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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원위 쇄골 골절의 보존적 치료 후 발생한 불유합의 관련 인자

        정재훈 계명대학교 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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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존적 요법을 시행한 원위 쇄골 골절 환자의 치료 결과 및 불유합과 관련된 인자를 분석하고자 하였다. 29명의 환자를 대상으로 하였으며, 단순 방사선 사진을 통해 Neer 분류, 오구 쇄골간 거리, 초기 전위 및 분쇄 여부, 골유합 여부를 알아보았다. 임상적 결과 판정을 위해 최종 추시 시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UCLA) 점수, American Shoulder and Elbow Surgeons(ASES) 점수 및 Subjective Shoulder Value(SSV)를 측정하였다. 불유합이 6예에서 발생하였으며, 증상이 없는 불유합이 3예였다. 유합 군이 불유합 군보다 최종 추시 시 평균 UCLA, ASES, SSV 점수가 더 높았으나 통계학적 유의성은 없었다. 고령 및 수상 당시 오구 쇄골간 거리가 길수록 통계학적으로 유의하게 불유합의 빈도가 높았다. 원위 쇄골 골절의 보존적 치료 후 만족할 만한 중기 추시 임상적 결과를 보였으며, 고령 및 수상 당시 오구 쇄골간 거리가 길었던 경우에 불유합이 잘 발생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The purpose of this study was to evaluate radiological and clinical outcomes and to analyze associated factors of nonunion after conservative management in patients with distal clavicle fracture. We analyzed the 29 cases. Neer type, coracoclavicular distance, initial displacement, comminution, union, and presence of bony union were evaluated by plain radiographs. Clinical outcomes according to the University of California at Los Angeles (UCLA), American Shoulder and Elbow Surgeons (ASES), and Subjective Shoulder Value (SSV) scores were assessed. Six cases had developed nonunion. Three cases had asymptomatic nonunion. Mean UCLA, ASES, SSV scores in the union group were more higher than in the nonunion group. Although the non-union group had inferior clinical outcomes than the union group, there was no significant difference between the two groups. Older age and more coracoclavicular distance correlated with nonunion. Conservative management of distal clavicle fractures provided satisfactory clinical outcomes. Occurrence of nonunion correlated with older age and more coracoclavicular distance.

      • 순조대 『빈례총람(儐禮總覽)』의 편찬과 빈례 정비

        김윤주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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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빈례는 오례 중 하나로서, 중국과 같이 외교관계를 맺고 있는 외국 사신들을 맞이하는 의례이며 다양한 의식 절차를 시행하면서 친선관계를 도모하는 예제라고 할 수 있다. 이 때 각국의 대포인 사신은 군주로부터 권한을 위임받아 의사를 전달하여 이익을 창출하고 자국의 위상을 드높이는 역할을 하였기에 빈례의 의례절차는 당시 외교관계에서 중요한 사안으로 인식되었고, 이를 논의하고 수정 · 추가하는 작업 문제도 적지 않게 쟁점으로 떠올랐다. 그러나 기존연구에서는 조공책봉관계에 입각하여 양국의 국경문제 · 전쟁 · 경제 등과 같은 갈등과 협력 및 교류 등의 모습을 확연히 드러내는 외교의 내용 위주로 연구되었다. 최근에 들어서 기존연구 방향의 한계를 벗어나 외교의 주체인 사행과 사신에 초점이 맞추어지게 되었다. 이윽고 상호 호혜적인 관계와 질서가 이루어지는 공간과 의례, 즉 빈례에 대한 연구가 시작되었다. 조선전기에 편찬된 대표적인 국가전례서 『국조오례의』에는 위에서 말한 빈례의 중요성으로 인하여 당연히 빈례의 내용도 포함하고 있었다. 그렇기 때문에, 조선전기 내내 외국사신이 내조했을 때, 『국조오례의』가 활용되었다. 『국조오례의』 「빈례」 조(條)는 17세기에 있었던 호란으로 정비가 필요해졌다. 그 이유는, 이 시기에는 중국왕조가 명에서 청으로 교체되며 종래에 있었던 명 중심의 중화질서가 청 중심으로 바뀌고 있던 시기였기 때문이다. 청의 문화와 제도를 받아들이는 것은 심리적인 갈등이 있었지만 조공책봉관계로 맺어진 청과 외교관계를 끊을 수는 없었다. 조공과 책봉을 이어가기 위해서는 조선과 청이 문서를 주고받아 법적인 효력을 만들어내야 했으며 문서의 전달은 빈례 때 이루어졌다. 빈례를 잘 치르기 위해서는 지침이 될 만한 실무서적이 필요하였다. 이 시기 외교와 통상 실무를 담당한 곳은 사역원이었는데 이에 속한 관리들은 빈례 서적의 부족함을 느끼고 자신들의 업무를 문제없이 수행하기 위하여 사대 · 교린에 대한 제반사항이 실린 『통문관지』를 펴낸다. 『국조오례의』의 빈례가 당일절차만 서술되어 있는 반면에 『통문관지』의 빈례 절차는 칙사가 오기 전 통보, 조선 도착 시 연회, 도성 도착 및 당일 절차, 특수 의식, 회정, 준비사항 및 예단 등 제반사항 26항목을 모두 서술하여 『국조오례의』보다 더욱 세분화된 형식의 구성을 볼 수 있다. 『통문관지』의 빈례 주관자는 국왕이다. 조선후기에 빈례의 주관자가 국왕으로 통일되는 것은 청과의 전쟁에서 막대한 피해를 입은 조선에게 철저히 국왕중심으로 신하의 예를 할 것을 요구당하여 청이 황제국으로서의 위엄을 내세우는 방식의 의례 진행을 했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두 예서의 교영절차를 살펴보면 절차상 국왕이 직접 맞이하는 것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통문관지』에서는 주석(‘[]’표시)으로 기록해두어 국왕이 대표로 맞이하지 않아도 되는 상황의 여지를 남겨두었다. 국왕의 교영 참여 여부는 곧 상대국과의 관계와 조선이 상대국을 어떻게 인식하고 있느냐로 나타나는 것이나 마찬가지였다. 청은 조선에게 국왕이 중심이 되어 교영을 행할 것을 요구하였다. 조선은 이러한 청의 요구에 쉽게 응할 수 없었다. 그래서 이 시기에는 교영을 나가야할 때마다 국왕의 병, 전염병 등을 이유로 대며 직접 나가지 않으려는 경향도 보인다. 정조는 재위초반까지만 해도 빈례 정비와 빈례 예서 편찬에 크게 관심이 없었던 듯하다. 정조대 등장한 『춘관통고』에서조차 빈례는 절차 수정의 대상이 되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그러나 정조 후반기에는 빈례 절차를 고치려 하는 정조의 모습과 함께 빈례 예서 편찬에도 관심을 가지기 시작하였다. 순조대에 독립적인 빈례 예서인 『빈례총람』이 편찬되었다. 17 · 18세기에 빈례에 대한 지속적인 논의가 있었고 이에 따라 빈례 정비 및 빈례 관련 예서의 편찬이 필요했음에도 불구하고 빈례 예서는 편찬되지 않았다. 이에 19세기 초반에 오례의 절차가 모두 수록된 국가전례서가 아닌 오직 빈례만을 위한 『빈례총람』이 편찬되었다는 것은 빈례 정비의 재대두와 이 때까지 논의되어 수정 · 추가된 빈례 절차가 수록되어 완성된 것으로 보인다. 『빈례총람』을 펴낸이들은 사역원 관리들이다. 편찬한 주체자가 사역원 관리인 점과 국왕에게 권할 정도로 사대에 관하여 상세하게 실린 『통문관지』라면 『빈례총람』을 편찬할 때 사역원 관리들이 참고했을 가능성이 있을 것이라고 추측된다. 『빈례총람』 권 1의 목록은 강령으로 구성되어 칙사가 도착하기 전 통보하는 사항과 조선에서 준비해야할 사항이 나열되어 있다. 권 2는 의주로 구성되었는데, 주로 맞이와 전송, 황제가 왕위를 승인하는 문서인 고명, 특수의식 때의 복색갖춤 등이 나열되어 있다. 2권이 담고 있는 내용은 권 1보다 『통문관지』와 겹치는 부분이 상당히 많다. 왜냐하면 청 사신을 맞이하는 교영, 황제가 보내는 문서인 고명을 받는 의식은 황제의 권위와 조선의 위상 등과 직결되어 있는 문제였기 때문이다. 그만큼 권 2에 있는 절차들은 양국에서 모두 중요한 것으로 여겼으며 『통문관지』가 편찬되는 숙종대부터 『빈례총람』이 간행되는 순조대까지 많은 힘을 쏟은 의례 절차로 파악된다. 권 3은 칙유에 대한 예제가 적혀있다. 칙유는 황제가 내리는 명령을 말하는 것인데 『통문관지』에는 중요한 칙유 한 두 가지에 대해서는 언급하여 놓았으나, 항목이 따로 목차로 구성되지 않았다. 권 4는 청사신의 행차길에 의장과 의물 설치, 그리고 사신이 머무는 곳의 준비사항 등을 수록하였다. 이는 대체적으로 『통문관지』와 일치하지만 『통문관지』의 준비사항 항목이 3개의 그치는 것에 비하여 『빈례총람』은 81개의 항목이 존재하고 있다. 이를 볼 때, 청사신 맞이에 더욱 신경 쓰는 모습과 그것에 대비하기 위하여 자세히 기록해두어 후세에도 사용하려고 하는 양상을 알 수 있다. 『빈례총람』 이후 빈례 관련 예서는 대한제국 때의 『대한예전』 과 『예식장정』이 있다. 이 두 예서가 편찬되기 까지 의례 절차로 인한 마찰과 충돌이 없었다는 것은 호란 이후 지속적으로 문제가 되었던 빈례 절차가 수정 · 추가 작업으로 이어지며 『빈례총람』으로 귀결되어 편찬 직후부터 빈례 실행 시 도움이 되었다는 것을 짐작하게 한다. 이것은 『빈례총람』 편찬 의의에 힘을 실어주는 것이라 생각된다. Bin-re (賓禮; lit. tributary ceremony), as one of the Five Rituals, is a ceremony to greet foreign envoys who have diplomatic relations with China, and can be said as an example of promoting goodwill through various ceremonial procedures. At this time, the ambassadors of each country were delegated with authority from the sovereigns, and because they performed roles in raising profits and elevating status of their country, the ceremonial procedures of bin-re were recognized as an important matter in the diplomatic relations. Discussing these matters, as well as editing or adding work were also made an issue of. In the previous researches, it was mainly studied on diplomatic contents that clearly showed the conflicts, cooperation, and exchanges, such as border issues, war, and economy of the two countries based on the tributary appointment relationship. In recent years, the focus has shifted beyond the limitations of existing research to the diplomatic subjects of speculations and envoys. Soon, there began a study on space and rituals, through which mutual reciprocal relations and order are made. In other words, research on bin-re had commenced. National Five Rituals (國朝五禮儀), which is a representative national precedent book compiled in the early days of the Joseon Dynasty, certainly included the contents of bin-re, due to the above-mentioned importance of bin-re. For this reason, when foreign dignitaries were involved throughout the whole Joseon Dynasty, the National Five Rituals were utilized. The ‘bin-re’ Jo (條) in the National Five Rituals needed a maintenance due to the Horan in the 17th century. There a son for this is that the Chinese dynasty was replaced by the Qing Dynasty from Ming Dynasty during this period. Although Joseon had a psychological rejection to accepting the culture and the system of Qing, it could not break the diplomatic relations formed under the tributary appointment relationship. In order to carry on with the tributes and appointment, it was necessary for Joseon and Qing to exchange documents and create legal effects, and the exchange of documents were achieved during the bin-re. In order to carry out bin-re with no problems, a practical book that would be a guide was necessary. The place where they took charge of diplomacy and commerce were called Sayeok-won (司譯院), and the officials who were affiliated with it feel the shortage of the books of bin-re and in order to carry out their work without any problems, they publish the “Tongmungwan-ji” (通文館志) that contains all the information about the “sadae” (lit. “serving the great”) and “gyorin” (lit. “neighborly relations.”) While the “National Five Rituals” only described bin-re on the day of the ritual, “Tongmungwan-ji” illustrated the notification before the ritual ceremony, banquet at the arrival of Joseon, arrival of do-sung and on-the-day procedures, special ceremony, return trip, preparation matters, wedding gifts, and other 26 various matters, all of which are more detailed than the “National Five Rituals” in observing the composition of forms. It seems that Jeongjo did not pay much attention to the maintenance of the bin-re rituals and the script of bin-re until the beginning of his reign. It was because bin-re was not the subject to the procedure modification even in the “Chungwantonggo” (春官通考), which appeared in the King Jeongjo Dynasty. However, in the second half of the Jeongjo Dynasty, along with Jeongjo’s attempts to modify the bin-re procedures, people to pay attention from bin-re as well as the compila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 “Bin-re Chongnam,” which is an independent example of bin-re clerical script, was compiled. There was a continuing discussion of bin-re in the 17th and 18th century, and despite the fact that there needed to be a compilation of clerical scripts related to bin-re and maintenance of bin-re, the clerical script of bin-re was not compiled. Thus, in the early 18th century, the fact that“Bin-re Chongnam” was compiled to dedicate to bin-re and not only the national precedent book containing all the procedures of five rituals, is looked upon that the maintenance of bin-re and all the procedures that were modified and edited through discussions were contained in it. Those who published the“Bin-re Chongnam” are the officials of the Sayeok-won. It is presumed that the officials, when compiling the“Bin-re Chongnam,” might have referred to the “Tongmungwan-ji,” which is written about the “sadae” in detail to the point where the compiler recommended it to the official Jeom of Sayeok-won and the King. Clerical scripts during the Empire of Korea on Bin-re after the compilation of “Bin-re Chongnam” are “Daehan-yejeon” (大韓禮典) and “Yesik-jangjeong” (禮式章程). The fact that there were no clashes due to the ritual processes until these two examples were compiled suggests that the Bin-re procedure, which had been continuously problematic after Horan and led to revision and further work, was a help during the execution of Bin-re right after the conclusion of “Bin-re” and its compilation. It is believed that this is the compilation significance of “Bin-re Chongnam.”

      • 가족복지서비스 전달체계 비교분석연구 : 몽골과 한국을 중심으로

        창츨 헝거르졸 서울여자대학교 일반대학원 2015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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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몽골과 한국의 가족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비교함으로써 몽골의 가족복지서비스 전달체계에 시사점을 제공하고, 개선에 기여하고자 하는 목적을 갖고 크게 두 가지 방향으로 진행하였다. 첫째, 몽골과 한국이 갖고 있는 가족 개념과 관점이 각국의 가족복지서비스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가족과 관련된 법률을 중심으로 가족개념을 찾아보고 용의정의를 비교분석하였다. 둘째, 몽골과 한국의 가족복지서비스 전달체계가 어떤 형태로 구축되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하여 각국의 가족복지서비스 제공 관할 부처와 서비스 현황을 조직의 통합성, 인력의 전문성, 예산의 적절성, 서비스의 접근성이란 분석틀을 토대로 비교분석하였다. 그 결과 첫째, 가족개념을 가족과 관련된 법과 정책 속에 명시되어 있는 ‘가족’이란 용어의 의미를 비교해보니 양국의 가족의 개념 정의한 규정과 내용이 유사했다. 몽골은 가족 형태가 핵가족으로 변화하고 있지만 대가족 개념이 혼합되어 있어서 가족 개념이 광범위하고, 한국은 이미 핵가족이 형성되었기 때문에 가족 개념이 구체적이고 세분화되어 있었다. 또한 몽골은 가족형태가 핵가족으로 변화하고 있어서 핵가족과 관련된 문제에 관심이 많았으며, 한국은 핵가족 형태를 넘어 다양한 가족형태가 증가하고 있으며 이에 따른 다양한 가족문제에 관심을 갖고 있다. 몽골 가족복지서비스는 사회주의 영향이 남아있어서 보편적 연금 또는 수당으로 이뤄진 소득보장서비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다양한 가족 관련 문제에 대처할 수 있는 대인서비스가 약하다. 반면 한국은 한부모, 미혼모, 다문화가족, 만혼 등 다양한 가족을 대상으로 독립적인 기관을 통해서 다양한 대인서비스와 일부 소득보장서비스를 제공하고 가족 문제를 해결하는데 도와주고 부담을 덜어주고 있다. 둘째, 몽골과 한국의 가족복지서비스 전달체계를 조직의 통합성, 인력의 전문성, 예산의 적절성, 서비스의 접근성을 통해서 어떻게 형성되어 있는지를 확인해 봤다. 조직의 통합성 측면에서 몽골은 ‘인구개발 및 사회복지부’란 한 가지 주무부처를 중심으로 가족복지서비스가 전달되고 있다는 점에서 몽골은 조직의 통합성이 높았다. 반면 한국은 가족복지를 위해 여성가족부와 보건복지부란 두 가지 조직체계가 움직이고 있었으며, 이에 조직의 통합성이 비교적 낮은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인력의 전문성 측면에서 몽골은 아직 사회복지사자격증이 존재하지 않아 사회사업학을 전공한 자 또는 비전공자를 많이 채용하고 있어서 인력의 전문성이 낮았으며, 한국의 경우에는 국가공인자격증제도가 있어서 사회복지학을 전공한 사회복지사와 가정학을 전공한 건강가정사가 각 자격증을 시험을 통해 전문성을 인정받고, 자격을 부여받는 자만 가족복지서비스를 제공할 수 있었다. 이에 몽골에 비해서 한국 인력의 전문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예산의 적절성 측면에서 몽골은 현금 서비스를 중심으로 하고 있지만 현금지원이 가족의 삶의 질에 크게 도움이 되지 못한다는 점에서 예산의 적절성이 낮고, 한국은 가족복지와 관련된 다양한 서비스를 두 부처에서 많이 투자하고 있어서 예산의 적절성이 높다고 할 수 있다. 서비스의 접근성 측면에서 몽골과 한국의 인구 대비 기관수를 보면 차이가 크지 않다. 몽골이 인구 대비 지역면적으로 인해 서비스를 접근하기 어렵고 또는 전문가 일인당 인원수가 많아서 서비스의 접근성이 떨어진다면, 한국은 가족복지서비스 전달 기관이 많이 설치되어 있지만 몽골에 비해 인구밀도가 높아서 전문가 일인당 인원수가 많아서 양국 서비스의 접근성은 떨어진다고 할 수 있다.

      •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기업의 재무적 성과에 관한 실증적 연구 : CEO의 변혁적 리더십의 조절효과를 중심으로

        김헌수 인하대학교 대학원 2013 국내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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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 문 초 록 김 헌 수 본 논문의 연구주제인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재무적 성과’를 연구의 대상으로 정한 것은 기업을 둘러싼 환경이 광범위하고 급격하게 변하는 상황에서는 과거처럼 일반적인 경쟁의 우위, 즉 기술적, 물적, 재무적 자원만을 가지고선 경쟁력이 없기 때문이다. 이러한 자원 즉 기업의 구성요소는 웬만한 기업이면 잠재력이 있고 모방과 공유도 쉬워서 상당기간 지속될 수는 없다. 따라서 고도의 전문적 지식, 기술, 국제적인 감각․능력, 전략 등을 겸비하고 잘 준비된 인적자원의 보유야말로 기업의 근간, 즉 자원(resource)으로서 상대적 경쟁우위이며, 경쟁기업들이 쉽게 모방하기 어렵고 지속 가능한 경쟁우위의 원천이다. 따라서 전략적 인적자원관리란 사람이 가진 능력을 배가하여 전략적 가치로 계발‧승화‧발전시켜 지속적 경쟁우위를 확보하는 데 그 목적이 있으며, 고용관계 관리의 전략적 접근의 하나로서, 그 관리는 고용에 관한 정책, 계획, 실천을 통합한 일련의 혁신적 통합이어야 한다. 과거의 전통적인 인적자원관리가 기업의 사업전략을 수행하기 위해 필요한 인력의 채용 및 훈련, 유지, 배치, 평가, 방출 등의 중심적인 역할을 의미한다면, 연구주제로 다루고자 한 전략적 인적자원관리는 조직에 전략목표를 반영하여 경영전략과정과 연계시켜 인적자원관리 기능 간에도 적합성과 조화를 이루어 조직의 전략목표를 효율적으로 달성시키는, 즉 재무적 성과 면에 효율성을 발휘하여 전략적 인적자원관리가 효과적으로 수행되기 위한 변수이다. 또한 기존 연구들이 대부분 포괄적 기업성과의 관계 규명을 위해 주로 기업전체 또는 전략적 사업단위 정도의 수준에서 성과측정을 수행했다면, 본 연구는 성과의 만족을 재무적 성과에 겨냥하여 긍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하는 인적자원관리 활동의 핵심요소로 페퍼(Pfeffer, 1998)교수가 제시한 7가지 특성의 구성요소를 연구 대상으로 선정하게 되었다. 그리고 두 변수 사이에 조직이나 집단의 성과를 좀 더 제고하기 위해서는 리더 혼자만 리더십 특성을 함양하고 행위스타일을 개발하며 상황에 적합하게 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하다. 따라서 부하로 하여금 리더에 고무되어 솔선하여 열심히 일하도록 만들고, 특히 최고 책임자는 부하들이 열심히 일하도록 동기를 부여할 뿐만 아니라 조직과 자신을 동일시하도록 변화시켜야 성과가 극대화될 것이라는 전제하에 최고 책임자의 변혁적 리더십을 조절 변수로 하여 연구의 맥락을 정리하였다. 따라서 상기의 연구주제와 관련하여 선행연구를 고찰하기 위해 국내외의 다양한 연구 문헌, 기업의 인사전문가를 대상으로 한 인터뷰 등을 통해 설문을 만들었으며, 우편발송, 이메일, 팩스 등의 방법으로 실증연구를 실시하였다. 본 연구의 실증분석 결과를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수집된 자료의 통계분석은 SPSS/WIN 18.0을 활용하였다. 일반적인 사회과학분야의 경우 Cronbach's Alpha값이 0.6 이상이면 내적 일관성이 있다고 판단하는데, 설문간의 내적일치도는 전체 결과 변수의 신뢰도 검정에서 0.7 이상으로서 일반적 수준 이상으로 높게 나왔다. 또한 통계적 검정 실시 이전에는 설문내용에 대한 일반적인 특성검정의 일환으로서 평균값으로 현황 분석을 실시한 바, 주요 변수값의 설문에 대한 응답 결과는 7점 척도의 4.0 이상으로서 이는 전체 100의 60 이상이므로, 앞으로 진행될 통계적 검정의 신뢰도를 높여줄 수 있는 예비적 진단이라 해석할 수 있다. 독립변수인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조절변수인 최고 책임자의 변혁적 리더십의 요인값들은 대부분 0.5보다 크므로 요인분석이 잘 이루어졌다고 할 수 있다. 그리고 구성 타당성을 검정하기 위해 실시한 직교회전(varimax) 방식의 결과는 특정한 독립변수들의 측정 항목들과 높은 요인인 적재치(factor loading)를 가지고 있어 타당성 있게 측정되었음을 보여준다. 그뿐만 아니라 독립변수인 페퍼교수가 제시한 최상의 제도(Best Practices)인 7가지 요소로 종속변수인 재무적 성과와 다중회귀 분석을 실시한 바, ‘선별적 채용’의 모형은 43.9%의 설명력을 갖고 있으므로 계수도 유의하며 긍정적인 영향을 미친다고 할 수 있다. ‘광범위한 교육훈련’에서는 모형도 계수도 유의한 결과가 나왔으며, 특히 모형은 30.3%의 설명력을 갖는다. ‘정보공유’ 또한 종속변수에 유의한 결과가 있었으며, 45.6%의 매우 높은 설명력을 갖는다. 그리고 ‘고용보장의 정도’ 또한 종속변수에 모형도 계수도 유의적이었고 32.2%의 설명력을 갖는다. 따라서 독립변수인 전략적 인적자원관리가 재무적 성과에 75.5%의 매우 높은 설명력을 갖는 회귀분석의 결과를 볼 때, 우리나라의 기업들도 이젠 국제적인 경쟁력을 가지고 인본주의적 인적자원관리를 하고 있으며, 그 필요성이 상당히 제기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조절변수에서 ‘카리스마’가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재무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대한 회귀분석의 결과는 77.0%로서 더욱 긍정적인 유의성을 가지고 있음을 발견할 수 있었으며, ‘영감적 동기부여’가 재무적 성과에 미치는 영향에 관해서는, 동기 부여가 높을수록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매출액, 영업 이익률, 증가율에 75.9%라는 높은 설명력을 갖고 있음을 발견하였다. 그뿐만 아니라 ‘지적인 자극’은 77.1%의 설명력을 가진 긍정적인 유의성을 가지고 있었고, ‘개인적인 배려’가 독립변수와 종속변수 사이에 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한 가설을 검정 한 바, 60.4%의 설명력이 있음을 확인하였다. 마지막으로 최고책임자의 변혁적 리더십이 전략적 인적자원관리와 재무적 성과에 미치는 조절변수의 영향을 조사하기 위해 회귀분석을 실시한 바, 최고 책임자의 변혁적 리더십이 높을수록 더 긍정적인 영향(75.4%)을 미친다는 결과가 나왔다. 이상과 같은 결과는 ‘사람이 곧 경쟁력이다’라는 페퍼교수의 ‘Best Practices’가 우리나라 기업에서도 인적자원관리의 매우 경쟁력 있는 구성요소로서 그 가능성을 시사해 주었다고 하겠다. 그리고 페퍼교수가 말했듯이, 이 7가지 구성요소가 모든 인적자원관리에서 만병통치약인 것처럼 과신하는 것은 금물이며, 그 가능성을 확인하는 데 더 큰 의미가 있고, 향후 지속적인 연구의 대상이 될 수 있어야 한다.

      • 전정-고유수용성감각 중심의 감각통합중재가 ADHD아동의 감각처리 및 감정조절, 일상생활적응에 미치는 영향

        김환신 가야대학교 보건대학원 2020 국내석사

        RANK : 247599

        본 연구는 전정-고유수용성감각 중심의 감각통합중재가 ADHD아동의 감각처리 및 감정조절, 일상생활적응에 어떠한 영향을 미치는지를 알아보고자 중다기초선 설계를 적용하여 연구를 하였다. 연구는 ADHD로 진단받은 9세 초등학교 2학년 남자 아동 3명을 대상으로 8주 동안 주 2회, 매회기 50분 중재, 총 16회기를 진행하였으며, 3회기의 유지 기간을 통해 중재 효과가 지속되고 있는지 알아보았다. 전정-고유수용성감각 중심의 감각통합중재를 적용한 후 감각처리 변화는 특정 자극을 찾는 행동시간(분)으로, 감정조절 변화는 화를 내는 행동 발생률로, 일상생활적응 변화는 부적응 행동 발생률로 매회기 관찰하였으며, 중재 전․후 평가로 감각처리는 단축 감각 프로파일(SSP), 감정조절은 아동 청소년을 위한 감정조절지수(ERICA), 일상생활적응 척도는 한국판 ADHD 일상생활적응척도(K-LPS-C)를 사용하였다. 연구 결과는 대상아동 3명 모두 특정자극을 찾는 행동시간, 화를 내는 행동 발생률, 일상생활 부적응 행동 발생률에서 기초선 기간에 비해 의미 있는 향상을 보였다. 그리고 중재 전․후 평가에서도 SSP 및 ERICA, K-LPS-C 점수가 향상되었다. 따라서 전정-고유수용성감각 중심의 감각통합중재가 ADHD아동의 감각처리 및 감정조절, 일상생활적응에 긍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본 연구결과를 바탕으로 향후 ADHD 아동뿐만 아니라 감각처리에 문제가 있는 다양한 장애영역을 대상으로 전정-고유수용성감각 중심의 감각통합중재를 적용함에 있어 임상적인 근거를 제공하는데 의의가 있다. This study conducted an experimental study by applying a multi-baseline design to see how the sensory integration Intervention centered on the vestibular-proprioceptive sensory affects sensory processing, emotional regulation, and Daily Life Participation, of ADHD children. The study was conducted on 3 boys in 9-year-old elementary school who were diagnosed with ADHD, conducted twice a week for 8 weeks, 50 minutes of intervention each time, and a total of 16 sessions. Through the maintenance period of the 3 session it was checked whether the mediation effect is continuing. The change in sensory processing is the action time (in minutes) to find a specific stimulus, and the change in emotion regulation is the incidence of angry behavior, and the change in daily life participation is observed each time as the incidence of maladapted behavior, As a pre-and post-intervention evaluation, sensory processing uses a shortened sensory profile (SSP), emotional control uses an emotional control index for children and adolescents (ERICA), and the daily life adaptation scale uses the Korean version of the ADHD daily life participation scale (K-LPS-C). As a result of The study found that all three children significantly improved the incidence of time and anger in finding specific stimuli and the incidence of maladjustment in daily life participation when compared to the baseline period. In addition, the SSP, ERICA, and K-LPS-C scores improved in the pre-and post-intervention evaluation. Therefore, the Vestibular-proprioceptive Sensory-centered Sensory Integrative Intervention had a positive effect on the sensory processing, emotion regulation, and daily life participation of ADHD children. Based on the results of this study, it is meaningful to provide a clinical rationale for the application of sensory integration mediation centered on vestibular- proprioceptive Sensory-centered Sensory Integrative Intervention in a variety of disability areas with sensory processing problems as well as ADHD children in the future.

      • 인조(仁祖)대 재이(災異)에 대한 인식과 대응

        하서정 경북대학교 대학원 2017 국내석사

        RANK : 247599

        인조대는 정치적 · 사회적인 변화를 겪은 시기로 이해되고 있다. 반정(反正)으로 정국이 바뀌면서 남인과 서인의 공존화가 이루어졌고, 이괄의 난 등의 내부적인 위기를 경험하였다. 또한 명·청이 교체됨에 따라 국제 질서의 재편을 겪고, 두 차례의 호란으로 국제 전쟁을 치루기도 하였다. 이러한 인조대 사회의 양성은 자연 환경적인 현상과 무관하지 않다. 인조대가 소빙기에 포함되기 때문이다. 전통시대 자연 재해는 재이(災異)로 인식되어 국가적 위기로 파악되었다. 조선시대 재이는 ‘천변’과 ‘지변’으로 구분하여 이해할 수 있다. 인조대 재이는 다양한 사료를 통해서 그 실체를 파악할 수 있는데, 연대기 사료와 『증보문헌비고』를 통해 17세기 조선시대에 재이가 집중적으로 발생했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또한 『재이고』를 통해 ‘천변’이 단순 자연 현상으로 이해된 것이 아닌, 국가적 위기와 함께 이해되었음을 알 수 있다. ‘지변’의 경우 인조대 후반기로 갈수록 그 빈도가 늘어나고 있다는 사실을 확인할 수 있었다. 조선시대 재이론은 동중서의 ‘천인감응론’으로부터 비롯되었고, 재이의 의미는 중종대에 완성되었다. 인조는 ‘천인감응론’과 중종대 완성된 재이의 기능을 그대로 수용하여 반정군주로서의 취약한 정통성을 극복하고자 하였고, 신하들은 독단적인 군주의 권력 행사를 제재하고자 하였다. 인조는 기우제를 친제함으로써 민본(民本)을 표방하여 천명(天命)을 부여받은 임금의 권위를 확인하고자 하였고, 원종 추숭과 왕실 보호에 재이 구언을 적극적으로 활용함으로써 정치적인 주도권을 잡고자 하였다. 그러나 인조의 재이에 대한 태도는 병자호란을 기점으로 바뀌게 되는데, 병자호란은 인조에게 굴욕을 안겨준 동시에, ‘천변’을 통한 절대적인 군주권 강화의 명분을 잃게 하였다. 인조는 전쟁 이후 천변을 활용하기에 어려움이 있자 다른 방안으로 지변을 선택하게 되었고, 이는 재이구언의 계기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그럼에도 재이 구언 자체에 대해서는 소극적으로 대응하였는데, 이는 정치적인 견제로부터의 거부로 볼 수 있다. 대신 인조는 민생 구휼에 힘쓰는 태도를 보인다. 기우제를 친제하거나 내탕고를 열어 빈민을 구제하는 등의 행위는 민생 구휼에 인조가 적극적으로 나섰다는 사실을 보여준다. 또한 이러한 분위기는 인조대 진휼청의 역량이 향상되는 결과를 낳기도 하였다. 인조의 구휼에 대한 태도는 후대에 긍정적으로 평가되는데, 인조의 행장과 『국조보감』을 통해서 살펴볼 수 있다. 인조는 명종대 이후 단절된 재이에 담겨있는 민본(民本)의식을 다시 끌어올리는 역할을 하였다. 이러한 의식은 훗날의 임금들에게 영향을 주어 조선후기 위민정치의 기초가 되었다.

      • 조선 초 승역(僧役) 관련 상직(賞職) 연구

        김선경 경북대학교 대학원 2020 국내석사

        RANK : 247599

        The Buddhist policies of the early Joseon Dynasty were intended to strengthen the foundation of the nation and directly or indirectly utilized the human and material resources of the Buddhist community. Thus, monk(seung,僧), a representative human resource of the Buddhist community, was mobilized for large scale state construction. During the reign of King Taejo(太祖) and King Taejong(太宗), monks participated in the construction of the capital. And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世宗), monks(seung,僧) participated in various state construction. The state mobilized monk for the construction and compensated him in various ways. Examples include the provision of food and clothing(衣食), the award of monk officials(sangjik,賞職), and the payment of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In particular, the issue arose after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was paid in return for the mobilization of the ascendancy. Therefore, there is a suggestion to replace the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with monk officials(sangjik,賞職). At that time, a large number of high ranking officials, including the Seonsa(禪師), Daeseonsa(大禪師) in the construction, and a large number of them were paid to monk officials(sangjik,賞職) at once. According to the Doseungjo(度僧條) by Gyeong-je-yuk-jeon(經濟六典) and Gyeong-guk-dae-jeon(經國大典), the official certificate of status monk(seung,僧) in the early Joseon Dynasty was obtained only when strict qualification standards, complicated procedures, and economic power were supported. However, the change occurred when such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 (docheop,度牒) was given in return for participating in the nation's construction. For monks(seung,僧), possessing a axe means being officially exempted from national service. However, from the perspective of the state, the payment of the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means a reduction in the human resources that the state can operate. Nevertheless, King Sejong(世宗) chose the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as a reward for the mobilization of monks(seung,僧) in order to save the people's hard work and to use the martial a monk without a certificate as a human resource. It was practically not easy to charge a station service to a large number of monks(seung,僧) hiding without a monk certificate(docheop,度牒). Therefore, it was thought that it would be more efficient to give monk's certificate (docheop,度牒) to monks and mobilize them for construction on behalf of the people. Meanwhile, this measure, which provides the monk's certificate (docheop,度牒) of monks(seung,僧) in charge of national construction, was applied to the construction of Taepyeonggwan(太平館), which resulted in a surge of monks(seung,僧) participating in the construction. However, when the government was forced to carry out various national projects in the early days, it would have been inevitable to mobilize monk(seung,僧) as a way to ease the people's power and facilitate the construction. Because of this, the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was used as a means, but the station service was reduced became more serious. The government must have agonized over the fact that it could not suspend various ongoing construction projects just because these problems were growing. The government would have been troubled. As a result of the agony, it can be thought that he might have considered a monk officials(sangjik,賞職) instead of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In othe from the perspective of the country, it was impossible to continue to pay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docheop,度牒) with a huge problem of loss of national service(gukyeok,國役). It can be said that the payment in return for temporary benefits not in the law and compensation of a position that can be mobilized for national services at any time has been reconsidered and implemented. Thus, the compensation of monk officials(sangjik,賞職), which is a temporary measure that is not in the law, was once again considered and implemented as a reward for mobilizing monks instead of the buddhist monk's certificate (docheop,度牒).

      • 조선후기 관찬읍지 연구

        이재두 경북대학교 대학원 2021 국내박사

        RANK : 247599

        이 논문은 조선후기 중앙정부나 지방관아에서 편찬한 관찬읍지(官撰邑誌)의 실태를 분석한 것이다. 선행연구로 인해 조선후기 관찬읍지에 대한 이해가 깊어졌다. 그러나 선행연구에서는 읍지의 목차나 항목구성의 차이에 주목하여 유형화하려는 노력이 부족하였다. 더구나 분석의 대상으로는 지도를 빠뜨리고 인찰지나 행자수를 변형한 후사본(後寫本)을 소재로 삼았다. 그런데 최근에는 각 기관에서 다수의 읍지 원본을 인터넷 웹에 이미지를 탑재하거나, 원문 복사 서비스를 제공하고 있다. 이에 선행연구를 검토하면서, 국내외 기관이나 개인 소장 읍지를 더 많이 확보하여 조선후기 관찬읍지의 실상을 제대로 파악할 필요가 커졌다. 17세기 말부터 조선에서는 국가가 주도하여 전국 읍지 편찬을 추진하였다. 숙종 즉위 초기인 1679년(숙종 5)에는 대제학인 김석주가 주관하였으며, 문한기구인 홍문관이 『여지승람(輿地勝覽)』 증보개간을 담당하였다. 당시에는 『신증동국여지승람』(이하 『여지승람』)을 바탕으로 행정과 재정 상황을 추가한 15개 전후의 항목을 신설하였다. 『여지승람』과 『세종실록지리지』를 통합한 형태라 할 수 있다. 숙종 중기인 1699년(숙종 25)에는 비변사가 주축이었으며, 좌의정 최석정이 주관하였다. 행정과 재정 상황만이 아니라, 인물 수록대상을 문과⋅음사⋅생진⋅무과까지 확대하여 각 고을의 지배세력까지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하였다. 각 고을의 읍지를 대부분 수집하고 찬수청을 설치하여 사업이 절반 정도 진척되었지만, 최석정이 유배되면서 2년여 만에 중지하였다. 그러나 곧 최석정이 영의정으로 복귀하면서 1706년(숙종 32)부터 사업을 재개하였다. 1707년에는 고례(古例)를 존중하여 『여지승람』의 단순한 증보를 목표로 인물과 시문의 신증에 주력하였다. 그렇지만 ‘증보여지승람(增補輿地勝覽)’은 편찬인력과 재정 부담 등으로 인해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18세기 중엽 영조 후반기에는 전국읍지인 『여지도서(輿地圖書)』를 편찬하였다. 숙종대의 『여지승람』 증보개간 시도 이후 50여년이 지난 시점이었다. 1757년(영조 33)에는 읍지 수집에 주력하여 1758년 말 홍문관에는 팔도읍지 신건을 비치하였다. 당시 각 고을에서는 『여지승람』이나 숙종대에 편찬한 읍지나 사찬읍지, 혹은 이들 읍지의 수록항목을 참고하여 편찬한 읍지를 상송하였다. 1759년(영조 35) 말에는 홍문관에서 읍지의 표준양식을 각 고을에 하달하였다. 『여지도서』는 국가운영에 필요한 행정과 재정 관련 항목을 신설하고 시문 수록을 지양하여 실용적인 전국읍지였다. 『여지승람』의 제영 등을 생략하면서 사찬읍지 수록항목을 다수 반영하였으며, 유형원이 『동국여지지』에서 제시한 문제의식과 숙종대의 『여지승람』 증보개간 사업 당시 개발한 신설항목을 수용하였다. 그러나 경상도편은 제영을 비롯한 『여지승람』 수록항목을 그대로 두었다. 함경도편은 학교와 발참을 두었으며 공해와 누정 등에 제영을 다수 수록하였다. 1760년(영조 36) 강화부와 팔도 감영에서는 각 고을 읍지를 모아 그대로 상송하였다. 홍문관에서는 당시까지 수집한 읍지들을 『여지승람』의 도별 고을별 수록순서에 따라 진관별로 분류하여 일정한 분량으로 성책하였다. 성책 순서대로 분석해 보면, 경기와 충청도 일부 고을 읍지는 『여지도서』 성책 당시부터 누락되었으며, 경도⋅한성부⋅개성부 읍지는 누락 여부를 알기 어렵다. 『여지도서』는 인물과 시문이 적어 교화라는 관점에서 보면 『여지승람』보다 부족하였다. 방리⋅도로 및 재정 관련 항목은 부록처럼 편성되어 있어 이들 항목을 읍지 내부에 적절히 배치할 필요가 있었다. 1768년(영조 44)에는 『여지도서』를 보완한 새로운 수록규정을 하달하였다. 『여지승람』과 『여지도서』의 항목들을 모두 다 반영하였다. 『여지승람』의 항목명과 수록순서를 존중하였으며, 장시(어염 포함),⋅환적⋅과거⋅비판(비문+책판)을 신설하였다. 영조 집권 말기 지방행정과 재정은 물론, 상업⋅인물⋅시문⋅출판에 관심이 높아지던 시대상을 반영하였다. 군사(君師)이고자 했던 영조와 사족의 이상을 반영하였다. 향론을 바탕으로 읍지에 수록할 인물을 선정하고 선현의 비문까지 수록하기 위해서는 사족의 참여가 필수적이었다. 전국적으로 『여지도서』 보완유형이 약 40%에 이르는 고을에서 확인되는 것은 『여지도서』 편찬 이후 새로운 유형을 적용하여 편찬한 구지가 남아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1773년(영조 49)에 편찬한 읍지를 보면, 대부분의 고을에서 『여지도서』 유형으로 회귀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이하 『각도읍지』)에는 1773년지가 54개인데, 44개(81%)가 『여지도서』 유형이다. 정해진 기간 내에 읍지를 상송해야 하는 지방관이나 향리들은 이전에 편찬한 『여지도서』 유형을 선호하였다. 수록할 내용이 적고 객관적이었으며, 인물이나 시문 선정에 따른 부담이 적었기 때문이다. 1775년(영조 51)에는 『여지도서』 수록항목에 책판⋅선생안을 신설하고 누정 뒤에 제영을 둔 『여지도서』 증보유형을 보급하였다. 책판의 유무만 밝히거나, 선생안만 추가해도 1760년 『여지도서』 성책 이후에 편찬한 읍지이기 때문에 『여지도서』 증보유형으로 분류할 필요가 있다. 정조 초반에 수집한 『각도읍지』 1780년지 61개 가운데 56개(92%)는 『여지도서』 유형이나 『여지도서』 증보유형이다. 정조는 당시 수집한 『여지도서』 계통의 읍지에 만족하지 못하였다. 1781년(정조 5) 정조는 『여지승람』의 고례를 존중하면서 『여지도서』 계통 수록항목을 추가하는 새로운 전국읍지를 모색하였다. 영조대부터 여러 차례 편찬한 ‘해동읍지’와 『여지승람』의 수록항목을 재구성한 『해동여지통재(海東輿地通載)』를 편찬하고자 한 것이다. 1787년(정조 11) 8월 정조는 이전에 수집한 읍지들을 바탕으로, ‘읍지 범례’를 도별로 2개 고을에 시범적으로 적용하였지만 제대로 되지 않았다. ‘경상도읍지’(1786)와 『영남읍지』(1789)를 비롯하여 정조 전반기에 편찬한 읍지들이 다수 현전하는 것은 정조가 전국읍지 편찬을 모색하면서 각 고을의 읍지를 여러 차례 수집한 결과이다. 정조 후반기 규장각에서는 그동안 수집한 읍지, 중앙정부의 각종 기록, 그리고 일정한 수록규정을 바탕으로 읍지의 정본화(定本化)에 주력하였다. 1789년(정조 13) 6월 정조는 교정당상인 이서구와 논의하여 ‘해동읍지’ 수록항목을 결정하였으며, 도별 담당자들에게 항목별로 업무를 분담시켰다. 가장 먼저 완성한 경도와 한성부의 읍지는 순조 말에 신증한 것을 재필사한 『동여비고』 2권 2책으로 현전하고 있다. 연대기 사료에는 경기도, 충청도를 거쳐 경상도까지 시작한 것으로 나온다. 1790년(정조 14) 규장각 서고에는 『해동읍지』 1건 46책을 비치하고 있었다. 1792년(정조 16) 말 정조의 지시로 승정원에서는 전라도에 영남규모(嶺南規模)에 따라 읍지를 편찬하라는 절목을 내려보냈다. 당시 전라감영에서는 『안동부여지지』(1786)를 바탕으로 일부 항목을 신설한 『호남읍지』 유형을 보급하였다. 개인소장본 『호남읍지』와 『각도읍지』에서 전라도 56개 고을 가운데 54개 고을의 1793년지를 확인할 수 있다. 『호남읍지』 유형은 정조의 『해동여지통재』 간행의 이상을 반영한 것으로 『여지승람』을 대체할 만한 전국읍지 형식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이 유형은 전라도 이외 지역까지 확대되지는 않았다. 『해동여지통재』 편찬의 이상은 정조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하여 미완의 과제로 남게 되었다. 당시 정본화하고 있던 『해동여지통재』 60권은 유일 필사본이기도 하였지만 제대로 관리되지도 못했던 듯하다. 그리하여 『해동여지통재』는 『동여비고』와 『호남읍지』에서 정본화한 흔적을 겨우 확인할 수 있다. 1832년(순조 32) 규장각에서는 각 도에 공문을 내려 『각도읍지』에 빠진 고을의 읍지를 채워 넣어 전질을 갖추었다. 1832년에 편찬한 『경상도읍지』는 읍지유형이 동일하지만, 『호남지』는 유형이 다양하였다. 그리하여 『경상도읍지』는 『각도읍지』 경상도편에 포함되었지만, 전라도는 『각도읍지』 1793년지에 누락된 고을 위주로 『호남지』 수록 읍지를 포함시킨 것으로 추정된다. 이처럼 『각도읍지』는 이전에 편찬한 읍지와 새로 수집한 읍지 가운데 선별하는 과정을 거쳐 전질을 완성하였다. 『각도읍지』의 완성은 정조대에 추진한 『해동여지통재』의 편찬을 마무리한 것이다. 그러나 『여지승람』을 대체하기에는 고을별로 수록형식과 분량의 차이가 너무나 컸으며, 출판되지도 않았다. 『각도읍지』 1832년지는 159개인데, 『여지도서』 보완유형 86개(54%), 『여지도서』 계통 43개(27%), 예외 유형 16개(10%), 『여지승람』 계통 9개(6%), 『호남읍지』 유형 5개(3%)이다. 헌종대인 1840년대에는 연차적으로 경상도⋅경기⋅강원도⋅충청도⋅전라도 순으로 도지를 편찬하였다. 1860년(철종 11)에는 『관북읍지』, 1862~63년(철종 14) 사이에는 『호남도지』를 편찬하였다. 19세기 말 20세기 초 제국주의 열강의 침략에 직면한 고종 집권기의 조선⋅대한제국은 근대 국가를 만들어가는 과정에서 각 고을의 사정을 제대로 파악하기 위하여 여러 차례 읍지를 수집하였다. 1868년(고종 5)에는 『관북읍지』를 편찬하였다. 1871년(고종 8)에는 의정부의 지시로 각 고을에서는 읍지⋅지도⋅사례대개와 영⋅진⋅역지를 편찬하였다. 1874년(고종 11)에는 『호남읍지』를, 1878년(고종 15)에는 『경상도읍지』(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경상도편)와 『황해도전지』를, 1879년(고종 16)에는 『호남읍지』를, 1881~82년에는 『강원도읍지』를 편찬하였다. 1894년(고종 31) 의정부(내각)는 각도의 감영⋅병영으로부터 주부군현⋅진⋅역⋅보에 이르기까지 인사와 재정에 관한 읍사례를 부기한 읍지를 수집하였다. 1897년(광무 1) 10월 대한제국 수립을 선포한 이후, 1899년(광무 3) 4월 대한제국 내부에서는 각 고을에 읍지와 지도를 각 2건씩 정서하여 올리라는 읍지수상령을 내렸다. 규장각의 252종 312군의 읍지는 당시 각군에서 상송한 것이다. 장서각이 소장하고 있는 강원도 26개 군의 읍지는 대부분 1899년 1월에 편찬한 읍지에 이후 편찬한 읍지를 합친 것이다. 1899년 당시 지방행정구역인 342개 부⋅군 가운데 338개는 1899년지가 현전하고 있으며, 한성부⋅경주군⋅영변군⋅함흥군 읍지는 확인되지 않는다. 한편, 대한제국은 1899년 3월 『각도읍지』 72책의 경운궁 흠문각 내입을 계기로, 분실한 고을과 신설군의 읍지를 보충한 보유편 8책을 제작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의 『읍지』 74책은 2011년에 환수한 전국읍지인데, 일제가 대한제국 각 고을의 사정을 구체적으로 파악하고자 정선하여 반출하였으며, 국권 피탈 과정이나 이후 식민 지배 전략 수립 등에 활용하려는 의도가 강하였다. 국립고궁박물관과 규장각한국학연구원의 『각도읍지』는 각 고을이나 감영, 혹은 규장각 등에서 어람용으로 잘 정서한 선본이며, 『신증동국여지승람』, 『동국여지지』, 『여지도서』 다음으로 오래된 전국읍지이다. 1899년 당시 대한제국 행정구역인 부⋅군 가운데 한성부(경도 포함)를 제외한 341개 고을 읍지를 포함하고 있다. 각 고을의 사정을 면밀히 파악(‘조사’)하기에는 최적의 자료였다. 1909년(융희 3) 일제가 반출할 당시 『각도읍지』는 80책이었는데, 일제는 『각도읍지』 경상도편 20책 대신 열고관의 『읍지』 14책을 포함시켜 ‘『읍지』 74책’을 반출하였다. 『각도읍지』 경상도편은 『여지도서』 보완유형으로 획일적이었던 반면, 열고관의 『읍지』는 다양한 유형을 수록하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분량도 더 많았기 때문이다. 이 연구를 통하여 각 고을의 사정을 비교적 상세히 수록하고 있는 조선후기 읍지가 한국학의 여러 분야에서 적극적으로 활용되는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This article is an analysis of the Government-Eupji(官撰邑誌) in the Era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大韓帝國). Eupji(『邑誌』, County Gazetteer) contained not only historical and geographical information of a county, but also poetry and character information. Thus, it was more of a comprehensive county information book rather than a simple book of geography, which focuses on the Changes in Administrative(建置沿革). The origin of the Eupji began in 1424 when each county compiled them under the direction of Chunchugwan(春秋館). There have been several Eupji studies so far, but a large number of materials have been found to have not yet been used in the research, so it is necessary to supplement the previous research by utilizing these data sets. Most of the Eupjis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 and Jeongjo provided by the ‘Comprehensive Information on Geography of the Kyujanggak Institute for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were copied from the Consulate's Office(參事官室)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in the early 1910s. Therefore, it is difficult to identify the original form of the Eupjis compiled at that time. In addition, the 74 volumes of Eupji(『邑誌』) of the National Palace Museum were taken by Hirobumi Ito(伊藤博文) in 1909, and the eupjis collected by Korea University's Center for Overseas Resources on Korean Studies were not properly studied. From the end of the 17th century, the central government promoted the compilation of National Eupji. In the first and second attempts to promote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fifteen items were newly added; these items created during the compilation of Private County Gazetteers[私撰邑誌] in the 16th and 17th centuries. It is a combination of Dongguk Yeojiseungram and Sejongsilok jiriji(『世宗實錄地理志』). The third attempt was to promote Yeojiseungram by focusing on the contents of characters and poems while drastically reducing the number of new items, but Jeungbo Yeojiseungram(『增補輿地勝覽』) was not publish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gjo(英祖), the central government strengthened its control over the provinces and carried out several attempts to compile National Eupji to accurately understand the changing information of each county in the country, as well as to collect taxes and secure military personnel. The compilation of National Eupji during the second half of King Yeongjo's reign reflects the intention of restructuring the national record and re-organizing the national operating system. The first attempt(1757~58) was based on Eupjis that compiled the revision and promotion of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and, thus, the situation of the time was reflected in 1758. During the second attempt(1759~60) in the reign of King Yeongjo, Hongmungwan completed the rules for the items of the Eupjis, i.e. the standard form of the Eupjis, and were bound up National Eupji, Yeojidoseo. Yeojidoseo was a practical National Eupji that recorded newly established items related to the tribute taxes and securing military personnel necessary for the operation of the state, while it avoided contents of poetry. Gyeongsang-do section kept the entire list of Yeojiseungram, while Hamgyeong-do section included schools and balcham(撥站). It is reasonable to regard the Yeojidoseo as an Unfinished National Eupji(全國邑誌), bound in volumes at Hongmungwan(弘文館) in 1760, given that there is no record of additions since 1760. Among the Private County Gazetteers, the most frequently included items included Seungpyeongji(『昇平志』) and Posanji(『苞山志』), as well as the new items developed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Hongmungwan, the Eupjis collected and sent from each provincial government office were sorted out according to the jurisdiction(鎭管) of each county. In the third attemp, the items of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and Yeojidoseo were included, and the names and order of the items of Yeojiseungram followed. Compared to the Gyeongsang-do section of Yeojidoseo, slash-and-burn field taxes(火稅), yoyeok(徭役), accomplishments of officials(宦蹟), markets[場市, including fish and salt(魚鹽)], literati degree holders(科擧), epitaphs and printing woodblocks(碑板) were newly established. This type can be classified into the Yeojidoseo Complement Type(補完類型). The fourth attempt almost abandoned the Yeojidoseo Complement Type developed in 1768, and returned to the lineage of Yeojidoseo. In 1775, Hongmungwan kept the items in the Yeojidoseo list, and distributed the Yeojidoseo Supplement Type(增補類型), which had printing woodblocks(冊板) and accomplishments of officials(先生案) at the end of the book, and poems(題詠) were placed after the pavilions(樓亭). The reign of King Jeongjo(正祖) can be divided into the first half of the year and the second half of the year as of June 1789, when the person in charge of compilation was confirmed for each province and item. In 1781, King Jeongjo attempted to develop a new type of Eupji that combined the Yeojiseungram and Yeojidoseo. In August 1787, King Jeongjo reorganized the attempt by developing regulations on the list based on eupjis he had previously collected, but failed to complete the attempt properly by sending the person who was in charge of the attempt to exile. On June 16, 1789, King Jeongjo decided on the items in Haedong Eupji(海東邑誌) list after some discussion with Lee Seo-gu(李書九), the head of the correctional center, and decided to share them with the people in charge of each province to complete them at Kyujanggak(奎章閣). During this period, the government focused on the original version of the Eupjis according to certain guidelines through various records collected by the central government. Gyeongdo and Hansungbu Eupji, which were first completed, have two volumes of Dongyeobigo(『東輿備攷』), which were newly established in the early reign of King Gojong. It is said that it started in Gyeongsang-do through Gyeonggi-do and Chungcheong-do. King Jeongjo encouraged Lee Seo-gu in early 1790. At that time, the library of Kyujanggak had 46 volumes of Haedong Eupji. In late 1792, Seungjeongwon(承政院) sent down the guidelines for the compilation of Eupjis. At that time, Jeolla-do developed and distributed the Honam Eupji Type, which was newly developed by the vice-governor Gwonbang(權訪) based on Andongbuyeojiji(1786). Although Gwon Bang was replaced in June 1793, Lee Seo-gu completed the Honam Eupji, which accurately reflected the regulations, when he was appointed as Jeolla-governor in August. The Honam Eupji type was a ‘perfect eupji’ to replace Sh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reflecting the ideal of King Jeongjo's Haedong Yeoji Tongji(『海東輿地通載』). The 60 volumes of Haedong Yeoji Tongjae, which were still in its original form at the time, were not properly managed as the only manuscripts, and only the traces of the original version of Dongyeobigo and Honam Eupji can be found. In 1832, during the reign of King Sunjo(純祖), an official document was sent down to each province to fill in the Gakdo Eupji(『各道邑誌』). The completion of Gakdo Eupji was the completion of the National Eupji Compilation(全國邑誌編纂) during the reign of King Jeongjo. Completed in 1832, Gakdo Eupji had a wide gap between the type and the amount of each county to replace S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During the reign of King Heonjong(憲宗) and Cheoljong(哲宗) in the mid-19th century, six kinds of Provence unit Eupjis were identified, and the compilation period was different. During the invasion of imperialist powers in the late 19th and early 20th centuries, Joseon and Korean Empire collected Eupjis several times to understand the situation of each county in the process of creating a modern nation. Gwanbuk Eupji was compiled in 1868, Honam Eupji in 1874, and Gyeongsangdo Eupji in 1878. In 1871, each county compiled the Eupjis, maps, cases(事例), and yeong⋅jin⋅yeok’s Eupjis(營鎭驛誌) by the official documents of Uijeongbu(議政府). but the Eupjis of Hwanghae-do and Gangwon-do are not confirmed. In 1894, the the Cabinet(内閣, Uijeongbu) collected Eupjis with county cases(邑事例) of personnel and finance from the provincial governments(監營) and barracks(兵營) to the counties and the jins⋅yeoks⋅bos(堡). In April 1899, the Internal Ministry(內部) of the Korean Empire was required to collect two Eupjis and two maps for each county. The 251 species 312 counties of the Kyujanggak were compiled in 1899. Each county in Gangwon-do, Hansung-bu, Gyeongju-gun, Yongbyon-gun, and Hamheung-gun are not identified. On the other hand, most of the Eupjis of 26 counties in Gangwon-do, which are owned by Jangseogak, were compiled in January 1899. In March 1899, Gakdo Eupji was housed in Heummungak(欽文閣) of Gyeongungung Palace(慶運宮). With this opportunity, the lost Eupjis and new counties’ Eupjis were supplemented. Gakdo Eupji is an old National Eupji following Shinjeung Dongguk Yeojiseungram, Donggukyeojiji, and Yeodoseo. Compared to other Eupjis, the writing is more upright and well preserved. By 1899, it contained the Eupjis of the entire Korean Empire except for Hanseong-bu, making it the best data to keep a close eye on the situation of each county. The Japanese chose 14 volumes of Gyeongsangdo Eupji, which were compiled in 1878, instead of Gakdo Eupji. As a result, the Gyeongsang-do section of Gakdo Eupji was left at the Kyujanggak Institute of Korean Studies at Seoul National University. This thesis pointed out that it was difficult to identity the exact aspects of the attempts for each period in the National Eupji Compilation, which began during the reign of King Sukjong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they were copied from the Eupjis compiled during the previous period. I hope that the use of the Eupjis in various fields of Korean studies will become more active by understanding the compilation of the Eupjis in the Era of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Korean Empire.

      • 코로나19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의 효용성 및 선호도에 대한 연구

        공선영 가천대학교 대학원 2022 국내석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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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본 연구는 국내 다양한 코로나19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의 효용성 및 선호도에 대해 국내 역학조사 담당자들의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평가하는데 목적을 두고 있다. 이에 따라 본 연구에서는 국내 코로나19 역학조사 방법과 해외 역학조사 방법을 분석하였고 국내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의 효용성 및 선호도 평가를 위해 전국의 코로나19 역학조사 담당자를 대상으로 한 선행 연구의 설문조사 결과를 재분석하였다. 설문조사는 2021년 9월 한 달 간 온라인으로 진행하였고 온라인 설문조사 링크는 전국 코로나19 역학조사 담당 부서 대표 메일을 통해 전달되었다. 설문지는 1) 인구통계학적 특성: 성별, 연령대, 소속, 담당지역, 2)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별 활용도, 3)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의 활용 순서, 4)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별 일치도, 선별검사 실시율, 응답률, 도움 정도 5) 대상별 가장 적합한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으로 구성되어 있다. 본 연구의 설문조사 결과를 요약하면 총 190명이 응답하였으며, 응답자 중 기초지자체 소속이 139명(73.2%)으로 가장 많았으며, 광역지자체 31명(16.3%), 질병관리청 13명(6.8%), 감염병관리지원단 7명(3.7%)이었다. 지역별로는 수도권 148명(77.9%), 비수도권 29명(15.3%), 질병관리청 13명(6.8%)이었다.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별 활용도에 대한 문항에서 ‘높다’또는 ‘매우 높다’라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은 방법은‘카드결제기록’(86%)이다. 반면, 활용도에 대해‘낮다’또는‘매우 낮다’고 답한 비율이 가장 높은 방법은 ‘수기명부’(47%)이다.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의 활용 순서에 대한 문항에서 1순위로 확인하는 정보는 ‘카드결제기록’이 전체 응답자의 40%로 가장 많았으나, 대유행 시 1순위로 확인하는 정보는 ‘KI-Pass(QR코드)’(37%)로 차이를 보였다. 응답자들이 생각하는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별 실제 도움 정도에 대한 문항에서 ‘도움이 된다’또는‘매우 도움이 된다’고 답한 응답자의 비율은 KI-Pass(QR코드) 91%, 카드결제기록 83%, 수기명부 22%, 안심콜 78%이다. 본 연구의 결과로 국내 역학조사 담당자는 다양한 역학조사 자료원 수집 방법 중 카드결제정보와 KI-Pass(QR code)를 이용한 역학조사를 가장 선호하였으며 수기명부를 이용한 역학조사를 가장 선호하지 않았다. 하지만 디지털 취약계층을 위한 수기명부는 여전히 필요하다. 따라서 업체에 비치된 디지털 기기를 사용하는 등 수기명부를 대체할 수 있는 시스템의 개발이 필요하다. 또한 다양한 출입명부의 개발로 역학조사 담당자들이 코로나19 확진자의 밀접 접촉자 추적을 위해 확인해야하는 정보가 많아졌으며 이는 효과적인 역학조사를 방해할 수 있는 요인으로 판단된다. 따라서 현재 활용하고 있는 전자출입명부 시스템 중 역학조사 담당자와 사용자 모두 편리하게 사용할 수 있는 시스템으로의 일원화가 필요하다는 결론을 도출 할 수 있다. 이러한 결론을 위드(With)코로나와 새로운 감염병의 출현에 대응할 수 있는 역학조사 관련 정책 수립에 참고하기 위해서는 역학조사지원시스템 내 실제 역학조사 자료원별 사용현황 등의 객관적인 데이터를 기반으로 하여 보다 정확한 효용성 평가 연구가 필요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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