude from the past. Consequently, there is no reason to refute logical compatibility of the eternity and createdness of the world and also it is certainly true that, with his absolute omnipotence and free will, God could have created the world eternally. To consolidate his conviction for the non-contradictory status of an eternal creation, Thomas tries to rule out some counterarguments, especially those raised by Bonaventure, which are closely related to topics such as `creatio ex nihilo` and of `possibility of an actually infinite multitude`. Several scholars like, F. Van Steenberghen and B. M. Bonansea, strongly criticise Thomas` arguments and consider Bonaventure`s position more plausible, pointing out some incoherences and irrelevances in Thomas` texts. As a contrast to these scholars` reviews, this paper shows that, although Thomas fails to identify crucial points of Bonaventure`s real contentions, Thomas` arguments are still coherent and more plausible than Bonaventure`s. In the course of proving a non-contradictory status of an eternal creation, Thomas is also convinced of the harmony of reason and revelation. Although neither the world`s eternity nor its temporal beginning can be rationally proved, Thomas highlight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convenientia`, which has been mostly ignored by commentators, it is fitting for divine goodness to create the world which has not always existed. This is obviously in line with the truth of Christian Revel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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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독교와 유교에서 영원과 시간에 대한 어떤 형태들의 비교

        김동진 ( Kim Dong Jin ) 한국조직신학회 2021 한국조직신학논총 Vol.65 No.-

        논문의 목적은 기독교와 유교와의 영원과 시간의 어떤 유사한 형태들을 연구 하는 것이다. 물론 두 개의 전통들은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 논문은 영원한 삶과 일시적인 시간의 유형들인 과거, 현재 그리고 미래에 대한 공통적인 개념들을 탐구하고 분석하는 것이다. 방법론에 관련해서는 그 두 전통들의 영원과 시간 개념들의 비교는 효과적이고 분석적이다. 이 비교적인 접근은 한 독자가 영원과 시간의 서로 상관관계와 공존에 대하여 이해하고 다시 생각할 수 있다. 그것들의 비교는 그 두 전통들이 기존에 배워왔던 개념을 새로운 발전적인 개념들로 향상시키는 데 도움을 준다. 연구 내용과 관련해서, 기독교의 영원과 시간의 개념들은 신플라톤이즘을 따른다―예를 들면, 플로티노스의 이론. 그의 관점에서 영원과 시간은 함께 공존한다. 시간은 일시적은 유형을 나타낸다―변할 수 있고 운동적 이다. 반면에 영원은 시간의 멈춤이 아니라 시간의 끊임없는 계속성이다. 게다가, 유교에서 주희는 영원을 양과 음의 계속성으로 본다. 그것들은 서로 배타적이기도 하고 수용적이기도 하다. 그러므로 기독교에서 영원에서 산다는 것은 존재 그 자체, 즉 하나님께 예배하는 것이다. 반면에 유교에서 영원히 산다는 것은 태극(太极)을 경험하면서 규칙적인 예식을 통하여 이루어진다. 이 논문의 공헌은 크리스천들은 존재 그 자체, 하나님께 예배의 중요성을 경험하는 것이고 유교 적인 사람들은 예식 적인 삶에 충실하는 것이다. 예배와 예식은 각 전통 안에서 시간을 통하여 영원을 인식하고 경험하는 것이다. The purpose of this thesis is to research for some similar forms of eternity and time between Christianity and Confucianism. Of course, the two traditions differ from each other. However, this thesis focuses on exploring and analyzing the common concepts of the everlasting life and temporary modes, the past, present, and future. As regards the methodology, the comparison of the concepts of eternity and time between the two traditions becomes effective and analytical. Through this comparative approach, a reader can understand and rethink the interrelation and coexistence of eternity and time. Their comparison helps the two traditions develop the re-conceptualizations of the concepts they have learned. As for the content of the research, the concepts of eternity and time in Christianity traditionally follow Neo-Platonism, that is, the theory of Plotinus. In his view, eternity and time coexist. Time represents the temporary modes, changeable and moveable, while eternity means repose and stillness―not a stop of time but a nonstop as no an interval. In Confucianism, Zhuxi sees that eternity means the continuity of yang and yin, one in which they complement each other in time and, at the same time, are exclusive and inclusive. Therefore, in the two traditions, to live in eternity means that Christianity claims worshipping Being Itself― God and Confucianism accentuates living a ritual life experiencing the Supreme Polarity. The contribution of this thesis is that Christians discover the importance of worshipping Being Itself―God and Confucians engage in their ritual life. Worshipping and ritual life are the important ways for their followers to realize and experience eternity in the temporal modes, the past, present, and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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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세상의 영원성’에 관한 Thomas Aquinas의 사상

        김이균 한국중세철학회 2007 중세철학 Vol.0 No.13

        Thomas Aquinas maintains an agnostic position on the issue of the world’s eternity; neither the world’s eternity nor its temporal beginning can be rationally proved. This conclusion stems mainly from the clear distinction between two senses of ‘eternity’: the strict sense of ‘eternity’ can be attributed to immutability which God alone possesses, and ‘eternity’ attributed to the world meaning temporal infinitude. From this distinction, it is clear that ‘eternity of the world’ does not mean co-eternal with God, but merely the world without temporal finitude from the past. Consequently, there is no reason to refute logical compatibility of the eternity and createdness of the world and also it is certainly true that, with his absolute omnipotence and free will, God could have created the world eternally. To consolidate his conviction for the non-contradictory status of an eternal creation, Thomas tries to rule out some counterarguments, especially those raised by Bonaventure, which are closely related to topics such as ‘creatio ex nihilo’ and of ‘possibility of an actually infinite multitude’. Several scholars like, F. Van Steenberghen and B. M. Bonansea, strongly criticise Thomas’ arguments and consider Bonaventure’s position more plausible, pointing out some incoherences and irrelevances in Thomas’ texts. As a contrast to these scholars’ reviews, this paper shows that, although Thomas fails to identify crucial points of Bonaventure’s real contentions, Thomas’ arguments are still coherent and more plausible than Bonaventure’s. In the course of proving a non-contradictory status of an eternal creation, Thomas is also convinced of the harmony of reason and revelation. Although neither the world’s eternity nor its temporal beginning can be rationally proved, Thomas highlights that from the point of view of ‘convenientia’, which has been mostly ignored by commentators, it is fitting for divine goodness to create the world which has not always existed. This is obviously in line with the truth of Christian Revelation. 토마스 아퀴나스는 세상의 영원성도 그것의 시간적 시작도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다는 불가지론적 입장을 취한다. 이는 신(神)만이 소유한 불변성에 귀속시킬 수 있는 본래적 의미에서의 ‘영원성’(aeternitas)과 시간적 무제약성의 뜻으로 세상에 귀속시킬 수 있는 파생적 의미에서의 ‘영원성’을 명확히 구분한 결과다. 이 구분을 전제할 때, ‘세상의 영원성’(aeternitas mundi)은 결코 신과 함께 영원함(coaeternus)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단지 과거로부터 시간적 제한 없이 실존해온 세상을 지시하게 된다. 따라서 세상의 영원성과 창조성이 논리적으로 양립 가능함을 부정할 하등의 이유가 없으며, 신은 자신의 절대적 전능성과 자유로운 의지로 ‘영원한 세상’을 창조할 수도 있었다는 것은 분명히 옳다. 자신의 확신을 강화하기 위해 토마스는 ‘영원한 창조’의 모순성을 주장하는 반론들, 특별히 ‘무로부터의 창조’(creatio ex nihilo)와 ‘현실태의 무한적 다수성’과 관련된 보나벤뚜라의 반론들을 무력화시키려 한다. 그런데 방 스텐베르겐(F. Van Steenberghen)과 보난세아(B. M. Bonansea)와 같은 학자들은 토마스의 논지에 나타난 일관성과 부적절함을 지적하면서 보나벤뚜라의 입장이 더 설득력 있음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학자들의 주장과는 달리, 비록 보나벤뚜라가 주장한 논지를 정확히 파악하지 못했지만, 토마스의 주장은 여전히 일관성 있고 보나벤뚜라에 비해 보다 설득력 있는 입장임을 이 연구에서 논하게 될 것이다. ‘영원한 창조’의 비모순성을 입증하는 과정에서, 토마스는 이 주제에 대한 이성적 진리와 계시 진리 사이의 조화를 확신한다. 비록 세상의 영원성도 시간적 시작도 이성적으로 입증할 수 없지만, 대부분의 주석가들이 도외시한 ‘적합성’(convenientia)의 관점에서 볼 때, 신이 항상 실존해오지 않은 세상을 창조했다는 것이 신의 선성(Bonitas)에 보다 적절함을 이성적으로 알 수 있다. 이는 당연히 그리스도교의 계시 진리와 조화를 이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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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에 대한 고찰 - 영원회귀사상을 중심으로 -

        이서규 대동철학회 2016 大同哲學 Vol.77 No.-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은 힘에의 의지와 영원회귀사상을 서양형이상학의 해체작업으로 규정하는 것에 그 특징이 있다. 이러한 해석은 영원회귀사상을 가치전도의 시도로 규정하는데, 이것은 전통철학의 해체를 시도하는 하이데거의 입장에 고유한 것이기도 하다. 또한 하이데거는 니체의 유고의 언급에 주목하면서 니체 사후에 출간된 힘에의 의지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니체의 사상의 해석에서 신중한 태도를 취하고 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기에서 하이데거가 니체철학을 서양형이상학의 완성으로 규정하면서 자신의 철학과 거리를 둔다는 점이 간과되어서는 안 된다. 물론 하이데거는 영원회귀를 중심으로 한 니체의 형이상학이 플라톤이래의 전통형이상학의 주장들과 대결하고 있다는 점을 긍정적으로 평가한다. 그는 니체의 유고에서 언급된 다양한 단편적인 언급들에 주목하면서 새로운 철학의 구축을 시도하는 니체의 계획을 긍정적으로 파악한다. 하이데거는 궁극적으로 자신의 현존재분석론과 존재물음의 기획 속에서 이러한 니체의 작업에 대해서 비판적 태도를 제기하지만, 우리는 이러한 하이데거의 해석에서 니체의 철학이 전통형이상학을 해체하는 다양한 방식들을 논의할 수 있는 지평을 확보 할 수 있다. 즉 이러한 하이데거의 니체해석은 영원회귀와 힘에의 의지와 같은 사상이 전통형이상학과의 논쟁에서 어떤 역할을 하는지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시도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한 논의의 장을 제공할 수 있다고 생각된다. 이 논문에서는 영원회귀사상을 힘에의 의지와 가치전도의 문제와 연결시키면서 니체의 형이상학이 전통형이상학과 구분되는 특징들과 문제의식 그리고 이러한 니체의 시도에 대한 하이데거의 비판적인 입장이 무엇인지를 고찰하도록 할 것이다. Heidegger '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is characterized by applying the will to power and the eternal return to the dismantling of Western metaphysics. This interpretation defines eternal regression as an attempt of value subversion, which is also inherent in Heidegger's attempt to dismantle traditional philosophy. Heidegger, taking note of Nietzsche's remarks in posthumous work, has taken a cautious attitude in interpreting Nietzsche's thought by pointing out the problem that The will to power was published after Nietzsche's death. Nevertheless, it should not be overlooked that Heidegger sets Nietzsche philosophy as the fulfillment of Western metaphysics and sets it apart from his philosophy. Heidegger positively assesses that Nietzsche's metaphysics, centered on the eternal return, confronts the claims of the traditional metaphysics since Plato. He positively grasps Nietzsche's plan for building a new philosophy, paying attention to the various fragmentary references mentioned in Nietzsche's posthumous work. Heidegger ultimately raises critical attitudes about Nietzsche's work in his Daseinsanalytik and Being-Question, but we can see in his interpretation of Heidegger that Nietzsche's philosophy can discuss various ways of dismantling traditional metaphysics. In other words, Heidegger 's interpretation of Nietzsche seems to suggest that such ideas as the eternal return and will to power can play a role in debates within traditional metaphysics and provide a forum for discussion of whether Nietzsche' s attempt is justified. In this paper, I examine characteristics of Nietzsche's metaphysics as distinct from traditional metaphysics, and the critical consciousness of Nietzsche's attempts to link the eternal return to the question of powe rand value, as well as the question of value subvers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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