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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紹修書院 入院錄 분석- 1617세기를 중심으로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6 서지학연구 Vol.34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establishment and accreditation of Sosoo-Seowon School(紹修書院) by the King and to analyze the composition of students, when to enter the School, from where they come, what age to enter, when to pass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nd what their academic, political inclination are, based on the 1st volume of the Register List of the School. 이 연구에서는 소수서원의 건립과 사액과정을 살펴보고 소수서원 입원록 제1권을 대상으로 1617세기 소수서원 입원생의 인적 구성, 입학연령과 과거 급제, 학문적정치적 성향 등을 분석하였다.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은 공교육을 정상화하기 위해 향교를 이건하고, 이어서 주자의 학문을 계승발전하기 위해 주자의 백록동서원의 예에 따라 백운동 서원을 건립하였다. 후임 풍기군수인 이황의 요청으로 소수서원으로 사액되었는데, 여기에는 척신세력의 지원이 있었다.소수서원 입원록 제1권에 수록된 1543년부터 1696년까지의 입원생 735명을 대상으로 입원 연도를 분석한 결과 입원생은 한 해에 평균 5명이 입학하였다. 입원생은 1550년대에 119명으로 가장 많았고, 출신지역은 제주도평안도함경도를 제외하고는 전국에서 입원하였는데, 경북이 610명으로 전체의 83%를 차지하였다. 입원생의 연령은 9세부터 59세로 이즈음보다 입원연령의 폭이 넓었으며, 이즈음처럼 20대가 가장 많았다. 생원진사시 합격연령은 14세부터 66세이고, 문과 급제 연령은 23세부터 60세로 이즈음보다 고령에도 과거시험에 도전하여 합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이는 과거시험이 관료진출만이 목적이 아니라 급제 사실 자체가 개인과 가문의 영광이었던 조선중기의 시대상을 반영하는 것으로 해석된다. 과거급제 정도를 보면, 735명 가운데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313명으로 전체의 43%를 차지하고, 대과 합격자는 99명으로 전체의 13%를 차지하였다. 서원에 입원한 후 20년이 지나면 전체의 38%가 생원진사시에 합격하고, 전체의 11%가 문과에 급제한다. 과거급제연도를 보면 임란이 일어났던 1590년대를 제외하고는 1550년대부터 1610년대까지 평균 매년 3~4명씩 합격하였고, 문과는 1560년대부터 1600년까지 평균 매년 1~2명이 급제하였다. 1650년 이후 급제자가 급속히 줄어들었는데, 이는 이 시기에 입학생이 거의 없었기 때문인 것으로 보인다. 문과는 정규시험인 식년시보다 비정규시험이 더 많이 시행되었으며, 1회에 1~2명의 급제자를 배출하였다. 소수서원 입원생들은 상당수가 퇴계 이황의 제자로서 영남학파에 속하며, 소수서원 입원생들이 도산서원 창설의 주역으로 활동하였다. 그리고 정치적으로는 동인, 남인이 다수이지만 서인과 북인 등 다양한 정치세력이 공존하였다.

      • KCI등재

        紹修書院 任事錄 연구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7 서지학연구 Vol.38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review the first volume of the List of Directors of Sosoo-Seowon Academy(紹修書院) mainly for the 16th and 17th centuries, and investigate the characteristics of those Directors in terms of their backgrounds, including the residences, birthplaces, and family names, the age of being appointed to the Director, as well as passing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and the length of holding offices in the Academy.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Sosoo-Seowon Academy was established in Poonggee(豊基) by Chu Seboong(周世鵬) in 1543, and accredited by King Myungjong(明宗) with the request of Lee Hwang(李滉) in 1549.A total of 181 Directors held offices in this Academy from 1542 to 1718, and on the average every director serves a year. Of the Directors, 93% came from Kyungsangbuk-Do Province(慶尙北道), and especially 87% were from Poonggee(豊基), Soonheung(順興), and YoungJoo(榮州). While the age of Directors ranged 30 to 70 years old, the largest group were in their 40s to 50s.Out of 107 Directors, 47 passed the examination to enter Seonggyunkwan National College called Sangwon-Jinsa-Si(生員進士試), and 14 passed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called Moonkwa(文科).An analysis of their family names and ancestral homes evidences that of 18 family names, Hwang-Park-An and Kim, in the order of frequency, constituted the largest group. It is surprising to see that none of 107 Directors was Lee Hwang's pupil, which seems to suggest this Academy's independent position. 조선조 최초의 사액서원인 소수서원 원장의 명단을 기록한 명부인 소수서원 임사록 제1권을 분석하여 소수서원 원장의 평균 재임기간과 그 추이, 거주지와 성씨ㆍ관향을 통해 본 원장의 출신배경, 원장의 소수서원 수학 비율과 생원진사시와 문과 급제 비율 등을 소수서원 입원생과 비교ㆍ분석하여 소수서원 원장의 특성과 시대별 추이를 파악하였다. 그 결과 다음과 같은 사실을 추론할 수 있었다.1) 소수서원 원장의 재임기간을 보면, 1542년부터 1599년까지는 초대 원장 김중문을 제외하면 원장이 평균 2~3년간씩 재임하였으나, 1600년부터 1679년까지와 1700년 이후는 1년 내외(8개월~13개월) 재임하였고, 1680년~1699년까지는 평균 5개월 정도 재임하였다. 서원에 입원생이 많은 때에는 원장의 재임기간이 길었고, 학생이 거의 없을 때에는 재임기간이 짧았다. 즉 서원이 교학의 기능을 원활히 수행할 때에는 서원 운영이 안정되어 재임기간이 상대적으로 길었다고 파악된다.2) 소수서원 원장의 거주지를 분석한 결과 경북 출신이 압도적으로 많았으며, 그 중에서도 풍기ㆍ순흥ㆍ영천(榮川) 즉 현재의 영주 출신이 87%를 차지함은 소수서원의 운영을 주도한 세력이 서원 인근의 영주 사림임을 입증하고 있다.3) 소수서원 원장의 성씨와 관향을 분석한 결과, 소수서원 원장을 배출한 성씨는 18개로 황 - 박 - 안ㆍ김의 순이다. 관향을 보면 창원황씨가 원장을 15명을 배출하여 가장 많고 다음이 순흥안씨(10명), 무안박씨(9명)의 순이다.4) 원장의 소수서원 출신 비율을 보니, 전체 107명 가운데 52명이 소수서원 출신으로 49%에 해당한다. 예상밖으로 소수서원 출신 비율이 적어 연도별 소수서원 원장의 비율을 살펴보니, 1620년대부터 소수서원 출신이 조금씩 감소하기 시작하다가 1680년대부터는 비소수서원 출신이 전적으로 서원을 운영하기에 이르렀다. 이는 1650년대부터 1696년까지 47년 동안 소수서원 입원생이 9명에 불과한 것에서 알 수 있듯이 소수서원의 교학기능 쇠퇴와 관련이 깊다. 5) 원장의 과거사항을 분석한 결과 원장의 생원진사시 합격률은 44%, 문과 급제율은 12%로서 소수서원 입원생과 비교할 때 생원진사시 합격률은 12% 높았지만 문과 급제율은 1% 낮았다. 물론 사마시와 문과 급제여부로 학문적 능력을 판단하는 것은 무리가 있겠지만 이를 통해 볼 때 원장의 선임기준은 적어도 학문적 능력순은 아니라고 보아진다. 이는 이즈음의 대학의 총장이나 학장 선임이 학문적 능력이 뛰어난 순으로 하는 것이 아닌 것과 같은 이치라고 하겠다.6) 소수서원 원장 가운데 퇴계 문하에서 수학여부를 조사한 결과 놀랍게도 1명도 없었다. 소수서원 입원생 가운데는 이황 문하에서 수학한 학생이 735명 중 57명이었는데, 원장은 1명도 없다는 사실은 소수서원만의 독자성을 간직하고자 했던 것이 아닌가 한다.

      • KCI등재

        18ㆍ19세기 소수서원의 院生 연구 - 「소수서원 입원록(紹修書院 入院綠)」 제2권을 중심으로 -

        송정숙 한국서지학회 2008 서지학연구 Vol.41 No.-

        The aim of this paper is to analyze students composition when to enter Sosoo-Seowon(紹修書院), where to come from, what age to enter, when to pass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based on the 2nd volume of the Register List of Sosoo-Seowon. The results of the analysis are as follows : 1,805 students admitted this School during the years of 1790 to 1888, with 10 to 26 new students enter per one year. By the way, in 1850s the size of registered students was the largest. Students came from many areas nearby Kyungsangbuk-Do. 90% of the Students came from Kyungsangbuk-Do. Especially 82% of the Students came from Andong and YoungJoo. The age of students were 15 to 74 years old. But the age of 30s were the largest. The number of the students who passed the examination for admission of Seonggyunkwan National College called Sangwon-Jinsa-Si(生員進士試) among the total 1,805 students was 143. The number of the students who passed the government service examination called Moonkwa(文科) among the total 1,805 students was 61. 이 연구에서는 「소수서원 입원록」 제2권을 대상으로 18·19세기 소수서원 원생의 인적 구성을 파악하기 위해 입원 인원, 출신 지역, 입원 연령, 입원 후 생원진사시와 문과 급제의 소요연한 등을 분석하였다. 아울러 16·17세기와 비교하여 변모양상도 파악하였다. 「소수서원 입원록」 제2권에 수록된 1790년부터 1888년까지의 99년 동안의 입원생 1,805명을 대상으로 입원 연도를 분석한 결과 입원생은 한 해에 대략 10명 이었지만 많을 때에는 26여명에 달하였다. '취인'이라 하여 한 해에 68명에서 369명까지 대규모로 입원한 해도 있었다. 출신지역은 경북을 중심으로 한 인근 지역 출신이 대다수인데, 특히 안동, 영주 출신이 다수를 차지하였다. 입원생의 연령은 15세부터 74세로 16·17세기보다 입원연령의 폭이 넓어졌으며, 고령인 60대와 70대가 125명으로 전체의 7.6%나 되었다. 16·17세기보다 고령화되어 18·19세기의 입원생은 30대가 가장 많았고, 20대·40대의 순이었다. 과거급제 정도를 보면, 1,805명 가운데 생원·진사시 합격자가 143명으로 전체의 8%를 차지한다. 이 가운데 78명이 생원진사시에 합격한 이후에 서원에 입원하였다. 문과 급제자는 61명으로 전체의 3%에 불과한데, 이 가운데 42명은 문과에 급제한 후에 소수서원에 입원하였다. 이를 볼 때 18·19세기에 이르면 당시 선비들에게 소수서원은 과거 준비기관으로서의 의미는 다소 퇴색하고, 서원 입원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고 파악된다. 이렇게 18·19세기에 이르면 원생의 출신 지역의 범위가 좁혀지고, 입원연령이 고령화되고, 원생 가운데 생원·진사시나 문과급제자의 비율이 급격히 줄어듦과 아울러 생원·진사시나 문과 급제 후 서원에 입원하는 경향은 서원이 남설되는 당시의 사회적 환경, 재정이 고갈되어 선비를 기를 수 없는 소수서원의 열악한 재정 상황, 남인의 정치적 몰락으로 과거에 급제하더라도 중앙정계로의 진출에 제약이 있었던 당시의 정치적 상황, 과거에 대한 부정적 인식 및 위기지학을 추구하는 영남사림의 학문적 성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고 하겠다.

      • KCI등재

        紹修書院 立地環境과 風水

        박정해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4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4 No.-

        So-su Seowon(紹修書院) that has been known as the first Seo-won was a model of Seowon architecture. Also it provided other Seowon to a standard of location selection and spacial composition. In Mun-sung -gong-myo(文成公廟) which represents characteristic of So-su Seowon, as Joo, Se-boong(周世鵬) clarified, shrine was constructed first with the purpose of ancestral rites for Ahn, Hyang(安珦). And a lecture hall was constructed subordinately. So So-su Seowon was not a lecture- centric Seowon but a rite-centric one. This has became very important meaning of directivity to determine what building is on Hyeol(穴) of Feng shui(風水). In So-su Seowon there has location selection and spacial composition on the basis of Feng shui logic. And there has clear objective limitation from the view of locational condition theory(形勢論) of Feng shui. However, when see from the view of the shape features with that place, main mountain, which called Ju-san(主山), Yong-guee-bong has the shape of turtle body and the Mun-sung-gong temple is located on the part of turtle head. Traditional theory of location selection with which So-su Seowon was established has been organized with Feng shui feature. And shrine and lecture hall has also been built from the theory. 소수서원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서원으로써, 서원건설의 시초를 제공하였으며 서원건설의 본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서원입지선정과 공간구성의 기준점을 제시한 측면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소수서원의 성격을 대변하는 문성공묘는 주세붕이 밝히고 있듯이, 安珦을 제사 지내는 목적을 앞에 두고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있다. 부차적으로 강학하는 장소를 마련하고 있어 소수서원이 강학중심 서원이 아닌 제향중심의 서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혈처에 어떤 건축물이 입지할 것인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수서원은 풍수적 논리를 바탕으로 입지선정과 공간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풍수의 한 유파를 차지하는 형국론은 객관성을 담보하는데 한계성을 가진다. 그러나 특정지역의 특징적인 형상을 소개하는데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의 주산 靈龜峰은 거북이의 몸체에 해당하며, 앞으로 목을 쭉 뻗어 머리 부분에 文成公 사당이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수서원을 구성한 전통적인 입지론은 풍수라는 특징요소를 바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선현제향과 강학공간을 중시한 소수서원 입지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 투고논문 : 소수서원(紹修書院) 입지환경(立地環境)과 풍수(風水)

        박정해 ( Jeong Hae Park )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4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4 No.-

        소수서원은 최초라는 수식어가 붙어 다니는 서원으로써, 서원건설의 시초를 제공하였으며 서원건설의 본보기와 같은 의미를 가지게 된다. 또한 서원입지선정과 공간구성의 기준점을 제시한 측면도 강하다고 할 수 있다. 소수서원의 성격을 대변하는 문성공묘는 주세붕이 밝히고 있듯이, 安珦을 제사 지내는 목적을 앞에 두고 사당을 먼저 건립하고 있다. 부차적으로 강학하는 장소를 마련하고 있어 소수서원이 강학중심 서원이 아닌 제향중심의 서원이다. 이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지게 되는데, 혈처에 어떤 건축물이 입지할 것인지 방향성을 제시하는 것이다. 소수서원은 풍수적 논리를 바탕으로 입지선정과 공간구성이 이루어지고 있는 데, 풍수의 한 유파를 차지하는 형국론은 객관성을 담보하는데 한계성을 가진다. 그러나 특정지역의 특징적인 형상을 소개하는데 효과적이라 할 수 있다. 소수서원의 주산 靈龜峰은 거북이의 몸체에 해당하며, 앞으로 목을 쭉 뻗어 머리 부분에 文成公 사당이 입지하고 있다. 이와 같이 소수서원을 구성한 전통적인 입지론은 풍수라는 특징요소를 바탕으로 구성하고 있으며, 선현제향과 강학공간을 중시한 소수서원 입지의 사상적 배경을 형성하고 있다. So-su Seowon(紹修書院) that has been known as the first Seo-won was a model of Seowon architecture. Also it provided other Seowon to a standard of location selection and spacial composition. In Mun-sung -gong-myo(文成公廟) which represents characteristic of So-su Seowon, as Joo, Se-boong(周世鵬) clarified, shrine was constructed first with the purpose of ancestral rites for Ahn, Hyang(安珦). And a lecture hall was constructed subordinately. So So-su Seowon was not a lecture- centric Seowon but a rite-centric one. This has became very important meaning of directivity to determine what building is on Hyeol(穴) of Feng shui(風水). In So-su Seowon there has location selection and spacial composition on the basis of Feng shui logic. And there has clear objective limitation from the view of locational condition theory(形勢論) of Feng shui. However, when see from the view of the shape features with that place, main mountain, which called Ju-san(主山), Yong-guee-bong has the shape of turtle body and the Mun-sung-gong temple is located on the part of turtle head. Traditional theory of location selection with which So-su Seowon was established has been organized with Feng shui feature. And shrine and lecture hall has also been built from the theory.

      • KCI등재

        조선시대 서원교육의 公的 기반 변화와 그 대응

        김자운(Kim, Ja-woon) 역사문화학회 2015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8 No.2

        이 연구는 소수서원 사례를 중심으로, 조선시대 서원 교육의 토대였던 공적 기반 변화와 그 대응 방식에 따라 서원교육의 정체성과 성격이 어떻게 변화해왔는가를 실증적으로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조선시대 서원은 공적 기반 확보를 위해 국왕에게 사액을 요청하여 국가의 공식적 승인과 지원을 획득함으로써 서원의 위상을 확립하는 한편, 지방관의 행 재정적 지원을 통해 서원교육의 실질적 기반을 확보하고자 하였다. 서원 운영에 있어, 관권을 배제한 향촌자치제를 강조했던 퇴계의 서원론을 따르던 영남 남인계 서원들 역시 조선후기로 가면서 경제적 기반이 약화되자 점차 관권에 의존하지 않을 수 없었다. 지방관의 행 재정적 지원 없이 서원교육의 유지는 사실상 거의 불가능하였으므로, 교육 이념과 내용 면에서는 관권의 개입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한편, 행 재정적 지원 확보를 위해 서원에서는 끊임없이 관권을 개입시키고자 하는 이중적 태도를 취하였다. 이와 같이 관권의 개입과 배제라는 모순적, 이중적 과업을 수행하기 위해 조선시대 서원이 처했던 딜레마와 다양한 대응 방식을 소수서원 사례를 통해 엿볼 수 있다. 한편, 16세기 소수서원은 공적 기반 뿐 아니라 교육의 성격에 있어서도 사학보다는 관학에 더 가까웠다. 16세기 풍기군수 주세붕과 경상감사 안현은 서원을 관학과 다름없는 교육기관으로 인식, 관학에 버금가는 특전을 제공하고, 교육 내용에 있어서도 철저하게 과거 대비를 위한 교육을 수행하였다. 그러나 이후 도학으로 무장한 사림들이 정계에 진출, 풍기군수로 부임하면서 서원을 관학의 연장선에서 바라보던 서원관에 변화가 일어났고, 서원교육이 이념적으로 관학에서 독립하는 계기를 제공하였다. 17세기 풍기군수 이준은 지방관이자 동시에 사림의 일원으로서, 서원의 공적 기반을 제공하는 한편, 교육 이념에 있어 관학적 성격의 탈피를 주장하며 파격 논쟁에서 파격의 근거와 논리를 확립하였다. 우여곡절 끝에 그의 논리가 관철되면서 그는 서원교육이 관학적 성격에서 벗어나 주자와 퇴계가 주장한 서원의 사학 정신을 소수서원에 확립한 계기를 제공하였다. 그 결과 18세기 소수서원은 과거공부만하던 관학적 속성에서 벗어나 비로소 주자의 사학 정신과 이념을 확립하고 이를 실천하는 도학서원으로 재탄생할 수 있었다. 18세기 소수서원은 이념적으로는 관학에서 독립하였으나 18세기부터 지방관의 전폭적 지원이라는 특혜가 사라지면서 서원교육의 공적 기반을 상실하였다. 이에 삼동거재와 윤번거재, 양사청의 설치 등 다양한 자구책을 동원하여 교육을 지속하고자 도모하였다. 그러나 18세기 말 양사청이 완전히 폐지되면서, 교육을 지속하기 위해 다시 관의 지원을 확보할 묘안을 강구해야 했다. 이에 겸원장 제도를 마련하여 다시 관권을 개입시킴으로써, 공적 기반을 확보하고 수령의 지원과 참여를 끌어내고자 하였다. 그러나 공적 기반 확보를 위해 의도적으로 관권을 개입시킨 결과 수령의 지원과 참여는 또 다시 과거공부의 폐단을 낳기 시작하였다. 그 결과 19세기 서원의 지도자들은 과거공부가 도학을 방해하고 서원 본래의 교육이념을 해칠까 우려하며, 관권을 개입시켜 공적 기반을 확보하는 한편, 교육내용에서는 과거공부에 치우치지 않고 道學과 科業의 균형과 조화를 유지하기 위해 다방면의 노력을 강구하였다. 19세기 소수서원 동주 이가순과 강운의 사례에서 그 고군분투의 과정을 엿볼 수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find out, through a positivistic examination of Sosu Seowon, how the characteristics and orientation of seowon education have changed and how the public foothold of private academies changed during the Joseon Dynasty. Conventional views hold that the educational system of the dynasty made a transition from centralized to decentralized, with the government yielding its educational authority to local literati, thus shifting the nature of education from a government-operated education system to a private education system. A micro-historical analysis of Sosu Seowon, however, shows the coexistence of government initiatives and the local literati’s educational influences, as well as a mixture of public and private characteristics. This is contrary to the conventional view that there was a linear change in the Joseon Dynasty education system. Sosu Seowon continuously secured a public foothold and maintained its identity as an educational institution, playing the role of a public academy at one time and a private academy at another, responding to the changes of the times. The changes in Sosu Seowon’s public foothold have been closely linked to changes in its educational ideology and content. Understanding Joseon Dynasty seowon education, therefore, requires a proper understanding of the changes in the public foothold of seowon. Characterizing seowon education in a dichotomous way, without a thorough analysis, as “public” or “private,” or “government-centered” or “private academy-led,” might distort the realities of seowon education during the Joseon Dynasty. As a case study, this article examines the changes in seowon education’s public foothold and its responses to changes of the times from the 16<SUP>th</SUP> to 19<SUP>th </SUP> centuries.

      • KCI등재

        16세기 소수서원 교육의 성격

        金紫雲 ( Kim Ja-woon ) 한국유교학회 2014 유교사상문화연구 Vol.58 No.-

        이 연구는 학교로서 조선조 서원이 수행한 교육의 성격과 그 성격의 변화 과정을 소수서원 사례를 중심으로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1543년 주세붕에 의해 창건된 이래 조선의 서원은 흔히 ‘官學’이 아닌 ‘私學’으로, ‘士林’이 그 설립과 운영의 주체가 되어 본받을만한 스승이나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道學’을 講明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주세붕은 사림보다는 공신 계열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16세기 소수서원에서 행해진 교육도 道學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운영 주체나 학교의 성격 면에서도 官學과 私學의 구분이 매우 모호한 상태였다. 이는 학교로서 조선조 서원의 성격이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해갔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16세기 소수서원에서는 과연 무엇을 목표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백운동서원은 설립된 지 3년만에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고 회자될 만큼, 과거 공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시키는 科學(科擧之學)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1558년 스무살의 나이에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학봉 김성일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과거 공부만 하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고 하며 과거에 뜻을 접고 도학을 탐구하기 위해 소수서원을 떠나 도산서당으로 가서 퇴계의 문하가 되었다. 이 일화들은 16세기 소수서원의 교육 실제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즉, 16세기 소수서원은 교육의 내용과 효과 면에서 무엇보다 科業을 충실히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16세기 소수서원 교육이 이와 같은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은 과연 무엇이고, 그 교육은 어떤 이념 하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의미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또 16세기 이 후 소수서원 교육의 이념과 실제는 과연 어떻게 변화해갔는가? 본고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함으로써 조선조 서원 교육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의 일단을 살피고자 한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educational characteristics of Seowon in Choseon dynasty focused on Sosu-Seowon. Choseon Seowon is usually regarded as a private school not a government-operated Academy. Also, people think Seowon was built and managed by gentry and they explored dohak(道學) in Seowon. However, Jusebung who established the first Seowon was more close to a meritorious retainer rather than gentry and the education in 16th century was somewhat different with dohak. In addition it was very ambiguous to regard Sosu-Seowon in 16th century as government-operated Academy or private school. This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Choseon Seowon has gone to change over time. Then, what was the educational purpose of Sosu-Seowon in 16th century and how the education was accomplished? The government-operated Academy of Choseon was losing the educational function in 16th century. So Jusebung regarded Seowon as the replacement of government-operated Academy. As the result, the education in 16th century was focused on preparation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the result of this education was very effective. Although Jusebung did not inherit Chu hsi’s educational philosophy with Seowon, he successfully carried out his duty to reconstruct school as a local magistrate. Since the 17th century, the educational philosophy and practice of Sosu-Seowon began to change, finally, Seowon was a place to explore and practice the do-learning(道學) not prepare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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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7~18세기 소수서원 노비의 혼인과 가족

        김영나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20 嶺南學 Vol.0 No.73

        This paper aims to discuss the marital and familial forms, as well as the residential areas of slaves through the ancient documents of the Sosu Seowon, including a 17th century slave register, and two 18th century slave registers. There were initially 18 slaves, but the number increased to 134 in the 17th century and to 380 in the 18th century. Among those with verified ages, slaves aged 10 and younger were the most common in 1677, and those aged 71 and older were the most common in 1762 and 1783. This is because all former Sosu Seowon slaves were recorded in 1762 and 1783. Sosu Seowon slaves paid rice and beans as labor exemption fees. Marriage between unidentified males(未詳) and female seowon slaves(院婢) was the most common marriage type found in Sosu Seowon slaves. In 1667, the most common type was between male seowon slaves(院奴) and female seowon slaves, and in 1762 and 1763, the most common type was between male seowon slaves and unidentified females and between male seowon slaves and female commoners(良女). Marriage between male seowon slaves and private female slaves(私婢) was strictly forbidden. Second generation families were the most common family type among Sosu Seowon slaves, followed by seventh generation families. Seowon slave generations were more continuous than those of private slaves(私奴婢) because Seowon slaves were not subject to inheritance. The slaves usually lived in the north of Gyeongsang province, but more began living in the Seowon village in the 18th century. There were also slaves who lived in public places such as stage stations, other who lived in private places, and other Seowon villages. This paper has thus explored the marital and familial relationships, and residential areas of the Sosu Seowon slaves between the 17th and 18th century. 본 논문은 17~18세기 『소수서원노비안』 등의 고문서를 중심으로 노비의 혼인 및 가족 형태, 거주 지역 등을 밝히고자 하였다. 설립 초기에는 18명의 노비가 있었으나, 17세기에는 134명으로, 18세기에는 380여 명까지 증가하였다. 나이를 확인할 수 있는 노비 중에서 1677년에는 10세 이하가, 1762년과 1783년에는 71세 이상이 가장 많았다. 왜냐하면 1762년과 1783년에는 이전의 소수서원 노비가 모두 기록되었기 때문이다. 외거노비는 신공으로 쌀을 냈고, 원촌에 거주하면서 신역을 담당한 노비와 원노와 양녀의 소생, 서원에 임시로 소속된 노비는 콩을 납부하였다. 따라서 소수서원 노비는 院村에 거주하면서 서원의 일을 하더라도 신공도 함께 담당하였다. 소수서원 노비의 혼인은 전체적으로 미상과 원비의 혼인이 가장 많았다. 다음은 1667년에는 원노와 원비의 혼인, 1762년과 1783년에는 원노와 미상, 원노와 양녀의 혼인이 많았다. 원노와 사비의 혼인은 엄격하게 규제하였다. 소수서원 노비의 세대유형별 가족에서 중복된 노비 가족을 제외하면 2세대가 가장 많고 다음은 7세대였다. 3, 4세대의 가족들은 대체로 7세대 이상에 포함되었다. 서원노비의 가계는 사노비보다 연속적으로 나타났는데, 서원노비들은 상속의 대상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소수서원 노비들은 경상도 북부 지역에 주로 거주하였다. 18세기에 원촌에 노비가 집중적으로 거주하였지만, 거주 지역은 더 다양해졌다. 驛이나 齋舍, 다른 서원의 서원촌에도 거주하는 노비들이 있었다. 지금까지 17~18세기의 소수서원 노비의 노비 수, 나이와 신공, 혼인과 가족관계, 거주 지역을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소수서원 노비의 특징을 파악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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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소수서원 교육의 성격

        김자운 한국유교학회 2014 유교사상문화연구 Vol. No.

        This paper aims to examine educational characteristics of Seowon in Choseon dynasty focused on Sosu-Seowon. Choseon Seowon is usually regarded as a private school not a government-operated Academy. Also, people think Seowon was built and managed by gentry and they explored dohak(道學) in Seowon. However, Jusebung who established the first Seowon was more close to a meritorious retainer rather than gentry and the education in 16th century was somewhat different with dohak. In addition it was very ambiguous to regard Sosu-Seowon in 16th century as government-operated Academy or private school. This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Choseon Seowon has gone to change over time. Then, what was the educational purpose of Sosu-Seowon in 16th century and how the education was accomplished? The government-operated Academy of Choseon was losing the educational function in 16th century. So Jusebung regarded Seowon as the replacement of government-operated Academy. As the result, the education in 16th century was focused on preparation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and the result of this education was very effective. Although Jusebung did not inherit Chu hsi’s educational philosophy with Seowon, he successfully carried out his duty to reconstruct school as a local magistrate. Since the 17th century, the educational philosophy and practice of Sosu-Seowon began to change, finally, Seowon was a place to explore and practice the do-learning(道學) not prepare for civil service examination. 이 연구는 학교로서 조선조 서원이 수행한 교육의 성격과 그 성격의 변화 과정을 소수서원 사례를 중심으로 밝히는 데 목적이 있다. 1543년 주세붕에 의해 창건된 이래 조선의 서원은 흔히 ‘官學’이 아닌 ‘私學’으로, ‘士林’이 그 설립과 운영의 주체가 되어 본받을만한 스승이나 선현의 위패를 모시고 ‘道學’을 講明한 곳으로 이해되고 있다. 그러나 조선 최초의 서원인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주세붕은 사림보다는 공신 계열에 가까운 인물이었고, 16세기 소수서원에서 행해진 교육도 道學과는 다소 거리가 있었으며, 운영 주체나 학교의 성격 면에서도 官學과 私學의 구분이 매우 모호한 상태였다. 이는 학교로서 조선조 서원의 성격이 시대를 거치면서 변화해갔음을 말해준다. 그렇다면 16세기 소수서원에서는 과연 무엇을 목표로, 어떤 교육이 이루어지고 있었을까. 백운동서원은 설립된 지 3년 만에 ‘이 서원에서 공부하면 5년도 안되어 모두 과거에 급제한다’고 회자될 만큼, 과거 공부를 가장 효율적으로 시키는 科學(科擧之學)의 명소로 급부상하고 있었다. 또한 1558년 스무살의 나이에 소수서원에서 공부하던 학봉 김성일은 ‘사람이 이 세상에 태어나 과거 공부만 하고 자신을 위하는 학문을 알지 못한다면, 이는 아주 부끄러운 일이다’고 하며 과거에 뜻을 접고 도학을 탐구하기 위해 소수서원을 떠나 도산서당으로 가서 퇴계의 문하가 되었다. 이 일화들은 16세기 소수서원의 교육 실제와 성격을 파악할 수 있는 단서를 제공하고 있다. 즉, 16세기 소수서원은 교육의 내용과 효과 면에서 무엇보다 科業을 충실히 수행하는 곳이었다. 그렇다면 16세기 소수서원 교육이 이와 같은 식으로 전개될 수밖에 없었던 이유와 배경은 과연 무엇이고, 그 교육은 어떤 이념 하에 구체적으로 어떤 방식으로 이루어졌으며, 그 의미는 과연 어디에서 찾을 수 있는가? 또 16세기 이후 소수서원 교육의 이념과 실제는 과연 어떻게 변화해갔는가? 본고는 이와 같은 물음에 답함으로써 조선조 서원 교육의 성격과 그 변화 과정의 일단을 살피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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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嶺南地方 書院藏書의 淵源과 性格

        裵賢淑(Pae, Hyon-Suk) 대동한문학회 2016 大東漢文學 Vol.46 No.-

        본고는 올 7월 유네스코 세계유산 등재 여부가 결정될 9서원 가운데 영남지방의 6서원을 대상으로 그 문고의 성립과정을 분석한 것이다. 6서원은 소수서원・남계서원・옥산서원・도산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이다. 이들 서원은 장서를 하였고, 서적을 수장할 공간으로 문고 또는 장서각을 건립하였다. 이들 서원문고의 장서는 오늘날 대학도서관의 기능을 한 것으로 보인 다. 장서는 장서마다 특징이 있게 마련인데, 서원의 장서도 마찬가지이다. 서원은 설립자와 원규에 따라 장서의 성격에 차이가 있었다. 서원의 장서는 주향자의 수택본 이관본, 국왕・지방관인・사인 기증본과 구입본으로 증대되었다. 서원의 초기 장서 가운데 주향자의 서적을 이관한 경우는 소수서원・남계서원・도동서원은 전무한 상태이고, 도산서원의 경우 일부 서적은 확인되었고, 병산서원・옥산서원은 가능성은 있지만 확신할 수 있는 서적은 찾지 못한 상태이다. 6서원 초기의 장서에는 서원 자체 간본이 나 교환으로 증대된 서적의 증거는 볼 수 없었다. 다만 도산서원에는 송지인책본이 극소수 있었을 뿐이다. 서원마다 기증본 가운데 지방관인 기증본이 압도적으로 많은 것으로 추정할 수 있겠다. 국왕하사본은 소량이지만 중시되었다. 구입본은 소수서원의 경우 장서의 기반이 되었고, 도산서원은 지방관인의 기증본 다음으로 큰비중을 차지하였고, 남계서원・옥산서원・도동서원・병산서원은 주기가 없어 알 수 없다. 자체제작본은 병산서원에서는 하권의 대다수를 차지할 정도로 상당히 큰 비중을 보이고 있다. 서적의 주제는 대개 유학의 경서와 유가의학설이 중심이고, 다음이 역사 서적이었다. 그러나 여타 자부서적은 거의볼 수 없었다. 신재는 교육에 있어 서적은 필수적인 것으로 인식하고 있었던 것 같다. 그리하여 서원의 장학과 관계되는 尊賢錄 ・ 學田錄 ・ 藏書錄 을 동등한 수준으로 작성한 것이다. 그 결과 소수서원 창립기 서적의 규모와 입수방법을 알 수 있다. 신재는 서원의 창설뿐만 아니라 장서구축과 서목의 작성에큰 공을 남겼으니, 그 공이 적지 않다고 하겠다.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origion of book collections stored in 6 seowons in Yeongnam Province, which are going to be registered in UNESCO. They are Sosu, Namgye, Oksan, Tosan, Todong and Pyungsan seowons. All of these seowons had book collections and library buildings to store them. These collections acted as college libraries of nowadays. The collections of seowons had their own characteristics like other collections. The characteristics vary depending on the founders and regulations of seowons. In the process of collections, books were accumulated by donations from the persons whom enshrined, kings and provincial officials, privately donated and from purchases. The books donated from the person whom enshrined were not found at Sosu, Namgye and Todong seowons. At Tosan seowon, only a few books were found. There is a possibility that Oksan and Pyungsan seowons had them, but they were not found. There was no evidence found that books published in each seowon and exchanged. Although at Tosan seowon there were 2 kinds of books stored which papers were sent to other publisher and printed there. It looks like a large number of collections of seowons were accumulated by books donated from provincial officials. Books donated from kings were small amounts, but were regarded highly. At Sosu seowon majority of them were books purchased, but at Tosan seowon majority were books donated from provincial officials. Namgye, Oksan, Todong, Pyungsan seowons had no records to show. At Pyungsan seowon a large proportion of books stored were written at its own seowon. The main subjects of collections at most seowons were the Confucian classics, Confucianism and history. Other philosophical books were hardly found. Sinjae Ju Sebung, founder of the first seowon ie. Sosu seowon realized that books were an indispensable part of education. He wrote 「On the sage of seowon」・「On real estate of seowon」 and 「On the book collection of seowon」, all of them on the same level. Through these books, we can understand the founding, the size of collection, and the means of acquisition of the book collections. Sinjae is credited with not only founding the seowon but also the collection and making a compilation of catalogues of the seowon books. His dedication to making a compilation of catalogues was admira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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