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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로마제국 쇠망사』의 준비과정

        서나래 한국교원대학교 대학원 2010 국내석사

        RANK : 247807

        18세기에는 여흥을 위하여 외국 여행을 한 영국인들이 큰 폭으로 증가하였다. 그리고 이미 많은 사람들이 여행을 하고 있다는 확신은 그랜드 투어의 사회적, 문화적 중요성에 대한 인식을 확대시켰다. 그랜드 투어는 사회적 엘리트라면 거쳐야 하는 통과 의례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당시 영국의 귀족과 상류 시민 계층 사람들은 매력적인 관광지였던 이탈리아로 떠났다. 로마에서 고대 로마의 유물을 볼 수 있고, 피렌체에서 르네상스 시대의 건축과 예술품을 감상할 수 있으며 영국과 비교한다면 이탈리아는 날씨도 온화하여 활동하기 좋았기 때문이다. 󰡔로마제국쇠망사󰡕를 집필한 영국의 역사가 에드워드 기번(1737-1794)은 이러한 유행에 발맞추어 그랜드 투어를 떠났다. 하지만 그는 귀족이나 상류 시민 계층 사람들이 추구한 방식을 그대로 좇아 이탈리아를 여행하지 않았다. 기번은 자신의 고유한 목적과 방법으로 이탈리아를 여행하였다. 이 논문은 에드워드 기번의 그랜드 투어를 좇아, 여행의 특징을 규명할 것이다. 제 2장에서는 기번의 성격, 가정환경 등 생애와 작품 그리고 그랜드 투어의 여정을 살필 것이다. 1764년 기번은 그의 친구 윌리엄 가이즈와 함께 그랜드 투어를 시작하여, 약 13개월 동안 투린, 밀라노, 제노바, 볼로냐, 피렌체, 로마, 나폴리, 베네치아 등을 여행하였다. 제 3장은 그의 그랜드 투어가 학습의 장이었다는 것에 주목한다. 이탈리아로 떠나기 1년 전부터 기번은 고대 이탈리아 지리를 분석하여 󰡔지리 모음집󰡕을 작성하였다. 󰡔지리 모음집󰡕은 고대 이탈리아의 안내서이자 기번 스스로의 연구를 체계화시키는 개요였다. 여행을 하는 동안 그는 여정뿐만 아니라 여행 중에 관찰한 고대 로마 유물과 예술품 등을 꼼꼼히 일기에 기록하였다. 그는 여행 중에 고대 로마 개선식에 관한 세 편의 연작 논문(「로마의 개선식에 관하여」, 「개선 경로에 관하여」, 「개선 행사와 개선 의식에 관하여」)을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는 로마에 머물면서 건축물, 미술품, 유물과 골동품을 관찰했고 이것을 정리하여 논평을 달았다. 제 4장에서는 그랜드 투어가 쇠망사를 위한 준비과정이었다고 주장한다. 기번은 그랜드 투어를 현장학습으로 여겼다. 이 과정에서 기번은 도서관, 박물관, 미술관, 유적 등을 답사하였고 이러한 경험은 그가 훗날 역사학자로 변모하는 기초가 되었다. 기번은 이탈리아를 여행하면서 로마 제국을 쇠망을 조망하는 역사서 󰡔로마제국쇠망사󰡕를 구상하게 되었다. 󰡔로마제국쇠망사󰡕는 로마 제국의 정치사를 다룬 작품이 아니라 경제, 지리, 문화, 건축, 예술, 과학 등 거의 모든 분야를 망라하여 종합한 대작이다. 그는 그랜드 투어에서 고대 로마라는 주제에 관련된 것들을 탐색하고 연구하여 훗날 󰡔로마제국쇠망사󰡕를 집필할 토대를 마련하였다. 그래서 그는 고대 로마의 유적과 유물을 관찰한 경험을 살려 󰡔로마제국쇠망사󰡕에서 로마 제국의 모습을 더욱 생생하게 표현할 수 있었다. 이렇듯 기번의 그랜드 투어는 기번이 장차 역사학자가 되도록 수련하는 과정이었고, 󰡔로마제국쇠망사󰡕를 위한 준비과정이라고 할 수 있다.

      • 로마에 대한 누가복음의 정치적 변증 연구

        남궁성열 한신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 중 누가복음과 관련된 정치적 변증에 대한 연구 논문으로 누가복음의 정치적 변증에 대해 콘첼만이 제시한 ‘예수 자신이 그의 공생애 기간 기존 정치 질서에 맞서지 않았기 때문에 그를 따르는 사람들도 이것과 비슷한 길을 따라야 하며 따라서 로마 질서에 알맞은 행동을 추구해야 한다.’를 중심으로 한 친로마적 변증에 대한 연구사와 카시디가 주장한 ‘예수가 로마에 의해 소란죄와 반란죄로 처형을 당하였다.’를 중심으로 한 반로마적 변증을 다루었다. 또한 친로마적 변증과 반로마적 변증과는 다른 제 3의 변증으로 왈라스키가 주장한 ‘전체적인 누가의 관점이 로마의 행정으로부터 교회를 보호하는데 있지만 누가 문서의 독자들에게 로마가 기독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변증하는 문서’ 즉, 로마에게 기독교를 변증하는 콘첼만과 카시디의 변증이 아닌 누가 문서의 독자들에게 로마가 기독교를 적대시하지 않는다는 변증에 대하여 다루었다. 정치적 변증을 위한 전거로서 로마에 대한 역사적 접근과 신학적 접근이 다루어졌는데 역사적 접근에서는 하이켈하임, 요세푸스, 헬무트 쾨스터 등의 자료를 토대로 폼페이우스의 예루살렘 정복으로 인한 헤롯 왕조와 바리새파의 집권,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로 이어지는 원수정 기간의 로마의 번영과 속주 정책을 다루었으며 아우구스투스와 티베리우스의 원수정 기간에 로마의 속주에 대한 호혜주의 특히 유대 민족에 대한 호혜주의가 강했음을 다루었다. 한편 신학적 접근에서는 크로산과 호슬리의 연구를 중심으로 승리를 통한 평화를 주장한 제국의 질서에서 예수의 활동이 극형을 당한 것을 감안하면 예수가 로마에게 상당한 위협이었으며 복음서는 그러한 예수의 활동을 담고 있다는 주장에 대하여 다루었다. 누가복음의 정치적 변증과 관련된 연구사와 역사적, 신학적 접근을 토대로 누가복음의 주석을 통하여 누가복음과 로마제국의 상관관계에 관한 연구를 위하여 누가복음의 구조 분석을 통해 누가복음을 189개의 기사로 세분화 하였고 그 중 누가에만 쓰인 특수한 누가의 자료 38개를 선별하여 공관복음서가 모두 공유하는 5장 27절에서 32절의 세리를 제자로 부르는 장면을 모티브로 하여 세례 요한의 세례 장면에 독특하게 삽인 된 3장 12, 13절의 세리에 대한 세례요한의 요구와 누가의 여행기에 속하는 18장 9절에서 14절의 바리새인과 세리의 기도에 관한 예수의 비유가 비유에서 현실로 실체화되는 19장 1절에서 10절의 삭개오 본문의 주석을 통하여 누가의 특수 자료인 19장 1절에서 10절의 삭개오가 마치 예수처럼 유대 민족과 로마 제국 양가에 위협을 받고 있는 특수한 위치에 놓여 있으며 삭개오에 대한 예수의 구원의 선포가 유대 민족과 로마제국의 정상성에 맞서는 제 3의 길임을 논증하였다. 그 결과 누가복음에는 다양한 관점들이 존재하며 때로는 로마를 변호하는 본문이 드러나기도 하고 반유대주의를 부추기는 본문 또한 존재하는가 하면 로마가 그리스도교에 위협적이지 않다는 주장까지 가능하도록 다양한 본분들이 누가복음에 녹아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그러므로 누가복음은 한 입장을 변증하기 위해 기록된 문서라기보다는 유대 민족에도 로마 제국에도 속하지 않는 제 3의 길을 걸었던, 신세계 무질서 속에 드러나는 제국의 폭력성과 제국의 폭력성에 길들여지고 그 폭력에 굴할 수밖에 없었던 유대 정치 지배자들과 종교 지도자들의 폭력의 정상성에 반대하는 독자적인 길을 걸었던 예수를 로마 제국의 역사적 사실에 투영시켜 기록한 것이 누가복음의 기록 목적이다. This essay is based on the gospel of Luke, writing on the aspects related to political apologetics. Conzelmann proposed that “During the public life period of Jesus, he did not confront about the existing political order, therefore people who followed him had to take similar pathways and so they should be seeking actions that would suit Roman order.” Which is based on pro-Roman political apologetics. Whereas researcher and Cassidy’s opinion were based on anti-Roman political apologetics, that they mentioned “Jesus was punished according to Rome’s disturbance and mutinousness.” Not only that, different to pro-Roman political apologetics and anti-Roman political apologetics, there was a third apologetics that Walaskay claimed. “Overall, Luke’s point of view is at protection of church by Roman administration. However the gospel of Luke is not apologetics who Rome is hosteling Christianity.” Therefore it is not to apologetics Christianity to Rome, as above argument, it is to demonstrate that Rome does not hostile Christianity. In this kind of political apologetics reference establishes about Roman historical approach and theological approach. Based on historical approach, Heichelheim, Josephus, and Helmut’s data are on the basis of Pompeius’s Jerusalem conquest. Followed by Herod dynasty and Phariaism’s power, principate period that is lead by Augustus and Tiberius are handled in Roman prosperity and colonial policy. While the Augustus and Tiberius’s principate period, the principle of reciprocity in Rome’s colonial was handled very strongly. On the other hand, in theological approach, it was based on Crossan and Hosley’s research. Hosley and Crossan illustrates about empire’s order that was lead by peace with victory. They were considering about Jesus’s movement that was treated as death penalty, Jesus was appropriate threat and the gospel claims its opinion about Jesus’s movement. Based on relation to gospel of Luke’s political apologetics, these are the structural analysis. This structural analysis is based upon the researcher, historical and theological approaches. It also shows the Roman Empire’s interrelation about the research. The result of structural analysis was separated into 189 articles. Within these articles, 38 articles that were related to gospel of Luke were selected. In the outcome, gospel of Luke that is being shared by Synoptic gospel, verse 27 to 32 in chapter 5 was chosen as a motive. These verses record that tax collector being called as disciple. A unique addition about John the Baptist, of chapter 3 verse 12 and 13, his demand about tax collector and Luke’s journey that belongs to chapter 18 verse 9 to 14. Jesus’s comparison about Pharisee and tax collector’s prayer were transforming into reality in chapter 19 verse 1 to 10 were it was noted about Zaccheus. The unique data about Luke in chapter 19 verse 1 to 10, where Zaccheus was spotted as if he was like Jesus and being under threat by the Jewish nation and Roman Empire. Not only that it was apologetics that Jesus’s proclamation about salvation was standing against the Jewish nation and Roman Empire as a third pathway. In relation to this, there are various points of view. Sometime there are texts where it justifies Rome and encourage anti-Semitism. Also it was found that there were opinions, which explained it was potential to state Rome was not threatening Christianity. Therefore gospel of Luke is not a document that is to apologetics one position. It is rather a record about Jesus who have followed the third pathway without being included in Jewish nation nor Roman Empire. Gospel of Luke projected the empire’s violence that is being shown in new world’s disorder. Not only that, it illustrates Jesus’s independent pathway that he was against normalcy of empire’s violence, doubtfulness of Jewish political rulers and religious leaders’ ascending habit.

      • 로마서의 기독교교육 구조에 기초한 복음교육목회

        박정원 장로회신학대학교 대학원 2014 국내석사

        RANK : 247807

        본 논문은 기독교교육이 끊임없이 변화하는 시대적 흐름 속에서, 주로 방법적 차원에서만 새로움을 추구하는 기독교 교육적 현실을 바라보며, 과연 이들이 기독교교육의 본질을 추구하는 교육을 하고 있는가에 대한 의문에서 출발하게 되었다. 그래서 본 논문은 기독교교육의 본질에 대한 해답을 ‘로마서’에서 찾을 수 있다는 점을 바탕으로 기독교교육의 핵심인 ‘복음’에 대한 재정립 및 복음에 기초한 기독교교육을 모색하였다. 먼저, 로마서의 성서 신학적 이해에 대해 살펴보면서, 기독교교육과의 연관성을 찾아보고, 이를 바탕으로 로마서에 나타난 기독교교육의 구조를 탐구해 보았다. 이를 실현하기 위하여 교육목회적 접근을 시도하였고, 교육목회 이론을 토대로 로마서의 기독교교육 구조에 기초한 복음교육목회 모델을 제시하였다.

      • 로마 공화정기 노빌레스에 관한 연구

        김영목 전남대학교 1996 국내박사

        RANK : 247807

        공화정 초부터 로마의 주요 정무관직과 원로원을 독점해 은 파트리키는 신분 투쟁과정을 통해 등장한 지도적 평민들과 연합하여 새로운 지배귀족을 형성했는데 그들은 통상 노빌레스라 불리웠다. 그들은 당시 정치적 권력을 장악하여 정치귀족으로 정의되었다. 노빌레스는 초기에는 파트리키를 포함하여 쿠룰리스 아이딜리스 이상의 고위 정무관직을 역임한 자들과 그들의 후손으로 비교적 광범위한 사람들이 해당되었으나 공화정 마지막 세기인 기원전 1세기에는 최고 정무관인 콘술을 역임한 자들과 그들의 후손만을 지칭하게 되었다. 그러나 이들 노빌레스 가운데서도 특별히 최고 정무관인 콘술을 역임하고 속주의 총독직을 독점하고 원로원을 주도한 자들이 있었다. 로마 공화정기의 정치체제는 이들 핵심적인 노빌레스에 의해 통치되는 과두정체제였다. 최근 영미학계를 중심으로 로마 정치사회에 있어서 민회와 시민의 역할과 중요성을 강조하며 공화정기 로마의 정치체제가 과두정이 아이었다거나 심지어는 아테네의 민주정과 유사했다는 주장을 하는 학자들이 대두했다. 그들은 주로 노빌레스의 지배기구로 인식되어 온 원로원의 중요성을 부정하고 국제상 시민에겐 보장된 선거와 입법 그리고 사법 분야에서 시민의 권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국제상의 시민의 권리에도 불구하고 시민들의 정치 참여는 상당히 제한받았다. 고위 정무관을 선출한 켄투리아회는 재산 소유량에 따라 비민주적으로 조직되었으며 그 운영에 있어서도 매우 불합리했다. 대부분의 입법을 담당한 평민회 역시 비록 켄투리아회에 비해 민주적으로 구성되었다고 볼 수 있으나 지리적 요인과 인구 구성면에 있어 많은 모순을 안고 있어 부유한 노빌레스들이 사실상 지배하였다. 노빌레스의 지배체제는 무엇보다도 민회와 원로원 그리고 국가종교의 장악을 통해 확보되었다. 우선 민회는 노빌레스인 주제 정무관에 의해 소집되었으며 그에 의해 논의할 사항과 회의 절차 등이 결정되었다. 시민들이 민회에 참석하여 선거나 입법에 관한 문제에 투표권을 행사했으나 그들의 행위는 단지 주제 정무관의 제안에 대한 찬반 형식의 의사를 표현하는데 지나지 않았다. 노빌레스의 원로원 장악은 그들의 권력 유지에 무엇보다 중요했다. 이론상 콘술의 자문기구였으나 조상 전래의 관습에 의해 국가의 중요 업무를 관장한 원로원은 군사적 행정적 경험이 풍부한 노빌레스에 의해 지배되었다. 로마 정치에서 중요한 또 하나의 기구인 국가 종교에 있어서도 노빌레스는 지배권을 장악했다. 로마의 모든 집회는 종교행사를 수반했는데 집회 주제자인 고위 정무관은 정치적 목적을 위해 이를 이용하였다. 노빌레스의 종교 장악은 일반 시민들이 그들의 권리를 행사할 수 있던 유일한 기회인 선거와 입법을 위한 민회에서 그 진행에 크게 영향을 미칠 수 있어 노빌레스의 민회 장악에 이용되었다. 로마 공화정의 실질적 지배층이었던 지도적 원로원의원인 노빌레스들은 복잡하고 다양한 관계에 의해 로마 사회를 지배할 수 있었다. 그들의 권력 기반은 무엇보다도 초기에 형성된 사회제도인 보호제도에 의해 확립되었다. 보호관계는 비단 로마 시민 사회에서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로마의 정복 확대로 지배국으로서 로마의 권위가 확보되면서 사실상 로마의 지배하에 들어 간 이태리 동맹국이나 식민시 또는 해외 속주들은 로마의 유력자들과의 보호관계를 통해 그들의 지위와 이익을 보장받으려 했다. 보호제 외에도 노빌레스의 권력 기반으로 크게 작용한 것은 노빌레스 상호간에 가문을 중심으로 맺어진 정치동맹이었다. 노빌레스들은 정치적 관직을 두고 같은 노빌레스 사회에서 뿐만 아니라 같은 사회적 지위에 있는 비노빌레스 계층과도 경쟁을 해야했던 관계로 그들은 그들의 결속력을 다지기 위해 파벌을 형성했다. 파벌의 중심은 혈연적 유대관계가 강한 가문이 중심이 되었으며 가문간 결속을 강화하기 위해 그들은 보통 혼인 관계와 입양제도를 이용하였다. 그리고 풍부한 경제력 역시 노빌레스의 권력 유지에 중요한 요소로 작용했다. 노빌레스의 지배에도 불구하고 원로원의 저변은 항상 에퀴테스 출신 신인으로 보충되고 있었다. 그들 가운데 특별히 뛰어난 능력과 특정 노빌레스의 적극적 후원으로 노빌레스 사회에 진출한 예가 있으나 그것은 극히 소수에 지나지 않았다. 나머지는 대부분 원로원의 하위직에 머물렀으며 국가 정책 결정에 크게 영향을 미치지 못했다. 노빌레스 지배체제에서 원로원에 들어 간 에퀴테스 출신 신인들은 고위 정무관직을 두고 자기들의 기득권 유지를 위해 출생의 고귀함을 내세우면서 배타적 태도를 취한 노빌레스에 대해 개인의 덕과 업적을 내세우며 그들의 권력 독점을 종식시키고 새로운 지배질서에의 참여를 정당화하려고 했다. 일부 야심적인 신인들은 배타적인 노빌레스에 대해 심한 적대적 태도를 취하기도 했으나 전체적으로 그들은 기존 질서를 완전 무너뜨리고 그 자리를 차지하려 한 것은 아니었다. 그들은 대부분 기존 과두정 체제에서 노빌레스들로부터 동등자로 인정받고자 했다. 끝으로 노빌레스의 지배는 법이 아닌 시민의 지지위에 근거했다. 따라서 시민의 지지가 계속되는 한 그들의 지배권은 유지될 수 있었다. 그런데 노빌레스 지배체제에 대한 도전이 기원전 2세기 중엽 이후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 원인은 무엇보다도 지도적 노빌레스들이 대내외정책에서 보여 준 독단적 국정 운영과 무능 및 부패였다. 특히 공화정 후기의 두드러진 사회 경제적 현상으로서 장기간의 군복무로 인한 자영농민이 몰락하였다. 자영농민의 몰락은 자연 로마 사회의 심각한 사회적 문제와 함께 군대의 성격을 크게 변화시켰다. 일부 개혁적인 호민관들이 이들을 구제하기 위해 시도했으나 부유한 노빌레스를 중심으로 한 유산자들의 반대에 부딪혀 실패하였다. 그 결과 로마 공화국은 원로원을 중심으로 사유재산권 보호를 강조한 보수적인 옵티마테스와 겉으로는 민중의 이익을 내세웠지만 본심은 자신의 권력 추구를 꾀한 포풀라레스 간 권력 투쟁이 전개되었다. 이 과정에서 군대를 배경으로 한 정치 군인들의 등장은 결국 노빌레스 지배체제의 붕괴를 가져왔다. The Patricii, who had monopolized the magistrates and the senators from the early Republic, formed a new aristocracy with the leading plebs who had newly emerged as a political power after long class strife. They were in general called the nobiles. Since they seized the political power of the period, they were defined as the political aristocrats. In the early days, the nobiles broadly included the high plebian magistrates and their decendents as well as the patricii; in the last century of the Republic, that is, in the first century B.C., this term, nobiles, exclusively meant the ex-consuls and their decendents. Among these nobiles, there were a small number of people who held the consulship, commanded the legion and controlled the senate. The political system in the late republican Rome was the oligarchy which was operated by these leading nobiles. Lately, some people, mostly Anglo-American scholars, have emphasized the importance of the Popular Assembly and have argued that the political system of the republican Rome was not an oligarchy; they even maintained that it resembled the democratic system of Athens. These scholars disregarded the senate which had been recognized as the ruling organ of the nobiles and stressed the rights of the citizens in the process of the election, legistration and judicature, which was, in fact, proclaimed as the constitutional rights. In spite of these constitutional rights, the assemblies were far from democratic. The comitia centuriata, even though it controlled the election of the censors, consuls and praetors and decided the war or peace, was undemocratically organized according to property and unreasonably operated. The consilium plebis, which enacted most laws and organized rather democratically compared to the comitia centuriata, was also controlled by the leading nobiles because it contained the irrationality in the geographical and demographic spheres. The domination of the nobiles was, above all, secured by holding power in the assemblies, the senate and the national religion. First, the assemblies were summoned only by the presiding magistrate among the nobiles; he settled the details of the items and the procedure as well. The citizens could participate in the assembly, cast a vote in election and legislation. However, what they could do was either approve or reject the presiding magistrate's proposal. Second, dominating the senate by the nobiles was very important for securing their political power: the senate was under the control of the leading nobiles who had accumulated experience in military and administrative fields, just because, though it ramained theoretically an advisory organ for the consul, the senate practically executed the important domestic and foreign affairs. Lastly, the national religion which was another chief organ in the politics, was controlled by the leading nobiles. They made the most of the significance of the religion by way of influencing the citizens in the elective and legislative assemblies. The leading nobiles who were the practical ruling class of the republican Rome managed the society by means of various and complex systems. The social basis of the predomination of the nobiles was the patrocinium which had been established in the early stage of the Republic. This system was not restricted in the lives of the Roman citizens; the conquest of the neighboring countries brought about a gradual extension of the patrocinium, because the legional kings wished to secure their political privilege by uniting the leading power of Rome. Besides the patrocinium, the political alliance with the ruling class of the socii, colonies and provinces was also the important element in the domination of the nobiles. As a rule, the nobiles formed the factio around the familia. They also used the marriage and adoption to fasten the solidarity among them. The bottom of the senate was recruited with the equites. A very small number of them were introduced into the circle of the nobiles by their own eminent ability and the support of the existing nobiles. These new men were struggling with the exclusive nobiles who tried to monopolize the power with the help of the advantage of the noble birth. However, in general, these newly emerging equites did not desire to destroy all established social order; instead, they merely wished to being accepted as the equals to the nobiles by birth. The domination of the nobiles was assured not by the law but by the support of the citizens. Therefore, their ruling power could be retained so long as they kept the support of the people. However, the leading nobiles of the republican Rome came under the challenge since the mid second century B.C. This was mainly due to their arbitrary national administration, the disability and the corruption. An important feature of the late Republic was the fall of the owning peasants owing to the long military service. Some progressive tribunes tried to save them but failed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the obstinate optimates. The consequence was the continuous conflict between the populares and the optimates. In the long run, the political generals, who had aspired the absolute power with the help of their military background, destroyed the domination of the nobiles.

      • 로마가톨릭교회의 마리아론에 관한 고찰

        박흥상 한일장신대학교 한일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RANK : 247807

        지금까지 제2차 바티칸 공의회 문서에 나타난 마리아, 로마교회에서 가르치는 마리아, 로마교회의 일상 기도문에 나타난 마리아에 대하여, 그리고 로마교회가 왜 마리아를 신처럼 숭배하고, 마리아에게 기도하며 '중보자'의 위치에 까지 올리게 되었는가에 대하여 바벨론 신비종교의 영향과 세계에 널리 퍼져있던 어머니 숭배와 그것의 마리아 숭배로의 대체, 그리고 성경은 중보자에 대하여 어떻게 증거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로마교회의 마리아론내지 마리아 숭배는 성경적 근거가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제2차 바티칸 공의회 중에 만들어진 여러 헌장과 교령, 선언에서도 마리아에 대하여 언급하고 있다. 이 마리아가 예수 그리스도와 성령님과 같은 위치의 중재자요, 교회의 가장 뛰어나고 유일무이한 지체요, 하나님의 어머니이며, 원죄의 온갖 더러움에 물들지 않으시어 티 없이 깨끗하신 동정녀며, 지상 생활의 여정을 마치시고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께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여지시어, 군주들의 주님이시며 죄와 죽음에 대한 승리자이신 당신 아드님과 더욱 완전히 동화되었음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마리아를 그리스도인의 일지를 위한 전구자로 표현하며, 이 땅의 모든 인류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써 삼위일체(三位一體) 하나님께 영광(榮光)을 드리게 되도록 마리아를 통하여 기도하여야 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성경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단 하나의 중보자를 세우셨고, 바로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요14:6)이신 것이다. 또한 모든 사람과 같이 마리아도 구주를 필요로 했고, 그녀 자신도 기꺼이 이 사실을 인정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1:47)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마리아는 교회의 유일무이(唯一無二)한 지체가 아니라,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에게 속한 교회의 일원에 불과하며(행1:14;고전12:13, 27), 마리아가 육신과 영혼이 하늘의 영광으로 올림을 받으시고, 주님에 의해 천지의 모후로 들어 높이이지셨다고 하는데, 이것 역시 성경 그 어느 곳에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리고 주님의 재림 때까지 하나님의 백성들의 지상에서의 생활에 희망과 위로의 표지는 마리아가 아니라, 하나님 아비지의 독생자이신 예수 그리스도(요14:27;16:33)이심을 성경이 증기하고 있다. 로마교회에서 가르치고 있는 마리아에 대한 교리는 성경적 근기가 없는 인간의 유전임을 알 수 있다. 대부분의 교리가 19세기와 20세기에 이르러 공식화 되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우선 할 것인지, 인간의 유전을 우선할 것인지는 신앙을 가지고 있는 성도라면 선택이 분명해 질 것이다. 하나님께서 받으셔야할 영광을 마리아가 가로채고 있으며,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드려질 기도들이 마리아를 통하여 드려지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또한 주님이 가르쳐 주신 기도보다 사람이 지은 마리아 기도가 더 중요시되고 있다는 사실도 우리는 기억해야 한다. 결론적으로 로마교회에서 말하는 마리아는 성경에 나오는 마리아가 아니다. 성경은 죄 없이 잉태되고, 완전하게 죄가 없고, 몸으로 승천한 여인에 대하여 단 한 번도 언급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로마교회는 여로보암 시대의 이스라엘에 못지않을 정도로 그들 사이에서 종교가 부패하고 타락했었다는 것을 할 수만 있다면 부정해 보라. 그들은 추잡한 우상 숭배를 하고 있다. 교리 방면에서도 더 순수한 점은 조금도 없고 오히려 실제적으로는 더욱 불순하다. 우리는 마리아도 모든 사람과 같이 구주를 필요로 했고, 그녀 자신도 기꺼이 이 사실을 인정하여 "내 마음이 하나님 내 구주를 기뻐하였음은"(눅1:47)이라고 고백하고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그들은 교회는 마리아의 영혼 안에서 수락이 자각되었을 때 생성되었다고 함으로써 성령님의 사역을 마리아가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성삼위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와 이것을 위한 사역의 한 가운데 마리아를 가져다 놓고, 성자와 성령을 인간 마리아로 대체해 놓은 로마교회는 참된 교회인가를 스스로 묻고, 자성하는 기회를 만들어야 할 것이다. 아니 더 나아가 마리아에 대한 신앙을 버리고, 성경 말씀(출20:3;신5:7)으로 돌아와야 할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 자신, 그분만이 하나님의 오른편에 계시며 그분만이 우리의 중보자이시며 그분만이 우리 위에 복을 부어 주시는 분이다. 스스로 "주의 계집종"이라고 고백하였듯이 결코 마리아가 제2의 중보자일수 없다. 로마교회는 교회가 마리아의 영혼 안에서 수락이 자각되었을 때 생성되었다고 함으로써 교회를 위한 성령님의 사역을 마리아가 대신하는 것으로 인식하고 있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나라이며, 그리스도께서는 그의 말씀만으로 지배하시므로 그리스도의 홀(笏) 즉 그의 지극히 거룩한 말씀과는 별개로 그리스도의 나라가 존재하듯이 상상하는 것은 거짓말이란 것을 어느 누가 깨닫지 못할 것인가? 이러한 교리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영광을 갈취하고 수많은 로마교회의 신자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보다 마리아에게 더 큰 헌신을 하도록 하는 결과를 낳게 하였다. 개신교회의 모든 성도들은 종교개혁자들이 왜 로마교회에 대하여 대항하며, 목숨을 걸고 신앙을 지켰는지에 대하여 정확하게 알아야 하며, 그들의 신앙을 이어가야 할 것이다. 우리의 신앙생활에 있어서 말씀과 믿음에 타협이 있어서는 안 될 것이다. 타협을 하기 시작하면 더 많은 것을 양보하게 되고 이방적요소가 물밀 듯이 들어와도 끊어낼 힘을 상실하여 하나님께로부터 멀어지게 되는 것을 로마교회를 통하여 깨달았기에 타협 없는 신앙을 온전히 이어가야 한다. 우리의 신앙이 바울이 데살로니가 교회에 보낸 편지의 내용과 같이 믿음의 역사와 사랑의 수고와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의 인내를 우리 하나님 아버지 앞에서 쉬지 않는(살전1:3) 믿음의 사람들이 되어지길 바란다. 또한 믿음을 가진 성도(聖徙)들은 하나님 앞에 세상 이론과 철학으로 무장하여 견고한 진을 구축하고 있는 사람들을 그리스도에게 복종시킬 수 있는 하나님의 강력한 병기를 들고 군사로 나서야 한다. 이 조그마한 논문집이 로마교회에 대한 피상적인 이해에서 벗어나, 그들의 실제를 확실히 알아가는 단초가 되어 지길 비란다. 그리고 우리의 신앙을 성장시키고, 성숙시키기 위하여 로마교회의 교리에 대하여 활발한 연구가 전개되어 인간의 유전에 더 이상 현혹되는 우(愚)가 없어야 한다. 또한 이 시대에도 칼빈과 같은 교회를 개혁시키고, 사회를 변화시켜 나갈 하나님의 사람들이 많이 등장하길 바란다.

      • 로마공동체의 내부 갈등과 이스라엘의 구원 : 로마서 11장 25-32절을 중심으로

        이대주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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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롬 11:25-32에 대한 연구는 이스라엘의 개념 즉 이스라엘이 유대인과 이방인으로 이루어진 크리스천 공동체를 가리키는 지 아니면 역사적 이스라엘을 가리키는 지에 대한 논의와, 이스라엘의 구원 방법 즉 이스라엘의 구원이 기독론적 방법을 통한 구원인지 하나님의 언약에 의한 구원인지에 대한 논의에 집중해왔다. 그러나 이러한 기존의 연구들은 로마공동체의 상황과 바울의 상황을 고려하지 않음으로써 본문을 통해서 바울이 로마공동체에 의도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정확하게 이끌어내지 못했다. 이에 비해 로마공동체의 상황과 바울의 상황을 고려한, 로마서 9-11장에 대한 서중석의 연구는 롬 11:25-32의 사회학적 논의의 출발점이 된다. 본 단락에 담긴 바울의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먼저 로마공동체에 대한 분석이 필요하다. 로마공동체는 회당을 중심으로 유대인 크리스천들에 의해서 설립되었다. 그러나 주후 49년 클라우디우스 황제의 유대인 추방령 이후 로마공동체의 주도권은 이방인 크리스천들에게 넘어갔다.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귀환 후 주도권이 이방인 크리스천에게로 넘어간 로마공동체는 갈등 국면에 접어들게 된다. 그 갈등의 항목들은 음식법, 리더십,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도덕성 등에 관련된 것들이다. 바울은 로마공동체의 이러한 갈등을 해결하기 위하여 로마공동체의 정체성과 회원자격을 새롭게 규정하는 방법을 사용한다. 로마공동체의 기존 정체성은 '의'였다. 로마공동체는 '의의 공동체'였고, 회원자격은 '믿음'이었다. 그러나 바울은 롬10:10에서 로마공동체의 정체성을 '구원'으로, 회원자격을 '공개적 고백'으로 새롭게 설정한다. 바울은 정체성과 회원자격을 새롭게 설정한 후 롬 11:25-32 단락에서 모든 이스라엘이 '구원'받을 것을 언급한다. 이는 곧 모든 유대인들이 로마공동체의 회원일 될 수 있는 가능성을 가진 잠재적 회원임을 밝히는 것이다. 이렇듯 롬 11:25-32은 바울이 단순히 이스라엘의 실질적인 구원을 언급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단락이라기보다는, 이스라엘의 구원을 통해서 로마공동체 내의 유대인 크리스천들을 지원하고 있는 단락이다. 바울은 본문의 유대인 변호를 통하여 자신의 예루살렘 방문에 로마공동체 유대인 크리스천들의 지원을 유도하고, 로마공동체를 스페인 선교의 거점으로 삼으려는 이중목적을 추구하고 있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clarify the intention of Paul in Rom 11:25-32. The studies on Rom 11:25-32 have focused on two things; first, the concept of Israel -Is Israel composed of the Jewish and Gentiles or the Jewish only?-, second, the method of salvation - Can Israel get salvation through Jesus Christ or God's Covenants?-. However without any consideration of the situations of Roman Community and Paul, these investigations could not extract the intention of Paul to Roman Community from this paragraph. Otherwise the study of Joong S. Suh on Rom chap. 9-11 in which the situations of Roman Community and Paul is well reflected can be a starting point of sociological investigation on Rom 11:25-32. In order to clarify Paul's intention, it is necessary to analyse the Roman Community first. Roman Community was founded on the basis of synagogues by Jewish Christians. However, since the edict of Claudius in AD 49 was declared to expel the Jewish from Rome, the leadership of Roman Community was alienated from the Jewish christians to the Gentile christian. When the Jewish christians returned to Rome, the conflicts between Jewish christians and Gentile christians began in Roman Community. The conflicts were about Food abstention, Leadership, and Jewish Christian's morality. In order to get rid of those conflicts, Paul tried to redefine the membership and membership requirement of Roman Community. Ex-membership had been 'Righteousness' and ex-membership requirement had been 'Faith'. However in Rom 10:10, Paul redefined membership as 'Salvation' and membership requirement as 'Open confession'. Then he insisted on 'The salvation of all Israel' in Rom 11:25-32. In this way he insisted that all the Jewish including non christian Jewish is the possible members of Roman Community. Therefore, Rom 11:25-32 supports Jewish Christian in Roman Community through the salvation of Israel rather than just revealing the salvation of Israel. Through his advocation of Jewish Christians, Paul wanted to accomplish double goals; Gaining of Roman Jewish christians' support on his visitation to Jerusalem and Making Roman Community as the post for his future mission to Spain.

      • 로마제국의 기독교 박해에 관한 연구 : 249-305년을 중심으로

        박종민 목원대학교 신학대학원 200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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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로마 제국의 기독교 박해 원인을 종교적·정치적·사회적으로 살펴보았다. 로마 제국은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유일신인 기독교와의 대립이 종교적 원인이었다. 로마의 종교는 배타적이 아니었기 때문에 신들의 숫자는 점점 늘어났고 혼합주의적 국가 제의로 발전해 나갔다. 그러나 로마 제국 국민은 반드시 로마신에게 예배해야 하며, 국가가 인정하지 않는 종교의 참여는 금지했다. 기독교의 유일신앙은 자신의 신외에는 인정하지 않았기에 로마 제국이 이를 금지했고 박해했다. 정치적 원인은 황제숭배와의 대립이었다. 로마는 동방으로부터 황제숭배를 도입하여 황제를 신격화 하고 황제숭배를 강요했다. 이를 거부하는 기독교인들은 반로마적 무정부주의로 낙인 찍혀 박해를 받게 되었다. 로마 사회는 다신교 사회였기 때문에 우상숭배로 경제적 생활을 꾸려가는 로마인들이 적지 않았다. 그러나 기독교인들은 우상숭배를 하지 않기 때문에 이들에게 경제적 손해를 즉, 이교도 신전의 수입이 이를 이유로 기독교인들을 미워하게 되었다. 또한 로마인들은 기독교인이 로마사회에 대한 불관용성과 그릇된 소문으로 인한 오해와 편견으로 기도교인들을 증오하게 되었다. 로마제국 내에서의 기독교인들에 대한 박해는 단순히 기독교도라는 이름 때문이거나 로마정부와 종교정책에 대한 배타성 때문만도 아니다. 하나의 큰 사건이 오직 한 가지 이유 때문에 일어나는 경우는 매우 드물다. 로마인들이 기독교를 박해한 것은 정치적, 사회적, 종교적, 이교적 이유가 한데 어우러져서 일어난 사건이다. 로마인들은 기본적으로 기독교인에 대한 혐오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황제나 지도자들이 이를 정치적, 또는 종교적 이익을 위해 박해를 조장한 것이라 볼 수 있다. 후반기 박해는 데키우스 때부터 시작되었다. 그는 조직적인 박해를 가한 최초의 황제였다. 그는 로마의 기강을 회복하고 제국의 질서를 강화하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고 로마제국이 쇠퇴하는 이유는 로마가 옛신들을 버렸기 때문이라고 믿어 옛 종교로 회복하는 길만이 옛 영광을 찾는 길이라 생각하여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의 목적은 순교자를 만드는 것보다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그는 제국 전역에 걸쳐 모든 국민에게 로마 옛 신들에게 대한 숭배를 의무화 하였다. 이러한 과정에서 많은 순교자와 배교자 나왔다. 발레리아누스도 데키우스와 비슷한 방법으로 기독교를 박해했다. 그는 칙령을 내려 배교하지 않는 기독교 지도자들을 사형에 처하게 하여 기독교의 뿌리를 뽑으려 했다. 디오클레티아누스의 박해는 그의 사위 갈레리우스의 선동에 의해 시작된 것으로 보는 것이 정설이다. 그는 칙령을 발표할수록 박해를 훨씬 강화하였다. 모든 성직자 체포령이 내려지고 체포된 모든 기독교인들은 이방신에게 제사를 하도록 강요했다. 이 명령을 지키는 자는 석방하고 거부하는 자는 처형을 했다. 후반기 박해가 실패한 원인 중에는 기독교인들의 신실하고 순결한 믿음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러한 순결하고 신실한 믿음은 순교자들을 만들어 냈다. 시간이 지남에 따라 사람들이 순교자들을 숭배하면서 기독교의 근본사상, 즉 구원은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만 온다는 핵심사상이 약화되고 성자숭배로까지 이어지지만, 순교 그 자체에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니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 시기에 순교자들 중 오리겐과 키프리안은 교회 지도자들로서 순결하고 신실한 믿음을 지켜 그 시대 사람들과 후대에 모범이 되었다. 순교자들이 있는 반면 배교자도 생겨났다. 데키우스와 발레리아누스는 배교자를 만드는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이다. 배교자 문제는 지금 현재도 우리와 관련된 문제이다. 우리의 기독교 역사를 돌아 봤을 때 신사참배와 유사한 점이 있다. 초기 기독교가 이러한 문제로 고심한 것은 회개를 판단할 객관적 기준이 없었기 때문이다. 회개를 통한 죄용서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기 때문에 용서의 문제는 인간을 손을 떠난 것이다. 그러나 외적으로 어떤 참회의 행동을 요구하지 않았을 때 과연 똑같은 일이 반복 될 때 어떻게 할 것인가의 교훈이 없어진다. 순교자의 삶이 정당하지만 개인의 신앙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만 있는 것이기 때문에 기독교가 다시 배교자들을 받아들인 것이 아닌가 생각된다. 배교자 문제는 교회를 분리 시켰고, 교회를 통합시키는 과정에서 교회 조직과 감독직의 지위가 향상되는 결과를 가져왔다. 로마 제국의 후반기 박해는 교회의 결속력과 신앙을 더욱 견고히 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는 기독교가 확장하는 틀을 제공해 주었을 것이다. 기독교의 복음은 당시 세계를 지배하는 로마제국으로 전파되었다. 하나님은 로마 제국의 박해를 통하여 기독교인들의 순결하고 진실 된 신앙을 드러내어 당시 도덕적으로 타락한 로마인들이 보게 하시고, 결국은 기독교를 그들의 종교로 받아들이도록 하셨다. 기독교는 로마 사회를 밑바닥에서 개혁하여 중간 계층과 상급 계층에까지 영향을 미치다가 마침내 황제까지 변화 시켰다. 그 중심에 박해의 고난을 이겨낸 신앙의 힘이 있다.

      • 로마교회와 『양자의 영』 : 로마서 8:12-17을 중심으로

        이승엽 연세대학교 연합신학대학원 2003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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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논문의 목적은 바울이 롬8:12-17절에서 성령을 양자의 영으로 규정하고 있는 진술에 드러난 로마교회의 내·외적인 상황들과의 상호 연관성을 규명하는 것이다. 즉 로마교회의 내부 정황과 사회적인 상황을 동시에 고려하고 있는 바울의 성령이해를 살펴보고자 하는 것이다. 그리고 본 단락을 포함하고 있는 롬8장에 기록된 양자의 영으로 규정된 성령에 관한 연구이다. 바울은 성령에 관한 문제를 진술함에 있어서 하나님에 대한 신앙적 체험이라는 해석적 도구를 사용하고 있다. 그리고 신앙적 체험이라는 바울의 성령에 관한 진술 속에는 1세기 중반이라는 시간적인 상황에 가로질러 놓여 있던 그레코-로망 세계의 사상 체계와 사회적 관습을 반영하고 있다. 무엇보다 바울 자신이 당시 로마사회의 일상적인 문제들과 정면으로 부딪히고 있는 상황을 드러내고 있는 것이다. 로마서가 기록될 당시 1세기 중반의 로마교회는 '이방인 크리스천들'과 '유대인 크리스천들'이 공존하는 인종적으로 혼합된 공동체이다.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를 이루고 있는 혼합된 구성원들간의 대립적인 상황에 대한 바울의 성령이해가 제시되고 있는 것이다. 먼저 '정황'의 측면에서 교회 공동체 구성원들간의 긴장관계를 파악할 수 있다. 특히 로마교회는 신분상의 '노예제'와 '유동성'이라는 사회적인 영향을 받고 있었다. 그리고 대립하고 있는 두 그룹을 향하여 '양자의 영'으로 규정한 성령을 소개함으로써, 어지럽혀진 공동체 내부의 '연합'을 가능케 하는 실체가 무엇인지를 설명하고 있다. 그리스도 교회 공동체 연합을 위한 '성령'의 역할과 1세기 그레코-로망 사회의 '양자'의 의미를 함께 묶는 바울의 진술 속에서 로마교회의 '정체성'이 반영되어 있다. 특히 사회구조의 '근간'(根幹)을 토대로 하여, 바울이 전하는 이 '양자'의 문제는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에게 복음에 대한 공감대를 형성할 수 있는 장치가 된다. 로마교회의 '정체성'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양자'(uiJoqesiva)가 되었다는 상징적인 해석에 의하여 명료해 진다. 또한 바울은 이 신적인 신분에 주어지는 옛 전승이 말하고 있는 '보증'과 '상속권'을 인식시키려는 것이다. 롬8장의 내용은 스스로 종이 된 그리스도가 성령에 의하여 하나님의 '맏아들'이 된 그 증거를 보여 주고 있으며, 또한 동일하게 양자의 영인 성령에 의하여 로마교회가 공동체로서 미처 깨닫지 못한 자신들이 소유한 것이 하나님의 '아들이 되었다'라는 특권을 인식하게 하는 것이다. 한편 바울은 '양자의 영'을 받은 공동체로서 로마교회를 '협력'과 '선교', 그리고 '일치'라는 측면에서 사회를 향한 '책임성'과 내부 '결속'에 관하여 설명하고 있다. 바울은 양자의 영에 의하여 결속된 로마교회의 구성원들을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강력한 이미지를 만들어 냈다. 그리고 먼저 이 하나된 하나님의 가족이라는 이미지는 '선교'의 강력한 의미를 부여한다. 바울은 로마교회가 양자의 영에 의한 공동체 내부적인 결속과 함께, 일생동안 감당해 온 이방인 선교에 '종합적 결론'인 바울 자신이 세운 '이방교회들'과의 결속을 추구함으로써 자신이 전하는 복음에 대한 '지지'(支持)와 예루살렘교회와의 '협력' 문제를 획득하고자 한다. 결과적으로, 롬8:12-17절 단락에서 볼 수 있는 바울의 성령이해는 구체적으로 복음을 전파하는 과정에서 교회 공동체의 내·외적으로 드러나는 실제적인 현상들을 성령에 관한 신학적인 논의로 전환시켜 낸 것이다. 바울은 이러한 현상들을 전적인 성령의 역할로 이해하고 있다. This thesis is a study about how Paul defined the Holy Spirit as 'the Spirit of adoption'(pneu'ma uiJoqesiva") in relation to the situations inside and outside of the Roman Church as seen in the verses of Romans 8:12∼17. In other words, it is about what Paul thought the Holy Spirit was as he tried to consider the social situation as well as the internal circumstance of the Roman Church. It is also about the Holy Spirit defined as pneu'ma uiJoqesiva" in the 8th chapter of Romans. Paul used a method when he explained the Holy Spirit: experiences in faith. In his statement about the Holy Spirit related to the experiences in faith, he revealed the system of the thought and custom of the Greco-Roman society in the mid first century. He himself had to collide with the social problems everyday. The Roman Church was a ethnically diverse community in which the Gentile Christians and the Jewish Christians coexisted in the mid first century when Romans was written. Paul's understanding of the Holy Spirit was based on the opposing situation of the members of the Roman Church. The members of the Roman Church were in strained relations because of their circumstances. Especially, the Roman Church was influenced by the Roman society in terms of "slavery" and "mobility". He revealed what substance could accomplish the union of the community by introducing the Holy Spirit to two groups that were opposed to each other. In Paul's statements where he related the works of the Holy Spirit for the union of the Christian community to the meaning of uiJoqesiva in the Greco-Roman society at the first century, he tried to reveal the identity of the Roman Church. On the basis of the keynote of the social structure, the matter of the adopted son could be a device by which the members of the Roman Church could arouse their sympathy with the Gospel. The identity of the Roman Church became clear by the symbolic interpretation that they became the adopted son of God by the Holy Spirit. Paul also wanted them to recognize 'inheritance rights' and 'assurances' given by their divine status. In the 8th chapter of Romans, Paul was trying to show the evidence that self-imposed slave Christ became the eldest son of God by the Holy Spirit. Paul also wanted the members of the Roman Church to recognize their privilege that they became the children of God by the Holy Spirit, pneu'ma uiJoqesiva". Meanwhile, Paul explained what the internal unity and the responsibility of the Church of Rome toward society were as a community with pneu'ma uiJoqesiva", in terms of cooperation, mission, and union. Paul presented the intense image of the Rpmana Church as the family of God united by pneu'ma uiJoqesiva". The image of the family of God gives the word mission its strong meaning. Pursuing the union of the Roman Church with the gentile churches he had established, the synthetic conclusion to the gentile mission which he had coped with during his whole life, along with internal unity of the community by pneu'ma uiJoqesiva", he tried to acquire support for the Gospel he had been conveying and cooperation with the Jerusalem Church. In result, Paul's understanding of the Holy Spirit seen in the verses of Romans 8:12∼17 turned the actual state inside and outside of the Roman Church in the process of conveying the Gospel into the theological discussion about the Holy Spirit. Paul understood this as the role of the Holy Spirit. He came to a conclusion that the members of the Roman Church could be the equal family of God (true Israel) by the Holy Spirit, pneu'ma uiJoqesiva", which was the accomplishment of the covenant God promis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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