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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철학 : 18세기 정조기(正祖期) 조선(朝鮮) 서학(西學) 수용(受容)의 계보(系譜)

        안대옥 동양철학연구회 2012 東洋哲學硏究 Vol.71 No.-

        본고는 주로 18세기 후반기 정조년간을 중심으로 전개된 조선에서의 서학수용을 명청기 중국서학사의 유형화와 연관하여 그 계보를 추적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18세기 정조기 조선의 서학수용은 동 시기 중국 일본등 동아시아 인접국의 경험과는 달리 공적인 수용이 아니라 사적인 수용이 중심을 이루었다. 따라서 실학과 같은 사대부의 새로운 사상운동으로 발전할 수 있는 가능성을 내포하고 있었지만 동시에 그만큼 정치적으로 불안정하였을 뿐만 아니라 서학의 학문적 위상과 지위를 둘러싸고 당색간에 상이한 서학관이 동시기에 중층적으로 형성된 점을 특징으로 한다. 이는 다시 말하면 동시기에 주자학과 서학이 서로 다른 방식으로 공존하거나 길항하는 구조에 있었다고 할 수 있다. 결론적으로 보자면 18세기 정조기에 조선에 존재한 서학파의 계보는 다음과 같이 분류될 수 있음을 확인하였다. (A) 서학을 천주교(서교)와의 연계 속에서 객관주의 혹은 외재주의적 필로소피아의 학문형식의 일부로서 파악하는 일파(친서학, 친서교)로, 사상적도구로서 『천학초함』특히 『기하원본』을 중시한 이가환을 중심으로 한 남인계의 학맥. (B) 유가적 경세론의 입장에서 역산학 분야에 한정해 서학의 선진적인 부분을 수용함으로써 주자학 체계의 완결성을 강화시키려는 일파로, 서학의 과학으로서의 우월성을 인정하지만 서교를 전적으로 배척하는 입장(친서학, 반서교). 『역상고성』, 『수리정온』을 중시한 황윤석 등의 노론 낙론계. (C) 기본적인 입장은 친서학 반서교로서 (B)와 같지만 상수학적 전통 속에서 수리적 서학관을 형성한 서명응, 서호수 부자의 소론계. 이후 관상감제조를 역임한 서호수를 통해 관상감(관학)계 중인층 역산학자를 포함. 本稿の目的は、18世紀の後半期、主に正祖年間を中心にして展開された朝鮮に おける西學受容を、明淸期の中國西學史の類型化と關連しつつその系譜を追跡す ることにある。18世紀の朝鮮における西學受容は、同時代の中國や日本などの經 驗とは異なり、公的な受容ではなくほとんど私的な受容が中心になって行われ た。したがって、いわゆる實學のように士大夫の新しい思想運動にまで發展しう る可能性を內包していたものの、その代わりに私的な受容ゆえ、政治的に脅かさ れやすい不安定さをも持ち合わせており、しかも西學の學的地位とその外延とを めぐって、堂色ごとに異なる西學觀を一時に重層的に形成した点を特徵とする。 これは、言い換えれば、ほぼ同時期に朱子學と西學とが互いに異なる方式で共存 したり、拮抗したりする構造にあったといえる。 結論的にみれば、18世紀の正祖年間の朝鮮にみられる西學派の系譜は、次の ように3派に分類することができる。 (A)西學を、キリスト敎との關連の中で客觀主義ないし外在主義的フィロソ フィアの學的形式の一部として捕らえる一派(親西學·親キリスト敎)。思想 的な道具として『天學初函』とくに『幾何原本』を重んじた李家煥ら南人の流れを 汲む學脈。 (B)儒家的經世論の立場から、曆算學分野に限って西學の長所を認め、その優 れた內容のみを受容し、よって朱子學體系の整合性を强化しようとする一派で、 西學の科學としての先進性は認めるが、キリスト敎は完全に排斥する立場(親西 學·反キリスト敎). 『曆象考成』 『數理精蘊』などを重んじた黃胤錫ら老論洛論系。 (C)基本的な立場は親西學·反キリスト敎であり、(B)と重なるところも多い が、象數學の傳統のもとで數理的な西學觀を形成した、徐命膺·徐浩修父子の少 論系。のち、觀象監提調を歷任した徐浩修を介し觀象監系中人曆算學者を含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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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학동점(西學東漸)과 주자학적 ‘격물궁리(格物窮理)’ - 『대학장구(大學章句)』와 『서학범(西學凡)』의 ‘격물궁리’ 명제를 중심으로

        이원준 (사)율곡학회 2022 율곡학연구 Vol.47 No.-

        Zhu Xi’s Commentary on the Great Learning(Daxuezhangju) has the characteristics of an introduction to the academic system. The reason is that he presented the goals and methods of learning in the higher education stage in the two-stage learning system of the Elementary Learning(Xiaoxue) and the Great Learning(Daxue) as the composition of the Three Cords(Sangangling) and Eight Steps(Batiaomu). Here, Zhu Xi defined the first step of the Eight Steps, Gewu, as investigating principle of external things, Qiongli. “Gewu-Qiongli” in the learning of Zhu Xi is an academic methodology that recognizes the fundamental homogeneity of my mind and the principle of things. And this becomes the basis for subsequent learning, self-cultivation. Xixuefan is a book written in Chinese by Julio Aleni, a Jesuit missionary, introduced the teaching system of European universities in six subjects and three stages in the early 17th century. In this text, the ‘Philosophia’, which forms the center of the educational system, is translated into the term “Gewu-Qiongli”. Because Gewu-Qiongli in Zhu Xi’s thought was focused on investigating external objects, during the period of the Eastward transmission of Western Learnings, which mediated the Jesuit missionaries in 17th century, Gewu-Qiongli was used to introduce Western academic methodologies. However, in the Western studies introduced by Xixuefan, the Catholic doctrine was in charge of acquiring the moral principles as base of the self-cultivation that Zhu Xi’s Gewu-Qiongli study ultimately aimed at. Therefore, from the point of view of Western studies connected with Catholic ethics, ‘li’, the core of Zhu Xi’s learning, is nothing more than an acquired attribute of things. From the standpoint of a Confucian scholar who is familiar with Zhu Xi’s thought of the investigation of things, Gewu-Qiongli, in which the self-cultivation and the investigation of things are separated, only means contact with objects without considering the its principle. In other words, from the point of view of the Zhu Xi, Gewu-Qiongli in books of Western Learning written by Chinese is contact with things without Qiongli, the investigation of principle of things. 『대학장구(大學章句)』는 소학(小學)-대학(大學)이라는 초등-고등교육 체계 하에서 대학 단계의 학습 목표와 방법을 삼강령(三綱領)-팔조목(八條目)의 구도로 제시하였다. 이러한 점에서 해당 텍스트는 주자학의 교학 체계 개론서의 성격을 지닌다. 여기서 주자는 팔조목의 출발점인 ‘격물(格物)’을 “외부 사물에 나아가 그 이치를 탐구하는 것[卽物窮理]”으로 정의하였다. 여기서의 격물궁리는 외부 사물의 이치를 이해함으로써 나의 마음과 사물의 이치의 근원적 동질성을 인식하고, 이를 통해서 수신(修身)의 기틀을 다지는 학문방법론이다. 『서학범(西學凡)』은 예수회 선교사 줄리오 알레니(Julio Aleni, 艾儒略, 1582~1649)가 당시의 유럽 대학의 교학 체계를 교육 과정을 여섯 교과와 문과(文科, Rhetorica)-이과(理科, Philosophia)-분과학문의 세 단계로 소개한 한역서학서로, 이 텍스트에는 교학 체계의 중추를 이루는 이과, 즉 ‘Philosophia’를 ‘격물궁리’로 번역하였다. 『서학범』에서 소개하는 ‘격물궁리’의 세부 항목은 논리학, 물리학, 형이상학, 기하학/수학, 윤리학으로, 수리적 지식이 보다 강조되면서도 주자학적 격물 공부의 각 요소와 상통하는 지점이 있다. 외부 사물을 인식하는 것을 골자로 하는 주자학적 격물궁리는 서양 학문이 동아시아에 전래되던 서학동점(西學東漸)의 시기에 ‘격물궁리’ 명제가 서양의 학문방법론을 소개하는데 활용되는 동인(動因)을 제공해 주었다. 그러나 주자학적 격물궁리가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수신의 기반으로서의 도덕원칙 체득은 서학 내에선 천주교 교리가 담당하고 있었다. 더욱이 천주교 윤리와 결부된 서학의 입장에서 주자학의 핵심인 ‘리’는 객관 사물에 후천적으로 생성된 속성 정도에 불과하다. 주자학자에게 있어 수신과 궁리가 이격된 ‘격물궁리’는 단순한 사물과의 접촉을 의미할 뿐이다. 즉, 주자학의 입장에서 볼 때 한역서학서의 ‘격물궁리’는 사실상 궁리가 결여된 접물(接物)에 불과할 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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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후기 서학서(西學書)의 수용과 보급

        조광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06 民族文化硏究 Vol.44 No.-

        18세기의 조선은 중국에서 간행된 한문본 서학서적에 관한 연구와 독서를 통해서 유럽의 과학기술과 사상에 접할 수 있었다. 이를 조선에서는 西學으로 불러왔다. 그러나 특히 조선사회에서 관심의 대상이 되었고, 사회적 문제를 일으켰던 것은 천주교 신앙이었다. 따라서 조선에 천주교가 설립된 1784년을 전후하여 서학이라 할 경우에는 주로 천주교를 뜻했고, 서학서적은 천주교 서적들을 뜻하게 되었다. 본고는 18세기말부터 19세기 개항이전의 시기에 조선 천주교회에서 취하고 있었던 천주교 서적의 보급을 위한 노력을 먼저 검토하였다. 이에 이어서 본고는 천주교 서적의 수용과 보급에 대한 정부의 반대 입장 내지는 탄압정책을 간략히 검토하였다. 즉, 본고는 조선에 전래된 서학서의 종류나 그 구체적 내용에 주목하기보다는 당시 서학서적의 보급을 위한 조선교회의 노력과 이를 금지하고자 하던 조선정부의 정책을 주목해 보았고, 이것들이 가지고 있는 역사적 의미를 살펴보고자 했다. 즉, 조선에 천주교 서적이 전래되기 시작한 때는 17세기 전반기였다. 그러나 이 서학사상은 곧 양반 지식인의 범위를 벗어나 일반 민중에게로 확산되어 갔다. 그리하여 조선 천주교회가 세워진 18세기 80년대 이후부터 서학 즉 천주교 서적의 번역 간행을 위한 노력이 진행되고 있었다. 당시 교회 지도자들은 신도들에게 천주교 신앙을 보급하기 위해서는 서적의 보급이 필수적이라고 판단했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18세기 말엽에는 주로 漢文西學書들이 한글로 번역되었다. 1801년에 이르러서는 당시 조선에 전래되어 있던 120여종(199책)의 한문서학서 중에 83종(128책) 정도가 한글로 번역되기에 이르렀다. 또한 서적의 번역뿐만 아니라 저술활동도 나타났다. 정약종의 "주교 요지"(the Principle of Catholicism)가 그 대표적 예이다. 그리고 1836년 프랑스 파리외방선교회 (Missions Etrangers de Paris)의 선교사들이 들어와 활동한 이후 "신명초행"(Pensez-y-bien), "프란시스코 살레지오의 전기"(la Vie Devote) 등 프랑스의 종교서적들이 번역 소개되었다. 그리고 신자수의 증가에 따라 18세기 말엽 이래로 번역되어 읽혀 왔던 천주교의 기도서, 교리서, 전례서들이 본격적으로 간행되었다. 그리하여 1860년대 초반 서울에서 모두 2만 여권의 각종 천주교 서적이 간행되어 전국으로 보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조선정부 당국은 천주교 신앙이 왕조의 지배이념이었던 성리학에 위배되고, 군주에 대한 충성과 부모에 대한 효도를 부정하는 反사회적 사상으로 규정했다. 정부는 천주교 신앙을 탄압하는 정책을 강행했다. 그 탄압 정책에서 중요한 부분은 천주교 신앙의 전파를 막기 위해 서학서 즉 천주교서적의 보급을 금지하는 것이었다. 정부는 천주교 서적의 소지자들을 찾기 위해 노력했고, 천주교 서적을 찍어내던 판목을 압수하여 소각시켰다. 18세기 말엽부터 진행된 천주교 서적의 보급을 위한 노력은 성리학 중심의 조선사회에 대한 사상적 도전으로 이해된다. 그리고 이에 대한 정부의 탄압은 전통사회의 질서를 유지 강화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본고는 바로 이와 같은 사실이 서적에 대한 정책을 통해서 어떻게 진행되어 갔는지를 집중적으로 밝힐 수 있게 되었다. 또한 이 작업은 서학과 실학과의 관련성을 연구하는 데에 있어서도 전제되는 작업이 될 것이다. In 17th century, Korean society accepted western science and ideas by reading western books translated in China. They called such studies Seohak(西學, western learning). In the domain of seohak, it was catholicism which attracted korean people and provoked many social problems. Since the establishment of catholic church in 1784, seohak had been understood as Catholicism and sohak books had meant catholic books. Catholic books arrived in Korea in the early 17th century. Catholicism spreaded out not only yangban intellectuals but also common people. Since the years of 1780s, leaders of Korean Catholic Church tried to translate and to distribute catholic books to propagandize people for catholicism. At first they translated Chinese written catholic books into hangul. In 1801, 83 books(128 volumes) were translated into hangul. Some leaders wrote catholic books in hangul like Chugyoyoji (주교요지, the Principle of Catholicism). After the arrival of french missionaries of Missions Etrangeres de Paris in 1836, french religious books were translated and distributed; Pensez-y-bien (신명초행), la Vie Devote(프란시스코 살레지오 傳) etc. In the begin of 1860s, about 20,000 vernacular catholic books were published and supplied all over the country. The korean government regarded catholicism as a anti-social and anti-confucian idea which denies loyalty to the king and filiarity toward one's parents. The government suppressed catholicism by prohibition of vernacular catholic books and burning their printing blocks. The efforts to spread vernacular catholic books were understood as the ideological defiance to Korean confucian society. Governmental suppression to it was the effort to conserve their traditional ord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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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세기 西學 비판의 맥락과 艮翁 李獻慶의 〈天學問答〉

        조지형(Cho, Ji-hyoung) 한국교회사연구소 2017 敎會史硏究 Vol.0 No.50

        본고는 이헌경의 〈천학문답〉(天學問答)을 검토하여 그의 서학에 대한 비판적 입장을 살펴보고,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이헌경의 위상을 논하였다. 이헌경은 근기 남인 계열 학자들의 학풍에 영향을 받아 젊은 시절부터 자연스럽게 서학서를 접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서학서를 접하고는 이내 부정적인 생각을 지니게 되었으며, 나아가 서학이 백성들을 그르치고 있음을 근심하였다. 이헌경은 남인 계열의 인사였지만 당파를 넘어 소론 계열의 인사였던 홍양호와도 교유하며 반서학적 입장을 공유하였다. 또 18세기 서학 비판의 핵심 인물이었던 안정복과도 서신을 주고받고 각자의 서학 비판저술을 교환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지하였다. 그의 저술 〈천학문답〉은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서 그에 대한 우려와 함께 서학의 속성을 드러내고 이를 배척할 수 있는 방안을 모색한 저작물이라 할 수 있다. 그 내용은 서학이 날로 치성해지는 현실에 대해 우려를 표하고 서학의 그릇된 실질을 비판하며 서학은 불교보다도 보잘것없는 학설이라는 주장을 핵심으로 한다. 이헌경은 서양의 과학기술이나 천문 역법에 대해서도 부정적으로 바라보았고, 서학 관련 저술들은 명말청초 호사가들이 해괴한 이야기를 만들어 꾸며낸 것이라고 주장하였다. 이헌경은 서학을 금할 방법으로 그들의 서적을 불태우고 그들의 학설을 뽑아내려는 행동과 더불어 유학의 도를 밝히고 가르쳐 다시금 중화의 도를 제고시키려는 노력이 필요함을 역설하였다. 주목할 점은 18세기 중반을 넘어서면서 성호우파 계열과는 관계없이 근기 남인 계열 안에서 이헌경으로 대표되는 서학에 대해 비판적 인식을 지니고 있는 또 다른 인사가 등장하였다는 점이다. 이상의 논의를 통해 보건대, 이헌경은 18세기 후반 남인 계열의 학자들 중에 서학 비판의 또 다른 한 축을 담당하면서 반서학적 입장을 견인하였을 뿐만 아니라 그가 남긴 〈천학문답〉은 후대 서학 비판 저술에 영향을 끼치고 있기에 18세기 서학 비판의 맥락 속에서 중요한 위상을 지닌다. This paper reviewed Lee Heon-gyeong’s “Cheonhakmundap” to examine his critical position on Western knowledge and discussed Lee Heon-gyeong’s position in the context of the critique on Western criticism in the 18th century. Influenced by the academic tradition of Namin scholars in near capital area in the 17th century, Lee Heon-gyeong seems to have naturally encountered Western knowledge books since his youth. Encountering Western knowledge books, however, he soon had negative thoughts, and was worried that Western knowledge was ruining the people. Although a figure from Namin party, Lee Heon-gyeong shared the anti-Western knowledge position while keeping company with Hong Yang-ho, who was a figure from Soron Party beyond the party. He also maintained the anti-Western knowledge position while exchanging letters with An Jeong-bok, a key figure the critique on Western knowledge in the 18th century and exchanging their writings criticizing Western knowledge. His writing “Cheonhakmundap” can be said to be a work that revealed the properties of Western knowledge with the worry and found ways to reject it in the face of widespread Western knowledge. The core of the contents is that he expressed his worries about the reality in which Western knowledge was getting popular day by day, criticized the false reality of Western knowledge and argued that Western knowledge is a lesser doctrine than Buddhism. Lee Heon-gyeong also had a negative view on Western science and technology and astronomical calendar, and claimed that Western knowledge related writings are strange stories made up by busybodies in the late Ming and Early Qing dynasty. In order to forbid Western knowledge, Lee Heon-gyeong emphasized the necessity of efforts to burn out their books, to remove their doctrines and to raise the intention of China-centrism again by revealing and teaching the intention of Confucianism. What is noteworthy is that another person with a critical awareness of Western knowledge represented by Lee Heon-gyeong in Namin party in near capital area regardless of Seongho right-wing party has appeared after the mid-18th century. Based on the discussion above, Lee Heon-gyeong has an important position in the context of the critique on Western knowledge in the 18th century because he not only led the anti-Western knowledge position while being responsible for another axis of Western knowledge criticism among scholars from Namin Party in the late 18th century but “Cheonhakmundap” he left behind is affecting the critical writings of Western knowledge in future generations.

      • 順菴 西學認識의 계승과 확장, 黃德壹의 <三家略>

        조지형(趙志衡) 인천가톨릭대학교 복음화연구소 2014 누리와 말씀 Vol.- No.36

        본고는 공백당(拱白堂) 황덕일(黃德壹)의 저술 <삼가략(三家略)>에 대한 분석을 통해 그의 서학 인식의 형성 과정과 그에 대한 비판과 대응 양상을 규명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황덕일은 동생 하려(下廬) 황덕길(黃德吉)과 더불어 안정복(安鼎福)의 학문과 사상을 전수한 수제자로서, ‘이익 → 안정복 → 황덕일・황덕길’로 이어지는 학통을 형성한 인물이다. 그는 안정복 문하에서 주자학을 근간으로 한 학문을 연마하였으며, 이 과정에서 자연스레 스승이 지니고 있었던 서학의 확산에 대한 문제의식을 공유하였다. 이에 황덕일은 스승인 안정복에게 편지를 보내 성호 이익의 저술 가운데 서학에 대한 비판적인 입장을 견지한 서적들을 간행하기를 청하는 한편, 문답을 통해 서학의 폐해를 성토하기도 하였다. 안정복 사후에도 황덕일은 주변 인사들에게 서학의 확산을 막기 위한 협조를 구하기도 하고, 서학에 발을 들여놓은 동류들에게는 유학의 가르침으로 복귀할 것을 호소하기도 하였다. 황덕일의 <삼가략>은 도가・불교와 함께 서학을 이단으로 지목하여 비판한 저술로 그의 서학 인식을 집약하고 있다. 황덕일은 주자학을 현정(顯正)하기 위한 방편으로 <삼가략>을 저술하여 도・불・서 삼가에 대한 이단성을 파헤치고 있으며, 이를 우선적으로 가문 내의 자제들과 자신의 문하에 있는 제자들에게 전수하고자 하였다. <삼가략> 서학 부분에서는 당시 유행하고 있던 주요 서학서적의 논점에 대해 비판을 가한다. 그리고 비판의 논설은 성호 이익과 순암 안정복의 견해를 가져와 활용하고 있다. <삼가략>에 나타난 서학에 대한 비판적 관점은 다음의 몇 가지로 정리할 수 있다. 첫째, 서학은 노・불의 주장을 합하고 유가의 상제를 가탁한 것이라는 점. 둘째, 유・불・도 삼교의 학설을 차용하고서도 오히려 삼교를 온전히 배척한다는 점. 셋째, 실제로 서학은 노・불의 하승(下乘)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 넷째, 장차 서학이 제멋대로 사설을 행하도록 내버려 둔다면 그 해로움은 과거 노・불보다 더 심할 것이라는 점이다. 이러한 문제점이 있기 때문에 강력한 배격의 의지로서 결말을 맺고 있다. 이러한 황덕일의 서학과 서양 인식은 오히려 이익과 안정복의 사례보다 더욱 비판적이고 배타적이었을 가능성도 크다. 本稿的目的是通过分析拱白堂黄德壹的著述<三家略>查明他的西学认识的形成过程及对他的批判和对应的样态。 黄德壹与弟弟下庐黃德吉是传授安鼎福的学问和思想的大弟子, 是形成由‘李瀷→安鼎福→黄德壹・黃德吉’承传的学统的人物。 他在安鼎福门下掌握了以朱子学为基础的学问, 在该过程中自然而然地与老师的西学扩散的问题意识形成了共识。 对此, 黄德壹向安鼎福请求刊行李瀷的著述中坚持对西学的批判立场的书籍。 通过问答声讨了西学的弊端。 此外, 还为了防止西学向周围的人士扩散请求了协助, 并向步入西学的同一流派呼吁恢复儒学的教导。 黄德壹的<三家略>是与道家・佛敎一起指责和批判西学为异端的著述, 集成了他的西学认识。 黄德壹为了恢复朱子学, 一边著述<三家略>, 一边揭露道・佛・西三家的异端性。 对此, 他要首先向家门内的弟子们传授。 <三家略>中出现的批判观点指出, 西学的学说认为儒・佛・道三家的主要内容存在假借的虚构性。 此外, 他还主张若对西学肆意散布邪说置之不顾, 其危害将比道・佛更严重。 因此, 通过强力的排击西学的意志了结。

      • KCI등재

        17·18세기 서학서 연구의 몇 문제에 대하여

        김철범 동양한문학회 2024 동양한문학연구 Vol.67 No.-

        17·18세기는 동아시아에 서학이 형성되고 발전하였던 시기이다. 유럽의 예수회 선교사들이 중국으로 진출하면서 계기가 마련되었고, 중국 지식인들의 관심과 상호교섭을 통해 발전하였다. 그 결실이 서학서이다. 서학서 안에는 기독교 신학과 서구 철학 등의 사상적 영역과 천문·수학·역사·지리 등의 자연과학적 영역이 두루 포함되어 있다. 그러나 당시 “天學”이라고 불렀던 서학은 자연학을 형이상적인 신학이나 철학과 별개의 학문으로 인식한 것이 아니라, 자연학을 통해 신의 섭리를 인식할 수 있다는 통합적인 학문체계를 지니고 있었다. 그럼에도 청나라 시기 사고전서 편찬자의 서학에 대한 비평관과 이와 연장선상에 있었던 19세기말 동도서기론에 의해 서학은 이른바 “西敎”와 “西器”로 분리되고 말았다. 문제는 오늘날 서학을 연구하는 우리들도 이런 시각을 고수해 왔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조선지식계와 서학의 사상적 교섭은 접어둔 채 자연과학의 수용에 주된 관심을 두었고, 이로 인해 조선 지식계와 서학의 영향 관계를 올바로 이해하는 데 한계가 있었다고 본다. 본 연구는 이러한 시각에 문제제기를 하고자 한다. 또한 이와 함께 서학서에 대한 書誌的 검토의 오류를 짚어보았다. 일반적으로 17·18세기 서학서가 모두 서양 선교사들의 저작으로 알고 있다. 그러나 거기에는 선교사와 중국 지식인의 공동저술도 있고, 중국 지식인의 저술도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사실이 17·18세기 서학과 동양 지식계의 관계를 단순히 “전달과 수용”으로 설명해 왔던 논리에 대해 당시 서구 지식을 수용하고 변용하고자 했던 동양 지식인들의 주체적 역할을 정당하게 평가하는 단초를 열어 줄 것으로 기대한다. 또 한편 17·18세기 서학서 연구에 새로운 활기가 살아나기를 기대하며, 향후 서학서 번역에 관한 소박한 제언도 덧붙여 보았다. The 17th and 8th centuries is when Western studies were formed and developed in East Asia. As European Jesuit missionaries entered China, an opportunity was provided, and it developed through the interest and mutual negotiations of Chinese intellectuals. The result is Western leaning books. This books includes ideological areas such as Christian theology and Western philosophy, as well as natural science areas such as astronomy, mathematics, history, and geography. However, the Western Learning which was called "Celestial Learning[天學]" at the time, did not recognize natural science as a separate discipline from ideal theology or philosophy, but had an integrated academic system that could recognize God's providence through natural science. Nevertheless, in the Qing Dynasty, the so-called "Western Religion[西敎]" and "Western Tools[西器]" were separated by the 『Siku Quanshu(四庫全書)』editor's critique of the Western Learning and the theory of Western tool in Eastern thought at the end of the 19th century, which was an extension of it. The problem is that those who study the Western Learning today have adhered to this perspective. Therefore, the main focus was on the acceptance of natural science, leaving aside the ideological negotiations between the Joseon intellectual community and the Western Learning. And it seems that there was a limit to properly understanding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Joseon intellectual community and the Western Learning. This study attempts to raise a problem from this perspective. In addition, the errors that occurred in the bibliographic review of the Western Learning books were also pointed out. In general, this books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are known as the works of Western missionaries. However, it can be confirmed that there are joint writings between missionaries and Chinese intellectuals, as well as writings by Chinese intellectuals. This fact will open the door for the legitimate evaluation of the subjective role of Eastern intellectuals who sought to accept and transform Western knowledge at the time for logic that had simply explained the relationship between Western studies and Eastern knowledge in the 17th and 18th centuries as "transmission and acceptance." On the other hand, I hope that new vitality will be revived in the study of Western Learning books in the 17th and 8th centuries, and I added simple suggestions for translating books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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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유희재 『서개』의 서학사상 연구

        곽노봉(郭魯鳳) 한국서예학회 2016 서예학연구 Vol.28 No.-

        『서개』는 유희재가 지은 『예계』 중에서 다섯 번째에 해당하는 것으로 오로지 서예에 대한 문제를 총 246조목으로 나누어 개괄하면서 논한 저서이다. 『서개』의 구성과 내용은 크게 001-062조목까지 서예의 역사적 고찰, 063-168조목까지 진나라에서 송나라에 이르기까지의 비와 첩에 나타난 서예에 대한 연구, 169-246조목까지 필법론으로 먼저 용필ㆍ장법ㆍ집필ㆍ서풍에 대해 기술하고, 마지막은 서예란 무엇인가에 대해 논술하며 정리하였다. 그리고 이를 서학의 논리체계에 의해 심미론ㆍ서체론ㆍ창작론ㆍ풍격론ㆍ서품론으로 나누어서 유희재의 서학사상을 연구하였다. 심미론의 서학사상은 유교를 위주로 하면서 각종 유파의 학설을 광범위하게 취하였고, 서체론은 ‘변(變)’과 ‘통(通)’을 통한 ‘서체호통(書體互通)’설, ‘여고위도(與古爲徒)’ㆍ‘관기회통(觀其會通)’이 중심을 이루었으며, 창작론은 ‘입상이진의(立象以盡意)’를 본질로 삼고, 서학은 심학이기 때문에 ‘관아(觀我)’ㆍ‘통덕(通德)’을 통해 자신의 풍부한 개성을 충분히 나타낼 수 있었다. 풍격론은 역대 서예가들과 서예의 풍격 분석 및 시대서풍을 논술한 데에서 독특한 관점을 나타내었고, 서품론은 관물(觀物)ㆍ관아(觀我)의 통일, 아신(我神)ㆍ타신(他神)의 구별, 성정 표현을 본질로 삼고 서여기인(書如其人)을 제시하였다. 『서개』의 가치와 영향은 비록 말은 간단하지만 뜻을 갖추었고, 체제는 주도면밀하면서 상세하며, 사상과 체계는 심각하고 풍부하며, 인증한 것이 넓고 서예의 이치에 맞는 고전 전통 서학사상을 집대성하였다는 것이다. 이를 보면, 『서개』는 비록 간단하고 함축적으로 내용을 개괄하였지만, 이전 서론에 비해 내용이 심각하고 풍부하며 계통적임을 알 수 있다. 이는 또한 중국서예 미학사상발전사에서 무시할 수 없는 중요한 지위에 있기 때문에 원문을 중심으로 전반적 내용을 살펴보는 것은 오늘날 서예는 물론이고 미래 서예의 이정표를 세우는 데에 충분한 의의가 있다고 하겠다. 『書槪』是劉熙載撰的『藝槪』中當第五, 專論書法分246條槪括他的書學思想. 『書槪』不但富於理論深度,而且涉及面更廣, 其中包括書法的美學、書體、變遷、技巧、風格、書品等方面. 『書槪』的構成和內容是分別從001條到062條考察書法的歷史, 從063條到168條硏究從秦代到宋代的碑和帖的書法, 從169條到246條論述筆法論的用筆、章法、執筆、書風,然後再論述書法是什麼. 這些按書學的論理體系分別審美論、書體論、創作論、風格論、書品論硏究劉熙載的書學思想. 審美論的書學思想是以儒敎爲主廣範吸取各種流派的說法, 書體論是通過‘變’和‘通’的‘書體互通’觀其會通爲主, 創作論是以‘立象以盡意’爲本質通過‘觀我’、‘通德’表現了自己的富於個性. 風格論是對於歷代書法家和書法風格及時代書風的論述表現了自己的獨創觀點, 書品論是首先提示‘觀物’、‘觀我’的統一,‘我神’、‘他神’的區別, 然後提示了書如其人說. 『書槪』的價値和影響是雖言簡意賅, 體制周密而詳贍, 思想豐富而深刻, 所論或廣徵博喻, 切中書理的可謂古典傳統書學思想的集大成. 可以說,『書槪』雖然言簡涵蘊比以前書論內容深刻豊富系統的. 又因在中國書法美學思想發展史上不容忽視的地位, 以原文爲主考察全面的內容是不僅至今書法, 而且爲未來書法有充分意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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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세기 영남 남인의 서학 비판과 지식권력: 류건휴의 『이학집변』을 중심으로

        김선희 ( Seon Hee Kim ) 한국사상사학회 2015 韓國思想史學 Vol.0 No.51

        조선 후기에 유입된 한역서학서에 담긴 서양의 학술 즉 서학(西學)은 내부를 변화시킨 사상적 변수이자 조선 후기의 지적 상황을 조망하는 하나의 창이라고 할 수 있다. 성호 문하의 기호 남인 중 일부는이 변화와 그에 따른 동요를 사상적, 사회적 위기로 인식하고 이에 개입하고자 했다. 서학에 개방적이었던 스승 성호와 달리 서학에 대한지적 긴장을 최대치까지 높인 하빈 신후담의 최초의 척사서 「서학변(西學辯) 외에도 천주교에 대한 공식적 탄압이 시작된 후 완성된 순암 안정복의 척사서 「천학문답(天學問答)」 은 당시 서학에 대한 남인의 경도에 대한 경계를 담고 있다. 19세기 초반 서학에 이단이라는 국가적 낙인이 찍힌 후 안정복의 척사론은 기호 지역을 떠나 영남 남인들 사이에서 도통론과 벽이단론이라는 방식으로 재생산되었다. 이에 적극적으로 개입했던 것은 병호시비 등을 통해 지적 권력의 중심에서고자 했던 대산 이상정 계열의 학자들이었다. 류건휴는 스승 손재남한조가 안정복의 「천학문답」을 검토하여 작성한 두 편의 척사서 등을 활용하여 『이학집변(異學集辨)』 권6의 「천주학」부분을 완성한다. 서학 자체 뿐 아니라 남인의 서학 비판까지 논점화하는 류건휴의 척사론은 상제를 인정하고 서학의 기술적 측면을 긍정했던 기호 남인의 사상적 특징과, 이를 정통 퇴계학의 입장에서 비판함으로써 학술적 정통성과 지적 권력을 확보하고자 했던 영남 남인의 문제의식을 동시에 보여주는 저작이라고 할 수 있다. Sohak (西學), or Western Learning that was introduced through Western texts translated in Chinese characters was both a kind of window through which the intellectual landscape of the late Choson dynasty could be reviewed and an intellectual variable which influenced and changed the inside of Choson’s intellectual field. The Namins, or the Westerners with Song-ho School as its representative school of thought, was the first who responded to and coped with Western Leaning with any sensitiveness. Whereas Song-ho Yi Ik (李瀷), the leader of Song-ho school, studied Western thought with open-mind, his disciple Shin Hu-dam criticized it in his book Sohak-byon [西學辨] and An Jong-bok admonished in his book Chonhak-mundap [天學問答] Namin scholars who showed inclination to favor it. After the nation officially persecuted the Catholic Christians, Ahn Jong-bok’s argument for ‘refuting unorthodoxy’ (斥邪論) spread beyond the Ki-ho area, reproducing itself among Yeongman Namins as “daotong discourse(道統論)” and “heterodoxy exclusion discourse.(闢異端論)” Ryu Gon-hyu (柳健休), an author of Yihak-jipbyeon [異學集辨] that argued the necessity of excluding heterodoxy and a Yeongman scholar succeeding to Toegye, attempted to establish Toegye’s academic legitimacy through the discourse on excluding and refuting heterodoxy. His writing was not a mere critique of Western Learning. He intended to claim and secure the legitimacy of Toegye’s philosophy and learning through his writing. Therefore, it can be concluded that Rye Gon-hyu’s discourse on heterodoxy is the one that reveals the critical consciousness of Yeongman Namins who attempted to solidify their academic legitimacy and intellectual power through heterodoxy discours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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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續書譜』의 書學思想 연구

        곽노봉(郭魯鳳) 한국서예학회 2016 서예학연구 Vol.29 No.-

        강기의 『속서보』 서학사상은 송나라 ‘상의’서풍의 말류 현상을 구제하고 위ㆍ진나라의 고법으로 복귀함을 주장하여 현재의 병폐를 정리하고 새로운 출구를 찾으려고 하였다. 『속서보』의 주요 판본은 9종류이고, 배경은 당시 정치ㆍ문화적 배경, 송나라 이학의 의고(疑古)정신, ‘상의’서풍과 첩학 흥성 등과 밀접한 관계가 있다. 『속서보』의 서학사상은 위진고법ㆍ서체인식ㆍ서학비평으로 나눌 수 있다. 위진고법은 ‘자연 고묘(自然高妙)’의 정신을 체현한 ‘소쇄종횡(瀟灑縱橫)’ㆍ‘천연부제(天然不齊)’ㆍ‘표일지기(飄逸之氣)’가 중심이다. 서체인식은 ‘정체(正體)’에 대한 올바른 인식과 초서는 장초서를 먼저 배워야 한다는 것이다. 서학비평은 중화사상ㆍ순수예술ㆍ자연정 신을 표준으로 삼았다. 『속서보』의 가치와 영향은 서예를 실용적이거나 세속적이 아닌 서예 자체로부터 예술을 논한 점, 서예 기법에 대한 설명은 고전 서예 기법의 교량적 역할을 한 점, 위ㆍ진나라의 고법으로의 복귀를 주장한 점을 들 수 있다. 강기의 『속서보』에 나타난 서학사상은 결코 진보적이라 할 수 없다. 그러나 어떠한 사물이나 모두 양면성이 있어 장점과 단점을 가지고 있다. 일반적으로 창신을 진보라 하지만, 때로는 복고가 오히려 진보적일 때도 있다. 따라서 창신만 일삼는 것을 진보의 절대적 표준으로 삼을 수 없다. 그의 서학사상은 시대의 조류 및 역사의 규율에 부합하는 진보적 사상으로 송나라 ‘상의’서풍에 대한 일차적인 역방향일 뿐만 아니라 전통으로 회귀하는 것이기도 하다. 이런 의미에서 볼 때 강기가 옛것을 숭상하고 위ㆍ진나라로 복귀하려는 서학사상은 자연미를 숭상하는 정신과 성정을 나타내는 것을 종주로 삼는 예술 본질의 수호라 하겠다. 이러한 점에서 이 글은 전통을 홀시하고 창신만 일삼는 한국서단에 대해 경종을 울리면서 올바르고 건전한 미래 서예를 위한 초석이라는 현실적 의미를 담고 있다고 하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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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선서학의 전개와 과제

        금장태(Keum, Jang Tae) 서강대학교 신학연구소 2012 신학과 철학 Vol.- No.20

        본 논문은 ‘조선서학’이 조선후기 사상사에서 주변적 사건이 아니라, 새로운 시대를 열어가는 가장 활성적 요인으로 파악해야 한다고 제안하면서 조선후기 사상사를 ‘도학-실학’의 이원구조가 아니라, ‘도학-실학-서학’의 복합구조로 보아야 한다고 주장한다. ‘조선서학’에서 서양근세 과학지식은 ‘도학’이념이 구축한 중국중심의 세계관을 허물고, 동양과 서양이 소통하는 새로운 세계관을 열어주었으며, 또한 천주교신앙은 유교적 신념체계와 사회질서에 큰 충격을 주었다. 일찍이 예수회의 보유론(補儒論)은 유교경전과 천주교교리를 조화시켜 해석함으로써 동서사상의 소통을 가능하게 해주었다. 하지만 18세기말 이후 100년 동안 ‘조선서학’은 예수회의 적응정책을 포기하고 제사를 금지하면서 유교와의 대화의 통로를 잃고 정면충돌을 초래하였다. 본 논문은 이에 따라 조선사회가 ‘서학’으로부터 근대적 전환의 계기를 얻지 못하고 폐쇄되어 자멸의 길을 갔고, ‘서학’은 조선사회와 문화전통 속에 뿌리내릴 기회를 상실하고 외래종교로 머물게 되었던 문제점을 지적하면서 ‘조선서학’의 의미를 재음미한다. This paper argues that “Seohak” (Western Learning) was not a marginal, but a major factor in opening a new era in late Chosun Dynasty, and that the history of thought in late Chosun should be approached not in terms of a dual structure of “Dohak” (Neo-Confucian Learning) and “Silhak” (Practical Learning), but from the perspective of the more complicated situation of interactions among “Dohak,” “Silhak,” and Seohak. “The scientific knowledge of the Modern West in “Seohak” broke down the China‐centered worldview established by the ideology of “Dohak” and opened up a new worldview through which the East and the West could communicate with each other. In addition, the Catholic faith made a huge impact on the Confucian belief system and social order. With their “theory of [Christianity as] fulfillment of Confucianism,” Jesuit missionaries in China made communication between Eastern and Western thought possible by an interpretative method that harmonizes the Confucian scriptures and Catholic doctrine. However, “Seohak” of the late Chosun Dynasty (late 18th to late 19th century) abandoned the Jesuit missionary policy of ‘accommodation’ and banned the rite of ancestor worship. As a result, it came to block the passageway of dialogue with the Confucianism to the effect of causing a head‐on collision between the two ways of thought. As a result, the Chosun society, having failed to draw momentum from “Seohak” for a turn to modernity, went its way to self‐destruction by closing itself from the world. On its part, “Seohak” lost its opportunity to take roots in the cultural tradition of Chosun society and so came to remain as a foreign relig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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