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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韓國 古代 木簡의 分類 方案

        김재홍 한국목간학회 2022 목간과 문자 Vol.- No.28

        This paper examines the meaning of number classification of ancient Korean wooden documents by stage after being excavated from the ruins and storing them in a storage(relic storage), and classifies the types of wooden documents based on the planar conformation. Thorough this, it was intended to promote the convenience of search by identifying the appearance of wooden documents, and to prepare a classification standard of wooden documents. The classification plan between wooden documents can be largely divided into number classification and type classification. The number of wooden documents is a classification that easily identifies the wooden documents with the name of wooden documents, and it is numbered step by step in the process of organizing. wooden documents will be given numbers such as ①The location number of the excavated site, ②The number of the organization, ③The number of the report, and ④The number of national attribution number(official number goven by the country). The type classification of wooden documents set up on consideration of the planar conformation, the upper and lower(upper and lower ends), and cross-sectional shape. Considering the planar conformation of the wooden documents, it was classified into Ⅰ: elongated square type, Ⅱ: bar type, and Ⅲ: crumb type for set as a standard. 이 글은 한국 고대 목간을 대상으로 유적에서 출토된 이후 수장고에 수장하는 단계별로 번호 분류의 의미를 살피고 평면 형태를 기준으로 목간의 형식을 분류하였다. 이를 통해 목간의 외형적인 특성을 파악하여 검색의 편리성을 도모하고 목간의 분류 기준을 마련하고자 하였다. 목간의 분류 방안은 크게 번호 분류와 형식 분류로 나눌 수 있다. 목간의 번호는 목간의 명칭과 더불어 목간을 쉽게 파악하는 분류 방식이며, 정리하는 과정에서 단계별로 번호가 부여된다. 목간은 ①출토 위치 번호, ②정리(임시) 번호, ③보고서 번호, ④국가귀속번호 등의 번호를 부여받게 된다. 출토 위치 번호는 목간의 출토 위치와 층위를 표현한 번호로서 학문적인 자료로서의 지위를 부여 받는다. 목간의 최종적인 번호는 소장 기관의 수장번호를 반영하는 국가귀속번호이며, 목간의 번호 분류의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목간의 형식 분류는 평면 형태와 상·하단 형태, 단면 형태 등을 고려하여 설정하였다. 먼저 목간의 평면 형태를 고려하여 Ⅰ: 장방형, Ⅱ: 봉형, Ⅲ: 부스러기로 분류할 수 있다. Ⅰ: 장방형의 하위 단위로 상단 형태는 알파벳 대문자, 하단 형태는 알파벳 소문자로 세분할 수 있으며, Ⅱ: 봉형의 하위 단위는 단면 형태를 기준으로 아라비아 숫자로 표현한다. 폐기 시의 상황을 고려하여 파손은 ‘×’로 표현하여 현존 상황을 나타낸다

      • KCI등재

        함안 성산산성 출토 목간의 정리현황 검토

        최상기(崔尙基) 한국목간학회 2013 목간과 문자 Vol.11 No.-

        1차 사료가 부족한 한국 고대사 분야에서 목간은 중요한 역할을 한다. 특히 咸安城山山城에서 출토된 대량의 목간들은 중고기 신라의 정치, 경제, 군사 등을 살필 때 빠뜨릴 수 없는 소중한 실물 자료이다. 그러나 현재까지 성산산성 목간 관련 간행물, 연구성과들이 다수 축적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체계적인 번호 부여조차 이루어지지 않은 상태이다. 이는 연구 과정에서 오류, 비효율을 초래할 수 있는 심각한 문제 요인이다. 발굴보고서, 현장설명회 자료집의 경우 한 간행물 안에서도 번호 부여 방식이 여러 가지이며, 각 간행물마다 매번 목간 번호가 1번부터 시작하므로 일관적인 파악이 어렵다. 《韓國의 古代木簡》, 《韓國木簡字典》은 현재까지 연구자들이 가장 많이 활용하는 기본 자료집이다. 그러나 다른 간행물들과의 연속성이 부족할 뿐만 아니라, 부여한 번호도 아직 문제점이 있어 그 형식을 한국에서 출토된 목간들에 일괄 적용하기 어렵다. 여러 종류의 번호 부여 방식이 혼재한 상황은 연구성과의 작성 단계부터 문제가 되며, 이로 인해 연구사의 신속, 정확한 파악도 곤란하다. 번호부여 방식을 비롯해 성산산성 목간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는 학문후속세대의 연구 지속성 측면에서도 중요한 과제이다. 차후 새로운 번호 부여 방식을 마련할 때에는 해당 목간의 출토 장소, 출토 연도, 일련번호를 직관적으로 보여줄 수 있는 틀을 갖춰야 할 것이다.

      • KCI등재

        한국의 고대목간과 연구동향

        전덕재(Jeon Deog-jae) 한국목간학회 2012 목간과 문자 Vol.9 No.-

        본고는 2011년까지 발견된 한국 고대목간의 현황과 그것을 둘러싼 연구동향을 정리한 것이다. 2011년까지 낙랑 목간 120여 점, 백제 목간과 목간 부스러기 150여 점, 신라 목간 330여 점이 발견되었다. 삼국시대까지 목간은 付札 또는 荷札用뿐만 아니라 文書로서 널리 사용되었고, 통일신라시대에 이르러 종이문서가 널리 쓰이면서 문서용은 크게 줄어들고 주로 물품에 부찰된 꼬리표로 사용되었다. 목간의 연구를 통하여 古代의 문서행정체계 및 중앙과 지방의 통치체제, 수취체계와 사회경제제도, 그리고 고대인의 일상 생활모습에 대한 이해가 크게 진전되었다. 앞으로 목간의 발굴 사례가 계속 증가하고, 또 이미 발굴된 목간의 묵서가 새로 판독됨에 따란 목간을 통한 韓國古代史像의 체계적인 복원작업도 크게 활성화되리라고 기대된다. This study analyzes the current state of the Korean ancient wooden slips that have been discovered by 2011 and conducts a summary of the overaching research trends. All in all, some 120 Lelang wooden slips, 150 Baekje wooden slips and shavings, and 330 Silla wooden slips have to date been uncovered. Up until the Three Kingdoms period, wooden slips were widely used, not only for labeling and listing purposes but also as a means of documentation. The widespread use of paper documents during Unified Silla coincided with a significant decline in the use of wooden slips for documentation purposes, with such resources increasingly being used mainly as labels attached to goods. Research on wooden slips has contributed to furthering scholars’ understanding of the ancient document administration system, the ruling structure in the central and local areas, the tax and socio-economic systems, and the everyday lifestyle of ancient people. In this regard, the continued excavation of wooden slips and advent of new interpretations of existing wooden slips is expected to further invigorate the practice of Korean ancient history based on such wooden slips.

      • KCI등재

        경주 월성 해자 조사 성과와 목간

        박정재 한국목간학회 2018 목간과 문자 Vol.0 No.20

        This study review the excavation performance of the Wolseong moat since the 1980s, learned about the change of the moat, and analyzed the conditions of excavation between moats that had been excavated, and looked for the value of excavation mujian. The Wolseong moat are confirmed the presence of moats on the northern side of Wolseong easten-gate by investigating the excavation site and determined the size, construction techniques, patterns, and interior layer of moats by the excavation research. After analyzing and studying the results of an excavation research, the Wolseong moat was able to pit moat was construct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when the stone-built moat was constructed Silla unified the three kingdoms in changed the postwar era, Finally the moat was fell into disuse after the 9th century. In addition, due to the nature of the moat, various wooden objects, earthen ware, and tiles were excavated and various wooden structures, plant fluids, and organisms were found in the society. In particular, mujian are the most direct graphic materials that can be inferred about the society of the time, and are the key artifacts of restoring Silla culture. Up to now, around 180 mujian and mujian parts wooden have been excavated from the Wolseong moat, and among them, 30 mujian and mujian parts wooden with read on them are actively used to identify culture at the time. This study we have examined the status of new-through mujian and mujian parts wooden found in the moat transfusion from 2015 and have examined the characteristics of mujian and mujian parts wooden excavations and their locations. The mujian excavated during the Three Kingdoms Period is only excavated from the pit moat of the blood transfusion after being disposed of, and is not shaped by the moat in its general appearance. However, it is unreasonable to investigate some of the transfusion so far and identify the entire aspect of mujian excavated from the Wolseong moat. In the future, in-depth research has been conducted on mujian excavated from the year's original site, and it is expected to be used as a base for restoration of the Silla culture. 본고에서는 1980년대부터 진행된 월성 해자 발굴조사 성과를 검토하여 해자 변천과정을 파악하고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의 출토상황을 분석하여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이 가지는 가치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월성 해자는 월성 동문지 발굴조사를 통해 월성 북편에 위치한 해자의 존재를 확인하였고 현재까지 꾸준한 발굴조사를 통해 해자의 규모, 축조 기법, 변화양상, 해자 내부 층위 및 층위별 출토 유물을 파악하였다. 발굴조사 성과를 분석·연구하여 월성 해자는 삼국시대에 수혈해자를 축조하여 사용하다 신라가 삼국을 통일하기 전후한 시점에 석축해자로 변화하여 9세기 이후까지 사용된 것으로 파악하였다. 더불어 해자라는 유구의 특성상 다량(多量)의 토기·토제품·기와류와 더불어 다종(多種)의 목제품, 동·식물유체, 유기물이 출토되어 당시의 사회·문화·토목건축·식생환경을 복원할 수 있는 기초자료를 확인하였다. 특히 목간은 당시의 사회상을 짐작할 수 있는 가장 직접적인 문자자료로서 신라 문화상 복원의 핵심유물이다. 현재까지 월성 해자에서 출토된 목간 및 목간형 목제품은 180여점이며 이 가운데 묵흔이 확인된 30여 점에 대한 판독을 통해 당시의 문화상을 파악하기 위한 연구가 활발히 진행 중이다. 본고에서는 2015년부터 진행한 월성 ‘다’구역 수혈해자에서 확인된 신(新)출토 목간과 목간형 목제품의 현황과 출토 층위와 출토 위치를 파악하고 목간의 형태적 특징을 살펴보았다.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은 삼국시대에 조성되어 사용하다 폐기된 수혈해자 내부퇴적토에서만 출토되고 유수에 의해 해자 전반에 걸쳐 정형성을 띄지 않게 출토되는 양상을 보인다. 다만, 현재까지 수혈해자 일부에 대한 조사만 진행되어 월성 해자 출토 목간의 전체적인 양상을 파악하기에는 무리가 있다. 향후 월성 해자 신(新)출토 목간에 대한 심층적인 연구가 진행되어 신라 문화상 복원의 기초자료로 활용되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扶餘 陵山里 出土 木簡의 性格

        李炳鎬 한국목간학회 2008 목간과 문자 Vol.1 No.-

        부여 陵山里寺址 중문지 남쪽과 서쪽에서는 40여 점의 목간이 출토되었다. 지금까지 능산리 출토 목간은 중문지 남서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에서만 출토된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목간 출토지점에 관한 재검토 결과 중문지 동남쪽의 초기 자연배수로와 그보다 시기가 늦은 남쪽의 제2석축 배수시설에서도 출토된 것으로 드러났다. 대부분의 목간이 출토된 초기 자연배수로의 폐기 시기와 정비 과정을 파악하기 위해 능산리사지 가람 중심부의 정비 과정을 살펴보았다. 능산리사지에서 출토된 互當의 형식 분류와 상대편년, 건물지별 분포 상황을 분석한 결과 가람 중심부의 건물들은 강당지, 목탑지, 불명건물지Ⅱ가 1차로 건립되고, 금당지와 중문지, 회랑지가 2차로 건립되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또 동·서 회랑지 남쪽 끝부분에서 발견된 암거시설을 통해 동·서 대배수로의 정비, 즉 초기 자연배수로의 폐기가 가람 중심부에 1차 건물이 건립되고 나서 2차 건물이 들어선 시점에야 이루어졌음을 추정할 수 있었다. 능산리사지의 講堂址는 이 사원에서 가장 먼저 건립된 건물로서 567년 목탑 건립 이전부터 능산리고분군의 祠堂과 같은 역할을 하였던 것으로 추정되며 이는 願刹이라는 능산리사지의 성격과 깊은 관련을 갖는 것으로 생각된다. 목간이 폐기된 하한을 추정하기 위해 2002-1번 목간의 출토 상황에 주목하였다. <도면4>의 토층도와 와당 등의 공반유물을 불 때 이 목간은 금당지가 건립되거나 완성되고 회랑지가 건립되기 시작하던 6세기 후반 무렵에야 폐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목간 제작·사용의 상한 연대는 사원의 최하층에서 출토된 중국청자편과 벼루편 등을 통해 볼 때 6세기 중엽 정도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능산리 출토 목간은 554년 관산성 전투에서 성왕이 축은 사건 이후부터 567년 목탑이 건립되던 단계에 주로 제작·사용·폐기되었지만 일부 목간은 6세기 후반까지 제작·사용되다가 폐기된 것으로 생각된다. 능산리 출토 목간의 대부분이 567년 목탑 건립 전후에 폐기된 사실은 이들 목간이 능산리사지 초기 강당지에 있었던 어떤 시설과 밀접하게 관련됨을 알려주고 있다. 또 목간에 기록된 내용이 불교나 죽은 사람의 의례와 관련된 것, 물품의 생산지와 이동, 장부와 같은 것이 망라되어 있는 점을 고려할 때 능산리 출토 복간들은 능산리사지의 건립 과정에서 파생된 것으로 생각된다. 따라서 8차 조사에서 발견된 2002-1번 4면목간의 경우도 능산리사지의 정비와 관련시켜 볼 필요가 있다. 목간의 적외선 판독 결과 1·2면의 支藥兒食米記와 3면의 道使 관련 기록은 작성 시기에 차이가 있음을 알 수 있었다. 1·2면은 支藥兒라는 어떤 건물이나 시설에서 쌀을 지급한 내역을 담은 帳簿이며, 3면은 1·2면에서 연속된 食米 관련 기록을 지운 다음 再使用한 2차 목간이고, 4면은 習書로 생각된다. 따라서 2002-1번 목간은 支藥兒라는 어떤 건물이나 시설에서 능산리사지의 건립에 동원된 지방민들에게 쌀을 지급한 내역을 기록한 중간 단계의 장부라고 할 수 있다. 2002-1번 목간과 300번, 306번, 310번 목간 등을 통해 불 때 능산리사지 일대에는 쌀과 같은 물품의 이동과 관련된 창고시설이나 행정조직이 존재하였을 것으로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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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 7세기 목간에 보이는 한국목간

        市大樹(Ichi Hiroki),오택현(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9 목간과 문자 Vol.0 No.22

        본고는 일본의 7세기 목간을 여러 차례 살펴본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에 대해 약간의 문제 제기를 시도해 본 글이다. Ⅱ장에서는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목간의 연대를 문제 삼았다. 이제까지 신라 外位의 표기 등을 주된 근거로 삼아 성산산성 목간의 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목간의 표기에는 정도의 폭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지적했다. 최근 출토된 「壬午年」 목간은 59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다른 목간의 연대도 6세기 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절에서는 성산산성 荷札의 서식을 살펴보았는데, 「地名+人名+物品名」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형식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면 이러한 서식은 오래 전부터 사용된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3절에서는 수량이 많은 仇利伐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특히 「人名A+奴(人)+人名B+負」의 표기를 중심으로 고찰했다. 「奴(人)」는 從者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천민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負」는 「荷物」을 의미하는 명사가 아니라 「負担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라고 생각된다. 이것과 관련해 「発」도 「発送하다」의 의미인 동사로 보인다. 4절에서는 조금 특수한 사례로서 「◯城下」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타입은 「◯城下」의 真下에서 물품명이 기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고, 품목과 麦 · 米로 少数派인 것을 확인했다. 또 「◯城下」가 州·郡 중 어디인지를 생각했을 때, 郡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다. Ⅲ장에서는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大烏知郎」으로 시작되는 4면 묵서 목간을 살펴보면서 일본의 前白木簡과의 공동점이 많다고 소개하였다. 그 후 중국 漢簡과의 비교를 시도한 김병준의 견해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견을 덧붙였다. 2절에서는 2017년에 공개된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 3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 서식에 주목하면서 검토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前白木簡과 달리 3점 모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으며, 2점은 첫머리에 행선지(상신처)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들은 일본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前白木簡과 공통된다. 또 이 3점을 포함해 한국의 前白木簡을 살펴보면 행선지가 地位 · 尊称 · 官職으로 기록되는 것, 差出이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일본과도 공통되는 부분이다. 일본의 前白木簡의 직접적인 기원이 조선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추론은 이미 제기되었지만, 보다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Based on Japan’s experiences in the 7th century, this thesis attempts to raise some questions about 荷札木簡, which was excavated from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and 前白木簡, which was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in Gyeongju. In Chapter II looked at the excavated at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The first verse took issue with the wooden solidarity.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e wooden documents standard form of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In section 3, we looked at the high volume of Guribeol(仇利伐). In section 4, we looked at 「◯城下」 of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as a rather special example. Chapter III looked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The first verse confirmed that there were many joint points with Japanese wooden docunents to compare in korea wooden documents.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ree pieces of the Wolseong moat(月城垓字), which were released in 2017. The reasoning that the direct origin of Japan’s wooden documents of front writing ‘前’(前白木簡) was found in the ancient korea has already been raised, but is appearing in a clearer for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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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여 ‘중앙성결교회유적’ 및 ‘뒷개유적’ 출토 목간 보고

        심상육(沈相六),이미현(李美賢),이효중(李孝重) 한국목간학회 2011 목간과 문자 Vol.7 No.-

        본 글은 2010년도에 백제 후기의 도성지인 부여읍 구아리에서 출토된 목간을 보고함에 그 목적이 있다. 신출 목간이 출토된 유적은 ‘부여 중앙성결교회유적’이며, 유적에서는 사비도성의 내부시설물로 판단되어지는 2단계에 걸친 수로와 건물 등이 확인되었다. 유적에서 출토된 신출목간은 그간 사비도성 지역에서 출토된 것과 같이 문서목간, 부찰목간 등과 같이 형태와 내용적인 면에서 흡사한 편이다. 하지만 한시를 연상케 하는 4언의 운문이 적힌 목간, 사비도성의 도성 5부체제와 관등 그리고 인명이 적힌 목간 그리고 부찰목간으로 그 당시 물품의 품목이 적힌 것 등 모두 13점의 목간이 좁은 유적지에서 확인되어 또 다른 그 당시의 문화를 탐구할 수 있는 자료를 획득하게 되었다. 본고에서는 목간에 대한 정확한 실측도 및 목간의 수종 파악, 판독문에 대한 해석문 등은 아직 이루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사항은 이번의 보고 이후 목간에 대한 활발한 연구가 진행된 후 유적에 대한 발굴조사보고서에 다시 수록하도록 하겠다. 그리고 글 말미에 부여 뒷개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또한 보고한다.

      • KCI등재

        일본 7세기 목간에 보이는 한국목간

        이치 히로키,오택현 한국목간학회 2019 목간과 문자 Vol.0 No.22

        Based on Japan’s experiences in the 7th century, this thesis attempts to raise some questions about 荷札木簡, which was excavated from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and 前白木簡, which was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in Gyeongju. In Chapter II looked at the excavated at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The first verse took issue with the wooden solidarity.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e wooden documents standard form of Seongsan Fortress(城山山城). In section 3, we looked at the high volume of Guribeol(仇利伐). In section 4, we looked at 「◯城下」 of wooden tablets on tag attached to the luggage(荷札木簡) as a rather special example. Chapter III looked excavated at the moat of the Wolseong palace(月城垓字). The first verse confirmed that there were many joint points with Japanese wooden docunents to compare in korea wooden documents. In the second verse, we looked at three pieces of the Wolseong moat(月城垓字), which were released in 2017. The reasoning that the direct origin of Japan’s wooden documents of front writing ‘前’(前白木簡) was found in the ancient korea has already been raised, but is appearing in a clearer form. 본고는 일본의 7세기 목간을 여러 차례 살펴본 경험을 토대로 한국의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에 대해 약간의 문제 제기를 시도해 본 글이다. Ⅱ장에서는 성산산성 출토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목간의 연대를 문제 삼았다. 이제까지 신라 外位의 표기 등을 주된 근거로 삼아 성산산성 목간의 연대를 6세기 중엽으로 보는 견해가 일반적이었다. 그러나 목간의 표기에는 정도의 폭이 있다는 것을 구체적인 사례를 들어 지적했다. 최근 출토된 「壬午年」 목간은 592년으로 보는 것이 타당하기 때문에 다른 목간의 연대도 6세기 말로 보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2절에서는 성산산성 荷札의 서식을 살펴보았는데, 「地名+人名+物品名」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다양한 형식이 존재함을 확인했다. 일본의 사례를 참고하면 이러한 서식은 오래 전부터 사용된 특징이 아닐까 생각된다. 3절에서는 수량이 많은 仇利伐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특히 「人名A+奴(人)+人名B+負」의 표기를 중심으로 고찰했다. 「奴(人)」는 從者 정도의 의미로 이해해야 한다. 천민 신분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다. 또 「負」는 「荷物」을 의미하는 명사가 아니라 「負担하다」의 의미를 지닌 동사라고 생각된다. 이것과 관련해 「発」도 「発送하다」의 의미인 동사로 보인다. 4절에서는 조금 특수한 사례로서 「◯城下」의 荷札木簡을 살펴보았다. 이러한 타입은 「◯城下」의 真下에서 물품명이 기재되었다는 점이 특이하고, 품목과 麦·米로 少数派인 것을 확인했다. 또 「◯城下」가 州·郡 중 어디인지를 생각했을 때, 郡에 가깝다고 결론 내렸다. Ⅲ장에서는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을 살펴보았다. 1절에서는 「大烏知郎」으로 시작되는 4면 묵서 목간을 살펴보면서 일본의 前白木簡과의 공동점이 많다고 소개하였다. 그 후 중국 漢簡과의 비교를 시도한 김병준의 견해에 대해서도 약간의 의견을 덧붙였다. 2절에서는 2017년에 공개된 월성 해자 출토 前白木簡 3점을 살펴보았다. 여기서는 그 서식에 주목하면서 검토를 진행했다. 지금까지 알려진 한국의 前白木簡과 달리 3점 모두 날짜가 적혀 있지 않으며, 2점은 첫머리에 행선지(상신처)가 기록되어 있다는 점을 지적했다. 그것들은 일본에서 출토된 대부분의 前白木簡과 공통된다. 또 이 3점을 포함해 한국의 前白木簡을 살펴보면 행선지가 地位·尊称·官職으로 기록되는 것, 差出이 생략되는 경우가 있다는 것은 일본과도 공통되는 부분이다. 일본의 前白木簡의 직접적인 기원이 조선반도에 있었다고 하는 추론은 이미 제기되었지만, 보다 명료한 형태로 나타나고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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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도2호선 발굴 목간의 판독과 분류

        임경희(Lim Kyoung-hee) 한국목간학회 2010 목간과 문자 Vol.6 No.-

        2010년 충청남도 태안군 근흥면 마도 인근해역에서 고려시대 침몰선 마도2호선이 발굴되었는데, 화물의 운송표로 쓰인 목간이 다량 나왔다. 마도2호선 목간은 총 58점인데 이 중 17점에 대한 판독과 형태 · 내용별로 분류하고, 목간 내용을 통해 마도2호선의 편년과 화물의 성격을 고찰하였다. 마도2호선 목간 형태는 크게 홈의 유무에 따라 분류할 수 있는데, 홈이 목간의 윗부분에 있는 것이 대부분인데, 홈의 위치가 중간 또는 아랫부분에 있는 것도 있다. 끈을 묶기 위해 판 홈이기 때문에 위치가 그다지 중요하지는 않았다. 특이한 것은 홈은 없고 끝이 뾰족하게 다듬어져 있는 목간인데 볏섬 등에 꽂아서 사용한 것으로 보인다. 마도2호선 목간 내용은 ① 수취인 ② 발송지(발송자) ③ 화물종류와 수량 ④ 포장단위로 이루어져 있는데, 목간에 따라 적힌 것이 다르지만 운송관계에서 가장 중요한 수신자와 화물종류와 수량 등은 특수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모두 적혀 있다. 수신자는 개경에 있는 관직자다. 大卿 庾, 奇 牽龍, □郎中, 別將 (鄭)元卿, 校尉 黃(仁俊), 重房 都 將校 吳文富 등 實職을 지닌 사람이 대부분이다. 이외에도 別將同正 尹□珍 등 散職을 지닌 사람도 있다. 발송지는 현재까지는 茂松縣만 확인 가능하다. 발신자는 次知 또는 使者라고 적혀 있는데 姓이 적혀 있지 않고 이름만 적힌 점, 宅上이라는 용어가 나타난 것으로 보아 수취인보다는 하위 계층으로, 수취인이 개인적으로 부리는 사람으로 추정했다. 화물은 太, 白米, 中米, 米 등의 곡물류가 주류를 이루고 있으며, 이외에도 精蜜과 卵?가 있다. 곡물류는 ‘○石入○斗’로 액체류인 卵?는 마도1호선 목간과 마찬가지로 ‘○缸(各)入○斗’로 수량과 포장 단위를 적어 정확성을 기했다. 다음으로 ‘李克?’가 적힌 목간을 중심으로 마도2호선에 대한 편년을 시도했다. 李克?는 高宗代 추밀원부사와 평장사를 지낸 인물이다. 그의 활동시기를 전후하여 무송현, 장사현, 고부군과 연관성이 높고, 大卿이라는 벼슬을 지낸 마도2호선 목간의 大卿庾가 庾資諒임을 밝혔다. 또한 庾資諒의 관력과 致 仕시기, 함께 발굴한 도자기를 살펴보면 마도2호선은 1208년의 마도1호선과 거의 비슷하거나 약간 앞선 시기다. 마지막으로 마도2호선에 실린 대부분의 화물인 田出 곡식은 수취인이 다양하고, 발송자가 개인으로 나타나는 점, 次知와 使者라는 용어를 통해 地代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또한 매병에 담긴 꿀은 최고 권력기관인 중방에 소속된 오문부에게 사적인 선물(또는 뇌물)로 보낸 것이라고 생각한다. A mass number of wooden tablets inscribed with records of shipments on board were excavated from wreckage of a vessel identified as Mado II off the coast of Mado Island, Geunhung-myeon, Taean-gun, South Chungcheon Province, in 2010. This paper deciphered and categorized 17 of a total of 58 tablets by shape and contents before identifying the chronicles of the Mado II and the nature of goods onboard. Existence of a groove on the surface of the tablets can be used to classify the tablets by their shape. The groove exists on most tablets, and some tablets were discovered for the first time to have the grooves on the middle or bottom part of the tablets. However, the exact location of the groove was not considered significant since the purpose of the groove was simply to fasten strings. Notable fact was the discovery of tablets without a groove and whose tips were sharpened that are presumed to have been used pinned into rice sacks. As for content, the tablets included information of i) recipient, ii) origin of shipment (sender), ii) types and quantities of goods, and iv) package unit. Although the descriptions varied from tablet to tablet, all tablets were inscribed with critical shipment information including the identity of the re-cipient and type and quantity of goods excluding a few exceptions. The tablets were addressed to government officials located in Gae-kyung, then capital, most of whom were authenticated to have served actual administrative positions based on descriptions of Daekyung Yu, Ki Gunryong(Royal Guard), Byuljang(Middle-ranking Military Nobleman) (Jung) Wonkyung, Kyowi(Low-ranking Military Nobleman) Hwang (Injun), and Jungbang(Highest Military Executive Council) Dojangkyo(Low-ranking Military Nobleman) Munbu Oh. There were also a few recipients who were non-active officials such as Byuljang Dongjung Yoon □Jin. As for the origin of the shipments, Musong-hyun is the only geographical location identified to date. Considering that senders were identified only by their first names accompanied by titles as Chaji (butler) or Saja (mes-senger) without family names and the use of expression, ‘offered to the honorable[宅上] Mr. X’, it is presumed that the senders were of a lower class in servitude of the recipients. Goods onboard were mostly grains including beans, polished rice, half-polished rice, and unpolished rice, but there were also fine quality honey and salted fish roe. Tablets were recorded with detailed quantity and package units for accuracy as in X number of suk(石) and X number of du.(斗) Salted roe that were considered liquid in nature were marked as X units of hang(缸) and X units of du like the tablets excavated from Mado I. In addition, this paper attempted to chronicle the history of the Mado II using the wooden tablets that included the identity of Geukseo Lee who served as a high-ranking official for Chumilwon (an executive council) and as Pyeongjangsa for King Go-Jong. Based on his service years and relevance to areas of Musong-hyun, Jangsa-hyun, and Gobun-gun, the identity of the person who served as Daekyung and only referred as Yu was determined to be Jaryang Yu. The records of service years of both Yu and Lee as well as potteries excavated from the wreckage are considered sufficient evidence that puts the timeline of the Mado II roughly at the same time or slightly prior to the Mado I. Lastly, it was also concluded that grains shipped onboard the Mado II were rent payment based on the fact that they were addressed to different recipients, the senders are clearly identified, and the terms such as Chaji and Saja were used. Honey stored in Meiping is deemed to have been sent as personal gift (or bribe) to Munbu Oh of Jungbang, the highest military executive council.

      • KCI등재

        울산 반구동 유적 출토 목간

        김현철(Kim Hyun Chuel) 한국목간학회 2009 목간과 문자 Vol.4 No.-

        이 글은 울산 반구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 자료를 소개할 목적으로 작성하였다. 목간이 출토된 울산 반구동 유적은 2007년 아파트신축현장에 대한 구제 발굴조사를 통해 항구의 배후시설과 울산의 중심지 역할을 한 유적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발굴조사에서는 통일신라시대의 목책시설과 목조우물, 고려시대 토성, 조선시대 溝 등의 유구와 연화문수막새, 중국제자기, 목간 등의 유물이 출토되었다. 목간은 통일신라시대~고려시대에 속하는 성격이 불분명한 수혈유구에서 출토되었다. 목간은 소나무를 이용하며 윗부분이 뽀족한 圭頭形으로 만들었다. 묵서는 앞 뒷면에 있는데 앞면 16字, 뒷면 16字로 총 32字이다. 묵서의 내용은 명확하지는 않지만 누구에게 물품을 어떻게 보낸다는 뜻으로 이해된다. 목간의 용도는 묵서의 내 용과 형태로 볼 때 물품의 荷札로 추정되며, 목간의 제작시기는 출토 유구의 시기와 묵서의 특징을 통해 고려시대로 보았다. 목간자료는 반구동 유적에서 출토된 수많은 유물 가운데 하나이지만 구체적인 사실을 알 수 있는 명문자료라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또한 통일신라시대에 비해 그 위상이 작아졌다고 할 수 있는 고려시대의 반구동 유적을 이해하는 데도 중요한 자료이다. 이 글을 통해 반구동 유적에서 출토된 목간의 정확한 판독과 목간의 성격에 대한 연구가 이어지길 기대한다. The purpose of this report is the presentation of wooden tablets which were excavated from the Bangu-dong Archeological Site, Ulsan. The Bangu-dong Archeological Site where excavated the wooden tablets, at a new construction field of apartment in 2007, became known for background of port and the center of Ulsan. In digging investigation excavated relics and artifacts, a wooden barricade and a wooden well of the Unified Silla, a earthen ramparts of Koryo period, a ditch of Joseon period, Roof-end tile with lotus design, earthenware, Chinaware, wooden tablets and so forth. The wooden tablets from the Unified Silla to Koryo period were excavated from uncertain pit remain. The species of trees of the wooden tablets are pine trees and the part of upper made a pointed. The black writing has the front on 16 letters and the back on 16 letters. The letters total 32 letters. The contents of the black writing isn't clear but consider that the object was sent by someone. According to content and shape of the black writing, a use of wooden tablets consider Wooden tablets for name list of supplies and a work period of wooden tablets estimated Koryo period judging from the period of pit remain and black writing. The data of wooden tablets is one of the many remains and relics that excavated from the Bangu-dong Archeological Site. It is the data of excellent composition that is for us to know the concrete fact. Also, the position is lower than the Unified Silla. But it is important to understand the data of the Bangu-dong Archeological Site of Koryo period. It is expected to continue on the study about the exact decipherment and the character of the excavated wooden table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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