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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양양문화제의 전승 상황 연구 -강릉단오제의 전승 상황을 비교하여

        이경화(Lee, Kyung-hwa) 아시아강원민속학회 2022 아시아강원민속 Vol.37 No.-

        강원도 양양군을 대표하는 축제인 양양문화제는 그 기원이 단옷날을 전후해서 펼쳐졌던 성황제 계통의 향토신제(鄕土神祭)다. 그리고 전승의 모습이 강릉단오제와 많이 닮았다. 그리고 지난날 현산문화제로 시작한 이 축제는 양양지역의 전통문화 양식을 바탕으로 새롭게 만들어가고 있다. 오늘날의 강릉단오제는 신주빚기, 산신제(김유신 장군)와 대관령성황제 [국사성황(범일국사)과 여성황(정씨처녀)]를 시작으로 축제가 펼쳐진다고 했을 때 양양문화제는 고치물제와 성황제(장군성황신과 매화여성황신)를 시작으로 한다. 축제의 시원과 함께 이를 가늠할 수 있는 역사적 기록과 연계한다면, 강릉단오제는 ‘935년에 강릉사람 왕순식이 왕건 고려태조 을 도와 신검을 토벌하러 가는 길에 대관령 산신께 제사를 지냈다’는 『고려사』의 기록이 천년의 역사에 근거를 둔다 여기에 양양문화제는 고려 목종(穆宗) 10년(1007) 양주성을 축성하고 지금의 자리에 성황사를 짓고 순국영령을 위무하고 국태민안 과 풍년을 기원하는 성황제를 매년 봄 가을로 지냈던 것이 시초가 된다 그래서 이 축제 또한 천년의 역사를 계승하고 있다. 그리고 양양문화제는 이후, 조선시대 선조 25년(1592년)부터는 5월 단옷날을 기하여 ‘장군성황신’을 수호신으로 하는 성황제는 물론 성황굿을 성대하게 거행하였다. 이렇듯 세시와 명절로서의 단오가 중심축인 양양문화제와 강릉단오제는 강원도 동해안에 위치하면서, 양양군과 강릉시로 두 지역이 나란히 붙어있다. 하지만 서로의 말씨가 다르고 근현대사의 사회 정치적 양상 - 양양의 기미년 독립만세 운동과 독립 운동 6.25전쟁으로 인한 38선 등 - 또한 그 정도로 향토문화적인 차이와 다름이 있다. 이 글에서는 양양과 강릉을 대표하는 축제를 놓고, 그동안 지역에서 사회〮문화적 요구를 통해 축제의 형식과 내용이 어떻게 오늘날까지 변화〮지속되었는지에 초점을 둔다. 여기에는 두 지역의 축제가 나름의 민속을 바탕으로 다양한 사회〮문화교류를 통해 ‘수용 된 것’을 지역화로 정착시키고, 한편으로는 보완해 오면서, 그것들을 어떻게 축적해 왔는가를 살펴보는 것이다. 결국은 축제의 다양한 양상을 어떻게 창조적으로 변용해 왔는가에 관심을 두는 것이다. 따라서 축제의 전승 상황을 비교해 가면서 살펴본다. 한반도의 단오문화를 지역적 차원에서 전승하고 있는 강릉단오제와 양양문화제는 오래된 축제라는 사실을 자각해야 한다. 여기에는 지역의 정체성을 담지한 축제문화로 가꾸어가는 거시적이고, 지속적인 연구와 창조적 활동이 필요하다 .그리고 양양문화제와 강릉단오제를 비교해 보면, 축제의 전승 양상에는 변전(變轉)의 경험을 쉼 없이 겪어야 했다. 그러는 가운데서 어떤 시점에서 드러나는 변화의 계기는 지역민들 삶의 문화를 응집시키는 전환의 시대를 겪는다. 이러한 경험은 축제의 지속과 창조적 계승으로 이어진 것이다.

      • KCI등재

        양양지역 신간회 조직과 활동

        성주현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2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73

        The Singanhoe was established in 15 February, 1927 and dissolved in May, 1931 continued to exist for 4 years, and played the crucial role as the national movement in the period of Japanese imperialism. The socialism adopted in the beginning of 1920’s recognized as alterative of national movement and became one of the mainstays of national movement. In this progress, naturally in the 1920’s the parties of nationalism and socialism resisted against the colonial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competing with each other. And Both of these parties sometimes need to make the united front. In Yangyang, there were resistance against the colonial policy of Japanese imperialism, actively participating the 3ㆍ1 Movement. And because of nearest distance to the northeastern part of Korea, in Yangyang socialism was adopted early. Thus the youth movement in Yangyang was took lead by the party of socialism, and further socialism played the leading role to establish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 the structure of the board members of Shinganhoe, the topsider were in charge of the political local exile, and working group was the party of socialism.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stalled the affiliated societies to expend the organization. The affiliated societies were instsalled generally with a myeon as a unit.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included 6 myeons, but in only 2 myeons, Docheonmyeon and Yangyangmyeon, established the affiliated societies. This means that in Yangyangmyeon, there were more many members who worked on positive lines than other myeons. Moreover,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yang not only tried to maintain the organization essentially, but it actively participated in outside activities. This means that the branch of Shinganhoe in Yangyang concerned with the issues on a nationwide scale as well as local problems. 신간회는 1927년 2월 15일 창립되어 1931년 5월 해소될 때까지 대략 4년 동안 활동하였지만 일제강점기 민족운동으로서의 위상은 적지 않다. 1920년대 들어 수용되기 시작한 사회주의는 민족운동의 새로운 대안으로 떠오르면서 민족운동의 한 축을 담당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1920년대는 자연스럽게 민족주의와 사회주의 세력이 경쟁하면서 일제의 식민지배정책에 저항하였다. 그러나 때에 따라서는 두 민족운동 세력은 연합전선을 형성할 필요성이 제기되었다. 이 두 민족운동 세력의 연합전선의 결과로 탄생한 것이 신간회였다. 이에 양양지역에서도 양양지역 역시 민족주의계열과 사회주의계열이 민족연합전선 정신에 따라 1927년 11월 20일 신간회 양양지회를 조직하였다. 양양지역은 3ㆍ1운동에 적극적으로 참여하는 등 일제의 식민정책에 대해 저항하였다. 또한 관북지역과 지리적으로 가까운 관계로 사회주의를 일찍 수용하였다. 이에 양양지역 청년운동은 사회주의계열이 주도하였고, 나아가 신간회 양양지회를 설립하는데도 주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신간회 양양지회의 임원진의 구조는 상층부는 지역명망가, 실무진은 사회주의계열이 담당하였다. 한편 신간회 양양지회는 조직 확대를 위해 분회를 설치하였다. 일반적으로 분회는 면단위로 조직되었다. 신간회 양양지회는 6개의 면이 있었으나 도천면과 양양면 2개면에서만 분회가 설치되었다. 이는 다른 지역보다 도천면과 양양면의 회원 수도 많았고 그만큼 활동도 활발하였음을 의미한다. 뿐만 아니라 신간회 양양지회는 기본적으로 조직을 유지하기 위해 노력하였지만 대외활동에도 적극적으로 참여하였다. 이는 신간회 양양지회가 지역적인 문제뿐만 아니라 전국적으로 이슈화되었던 문제에 대해서도 적극 참여하였음을 알 수 있다.

      • KCI등재

        1920〜30년대 양양지역 청년운동

        장경호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23 인문과학연구 Vol.- No.76

        1924년 양양지역의 청년단체는 엡웟청년회, 강현면 호산청년회, 토성면 동성청년회, 양양청년회 등 4개에 불과하였다. 이 청년단체는 노동야학 및 풍속개량 등의 활동을 했던 것으로 보아 양양 각 면·리의 발전을 위해 조직된 단체로 보인다. 양양지역 내 청년운동의 분기점이 되는 사건은 1925년 1월 11일 양양신청년동맹의 조직이었다. 양양신청년동맹은 무산계급을 대표하는 청년을 중심으로 조직되었고, 소작 운동, 순회 강좌, 노동 연합 등을 논의하고 실천하였다. 개신교 계열인 엡웟청년회에는 민족주의 계열이 참여하였지만, 양양신청년동맹에는 대부분 사회주의 운동가들로 구성되었다. 1927년 4월 9일 양양신청년동맹은 양양청년연맹으로, 8월 10일 양양청년연맹은 양양청년동맹으로 각각 발전적 해소를 하게 되었다. 양양군 내 각 면에조직된 각 청년단체들도 해체하고, 양양청년동맹 지부로 전환하였다. 문헌상 7개 면에 8개 지부 설치가 확인되는데, 양양청년동맹 지부의 활동은양양청년동맹의 활동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양양청년동맹 각 지부의 인물들은 복수의 지부에서 활동했고, 양양신청년동맹이나 양양청년연맹에 참여했던인물들도 있으며, 지부 설치 이후 새롭게 참석한 인물들도 있었다. 그러나, 청년운동에 참여한 사회주의 계열에서는 점차 조선청년연맹의 우경화를 주장하였다. 특히 양양청년동맹은 조선청년연맹 선거방식을 강원청년연맹을 통해 문제제기하는 안건을 발표했다. 결국, 1931년 3월 30일 양양청년동맹은 해소를 논의하기 시작하였지만, 경찰의 간섭을 받아 8월 이후부터는 그활동이 보이지 않게 된다.

      • 襄陽學 考察

        양언석(Yang, On-seok) 아시아강원민속학회 2015 江原民俗學 Vol.29 No.-

        지역발전에 중요한 지역학인 양양학은 역사, 인문, 지리, 교육, 문화, 관광, 환경, 예술 등을 연구하여 미래발전을 탐색하는 학문이다. 양양은 오랜 역사와 우수한 문화를 가지고 있지만 이 문화를 정리하고 연구하여 학문적으로 체계화하지 못하였다. 그러므로 지역문화 활성화를 위해 양양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문화적 배경으로 양양은 삼국시대부터 불교의 성지로 신라는 삼국통일을 위한 중앙집권 체제를 위해 새로운 이념인 불교를 수용하였다. 불교를 수용하면서 사찰이 건립되었고, 사찰의 상징인 불전과 탑이 양양을 중심으로 건립되어 불교의 성지(향성사, 낙산사, 진전사, 사림사, 영형사 등)로 전통을 이어오고 있다. 대표적인 승려로는 자장을 비롯하여 의상, 원효, 도의 등을 들 수 있다. 승려들은 대부분 입당구법으로 중국의 선진문화와 불교로 교화에 힘썼다. 그리고 향교는 양양문화발전의 전환점이 되었다. 복원되어야 할 문화재로는 조선조 양양관아건물과 이화정이 있다. 조선왕조에서는 양양을 외친이라 하여 도호부로 승격하고 특별히 관리해 왔다. 지리적 배경으로는 사람의 성품은 지세와 환경의 영향을 받는다. 양양은 한반도의 중심부분에 위치하며 장엄한 설악산의 정기와 호탕하고 정열적인 동해를 접하면서 강인한 정신과 우수한 문화와 함께 풍요로움으로 인해 여유로운 삶을 살아 왔다. 양양의 우수한 문화전통을 계승하고 발전하여 자부심을 느낄 수 있고, 양양인의 삶을 풍요롭게 할 수 있도록 양양학이 정립되어야 한다. In Yangyang, a local academic studies to regional development, important history, culture, geography, education, culture, tourism, environment, arts, and explore future development academic research. Yangyang is a long history and culture of good but those cultures up to organize research with academically, nor did. Yangyang studies established in order to stimulate the cultural area, therefore, necessary. Yangyang and cultural background, from the Three Kingdoms period to a Buddhist shrine centralized system for new ideology for the unification of the three kingdoms, Silk accepted Buddhism. Temple, accepting to be built, and a Buddhist temple, a symbol of the temple and Yangyang as the central tower come a tradition of (Hyangseongsa, Naksansa, etc ) shrines of Buddhism in helping to be built. Typical monks are Uisang, Wonhyo, including magnetic field at that time, Doui and so on. Advanced culture and Buddhist flower in preparation for the China Buddhist monks were mostly ipttangkubeop. Yangyang and Confucian School is a turning point for the development of culture. Yangyang Joseon era of Cultural Property to do, and Lee Hwa Jung of a government office buildings to be restored. In Yangyang as a call this it was replaced by the Chosun Dynasty, be promoted to the local metropolitan and has been particularly be controlled. Affected by the his wife, a person’s personality is geographical features and geographical context. Yangyang is the central part of the peninsula and access to regular and vigorous and passionate East Sea, and tenacious spirit of the majestic Mt. Sorak with high culture and by affluentLeisurely life because they’ve lived. Yangyang’s outstanding cultural traditions can feel pride and to develop and succeed can also enrich the lives of Yangyang was to Yangyang studies should be established.

      • KCI등재

        襄陽妓와 宣城妓 史鳳姬에 대한 재고찰 -『朝鮮解語花史』 수록 작품의 오류 검토

        李麗秋 동아시아고대학회 201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23

        본 논문은 조선해어화사(朝鮮解語花史)에 수록된 양양기(襄陽妓)와 선성기(宣城妓) 사봉희(史鳳姬)의 시를 가지고 작자의 신분과 작품의 출전에 대해 고찰하였다. 한국의 고문헌에서는 이들의 관련 기록을 찾아볼 수 없으므로 중국 남송(南宋) 오증(吳曾)의 능개재만록(能改齋漫錄)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여 양양기(襄陽妓)의 <송별(送別)>이라는 시가 사실 중국 당나라 양양기(襄陽妓)의 <송무보궐(送武補闕)>라는 작품이라는 것을 고증하였고, 후당(後唐) 풍집(馮贄)의 운선잡기(雲仙雜記)의 관련 자료를 인용하여 사봉희(史鳳姬)의 <영신계침(詠神鷄枕)>이 실제로 당나라 기녀 사봉(史鳳)의 7수 중의 한 작품이라는 것을 밝혔다. 또한 배경설명을 결부하여 개별적인 작품에 대한 구체적인 분석을 통해 시의 의미를 파악하였다. 이러한 혼동이 생긴 주요한 원인은 중국과 한국에 모두 다 양양(襄陽)과 선성(宣城)이라는 지명이 있는 공통점에서 비롯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이러한 고증을 통해 중국 기녀의 작품이 한국 기녀문학에 연구하는 자료로 오용되지 않게 하기 위한 근거를 마련하였다.

      • KCI등재

        일제강점기 양양농민조합의 혁명화와 그 배경

        이세진 한중인문학회 2020 한중인문학연구 Vol.66 No.-

        양양농민조합은 1920년 후반에 결성되어 혁명적 운동을 전개해 나갔다. 양양농민조합의혁명적 성격은 강원도 동해안의 지역적 특수성과 밀접하다. 강원도 동해지역은 함경도와 인접해 있다는 점과 해운, 철도 등 교통이 발달해 있었다. 당시 사상의 해방구였던 노령, 만주, 간도 등과 많은 인적 교류 많았던 함경도와 인접해 있었다. 또한 강원도와 인접한 도시였던 흥남, 함흥, 원산은 일제의 중화학공업 투자가 집중되었고, 해운과 철도도 상당히 발달한 곳이었다. 양양의 많은 빈농들은 함경도에 공업 노동자나, 하역 노무자로 이주했고, 이들은 자연스럽게 사회주의 사상을 접하게 되었다. 이처럼 양양농민조합의 혁명화는 외부적 계기와 밀접한 관련을 갖는다. 또한 양양농민조합운동에는 지역 엘리트의 역할이 컸다. 지역 엘리트들은 양양농민조합의 결성에 핵심적 역할을 하였다. 양양농민조합의 혁명화는 이런 지역적 특수성과 인적 요소가 결합되었다. The Yangyang Farmers' Union was established in the late 1920s and developed a revolutionary movement.The revolutionary nature of the Yangyang Farmers' Union is closely related to the regional specificity of the east coast of Gangwon Province rather than the specificity of the Yangyang area. The revolutionaryization of the Yangyang Farmers' Union is closely related to external factors, which is the reason why the Eastern-sea region of Gangwon Province is adjacent to Hamgyeong Province and the development of transportation such as shipping and railway. Hamgyeong Province was a border area, and there were many human exchanges with the old age, Manchuria, and Gando, which were the liberation districts of thought at that time. In addition, Heungnam, Hamheung, and Wonsan, which were adjacent to Gangwon Province, were concentrated in heavy chemical industry investment in Japan and shipping and railway were also developed considerably. Many poor farmers in Yangyang moved to Hamgyeongdo as industrial workers or unloading workers, and they naturally came to see socialist ideas. In addition, the Yangyang Farmers' Union Movement played a major role in the local elite. Kim Byung-hwan, Choi Wook, and Choi Yong-dal were early in socialist thought, and they played a key role in the creation of the Yangyang Farmers' Union. The revolutionaryization of the Yangyang Farmers' Union was linked to these regional specificities and human factors.

      • 한국전쟁 전후의 양양 고찰

        이한길 ( Lee Han-gil ) 강원대학교 강원문화연구소 2022 강원문화연구 Vol.45 No.-

        이번에 양양지역을 대상으로 하여 과연 양양지역에서는 한국전쟁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를 연구해보았다. 그러면서 처음엔 전쟁의 아픔 정도로만 단순하게 생각하고 시작하였던 것이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알 수 없는 당혹감에 휩싸여야만 하였다. 우선 양양군의 지정학적인 문제를 심각하게 고려하여야만 했었다. 주지하다시피 양양군의 대부분은 38선 이북에 위치하고 있었다. 이들은 1945년부터 시작하여 전쟁이 나면서 수복되기 전까지 인공의 정치를 받아야만 하였던 지역이었다. 그런데 이들 지역은 한국전쟁을 통하여 수복은 되었지만, 1954년 11월 완전히 민정으로 이양되기 전까지는 대한민국의 땅이라기보다는 대한민국에 점령당한 점령지로서 간주하는 것이 적절해 보였다. 5년여의 인공 생활, 다시 5년여의 전쟁과 점령지로서의 생활, 도합 10여 년의 생활은 이 시대의 양양사람들의 의식을 완전히 황폐화시키기에 충분했다. 그리하여 ‘양양 하와이’라는 속어가 생겨나기도 했다. 이렇게 생겨난 양양하와이란 단어의 의미를 역사적 맥락, 군사적 충돌, 당시의 사회적 긴장 속에서 그 의미를 찾아 보았다. This study is aiming to figure out the public understanding on Korean War in Yangyang through exploring the context of ‘Yangyang Hawaii.’ The term Yangyang Hawaii, which demonstrates the otherness of people in this area from pre- and post-Korean war, encapsulates their understanding on war. This study emphasizes that their understanding of war has been formed by not only sufferings from war itself but also complicated geopolitical issues. As known, most area of Yangyang was located in North Korea and governed by the communist party before war. From war to 1954’s administrative transition, this area was considered as occupied territory connoting otherness. Confusing experience in half decade communist ruling and in other half decade hostile treatment can be enough to devastate their identity, and may cause the context of humiliating term, Yangyang Hawaii. This study finds the meaning of Yangyang Hawaii in terms of history, military conflict, and social tension between the right and the left.

      • KCI등재

        정책실패의 반복과 관성에 관한 연구

        허혁(Hyeok Heo),최선미(Seonmi Choi) 한국콘텐츠학회 2018 한국콘텐츠학회논문지 Vol.18 No.12

        본 연구는 양양국제공항 사례를 중심으로 정책실패의 반복 원인에 대하여 분석하였다. 2002년 개항한 양양국제공항은 약 3,600억원을 들여 건설하였으나, 공항 이용 객수 확보 실패 및 활성화 실패로 지방공항의 대표적 실패사례로 거론되고 있다. 정책실패 이론에 따라 합리주의적 관점, 정치적 관점, 환경복잡성 관점에 따라 양양국제공항의 실패요인을 분석한 결과 첫째, 합리주의적 관점에서 양양공항은 이용객 확보와 지역경제 활성화라는 정책목표 달성에 실패하였으며, 이는 정치권의 압력에 의한 사업추진과 지리적 인프라 부족에 기인한 것으로 나타났다. 둘째, 정치의 흐름에서의 이해관계자들의 갈등 조정 실패 양상은 항공사와 공항 간 갈등과 저가항공인 플라이양양 허가 및 지원금에 대한 정부와 공항 간의 갈등 조정 실패로 볼 수 있다. 셋째, 환경복잡성 관점에서 양양국제공항은 주변 고속도로, 철도 노선 개통과 한한령으로 인한 중국인 관광객 급감이라는 환경변화에 적응 실패로 볼 수 있다. 즉, 양양국제공항은 정책계획단계에서부터 합리적인 분석에 의해 무산된 사업임에도 불구하고 정치적으로 선거결과에 따라 지리적 인프라가 부족한 지역에 건설되었으며 운영 과정에서 항공사 및 정부 간의 갈등 조정에 실패하였고, 주변 교통시설확충과 외부 환경적 요인에 적응하지 못한 것으로 볼 수 있다. 본 연구를 통해, 대규모 국책사업의 경우 정책결정자의 무리한 사업 추진을 막을 수 있는 독립적 기구의 설치, 공항이나 철도와 같은 교통시설의 경우 주변 인프라 및 관련 사업과의 연계 및 고려를 통한 사업 추진, 이해관계자들 간의 갈등조정을 위한 협력적 거버넌스의 제도화 등을 제언하였다. This study analyzed the repeated causes of policy failure focusing on Yangyang International Airport cases. Yangyang International Airport, which opened in 2002, was built with about 360 billion won, but it is considered as a representative example of policy failure of local airports. According to the policy failure theory, the failure factors of Yangyang International Airport are anlyzed by rationalistic, political, and environmental complexity viewpoint. The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from a rationalist point of view, Yangyang Airport failed to achieve the policy goal of securing passengers and revitalizing local economy, This is due to the pressure of politics and the lack of geographical infrastructure. Second, the failure of the stakeholders to resolve conflicts in the flow of politics can be seen as the conflict between the airline and the airport, and the failure to reconcile conflicts between the government and the airports on the low cost airline permits and subsidies. Third, from the viewpoint of environmental complexity, Yangyang International Airport can be regarded as a failure to adapt to environmental changes such as the opening of nearby expressways and railway lines, and the sharp decline of Chinese tourists. This study sugeests the establishment of an independent organization that can prevent unreasonable business promotion by politics in the case of large scale national projects, the linkage with the surrounding infrastructure and related businesses in the case of transportation facilities such as airports and railways, and institutionalization of cooperative governance for coordinating conflict among stakeholders.

      • 양양군 양양읍 서낭제 연구

        이한길(Lee Han-kil) 강원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5 江原人文論叢 Vol.14 No.-

        양양군은 오랜 역사적 연원과 더불어 풍부한 전통문화를 간직한 도시임에도 불구하고 38선으로 인하여 한때 전통문화가 말살되는 아픔을 겪기도 하였다. 바로 북한 정권의 미신타파라는 유물론적 이데올로기 때문인데, 이로 인하여 마을제의인 서낭제도 변화를 겪을 수밖에 없었다. 본고에서는 이에 주목하여 과연 미신타파 이데올로기가 정말로 양양군 양양읍 서낭제 전승과 단절에 어떠한 영향을 미쳤는지를 살펴보기로 했다. 결론적으로 말하면 그 영향은 있었지만 크지는 않았다. 오히려 양양읍성 장군성황제의의 영향이 더 커 보였고, 인구의 감소, 여타 종교 유입으로 인한 서낭제에 대한 관심 저조 등이 더 커 보였다. 다음으로 살펴본 것은 서낭제가 전승되고 있는 10개 마을이었다. 제사일시는 정월 초5일 이내에 대부분 거행했으며, 오전 3-5시 사이에 주로 지냈다. 제당은 서낭나무와 당집 등으로 나타났고, 告祝하는 마을은 5곳이었다. 주로 모신 신위는 성황지신이었으며, 里社之神을 모시는 마을도 있었다. 신위가 3위인 마을은 4곳이었으며, 암ㆍ수서낭의 개념 구분도 비교적 뚜렷하였다. 주요 희생으로는 돼지머리나 돼지고기를 사용하였고, 어물로는 명태를 사용하였다. 제관은 헌관, 축관, 도가로 구성되었고, 도가란 말 대신에 차지, 집사 등의 용어도 사용되었다. 제의절차는 일반 가정집 제사와 비슷했지만, 소지를 올리고 퇴송을 한다는 점에서 차이가 났다. 그러나 임천리, 조산리는 소지를 올리지 않았다. 이상에서 살펴본 바 양양읍 서낭제의 특징은 주민들의 현실적 가치인식이 적절히 반영되면서 서낭제가 변하고 있다는 점이다. 워낙에 日氣가 불순한 점도 있었지만 마을회관에서 제의를 지내는 것이나 제사 일자를 고정시키고 시간을 3-5시경으로 조정한 것 등은 神본위적이 아니라 人본위적 가치 개념을 반영한 것으로 보인다. Yangyang-Gun(Gun=county) was governed by the North Korea from 1945 to 1950. The North Korea was believed in the materialism, so the religion and village ritual etc. of this region was taken a suppress by the ideology of the North Korea. The North Korea regarded its as superstition and oppressed its. During that times, The Seonang ritual of YangYang-Eup(Eup=town) was vanished. For this influence Seonang ritual was discontinued in 11 villages of the YangYang-Eup after 1954. The first purpose of this study is looking for the correlation of the materialism and the disappearance of the Seonang ritual in this county. In the end the materialism of the North Korea was not influenced into the disappearance of Seonang ritual in this county. The second purpose of this study is looking for the features of the Seonang ritual which continued in 10 villages of YangYang-Eup. Ultimately I could take some results in this study processing. 1) the month of the Seonang ritual is January in this county. 2) The Seonang ritual has been carried in the forenoon time for the most part. 3) The form of the ritual place(shrine) is the trees and the house. 4) The written invocation prayer is transmitting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in 5 villages. 5) The major deity is the Seonang God, and Sex distinction of the Seonang was identified for the male and the female. 6) It was serviced a bacon(or the head of pig) as the main sacrifice giving to the Seonang, and the Alaska pollack is also serviced. Through above-mentioned I am concluded that the characteristics of the Seonang ritual in YangYang-Eup is very economic, present and considerable the correlation of the Seonang and the residents.

      • 강원 양양지역 연어의 산업화를 위한 제문제와 발전전략

        윤경호 한국지역발전학회 2012 지역발전연구 Vol.12 No.1

        강원도의 양양군은 연어의 치어방류량이나 성어포획량에서 전국에서 1위를 차 지하고 있다. 그러나 연어가 지역의 산업이나 지역경제에 기여하는 면은 아주 미흡한 상태이다. 본 연구의 목적은 양양연어를 산업화 하는데 있어서 과제는 무엇이며, 이와 같은 문제를 풀기 위해 어떠한 발전전략이 필요한 것인지를 도 출하는 것이다. 이를 위하여 양양연어의 실태와 함께 연어산업화의 많은 실적과 경험을 가지고 있는 일본의 연어산업의 사례를 살펴보았다. 양양연어의 실태에서 도출된 과제로는 연어산업에 대한 관심과 의지의 부족, 연 어관련 인프라의 취약, 연어생산 규모의 영세성, 비시장가치 중심으로 되어 있 다는 것으로 나타났다. 연어산업화를 위한 발전전략으로는 연어를 소중히 여기 는 마음과 생태가치의 키움, 연어관련 기본 인프라의 확충, 가공과 판매를 연계 시켜 시장의 점진적 확대, Cluster, Network, RIS를 구축하는 것이 필요하며, 이와 함께 연어관련 1, 2, 3차 산업의 융복합화로 양양연어의 비시장가치인 생태가치를 극대화 시키고, 접근성이 크게 개선되는 수도권을 생태관광의 목표시장으로 삼아 궁극적으로 양양 연어의 산업화로 연결시키는 것이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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