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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제말기 한국 국민문학과 타이완 황민문학 비교 연구-중·단편소설을 중심으로-

        후이잉 서울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박사

        RANK : 248703

        국문초록 일제말기 국민문학 연구는 아직까지 ‘암흑기 문학’이라는 선입견에서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다. 이 논문은 제국과의 간극을 확인하고 민족 입장을 명확히 해 나간다는 국민문학의 경로를 추적함으로써 민족 정체성 정립에 있어서 국민문학의 위상을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럴 때 동시기의 타이완 황민문학은 유용한 참고대상이 된다. 그러나 비록 강제적으로 부여받은 동화(同化, assimilation) 과제를 이화 실제로 전유(專有, appropriation)한 경로는 동일했지만 타이완 황민문학이 일상적 차원에서 동화과제를 검토함으로써 동화의 한계를 확인했는가 하면 한국 국민문학은 동화의 욕구를 내면화하지 않은 채 주관의지만 내세운 결과 모순과 균열을 극명하게 드러냈다. 이처럼 동화를 거부하는 지점에서 동화 과제에 접근한 것이야말로 조선 국민문학의 특징이었다. 일본적 정체성을 내면화할 가능성을 논의하는 것이 황민문학의 핵심과제이었는가 하면 과연 일본을 ‘국가’로 받아들여야 하는지 라는 것은 국민문학의 핵심과제였다. 동화에 대한 국민문학과 황민문학의 검토는 주로 이중언어, 내선일체/내대일여, 그리고 ‘동아’라는 세 가지 면에서 전개되었다. 공식 언어와 일상 언어를 혼용하는 중국 지식인의 언어적 습관을 이어받은 타이완 작가는 어휘적인 차원에서 ‘이중언어 창작’을 실천함으로써 식민지의 이중언어 상황을 일본인 독자에게 전가했다. 이런 과정 속에서 타이완어 순수화 요구를 제시하기에 이르렀던 것은 주목할 만하다. 이에 비해 조선인 작가들에게는 ‘이중언어 창작’은 언어체계적 차원의 것이었다. 그들은 일본어 창작과 모아 창작을 확연히 구분하면서 과연 일본어로 창작해야 하는지 라는 고민으로 일관되었다. 이 점을 감안한다면 조선 작가들은 실제로 일본어 창작을 내면화하지 않았다. 정체성 검토는 일제말기 식민지 문학의 핵심 주제였다. 내대일여(內臺一如) 소설과 내선일체 소설은 차별로부터의 탈출을 궁극적으로 지향하는 데 동일했지만 전자가 일상적인 차원에서 일본적 정체성을 내면화할 가능성을 검토함으로써 내대일여의 불가능성을 도출했던 데 비해 후자는 일본적 정체성의 구축 과제를 내면화하지 않은 채 정치적 차원에서 내선일체의 당위성 가능성을 검토했다. ‘동아’에 대한 식민지 지식인의 검토는 일본과의 관계를 검토하는 연장선상에 놓여 있었다. 타이완 지식인이 시야를 동아까지 확대함으로써 일시적으로 정체성 고민을 해결하듯이 보였지만 일본과의 양립 불가능성을 더욱 인식하기에 이르렀다. 이에 비해 조선 지식인은 동아를 내선일체의 가능성으로 검토하는 과정 속에서 민족 자의식을 보다 명확히 하기에 이르렀다. 이 시기 지식인들의 ‘과도기’인식은 궁극적으로 이런 동화 불가능성에 대한 인식에서 비롯되었다. ‘과도기’이후 자민족 중심의 동아에 대한 기획을 통해 식민지 지식인의 일본 초극 욕망을 확인할 수 있다. 핵심어: 국민문학, 황민문학, 동화, 민족 정체성, 이중언어, 내선일체/내대일여, 동아 학번: 2010-31391

      • 國民文學에 투영된 한일 작가의 시대인식 硏究

        사희영 전남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박사

        RANK : 248703

        한국의 근대는 일본 제국주의 세력하에 편입되어 나라를 잃고 모국어를 통제 당하던 혼돈의 시대였다. 독립된 민족국가에서 식민지로 전락하고, 조선인은 제국의 식민지인이자 이등국민으로 자리매김 되어졌다. 특히 식민지 말기 일제는 중일전쟁과 태평양전쟁 등을 일으키고 이를 합리화하기 위해 ‘서양’에 대립되는 ‘동양’을 강조하며 아시아를 ‘동양’이라는 키워드로 묶는 ‘대동아 공영 권’을 내 세우게 된다. 일제강점기 조선문인들은 확장된 일본세력에 더 이상 저항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새로운 돌파구로서 ‘대동아 건설’의 주체가 되어 식민지에서의 탈피를 상상하였다. 그리고 그러한 인식들은 결국 일제의 동화정책을 통한 강요에 의한 협조, 일본의 확대된 세력에 협조함으로써 식민지 탈피를 꿈꾼 암묵된 협조, 일본을 근대문명으로 수용 하며 동반된 협조 등 강요 혹은 자발에 의해 ‘내선일체’ 슬로건 아래 식민지 언어인 ‘조선어’를 포기하고 식민국 언어인 ‘일본어’ 상용화에 동참하였다. 이러한 상황 속에서 조선에서는 일제의 언론통제에 의해 민간신문인 ≪朝鮮日報≫와 ≪東亞日報≫가 폐간되었고, 잡지도 &#65378;文章&#65379;과 &#65378;人文評論&#65379;이 폐간되었다. 그 후 경무당국(警務當局)의 주재로 &#65378;國民文學&#65379;이 발간되게 되었다. &#65378;國民文學&#65379;에는 조선인들은 물론 일본에서 활동하는 일본 문인 혹은 조선에서 생활하는 일본인 등이 참여하여 여러 종류의 글을 투고하였다. &#65378;國民文學&#65379;은 시, 소설, 수필, 평론에 이르기까지 당대 가장 많은 작품을 게재한 잡지이자, 정책과 관련한 담론이 가장 활발하게 이뤄진 잡지이다. 그러나 잡지 &#65378;國民文學&#65379;은 일본어로 쓰여진데다가 친일단체에서 활동한 작가의 글이 게재되어 있거나 친일적 색채를 띤 작품 혹은 글들이 게재되어 있어서 친일잡지라는 일반적 인식이 강하였다. 특히 잡지 구성이나 게재된 작품 등에 관한 연구가 충분히 이루어지지 않은 채, 친일작가로 알려진 작가들의 &#65378;國民文學&#65379; 게재작품 연구가 산발적으로 이루어짐에 따라 그 이미지는 더욱 경화되고 말았다. 이 논문은 그 동안 이루어지지 않은 &#65378;國民文學&#65379;의 서지정리를 꾀한 것이다. 또한 친일로만 치부되어왔던 국한된 작품 분석이 아닌 사회적 상황을 그 베이스로 하고 포스트 콜로니얼리 즘에 근거하여 식민 자(일본인)의 양가 성, 오리엔탈리즘, 제국주의 시선 그리고 피 식민 자(조선인)의 모방, 전유, 식민주의적 무의식 등 근대의 다양성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1941년 11월부터 1945년 5월까지 발간된 &#65378;국민문학&#65379;에는 한국인 집필진이 약 96명 참여하고 있었으며, 조선문인들이 상당수를 차지하고 있으며 응모에 응해 투고한 학생들도 소수 포함되어 있다. 일본인 집필진은 경성제국대학 일본인 교수진들을 비롯해 중학교 교장과 교사 그리고 <綠旗聯盟>에 소속되어 활동한 일본인과 조선총독부에 근무하는 일본인 등 약 140명이 참여하고 있었다. &#65378;國民文學&#65379;에는 시, 기행, 수필, 평론, 희곡 등 다양한 문학장르의 글들이 게재되어 있었다. 특히 시의 경우 한일 문인들 모두 한일 양국의 유물을 소재로 한 시가 많은데, 이러한 표현은 유물을 통해 ‘동양의 미’를 나타내고 다시 ‘일본의 미’로 재구성하여 ‘내선일체’를 형상화 한 것이었다. 또 전시하 상황이었기 때문에 전쟁을 찬양하는 전쟁관련 시들도 상당수 창작되어 있었다. 그러나 같은 소재를 취하면서도 그 이면에는 동조 동근 론 에 근거를 둔 제국주의 시선이 담긴 시들이 있는가 하면, 식민지 현실과 일본을 문명을 통해 접목함으로써 끊임없이 새로운 시대에 주체를 형성하고자 하는 시들도 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수필&#8228;기행 류는 한국인의 경우 작가 주변의 생활이나 체험 혹은 정서를 다루어 일본 내셔널리즘이 거의 표출되지 않은 반면, 일본인의 경우는 국책을 강조하는 중 수필이 상당수 게재되어 있었다. 이는 수필에서 조차 제국의 이미지를 정형화시키려는 제국주의자 의식이 담겨있는 것을 의미한다고 할 수 있다. 평론의 경우는 한국인의 문학 평론은 국가에 귀속된 문학으로 일제의 국책 및 황국의식을 선전하는 선전문학의 필요성을 주장하고 있었고, 식민국의 문학과 윤리를 우월한 문학이자 올바른 윤리로 제시하는 등 이항적 대립을 통한 제국주의 모방의 양상을 보여주고 있었다. 한편 일본인의 평론은 ‘내선일체’의 근거를 제시하는 과거 교류에 관한 서술이 많았다. 그리고 이러한 글들을 통해 일본문인들은 식민지인을 지배민족으로 동화시켜 제국내부로 편입시키기 위한 작업에 앞장서고 있었음을 알 수 있었다. 기타 장르의 글들도 상당수가 식민지 내부모순을 은폐하고 침략을 위한 제국 이데올로기를 담겨있었다. 일본인과 한국인이 혼재되어 있는 좌담회의 경우는 크게 문학담론, 지배정책담론, 문화의 담론으로 나뉘었는데 식민 자와 피 식민자의 갈등양상이 눈에 두드러졌다. 피 식민자인 조선문인들은 좌담회를 통해 끊임없이 식민지 탈출통로를 모색하지만, ‘문명’, ‘우월’, ‘주체’의 틀 속에 갇힌 채 한계를 벗어나지 못하고 식민자의 모방양상을 보이고 있었다. 식민자인 일본문인들은 식민국의 권력과 식민자의 양가 성을 표출하고 있었다. 소설작품을 분류해 본 결과 한국인은 29명의 작가가 참여해 60여 작품을 싣고 있으며, 일본인은 18명이 36작품을 싣고 있다. 게재된 작품을 분석해 보았을 때 제국이데올로기를 생산하는 작품이 상당 수 포함되어 있었으며, 일본어를 전유하여 조선인의 정체성을 지키려는 작품도 있었으며, 정치성을 초극하고 문학을 지향한 작품들도 게재되어 있었다. 한국인 작가 중 최재서는 차별과 부조리의 식민지 현실을 타개하기 위한 식민지 지식인의 사명감으로 시대의 흐름에 순응하여 일제를 문명으로 받아들이고 모방답습 함으로써 전체주의 파시즘화로 치닫고 있었다. 일본문단에서 데뷔하여 활동하였던 김 사랑은 자유로운 창작이 불가능한 문단 현실을 피하기 위해 역사성과 서정성을 빌어 조선민중을 묘사하는 역사소설과 서정소설 형식의 작품을 창작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석훈은 문학가로 살아남기 위해 내선일체를 관념적으로 수용하였다가 심리적 양가 성을 경험하고 다시 타자화된 자신의 정체성을 재발견해 나가는 모습을 보이고 있었다. 일본인 작가 중 다나카 히데미쓰는 일본문단에서 이미 등단한 식민국 기성작가로서 시국에 부응하기 위해 자신의 전쟁체험을 바탕으로 한 전쟁문학을 창작함으로써 일제파시즘을 표출하고 있으며, 미야자키 세타로는 조선문단에 등단하기 위한 국책협력의 후방작품을 창작하였는데 작품 속에서 국수주의적 시선 속에 일본인의 우월함과 배타적 애국주의를 재현하고 있었다. 오비 주조는 식민지 조선인을 동화시키는 모범적 日本人像을 그린 작품으로 &#65378;國民文學&#65379;에 게재하였고, 이후 일본문단에 진출하여 아쿠타가와賞을 수상하였다. 이를 통해 양국 문단의 교류가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고, 식민자의 불완전한 정체성을 타자인 식민지인에 의해 확립해가고, 또한 식민지인의 정체성을 식민 자에 의해 이식시켜가는 이중적 오리엔탈리즘을 포착할 수 있었다. 이 연구를 통해 현실과 이상의 괴리감에 갈등했던 근대 문인들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국가내셔널리즘, 제국주의 정책, 침략을 미화하는 행위 등은 근대 식민국가의 상투적 수단이었고, 그것이 &#65378;國民文學&#65379;의 여러 장르에 나타나 있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그 이면에 숨겨져 있는 문인들의 사회적 배경과 삶을 생각한다면 그들의 선택은 미미하나마 동조할 수 밖에 없는 것이라 하겠다. 식민지 탈피를 추구하며 조선인에 의해 만들어진 ‘國民’을 위한 잡지 &#65378;國民文學&#65379;이 일본인 집필진과 당시의 시대상황으로 인해 친일잡지 &#65378;國民文學&#65379;으로 나타날 수 밖에 없었던 배경과 한일 근대작가들의 이면을 잘 살펴볼 수 있었다.

      • 김사량 문학 연구 : 주체의 이동을 중심으로

        전설영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8 국내석사

        RANK : 248686

        이 논문은 식민지 말기 김사량 문학에 나타나는 서사주체 및 서술자주체의 위치와 이동 양상에 대해 고찰한 연구이다. 약 10년이라는 짧은 문학 활동 기간 중 ?빛 속으로?가 아쿠타가와 후보에 오른 1939년부터 중국 연안으로 탈출하기 직전인 ??국민문학??에 장편 ?태백산맥?을 발표한 1943년까지의 4년간은, 김사량의 문학이 집중적으로 생산된 시기이다. 태평양전쟁을 정점으로 국민총동원체제가 가속화되어 가는 이 시간에 김사량은 식민지인으로서 제국 일본에서 조선인의 문학을 일본어로 창작하였다. 제국과 식민, 중앙과 지방, 조선어와 일본어, 지식인과 하층민 등 그의 문학은 늘 경계와 구획을 내포하는 것이었지만 복합적으로 얽힌 그 경계와 구획이란 사실상 측정불가능한 것이다. 김사량은 이 측정불가능한 영역에서 지속적으로 문학을 해 왔으며 이러한 사실은 그의 문학을 연구하는 데 중요한 전제가 된다. 경계에 놓인 김사량의 문학에서 그의 주체들은 수시로 유동한다. 이때 일어나는 운동, 즉 주체의 이동에 의해 언어적?계층적?지정학적 차이가 발생한다. 본 연구는 이 주체의 이동 및 운동성으로 인해 산출되는 차이들을 규명함으로써 김사량 문학에 접근하고자 했다.본 논문은 주체의 위치와 이동 양상을 ‘거리, 시선, 이념’의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아울러 이 운동의 패러다임을 파악하기 위하여 개별 작품으로 완결되는 작품론이 아니라 작품 간, 언어 간, 세계 간의 상호 연관성에 주목하여 통시적으로 살피는 데 중점을 두었다. 구체적으로는 우선 ?빛 속으로?를 통해 하층민과 거리를 지니는 식민지 지식인 南선생의 계몽 주체적 측면과 제국 내 엘리트 집단에 자리 잡은 식민지 엘리트-김사량에 주목함으로써 작가 김사량의 위치에 대해 고찰하였다. 식민지인으로서 정체성이 불확실함을 자각하는 南선생은 자신과 똑같이 정체성이 불확실한 혼혈아인 야마다 하루오를 자유의 길로 계몽하지만 한편, 제국 내 식민지인으로서 스스로 계몽되려는 자이다. 식민지 조선으로부터의 해방은 일본으로의 동화에 직결되는 위험성을 가짐으로 그는 늘 불안정한 위치에서 정체성의 불확실성을 지닐 수밖에 없다. 그러한 南선생의 지식인 상(像)은 제국 일본에서 엘리트로 지내온 김사량의 모습에 연결된다. 즉 南선생과 김사량의 엘리트라는 공통점은 또한 제국 지식인과의 공감대를 형성했다. 제국 지식인과의 소통은 김사량의 최대의 무기이자 이 소설의 핵심이었다. 식민지 출신의 엘리트와 제국 엘리트와의 상상적 연대 안에서 식민지로부터의 해방과 제국으로의 동화 사이에서 갈등하는 작가 김사량의 모습을 확인할 수 있다.다음으로 주체의 이동 양상을 보다 자세하게 분석하기 위하여 김사량의 일련의 기행문 개작 과정을 살펴보았다. ?산곡의 수첩?(1935), ?산가세시간?(1940),?화전지대를 가다?(1941)에서는 주체의 시선에 주목하여 그러한 주체가 바라보는 조선(인)의 현실, 즉 조선의 ‘환유(metonymy)’로 기능하는 ‘화전민’에 초점을 맞추었다. ‘화전민’의 재구성 과정에서 부조된 것은 조선의 로칼리티였는데 이는 ?양덕통신?(1941), ?산의 신들?(1941.7/1941.9/1942), ?신들의 연회?(1941)에서 전면화된다. 이 계열의 판본들에서 두드러진 변화를 볼 수 있는 부분, 즉 ‘조선사람이 되겠다’에서 ‘국민이 되겠다’로 바뀌는 변개 과정은 국민이 조선인의 ‘은유(metaphor)’임을 가리킴으로써 오히려 조선의 로칼리티를 강조하게 되었다.마지막으로 이동하는 주체의 결정적인 변화로서 주체의 전환 지점을 ?태백산맥?을 통해 살펴보았다. 이 전환이란 일본 문단과의 결별, 조선으로의 귀환, 그리고 연안으로의 탈출을 포괄적으로 의미한다. 해방 직전의 ‘국민문학’ 안에 자리 잡은 김사량 문학이 전환을 거치면서 이전 작품과의 변별성을 스스로 드러내게 되는데 여기에는 식민지 말기 ??국민문학??이라는 매체의 기획과 불가분한 관계가 내재했다. 내선일체의 이념을 기반으로 하는 ??국민문학??의 개념에서 조선의 로칼리티를 내포하고 제시하는 모순적인 면모가 ?물오리섬?을 통해 드러나고 이 모순을 불식하는 기제로 ?태백산맥?이 등장한다. 최재서가 ?태백산맥?을 평가하면서 제창한 ‘낭만주의의 이상성’을 통해 신체제 문학의 새 출발이 예견되지만 결과적으로 이는 달성될 수 없었다. ?태백산맥?의 핵심은 ‘새로운 조선인을 창조한다’는 이상(理想)의 내러티브이다. 이 이상은 ‘국민문학’이라는 일원적 세계와 현재적 비전을 비켜가는 동시에 유토피아적 비전으로 제시된다. 하지만 그 이상의 세계는 ?태백산맥?에서 실현되지 않았다. 그것은 오히려 연안과 북한에서 ‘사실화’되어 갔지만 지속되지는 않았다. 남북 간의 치열한 전쟁 가운데 사라진 김사량은 결국 귀속의 문제를 보류시켰다. 김사량 문학은 ‘전환’을 맞이 뿐 ‘단절’은 거치지 않았다. 그의 문학은 여전히 경계선 상을 떠나지 않았던 것이다.

      • 최재서 비평 연구

        이혜진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2012 국내박사

        RANK : 248685

        본 논문은 한국근대문학사에서 본격적인 전문 비평가로 평가받는 최재서(1907~1964)의 경성제국대학 영문학 전공시절을 시작으로, 본격적인 실천비평에 진입한 뒤 한국 근대문학 비평에 대한 체계를 확립하고, 이어서 ‘국민문학’ 이론을 수립한 시기까지의 비평 활동을 종합적으로 검토하는 데 목적이 있다. 일본어와 영어로 표기된 최재서의 경성제대 시절의 논문들은 18~19세기 영국 낭만주의에 대한 연구가 주를 이루고 있기 때문에 그동안 국문학계에서는 공백의 상태에 머물러 있었고, 또 영문학계에서는 외국문학 수용사의 관점에서 논의가 진행되어왔다. 이에 따라 현재의 관점에서 최재서 비평을 종합적으로 검토할 때 여전히 문제가 되는 지점은 (영국) 낭만주의―모더니즘―‘국민문학’이라는 삼각구조의 틀에서 보이는 사상적 ‘전향’의 인식론적 변화구조이다.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들은 이러한 최재서 비평의 변천구조를 주로 ‘전향’이라는 단절의 계기로 관찰했기 때문에 최재서의 최종적 심급을 낭만주의자, 모더니스트, ‘친일문인’ 등으로 규정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을 대척적인 세계관으로 보았던 한국문학사의 주요 시각과 관련되어 있다. 본 논문에서는 (영국) 낭만주의와 모더니즘의 출발이 세기적 전환점에서 시작되었다는 점에서 범유럽적 혹은 국제적 현상으로 간주함으로써, 내적실재와 주관성을 중시하고 예술적 창조성을 강조했던 두 사조의 유사점에 착목하여 기본적으로 최재서를 근대주의자로 자리매김하는 데 천착함으로써 그의 (영국) 낭만주의―모더니즘―‘국민문학’의 인식론전 전환의 계기를 근대성의 연쇄적 문제 상황의 측면에서 고찰했다. 한편 본 논문에서는 최재서 문학비평의 사상적 측면을 외국문학(영국)―조선문학―일본문학이라는 삼각구조를 기본적인 틀로 두고, 그러한 외래사상의 수용이 불가피했던 내재적인 지배조건 또는 제약의 문제 등을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본 논문은 최재서의 비평을 관통하고 있는 중요한 영역인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국민문학’에 내재한 ‘외래’에 대한 관점을 ‘이식’으로서가 아니라 식민지배하에서의 근대적 변화에 대한 부정의 계기들을 반영하고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최재서 텍스트의 낯설음과 불투명성은 ‘징후적 독해’를 필요로 하며, 따라서 비평가로서의 최재서를 어떤 최종적 심급에 위치시키는 것을 지양함으로써 최재서 신화와의 결별을 시도했다. 또한 한국근대문학사는 제국 일본과 식민지 조선이라는 무시할 수 없는 이원적 구조가 존재하고 또 거기에 문학의 보편성과 자율성의 승인이라는 사상사적 차원에서 서구가 존재했던 양상을 보이는데, 이때 한국문학이 대면하고 있었던 일본과 서구라는 타자성의 외부관념 가운데 사상이 갖고 있는 본래적인 외부성과 외래사상의 변별방식을 최재서를 통해 살펴보았다. 이때 최재서가 당시 조선의 주류 문인들과 구별되는 변별점은 그가 영국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제국 일본의 국가주의 문학이라는 외부적 참조틀을 통해 자신의 내셔널리티를 구성해나가는 주요한 경로로 삼았다는 점에 있다. 따라서 서구―일본―조선의 역학관계나 계급문학―민족문학―해외문학이라는 삼각관계의 틀 속에서 최재서의 비평적 추이를 살펴볼 때, 최재서는 외국문학을 피상적 수용의 차원에 그친 것이 아니라, 즉 영문학이나 일본문학 등의 외래사상을 추구했던 것이 아니라 문학이라는 보편성, 인류 공통의 진리를 향해 나아가려는 강력한 의지를 구현해내고 있었다는 점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에서, 그의 비평적 도정이 관통하는 핵심적 문제군은 사상의 본래적인 외부성을 향한 데 놓여 있다고 할 수 있다. 이에 따라 최재서의 낭만주의와 모더니즘, 그리고 ‘국민문학’은 각각 서구와 일본의 것 그 자체라기보다는 일정하게 외재성의 장소로 남아 있음을 밝히고자 했다. 요컨대 최재서 비평에는 영국 낭만주의와 일본 국가가 절대타자로 군림하고 있었다고 할 수 있는데, 이때 절대적이기 때문에 낭만적으로 내면화할 수 있었던 것이 영국 낭만주의였다면, 한때 일시적으로 존재했던 상대적인 (절대) 타자였기 때문에 절대로 내면화할 수 없는 채 갑자기 대면할 수밖에 없었던 일본의 타자성은 명백히 구별되는 것이다. 그리고 최재서에게 있어서 상대화된 절대타자를 통과한 뒤에 남는 것은 또 다른 심급으로서의 절대타자, 즉 문학으로의 회귀였다. 그러므로 경성제대 영문학 전공 시절의 그는 낭만주의라기보다는 오히려 문학주의였고 따라서 일본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았으며, 그가 모더니즘으로 나아갔을 때는 조선문학의 (재)발견과 함께 자각적이고도 의식적으로 비평의 방법론을 모색했던 시기로 볼 수 있다. 그리고 이른바 ‘국민문학의 시대’에는 오히려 그동안 지속적인 탐구의 대상이었던 ‘문학’을 상실했던 시기, 이른바 ‘황국신민’을 위한 도식적 문학에 복무했던 시기였다는 점에서 최재서의 전체적인 문학비평 인생을 통해 볼 때 일종의 ‘예외적인 시기’에 해당한다. 이는 그가 ‘받들어 모시는 문학(まつろふ文學)’을 미학적으로 지양해버리고자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갖고 있는 ‘절대모순적 자기동일’이라는 ‘무(無)의 논리’의 모순에서 완전히 벗어나지는 못했다고 판단하기 때문이다. 本論文は、韓国近代文学史における本格的な専門批評家という評価を受けた、崔載瑞(1907-1964)について、彼の京城帝国大学英文学専攻の時期をはじめとして、本格的な実践批評へ向いながら韓国近代文学批評についての体系を確立し、さらに「国民文学」理論を立ち上げた時期までの批評活動を総合的に検討することを目的としている。日本語と英語で表記された崔載瑞の京城帝大時代の論文は、主に18-19世紀のイギリスロマン主義についての研究であるため、この間国文学界では空白の状態にとどまっており、また英文学界では外国文学受容史の観点から議論が進められてきた。現在の観点で崔載瑞の批評を総合的に検討するとき、依然として問題となるのは、(イギリス)ロマン主義―「国民文学」という三角形の構造の枠組みからみえる思想的「転向」の認識論的変化の「構造」である。現在までの先行研究はこのような崔載瑞の批評の変遷の構造を、主に「転向」という断絶の契機と理解していたため、崔載瑞の最終的な審級をロマン主義者、モダニスト、「親日文人」などと規定するほかなかった。これはロマン主義とモダニズムを対蹠的な世界観として捉えていた韓国文学史の主要な視角と関連している。本論文では、(イギリスの)ロマン主義とモダニズムの出発が世紀的な転換点において始まったという点で、汎ヨーロッパ的、あるいは国際的な現象としてみなされることによって、内的実在と主観性を重視し芸術的創造性を強調していた二つの思潮の類似点に着目し、基本的に崔載瑞を近代主義者として位置づけることで、彼の(イギリス)ロマン主義―モダニズム―「国民文学」の認識論的転換の契機を、近代性の連鎖的な問題状況の側面から考察した。一方で、本論文では崔載瑞の文学批評の思想的な側面を、外国文学(イギリス)―朝鮮文学―日本文学という三角構造を基本的な枠組みとし、こうした外来思想の需要が不可避であった内在的な支配条件、または制約の問題などを重点的に考察した。本論文は、崔載瑞の批評を貫いている主要な領域であるロマン主義とモダニズム、そして「国民文学」に内在する「外来」に対する観点を、「移植」としてではなく、植民地支配下における近代的な変化に対する否定の契機を反映していると考えるためである。こうした観点において、崔載瑞のテキストの奇妙さと不透明性は「徴候的な読解」を必要とする。よって、批評家としての崔載瑞をある最終的な審級に位置づけることを止揚することによって、本論文では崔載瑞神話との決別を試みた。また、韓国近代文学史には帝国日本と植民地朝鮮という無視することのできない二元的構造が存在し、またそこに文学の普遍性と自律性の承認という思想史的な次元において西欧が存在していた様相を見せているが、このとき韓国文学が向き合っていた日本と西欧という他者性の外部観念の中で思想が有している本来的な外部性と外来思想の弁別の仕方を、崔載瑞を通して明らかにした。崔載瑞が、当時の朝鮮の主流文人と区別される点は、彼がイギリスのロマン主義とモダニズム、そして帝国日本の国家主義文学という外部的な参照枠を通じて自身のナショナリティを構成していく主要な経路としたという点にある。よって、西欧―日本―朝鮮の力学的な関係や階級文学―民族文学―海外文学という三角関係の枠組みの中で彼の批評における推移を考えるとき、崔載瑞は外国文学を皮相的な受容の次元にとどまらず―すなわち英文学や日本文学などの外来思想を追求したのではなく―、文学という普遍性、人類共通の真理に向かおうとする強力な意志を具現していたという点を否定することはできないという点で、彼の批評的な道程が貫く核心的な問題群は思想の本来的な外部性を目指すことに置かれたといえる。よって、崔載瑞のロマン主義とモダニズム、そして「国民文学」はそれぞれ西欧と日本のものそれ自体であるというよりは、一定程度外在性の場所として残っていることを明らかにした。要するに、崔載瑞の批評にはイギリスのロマン主義と日本の国家が絶対他者として君臨していたといえるが、このとき絶対的であるためにロマン的に内面化し得たのがイギリスのロマン主義だったとすれば、一時的に存在した相対的な(絶対)他者であったために、絶対に内面化できないまま突然向き合うほかなかった日本の他者性とは明らかに区別される。崔載瑞にとって、相対化された絶対他者を通過したのちに残ったものは、もう一つの審級としての絶対他者、すなわち文学への回帰であった。したがって京城帝大の英文学専攻時代の彼はロマン主義というよりは文学主義で、日本はそれほど重要ではなかったのであり、彼がモダニズムへと進んでいったのは朝鮮文学の発見とともに自覚的に批評の方法論を模索していた時期と考えることができる。そして「国民文学の時代」にはむしろこの間持続的な探求の対象となっていた「文学」を喪失した時期、いわゆる「皇国臣民」のための図式的な文学に従属していた時期であったという点で、崔載瑞の全体的な文学批評人生を通じて考えるとき、一種の「例外的な時期」に該当する。彼が「まつろふ文学」を美学的に止揚しようとしたにもかかわらず、それが有している「絶対矛盾的自己同一」という「無の論理」の矛盾を完全には否定することができなかったためである。 主題語:崔載瑞、ロマン主義、モダニズム、国民文学、思想、批評、近代

      • 『國民文學』 소재 소설에 나타난 ‘국민화’ 연구 : '신생활'의 이상과 균열을 중심으로

        カミヤ, ミホ 韓國外國語大學校 大學院 2009 국내박사

        RANK : 248671

        This thesis focus on a concept of 'nationalization (kookmin-hwa)' appeared in the novels and the discussions of the magazine, National Literature(Kook-min munhak) which published in early 1940s. Harootunian explains that there were two kinds of forms of modernism at the same time for the Japanese modern times period. One was a 'modern life' which was going to receive western culture positively, and the other was a 'new life' which was going to trying unify tradition and daily life. In the end of 1930's, the 'new life' which established by Japan was a theory to aim at the 'contemporary age', however, it broke off the 'modern life' and divided into the two kinds of times. The 'new life', in other word 'Contemporary life' demanded the use of national language as a only common language and it aimed at the life that prepared for war. Such a tendency is just reflected on the discussion and the novels. On the nationalization magazine, discussions were held to examine the problem that focused on that situation, and Korean and Japanese intellectuals attended it and exchanged their opinions. If we examined in detail the agenda of these discussions, we can understand the matter which the Korea literary world should solve. The agendas taken up on these discussions were the specialty of the Korea literature, the issue of creation in national language(kokugo) and the subject to keep new 'national feelings' alive for creation. Judging from a flow of the times, the subject of concern of these discussions and the tendencies are classified in three kinds; Japan-Korea unification(naisen-ittai) and nationalization, war and mobilization, and a failure for the colonial policy and cracks of imperialism. Such a tendency also appeared in these novels in the same way. The aspect of Korean people's nationalization were possible to be examined from a viewpoint of the discovery of the 'new life' through the works of Lee Seok-hoon and Jung In-taek. On the other hand, Japanese novelist drawn the aspects that 'national feelings' was going to be tempted from the Japanese side in a process of Japan-Korea unification, or the aspect that a Korean was going to choose the direction positively by oneself. In case of AOKI, Hiroshi, and a Korean writter from a farm village internalize the Japanese logic comparatively easily and was unconscious of 'modern life' and 'new life' and did not distinguish it, but wrote the work which affirmed 'nationalization' by Japan positively. After the outbreak of the Pacific war, the creation that focused on daily life, war and the mobilization had been released. To begin with, TANAKA Hidemitsu released the work to introduce a concept of the war literature demands to Koreans to become a 'nation' through the work which also teaches a concept of the opposite 'unpatriotic person' or aimed at Koreans themselves becoming a 'nation', and a lot of work which was going to become self-colonization were created. And internalization of the Japanese logic and the distance before making it his' was described as the intellectual of the Korean reflected on the work of Jung In-taek. A fret of the intellectual who was going to advance earlier than another person oozed out from his work. However, the state that failed in new life is also drawn by a novel carried by National Literature. Lee Seok-hoon shows the flow of the times toward the 'new life' from a 'modern life' in his novels. He drew this process in a motif that the Korean intellectuals made an effort to acquired new thought but failed after all, and he abandoned city life which meant 'new life', and emigrated to Manchuria, where was an uncivilized area. The Korean intellect Choi Jae-so drew the sorrow of the old generation from a viewpoint called the generation of 'modern life'. Both of the Korean and Japanese writers were trying to draw the doubt for 'new life' from the Japanese novelists by describing a manner of avoiding the armed forces call, and the interchange of a Korean high school student and a Japanese teacher. As for the intellectuals all the members those who participated in 'National literature' were not flattery always-like in the situation. They began to hold doubt in 'new life' because military gains were not desirable, so the intellectuals who were along the Japanese logic reached abandonment of 'nationalization'.

      • '국어' 글쓰기와 '국민문학'의 성립

        김효진 연세대학교 대학원 2011 국내석사

        RANK : 248671

        국가어 또는 민족어라는 개념의 형성은 제도적 수행을 근간으로 하는 근대화의 통시적 과정과 밀접히 결부된다. 근대의 세계체제를 개별자로서의 행위 주체들이 복수적으로 참 여하는 역학관계로 이해할 경우, 근대적인 주체로 거듭나는 과정이란 이 복수의 세계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타자의 형상을 대타화하여 자민족 ? 국가의 자기동일성을 확보하려는 시도로 풀이될 수 있다. 식민지 시기 조선에서 빚어진 이중 언어상황은 세계체재를 밑바탕으로 하는 ‘언어적 근 대’의 개별적 실현이 제국과 식민지라는 이원적 역학의 관계로 귀결되는 역사성을 체현한 다. 일본의 제국주의적 구상 속에서 조선은 ‘제국 일본’이라는 새로운 단일체의 구성적 외 부로 포섭된다. 균질적 언어로서 제국의 국어를 이념화하는 것이 제국의 기획과 맞물려 있다면, 그 언어적 제도를 가시화하는 동력은 식민지라는 배타적 기원에서 유래한 이중 언어의 상황을 부정하는 것에 앞서, 그것을 적극적인 정치적 현실로 이해하는 것으로부터 형성되는 것이다. 이 점에서 식민지의 조선어는 제국의 국어인 일본어에 대립하는 외적 잔여물에 그치지 않는, 제국 내부의 영토, 즉 식민지의 언어로서의 ‘언문’으로 표지된다. 근대 계몽기 대한제국의 독립국가적 체모를 주장하는 ‘국문’ 운동이 활발히 일어나는 가 운데, 언문이라는 단어는 과거의 유교적 세계인식을 반성하는 문맥 속에서 활용된 바 있 다. 따라서 병합 이후 일본어가 국어로 도입되면서 조선어에 재차 언문의 위상이 부여되 었을 때, ‘국어’가 내포하는 배제적 논리는 국문으로 수복되었던 조선의 언어적 균질성 자 체를 박탈하는 것으로 드러난다. 언문으로서의 조선어를 통해 균질성을 회복하려는 시도는 ‘조선어학회’를 중심으로 한 어문운동과 문학적 근대성을 지향했던 조선 문단의 성장에서 발견된다. 조선 문학이 언어 라는 매재를 통해 조선인의 동질성을 형상화할 수 있다는 예술성에의 전문적 인식은 의 사소통의 기본 수단으로서 표준화된 언어를 수립하려는 어학 분야의 전문화와 무관치 않 다. 반면 이때 ‘문학적인 것’으로 분절된 문학어만의 고유성은 ‘표현 불가능성’에 천착함 으로써 드러난다. 의미 전달과는 상이한 차원에서 전개되는 감각의 물질적 체현을 추구하 는 가운데, 문학은 조선어가 아닌 다른 언어로는 번역할 수 없는 동일성의 최종적 심급을 그 예술적 재료로 삼는 것이다. 이러한 문학어의 본질적 속성을 형용하는 조선어의 표상 이 ‘모어’였다고 할 수 있다. 모어의 발견과 추구로 구체화되는 조선 어문 활동의 흐름은 배타적인 종적 동일화의 양식을 구축한다는 점에서, 실상 국어가 가정하는 균질화의 논리를 대리한다. 이 점에서 모어라는 조선어의 위상은 일본의 국민국가적 언어 편제 아래에서 필연적인 긴장관계를 유발하게 된다. 식민지 조선에서의 국어교육은 다만 잠재적으로 일본어의 모어적 습득을 목표로 가정했다. 1894년 청일전쟁을 즈음해서 본격화된 일본의 ‘코쿠고’ 개념은 일본정 신을 국민의 기초 자질로 수양하기 위한 입안이었으며, 이미 식민지에 대한 교육 정책으 로 구상되고 있었다. 그러나 이러한 정책의 본격적인 적용은 실상 중일전쟁의 발발, 태평 양전쟁으로의 확대로 이어지는 전시체제에 돌입하기 이전까지 가시화되지 않았던 것이다. 이러한 배경에서 ‘모어=조선어’는 언문이라는 지위에 내포된 국어와의 위계구도를 깨뜨리 고, ‘모어≠일본어’의 대타성을 노출시키는 이중 언어적 교착 상황을 이끌어낸다. 1940년대 언어와 사상의 일체관 아래 국어 상용이 곧 일본 정신에 귀의하는 길로 강조 되면서, 모어로서의 조선어가 환기하는 교환불가능성은 투명한 균질체로 상정된 국어의 형상에 균열을 일으키는 외적 요소로 적시된다. 반조적으로 형성된 ‘국어’와 ‘모어’의 대 립구도는 ‘<제3차 조선교육령> 시행기’에 이르러 심화된다. 1940년 8월의 ??조선일보?? ? ?? 동아일보?? 폐간, 1941년 4월의 ??문장?? ? ??인문평론?? 폐간 등의 사건이 대표하는 바, 이 시기는 공공기관을 통한 조선어 유통의 금지가 보다 강압적으로 이루어졌던 때이기도 하 다. 그리고 이와 같은 조선어와 일본, 모어와 국어의 이중적 언어구도가 빚어내는 갈등의 한 가운데에, ??국민문학??이 자리한다. 국어를 통한 문학적 글쓰기에 대해 이루어졌던 조 선인 작가들의 논의 속에는 작가 개인의 일본어 구사 능력이라는 실제적 측면 이전의 근 본적인 문제제기가 담겨 있다. ‘문학’이라는 예술 형식이 요구하는 매재의 동질화가 삶 혹 은 몸에의 밀착성을 지향한다는 문학과 언어에 관한 인식이, 대조적 형상으로 배태된 ‘모 어’와 ‘국어’의 불일치성을 문학적 글쓰기가 불가능해지는 시점으로 소급하기 때문이다. ?? 국민문학??의 창간은 모어의 회복을 통해 문단이라는 제도를 성립시켜왔던 ‘조선문학’의 실체가 완전한 재정립을 모색해야하는 임계점을 나타낸다. 모어와 국어의 교착적 병존이 더 이상 지탱될 수 없다는 의미에서, 해소의 방안은 (국어와 모어가 일치하지 않는) 식민 지적 언어주체와 (국어를 모어로 삼는) 제국적 언어주체 사이의 존재론적 위치를 재설정 하는 것으로 구체화된다.

      • 일제 말기 국민문학론과 국민시 연구

        이상옥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박사

        RANK : 248670

        The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became a main object of attention of modern literature study in the 2000s. It was subsequent to that nationalism discussion was criticized, post modern ․ post colonialism emerged and the study of pro Japanese was revitalized. Especially, the enforcement theory of the nationalistic standpoint was off the point, therefore discussion about spontaneity of collaboration with Japan, its internal logic, the crack of colonization discussion was rapidly produced. However, these discussions have regular limitation in the way that the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was considered to political extension. On the basis of the a critical mind, I made a conclusion that Josun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should be considered to be a space of discussion for 'literary/political' signifier. Accordingly, in this article, I payed attention to aporia - incompatible of literature and politics that is a modern literature idea. According to this idea, I discussed about the national literature theory and poetry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From the Sino-Japanese war to the Pacific war, under the war footing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politics is behind the lives. Especially, as a main agent of language patriotic, literature came into close relation. This means that politics which was eliminated as others should be brought into the field of literature. Therefore, those writers had to keep in mind 'the combination of literature and politics' under political compulsion. According to this, in national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there is a diversity of opinions about the combination of literature and politics. I judged those literacy and political ideas should be considered to be a core of national literature. That why I made a conclusion that the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is the literary/political discussion. In this article, to understand the literary/political character of national literature and poetry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as preparatory consideration, I tried historic, theoretical consideration that is about Korean modern literature history which is related to division of art, aesthetic establish and esthetic autonomy. In the 18th century, art got free from integrated artistic system and started to build self -regulating system. Pure art was created, as a result, art was strongly related to esthetics. From this time on, the polarity of pure art more cleary recognized and art was no longer compatible with artistic others. It's inevitable result of establish of esthetics art system and extinction of integrated artistic system. The flow of Korean literature isn't also much different in aspects of establish of esthetics of autonomy. It's because modern literature was basically created based on polarity system of modern art. Colonial modern literature reached the last period of Japanese through the literature upgrade of Englishment, the division of literature concept in the 1910s, the struggle and reinforcement of esthetics autonomy in the 1920s, the establish of esthetics identity in the 1930s and the period of the ideological blank in the late 1930s. From Enlightenment to modernism literature in the 1930s, colonial modern literature has gradually established paradigm of aesthetics autonomy. Since then, colonial modern literature has lost its political function due to wartime system reorganization that caused by the Sino-Japanese war, ideological blank which caused by western modern bankruptcy. As a result, Josun colonial writers got into the period of national literature due to ideological blank and reinforcement of pure literature. As national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was derived from Go-ku-min-bun-ga-ku, it was ambiguous signifier given in colonial Josun for wartime and in the process of interpretation of the signifier, great confusion arose. The confusion was about where to place the focus of 'national literature'. The writers who focused on 'nation' criticized 'silent' of the writers and the writers who focused on 'literature' criticized the restriction and coarseness of the work. This opinion gap means that the idea of incompatible of literature and politics had still existed. As a result, in the last period of Japanese, the theory of national literature and poetry was concluded with conflict between esthetics and politics. In the last period of Japanese, national poetry wasn't the term which designate the poetic tendency. There wasn't restriction about concept or category of national poetry. That's why esthetical literature had been able to created continuously. In this regard, national poetry in the last period of Japanese should be considered more inclusively. National poetry can be divided into esthetics and politics according to 'literary/political' point of view. In this article, as I investigated the reason why the literature of the last period of Japanese should be read from 'literary/political' vantage point, it's meaningful that brought up the possibility to take a view of contemporary literature more generally. However, there's a limit that national literature couldn't be considered with regard to social, culture and wartime history. Also, as rising poets and Japanese poets were excluded from the object of discussion, unlike my original intention, national poetry couldn't be treated in general. Through the follow-up discussion, this limitation will be needed to compensate.

      • 최남선의 고시조 수용작업과 근대전환기의 문학인식

        윤설희 성균관대학교 2014 국내박사

        RANK : 248668

        최남선의 고시조 수용작업은 근대라는 경계적 시기에 시조가 당면했던 장르적 변화의 과정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는 작업이었다. 전대에 창작, 향유되었던 시조를 모으고, 추려내고, 활자화하고, 또한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풀어낸 논설을 작성하는 최남선의 활동들은 일정한 연관성을 지니고 있었으며, 상당히 체계적이고 조직적이면서도 지속적인 것었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이 같은 최남선의 활동에 대한 다각적인 고찰을 통해 시조에 대한 그의 문학적 인식의 변화뿐 아니라 그 과정에서 이루어진 시조의 재생산 과정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고전시가사에서 20세기 초, 근대전환기 시조가 지니는 문학사적 가치와 그 의의를 최남선을 통해 짚어보고자 한 것이다. 최남선이 수행한 고시조 수용작업은 약 20여 년간에 걸쳐 크게 3가지 차원에서 이루어졌다. (1) 고시조를 수록한 잡지, (2) 활자본 가집, (3) 시조 관련 문학 담론 사설이 그것이다. 본고에서는 각각의 작업이 진행된 시기적 순서에 따라 그 구체적인 특징과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Ⅱ장에서는 <소년>-<남훈태평가>-<가곡선>으로 이어지는 최남선의 초기 고시조 수용작업에 대해 살펴보았다. 이를 통해 최남선이 고시조를 근대적 매체에 소환하는 최초의 시도를 보여주었던 잡지 <소년>이 ‘소년’을 ‘국민’으로 양성하기 위한 교육담론 위에서 고시조를 수용하였으며, 고시조를 근대적 지식의 일부로 편성하기위한 노력을 기울였음을 알 수 있었다. 또한 <남훈태평가>를 저렴한 가격에 다수의 대중들에게 보급하고자 했던 최남선의 의도는 곧 고전문학 향유문화의 확산을 위한 것이었음을, 텍스트의 선별과 배제의 기준을 ‘전범성’의 미학에 두고 있었던 <가곡선>은 누구에게나 모범이 될 만한 정전에 대한 기획이었음을 알 수 있었다. 이같은 최남선의 초기 고시조 수용작업에 대한 고찰을 통해 이 시기 최남선은 시조의 양가적 속성, 노래로서의 음악적 담론과 시로서의 문학적 담론에 대한 구분에 큰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는 살필 수 있었다. Ⅲ장에서는 <청춘>을 기점으로 후반부에 이루어진 최남선의 고시조 수용작업을 살펴보았다. <청춘>을 통해 그는 고시조를 수록하는 새로운 방식을 보여주었는데, 이는 지식의 범주를 넘어서 문화 향유를 통한 인격의 완성으로서의 교양의 범주에 고시조가 수용되었다는 사실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또한 <청춘>을 기점으로 최남선이 시조를 문학적 담론 위에서 이해하기 시작하였음을 살필 수 있었다. 따라서 이후 고시조에 대한 3편의 논설을 통해 그가 조선의 국민문학으로서 시조가 지니는 문학사적 가치에 대한 이론적․학술적 접근을 시도 하였으며, 그에 대한 실천적 방편으로 언어체로서의 시적 담론에 기저한 시조집 <시조유취>를 발간했음을 알 수 있었다. Ⅳ장에서는 최남선의 고시조 수용작업이라는 문학적 실천이 지니는 시가사적 의의를 고찰하였다. 고시조를 수록한 2종의 잡지, 3종의 활자본 가집 그리고 3편의 관련 논설을 통한 그의 고시조 수용은 모두 새롭게 등장한 고전시가의 소통매체를 기반으로 이루어진 작업이었다. 즉 고시조라는 전통을 현재적 관점에서 재해석, 재편성하는 과정을 통해 많은 사람들에게 오랫동안 꾸준히 향유될 것을 기획, 구상한 문화적 실천행위였다는 점에서 의의를 지니는 것이었다. 또한 그의 고시조 수용은 근대적 학술 개념으로서의 문학의 자장 안에서 이루어진 작업이었고, 이는 곧 고전 문학의 성립을 의미한다는 것임에 의의를 지닌다는 점을 살필 수 있었다. 이같은 최남선의 고시조 수용은 급변하는 20세기 초 고전시가의 부침을 여실히 담아내고 있는 작업이었다. 새로운 소통매체와 향유 계층의 확대, 그리고 서구 및 일본의 영향으로 재구성된 근대적 학술-지식 체계의 영향 하에 놓여있었던 고전시가의 변화상을 그대로 반영하고 있는 것이었기 때문이다.

      • 서정주 초기 시적 담론 연구

        허요한 성균관대학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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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고는 서정주 1940년대 서정주 문학의 자기서사 방식에 대한 문제의식을 바탕으로 작성되었다. 이 시기 서정주의 문학은 국가와 개인의 관계 설정에 관련된다. 근대 도시문명에 대한 소외의식에서 출발한 그의 문학의 경로는 시인이라는 특수한 주체를 통해 부정적 현실을 극복하려는 의지로 수렴되었다. 그러나 문학을 통해 구축한 미학적 영토는 신체제기에 이르러 국가 담론에 포섭되었다. 시를 통한 자기 극복의 의지는 현실의 정치적 상황과 문학장의 제도 구축으로 인해 제한적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환경으로 주어진 현실에 순응하면서 그 구조 속에서 특수한 주체의 권위를 유지하려는 능동적 시도는 지속되었다. 따라서 서정주의 친일행적 이전과 이후는 시인이라는 특수한 주체에 대한 욕망의 서사로서 연속성을 갖는다. 그는 시인의 역할에 대해 언어적 지도관을 제시함으로써 현실을 혁명하는 것으로 보았다. 국민 ‘정화’의 시론은 해방기 『동아일보』 편집장의 위치에서 제기되었지만, 그것은 또한 일제 말 잡지 『국민시인』의 편집의도와 일치한다. 서정주의 ‘현실극복의 의지-권위에 대한 의지’는 형이상학적 미학의 차원으로 그치지 않고, 문학장 재편의 실제적 운동으로 실현되었다. 이는 시인이자 동시에 잡지·신문 편집장으로서의 역할 수행과 함께 이미 해방기에 예술원 성립을 추진했다는 점에서 드러난다. 따라서 서정주의 문학적 기도는 현실 반영보다는 현실과 동시에 일어나는 담론 구축 행위로 볼 수 있다. 담론행위로서 그의 시를 분석하는 것은 따라서 시대적 맥락에 따른 ‘의도’를 이해하는 작업이다. 이는 일종의 개념사 분석을 필요로 한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해 불가피하게 친일 행적을 할 수 밖에 없었다는 자서전의 주장과는 달리, 서정주 문학의 주요 시어인 ‘꽃’과 ‘사랑’의 시대적 용법과 변이양상을 살펴봄으로써 반복되는 자기서사화가 갖는 ‘의도’가 무엇인지 이해할 수 있다. 초기 시에서 ‘꽃’은 자기 극복을 위한 미학적 영토를 상상하는 의미를 가졌지만, 일제 말과 해방기에는 새로운 ‘국가’를 환기한다. 이를 통해 1940년대 서정주는 시인이라는 특수한 주체의 권위를 유지하기 위해 ‘국가’의 ‘국민’이 되고자 하는 욕망을 갖고 있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러한 권위에 대한 욕망이 불가피한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는 자기 방어의 논리가 ‘자손지계’로 치환될 수 있는 ‘생활’이었다. ‘생활’은 거대 국가 담론에 반하는 개인의 일상사를 보여주는 동시에, 자신의 사회적 구조를 생략하는 기능을 갖고 있었다. 이를 보충하는 기능을 가진 시어가 ‘사랑’이었다. 1940년대 서정주의 문학을 통한 자기 서사화는 결국 자신의 과거를 재구성함으로써 현재의 권위를 쟁탈하기 위한 의도로 만들어졌다. 그러나 이러한 의도는 서정주 개인의 의지로만 이뤄진 것이라기보다는, 문단과 사회의 이해관계가 대응한 것으로 볼 수 있다. 1930년대 말과 1940년대 초 『인문평론』의 「나의 방랑기」를 통해 서구식 모더니즘의 표상이었던 도시담론에 대응하는 신세대 논의의 결과로 도시에서 소외되었던 ‘문둥이’ 서정주가 채택 되었다. 그리고 그 연장선상에서 새로운 ‘국민문학’의 신세대로서 서정주는 자신의 능력을 인정받았다. 해방기에 있어 친일행적으로 인해 불가피하게 선택할 수밖에 없었던 우익진영의 문단은, 1948년 체제를 기점으로 ‘반공-민족시인’의 위치로 서정주를 올려놓았다. 이 시기 서정주에 대해 형이상학적 미학 추구를 통해 현실을 외면했다는 비판으로는 충분히 설명되지 않는다. 단독수립정부 아래서 정부에 반대하는 입장의 문학인은 민족시인의 위치를 유지할 수 없는 것이 당연했기 때문이다. 따라서 여순 반란 사건에 대한 서정주의 관점은 그의 문학관에 대한 적극적 해석의 근거가 될 수 있다. 정신의 ‘정화’로 표현되는 언어적 지도관은 따라서 순수문학적이라기보다는 문학-정치적 ‘의도’를 지녔다고 할 수 있다. 그 효과나 결과가 정치적 문학이다.

      • 식민지 근대와 이효석 문학

        이세주 연세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RANK : 248668

        이 연구는 이효석 문학의 내적 일관성을 규명하기 위해 다양한 양상으로 변주되면서 나타났던 근대성(Modernity)의 새로움(newness)에 대한 그의 지향과 그것이 지니는 의미를 고찰하였다.한국 근대문학사에서 이효석은 소설을 통해 ‘향토적 서정성’을 그려낸 대표적 작가로 알려져 있다. 그의 문학 역시 ‘민족의 터전’을 형상화한 것으로 소비되어 왔다. 그러나 본고의 논의를 통해 확인한 것처럼, 이효석 문학은 식민지 근대의 감각적 혼종성(hybridity)을 가장 선명하게 보여주고 있었다. 이는 여행을 떠나는 인물들의 가방 안에 담긴 물품(화분)이나 밥과 빵, 버터와 고추장, 김치와 샐러드, 커피와 숭늉이 등이 뒤섞인 ‘주리야’의 ‘칵테일식 생활양식’(「주리야」)을 통해 선명하게 드러난다. 식민지 근대는 토착적인 것과 외래적인 것이 어지럽게 뒤엉키고 전근대적인 것과 근대적인 것이 뒤섞이는 혼종의 공간이었다. 그것은 곧 향토와 이국, 토속미와 세련미, 전근대와 근대, 동양과 서양, 나아가 식민지와 제국이 한 공간에 뒤엉키는 식민지 근대의 혼종성을 통해서 만들어진 것이었다.본고는 이를 가능케 했던 요인을 근대성의 핵심적 지표인 ‘새로움’으로 보았다. 따라서 이효석이 형상화한 ‘향토’ 역시 외부에 의해 훼손당하기 이전에 민족이 지니고 있던 순수함과 정수(精髓)를 담고 있는 공간이 아니었다. 그것은 삶과 문학을 통해서 줄곧 미지의 새로운 공간을 찾아 서구와 그 문명을 동경하던 시선이 내부를 새롭게 발견함으로써 만들어진 근대적 공간이었다. 그러나 시대적 상황에 맞물리면서, 그 새로운 시선은 ‘동양’이라는 역사적․정치적 공간으로 전이되었다. 이로 인해 그 안의 ‘신체제’ 혹은 ‘신질서’의 규율을 따를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이효석은 근대성의 ‘새로움’에 매혹되어 제국의 담론장 외부를 상상하지 못했던 것이다.이러한 논의를 토대로, 고향 혹은 향토에 대한 이효석의 인식과 이를 문학적으로 형상화한 대표적 작품인 「메밀꽃 필 무렵」이 지니는 의미를 재고하였다. 이를 위해 새로운 시공간과 그곳에서의 삶을 전망․기획․개척하는 향수(nostalgia)의 메커니즘을 살펴보았다. 주지하듯이 근대성의 경험은 혁신․덧없음․혼돈스러운 변화와 같은 감각의 한편으로 안정적이고 연속적인 시공간을 희구한다. 그러므로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향수는 근대성의 경험을 구성하는 또 하나의 상상적 욕망이라고 할 수 있다. 이효석 문학에서 향수는 새로운 시공간에 대한 기획, 특히 공간에 대한 개척을 가능케 하는 요인으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 이러한 향수의 메커니즘이 작동하여 허생원의 삶을 강력하게 이끌었던 공간이 바로 ‘제천’이었다. 이와 더불어 천일마(벽공무한)가 지니고 있던 향수는 역사적이고 정치적인 공간이었던 ‘만주’를 경유하여 ‘동양’이라는 가상의 공간으로의 퇴행을 가능케 했던 한 가지 요인이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제천’과 ‘동양’은 결코 동일한 공간일 수 없으나 그곳에까지 이르는 ‘비약’을 가능케 했던 계기는 공통적으로 ‘향수’에 있었던 것이다.한편, 만주개척의 서사라 할 수 있는 장편 벽공무한에서 이효석은 만주에 드리운 명암 혹은 재생과 몰락의 감각을 동시에 포착하였다. 첫 번째 만주행에서 천일마는 ‘할빈 교향악단’을 초빙하기 위해 만주에 갔다가 채표(복권)와 마권(경마)이라는 이중의 행운에 더하여 러시아 미인 나아자까지 데리고 돌아온다. 하지만 마약 거래에 연루되어 고초를 겪는 한운산으로 인해 다시 찾게 된 만주에서는 병들어 가는 에미랴를 구제하고 돌아오기도 한다. 그러나 천일마가 이러한 행운을 누릴 수 있었던 것은 만주국의 “위대한 건설과 변화”가 있었기에 가능한 것이었다. 그런데 천일마는 이러한 행운이 가져오는 기쁨에 취해 “행복의 포화상태”에 빠져있었을 뿐 개척을 수행하는 주체가 누구인지에 대해서는 묻거나 의심하지 않았다. 결과적으로 이는 개척의 주체인 제국의 폭력을 묵인하거나 은폐하는 결과를 초래하고 말았다.마지막 장에서는 줄곧 새로움을 추구하던 이효석의 문학이 결국 ‘국민문학’으로 귀결되는 몇 가지 양상을 고찰하였다. 식민지 말기 총동원 체제 아래서 ‘국책’의 일환으로 조직되고 실시되었던 애국반과 방공훈련을 다룬 「서한」은 당시의 ‘국민문학’이 요구하던 명랑함과 건강성을 형상화함으로써 그의 의도여부와는 별개로 ‘새로운 국민문학’으로 기능하고 말았다. ‘동양’의 ‘신질서’를 만들어나가는 과정에서 만주개척의 문제와 국책을 다루었던 문학 모두는 새로운 문학의 좋은 재료로서 기능할 수 있었기 때문이다. 따라서 만주를 배경으로 하는 벽공무한이나 애국반의 방공훈련을 소재로 한 「서한」은, 작품이 갖는 무게와 질감은 다를지언정, 이효석이 자기화한 국민문학을 실현하는 양상이었다.마지막 절에서 살펴본 일본어 소설 「은은한 빛」은 친일(親日)의 ‘혐의’로부터 이효석을 자유롭게 하는 작품으로 논의되었다. 이는 그동안 잠재되어있던 ‘민족적인 것’에 대한 인식이 역설적으로 일본어 작품을 통해서 표출하기 시작했다는 이유에서였다. 이를 확인하기 위해 고구려 고도(古刀)를 바라보는 주인공의 태도와 시선 및 주인공을 둘러싼 주변 인물들과의 관계를 고찰하였다. 그 결과 피식민자인 도재욱은 식민자인 호리 관장과 경쟁하면서 “절친한 사이”를 이루고 있었다. 또한 그 둘의 시선은 서로 맞서면서 다른 방향을 보고 있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매개하면서 같은 방향을 보고 있었다. 피식민자는 ‘제국의 시선’을 이미 내면화하고 있었기 때문이다.이상의 논의를 통해서 확인할 수 있었던 사실은 ‘동반자 문학’에서 출발하여 ‘순수문학’으로, 결국에는 ‘국민문학’으로 귀결된 이효석 문학의 근저에는 근대성의 새로움이 일관되게 관철되고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는 ‘식민지 근대’ 문학의 한 귀결점을 보여주는 것이기도 하다. 이효석의 ‘개성’은 ‘시대’의 자장을 벗어날 수 없었던 것이다. 새로움이란 신기한 것(newness)인 동시에 미숙한 것(newness)이기도 했기 때문이다.本硏究は李孝石の文學を貫通する通底音を究明するために、多樣な形において?奏されて現れれている近代性(Modernity)の新しさ(newness)に對する彼の志向とそれが持っている意味を考察したものである。韓國の近代文學史において李孝石は小說を通じ「鄕土的な?情性」を描いた代表的な作家として知られている。彼の文學もまた「民族の場」を形象化したものとして消費されてきた。だが、本稿での論議を通じ確認できたように、李孝石の文學は植民地近代の感覺的な混淆性(hybridity)を最も鮮明に示している。それは旅立つ人?のカバンのなかに納められた品?(花粉)や、飯とパン、バタ?とコチュジャン(唐辛子味?)、キムチとサラダ、コ?ヒ?とスンニュン(ご飯の焦げを煮立てた食後の飮み物)などがないまぜになったチュ·リヤ(朱利耶:「朱利耶」の主人公)’ の ‘カクテルされた生活洋式’(「朱利耶」)を通じてはっきりと示されている。植民地近代は土着的なものと近代的なものが、めまいを感じさせるほどからまりつき、前近代的なものと近代的なものがないまぜとなる混淆の空間であった。それは卽、鄕土と異國, 土俗的な美と洗練された美, 前近代と近代, 東洋と西洋、さらに植民地と帝國が一つの空間において混ざりあう植民地近代の混淆性を通じて造られたものであった。本稿はそれを可能とした要因を近代性の核となる指標である‘新しさ’に見た。したがって李孝石が形象化した‘鄕土’もまた、外部により傷つけられる以前に民族が持っていた純粹さと精髓を內包している空間ではなかった。そこは生と文學を通じて最後まで未知の新たな空間を求める西歐とその文明に憧れる視線が、その內部を新たに發見することで造られた近代的な空間であった。だが、時代的な狀況とぶつかり合いながら、その新たな視線は ‘東洋’という歷史的·政治的空間へと轉移していった。そのことにより、その內部の ‘新?制’ または ‘新秩序’ という規律に從うしかなかったのである。結局、李孝石は近代性の ‘新しさ’ に魅惑され帝國の言說場の外部を想像できなかったのである。以上の論議を基に、故鄕または鄕土に對する李孝石の認識とそれを文學的に形象化した代表的な作品である「蕎麥の花の?く頃(메밀꽃 필 무렵)」がもつ意味を再考してみた。そのために、新たな時空間とそこでの生を展望·企畵·開拓していく鄕愁(nostalgia)のメカニズムを考察してみた。周知のように近代性の?驗は革新·?さ·混亂きわまる?化といった感覺の一方に、安定した連續的な時空間を希求する。であるから、新たな時空間に對する鄕愁は近代性の?驗を構成するもう一つの想像的な欲望であると言える。李孝石の文學における鄕愁は新たな時空間に對する企畵、特に空間に對する開拓を可能とする要因として何よりもはっきりと示されている。そうした鄕愁のメカニズムが?き、ホセンウォン(許生員:「蕎麥の花の?く頃」の主人公)の生を强烈に導いていった空間こそが ‘チョチョン(提川:「蕎麥の花の?く頃」の舞台となった地方名)’ であった。それとともにチョン·イルマ(千一馬:碧空無限の主人公)が抱いていた鄕愁は、歷史的で、政治的な空間であった ‘滿州’ を?て ‘東洋’ という?想の空間への退行を可能とした一つの要因であったことが確認できた。‘チェチョン’ と ‘東洋’ は決して同一の空間ではあり得ないが、そこへと至る ‘飛躍’ を可能とした契機が ‘鄕愁’ にあることにおいて共通していたのである。一方、滿州開拓の語りとも云える長編碧空無限において李孝石は滿州にたちこめる明暗、又は再生と沒落という感覺を同時に捉えていた。チョン·イルマは ‘ハルピン交響樂?’ を招請するために初めて滿州に行き、そこで彩票(?くじ)と馬券に?たるという二重の幸運に加えロシア美人ナア?ジャまで連れて?ってくる。また、麻藥取引に卷き?まれ苦境に陷った知人ハン·ウンサン(韓雲山)との關わりで再度訪れることとなった滿州では病に侵されていくエミ?リャを救出し?ってくる。だが、こうした幸運を手にすることは、滿州國の “偉大な建設と?化” があってこそ可能だったのである。ところで、チョン·イルマはこうした幸運がもたらす喜びに醉いしれ “幸福の飽和狀態” に浸っているだけで、開拓を進める主?が誰なのかについて問いかけたり疑ったりしなかった。結果的にそれは開拓の主?である帝國の暴力を?認、または隱蔽する結果をもたらしてしまった。最後の章では、最後まで新しさを追求した李孝石の文學が結局「國民文學」へと歸結してしまういくつかの点を考察してみた。植民地期末期の總動員?制の下で ‘國策’ の一環として組織され、實施された ‘愛國班(日本の隣組)’ と防空演習を扱った「書翰」は?時の「國民文學」が求めていた明朗さと健全さを形象化することで、彼の意?いかんとは別に ‘新たな國民文學’として機能してしまっている。‘東洋’ の ‘新秩序’ を創り出していく過程において、滿州開拓の問題と國策を扱う文學全ては新たな文學の良き材料として機能してしまうからである。したがって、滿州を背景とする碧空無限や ‘愛國班’ の防空演習を素材とした「書翰」は、作品が持つ重さと質感は異なってはいるが、李孝石が自己のものとした「國民文學」實現の一つの姿であった。.最後のところで考察した日本語小說 「은은한 빛(ほのかな ひかり)」は ‘親日’ という ‘容疑’から李孝石を自由にしてくれる作品として論じてみた。それは、その間潛在していた ‘民族的なもの’ に對する認識が逆說的に日本語作品を通して表出し始めたという理由からであった。そのことを確認するために高句麗の古刀を見つめる主人公の態度と視線および主人公をめぐる周?人物との關係を考察してみた。その結果、被植民者であるト·ジェオク(都在郁:主人公)は植民者である堀館長と競爭しながら“親密な關係”をなしていた。また、二人の視線はお互い正面から向き合いながら、各?別の方向を見ているのではなく、お互いを媒介としながら同じ方向を見ていた。被植民者は ‘帝國の視線’ を旣に內面化していたためである。以上の考察を通じて確認できたことは ‘同伴者文學’ から出發し ‘純粹文學’へ、そして結局は ‘國民文學’へと歸結する李孝石の文學の根底には近代性の新しさが通底音として觀察されるということである。そして、それは ‘植民地近代’ 文學の一つの歸結点を示してもいるのである。李孝石の ‘個性’ は ‘時代’ の磁場を脫け出すことはできなかったのだ。新しさとは新奇なもの(newness)であると同時に未熟なもの(newness)でもあるから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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