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승만은 1952년 족청계와 (원외)자유당을 이용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다음 발췌개헌의 통과로 직선제를 관철시킨 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범석의 세력 확장을 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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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2013
학위논문(석사) --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 사학과 , 2013. 8
2013
한국어
900 판사항(22)
서울
Constitutional amendment issues and internal conflict in the Liberal Party in 1954
iv, 137 p. : 삽화 ; 30 cm
지도교수: 서중석
참고문헌 : p. 108-1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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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만은 1952년 족청계와 (원외)자유당을 이용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다음 발췌개헌의 통과로 직선제를 관철시킨 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범석의 세력 확장을 두...
이승만은 1952년 족청계와 (원외)자유당을 이용하여 부산정치파동을 일으킨 다음 발췌개헌의 통과로 직선제를 관철시킨 후 재집권에 성공했다. 그러나 이 과정에서 이범석의 세력 확장을 두려워한 나머지 1953년 12월 이범석을 제거하고 자유당을 개편한다. 1954년은 시기상으로 새로운 국회가 열리는 해이므로 개편하는데 적기였으며, 발췌개헌에서 간신히 직선제만을 통과시켰기 때문에 이승만은 새로운 국회에서 새로운 인물을 통하여 개헌을 통과시켜 이를 통해 권력 강화를 꾀하려고 하였다.
이승만에게 5. 20 총선은 처음부터 개헌을 위한 새로운 인물을 뽑는 자리였다. 이 총선에서는 처음으로 공천제가 도입되었는데 그동안 행정부는 장악하였으나 원내에 안정적인 지지 세력이 없어 입법부를 장악하지 못했던 이승만은 공천제를 이용해 개헌찬성 서약서를 받았으며, 서약서를 통해 소속의원에 대한 통제력을 강화할 수 있었다. 그리고 총선과정에서는 경찰력을 동원해 노골적인 선거개입을 하였고, 이를 바탕으로 압승을 거두며 새로운 인물들을 통한 원내에서 안정적인 지지 세력을 구축하는데 성공했다.
이 과정에서 이기붕을 중심으로 하는 관료집단이 기존 족청계를 대신하여 나타났다. 이들은 일제시기 식민지교육을 받은 고학력자들로 이승만에 대한 절대적인 충성심을 갖고 있으며, 민중 위에 군림하려는 성격을 갖고 있었다. 그러나 관료집단 이외에도 국민회와 청년단에 기반을 둔 비 족청계 세력도 다수 당선되었다. 이들은 이념이나 담론의 차이가 아닌 출신배경이나 지지인물의 차이를 바탕으로 주도권 싸움을 하였다. 관료집단은 이승만의 비호를 바탕으로 당내 주류파가 되었고, 비족청계 세력은 비주류파가 되었다. 그러나 한 쪽이 다른 한 쪽을 압도하지 못한 탓에 두 세력은 당내 주도권을 두고 지속적으로 반목했다.
두 세력 사이의 반목은 개헌을 둘러싸고 구체적으로 표면화되었다. 개헌의 주된 내용은 초대 대통령 임기제한 철폐, 국민투표제 도입, 정부형태의 변경, 경제조항의 변경 등이었다. 두 세력 모두 이승만의 절대충성 아래에서 개헌을 찬성하였으나 서로 자기 세력의 주도하에 개헌을 추진하려고 하였다. 그런 까닭에 총선이 끝나자마자 시도할 것 같았던 개헌공작은 당내 분열로 인해 쉽사리 시도하지 못했다.
이승만이 조속한 개헌추진을 압박하자 주류파에서는 비주류파를 설득해 간신히 개헌안 제안까지는 성공했지만 여전히 당내 분열로 상정하지 못하고 지지부진하던 차에 ‘뉴델리 밀회사건’으로 매카시즘의 바람이 불자 민의를 동원하며 이를 기회로 국회에 상정하는데 성공했다. 그러나 개헌안에 대해서 여론은 대체로 좋지 못했으며 자유당 내에서도 주류파와 비주류파와는 달리 개헌 자체에 부정적인 소장파가 등장하는 등 여전히 자유당은 단합되지 않았다.
개헌안이 표결에 들어갔고 그 결과 1표 차이로 부결이 되었다. 그러나 이튿날 유명한 ‘사사오입논리’에 의해 불법적으로 개헌은 가결로 바뀌었다. 주류파 주도의 개헌안이 불법적으로 통과되면서 이승만은 절대 권력을 손에 쥘 수 있었고 주류파 역시도 당내 주도권을 잡았다. 그러나 이 과정 속에서 자유당의 내분은 폭발해 이에 반발한 소장파와 비주류파 일부가 탈당했다. 주류파에서도 당내 결속을 위해 일부 의원을 제명 처분했다.
그렇지만 주류파의 주도권은 스스로의 힘이 아닌 여전히 이승만의 비호 아래에서만 쥘 수 있는 것이었고, 과거 족청계와 같이 언제든지 이승만에 의해 한 순간에 버려질 수 있었다. 따라서 비주류파는 이후에도 지속적으로 주류파에게 도전하였다. 한편 이승만은 이미 장악한 행정부에 더하여 주류파와 비주류파 양 쪽의 충성경쟁을 받으며 입법부까지 장악하며 절대 권력을 구축하게 되었다. 이 과정 속에서 자유당의 위법성과 폭력성이 적나라하게 드러났고, 이는 정권의 정당성을 크게 훼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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