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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조선시대 여성 묘비에 관한 일 고찰

        심경호 ( Sim Kyungho ) 근역한문학회 2018 한문학논집(漢文學論集) Vol.49 No.-

        한문학 연구에서 묘비 묘지 등 墓道文字는 문헌자료의 한계를 보완하는 기능을 할 뿐 아니라, 그 자체로서 지성사와 문화사에서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그런데 立碑의 사실 자체를 문화사적 관습과 관련시켜 주목할 필요가 있다. 지하에 묻는 墓誌와 壙誌는 墓主가 다양해서 승려, 사대부, 여성, 요절한 아이의 것 등이 있다. 고려시대에 지상에 세운묘비는 대부분 승려들의 비였고, 사대부 관원의 경우는 고려 전기와 중기까지는 지상에 세우지 않았다. 그러다가 고려 말에 이르러 사대부의 神道碑와 墓表가 지상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이후 조선 전기부터 사대부 지식인들은 外命婦로서 국왕으로부터 직첩을 받은 집안의 여성들을 위한 墓誌墓誌銘을 주의 깊게 작성했다. 사대부 여성의 묘도문자는 처음에는 지상에 세우는 묘표나 묘갈보다는 지하에 묻는 墓誌에 새겨지는 것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다가 조선 초부터 여성 묘주의 비석이 땅 위에 세워지기 시작했다. 그 비석은 주로 墓碣이나 墓表의 형태를 띠었다. 다만 이 경향은 시대적 조류를 이루지는 않았다. 오히려 일부 立言者가 그러한 묘도문자에 주목하게 되었다. 조선후기에 이를수록, 여성 묘주의 경우 부군의 묘에 ?葬하면서 生歿年과 葬地를 묘비의 비음에 새기는 경향이 짙어졌다. 다만 17세기 이후 여성의 삶에 대한 관심이 높아지면서 여성 묘주의 묘도문자가 증대하고, 이에 병행하여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도 점차 더 많이 세워지게 되었다. 곧, ‘부인은 남편을 따른다(夫人從夫)’는 관념을 벗어나, ‘그 남편의 묘에 부수하여 일컫지 않는(不稱以夫墓)’ 것으로 나아갔다. 이것은, 여성의 烈節이나 女中君子의 덕목이 여성이라는 존재자의 독자적 가치로서 부각되고 衆人의 耳目에 傳播되기에 이르렀다는 사실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다만, 여성 묘주의 묘표와 묘갈을 제작하는 관습은 아직 시대적 조류로서 간주하기는 어렵다. 오히려 家格이 뛰어난 집안의 학자-문인, 先? 혹은 夫人에 대한 각별한 정념을 지닌 문사들이 그러한 묘표와 묘갈을 남긴 것으로 파악된다. 夭?의 여성을 위한 묘표도 적은 수이지만 건립되었다. 여성 묘주를 위한 神道碑는 太宗의 명을 받아 權近이 1403년(태종 3)에 찬술한 太祖의 正妃 神懿王后 韓氏의 齊陵 神道碑銘이 가장 이른 예이다. 그 후 인조는 생부 定遠君을 낳은 仁嬪金氏를 위해 張維와 申欽에게 명해서 두 차례에 걸쳐 神道碑銘을 작성하게 했다. 그리고 영조는 생모 숙빈 최씨를 위해 朴弼成에게 명하여 신도비문을 작성하게 했다. 이세 글은 정치적인 맥락에서 이루어진 것이기는 하지만, 사대부 여성 묘주를 위한 立碑 사실과 마찬가지로 命撰者(이 경우는 국왕)의 각별한 정념을 반영하고 있다. 한편, 여승을 위한 묘표는 蔡濟恭이 定有大師를 위해 작성한 『女大師定有浮屠碑銘』이 유일하다. 이 글은 여성의 치열한 구도 행력, 여승에 대한 추억 등을 치밀하게 착종시킨 명문이다. 또 19세기 후반에는 『東都名妓紅桃之墓碑』처럼 敎坊 伶妓들이 ‘樂府의 師宗’을 위해 妓女墓表를 세우기도 했다. The epitaphic letters not only supplement the deficiency of documents in researching Korean classical literature, but also have a important meaning in the history of thoughts and culture. The epitaphic works for the wives of the scholar-officials were at first inscribed on the burial panels rather than on the tombstones on the ground and it was in the early Joseon period that the tombstones of a woman were erected on the ground which was same to the cases of man hosts. In late Joseon it became common to put up a tombstones to inscribe epitaphic letters on the tombstone at the same grave where the wife was buried with the husband, and the virtues as a supreme woman were highlighted as a unique value of woman. It was consequently resulted in the erection of tombstones with epitaphs of reminiscing and mourning the life and the death of a woman who lived an independent life. However, it doesn’t seem to be widely prevalent to produce a tombstone for a woman host at that time. Rather, it was literati of good family or those who had a deep affection for his mother or his wife that composed epitaphic letters for the tombstones. There are also tombstones for those who died at an early age though it is a very few case. As to a tombstone for a Buddhist nun, 女大師定有浮屠碑銘 is the only case which was written by Chae Jaegong. In late 19th century Kisaeng (woman entertainer) belonged to Entertainers Office asked literati to write a epitaphic work to commemorate their master, such as 東都名妓紅桃之墓碑 written by choe Namgon. The first memorial stone monument for a woman is one for Queen of Sinui, the queen of King Taejo written by Gwon Geun by the order of King Taejo in 1403. Two epitaphic letters for Inbin from Gim clan written by Jang Yu and Sin Heum by the oder of King Injo and the one for Sukbin from Choe clan written by Bak Pilseong by the oder of King Yeongjo also have a significant meaning in the history of literature of epitaph. It also includes a deep affection of the kings like the one by scholar-officials though they assume a political character.

      • KCI등재

        조선시대(朝鮮時代) 묘도문자(墓道文字)의 역사적(歷史的) 특성(特性)

        沈慶昊 한국어문학국제학술포럼 2010 Journal of Korean Culture Vol.15 No.-

        조선시대에는 국왕, 양반 사대부(妻를 포함), 중인, 승려가 故人(墓主)인 경우에, 그 신하, 자제, 지인, 문인으로서 문장에 능한 사람이 墓道文字를 작성했다. 生祠를 설립하고 거기에 비석을 세운 예가 없으므로 墓碑와 墓誌는 대개 한 사람의 일생을 개괄하고 삶을 평가하는 내용을 담았다. 게다가 사대부 지식인들은 자기 스스로 碑誌를 작성함으로써 삶과 죽음에 대해 성찰하기까지 했다. 조선시대는 양반 사대부가 정치문화의 중심에 있었던 시대였다. 이러한 사실은 묘도문자의 제작에서도 반영되었다. ① 조선시대에는 여성 묘주의 묘비가 제작되지 않은 듯하다. 여성은 사망 후에 남편의 묘에 祔葬되는 것이 항례였으므로 별도로 묘비를 세우지 않았다. 하지만 여성의 경우 墓誌는 광중에 묻었다. 여성을 위해 墓誌를 작성하는 관습은 조선시대에도 이어졌다. 朱熹의 경우도 「夫人呂氏墓誌銘」 등 여성 묘주를 위한 묘지명을 많이 남겼으므로, 그것이 많이 참고로 되었을 듯하다. ② 조선시대에는 17세기에 들어오면서 아동에 대한 관심이 종래보다 깊어지면서 早沒한 자식을 위한 壙誌가 제작되기 시작했다. 李植의 「亡兒老農壙誌銘竝序」는 그 선구를 이룬다. ③ 승려들을 위한 비문은 고려시대에 이어 조선시대에도 발달했다. 이를테면 조선후기의 승려 蓮潭有一의 「自譜行業」을 보면, 당시의 승려들은 先師의 비석을 작성하는 일을 매우 중요한 과업으로 삼았음을 알 수 있다. ④ 하급의 武班이나 벼슬길에 오르지 못한 殘班은 간단한 형태로라도 誌石을 제작했으리라 생각된다. 중인 계층도 묘도문자에 관심을 기울였으나, 사대부 양반에게 미치지는 못했다 서얼 계층의 경우는 자기 계층인의 묘도문자에 그리 큰 관심을 기울이지 않은 듯하다. 또한 상인이나 공인의 경우는 아직까지 묘도문자가 발견된 예가 없다. 상인과 공인은 직분상의 자각이나 계층으로서의 자각이 상대적으로 낮았던 듯하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지식층과 중간계층이 묘도문자에 관심을 기울인 이유는 묘도문자에서 다음과 같은 기능을 중시했기 때문이다. ① 묘도문자는 곧 立言者의 기록을 통해 墓主의 이름을 不朽하게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묘도문자는 諛墓로 전락하지 않는 것을 이상으로 생각했다. 많은 지식인들이 묘도문자에서 溢美를 배격하기 위해 묘도문자의 형식과 수사에 관한 논문을 남겼다. ② 묘도문자는 망자에 대한 공정한 평가를 제시한다는 의미를 지녔다. 조선중기의 학자 李滉이 碑誌를 行狀과 마찬가지로 公器 혹은 公道로 간주한 것은 그 같은 관념을 대표한다. 특히 한 인물에 대한 공적 평가가 달라지면 새로운 묘도문자를 작성했으며, 간혹 망자에 대한 평가에 불만을 품은 후손들이 묘도문자의 改撰을 청하기도 했다. ③ 묘도문자는 墓域의 標識와 占有, 家系의 追認 등 실질적인 기능을 지녔다. 李圭景은 『五洲衍文長箋散稿』에서 후세에 묘를 잃어버렸을 때 墓誌가 발견되면 先塋을 찾을 수 있다는 사실을 언급한바 있다. 이러한 일은 현대에도 자주 일어나고 있다. 조선시대의 사대부 지식인들은 삶과 죽음의 사실을 기록한 묘도문자를 풍부하게 작성하여, 그 실물이나 문헌자료가 매우 풍부하게 남아있다. 그런데 그 묘도문자는 양반 사대부를 중심으로 이루어졌기에, 소외 계층의 그것은 그리 발달하지 않았다고 推斷할 수도 있다. 이를테면 조선시대의 유물로서 日本의 板碑같은 예는 아직 보고되지 않았다. 그러나 조선시대에 환시도 碑碣을 만들었다면, 비갈과 같은 묘도문자는 실은 하층의 신분이나 소외된 계층에서도 제작했을 가능성이 있다. 또한 工商人의 비갈은 제작되지 않은 것이 아니라 전하지 않는 것 일수 있다는 가설을 세워볼 수도 있을 듯하다. 앞으로의 과제로 남긴다. 朝鮮代には國王、兩班士大夫(妻を含む)、中人、僧侶が故人(墓主)である場合、その臣下、子弟、知人、門人のうち文章に長けた者が墓道文字を作成した。生祠を立て、そこに碑を建てた例がないため、墓碑と墓誌には基本的に一人の一生を槪括し、その生を評価する内容が記された。—方士大夫知識人らは自ら碑誌を作成し、生と死に對する省察まで行なった。 朝鮮時代は兩班士大夫が政治文化の中心に存在した時代である。この事實は墓道文字の製作にも反映された。 ① 朝鮮時代には女性墓主の墓碑が製作されなかったようであ。女性の場合、死後は夫の墓に祔葬されるのが通例だったため別途、墓碑を建てることはなかったしかし、その墓誌は擴中に埋められ、女性の爲に墓誌を作る慣習は朝鮮時代にも受け継がれた。朱熹は、「夫人呂氏墓誌銘」など女性墓主のための墓誌銘を相省殘したので、これらがよく參照されたらしい。 ② 朝鮮時代には17世紀に入って以降兒童に對する關心が以前より深まり、夭折した子息のための壙誌が作られだした。李植の「亡兒老農壙誌銘竝序」はその先驅をなす。 ③ 僧侶のための碑文は高麗時代に續き朝鮮時代にも發违した。朝鮮後期の僧侶である蓮潭有一の「自譜行業」を見ると、当時の僧侶らは先師の碑石の製作を非常に重要な課業としていたことが分かる。 ④ 下級の武班や官途に就けなかった殘班は、簡單な形態ではあったが誌石を製作したと考えられる。中人階層も墓道文字に關心を持っていたが士大夫兩班には及ばなかった。庶擊階層の場合は同階層の人問の墓道文字に對して、さほど關心を持っていなかったようである。また商人や工人の場合、これまで墓道文字が發見された例はない。商人と工人は職分上の自覺や階層としての自覺が相對的に低かったらしい。 朝鮮時代の士大夫知識層と中間階層が墓道文字に關心を持っていた理由は墓道文字において次のような機能を動見したからである。 ① 墓道文字は、立言者の記録を通じて墓主の名を不朽のものにできると考えられていた。墓道文字は諛墓[墓誌銘を通じた死者への過度な称讚]に轉落しないことを理想とし、多くの知識人らが墓道文字において溢美[過度な称讚]を排撃するため、墓道文字の形式と修辭に關する論文を殘した。 ② 墓道文字は、亡者に對する公正な評価を提示する意味を持つ朝鮮中期の學者である李深が、碑誌を行狀と同じく公器、また公道と見なしたことはその觀念を代表する。特に或る人物に對する公的評価が変わると新しい墓道文字が作成され、ときに亡者に對する評価に不満を抱いた子孫らによって墓道文字の改撰が要請されることもあった。 ③ 墓道文字は墓域の標識と占有家系の追認など實質的な機能を持っ。 李圭景は『五洲衍文長箋散稿」において、後世、祖先の墓を忘れた時に墓誌が發見されれば先塋を搜すことができると言及したことがある。これは現代においても頻繁なことである。 朝鮮時代の士大夫知識人らは生と死の事實を記錄した墓道文字を盛んに作成し、その實物や文獻資料が非常に多く殘っている。一方で、墓道文字は兩班士大夫を中心に成り立ったので、疏外階層のそれはあまり發達しなかったと推斷することもできる。例えは朝鮮時代の遺物のうち、日本の板碑のような例はまだ報告されていない。しかし、もし宦侍も碑碣を作ったとすれば碑碣のような墓道文字が、實際には下層の身分や疏外階層でも製作された可能性がある。また工商人の碑碣は作られなかったのではなく、伝わらなかったのかも知れないという仮說を立てることもできよう今後の課題としたい。

      • KCI등재

        고전기 그리스 사회의 가족 개념과 이미지

        조은정 미술사학연구회 2015 美術史學報 Vol.- No.45

        The οἰκία(household, home) was the foundation of the classical Greek society which provided individual πολίτης(citizen) with the social status and supported the πόλις(city-state). Texts of ancient authors like Plato, Xenophon, Aristotle and the archaeological remains of Athenian Agora and Olynthus established during the late 5th and 4th century BC show us that the functions of the Greek οἶκος(house) were quite complex, as the structures of many buildings indicate commercial and industrial activities as well and domestic ones. A man’s οἶκος means his whole property, where he manages both his possessions and his household members. The ideal concept of the Greek family consists of two axis; the husband and wife, the master and slave, as is shown in the divisions of the γυναικωνῖτις(women’s quarter) and ἀνδρών(men’s quarter) in pastas houses, the usual type of the town houses. The role of household for the state was emphasized especially in democratic Athens where the economic power based on the household management is the essential footing of ordinary citizens in order to participate in politics. The increasing tendencies of portraying family members in the funerary stele during the later period of Periclean regime reveal the internal crisis of Athenian society and the desire of the people who wanted to stabilize their public position by means of family ties. 고전기 그리스 사회에서 가정(οἰκία)은 개인의 사회적 정체성을 규명하고 국가를 유지시키는 토대였다. 플라톤과 크세노폰, 아리스토텔레스의 문헌 자료들을 비롯해서 기원 전 4세기 중반의 아테네 아고라 북쪽에서 발굴된 고전기 주택들, 그리고 기원 전 5세기 말에서 4세기 후반까지 번성했던 올린토스의 도시 주택들을 보면 일반 도시민들의 가정이 남편과 아내, 주인과 노예라는 두 축을 중심으로 해서 가사활동 뿐 아니라 사회적 교류, 더 나아가서는 산업 활동까지 담당했던 복합적 공간이었음을 보여준다. 파스타스 주택 유적들에서 ‘여자들의 구역(γυναικωνῖτις)’과 ‘남자들의 구역(ἀνδρών)’ 사이의 경계는 이러한 관점에서 이해되어야 한다. 아테네와 같이 공적인 임무를 분담할 수 있는 경제적 기반을 지닌 일반 시민들이 국가 행정의 중추 역할을 수행하는 민주정 체제에서 가정은 국가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근간이자, 개인의 사회적 지위와 품위를 뒷받침하는 조건이었다. 내, 외부의 위험 요소들로 인해서 국가의 체제가 흔들리기 시작한 페리클레스 치세 후반의 아테네 사회에서 가정의 중요성을 강조하는 문헌들과 무덤 조형물들이 집중적으로 나타났던 사실이 이를 잘 말해준다. 고전기 후반 상류층 가정의 묘비들에서 가족 관계를 통해서 개인을 구체화할 뿐 아니라 가족 내의 여러 구성원들을 함께 기림으로써 가문의 결속력을 과시하는 경향이 두드러졌던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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