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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철학 : 남명 조식의 현실적 사회개혁론 -敬(경),義(의)를 중심으로

        ( Mi Rim Lee ) 한국철학사연구회 2013 한국 철학논집 Vol.0 No.39

        남명의 敬·義철학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먼저 실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유학에서 지향하는 자신에서부터 출발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상통한다.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 또한 스스로를 먼저 바로 보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수양은 곧 사회 전체의 수양, 사회의 개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맥락이 전제되는 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修身’에서 출발해 ‘平天下’로 가는 길, ‘修己’이후에 ‘安人’이 되고, ‘克己’이후에 ‘復禮’가 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개인과 사회를 분별하지 않고, 개개인의 모습이 모여 사회가 이루어지고, 개인이 바로 설 수 있을 때 사회도 바로 설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사회체계의 원리는 상호적, 또는 층차적 분화와 통합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를 개인 혹은 국가와 대립시키지 않으며, 같이 이루어나가는 도덕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명에 있어서 敬·義철학이 가지는 실천성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실천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천성이 남명의 敬·義철학에서 ``行義``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行義’는 후에 그의 문도들이 국가적 위기에 보인 행동으로 입증된다. 이 점에서 그는 퇴계나 율곡과는 다른 또 하나의 조선조 성리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行義의 사회적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느 성리학자나 실천성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명은 특히 현실의 당면 문제에 구체적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관념적, 내면 지향적 사유가 갖는 기만성을 경고한다. 결과적으로 남명의 敬義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수양과 단련은 사회·역사적 장과 상관없는 진공상태에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세적 공효 내지는 사회적 실천의 맥락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남명의 敬義의 실천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 개혁론’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Philosophy of respect·righteousness advocated by Nammyung points to what first needs to be done to drive social changes. It is consistent with the Confucianism, which views the world from within oneself. After all, developing a proper view of the society starts from looking at oneself in the right perspective. The view that personal cultivation can develop into cultivation and eventually reform of the entire society is also present in Confucius` belief that one can only be at peace after disciplining oneself and observe good manners only after perseverance. Also, one can lead the world in peace only after disciplining one`s body and mind. In other words, it suggests that individuals and the community where they belong to are not independent from one another. Rather, individuals gather to create a society and righteous individuals are the basis for righteous society. These principles of social system in Confucianism can be understood as a mutual or layered division and integration. The society is not conflicted with individuals or the nation but rather perceived as moral communities to co-exist. Hence, power of execution observed in the philosophy of respect and righteousness by Nammyung is identical to power of execution applied to the society. The power of execution shows up as ‘the execution of righteousness’ in Nammyung`s philosophy of respect and righteousness. It is also demonstrated in the acts by Nammyung`s disciples when the nation was at crisis. This is what differentiates Nammyung`s new-Confucianism in Joseon Dynasty from Toegye or Yulgok as he tried to deliver ‘the execution of righteousness.’ It does not mean that neo-Confucian scholars did not emphasize the importance of execution, but Nammyung, in particular, warned how deceitful ideological or inner-directed thinking can be since they fail to come up with concrete solutions to social issues. In summary, Nammyung`s moral discipline and training based on respect and righteousness cannot be evaluated in a state of vacuum separate from social and historical aspects but under the context of enlightening virtue and social execution. This can draw the conclusion that Nammyung`s execution of respect and righteousness is in the starting point of the realistic ‘theory of social reform’ for creating a better worl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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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명 조식의 현실적 사회개혁론— 敬⋅義를 중심으로 —

        이미림 한국철학사연구회 2013 한국 철학논집 Vol.0 No.39

        남명의 敬⋅義철학은 사회의 변화를 이끌어 가는데 가장 먼저 실행되어야 할 것이 무엇인지 제시해 주고 있다. 이러한 점들은 유학에서 지향하는 자신에서부터 출발하여 세계를 바라보는 관점과 상통한다. 사회의 현실을 제대로 직시하는 것 또한 스스로를 먼저 바로 보는 것에서 출발하기 때문이다. 개인의 수양은 곧 사회 전체의 수양, 사회의 개혁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는 맥락이 전제되는 것은, 유학에서 말하는 ‘修身’에서 출발해 ‘平天下’로 가는 길, ‘修己’이후에 ‘安人’이 되고, ‘克己’이후에 ‘復禮’가 된다는 사실에서 알 수 있다. 개인과 사회를 분별하지 않고, 개개인의 모습이 모여 사회가 이루어지고, 개인이 바로 설 수 있을 때 사회도 바로 설 수 있음을 제시한 것이다. 이러한 유학의 사회체계의 원리는 상호적, 또는 층차적 분화와 통합의 원리로 이해할 수 있다. 사회를 개인 혹은 국가와 대립시키지 않으며, 같이 이루어나가는 도덕 공동체로 인식하는 것이다. 따라서 남명에 있어서 敬⋅義철학이 가지는 실천성은 그것이 적용되는 사회의 실천성으로 이해될 수 있을 것이다. 이러한 실천성이 남명의 敬⋅義철학에서 '行義'의 개념으로 나타난다. ‘行義’는 후에 그의 문도들이 국가적 위기에 보인 행동으로 입증된다. 이 점에서 그는 퇴계나 율곡과는 다른 또 하나의 조선조 성리학의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다. 이러한 점은 行義의 사회적 구현이라는 측면에서 이해될 수 있다. 어느 성리학자나 실천성을 강조하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남명은 특히 현실의 당면 문제에 구체적 대책을 제시하지 못하는 관념적, 내면 지향적 사유가 갖는 기만성을 경고한다. 결과적으로 남명의 敬義를 바탕으로 한 도덕적 수양과 단련은 사회 ․ 역사적 장과 상관없는 진공상태에서 평가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경세적 공효 내지는 사회적 실천의 맥락에서만 평가될 수 있다고 보는 것임을 알 수 있다. 이것은 남명의 敬義의 실천이 지금보다 더 나은 사회를 구현하고자 하는 지극히 현실적인 ‘사회 개혁론’의 출발점에 서 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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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靖山 宋鎬坤의 남명학파적 성향 一考

        구진성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20 남명학연구 Vol.66 No.-

        This article was written with the intention of extracting Nammyeonghakpa[南冥學派]'s elements from Jeongsan[靖山] Song, Ho-Gon[宋鎬坤]'s life. This shows how Nammyeonghak[南冥學] was accepted during the Japanese Colonial Period. Song, Ho-Gon's family had a close relationship since the early days when Nammyeong Jo, Sik[南冥曺植] moved to Samga, also made a certain contribution to the creation of 「Yokcheon[浴川]」 in which the core of the Jo, Sik's thought was embodied in strong expression. Moreover, through the fact that 「Shinmyeongsado[神明舍圖]」 the essence of Jo, Sik's thought, was completed during this period, the characters of Song, Ho-Gon's family were able to experience the peak of Nammyeonghak closely, and this intense experience seems to have influenced Song, Ho-Gon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Song, Ho-Gon recognized the phrase expressed in 「Shinmyeongsado」's "The king must die in his own country[國君死社稷]" as the core of Nammyeonghak. It was the academic attitude of risking one's life for the right thing. And he borrow the rhyme of Jo, Sik's 「Yokcheon」, and the poem described the most academic figure as Jo, Sik. He never recognized the Japanese colonial era system. As a Confucian scholar, he regarded 'Don[遯]' as the creed of living in that era. This was a concept including Jo, Sik's 'Daechuk[大畜]'. He paid keen attention to current affairs, and thought the confrontation between the factions should be overcome. Because he believed that the country could stand upright through it. 이 글은 정산 송호곤(1865-1929)의 생애에서 남명학파적인 요소를 추출하여, 일제강점기 하에서 남명학이 어떠한 양상으로 수용되었는지를 일별하고자 하는 의도에서 작성되었다. 송호곤의 가계는 조식이 삼가로 이주한 초기부터 밀접한 관계를 맺고 있었으며, 조식 수양론의 핵심이 극렬한 언어로 형상화된 「욕천」의 창작에도 일정한 기여를 하였다. 게다가 조식 사상의 정수라 할 수 있는 「신명사도」가 이 시기에 완성된 사실을 통해, 송호곤 가계의 인물들은 남명학의 최고조를 가까이서 선명하게 체험할 수 있었고, 이러한 강렬한 경험이 대를 이어 송호곤에게 영향을 미쳤던 것으로 보인다. 송호곤은 「신명사도」의 ‘國君死社稷’이라는 언표에서 드러나는 목숨을 건 수양의 자세가 남명학의 본질이라고 보았고, 「욕천」을 차운하면서 그러한 수양의 극치를 이룬 인물이 두류산과 같은 조식이라고 형상화하였다. 조식 학문의 핵심이 비타협적 수양론이라고 인식한 송호곤은, 일제의 제도를 일체 인정하지 않고 自靖의 길을 택하였다. 구체적으로는 遯의 지향을 지녔는데, 이는 조식의 大畜을 포함한 개념이었다. 그러면서도 시사에 깊이 관심을 기울이며 유학이 쇄신되기를 희망했는데, 당파에 의해 올바르고 공정한 판단을 내릴 수 없었던 조선의 역사를 비판하면서, 당파의 극복을 모든 문제 해결의 전제로 인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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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활동과 그 지향에 대한 일고찰 -17세기 초반의 德川書院ㆍ新山書院과 비교하여-

        구진성 경상국립대학교 경남문화연구원 2013 남명학연구 Vol.39 No.-

        This article focused on Yongam-Seowon[龍巖書院]’ operating leaders action and their direction. Especially, it is mainly discussed what they were kept of scholarship, immediately after Injo-Coup[仁祖反正]. It was memorial that about Nammyung Jo,Sik[南冥 曺植]’ scholarship, in Yongam-Seowon. In 1609, Yongam-Seowon was authorized by government. In the same year, Deokcheon-Seowon[德川書院], Sinsan-Seowon[新山書院] were authorized, too. These three Seowon were memorial place about Nammyung Jo,Sik. In operation policy discussions, their academic features appear. In Yongam-Seowon, Jeong,In-hong[鄭仁弘]’ impact is huge, from the beginning. Jeong,In-hong is excellent student in Jo,Sik school, and in academic attitude, he is most looked like his teacher. Jeong,In-hong, Lee,Heul[李屹], Jeong,On[鄭蘊], Im,Jin-bu[林眞怤], Pak,In[朴絪] were responsible for operating Yongam-Seowon. They kept up about Jo,Sik memorial activity. Around 1635, Deokcheon-Seowon and Sinsan-Seowon operating leaders were discussed who is addendum memorial scholar in their Seo-won. Yongam-Seowon leaders insisted that the most admirable scholar is there in. Because it is one way to respect Jo,Sik. In this discussion, we may know that their three Seowon’ insistences were different from each other. 이 글에서는 陜川 三嘉에 있었던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성격과 활동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지향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다. 또한 1609년에 공히 사액되었던 德川書院ㆍ新山書院 등 타 남명 제향 서원의 경우와 비교해 봄으로써,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특징을 좀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용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경 재건되었는데, 이때 관여한 인물 다수가 鄭仁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암서원의 원장ㆍ원임을 맡은 인물로는 정인홍, 文景虎, 李屹, 鄭蘊, 林眞怤, 朴絪 등이 있는데, 정온ㆍ임진부ㆍ박인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용암서원 내에서 남명 선양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덕천ㆍ신산서원의 추가 배양 논의에서도 남명 위상의 제고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임진부는 용암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남명 정신을 강조했고, 박인은 남명 관련 기록물의 정리ㆍ편집을 맡았는데, 이 일들을 정온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였다. 정온은 趙任道에게 신산서원 원장을 맡길 만큼 용암서원ㆍ신산서원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조임도는 용암서원 측의 입장을 참고하며 신산서원 내의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덕천서원에서는 1635년 무렵 覺齋 河沆을 배향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 사액서원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배향을 강행하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온 등 용암서원 운영주체 측에서는 사액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하항 외에 鄭逑 등 남명 高弟를 함께 배향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추락해가는 남명의 위상을 제고할 방법을 모색한 것인데, 정구에게서 남명의 영향을 지우려는 집단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인홍이 생전에 추구했던 남명 선양 정신의 잔존이라 할만하다. 신산서원에서 金宇顒만을 제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들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은 정구도 함께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덕천서원ㆍ신산서원에서는 서원 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논의하고 충돌함으로써, 반정 이후 바뀐 환경에서 적응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면, 용암서원은 변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인홍 계열의 영향력이 컸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인홍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학의 학습과 교육, 정리와 출판 사업 등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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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龍巖書院(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활동과 그 지향에 대한 일고찰 -17세기 초반의 德川書院(덕천서원)ㆍ新山書院(신산서원)과 비교하여-

        ( Jin Seong Gu )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13 남명학연구 Vol.39 No.-

        이 글에서는 陜川 三嘉에 있었던 龍巖書院 운영주체들의 성격과 활동을 고찰하였는데, 특히 인조반정 이후 그들이 보여주었던 학문적 지향에 관해 주로 논의하였다. 또한 1609년에 공히 사액되었던 德川書院ㆍ新山書院 등 타 남명 제향 서원의 경우와 비교해 봄으로써,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의 특징을 좀더 부각시키고자 하였다. 용암서원은 임진왜란 때 소실된 뒤, 1601년경 재건되었는데, 이때 관여한 인물 다수가 鄭仁弘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것으로 판단된다. 용암서원의 원장ㆍ원임을 맡은 인물로는 정인홍, 文景虎, 李屹, 鄭蘊, 林眞付, 朴絪 등이 있는데, 정온ㆍ임진부ㆍ박인은 인조반정 이후에도 용암서원 내에서 남명 선양 사업을 활발히 진행하였고, 덕천ㆍ신산서원의 추가 배양 논의에서도 남명 위상의 제고를 위한 방법을 제시하였다. 임진부는 용암서원에서의 강학을 통해 남명 정신을 강조했고, 박인은 남명 관련 기록물의 정리ㆍ편집을 맡았는데, 이 일들을 정온의 자문을 받아 진행하였다. 정온은 趙任道에게 신산서원 원장을 맡길 만큼 용암서원ㆍ신산서원 내에서 영향력이 있었고, 조임도는 용암서원 측의 입장을 참고하며 신산서원 내의 일을 처리한 것으로 보인다. 한편 덕천서원에서는 1635년 무렵 覺齋 河沆을 배향하려는 논의가 있었다. 여기서 사액서원의 지위를 포기하면서까지 배향을 강행하려는 의견도 있었지만, 정온 등 용암서원 운영주체 측에서는 사액의 지위를 인정해야 한다는 의견을 피력함과 동시에 하항 외에 鄭逑 등 남명 高弟를 함께 배향해야 타당하다고 주장하였다. 이는 인조반정 이후 추락해가는 남명의 위상을 제고할 방법을 모색한 것인데, 정구에게서 남명의 영향을 지우려는 집단의 반대로 결국 실현되지 못한 것으로 보이지만 정인홍이 생전에 추구했던 남명 선양 정신의 잔존이라 할만하다. 신산서원에서 金宇옹만을 제향하려는 움직임에 대해서도 이들 용암서원 운영주체들은 정구도 함께 배향할 것을 주장하였다. 인조반정 이후 덕천서원ㆍ신산서원에서는 서원 내 서로 다른 성향을 가진 집단끼리 논의하고 충돌함으로써, 반정 이후 바뀐 환경에서 적응할 방법을 모색해 나갔다면, 용암서원은 변신이 불가능할 정도로 정인홍 계열의 영향력이 컸던 곳으로 판단되지만, 이러한 점 때문에 인조반정 이후에도 한동안은 정인홍의 정신을 계승하여 남명학의 학습과 교육, 정리와 출판 사업 등이 추진될 수 있었던 것이다. This article focused on Yongam-Seowon[龍巖書院]’ operating leaders action and their direction. Especially, it is mainly discussed what they were kept of scholarship, immediately after Injo-Coup[仁祖反正]. It was memorial that about Nammyung Jo,Sik[南冥 曺植]’ scholarship, in Yongam-Seowon. In 1609, Yongam-Seowon was authorized by government. In the same year, Deokcheon-Seowon[德川書院], Sinsan-Seowon[新山書院] were authorized, too. These three Seowon were memorial place about Nammyung Jo,Sik. In operation policy discussions, their academic features appear. In Yongam-Seowon, Jeong,In-hong[鄭仁弘]’ impact is huge, from the beginning. Jeong,In-hong is excellent student in Jo,Sik school, and in academic attitude, he is most looked like his teacher. Jeong,In-hong, Lee,Heul[李屹], Jeong,On[鄭蘊], Im,Jin-bu[林眞付], Pak,In[朴絪] were responsible for operating Yongam-Seowon. They kept up about Jo,Sik memorial activity. Around 1635, Deokcheon-Seowon and Sinsan-Seowon operating leaders were discussed who is addendum memorial scholar in their Seo-won. Yongam-Seowon leaders insisted that the most admirable scholar is there in. Because it is one way to respect Jo,Sik. In this discussion, we may know that their three Seowon’ insistences were different from each 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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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본(日本) 존경각(尊經閣) 소장(所藏) 『양휴당집(養休堂集)』의 판본 고찰

        全丙哲 ( Jeon Byung-chol ) 온지학회 2019 溫知論叢 Vol.0 No.61

        이 논문은 일차적으로 그동안 실전된 것으로 알려진 『養休堂集』이 日本의 尊經閣에 보존되어 있다는 사실을 학계에 보고하기 위해 작성된 것이다. 그리고 더 나아가 『양휴당집』의 체제와 구성내용이 중간본인 『玉溪集』과 어떠한 차이가 있는지를 밝혀 판본적 의미를 구명하는 데에 목적이 있다. 『양휴당집』 3권과 『옥계집』 원집 5권을 대조해본 결과, 중간본을 간행할때 초간본에서 삭제한 내용은 寄金都事書라는 편지 1통 뿐이다. 그리고 詩32수, 賦3편, 表1편, 祭文18편, 墓誌銘1편, 墓碣記1편, 疏1편, 啓2편, 書1통이 새롭게 증보되었다. 이처럼 『양휴당집』은 『옥계집』에 비해 寄金都事書라는 편지 1통이 더 수록되어 있을 뿐, 작품의 수량이나 내용의 측면에 있어서는 중간본보다 새롭게 확인할 수 있는 사항이 없는 것으로 판단된다. 하지만 이러한 미묘한 차이에도 불구하고, 몇 가지 중요한 의미를 정리해보자면 다음과 같다. 첫째, 초간본과 중간본을 편찬한 사람들 간의 학통 의식에 변화가 있었다. 초간본인 『양휴당집』은 1585년에 간행되었으므로, 남명학파의 위상이 퇴계학파에 뒤지지 않았다. 그런데 중간본인 『옥계집』은 1623년 인조반정으로 인해 남명학파가 정치적으로 몰락한 이후인 1632년에 중간되었으므로, 퇴계를 높이고 남명을 낮추려는 의도에서 만사의 제목을 수정한 것이다. 둘째, 현재 한국고전번역원에 DB화 되어 있는 『옥계집』 원문에는 상당 부분 빈칸으로 표시되어 있다. 『옥계집』의 원본 자체가 마모되어 판독할 수 없는 글자들을 빈칸으로 표시한 것이다. 그러나 『양휴당집』에는 판독할 수 없는 글자가 없으므로, 여기에 근거해 『옥계집』의 원문을 보완할 수 있다. 셋째, 『양휴당집』의 글씨체는 『남명집』 초간본과 매우 유사하다. 『남명집』 초간본의 경우, 許從善(1563-1642)이 글씨를 썼다. 두 문집의 글씨체를 대조하는 작업을 통해 남명학파 학자들의 문집 판본에 대한 연구를 심화시켜야 할 것이다. 넷째, 『양휴당집』에는 판목을 새긴 刻手를 표시하는 글자나 문양으로 판단되는 것들이 있다. 이 글자와 문양에 대한 고찰을 진행하여 조선 중기에 활동한 각수들에 대한 연구를 확대할 필요가 있다. This thesis was written to report to the academic world that Yanghyudangjip, which was previously known to be in existence, has been preserved at Jongyeonggak in Japan. Further, it aims to bring light to the significance of its text by revealing the differences between the structure and organizational content of Yanghyudangjip and Okgyejip, which is the revised edition. Comparisons of the 3 Yanghyudangjip books and the 5 Okgyejip books showed that when the revised edition was published, the only deleted content from the first edition was a letter called the Gigimdosaseo(寄金都事書). Also, 32 poems, 3 poetic writings (賦), 1 table, 18 funeral orations, 1 epitaph, 1 letter to the king (疏), 2 government letters to the king (啓), and 1 book were supplemented. Like this, Yanghyudangjip only had an additional letter included compared to Okgyejip and in volume or content, there was nothing new compared to the revised edition. However, despite these subtle differences, a few important meanings exist and they can be organized as follows. First, there were changes in the scholastic mantles of the people who compiled the first edition and the revised edition. The first edition was published in 1585 when the status of the Nammyeong school was comparable to that of the Taegae school. However, as the revised edition of Okgyejip was published in 1632, after the Nammyeong school had politically fallen due to the enthronement of InJo in 1623, the titles of everything were edited to raise the status of the Taegae school and lower that of the Nammyeong school. Second, there is a considerable number of blank spaces in the original text of Okgyejip, which is currently databased at the Institute for the Translation of Korean Classics. The original copy of the Okgyejip was worn so texts that could not be read were marked as blank spaces. However, as there are no texts in Yanghyudangjip that cannot be read, the original text of Okgyejip can be supplemented based on it. Third, the writing style of Yanghyudangjip is very similar to the first edition of the Nammyeongjip. The first edition of the Nammyeongjip used the writing of Heojongseon. More in-depth research on the collected works of Nammyeong school scholars should be made through comparisons of the writings of the two collections. Fourth, the Yanghyudangjip includes things that are judged to be letters or patterns that mark the engravers that worked on the woodblocks. Examinations of these letters and patterns should be progressed with to expand research on engravers who were active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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