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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金縢」篇 “周公居東” 해석에 관한 一考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19 東洋哲學硏究 Vol.97 No.-

        ≪Shangshu‧Jinteng≫ belong to the present text. However, due to the style, it has received many suspicions of counterfeiting. There are various interpretations of scholars on "fubi弗辟", "judong居東" and "zuirenside罪人斯得" in ≪Jinteng≫. So it is not easy to come to a conclusion. This is also why it hinders the accurate understanding of ≪Jinteng≫. If we put together the interpretation and contents of "Chixiao鴟鴞", "Dongshan東山", "pofu破斧" related to ≪Jinteng≫, "Chixiao" and "Dongshan" were constructed when Zhougong’s "居東" and were not associated with "conquest". We can see that "pofu" with the word "east conquest東征" is a poet after the completion of the "conquest". Through the interpretation of the Book of Odes, we can see that "live in east居東" and "east conquest東征" are clearly distinguished. A clue to the specific place name of "live in east" appears in the Han dynasty literature, such as ≪Shiji≫ and ≪Lunheng≫. "Chu楚" is an error of "bin彬", "彬" is the same as "fen份", and "份" is "bin邠(豳)". It is not a coincidence that the poems "Chixiao", "Dongshan", and "Pofu" that are related to ≪Jinteng≫ belong to ≪binfeng豳風≫. In addition, "bin邠(豳)" land is also a historical place where Zhou's ancestors laid the foundations for the foundation. 『尙書』 「金縢」편은 今文尙書에 속하지만, 文體의 평이함 등으로 인해 古來로 부터 僞作의 의심을 많이 받아왔다. 「금등」의 “弗辟”, “居東”, “罪人斯得”에 관한 諸家의 訓釋은 매우 다양해서 정론을 정하기가 쉽지 않고, 「금등」의 정확한 이해를 저해하는 요인이 되어 왔다. 「금등」과 관련 있는 『詩經‧豳風』의 「鴟鴞」, 「東山」, 「破斧」의 주석과 내용을 종합해보면, 「치효」와 「東山」은 周公이 “居東”할 때 지은 것으로 “征伐”과는 구분되며, “東征”이라는 詩語가 출현한 「破斧」는 “東征”이 완료된 후의 詩라는 것을 알 수 있다. 「빈풍」의 주석을 통해서 “居東”과 “東征”은 확실히 별개의 사건임을 알 수 있다. “居東”의 특정 지명에 관해서도 洛邑, 奄 등의 다수의 설이 존재한다. 일부 漢代의 문헌에 보이는 “楚”는 “彬”의 誤寫로서 “彬”은 “份”과 通하고, “份”은 곧 “邠(豳)”이다. 「금등」과 관련 있는 詩인 「鴟鴞」, 「東山」, 「破斧」 등은 「豳風」에 속해 있는 것도 우연한 것이 아니다. 또한 「豳風」의 “邠(豳)”땅은 周의 先王이 基業을 닦은 유서 깊은 곳이다.

      • KCI등재

        奎章閣所藏 中國本 書類와 그 가치

        이은호 서울대학교 규장각한국학연구원 2016 한국문화 Vol.73 No.-

        Kyujanggak(奎章閣) of Jungjo(正祖) was the Royal Institution which led the learning of the day. The chinese version’s the kind of The Book of history(中國本 書類) which is housed in Kyujangkak is the material which helps to confirm Jungjo's awareness of Shangshu(尙書). One of the most remarkable list of books(書目) among the Kyujangkak's The chinese version’s the kind of The Book of history are as below. First, it's the study of Chinese classics which completely denied GuwenShangshu(古文尙書) or doubted GuwenShangshu which is similar as WangYingLin(王應麟)’s Guwenshangshumazhengzhu(古文尙書馬鄭注, 奎5306) and Yanruoju(閻若璩)’s Shangshuguwenshuzheng(尙書古文疏證, 奎4844). Second, it is writings which double as annotation of The han․Song Dynasty(漢․宋) such as Qianshi(錢時)’s Rongtangshujie(融堂書解, 奎4643), Renqiyun(任啓運)’s Shangshuyuezhu(尙書約注, 奎3316) and Jinlüxiang(金履祥)’s Shangshubiaozhu(尙書表注, 奎3317). Third, the shangshu of Gyeongyeon(經筵, lecture for king) such as, Yuanhuang(袁黃)’s Shujingqimengjiejingxuanzhu(書經啓蒙捷徑選註, 奎4817), Zhangnai(張鼐)’s Shujingyan(書經演, 奎5206) and Zhangjuzheng(張居正)’s Shujingzhijie(書經直解, 奎4710) etc. are the valuable materials which are high in scarcity. Especially it is considered that Yuanhuang(袁黃) and Zhangnai(張鼐)’s the writings are valuables which is hardly seen even in the China. It is understandable that Jungjo read not only annotation of Caishen(蔡沈) but also ancient annotation(古注) of The han․Song Dynasty variously and aimed to figure out understanding of multiple about Shangshu by writing of doubting GuwenShangshu. The understanding of Jungjo about Shangshu is proved in Sangseogangyi(尙書講義) which deals with discussion with Chogemunsin(抄啟文臣, Kyujangkak Scholar).

      • KCI등재

        심장수술에서 저체온 체외순환 후 발생한 허혈성 뇌손상시 BIS의 변화

        이은호,최재용,조선준,심지연,함경동,정용보,최인철 대한마취통증의학회 2007 Korean Journal of Anesthesiology Vol.52 No.6

        The bispectral index (BIS) has been developed as a measure for monitoring the hypnotic drug effect. EEG processing results in a BIS scale from 0 to 100, where 100 represents an awake and responsive patient, and the scale decreases when hypnotics are administered. Here we describe two patients in whom the BIS decreased to nearly 0 during cardiac surgery. Postoperatively both patients showed hypoxic brain injury. There are several possible causes for a decrease in the BIS during surgery, including deep anesthesia, hypothermia and cerebral ischemia. In the present cases, cerebral hypoperfusion was the likely cause. During cardiac surgery, hemodynamic changes such as acute hypotension and cardiac arrest can cause cerebral ischemia. Cerebral ischemia develops most commonly during cardiopulmonary bypass (CPB). Therefore, the BIS may be useful for detecting severe cerebral ischemia during CPB, although it has some limitations as a cerebral monitor.

      • KCI등재

        退溪의 『書釋義』에 관한 연구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10 東洋哲學硏究 Vol.64 No.-

        퇴계의 『經書釋義』는 조선의 성리학이 자리를 잡으면서, 道學的 이상이 좌절과 실패를 딛고 정치적으로나 학문적으로 자리를 잡아가던 16세기의 經學書이다. 그 내용은 성리학에서 중시하는 四書와 三經 가운데 난해한 부분을 뽑아 ‘釋義’한 것인데, 『五經淺見錄』에는 볼 수 없는 諺解가 등장하는 것이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이는 훈민정음 창제이후 꾸준하게 진행된 경전의 우리말화 과정과 연관이 있으며, 懸吐의 단계에서 完全諺解의 과도기적 형태로서 부분적인 諺解가 가미된 ‘釋義’의 형태로 나타난 것이다. 『經書釋義』 가운데 『書釋義』는 『書經』에 대한 해설서로서 총 633조목으로 構成되어있다. 『書釋義』도 『書集傳』의 내용을 바탕으로 모든 經文과 蔡註에 대하여 언급하지는 않았고, 퇴계 자신이 난해하다고 판단했거나, 諸家의 설이 나뉘는 구절이나 단어에 한정하여 자신의 견해를 피력한 것이다. 『書釋義』 편장의 차례는 『書集傳』의 순서와 동일하다. 본 논문에서는 『書釋義』 633조목 가운데, 『書集傳』의 蔡註의 해석과는 다른 입장을 보이는 퇴계의 견해에 대해서는 ‘독창성’이라 규정하고, 퇴계가 바라보는 독자적인 경학관에 주목해보았다. 退溪의 『書釋義』는 16세기에 이루어진 『書經』에 대한 經學書로서, 관본언해본이 나오기 전에 당시까지 유행하던 諸家의 說을 모두 모아 비교판단하여 경서해석의 기준을 마련하고, 경서언해의 기반을 닦은 것으로 평가할 수 있다. 따라서 이 땅에 성리학이 전해지고 朱子書를 읽기시작하면서부터 시도되었던 경서의 우리말화 과정이 결실을 맺는 과정에서 실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한다고 할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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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息山 李萬敷의 天道有敬說 硏究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08 東洋哲學硏究 Vol.56 No.-

        儒學에서 誠 · 敬은 이미 先秦시기 『中庸』과 『易傳』에서 그 철학적 가능성을 배태하고 있었고, 성리학에 이르러서는 수양론에 있어서 중요개념으로 떠오르게 된다. 특히 程子의 ‘主一無敵’이라는 敬에 대한 입론은 朱子에 이르러 인간이 內聖外王을 실현하는 가치개념으로 자리잡은 반면 誠은 天道를 설명하는 개념정도로 인식되고 만다. 조선의 경우, 息山이 살았던 시대에는 퇴계와 율곡을 중심으로 각각 敬 중심의 철학과 誠 중심의 철학 등으로 나뉘어져, 학파적으로나 정치적으로 심한 대립과 아울러 敬에 대한 올바른 인식조차 하지 못하는 지경에 이르게 된다. 그런 와중에 息山은 天道有敬說에서 天道와 人道가 제각각 따로 떨어져 존재하는 것이 아니며 아울러 誠과 敬 또한 서로 다른 것이 아닌 하나라는 주장을 펼친다. 더 나아가 올바른 敬의 면목을 알기위해서는 다시 程朱學 본연의 모습으로 되돌아가야 한다고 제안한다. 이러한 그의 주장은 당시의 혼란스럽고 분열된 시대상황과 결부하여 많은 시사점을 던져준다. 비록 그의 주장이 독창적이거나 정주학이나 퇴율의 성리학을 뛰어넘는 차원의 입론이 아니고 또한 龍頭蛇尾격의 마무리로 끝을 맺고 있지만 당시 조선의 사회가 程朱의 종지를 벗어나 공리사변으로 치닫고, 사회변화에 대응하지 못한 채 온갖 모순을 양산해내는 상황에 맞서 성리학 본연의 정신으로 되돌아가 반성의 기회로 삼자는 한 유학자의 성찰적 태도는 분명히 평가받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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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묵자(墨子)』의 『서(書)』 인용(引用)에 관한 연구(硏究)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11 東洋哲學硏究 Vol.67 No.-

        『書』는 "君擧必書"의 전통에 기인한 史官의 역사기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후 戰國시기 諸子百家의 쟁명을 통해 단순한 史書에서 철학적인 의의를 담은 이론서로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書』의 잔편들이 『묵자』를 비롯한 제가의 문헌 및 漢代의 전적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었다. 先秦이후, 유가에 의해 편집된 『상서』만이 그 적통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今文』과 『僞古文』 등의 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전래문헌을 대신하여 최신의 학문으로 부상하고 있는 출토유물의 등장으로 기존의 『尙書學』(혹은 書經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상서학』은 유가의 『상서』의 범위를 벗어나, 諸子書속의 書편과 漢代의 경학, 이후 위고문의 여러 주석 및 청대의 고증학의 성과를 아우르며, 오늘날 출토되는 지하유물까지도 그 영역을 확대해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本稿의 『묵자』의 『書』인용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단편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墨家는 儒家와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집단이었고, 그들의 방법론은 비록 상이했으나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이나 논리의 근거로써 이용한 聖王의 표상 등은 대동소이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書』의 인용은 儒家와 마찬가지로 墨家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논리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묵자』의 『書』인용은 모두 46차례에 이르며, 이를 현전 『尙書』와의 비교를 통해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현전하는 『묵자』53편 가운데 『書』의 인용은 권5 「七患」편에서 권37「非命」편에만 집중되어 있다. 둘째, 『묵자』의 『書』인용은 『위고문』의 저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셋째, 先秦逸『書』의 잔편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현전『尙書』의 절대성에 대하여 제고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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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荀子』의 『書』인용에 관한 연구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16 東洋哲學硏究 Vol.85 No.-

        Since KongZi(孔子) has appeared, Zhuzibaijia(諸子百家) has become the historical arena in the Qi(齊)and Lu(魯) area. They mainly carried on the reorganization and re-explanation of the ancient literature. Through their Yin(殷)Zhou(周) culture’s re-explanation, Zhuzibaijia(諸子百家) hoped to build stable political situation and realize the way to unify countries. Like MoZi(墨子) and MengZi(孟子), XunZi(荀子) also quoted ancient ≪The Shi詩≫ and ≪The Shu書≫ to prove his own viewpoint. He extremely approved the classics and the significant work which the emperor spreads down. ≪XunZi≫ quoted ≪The shu≫ 50 times, distributed evenly in entire. In ≪XunZi≫, the part of《The Shu》quotation has the vital significance as the XunZi’s annotation in ≪The Shu≫ in the Age of the Warring states (戰國時期). The JinwenShangshu(今文尙書) was especially quoted many times in ≪HongFan洪範≫, ≪KangGao康誥≫, ≪lüXing呂刑≫ and so on, about the punishment content. The most remarkable feature of quotation of ≪Shu≫ in ≪Xun Zi≫ is that there are a lot of ≪The Shu≫ which are particularly referred as ≪Zhuan傳≫, etc. This is a important point that we recognized to study the lost ancient ≪The Shu≫’s real features. Besides, ≪MoZi≫ which currently passes on ≪Shangshu尚書≫, KingTang(湯王) and KingWu(武王) is connected to the content to quote about the lost ≪Shu≫. On this Side, Xun Zi and Mozi’s ≪The Shu≫ quotation is very similar. 孔子이후 齊魯지역을 중심으로 諸子百家가 등장하였는데, 그들의 작업은 古代文獻의 整理와 再解釋이었다. 諸子들은 殷周文化의 再解釋을 통해 당시의 혼란한 政局을 수습하고 統一國家를 지향하고자 하였다. 荀子는 墨子․孟子와 마찬가지로 자신의 주장을 뒷받침하는 근거로써 上古의 『詩』, 『書』를 인용하였다. 荀子에게 있어 聖王이 전하는 經典이 담고 있는 의의는 동일하였다. 『荀子』의 『書』인용은 모두 50여차에 이르고, 全篇에 걸쳐 고르게 분포되어 있다. 『荀子』의 『書』인용은 전국시기 荀子가 “注釋”한 『書』로써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특히 今文 가운데 「洪範」, 「康誥」, 「呂刑」등 刑罰에 관한 내용이 많이 인용되고 있는 점은 荀子의 사상적 특징과 관련이 있다. 『荀子』에 보이는『書』인용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은 “傳曰”등 特稱된 書篇이 많다는 점이다. 이는 經學史에서 逸書의 면모를 확인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墨子』에도 현전 『尙書』篇 이외의 湯과 武王과 관련된 逸書들이 많이 인용된 특징이 있는데, 이런 면에서 荀子와 墨子의 『書』인용은 유사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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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墨子』의 「書」 引用에 관한 硏究

        이은호 동양철학연구회 2011 東洋哲學硏究 Vol.67 No.-

        『書』는 “君擧必書”의 전통에 기인한 史官의 역사기록에서 그 연원을 찾을 수 있다. 이후 戰國시기 諸子百家의 쟁명을 통해 단순한 史書에서 철학적인 의의를 담은 이론서로서 탈바꿈하게 되었다. 그러한 과정에서, 『書』의 잔편들이 『묵자』를 비롯한 제가의 문헌 및 漢代의 전적에 고스란히 남아있게 되었다. 先秦이후, 유가에 의해 편집된 『상서』만이 그 적통의 지위를 이어받게 되었고, 그런 와중에 『今文』과 『僞古文』 등의 정치적 투쟁의 역사를 겪으면서 오늘날에 이르게 된 것이다. 그런데 기존의 전래문헌을 대신하여 최신의 학문으로 부상하고 있는 출토유물의 등장으로 기존의 『尙書學』(혹은 書經學)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하게 되었다. 결국, 『상서학』은 유가의 『상서』의 범위를 벗어나, 諸子書 속의 書편과 漢代의 경학, 이후 위고문의 여러 주석 및 청대의 고증학의 성과를 아우르며, 오늘날 출토되는 지하유물까지도 그 영역을 확대해서 종합적으로 검토해야 하는 과제를 안게 되었다. 本稿의 『묵자』의 『書』인용은 이러한 문제제기에 대한 단편적인 시도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墨家는 儒家와 더불어 춘추전국시대를 대표하는 지식인 집단이었고, 그들의 방법론은 비록 상이했으나 그들이 추구했던 이상이나 논리의 근거로써 이용한 聖王의 표상 등은 대동소이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書』의 인용은 儒家와 마찬가지로 墨家에서도 양보할 수 없는 중요한 논리의 근원이었던 것이다. 『묵자』의 『書』인용은 모두 46차례에 이르며, 이를 현전 『尙書』와의 비교를 통해 분석하면 다음과 같은 특징을 도출할 수 있다. 첫째, 현전하는 『묵자』53편 가운데 『書』의 인용은 권5「七患」편에서 권37「非命」편에만 집중되어 있다. 둘째, 『묵자』의 『書』인용은 『위고문』의 저작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셋째, 先秦 逸『書』의 잔편을 확인할 수 있는 귀중한 문헌이라는 점이다. 이는 곧 현전『尙書』의 절대성에 대하여 제고할 수 있는 여지를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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