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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신라의 분쟁 처리와 지방지배-중성리비와 냉수리비 비교분석-

        서지영(Seo, Ji-young) 신라사학회 2021 新羅史學報 Vol.- No.53

        「중성리비」와 「냉수리비」를 비교 분석해 본 결과 서술방식의 차이는 있지만, 분쟁을 처리하는 절차와 구성원의 역할은 유사함을 알 수 있었다. 하급의 실무진이 사건을 조사하고, ‘간지’급 이상의 고위 지배층이 판결한 뒤 교를 내렸으며, 도사 등의 실무진이 판결내용을 집행하였다. 다만 下敎를 내린 의결집단과 집행을 담당한 실무 집단의 소속부와 관등의 양상은 차이가 있었다. 「중성리비」는 왕을 비롯하여 탁부, 사탁부인으로 의결이 이루어졌지만, 「냉수리비」는 탁부, 사탁부 이외 본피부와 사피부의 "간지" 계층도 참여하였다. 「냉수리비」의 "간지"들은 신라 왕의 소집 명령을 받아 국정에 참여하고 있었으며, 비록 과거 사로국 단계의 위호를 그대로 사용하고 있었지만, 신라 왕에게 용인 받은 세력으로 관료집단으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냉수리비」에서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의결집단에 참여한 것은, 部의 수장적 지위보다 국왕의 관료로 편제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본피부와 사피부인이 보유한 간지 관등은 기존 部主의 전통적 지위를 명목상 인정해 준 것으로, 일원적 관등체계가 마련되기 전 명예적 성격이 강한 간지를 예우하는 과도기적 상황을 반영하는 것이었다. 집행을 담당한 중앙의 실무진은 두 비 모두 탁부와 사탁부인으로 구성되어 있었는데, 나마 이하 하급관등자와 도사가 중심이었다. 「냉수리비」는 판결을 집행한 실무진을 ‘典事人’으로 하여 하나의 직군으로 기록하였지만, 「중성리비」는 역할에 따라 분산된 채 기록되어 있었다. 판결을 알리는 방식도 「중성리비」는 典書 여모두가 판결 사실을 기록하고 심도리를 통해 널리 알린, 반면 「냉수리비」는 중앙의 ‘典事人’이 “煞牛拔誥” 한 뒤 ‘故記’하였고, 이것을 다시 촌주가 “世中了事”하고 故記하는 방식을 취하였다. 「냉수리비」에서의 사건 처리는 중앙 왕경인 집단의 판결 집행, 지방 촌주의 확인이라는 이중적 절차를 행한 것이며, 중앙에서 지방으로의 ‘敎令’ 전달 체계를 알 수 있다. 두 비의 분쟁은 모두 경제적 이권을 둘러싼 다툼이다. 「중성리비」의 분쟁은 두지사간지와 일부지가 빼앗은 4개 촌을 모단벌탁으로 다시 돌리는 수취와 관련된 문제이고, 「냉수리비」는 절거리 개인의 재산과 관련된 다툼이었다. 이 두 비는 농업생산력 증대와 이에 따른 재화의 유통, 市肆와 東市의 설치 등 당시의 경제적 상황을 잘 보여준다. 또 「냉수리비」는 "별교"의 형태로 상속자를 명시하였고, 패소측에게 이의를 제기하면 중죄를 받을 것임을 서약하도록 하여 법을 강제하였다. 이것은 지역, 촌에서 일어난 분쟁에 신라중앙이 개입하여 판결을 내리고, 이를 준수하도록 강제하여 지방에 미치는 중앙의 통치력을 확인할 수 있다. 6세기 초 신라 중앙은 이러한 방식을 통해 지방에 행정력을 발동하고, 지방지배를 실현해나가고 있었다. Jungseong-ri Silla Stone Monument,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Through comparative analysis, the aspects of disputes and their handling process were examined. The two inscriptions were different in the way they were written. The procedure for handling disputes was the same. All the voting groups were high-ranking officials above the kan-ji(干支). The working group consisted of people who held official positions such as nama-gwan-deung(奈麻-官等) or lower-ranking officials. Judgment and execution of disputes were centered on the king, the people of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The operation of the state was decided only by the king,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without going through a six-bu(6部) agreement. In the public opinion group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people such as Gan-ji-gwan-deung(干支-官等) and others from Bonpi-bu(本彼部) and Sapi-bu(斯彼部) participated. This indicates that he belongs to the royal priesthood, not the head of the bu(部). Bonpi-bu, Sapi-bu, and Jamtak-bu of Naengsu-ri Silla Stone Monument, Bongpyeong-ri Silla Stone Monument took part in state affairs by referring the kan-ji. This is an undifferentiated bureaucracy used in the governance structure of small countries in the past. They were discriminated against by the king"s religious group. Modanbeol-tak (牟旦伐喙) and bonpa-tak(本波喙) are the structures of kan-ji-ilbeol(干支-壹伐) for public opinion-group. The Ch"on(村) shows a similar form in the structure of kan-ji-ilgeumji(干支-壹金知). Tak-bu(喙部) and Satak-bu(沙喙部) revealed their superior status through the use of differentiated kanji series including ilganji(壹干支). bu of Modanbeol-tak(牟旦伐喙), bonpa-tak(本波喙) and Ch"on(村) use different government structures, and a social structure that is divided into stages appears.

      • KCI등재후보

        浦項 中城里新羅碑와 新羅의 官等制

        김희만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09 동국사학 Vol.47 No.-

        이번에 새로이 발견된 浦項中城里新羅? (Pohang joonsung-ri sillabi)는 迎日 ?水里新羅?(Yeongil naengsu-ri sillabi) ? 蔚珍鳳坪新羅?(Uljin Bongpyeon sillabi)와 더불어 6세기 신라사회를 이해하는 매우 중요한 자료로서 인정된다. 특히 중성리신라비는 영일냉수리비(Yeongil naengsu-ri sillabi)와 더불어 지중왕(Jijeungwang)대의 사회상뿐만 아니라 새로운 역사적 사실을 반영한다. 이에 학계에서는 두 차례의 학술회의를 통해 본 비가 지닌 의의를 해명 하고자 하였다. 본고는 기왕의 연구자들이 제기한 견해를 바탕으로, 먼저 비문(memorial inscription)의 문단구성과 석독(explanatory reading oral formulas)에 대한 필자의 견해를 제시하였다. 다음으로 본 비문에 보이는 관직(Official Position)과 관등(gwandeung : Official Ranks), 인명표기에 관한 문제를 살펴보았다. 특히 干支(Ganji)-壹金知(Ilgeumji)를 11등급의 외위체계(Oewije: Local Government Grade)가 정비되기 이전 단계의 것으로 추정하고, 경위체계(Gyeongwije : Official Rank Held by Residents of the Capital)로서 千支(Ganji)- 壹伐(Ilbeol)의 체계가 있었을 가능성을 제기하였다. 또한 본 비에서 그 소속부로서 탁부(Takbu)와 탁(Tak) 등이 함께 기술된 것은 그 소속 인물의 정치적 지위에 따론 때문이 아닐까 추측하고 당시에는 관등의 분화가 진행되고 있었으며 관직과 관등은 아직 세분화되지 않았던 것으로 파악하였다.

      • KCI등재

        「浦項 中城里新羅碑」의 新釋과 지증왕대 정치 개혁

        박남수(Park Nam-Soo) 한국고대사학회 2010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60

        2009년 5월에는 「포항 중성리신라비」(이하 「중성리비」)가 발견되었으나, 비문의 난해함과 새로운 용어의 등장, 그리고 결정적인 판독의 오류로 인하여 그 의미를 제대로 파악하지 못한 점이 있었다. 이에 필자는 「중성리비」를 면밀하게 살핆으로써, 기왕에 「중성리비」를 특징짓는 지명으로 일컬었던 2개의 ‘牟旦伐’을 각각 ‘牟?伐’과 ‘至且代’로 판독하였다. 또한 ‘ ’의 석독 ‘奪’이 ‘等’의 오독임을 밝히고, ‘本牟子’를 ‘본래 牟子 지방의 … 였다’로, ‘爭人’을 직임으로, ‘金評’을 신라 6부 가운데 하나인 한지부의 전신 지명으로 각각 이해함으로써 새로운 석문을 제시하였다. 이러한 석문을 바탕으로 하여 신라 6세기 전반 율령비의 서식이 정비되는 과정을 검토함으로써 지증왕 즉위 초의 강력한 개혁정책의 기조를 살폈다. 이에 「중성리비」의 신사년을 ‘지증왕이 신사년에 즉위하였다’는 「삼국유사」의 或說에 상응한 것으로 추정하였다. 또한 「중성리비」 敎令 頒行의 투식이 「냉수리비」에서 매우 정비된 형태로 나타난 것이나, 「중성리비」ㆍ「냉수리비」와 같은 사안에 대한 처결이 있었던 것 등을, 지증왕 즉위 초년의 정치개혁과 사회적 갈등을 해소하고자 하는 모습으로 이해하였다. Even though Pohang Jungseongri Silla StoneMounument was discovered inMay, 2009, it is very difficult to figure out the precise meaning, due to difficult passages, appearance of new terms and decisive errors of decipherment. Whereupon, through the close examination of StoneMonument, I decoded two ‘牟旦伐(Modanbul)’ as ‘牟?伐(Mochambul)’ and ‘至且代(ji-cha-dae)’ respectively which were the place names as the distinct features of Pohang Jungseongri Silla Stone Mounument. In addition, I found out that ‘奪’(tal : 奪) as interpretation of ‘ ’(deung : ) was the misreading of ‘等(deung : 等)’ and suggest a new interpretation, translating the phrase ‘本牟子’ as ‘originally, was … of 牟子(Moja) district’ and reading ‘爭人(disputants)’ as one’s official duties and ‘金評(Geumpyung)’ as a former name of Hanjibu which was one of Silla 6 Bu. On the basis of these interpretations, I examined the processes which a format of a stone monument of a statute was organized in early the 6th century in Silla and keynotes of strong reformation policies right after the accession to the throne of King Jijeung(Jijeungwang). Therefore, I presumed that the year of xinsi(辛巳), depicted in Jungseongri Silla StoneMounument, corresponded to a theory recorded that 'King Jijeung ascended the throne in the year of xinsi' in Samguk Yusa. Additionally, the format of the distribution of king’s ordinance in ‘Jungseongri Silla StoneMounument’was highly refined in ‘Naengsuri StoneMonument’, and there were the decisions on the same case to that of ‘Jungseongri Silla Stone Mounument’ and ‘Naengsuri Stone Monument’, which I understand as the political reformation and policies to resolve the social conflicts at the beginning of the accession to the throne of King Jijeu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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