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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전의 상징성과 향교 석전의 식민지적 변용

        장순순 한림대학교 태동고전연구소 2020 泰東古典硏究 Vol.45 No.-

        본 연구는 유교제례인 문묘 석전이 조선총독부의 유림정책 속에서 어떻게 변용되었는지에 대해서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서 다음과 같은 사실을 알 수 있었다. 조선왕조는 건국 초기부터 석전을 국가에서 주관했다. 우리나라 문묘에는 우리나라 18현이 중국의 유현들과 함께 석전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과 문묘 종사에 주자학의 도통이 강조되었다는 점이 중국과 다르다. 그리고 성균관과 전국 향교에 문묘를 설치하여 국가 차원에서 석전으로 거행한 것은 조선 왕조의 이념적 성격을 드러내는 것으로, 조선왕조의 정체성을 내외에 선언한 것이었다고 볼 수 있다. 일제는 통감부 시기부터 유림들의 활동 공간인 향교를 통제했다. 강점 직후, 향교가 총독부와 일본인 관리들의 통제 속에 들어가게 되면서 향교의 기능과 역할에 큰 변화가 있었으며, 더불어 석전에도 큰 변화가 있었다. 첫째, 문묘 석전의 주관자인 제관 및 참여자의 변화를 들 수 있으며, 둘째, 석전 제문의 날짜 표기⋅독축(讀祝)방식⋅날짜 변경, 셋째, 양무 및 계성사 향사의 일시적인 폐지, 넷째, 석전의례 중 서고식(誓告式) 추가, 마지막으로 경학원과 향교의 문묘 개방과 일반인 출입의 허용 등을 들 수 있다. 이러한 변화는 총독부가 ‘원활한’ 식민통치를 위해 유학을 중요하게 여기는 모습을 보여줌과 동시에 석전의례 속에서 오랫동안 지속해 온 조선의 유교적 전통을 의도적으로 배제하고 자신들의 통치 권력의 현재성을 강조하기 위함이었다. 심지어 석전행사를 일반인에게 개방하고, 경학원 명륜당과 전국 향교를 혼례식장으로까지 개방한 조치는 문묘로 상징되는 조선의 전근대적 사회 질서를 파괴함으로써 신민지 통치를 ‘근대화’로 미화한 것이었다. 1937년 중일전쟁 발발에 앞서 총독부는 전국 유림의 동향 파악에 더욱 적극적이었다. 석전을 강연회 등 각종 행사와 연계시킴으로서, 식민지 조선인에게 식민통치의 당위성을 선전하여 일제의 식민통치에 순종하도록 유도하고, 나아가 일제의 침략 전쟁과 식민통치에 철저하게 이용하였다. 이로서 석전은 기존의 제사로서의 기능이나 신성함을 완전히 상실하게 되었고, 일제가 일으킨 침략전쟁의 적극적인 선전의 장이 되었다. This study examines how Munmyo (Confucian shrine) Seokjeon was transform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s part of Confucian policies. Findings of this study include the following: Right from the its beginning, the Joseon Dynasty supervised and operated Seokjeon directly. Two major differences between Confucian shrines in Korea and those in China were that 18 major Confucianists in Korea along with those in China were enshrined at Seokjeon and that ideas of Orthodox Neo-Confucianism were emphasized in Confucian shrine affairs. Confucian shrines were built up in various hyanggyos nationwide as well as Seonggyungwan so that rituals were held with Seokjeon on a national level, which represents the ideological nature of the Joseon Dynasty and proclaims the identity of the Joseon Dynasty in and out of the country. Japanese imperialism controlled hyanggyos which were a space of activity for Confucian scholars since the period of the Residency General. Right after the Colonial Period began, hyanggyos were put under the control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and Japanese officials. As a result, there were significant changes in their functions and roles as well as those of Seokjeon. First, there were changes in rite officiants and participants at Confucian shrines of Seokjeon. Second, indication of dates in memorial addresses of Seokjeon, ways of reading addresses, and dates were changed. Third, Yangmu and Gyeseongsa shrines were abolished temporarily. Fourth, an agreement ceremony was added as part of Seokjeon rites. Finally, Gyeonghagwon and hyanggyo shrines were opened to the public. Such changes were intended to imply that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valued Confucianism for ‘smooth’ colonial ruling and to emphasize Japan’s present governance while excluding Confucian traditions of Joseon that had long been preserved in Seokjeon rituals. Furthermore, Seokjeon events were opened to the general public, and hyanggyos around the country as well as Gyeonghagwon Pyeongryundang became available as a wedding hall, which was to destroy the premodern social order of Joseon symbolized by Confucian shrines and to beautify the colonial rule as ‘modernization’. Before 1937 when the Chinese-Japanese War broke out,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put forth more efforts to grasp movements of Confucian scholars around the country. Seokjeon was connected to various events such as lecture meeting with the intention of justifying the colonial rule among Koreans and induce them to obey Japan’s rulership, and further, to make full use of Korea for their aggressive wars and colonial rule in other territories. As such, Seokjeon lost its original functions for rituals as well as its divineness completely and rather became a space used by Japan to propagate their war of aggression actively.

      • KCI등재후보

        한국사상(韓國思想) : 철학(哲學) ; 석전제례(釋奠祭禮)의 사회철학적 의미

        이기동 한국사상문화학회 2007 韓國思想과 文化 Vol.40 No.-

        ``석전(釋奠)``이란 글자는 제물이나 폐백을 신에게 받치기 위해 진열해 놓은 것을 의미한다. 일반적으로 석전이란 학문에 공이 있는 성현 또는 선사에 대한 제사를 의미하지만, 고대에는 반드시 학교에서의 제사를 지칭했던 것은 아니다. 산천에 대한 제사도 석전이라 불리어졌으나 점차 학교에서의 제사만을 한정하여 불리어졌다. 그러다가 공자가 과거 동아시아의 학교에서 가장 추앙 받는 성현이 되었기 때문에 성현에 대한 석전제는 차츰 공자에 대한 제사로 압축되었다. 조선시대에 행해지던 문묘제례의식은 국가적 차원에서의 철학적·정치적·교육적 기능이 지대했었다. 그러나 오늘날 행해지는 문묘제례의식의 의미는 과거에 행해지던 문묘제례의식과는 그 의미가 다르다. 오늘날 행해지는 석전제례는 박물관의 기능 이상일 수 없다. 따라서 과거의 철학적·정치적·교육적으로 역할을 했던 지대한 기능이 사장되고 만다면 참으로 안타까운 일이다. 만약 석전제례에 오늘날 되살릴 수 있는 중요한 요소가 있는데도 간과되고 있다면 그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석전제례의식이 오늘날 제대로 기능을 하기 위해서는 넘어야 할 산이 많다. 현대인의 삶에서 나타나는 문제점에 대해서 사람들이 더 많은 고민을 해야할 것이다. 그리고 그것이 서구 근대에 성립된 개인주의적 삶에서 비롯된다는 것도 인식해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문제점들을 극복하는 방법으로 동양적 삶의 방법에 관심을 가져야 할 것이다. 그런 날이 온 뒤에야 석전제례의식은 본래의 의미를 되찾을 수 있을 것이다. 또 한국인들에게는 공자의 사상이 중국에서 들어온 외래사상이 아니라 한국 고유의 사상이 공자에 의해 정리되고 그것이 다시 역수입된 것이라는 것을 인식하는 과정이 선행될 때 석전제례의식은 새로운 의미를 가지고 다가올 것이다. "釋奠"二字本來意味着向神獻祭物或幣帛而擺放祭品. 一般意義上講的"釋奠"指的是對學問深厚的聖賢或先師的祭祀, 但在古代타指的幷不只是在學校里擧行的祭祀. 對山川的祭祀也可以稱作釋奠, 但后來人們逐漸將在學校里的祭祀稱爲釋奠. 雖然古代中國的祭祀中有侍童, 但學校中的祭祀沒有侍童, 只是擺放祭品, 因此稱爲"釋奠". 在孔子以前就有釋奠的傳統, 而孔子死后, 曾經有一段時期學校的祠堂里比起孔子來更加崇尙周公. 幷且在與文廟相對立的武廟的祭祀也使用"釋奠"這一用語. 后來由于孔子是在過去東亞的學校中最受尊崇的骨賢, 因此對聖賢的釋奠祭禮就逐漸演變爲對孔子的祭祀. 李旭, ≪釋奠的价値與歷史≫, 見2003年鍾路區刊行的≪文廟佾員與釋奠大祭≫39頁. 而朝鮮時代實行的文廟祭禮儀式却幷非如此. 他在國家層次上具有至大的哲學、政治以及敎育功能. 而今天文廟祭禮儀式的意義却與過去有着흔大的不同. 至少就韓國來講, 文廟祭禮儀式的意義僅僅是延續了過去朝鮮時代的形式而已, 其哲學、政治以及敎育的机能已經退色, 甚至不覆存在. 那마今后的文廟祭禮儀式難道也像現在一樣其意義僅僅在于延續過去朝鮮時代的形式? 若是如此, 則今天的釋奠祭禮只能是博物館里的文物了. 因此, 釋奠祭禮在過去曾經發揮的至大的哲學、政治、敎育的机能若被積壓起來, 則无疑是一件遺憾的事情. 而且, 在今天我們可以重新覆活釋奠祭禮中的重要因素, 但却忽視而不做, 這更是遺憾之擧. 本論文就從這種問題意識出發.

      • KCI등재후보

        공인된 전쟁놀이 석전(石戰)과 관련된 세시풍속 연구

        남도희,조성균 한국무예학회 2017 무예연구 Vol.11 No.1

        This study aims to find out the correlation and the probability that the Seokjeon which was established as a regular military base by King Taejo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popularized as the folk game, is transformed into various Seasonal Rituals after the political abolishment of the state. This study was investigated through literature study, and the following results were obtained. Firstly, in the Early Joseon Dynasty, the Seokjeon was a military system for wars. While establishing the Joseon Dynasty, King Taejo established the Chukseok army, Seokjeon base, as a warrior for the wars and also equipped the amusing elements as a folk play. The Chukseok army was organized under the control of the central government. In the 9th year of King Sejong regime, the Seokjeon had a systematic form. Secondly, the form of Seokjeon, the battle play, was spread and changed into the Seasonal Rituals of the people. The form and supplies of the Uiseong sedan chair play imitated the form and the supplies of the Seokjeon, which demonstrates it. The existence of the form of Seokjeon in the Uiseong sedan chair play and the Gunwi baksi play shows that they are the Seasonal Rituals developed from the Seokjeon. Thirdly, in the Joseon Dynasty, the Seokjeon was likely to Soobak(Korean traditional martial art), the martial arts. The form of the game of Seokjeon can be found in the Uiseong sedan chair play and the Gunwi baksi, the other Seasonal Rituals, and the shape, the name and the terminology of their physical fights are likely to be associated with the Soobak in the Early Joseon Dynasty. 석전은 고대부터 근대까지 전국 각지에서 행하여졌던 한국의 세시풍속이었다. 이 연구는 석전이 조선 초기 태조에 의해 정규 군부대로 창설되었고, 민속경기로 대중화된 석전이 국가의 정책적인 폐지 이후에 다양한 세시풍속들로 변용된 연관성과 개연성을 찾고자 한다. 이 연구는 문헌연구를 통해 조사되었으며, 다음과 같은 결과를 얻었다. 첫째, 조선 초기 석전은 전쟁을 하기 위한 군사제도였다. 조선을 건국하면서 태조는 전쟁을 위한 무재(武才)로써 석전부대인 척석군(擲石軍)을 창설하였으며, 더불어 민속놀이로서 유희(遊戱)적 요소를 갖추어갔다. 척석군(擲石軍)은 중추(中樞) 관리 하에 편성하였다. 세종 9년에 이르러 석전은 체계화된 형태를 갖추었다. 둘째, 전투놀이 석전의 형식이 민중의 세시풍속으로 퍼져갔으며 변용되었다. 의성 가마놀이의 형식과 용품들이 석전의 경기형식과 용품을 모방한 것은 이를 증명한다. 의성 가마놀이 및 군위 박시놀이 속에 석전의 형태가 존재하는 것은 석전에서 파생하여 발전한 세시풍속 임을 보여주는 것이다. 셋째, 조선시대의 석전은 무예인 수박(手搏)과 개연성이 있을 것으로 나타났다. 석전의 경기형태는 다른 세시풍속인 의성 가마놀이 및 군위 박시놀이 등에서 찾아볼 수 있으며, 여기에서 보이는 몸싸움의 형태와 명칭, 용어 등은 조선 초기 수박(手搏)과의 개연성을 보인다.

      • KCI등재

        근대 불교지성과 불교잡지

        김상일(Kim Sang-Il) 동악어문학회 2009 동악어문학 Vol.52 No.-

        石顚 朴漢永과 萬海 韓龍雲은 근대 한국불교의 維新에 신명을 바친 高僧 또는 ‘佛敎知性’으로 일컬어진다. 그것은 그들이 이른바 ‘開化’ㆍ‘開明’의 근대시기를 살면서 ‘근대적 覺性’을 통해 당시 한국불교계가 당면한 문제에 주체적으로 대응하고 서구 자본주의 물질문명에 대해 비판적 성찰을 보이기 때문이다. 이글은 석전과 만해의 위와 같은 면모가 주로 그들의 불교잡지 발행과 문필활동으로 드러난 것에 착안하여 그 의미를 아래와 같이 고구한 것이다. 불교지성적인 면모 : 석전과 만해는 전통적인 유교와 불교를 훈습한 구지식인이지만 ‘근대적 각성’을 통해 한국불교의 유신을 꾀했다. 그리고 그들은 한국불교의 정체성을 끊임없이 확인하면서 일제의 침략에 대항하는 한편 서구 자본주의 물질문명의 폐해와 沒生命性을 비판하고 정신문화의 가치를 역설한 점에서 지성적인 면모를 볼 수 있다. 다만, 석전이 주로 교육의 현장에서 이러한 생각을 실현하려고 한 반면, 만해는 재야에서 이러한 활동을 운동적 차원으로 이끌어내려 한점이 다를 뿐이다. 불교잡지 발행과 그 의미 : 석전은 1913년 『海東佛報』를 발행하여 쇠퇴한 한국불교의 振作을 천명한다. 그리고 한국불교의 정체성과 관련된 글을 다량 발표하여 한국불교 유신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불교계의 각성을 촉구하였다. 만해 또한 1918년 『惟心』을 창간하고, 1931년에는 『佛敎』를 인수 발행하여 불교계 언론을 이끌며 주로 불교계의 현안과 관련된 많은 글을 발표하였다. 이런 점에서 석전과 만해의 불교잡지 발행은 한국불교의 근대화와 대중화를 실현하는데 적지 않은 역할을 한 것이다. 문필 활동 내용과 그 의미 : 석전과 만해는 불교잡지를 통해 문필활동을 활발하게 전개하였다. 석전은 주로 한국불교사와 한국불교문화의 정체성을 드러내는 한편 불교와 불교문화의 근대성을 살피는 글을 다수 발표하였다. 이에 비해 만해는 한국불교계가 당면한 문제에 대해 많은 글을 발표했다. 이처럼 석전과 만해의 문필활동은 개인의 성향에 따라 서로 조금씩 다르지만, 크게 보아 그들의 이러한 문필활동은 당시 불교계가 나아가야할 방향과 좌표를 던져주는 역할을 한 것이다. Seokjeon(石顚) Park Han-young(朴漢永) and Manhae(萬海) Han Yong-un(韓龍雲) are known as ‘Buddhist intellectuals’ or priests of high virtue who committed themselves to reforming Korean Buddhism. Indeed during the modern times of ‘civilization and enlightenment’ they responded to the challenges faced with the current Korean Buddhism through ‘modern awakening’ and criticized the material civilization of the western capitalism. This thesis focused on the fact that these characteristics of Seokjeon and Manhae were reflected in their literary works and publication of the Buddhist magazines and studied their meaning as follows. - Buddhist intellectuals: Although Seokjeon and Manhae practiced the traditional Buddhism and Confucianism, they tried to reform Korean Buddhism through ‘modern awakening’. Furthermore, they resisted the Japanese invasion by incessantly finding the identity of Korean Buddhism, criticized the ignorance of life and ill effect of the western capitalism, and emphasized the value of spiritual culture. However, while Seokjeon tried to realize his idea in education, Manhae aimed to develop his activity into a social movement. - Publication of Buddhist magazines and its meaning: Seokjeon declared that he would stimulate the declining Korean Buddhism by publishing 〈HaeDongBulBo〉 in 1913. In addition, he called on the Buddhist society to reform and reflect on itself by publishing a lot of writings regarding the identity of Korean Buddhism. Manhae published the first edition of 〈Yusim〉 in 1918 and acquired the magazine 〈Bulgyo〉 in 1931. He took the lead in the Buddhist media and published a lot of writings related with the current Buddhist issues. Their publication of Buddhist magazines played a significant role in reforming Korean Buddhism and spreading it to more people. - Literary works and its meaning: Seokjeon and Manhae actively wrote for Buddhist magazines. Seokjeon published the literary works that showed the identity of Korean Buddhist history and culture and examined the modernity of Buddhism and Buddhist culture. Meanwhile, Manhae published a lot of writings concerning the current issues of Korean Buddhism. Likewise, although Seokjeon's and Manhae's literary works are somewhat different, they all presented the future direction for the Buddhist society.

      • 文廟釋奠의 문화적 생명미학

        徐坰 遙 간재학회 2010 간재학논총 Vol.11 No.-

        제사문화는 생명문화에 대한 기도를 통해 생활문화의 안녕을 유지하려는 생존의 集會문화이다. 제사 중에는 천지와 산천에 대한 제사나 금수, 巨石, 古木과 같은 자연생명에 대한 제사와 인간생명을 낳아준 조상에게 대한, 그리고 문화생명을 낳아준 聖賢에게 드리는 제사 등이 있다. 이른바 釋奠은 文廟라는 學宮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이다. 따라서 고대 학교는 문화적으로 존현의식과 양현의식의 두 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다. 예물과 예절, 歌樂과 舞蹈등의 예술적 활동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행사이다. 또한 유교의례로서 석전대제는 祭壇이 되는 祠堂을 설치하고, 그 곳에 신앙의 대상을 位牌로서 現身하도록 하여, 인간에게 時空的인 제약을 초월하여 생명의 문화와 생활의 문화를 享有하도록 해준 데 대하여 그 고마움을 기리는 祭祀儀式이다. 문묘 석전의 典禮는 예악무의 종합적인 문화예술에 의해 행해진다. 그 대강을 보면, 석전은 廟宇에 先聖先師의 位牌를 모시고 時食의 祭羞를 진설하고, 笏記의 禮順에 따라 獻爵하며 歌樂舞로 그 德業을 칭송하는 문화적 제사이다.우리나라의 <釋奠儀註>는 迎神, 奠幣, 初獻, 亞獻, 終獻, 撤?豆, 送神, 飮福, 望?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석전은 陽氣가 시작되는 仲春과 陰氣가 시작되는 仲秋의 각 上丁日에 樂正에게 무도를 익혀 釋菜를 하게 했다. 처음에는 祭羞를 나물류만을 썼으므로 석채라 하고, 반궁을 芹宮이라고도 한다. 祭器로는 ?豆俎爵을 쓰고, 희생물로는 牛羊을 썼다 하여 釋奠이라 한다. 이른바 時祀를 지내는 것은 음양의 기운이 처음 시작하는 때를 택한 것이요, 가장 훌륭한 음식은 時饌이다. 제철 음식은 음양의 기운을 完備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樹木도 때에 맞추어 時伐해야 하고 禽獸도 때에 맞춰 時殺해야 한다. 한 나무를 자르고 한 짐승을 잡더라도 그 때로 하지 않으면 孝가 아니다. 이것은 仁者가 인간답지 못한 것을 미워하여 非孝라고 한 것이다. 효의식은 근본이 생명의식이다. 이것은 時中之道가 인간다움을 행하는 도로서 그 생명의식을 기준으로 殺生해야 함을 말해 주기도 한다.석전에서 행해지는 가악무는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적인 미학이다. 樂章의 송가, 器樂의 연주, 佾舞의 연희 등은 文武의 음양대대로 나누어 행해진다. 또한 악장은 八句로, 雅樂은 八音으로, 일무는 八列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천하에 천지자연과 인간의 소리와 몸짓으로 성현을 받들고 그 敎化가 팔방으로 퍼지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팔구체는 四言고체시의 형식으로 자연적인 음률에 맞게 노래하는 것이요, 팔음체는 金石絲竹과 匏土革木등 천지 속에서 나는 자연물로 만든 악기의 조화로 연주되는 것이요, 팔열체는 내외, 전후, 좌우, 상하의 팔방으로 춤사위를 펼치는 것이다.이러한 의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미학은 바로 인간문화의 생명미라고 할 것이다. 또한 樂歌와 奏樂은 인간의 심지를 八音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온 천하에 政敎가 잘 행해지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소리인 것이다. 堂上, 堂下두 개의 음악으로 나누 것은 오로지 천지조화에서 상징을 취한 것이다. 고대 문화가 集成된 하은주 삼대 제사악은 영신에 당상의 노래와 당하의 연주를 合樂하여 일시에 아울러 신령이 상제 곁에 계신 곳에서 성음을 듣고 강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樂舞는 천지의 도를 인간이 ‘裁成輔相’하여 인사에 펴는 것이다. 문무를 통하여 겸양을 수련하고 무무를 통하여 일의 순발력을 키우는 용맹함을 단련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음양의 待對에 맞추어 舞具를 드는 것도 모두가 덕성을 갖추어 생활의 화동함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춤사위의 동작 또한 세 번 읍양하고 세 번 진격하는 것도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사회가 조그마한 서운함과 시샘이 없는‘無怨不爭’하는 安樂함과 和同의 미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문묘의 제례악과 제례무는 성현의 德業과 함께 어울리기 위하여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가악무는 숭모하는 마음의 소리와 숭앙하는 몸짓의 춤사위로 興起시켜 그 祭儀를 鼓舞시키는 것이다. 歌辭는 頌歌이다. 祝文을 확대한 것이다. 홀기는 다만 예의 절차를 순서대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詩, 歌, 舞는 인간 내심의 지기를 안락하고 화동하게 하는 정감을 밖으로 표현하는 미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樂舞는 천지의 유행과 형상을 그려내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천지 조화의 유행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만져 보려 해도 형상이 없고, 쓰려 해도 말로 다하지 못하고, 그려내려 해도 그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오직 높고 낮은 악음만이 이를 원활하게 형용할 수 있는 것이다.이러한 의식은 성현을 모신 사당에서 악장과 악가와 악무를 통해 문화생명을 기리는 축제인 것이다. 문무로 나누어 주악과 무도하는 것은 文舞樂을 통하여 예의를 학습하고 武舞樂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여 활동하는 문화를 상징하여 정교이념을 제시하는 것이다.옛 성인이 耳目과 心思의 힘을 다해 律管을 만들어 악을 조화시켜 예와 병행하여 예악이라 한다. 또한 국가 풍속의 후박함, 정치의 득실, 국운의 隆替함을 모두 악과 관련시켜 聲音의 도는 정치와 통한다고 말한다. 樂音은 德音으로서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듯이 정치의 교화가 펴져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문화생명이란 생동하는 活潑性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의 정감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음악 절주의 조화를 통해 세상살이의 안락함을 구가하는 일이다. 정교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그 지방의 노래가 편안해야 한다. 바로 마음을 나타내는 소리가 인간문화의 즐거움을 구가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노래와 춤이라는 것은 신체단련을 위해 고대에서부터 추어왔다. 그래서 무예나 양생술과 서로 통한다고 한다. 雅樂舞는 정신수양과 신체단련을 위함이었다. 文舞가 마음자세를 위한 정신수양이고 武舞가 신체단련이었다. 무도는 수렵을 나가기 전에 마음을 단련시키고, 수렵에서는 한번 창을 던져 바로 잡아야 용서가 되는데, 이를 연습하기 위해서 문무와 무무를 함께 연습 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악무는 演戱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감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修身의 敎科目인 것이다.문화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와 남이 함께 문화적 소통을 통하여 삶을 질적으로 승화시켜 나아가는 일이다. 문화생명의 상징성은 인간다움이다. 나와 남이 함께 생명의 기쁨과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석전 행사에서 萬世의 宗師로 모시는 공부자 위패의 시호에 大成至聖이란 의미도 世道인심의 인간적 환경 교화를 위해서 유교문화 집대성한 더할 나위 없는 성인이시라는 뜻이다.유가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별하는 이른바 인간과 금수의 分辨의식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금수는 無禮하여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은 인간다운 예의를 가지고 있어 세련된 문화생활을 영위한다. 따라서 인간문화는 인심을 음악으로 교화하여 바로잡는 예악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문묘석전대제는 단순히 유교제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행하여진 집회문화로서 문화적

      • KCI등재

        일제강점기 釋奠의 변질과 해방 후의 規正

        장진영 고전문학한문학연구학회 2014 고전과 해석 Vol.17 No.-

        본고는 식민지 유산을 가치중립적인 의미로 해석하고, 지배의 유산 뿐 아니라 적응·순응의 유산, 저항의 유산 까지 포함해서 보아야 한다는 최근의 연구에 주목하여 釋奠이라는 전통적 儒敎儀禮가 식민지 유산에 어떻게 투영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석전은 성균관과 향교의 문묘에서 공자를 비롯한 先聖先師에게 지내는 제사로 그들의 학문과 인격을 높이고, 그들과 같아지기를 염원하는 교육적 성격의 의식이었다. 그러나 일제는 석전을 교화정책의 일환으로 이용하 기 위해 변질시켰고, 유림을 포함한 조선인들은 변질된 석전에 참례하였다. 이렇게 변질되었던 석전은 해방 후에야 차츰 예전의 모습을 찾을 수 있었다. 이 일련의 과정에는 지배의 유산으로서의 교화정책, 적응·순응의 유산으로서의 변질된 석전에의 참여, 저항의 유산으로서의 석전의 規正이 담겨있다. 일제강점기와 해방이라는 혼란 속에서 살아간 사람들이 전통유산인 석전을 어떻게 경험했는지를 통해 식민지 유산의 한 단면을 엿볼 수 있기를 기대한다. This paper aims at exploring how the rite observed in memory of confucius, the traditional confucius ritual, is reflected into colonial legacies by paying attention to recent studies which tries to translate colonial legacies not only neutral but also adaptive and resistant legacies. The rite observed in memory of confucius was performed to pay tribute to ancestors’ scholastic achievement and their characteristics in a hope that they, scholars in the Joseon Dynasty, could follow their ancestors’ academic achievement. In a colonial period in 1910, Japan allowed only the rite of confucius to be remained after transforming Sungkyungwan to Gyeonghakwon.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opened the rite of confucius to the public and changed the time of rite served from the night to the morning. They even changed the date in solar calendar. All these were designed to gather more audiences to lectures by the government general which was scheduled to commence just after the rite. Such polices taken by the government general had degenerated the rite of confucius into the rite for reforming the public, losing its genuine meaning of the divinity. After the liberation, the rite once carried out in spring and autumn had been also served on the Birthday of Confucius. Since in 1961 when the date of the anniversary of Confucius’ death was restored, the rite has been served until now to commemorate its original meaning. It was not until then the rite of Confucius could recover its genuine role of respecting and learning the good deeds and thoughts of ancient sages. The Japanese has degenerated the rite of Confucius to use as means of their reformation policy. In return, many koreans including the Confusions participated the corrupted rite. It was only after the liberation when the rite of Confucius could recover its original form. A series of this course has included reformation policy as a legacy of colonial period, participation the degenerated rite as a legacy of adaption and adjustment, and correction of the rite into original form as a legacy of resistance. I hope this paper would make its own contribution to learn one facet of colonial legacy by exploring how the people had experienced the rite, the traditional inheritance, in the time of confusion of the colonial period and the libe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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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Popular Violence in a Confucian World

        Felix Siegmund(펠릭스 지그문트)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18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23 No.2

        석전에 대한 그간의 연구들은 의례, 군사훈련, 스포츠, 그리고 인기있는 여가활동 등 석전의 의미를 다양하게 설명하였다. 석전은 전근대 시기의 다른 폭력 형태들과 공통성을 가지지만, 이것이 과연 스포츠로 분류될 수 있는지는 의문스럽다. 석전을 의례로 보는 것은 조선시대에 와서 희미해졌다. 이 논문은 1차 자료 및 선행연구의 해석들을 재해석하면서, 석전의 역사를 돌이켜보고자 하였다. 새롭게 부여하고자 하는 2가지의 의미는 다음과 같다. 석전은 조선의 유교왕국 이미지를 전복하며, 또한 그에 대한 저항 문화의 일부였다. 바흐친의 용어를 빌리면, “축제”이기도 했다. 유교지식인들은 석전을 비난했고, 몇차례나 불법으로 간주되었다. 그와 동시에 석전은 왕가의 후원을 받기도 하는 등, 계속 유지되었다. 석전은 조선사회에 내재한 모순을 증명하는 이중적 풍습이었다. Research literature has explained stone fighting (sŏkchŏn) in different ways: As a ritual, a form of military training, a sport, and a popular past-time. Sŏkchŏn shares key characteristics with other violent past-times of the pre-modern era, but whether it should be classified as a sport seems doubtful. The function of stone fighting as a ritual had become obscure by the Chosŏn dynasty. This article gives an overview on the history of stone fighting by reviewing the sources and by examining existing interpretations in scholarly literature. It adds two new perspectives: Stone fighting subverts the image of a Confucian society in Chosŏn and could be understood as part of a counter culture. It could also be understood as “carnival” in the Bakhtinian sense. Stone fighting was criticized by Confucian literati and was outlawed on multiple occasions. At the same time, it also received royal patronage and was effectively allowed to continue. Stone fighting is a contradictory phenomenon that should be explained as a symptom of the inherent contradictions of Chosŏn socie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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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石顚 朴漢永의 기행시문학의 규모와 紀實의 시세계

        김상일(Kim, Sang Il) 동악어문학회 2015 동악어문학 Vol.65 No.-

        이 글은 20세기 초 한국 근대불교학의 태두인 石顚 朴漢永(1870~1948)의 기행시문학에 대한 고찰이다. 석전은 일생에 걸쳐 국토의 勝地를 유람하고 유적지를 답사하여 그 旅情을, (가) 기행한시와 (나) 遊記 및 紀行의 산문으로 그 문학적 형상화를 시도하고, (다) 論評으로 미학적 평가를 꾀하였다. 석전 기행시문의 규모를 살펴보면, (가)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매년 국토의 일정지역을 구획하여 여행한 것을 시화한 漢詩 260여 제를 그의 시집『石顚詩?』(1940)에 연대별로 실은 것이다. (나)는 遊記 2편과 紀行 1편인데 모두 국한문체로 쓴 산문으로, 1910년대 말에서 1920년대 초반에 간행된 불교계 잡지에 게재된 것이다. 2편의 유기는 경기도 천보산과 東峽을 유람한 기행문이며, 1편의 기행은 瀛洲[제주도]를 여행한 기행문이다. (다)는 1930년대 중반에 쓰인 것이다. 이 가운데 3편은 금강산, 또는 금강산과 유사한 승경을, 1편은 지리산의 승경을 논평한 것이고, 다른 1편은 전국의 명산과 승지를 총괄하여 논평한 것으로 불교계 잡지와 일반잡지 및 신문에 게재된 것이다. 한편, (다)의 논평문은 논평에 앞서 그 實地[논평 대상 지역]에 대한 답사가 필수이며, 비교 평가 시 각각 다른 대상에 대해 서로 다른 장점을 들어서 서로 차이가 드러나도록 하는 품평 태도를 일관하고 있다. 석전의 기행한시는 명산과 승경, 사찰과 누정, 역사적 유적지 등을 시화한 것이다. 석전은 이러한 제재를 紀實의 사실적 표현을 통한 시적 형상을 꾀하고 있는데, 이것은 시적 대상을 實地로서 확인하려는 의식에 근거한 것으로 보인다. 국토의 승지를 紀實의 사실적 표현수법으로 형상화하기 위해 그는 아래와 같은 순서를 실천한 것으로 보인다. 이것은 먼저 시적 대상과 관련된 이왕의 시와 인문지리적 문헌을 통해 그 지역의 역사성을 확인하고, 實地를 답사하여 주위를 관찰하고 사실여부를 판단한 다음, 작시 시점에서 시적 대상을 묘사하고 그 감흥을 더해 형상화하는 수순을 밟는 것이다. 이상에서 석전 기행시문학의 특성은 국토 승지와 역사적 유적지에 대한 실제적 인식과 형상화를 꾀하고자 하는 관념이 그 저변에 흐르고 있는 점이다. 이것은 석전이 일제강점기를 살면서 국토에 대한 바른 인식과 시적 형상화, 나아가 미적 평가를 통해 일제치하의 국토에 대한 오도된 형상과 글쓰기를 바로잡기 위한 문학적 대응으로 판단된다. 이런 점은 그의 국토 기행시문학이 전근대의 명산 명승의 유람을 기록한 遊記나 遊山錄과는 그 성향이 다르고, 동시대의 동행자들의 그것과도 다르며, 근대기에 출현한 ‘觀光’, ‘見聞’, ‘巡禮’를 통한 기행문들과도 또 다르다고 생각되나 이는 후일의 과제로 삼는다. This paper is about Seokjeon(석전) Park Hanyoung(박한영) and his pieces in the early 20th century. He traveled all around in Korea, for example, famous mountains and some attractions, and made lots of poetry. And then, those were written by Chinese(Usually used in East Asia). He wrote some poetry about traveling in East Mt. Kumkang(금강산) & Seolak(설악산), North Baekdu(백두산), West Myohyang(묘향산) and South Mt. Jiri(지리산) & Halla(한라산). Also, he focused on the topic about little areas and cities, for example, like historical relics. He expressed about view, for example, the view of top of mountains and waterfall. In case, about historical relics, he focused on the flow of history(the rise and fall of the country). In here, we focused on his pieces based on realism literature. Meanwhile, he wrote the reviw(criticism), in Korean, about traveling mountains, based on an aesthetic appreciation of the landscape. We have to these with poem focused on same topic. So, his achievements is his hobby. But, we have to think about why he did that. Because he wanted people to notice the beauty of their country and have consciousness of master. This time, when he wrote about that, was the period of Japanese colonial rule.

      • 文廟釋奠의 문화적 생명미학

        서경요 간재학회 2011 간재학논총 Vol.11 No.-

        제사문화는 생명문화에 대한 기도를 통해 생활문화의 안녕을 유지하려는 생존의 集會문화이다. 제사 중에는 천지와 산천에 대한 제사나 금수, 巨石, 古木과 같은 자연생명에 대한 제사와 인간생명을 낳아준 조상에게 대한, 그리고 문화생명을 낳아준 聖賢에게 드리는 제사 등이 있다. 이른바 釋奠은 文廟라는 學宮에서 행해지는 제사의식이다. 따라서 고대 학교는 문화적으로 존현의식과 양현의식의 두 가지 기능을 겸하고 있다. 예물과 예절, 歌樂과 舞蹈 등의 예술적 활동이 종합적으로 이루어지는 문화행사이다. 또한 유교의례로서 석전대제는 祭壇이 되는 祠堂을 설치하고, 그 곳에 신앙의 대상을 位牌로서 現身하도록 하여, 인간에게 時空的인 제약을 초월하여 생명의 문화와 생활의 문화를 享有하도록 해준 데 대하여 그 고마움을 기리는 祭祀儀式이다. 문묘 석전의 典禮는 예악무의 종합적인 문화예술에 의해 행해진다. 그 대강을 보면, 석전은 廟宇에 先聖先師의 位牌를 모시고 時食의 祭羞를 진설하고, 笏記의 禮順에 따라 獻爵하며 歌樂舞로 그 德業을 칭송하는 문화적 제사이다. 우리나라의 <釋奠儀註>는 迎神, 奠幣, 初獻, 亞獻, 終獻, 撤籩豆, 送神, 飮福, 望瘞 등으로 되어 있다. 또한 석전은 陽氣가 시작되는 仲春과 陰氣가 시작되는 仲秋의 각 上丁日에 樂正에게 무도를 익혀 釋菜를 하게 했다. 처음에는 祭羞를 나물류만을 썼으므로 석채라 하고, 반궁을 芹宮이라고도 한다. 祭器로는 籩豆俎爵을 쓰고, 희생물로는 牛羊을 썼다 하여 釋奠이라 한다. 이른바 時祀를 지내는 것은 음양의 기운이 처음 시작하는 때를 택한 것이요, 가장 훌륭한 음식은 時饌이다. 제철 음식은 음양의 기운을 完備한 음식이기 때문이다. 樹木도 때에 맞추어 時伐해야 하고 禽獸도 때에 맞춰 時殺해야 한다. 한 나무를 자르고 한 짐승을 잡더라도 그 때로 하지 않으면 孝가 아니다. 이것은 仁者가 인간답지 못한 것을 미워하여 非孝라고 한 것이다. 효의식은 근본이 생명의식이다. 이것은 時中之道가 인간다움을 행하는 도로서 그 생명의식을 기준으로 殺生해야 함을 말해 주기도 한다. 석전에서 행해지는 가악무는 인간다움을 표현하는 예술적인 미학이다. 樂章의 송가, 器樂의 연주, 佾舞의 연희 등은 文武의 음양대대로 나누어 행해진다. 또한 악장은 八句로, 雅樂은 八音으로, 일무는 八列로 이루어진다. 이것은 천하에 천지자연과 인간의 소리와 몸짓으로 성현을 받들고 그 敎化가 팔방으로 퍼지게 한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팔구체는 四言 고체시의 형식으로 자연적인 음률에 맞게 노래하는 것이요, 팔음체는 金石絲竹과 匏土革木 등 천지 속에서 나는 자연물로 만든 악기의 조화로 연주되는 것이요, 팔열체는 내외, 전후, 좌우, 상하의 팔방으로 춤사위를 펼치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에서 느낄 수 있는 감성미학은 바로 인간문화의 생명미라고 할 것이다. 또한 樂歌와 奏樂은 인간의 심지를 八音으로 표현하는 것으로 온 천하에 政敎가 잘 행해지고 있는가를 가늠하는 소리인 것이다. 堂上, 堂下 두 개의 음악으로 나누 것은 오로지 천지조화에서 상징을 취한 것이다. 고대 문화가 集成된 하은주 삼대 제사악은 영신에 당상의 노래와 당하의 연주를 合樂하여 일시에 아울러 신령이 상제 곁에 계신 곳에서 성음을 듣고 강림하기를 바라는 것이다. 그리고 樂舞는 천지의 도를 인간이 ‘裁成輔相’하여 인사에 펴는 것이다. 문무를 통하여 겸양을 수련하고 무무를 통하여 일의 순발력을 키우는 용맹함을 단련하는 것을 상징하는 것이다. 천지자연의 음양의 待對에 맞추어 舞具를 드는 것도 모두가 덕성을 갖추어 생활의 화동함을 누리기 위한 것이다. 춤사위의 동작 또한 세 번 읍양하고 세 번 진격하는 것도 덕성을 함양하기 위한 것이다. 여기서 인간사회가 조그마한 서운함과 시샘이 없는 ‘無怨不爭’하는 安樂함과 和同의 미감을 체험할 수 있는 것이다. 문묘의 제례악과 제례무는 성현의 德業과 함께 어울리기 위하여 감흥을 불러일으키는 작용을 한다. 가악무는 숭모하는 마음의 소리와 숭앙하는 몸짓의 춤사위로 興起시켜 그 祭儀를 鼓舞시키는 것이다. 歌辭는 頌歌이다. 祝文을 확대한 것이다. 홀기는 다만 예의 절차를 순서대로 부르는 것에 지나지 않는다. 詩, 歌, 舞는 인간 내심의 지기를 안락하고 화동하게 하는 정감을 밖으로 표현하는 미학인 것이다. 다시 말해서 樂舞는 천지의 유행과 형상을 그려내고 표현할 수 있는 것이다. 천지 조화의 유행은 보려 해도 보이지 않고, 만져 보려 해도 형상이 없고, 쓰려 해도 말로 다하지 못하고, 그려내려 해도 그 뜻을 다 표현하지 못한다. 오직 높고 낮은 악음만이 이를 원활하게 형용할 수 있는 것이다. 이러한 의식은 성현을 모신 사당에서 악장과 악가와 악무를 통해 문화생명을 기리는 축제인 것이다. 문무로 나누어 주악과 무도하는 것은 文舞樂을 통하여 예의를 학습하고 武舞樂을 통하여 신체를 단련하여 활동하는 문화를 상징하여 정교이념을 제시하는 것이다. 옛 성인이 耳目과 心思의 힘을 다해 律管을 만들어 악을 조화시켜 예와 병행하여 예악이라 한다. 또한 국가 풍속의 후박함, 정치의 득실, 국운의 隆替함을 모두 악과 관련시켜 聲音의 도는 정치와 통한다고 말한다. 樂音은 德音으로서 사방팔방으로 퍼져 나가듯이 정치의 교화가 펴져 나아가는 것과 같은 것이다. 문화생명이란 생동하는 活潑性이 있어야 하고 그것은 인간의 정감 가운데 기쁨과 즐거움이 있어야 살아있는 것이다. 음악 절주의 조화를 통해 세상살이의 안락함을 구가하는 일이다. 정교가 잘 이루어지고 있는가는 그 지방의 노래가 편안해야 한다. 바로 마음을 나타내는 소리가 인간문화의 즐거움을 구가하는 것이라 할 것이다. 노래와 춤이라는 것은 신체단련을 위해 고대에서부터 추어왔다. 그래서 무예나 양생술과 서로 통한다고 한다. 雅樂舞는 정신수양과 신체단련을 위함이었다. 文舞가 마음자세를 위한 정신수양이고 武舞가 신체단련이었다. 무도는 수렵을 나가기 전에 마음을 단련시키고, 수렵에서는 한번 창을 던져 바로 잡아야 용서가 되는데, 이를 연습하기 위해서 문무와 무무를 함께 연습 시켰던 것이다. 이와 같이 악무는 演戱를 위한 것이 아니라 자신의 생명감을 고취시키는 일종의 修身의 敎科目인 것이다. 문화는 사람이 이 세상에서 사람답게 살아가는 삶의 흔적이다. 그것은 나와 남이 함께 문화적 소통을 통하여 삶을 질적으로 승화시켜 나아가는 일이다. 문화생명의 상징성은 인간다움이다. 나와 남이 함께 생명의 기쁨과 생활의 즐거움을 누리는 것이 인간다움이다. 석전 행사에서 萬世의 宗師로 모시는 공부자 위패의 시호에 大成至聖이란 의미도 世道인심의 인간적 환경 교화를 위해서 유교문화 집대성한 더할 나위 없는 성인이시라는 뜻이다. 유가는 인간 중심의 사고를 바탕으로 문명과 야만을 구별하는 이른바 인간과 금수의 分辨의식을 기본적으로 지니고 있다. 금수는 無禮하여 감정을 제대로 절제하지 못해 제멋대로 행동하지만, 인간은 인간다운 예의를 가지고 있어 세련된 문화생활을 영위한다. 따라서 인간문화는 인심을 음악으로 교화하여 바로잡는 예악사상으로 해석하는 것이다. 문묘석전대제는 단순히 유교제사에 지나지 않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고대로부터 행하여진 집회문화로서 문화적 생명을 남겨 준 성현을 모시고, 살아 있는 우리들이 문화적 삶을 살아가기 위한 가장 인간다운 의식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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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의 한시에 나타난 국토 주류와 그 의미

        김승호 ( Kim Seung - Ho )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16 禪文化硏究 Vol.21 No.-

        한말에서 근대기를 관통하는 시기에 창작된 석전(石顚) 박한영(朴漢永)의 한시는 선리통찰, 교류관계, 내면의식 등 작자의 삶과 의식세계를 엿보게 하는 매개체가 된다고 하겠다. 석전의 시대까지는 한시 창작이 일반적이었는데 한말에 태어나고 서당에서 공부한 그에게 내면과 사유를 드러내는 데는 현대시보다 전통적인 한시가 수월했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출가와 함께 석전의 시적 인식에 변화가 따르게 된다. 그는 시와 선은 결코 다른 것이 아님을 강조했다. 유가적 문인들의 시들과 달리 석전의 한시들에서는 선리, 묘오의 시적 형상화가 큰 비중을 차지한다는 지적들이 대세를 이루기도 하였다. 하지만 이는 석전을 승려로 고정시킨 나머지 내린 선입관적 시평이라는 우려를 낳기도 한다. 적어도 그의 시에서 큰 비중을 차지하는 기행시들은 선방을 벗어난 시인이 산하대지를 유유자적하며 포착한 인물, 유적, 풍속, 상념에 대해 소회를 전하는 것이 대부분이기 때문이다. 선방을 벗어나 산하대지를 떠도는 나그네에게 외물들은 시흥을 발화시키는 촉매가 되어준다. 국토주류(國土周流)는 석전에게 국토, 역사, 불교 등에 걸친 인식의 범위를 확장하거나 새롭게 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대상에 대한 성찰과 함께 해방감을 만끽하게 해주는 무대가 바로 국토라는 점을 그는 시를 통해 충분히 드러낸다. 일제에 의해 강점된 땅 위를 걷고 있으면서도 적어도 시에서는 비분강개한 어조가 발견되지 않는다. 때문에 시대성의 부족을 탓할 수도 있다. 하지만 그는 초시간 속에 위치한 것이 국토라는 인식을 보이며 그것이 지닌 영속성을 믿는다. 민족이 처한 암울한 현실을 직설적으로 증언하기보다 그는 망각된 역사, 인물, 설화, 불심 등을 찬찬히 환기시키는 방식으로 민족적 성찰과 불교적 자각이란 명제를 이끌어내고 있다. Seokjeon(石顚) cannot be said to have left a lot of Chinese poems. But his poetry, which was created in the period of going through the modern period from the end of Joseon period, has no deficiency even if being said to become a precious channel that watches for social activity, an insight into Seonri, and inner consciousness. Writing Chinese poetry had been general until the period of Seokjeon. As for him as a person who was born at the end of Joseon dynasty and then studied at Seodang(書堂, a village school), the traditional Chinese poetry seems to have been easier than the modern poetry in unveiling the inner side and the reason. However, Seokjeon`s poetic awareness comes to be followed by a change along with entering the Buddhist priesthood. He emphasized that poetry and Zen meditation are not different at all. Unlike the poems by Confucian literary persons, the indications were formed the mainstream as saying that Seokjeon`s Chinese poems are possessed a big weight by the poetic embodiment on the reason of Zen and on the delicate enlightenment. Still, this fixed Seokjeon to a Buddhist monk, thereby needing to be examined whether or not being the preconceived evaluation of having been made. That is because the travel poems of holding a large part in his poetry at least mostly include a thought about figure, ruins, custom, and Buddhism of having been captured with hanging loose in mountains and streams escaping from a Buddhist monk`s dwelling. As for a traveler who wanders everywhere with coming out of a Buddhist temple in the mountains, the views outside change into a catalyst of drawing poetic excitement. The land pilgrimage allows Seokjeon to open a sight available for expanding or newly seeing a range of recognition across national land, history and Buddhism. His poetry leads to fully revealing that the national land is just a stage of making it enjoy the sense of freedom along with the introspection into an object. Even while proceeding with walking on the territory that was occupied by the Japanese Empire, a heavy heart is not found at least in poetry. Thus, the lack of the contemporary character may be criticized. But he believes perpetuality that it has with showing the perception as saying that the national land is what is situated in eternity. Rather than flatly testifying to the grim reality that the nation faced, he is eliciting a proposition called national introspection and Buddhist awareness with a method of carefully stirring up the forgotten history, figure, tale and Buddha`s merc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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