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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국 대각성운동이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에 미친 영향 : 초기 한국선교사의 신학과 신앙을 중심으로

        맹종재 협성대학교 신학대학원 2004 국내석사

        RANK : 249775

        미국이라는 대륙과 한국이라는 조그마한 한반도는 지극히 멀다. 그러나 너무나도 가까운 나라 중에 하나였다. 그것은 기독교를 통해 가능 하였다. 물론 역사적 맥락으로 본다면 침략주의적 발상이었다고 주장하는 면도 있음을 안다. 그러나 이러한 주장의 논쟁은 어떠한 결과를 가져오지 않는 소모적인 줄다리기 일뿐이다. 우리는 기독교의 선교사들을 통해서 이 작은 한반도의 선진 문화는 물론 기독교의 복음을 전래 받았다. 초기 내한 선교사의 대부분을 차지하는 미국 선교사들의 신앙과 신학은 초기 한국교회를 형성하는데 지대한 역할을 하였다. 아무리 땅이 다르더라도 심기워진 나무가 달라지지는 않는다. 아무리 감나무를 논에 심든, 밭에 심든, 산에 심든, 길가에 심든 나무와는 관계없다. 나무의 성장과 열매에 조금 영향을 끼칠 수 있지만 감나무에 사과 열매가 맺게 하지는 못한다는 것이다. 한국이라는 땅에 선교사들의 신학과 신앙이 담겨진 복음을 심었다는 것은 그 영향이 절대적이라는 것을 말한다. 이 비유가 딱히 정확하게 맞는 것이라고 말할 수는 없다. 그렇다 하더라도 초기 내한 선교사들의 역할이 한국교회의 형성에 엄청난 영향을 주었다는 것은 의심할 바 없다. 한국 교회에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것은 한국 개신교가 전래된 지 겨우 20여년의 시간 밖에 지나지 않았다. 가히 경이로운 일이라 아니할 수 있다. 마치 아장 아장 걷는 어린아이가 논, 밭에 가서 일을 하는 것과 같은 것이다. 이토록 빠른 시일 내에 세계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경이로운 대부흥운동이 가능하게 된 것은 두 가지 요소가 복합적으로 이루어졌기 때문이다. 하나는 그 당시 세계에 일어나고 있었던 부흥운동의 물결이 한국에도 일어나게 했다는 하나님의 역사이다. 모든 선교사가 말 했듯이 한국의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이다. 그리고 또 하나는 먼저 부흥운동을 경험하여 그 신앙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의 중보 적 역할이 컸다는 것이다. 웨슬리 부흥운동과 미국 대각성운동을 경험하고 그 신망을 갖고 있던 선교사들은 어떻게든 한국교회에도 이 부흥의 불길이 번져나길 갈망했을 것이다. 그 소망이 하디목사를 통해 시작되었고, 다른 선교사들까지 합세하여, 한국인 길선주목사를 통하여 최고조에 다다랐던 것이다. 한국의 대부흥운동에 '각성운동'이라는 이름을 붙이지 않는 이유는 여러 가지가 있을 것이다. 그러나 한국의 초기 대부흥운동의 영향은 한국 민의 깊은 침체와 도덕적 타락과 외면에서 깨우는 일을 했다. 충분히 '각성운동'이라는 명제를 붙이기에 충분하다는 것이다. 1세기 전 우리는 선교사들을 통해 놀라운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체험 했다. 세계에서 일어나고 있던 부흥운동의 역사에 가장 큰 획을 이 한 반도에서 일어나게 만들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이 가능케 하는데 우리는 선교사들의 영향이 적지 않았음을 보게 되었다. 특히 하디목사의 회심과 존스톤 선교사의 강력한 촉구와 프란손 선교의 사경회등은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가능케 하는데 주요한 요인이었다. 우리는 그러한 선교사들로부터 주어졌던 신앙적 유산을 갖고 있다. 물론 이러한 신앙적 유산 이 한국인들의 문화와 정서에 맞게 계속해서 토착화를 이루어 왔다. 그러나 성서와 기독교의 고유적인 신앙의 양식 중심은 시종일관 같은 맥락을 갖고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지금 1907년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난 지 1세기가 지나 100주년을 곧 맞이하게 된다. 이제까지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 이후 한국교회는 끊임없이 크고 작은 부흥회를 개최하고 지속되어 왔다. 그러나 1907년의 대부흥운동의 역사는 좀처럼 만들어지지 않는 것이 사실이다. 각 교회에서도 1년 한 두 번은 꼭 부흥회를 한다. 그리고 지방과 여러 가지 대외적 부흥회를 합치면 일반 성도가 부흥회의 참석과 들음은 1년 적어도 4, 5번은 되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러한 일련의 부흥회에 모든 사람들이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과 견주려 하거나 비교하지 않는다. 아니 비교할 수 없다는 것이 더 옮은 말일 것이다. 그 와중에 한국은 급속한 경제 발전을 이루었고, 사회 문화적 발전은 가히 교회가 따라갈 수 없으리만치 저 앞장 서 있다. 한국 초기 모든 선진문화는 기독교를 통해서 들어왔다. 그 주도력은 1970년대까지 지속 되었다. 그러나 지금은 어디에도 한국 기독교가 한국 사회와 문화를 주도하고 있다고 말할 수 없다. 아니, 이제는 기독교를 외면하고 있다. 그리고 풍요해진 경제적 요인과 문화로 인해 사람들은 교회와 기독교의 필요성을 찾지 못한다. 교회가 사회를 깨우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그들의 죄악과 부패함을 지적하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흡사 지금의 한국 사회와 기독교의 모습은 마치 미국의 2차 대각성이전의 모습과 비슷하다. 지금 한국 교회에서는 'Again 1907'이라는 표어를 가지고 각 교회와 선교단체에서 부흥을 외치고 있다. 1907년 한국 초기 대부흥의 역사가 일어나길 간절히 갈망하고 있다. 그러나 지금은 한국 초기 때와 같이 선교사들이 있어 영향을 끼치는 시대도 아니다. 아니, 오히려 세계 기독교의 주도를 한국이 하고 있다. 그 나라 한 가운데서 다시 부흥이라는 말이 필요하다고 그 가운데 스스로 각성하는 것이다. 마치 유럽의 웨슬리 부흥운동과 미국 1차 대각성운동처럼 그 시대 속에서 부흥운동이 일어나지 않으면 안 될 것을 모두 깨달았듯이 지금 한국 교회는 누군가 아무라도 부흥을 외치지 않을 수 없게 된 것이다. 우리는 우리 역사에서 세계에서 가장 강력하고도 깊었던 대부흥운동의 체험을 갖고 있다. 우리는 이것을 1세기의 걸친 역사를 지나오면서 잃어버렸다. 그리고 하나님을 떠났다. 역사는 순환된다고 했다. 역사는 살아있는 교훈이라고 했다. 그 역사가 지금 한국 교회와 기독교에게 말하고 있는 것이다. 다시 일어나야 한다고,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재현해야 한다고, 그래서 한국사회의 전반에 걸쳐 변화를 창출해야 함을 1907년의 대부흥운동 역사는 말하고 있다. 한국 교회는 그 어느 나라보다는 아직까지 경건주의 신앙과 복음주의적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우리의 증조할아버지로부터 할아버지에게, 할머니가 체험한 그 신앙의 유산을 어머니에게, 그리고 지금 우리에게 이어지고 있다. 1907년의 역사의 중심이었던 그 신앙의 불꽃이 얼마든지 우리 깊숙한 저 곳에 피어있다. 이제는 참다운 회개와 성령의 역사로 다시 한번 1907년의 대부흥운동을 21세기의 이 시대에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미국 대각성운동의 영향으로 선교사를 파송하고, 세계에 부흥 운동이 전개된 것처럼, 이제는 한국의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다시 쓰는 주역이 되어야 할 것이다. 성령의 역사는 번져간다. 그러기 위해서는 바른 신학과 신앙의 양태를 가지고 균형 잡힌 부흥운동을 일으켜야 한다. 나는 확신한다. 이제 곧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일어났던 것과 같이 제2의 대부흥운동이 일어나게 될 것을 확신한다. 앞으로 올바른 부흥운동이 일어나게 하기 위해 그리고 세계에 그 부흥운동이 퍼지게 만들기 위해 우리는 준비해야 한다. 첫째는 바른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바른 신학의 정립은 마치 집을 짓는데 기초와 같다. 얼마나 바른 신학이 정립되느냐에 그 부흥운동의 파워와 영향과 지속력이 결정되는 것이다. 지금의 시대는 신학이 참으로 다양하다. 마치 19세기 미국에 자유주의 신학이 팽배한 가운데 복음주의적 보수신앙이 2차 대각성을 불러일으킨 것처럼 바른 신학의 정립이 필요하다. 두 번째는 기독교의 지도자들은 말씀운동을 먼저 선행시켜야 한다.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이 세계 그 어떤 부흥운동보다 다 강력하고 건강할 수 있었던 것은 말씀 공부 하는 사경회의 부흥회가 꽃을 피웠기 때문이다. 결국 기독교의 모든 운동의 정통성은 말씀에서 찾아야 한다. 그런 반면에 지금 한국교회의 강단에서 선포되어지는 말씀은 복음에 입각한 말씀의 선포라기보다는 하나의 '좋은 강연' 같은 '세미나'에 치중한다. 1907년 대부흥운동에서 강력하게 촉구하였던 '회개'의 말씀보다는 '축복'에 관한 말씀에 편중되어 있다. 한국의 기독교 강단의 편중되어 있다는 것이 많은 전문가들의 견해이다. 각 교회에서 다채로운 문화 행사는 많이 하는 반면에 사경회를 통해 깨달음을 주지는 않는다. 이러한 모습으로는 대부흥운동의 역사를 만들 수 없다. 세 번째는 다시 불붙어야 할 기도운동이다. 한국 초기 대부흥운동을 통해 한국교회에 생긴 좋은 결과를 들라면 단연 '새벽기도'와 '철야기도' 이다. 그러나 지금 많은 교회에서 새벽기도와 철야기도가 없어지고 있다. 아니면, 그 이전만큼 많은 성도들이 모이지 않거나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다. 대부흥운동은 기도운동과 함께 되었다는 것을 인식한다면 한국교회에 기도운동은 반드시 필요하다. 이제 우리는 새로운 시대에 살고 있다. 지금의 세대는 대부흥운동에 대해 전혀 알지도 못하고, 그러한 성령체험도 전혀 경험해 보지 못하고 신앙생활을 하는 경우가 많다. 이제는 한국교회를 깨워야 한다. 한국교회를 깨운다는 것은 세계를 깨우는 것이 될 것이다. 어딘 가에서부터 성령체험을 통한 대부흥운동이 일어나면 1세기 전에도 그랬듯이 세계로 번져 나갈 것이기 때문이다.

      • 칼뱅의 성찬신학에서 본 프로테스탄트 이미지 신학의 가능성

        노병균 총신대학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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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제의 제기] 본 논문은 기독교 역사 속에서 등장했던 이미지들의 약사를 살펴보고, 16세기 종교개혁 이후 등장한 프로테스탄트 진영의 이미지 신학의 가능성을 역사적으로 고찰한 것이다. 즉, 금단의 열매, 혹은 고리타분한 논쟁으로 여겨질 수 있는 기독교 이미지에 대한 역사적·신학적 연구이다. 많은 사람들은 이 논문의 제목만 보고, ‘이미 끝난 이야기’ 혹은 ‘빨간색 색안경’을 들고 싶은 충동을 느낄지 모르겠다. 그러나 이것은 ‘이미 끝난 이야기’이거나 우리 개혁교회와 이웃하고 있는 ‘저쪽 동네(가톨릭)의 이야기’만은 아니다. 적어도 필자의 생각에는 종교개혁 이후 지금까지 살아있는 몇 안 되는 논쟁의 활화산이요. 현대 교회의 실천적인 문제이다. 필자도 “너를 위하여 새긴 우상을 만들지 말고…….”라는 십계명의 제2계명과 “중세 성상 숭배는 우상 숭배와 같다”라는 일반적인 명제를 이미 알고 있다. 그러나 이 두 가지 명제만으로 눈을 가리기에는 내 주변을 둘러싸고 있는 이미지가 너무나 많다. 나도 이미지가 없었으면 좋겠다. 이 골치 아픈 주제들을 생각하면, 정말 우리 교회는 이미지가 없는 흰색 벽으로 둘러싸인 정방형의 집이었으면 좋겠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않다. ‘우상’, ‘성상숭배’라는 날카로운 비판 덕에 치워진 교회의 빈자리에는 어느새 국적 모를 수많은 이미지들이 들어와 있고, 이제는 멀티미디어의 발달로 몇 년 전까지 예배당 안에 남아 있던, 기독교 이미지의 마지막 상징인 십자가가 내려진 그 자리에 대형 스크린이 걸려 있다. 그리고 그 백색 스크린 위에는 예배 시간 내내 수많은 이미지들이 지나간다. 그 이미지는 신자들의 손에서 성경도 빼앗아 가고, 찬송가도 빼앗아 갔다. 이런 현실 속에서 종교개혁자들이 주장했던 기독교 이미지의 정체성에 관심을 두게 되었고 오늘날의 현실이 과연 종교개혁자들이 바라던 상황인지에 의문을 품게 되었다. 이런 화두는 몇 가지 작은 질문을 잉태했다. 종교적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서방 가톨릭교회를 개혁하며 등장한 개신교가 가톨릭교회의 전통과 구별되는 중요한 내용이기도 하다. 어느새 “형상을 만들지 않는다”는 것은 가톨릭과 구별되는 개신교만의 특징인 것으로 여겨지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우리의 주변에 형상이 없을까? 교회 첨탑 위에 높이 솟은 십자가는 형상이 아니고 그 무엇인가? 그리고 다소 조잡하기는 해도, 많은 교회의 유리를 장식하는 스테인 글라스는 무엇인가? 그리고 큰 고민 없이 ‘성화’라고 불리는 ‘종교화’는 개신교도들에게 무슨 의미를 던져 주고 있는가? [논문의 목적] 이와 같은 문제 제기에 따라, 이 논문은 “프로테스탄트 교회 내에서의 바른 이미지 신학이 가능한가?”를 기독교 역사 속에서의 이미지에 대한 고찰을 통해 접근해 보고자 한다. 그러나 역사적 고찰이 프로테스탄트 신학 내에서 이미지에 대한 태도를 모두 설명해 주지 못한다. 이에 우리는 역사적 진행 속에서 필연적으로 만나는 프로테스탄트 신학의 인큐베이터인 16세기 종교개혁 시대의 이미지 논쟁을 조명하게 되며, 그 가운데에서도 프로테스탄티즘 원리를 가장 잘 대변하는 칼뱅주의Calvinism를 고찰하게 된다. 그리고 그 가능성을 열어주는 통로로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성례(聖禮), 즉 칼뱅의 성찬신학의 회복에서 타진해 보고자 한다. 교회의 역사 속에서 이미지가 교회와 무관했던 시대가 있었던가? 기독교의 역사뿐만 아니라, 유대교를 포함한 성경의 역사 속에서 시각적인 이미지와 성경의 이야기가 무관한 때는 없었던 것 같다. 그러나 또 다른 역사의 한 편에는 이 이미지가 인간의 마음을 훔쳐가는 우상으로 전락하는 경우도 있었다. 무엇이 사실이며, 그 사이에 있는 긴장의 실체는 무엇인가? 결국 이 논문의 목적은 이 시각적 이미지와 성경, 그리고 교회사와의 관계를 밝혀, 바른 프로테스탄트를 넘어 기독교의 이미지 신학의 가능성을 고찰하는 것이다. [논문의 방향] 역사적인 논쟁이나 이슈들에 대한 연구는 역사적인 흐름을 이해하는 것이 중요하다. 따라서 다소 선행연구와 중복되는 부분이 있더라도 기독교 이미지에 대한 역사적인 접근을 먼저 살피는 것은 필수적이다. 또한 역사적 흐름들에 대한 연구는 신학적 접근을 필요로 한다. 이 논문의 목적은 역사적 논쟁의 타당성을 밝히는 데 있는 것이 아니라, 그 논쟁이 함의하고 있는 신학적 의의와 칼뱅의 개혁신학과의 관계에서 진행되는 발전적 방향을 찾는 일이다. 따라서 연구의 방법에 있어서 성격을 비롯한, 역사적 텍스트를 분석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즉 역사적 흐름에 따라, 각각의 중요한 텍스트를 살피고, 그 논쟁과 텍스트가 함의하고 있는 기독교 이미지에 대한 정체성을 밝혀, “보이는 말씀”으로서의 칼뱅의 성찬신학과의 연관성 속에서 바른 프로테스탄트 이미지 신학의 가능성을 타진해 본다.

      • 곤잘레스의 역사서술에 관한 분석

        고철규 웨스트민스터신학대학원대학교 2005 국내석사

        RANK : 249775

        교회사 서술이란 신학의 한 분과로서의 역사에 대한 이해를 담고 있다. 왜냐하면 교회사 서술 방식은 인간중심의 보이는 역사만을 서술하거나 모든 인과관계를 밝히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역사하심과 역사의 개입을 더욱 중요하게 살피는 것이기 때문이다. 이런 이유로 교회사는 역사신학이라고 명명하기도 한다. 즉 기독교의 역사이해는 역사철학이라기보다는 역사신앙에 더 가까울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학문이 가지는 객관성을 외면하지 않으면서 보이지 않는 역사와 그 흐름에 관하여서도 외면하지 않는 것이 중요한 자세로 요구된다. 특히 역사이해 역시 신학적 입장이라고 할 때에 개혁주의적인 안목을 가진다고 하는 표현은 성경이 강조된다는 또 다른 표현이라 할 수 있다. 이 안목 속에서는 단지 성경을 인용하는 것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성경의 사상과 가르침을 인정하면서 교회사를 서술하는 것을 중요하게 여긴다. 그러나 교회사에 관한 많고 다양한 서술들을 보면 객관적인 자료들은 풍성하게 제시하였으나, 성경이나 성경의 가르침과는 상관없이 단순히 교회의 흐름이나 활동을 정리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이러한 역사서술을 어떻게 보고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문제를 상세히 다루고자 한다. 그 대표적으로 한국교회와 신학교에서 많이 사용되는 곤잘레스의 교회사 기록방법에 대한 분석과 그 신학적 전제 그리고 그 신학에 대한 전반적인 평가를 기술하고자 한다. 특히 곤잘레스 자신만의 독특한 신학적 분류인 A, B, C 유형과 그 역사관을 분석함으로 그가 왜 유형 C를 현대적 대안의 신학으로 제시하게 되는가를 살피게 될 것이다. 즉 곤잘레스의 역사서술 방법은 성경에 근거한 것이라기보다는 자기 전제에 입각한 실용주의적 해석을 담고 있으며, 개혁주의적인 사고와는 차이가 난다. 그러나 그의 역사서술은 대중적인 교회사 서술이기에 신학적인 고민을 담아보았다.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contains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which is a part of theology. The method of the description is not confined to man-oriented, visible history. It is also to examine seriously the work of God in the process of history. This is the reason why Church history is regarded as a part of theology, and called as the theology of history. In Christianity,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is closer to the faith of history than the philosophy of history. We should, however, not underestimate academic objectivity as well as invisible history and its process. The understanding of history is the subject of theology. To have Reformed insight means to emphasize Biblical teaching. But it does not mean to simply quote passages from the Bible. What the Reformed insight require is to write Church history with the recognition of the Biblical ideas and teaching. Many studies on Church history have presented plenty of objective historical resources. But most of them have only explained the process of Church history and activities of Church without the recognition of the Biblical ideas and teachi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examine as to how to see and estimate this kind of the description of history. Gonzalez and his historical description which is familiar to Korean Church and Seminaries, are the main thesis in this study. This study analyses the method that he took for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and estimates his theology and it's basis. Especially his historical view and his unique theological classification system which contains type A, type B, and type C, are analysed in this study. Through this analysis, the reason why he presented type C as an alternative theology, could be explained. In conclusion, his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depends on pragmatic interpretation, rather than biblical interpretation. In fact, his historical description is not based on Reformed theology. However, because of the popularity of his description, the method that he took for the description of Church history, has been discussed in this study.

      • George whitefield와 18세기 부흥운동

        원영만 감리교신학대학교 대학원 2006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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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국과 미국에서 일어난 18세기 부흥운동은 이천년 기독교 역사에서 매우 주목할 만한 사건이었다. 이 부흥운동을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나고 성령을 체험하였으며 변화되었다. 이러한 부흥운동은 한 두 사람이 일으킨 사건이 아니었다. 1730년대 중반에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잉글랜드, 그리고 뉴잉글랜드의 지역에서 부흥이 태동하고 있음을 알리는 사건들이 속속히 일어났기에, 이 부흥을 한 두 사람이 일으켰다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18세기 부흥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요, 성령의 강력한 임하심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인간의 역할에 대해서 전혀 무가치한 것처럼 취급하는 것은 잘못이다. 이 부흥운동은 부름 받은 사람들의 수고와 열정, 눈물과 기도와 사역으로 지엽적인 부흥이 거대한 부흥운동으로 확대되었고, 식어가던 부흥의 불길이 되살아났으며, 일어난 부흥의 불길이 지속적으로 이어져나갔기 때문이다. 본 논문은 부흥이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임에는 틀림없으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인간의 역할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임에 대해 다루고 있다. 특히 18세기 부흥운동에서는 웨슬리 형제, 에드워즈, 휫필드 등이 주목할 만한 인물들인데, 그 중에서 이 논문은 휫필드를 중심으로 그의 생애와 사역, 그와 관련된 부흥의 전개과정과 그의 신학적인 특징들을 고찰하여 보았으며, 이러한 작업을 통하여 휫필드를 통해서 지엽적이던 부흥이 거대한 18세기 부흥 운동으로 확대되었음을 확인하였고, 또한 그의 순회설교, 야외설교와 전도 사역은 부흥의 불길을 일으키는데 있어서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였음을 살펴보았다. 휫필드는 매우 어둡고, 어려운 어린 시절을 보냈다. 그러다가 옥스포드에 진학을 하게 되었고, 이러한 영향은 그의 일생에 걸쳐 계속 되었다. 어느 날 찰스 웨슬리는 『인간의 영혼에 내재하는 하나님의 생명』이라는 책을 휫필드에게 건네 주었는데, 휫필드는 그 책을 통하여 자신이 아직 거듭나지 못한 존재임을 깨닫게 된다. 그는 그 책을 통해서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들어오는 것이 거듭남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는데, 정작 자신에게는 그 ‘하나님의 생명’이 없다는 것을 깨닫게 된 것이다. 그 후로 그는 매우 오랜 시간 동안 그 신적인 생명을 찾아서 구도의 삶을 살게 되었다. 그것은 매우 힘들고 어려운 과정이었는데, 이런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지난 후 그는 드디어 1735년 회심을 경험하게 된다. 하나님께서 그에게 ‘하나님의 생명’을 허락하신 것이다. 이러한 회심을 체험한 후, 잠시 동안 고향에 있으면서 하나님과 깊은 영적인 교제를 누리던 휫필드는 건강이 회복되면서 전도와 설교를 시작하였는데 그 결과는 아무도 예측할 수 없었던 놀라운 것이었다. 이러한 그의 사역은 곧 바로 18세기 부흥 운동으로 이어지게 되었고, 이러한 부흥의 물결은 웨슬리 형제의 회심을 통해서 더욱 힘을 얻게 되었다. 부흥운동 초기에는 이들이 함께 동역 하였으며, 이들의 야외설교, 전도, 순회설교를 통해서 웨일즈와 잉글랜드, 스코틀랜드는 전에 경험하지 못하였던 ‘부흥’을 경험하게 되었다. 특히 휫필드가 가는 곳마다 그의 설교를 듣기 위하여 수 많은 사람들이 모여들었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사람들이 회개하며 거듭났으며, 변화되는 사건들이 계속해서 일어나게 되었다. 또 그는 7번이나 되는 대서양 횡단과 뉴잉글랜드의 순회설교 여행을 통하여 식어져 가던 미국의 부흥운동에 다시 불을 붙이는 역할을 하였다. 18세기 부흥운동은 휫필드, 웨슬리 형제, 에드워즈, 웨일즈와 스코틀랜드 사역자들의 수고와 헌신, 설교와 전도를 통해서 이루어진 사건이었다. 그 중에서도 특히 휫필드는 지엽적이던 부흥운동을 하나로 묶었으며, 사람들을 각성시키고, 부흥의 불을 붙이게 하는데 크게 공헌하였다. 이렇게 부흥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면서도 또한 부름 받은 사람들의 헌신과 순종을 통해서 일어난 사건이다. 그래서 찰스 피니(Charles G. Finney)는 이것을 부흥은 단순히 지속적으로 하나님께 순종하는 것이라고 표현하며, 부흥운동에 있어서 하나님의 일하심과 함께 인간의 순종 또한 매우 필요한 것임을 지적하였다. 분명한 것은 부흥운동에 쓰임 받은 사람들이 가지고 있었던 나름대로의 특징들이 그대로 부흥운동에 영향을 미쳤다는 점이다. 그렇기에 본 논문에서는 휫필드가 어떠한 신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의 신학적인 특징이 어떤 것인지에 대해서 밝히는 일에 많은 지면을 할해했다. 그의 신학의 특징은 한마디로 거듭남을 강조하는 것이었다. 그의 주된 설교는 ‘거듭남’에 관한 것이었고, 그는 자기자신을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기 위해 부름 받은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그에게 있어서 거듭남의 사건은 외적인 것이 아닌 내적인 사건이었으며, 하나님의 생명이 인간의 영혼에 들어올 때 일어나는 사건이었다. 그렇기에 거듭남은 인간이 할 수 있는 어떠한 일이 아닌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일이었다. 그러나 그렇다고 그는 가만히 앉아 있는 것을 허락하지 않았다. 그는 계속해서 결단을 강조하였는데, 사실 어떻게 보면 거듭남을 강조한다는 것 자체가 결단을 강조하는 것이라고 볼 수 있다. 그는 결단을 강조하는 설교자였으며, 또한 그 결단을 미루지 말고 바로 지금 하라고 강조하는 설교자였다. 그는 지금 결단하고 돌아오면 하나님이 받으시고 구원을 허락하여 주신다고 계속해서 설교하였다. 또한 그는 이러한 거듭남을 확실하게 알 수 있다고 누누이 강조하였는데, 그러므로 거듭났다는 것을 체험하지 못했으면 거듭나지 못한 것이 분명하므로 어서 속히 돌아오라고 결단을 촉구하며 설교하였다. 거듭남을 강조하는 그의 이러한 신학적인 특징은 원죄의 교리와 매우 깊은 연관이 있다. 그에게 있어서 원죄란 죽음을 의미하는 것이었다. 그는 이것을 나사로의 죽음에 비유하기를 좋아하였는데, 나사로가 죽어서 무덤 속에 있었던 것처럼 원죄 가운데 있는 인간도 이와 마찬가지 상황이라고 했다. 주님께서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시기 전까지는 나사로가 할 수 있는 일이 아무것도 없었던 것처럼, 원죄 가운데 있는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이란 아무것도 없다. 죽었기 때문이다. 그러한 원죄의 상황은 반드시 거듭나야 하는 이유가 되었다. 철저한 원죄의 교리 위에 서 있던 휫필드가 그렇게 거듭남에 대해서 강조한 것은 당연한 일이었을 것이다. 그는 이러한 거듭남의 역사는 오직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는 영역으로, 믿음을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것을 분명히 하였다. 여기에서 믿음은 하나님께서 주시는 선물인데, 누구든지 믿음을 구하면 하나님은 거절하지 않으시고 믿음을 주신다고 설교하였다. 그는 이런 믿음과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통해서만 구원받을 수 있음을 그의 설교 내내 계속해서 강조하였다. 휫필드와 함께 사역하였고, 그에게 많은 영향을 미쳤던 웨슬리와는 예정론의 문제 때문에 한 때 심각하게 논쟁하게 된다. 본 논문 뒷부분에서 예정론의 문제를 다루었는데, 이것은 누구의 의견이 옳고 그르냐의 입장이 아니라, 휫필드의 신학적인 사상을 보다 분명히 이해하기 위해 다룬 것이다. 그는 이 논쟁을 통해서 그의 신학적인 체계가 기본적으로 칼빈주의에 바탕을 두고 있음을 확실하게 보여주었다. 웨슬리는 그의 “값없이 주시는 은총”이라는 설교는 통하여, 예정론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설교, 기독교의 계시, 전도, 성화를 위한 노력 등을 모두 무가치한 것이라고 계속해서 비판하였다. 이에 대해 휫필드는 예정론을 다루면서 하나님의 주권을 강조하면서도, 이러한 여러 가지 은총의 수단의 사용과 애씀이 예정의 교리와 모순 되지 않음을 계속해서 강조한다. 그는 하나님께서 이러한 수단과 애씀을 통해서 예정된 사람을 구원하신다고 주장하였다. 휫필드에게 있어서 은총의 수단의 사용은 늘 강조되었다. 그는 이것은 자신의 신학적인 체계와 모순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 이러한 그의 견해는 분명 극단적인 칼빈주의와는 차이가 있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이 예정의 교리 위에 서 있다는 것을 여러 설교를 통하여 분명히 하였지만, 이와 함께 그의 거의 모든 설교에서 누구든지 믿음으로 구하면 구원을 받는다고 강조하며 설교하였다. 이러한 그의 신학적인 특징은 웨슬리 형제들에게 영향을 받았기 때문이라고 생각한다. 웨슬리는 회심하기 전 긴 어둠과 고통의 시간을 보내고 있던 휫필드에게 이러한 모든 수단을 계속해서 사용하되 결코 의지하지는 말라고 분명히 충고하였고, 휫필드는 그것을 받아들였다. 그리고 휫필드는 그 고통에서 해방될 수 있었다. 휫필드가 의식하였던지, 의식하지 못하였던지 간에 그는 늘 결단을 강조하며 믿음으로 누구든지 구원받을 수 있다고 설교하는 설교자였다. 실제적으로 그의 설교를 통하여 수 많은 이들이 거듭났으며, 그의 설교를 들은 이들은 “어떻게 해야 거듭날 수 있습니까?”라고 하며 휫필드를 찾아왔다. 웨슬리는 그의 장례식 설교에서 “누가 그처럼 많은 이들을 거듭나게 한 사람이 있는가?”라고 설교하며 그의 인생을 한마디로 요약하였다. 휫필드는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사람이었다. 휫필드의 설교는 거듭남에 관한 설교였으며, 그의 설교는 실제로 사람들을 거듭나게 하는 설교였다. 그의 설교를 통해서 수 많은 사람들이 거듭남을 경험하였고, 이것이 18세기 부흥운동에 직접적으로 영향을 미쳤다. 거듭남을 강조하는 그의 사역은 분명 많은 유익을 가지고 왔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에게 있어서 거듭남의 강조는 하나의 약점이기도 하였다. 웨슬리는 회개를 종교의 현관(porch)으로, 믿음을 종교의 문(door)으로, 사랑의 성화를 종교 그 자체(religion itself)라고 하였다. 웨슬리의 구원의 핵심은 바로 성화에 있었는데, 그렇기에 그의 영성은 기독교 삶 전체를 포괄하고 있는 탁월함이 있다. 이에 반하여 휫필드는 이 부분이 너무 약하다. 휫필드도 참된 기독교는 그리스도와의 연합이라고 생각하였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기독교는 거듭남에서 더 이상 나아가지 못하고 거기서 멈추어 버렸다는 인상을 들게 한다. 구원에 있어서 거듭남은 매우 중요한 시작이지만 분명 구원의 완성은 아니다. 거듭난 사람들이 이제부터 가야 할 곳이 어디인지를 분명하게 제시하여 주는 것 또한 매우 중요한 것임에도, 휫필드에게 있어서는 이 점이 부족한 면이 아니었나 생각해 본다. 거듭남의 역사도 중요하지만 성화의 역사도 매우 중요하다. 이 부분의 중요성을 분명히 알았던 웨슬리는 공동체를 만들고 조직을 만들어서 거듭난 사람들을 양육하는데 최선을 다하였던 것이다. 바울 사도도 갈라디아 교회를 향하여 “나의 자녀들아 너희 속에 그리스도의 형상이 이루기까지 다시 너희를 위하여 해산의 수고를 한다”고 했다. 거듭남만큼이나 성화도 매우 중요하다. 휫필드의 사역이 놀라운 일들을 일으켰음에도 불구하고 지속적이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고 나는 생각한다. 이런 점에서 웨슬리의 사역은 구원의 길에서 모든 것을 포용하는 탁월함이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휫필드는 ‘성도의 견인’의 교리를 받아들였다. 한번 거듭나면 반드시 하나님께서 끝까지 지켜주신다고 믿었다. 그러나 웨슬리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다. 그는 신자들도 타락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그러므로 계속해서 그리스도의 완전을 향하여 나아가야 한다고 강조하였고, 철저히 어떻게 해야 하는지에 대해서 교육하고 그 길을 제시하였던 것이다. 이렇게 어떠한 신학적인 체계를 가지고 있는가가 사역의 방향을 결정하고 또한 부흥에도 직접적인 영향을 미쳤던 것이다. 웨슬리는 자신의 구원론과 자신의 설교에서 늘 한결 같았다. 그의 주장은 성서적이었을 뿐만 아니라 매우 이성적이며 합리적인 것이었다. 그러나 휫필드의 하나님 주권을 강조하는 ‘은총과 예정의 교리’와 거듭남을 위해 결단을 강조하는 그의 설교 사이에서는 늘 부자연스러운 어색함이 있다. 물론 이 부분에서 있어서 그는 여러 차례 자신의 입장을 변호하였으나 그리 시원하지는 못했다. 그는 하나님의 주권적인 구원의 역사와 누구든지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성서의 가르침을 모두 수용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쉽지 않은 작업이었다. 본인은 이 논문을 통하여 웨슬리의 신학적인 입장을 보다 분명하게 정리할 수 있었으며, 또한 그가 얼마나 위대하며 기독교 영성의 모든 부분을 포괄한 탁월한 인물이었는지에 대해서 다시 한번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계속해서 웨슬리에 대한 수 없이 많은 연구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고 생각한다. 물론 신학적인 입장을 넘어서서 하나님은 휫필드와 웨슬리를 모두 사용하셨다. 모든 사람에게 구원의 복음을 전했던 휫필드의 설교는 믿음으로 받아들이는 자에게 거듭남을 경험하게 하는 하나님의 도구였다. “나사로야 나오라”고 외치시던 주의 말씀에 하나님의 영이 나사로를 일으켜 무덤에서 걸어 나오게 하였던 것처럼, 죽은 영혼을 향하여 하나님께로 나오라고 외치던 휫필드의 설교를 통해 하나님은 죽은 영혼을 일으켜 살려 주셨다. 휫필드 또한 언제나 자신의 설교에 살리는 하나님의 권능이 함께 하여 달라고 기도하며 설교하였다. 신학적인 입장의 차이는 분명하였을지는 모르지만 영혼을 사랑하는 면에서는 웨슬리와 휫필드가 꼭 같았다. 휫필드와 웨슬리 형제가 같은 시대에 함께 사역하였다는 것은 하나님의 섭리이며, 18세기를 살았던 사람들에게는 한량없는 은혜였다. 하나님은 사람과 함께 사람을 통해서 일하시는 분이다. 18세기 부흥 운동은 하나님의 주권적인 역사이며 동시에 부름 받은 사람들의 헌신을 통해 일어난 사건이었다.

      •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역의 역사 이해 :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을 중심으로

        손성지 백석대학교 2019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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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나단 에드워즈의 『구속사역의 역사』는 18세기 복음을 위협하던 반(反)칼빈주의 시대정신에 대항하고, 쇠퇴하는 뉴잉글랜드 개혁파 교회를 위로하기 위해 저술된 작품이다. 이성과 관용을 중시하는 계몽주의 시대에 새로운 도덕철학이 유행하였고, 성경 비평주의가 크게 대두되었다. 아르미니우스주의와 이신론, 반(反)삼위일체론 같은 당대 유행하던 위협적 신학사조는 인간의 이성과 의지의 독립성을 강조하고,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과 하나님의 주권적 섭리로서의 ‘역사’를 부정하며, 기독교의 본질적 진리를 흔들었다. 이러한 위기에 직면하여 에드워즈는 뉴잉글랜드의 목회자이자, 개혁파 청교도의 후예로서 영적 민감성을 발휘하였다. 1739년 연속설교로 전해진 『구속사역의 역사』는 에드워즈의 광대한 신학적 비전이 담긴 작품으로서, 평생의 신학적 이정표이자, 사상적 구심점이 되는 주제였다. 『구속사역의 역사』를 전개함에 있어 신학적 틀을 제공한 에드워즈의 모형론적 성경해석과 언약사상은 성경의 통일성을 지지함으로써, 하나님의 계시로서의 성경을 뒷받침하는 도구가 되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완전히 새로운 방법’을 제시했는데, 그것은 기존에 익숙한 교의학적 방식이 아닌 구속사역의 거시적 차원을 나타내기에 적합한 역사적 서술 방식을 취한 것이다. 광대한 구속사역의 역사 속에 전개되는 하나님의 자기의지적인 경영은 주권적인 섭리를 선명하게 보여주었다. 특히, 반복되는 섭리의 흐름을 통찰함으로써, 어떤 위기 속에서도 교회가 궁극적으로 승리하고 복음이 전파된다는 확신을 심어주었다. 『구속사역의 역사』는 뉴잉글랜드와 영국에서 꺼져가던 개혁신학의 불씨를 되살리는 데 기여하였고, 뉴잉글랜드 대부흥운동의 촉매제로 작용하였으며, 19세기 세계 선교의 위대한 시대를 여는 데 막대한 영향을 끼쳤다. 『구속사역의 역사』는 에드워즈의 지적 소명의식이 담긴 그 시대에 대한 응답이자, 아르미니우스주의, 이신론, 반삼위일체론 등의 사상적 도전에 대항했던 신학적 응전이었다. 에드워즈는 18세기 뉴잉글랜드 개혁파 청교도의 ‘남은 자’였다.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a theological masterpiece of Jonathan Edwards, challenged against an anti-Calvinistic spirit of the age that threatened the Gospel in the eighteenth century and encouraged the New England Reformed church that was declining. In the age of Enlightenment, which underscored reason and tolerance, there was a new trend of moralistic philosophy and high criticism on Scripture. Theological spirit of the times that was trending such as Arminianism, Deism, and Anti-Trinitarianism emphasized human reason and independency of human free will, rejected the Scripture as God’s revelation and history as God’s sovereign providence, and shook the essential truth of the Christianity. In facing these crises, Edwards displayed spiritual sensibility as a New England pastor and descendant of Reformed Puritans.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delivered as a series of sermons in 1739, contained magnificent theological vision of Edwards. It was a theological sign-post of his entire life, and it was the focal point of his philosophy. In displaying of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Edwards’s typological hermeneutics and covenant theology set forth the theological framework, supported the unity of the Scripture, and it became a tool to reinforce the Scripture as God’s revelation. Meanwhile, Edwards presented ‘an entire new method,’ that is to take a form of historical narration to show a macro aspect of redemptive history, instead of a typical method of dogmatics. God’s arbitrary operation unfolding in God’s magnificent redemptive work of history vividly displayed God’s sovereign providence. In particular, by discerning the flow of the repetitive providence of God, it planted a conviction of the ultimate triumph of the church in any crises and its proclamation of the Gospel.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contributed in rekindling the Reformed faith that was about to cease in New England and England, it affected as an accelerator of the Great Awakening of the New England, and it had massive influence on world missions in the nineteenth century. A History of the Work of Redemption, consisting of his sense of an intellectual calling, answered the age of a theological challenge against the ideological flow of the age such as Arminianism, Deism, and Anti-Trinitarianism. Edwards was a ‘remnant’ of the eighteenth century New England Reformed Puritans.

      • 아리우스 논쟁에 관한 역사신학적 고찰 : 니케아 공회(1차)로부터 콘스탄티노플 공회(2차)까지

        구화평 총신대학교 2009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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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엇이 기독교 정통이며 무엇이 기독교 이단인가? 기독교 신자라면 이에 대하여 분명하게 파악하고 있어야 한다. 따라서 본 논문은 과거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사를 통해서 드러난 이단과 정통에 대하여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함으로서, 무엇이 기독교 이단이며, 무엇이 기독교 정통인가룰 규명하고자 하였다. 본 논문을 간단하게 요약한다면, ‘예수 그리스도의 신적 지위’가 성부 하나님과 동일한 본질을 가진 ‘호모우시오스’(o'μοοu'σιοo', 동일본질)라고 주장하는 정통 신앙, 즉 알렉산더와 아다나시우스의 신학에 도전하여, ‘예수’는 성부 하나님에 가장 가까운 유사한 본질을 가진 ‘호모이우시오스’(o'μοοu'σιοo', 유사본질)라고 이단 사상을 주장한 아리우스와 아리우스파가 일으킨 삼위일체 논쟁에 대하여 역사신학적 관점에서 고찰한 것이다. 즉 제1차 세계 교회 회의인 니케아 공회로부터 시작하여 제2차 세계 교회 회의인 콘스탄티노플 공회까지 일어난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의 중심이 된 아리우스의 신학 및 아리우스파가 갖고 있는 이단 신학과, 이에 대응하여 일어나 정통 신학의 체계를 세운 알렉산더, 아다나시오스, 캅바도기아 교부들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 신학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고찰이라고 요약할 수 있다. 본론에 들어가서 본 논문의 내용 전개는, 제 1장에서는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하여 일어난 아리우스 논쟁의 배경과 출발점이 된 오리겐의 신학과, 그의 신학에 대한 해석의 차이에서 나타난 동방 교회의 좌파 오리겐주의 신학과 우파 오리겐주의 신학의 갈등 관계, 즉 우파 알렉산더 감독의 주장에 대한 좌파 아리우스 장로의 신학적 도전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 2장에서는 콘스탄티누스 대제가 알렉산드리아 교회를 중심으로 일어난 아리우스 논쟁을 해결하고자 소집한 니케아 공회를 통해서 확정하게 된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의 형성 과정을 살펴보았다. 제 3장에서는 니케아 공회 이후 콘스탄티누스 대제의 비호 아래서 세력을 얻은 아리우스파가 정통 니케아 공회의 신학을 뒤집는 극적인 상황과, 이에 대응하여 니케아 신학을 지키고자 고군분투했던 아다나시우스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신학을 심도 있게 살펴보았다. 제 4장에서는 콘스탄티우스의 친아리우스 정책 아래서 아리우스파가 수차례의 교회 회의를 통해서 내놓은 ‘시르미움 참람’(Blasphemy of Sirmium)이라는 참람된 신조공식과, 이에 반대하여 일어난 친아리우스파 소속의 보수적 아리우스파가 니케아 신학으로 회귀하면서 제출한 신학과, 그러한 반전의 역사 속에 나타나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을 완성시킨 위대한 캅파도기아의 삼인의 신학을 중심으로 살펴보았다. 제 5장에서는 데오도시오스 황제의 극적인 등장과 더불어 반전된 친니케아파의 정통신학의 승리와, 정통 신학을 확정한 제 2차 세계 교회 대회인 콘스탄티노플 공회에서 확정한 ‘호모우시오스’를 중심으로 한 삼위일체 정통신학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끝으로 결론부에서는 아리우스 삼위일체 논쟁을 통해서 형성된 기독교의 정통 신앙과 정통 신학에 대한 역사적, 신학적 의의를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즉 무엇이 기독교 이단이며, 무엇이 기독교 정통인가를 규명함으로서, 기독교회는 무엇을 정통 신앙으로 알며, 어떻게 신앙 생활하는 것이 가장 올바른 것인가에 대해서 역사와 신학이 말해주는 교훈을 정리해보고자 하였다.

      • 한국교회사 고찰을 통한 신몬타누스주의 연구 : 역사신학적 유형분석에 의한 이단분별의 관점에서

        김창배 성결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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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에서는 ‘한국의 신몬타누스주의’를 정의하고 역사신학적 분별법을 도입하여 신몬타누스주의 경향성을 진단하였다. 한국 교회의 역사를 통해 한국인의 전통적 재래심성의 영향을 받은 극단적 신비주의 일파가 고대 기독교 신비주의 이단의 하나인 몬타누스주의와 매우 유사한 특징들을 보여줄 경우 한국의 신몬타누스주의로 정의하였다. 신몬타누스주의를 진단하는 방법론으로서 역사신학적 이단분별법을 사용하고자 한다. 역사신학적 분별법이란 역사신학의 관점에서 바라보았을 때, 어떤 의심되는 종파가 과거 이단 종파와 여러 부문에서 유사한 것으로 판명되므로, 의심종파를 과거 이단 종파의 범주에 속한 것으로 판정하는 방법이다. 신몬타누스주의 성향의 경우 성령론, 구원론, 종말론, 그리고 교회론의 영역에서 특성을 규명하였다 : 1) 새로운 예언과 같은 주관적 계시를 인정함으로 왜곡된 성령론을 보이고, 2) 과도한 금욕주의적 성향을 가짐으로 왜곡된 구원론을 야기하며, 3) 임박한 종말의 위기감 속에서 시한부 종말론으로 발전할 뿐만 아니라, 4) 극단적 교회 갱신을 주장함으로써 독단적 교회론의 오류에 빠지는 특성을 보인다면 신몬타누스주의 경향성을 보이는 이단으로 진단한다. 특별히 교파 간의 교리적 차이로 말미암아 의견의 일치를 보지 못하여 조직신학적 이단판별법이 그 역할을 제대로 할 수 없을 때, 역사신학적 분별법은 각 교단의 차이를 넘어선 범교단적 분별법의 역할을 맡을 수 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하겠다. 본 연구에서는 한국교회사 속에서 나타난 신몬타누스주의의 역사적 고찰과 함께 최근 발생하고 있는 신몬타누스주의의 구체적 사례들에 대해 진단하였다. 마지막으로, 한국의 신몬타누스주의에 대한 대응방안을 제시함으로써 한국교회의 범교단적 이단분별의 한 기준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This research discusses Korean Neo-Montanism by defining it with 4 characteristic aspects according to the diagnostic method by Historical Theology. If a suspicious sect which has been deeply affected by the Korean traditional characters in the Korean Church History shares the extreme mystical characteristics with the original Montanism which was a heresy in second century AD, it can be defined as ‘Korean Neo-Montanism’. The diagnostic method by Historical Theology is introduced to distinguish Neo-Montanism. On the viewpoint of Historical Theology, when a suspicious sect shares the characteristic aspects with the model heresy, it will be categorized into the type of the model heresy. Each sect will be examined with 4 areas: pneumatology, soteriology, eschatology, and ecclesiology. It is categorized as Neo-Montanism, when it has four major aberrancies such as (1) ecstatic prophecy in pneumatology, (2) strict ascetism in soteriology, (3) proclamation of the impending End in eschatology, and (4) schism caused by radical renewalism in ecclesiology. The diagnostic method by Historical Theology will be useful, when the diagnostic method by Systematic Theology cannot play an efficient role because of the doctrinal differences among the Korean Christian denominations. With the diagnostic method by Historical Theology, this research discusses the cases which seem like Neo-Montanist throughout the Korean Church History. Recent Korean issues are also included here. Finally, this research suggests the applicable countermeasures against the recent Korean Neo-Montanists.

      • 경건주의와 오순절주의의 관계성에 대한 역사신학적 고찰

        김재희 아세아연합신학대학교 2016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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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is dissertation is suggested that it could become a proper powerful capability for revival of present Church to the merits of Pentecostalism which extract from the fact, through researching the corelation between Pentecostalism and Pietism, on which Pentecostalism is a fruit drawn from Pietism. In both, there is a movement sharing a common ethos and having a smellier theological characteristics. Also up to historical trace, it makes known that Pentecostalism which is a part of "the parental inheritance" or "ancestral line" of Pentecostalism by genealogical research, and at least related to a descendant of Pietism. Pietism is an important ingredient in that network of movements that prepared the way for the emergence of Pentecostalism. Each of Pietism and Pentecostalism is, as is called "Second Reformation" or "third Reformation" as a reformed movement to seek the vividness of Christian, being a historical movement which shares a very unique ethos. They had convinced of the essence of Christian as a personal relationship with Christ rather than doctrines or offices, so that they were to represent a vivid organic relationship with Christ. It was a empirical-forcing belief to desire to meet Christ directly, empathizing experience of conversion and sanctification by making a pursuit of a proper relation with God, and as a result, there were many fruits of social service and mission. It was the core of Pietism not only to place inner piety and the establishment of virtue but also to underline the dynamic relation between belief and life as common value of Pentecostalism so that it was important to ethic practice and life.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share pros and cons of theological characteristics except the doctrine of the baptism of the Spirit. The purpose of this dissertation is, therefore, to provide to present Church with meaningful insights of which pertain the theological merits from comparing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and supplement doctrinal elements as the other respect of Evangelicalism, which are weaken in relative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This is what I intend for Churches to be revived through recovered piety by the power of the Holy Spirit as the revival of German Pietism led by Philipp Jakob Spener who was influenced by Johann Arndt and August Hermann Franke as a successor of Spener from the end of 17th century to the beginning years of 18th century and Pentecostalism in 20th century. The range of this dissertation is restricted that in Modern Pentecostalism, it deals with the theology of Charles Parham and Classical Pentecostal Movement, which do not deals with Charismatic Movement and Neochaismatic Movement. For this purpose, this dissertation explores following. In Ⅰ chapter, it represent the purpose of research, the history of research, theses and the method and range of research. In Ⅱ chapter, the historical, theological and thoughtful relation between Pietism and Pentecostalism. By doing so, it makes known a very unique ethos which shares by both Pietism and Pentecostalism, through comparing study on genealogical trace of Pentecostalism as its root along to Pietism. In Ⅲ chapter, it will explore what the foundation and background of Pietism are until the Second World War, Pietism had been underestimated to compared with its contributions. It will quest the theology of Spener as a founder of Pietism and the contributions of Johann Blumhardt who worked a role of the bridge of between Pietism and Pentecostalism so that to represent the influence of Pietism on theology and Church. In Ⅳ chapter, it will explore what the foundation of Pentecostalism is. the foundation of Pentecostalism consisted in Pentecostalism in 17th and 18th century, the Holiness Movement influenced by John Wesley in 19th century, especially the movement of the higher life and Keswick convention which were direct roots, and the theology of Charles Parham who was a founder of Modern Pentecostalism and these influence. In Ⅴ chapter, based all research until, it will explore what continuity and discontinuity of Pietism are, and demonstrates that Pentecostalism come from Pietism, which succeed in good theology and belief. In Ⅵ chapter as a conclusion, it summarizes up to concerned. According to argument, It is the theological merits of Pietism and Pentecostalism to be precious inheritances which can be a energy to make a divergence at present Christian ag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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