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선천지역 미션스쿨의 지정학교 승격과 학교 인계 과정 연구
박혜진 호남사학회 2010 역사학연구 Vol.38 No.-
The Presbyterian Church U.S.A. managed eight secondary schools for males and females in the four ministry branches including Seoul, Pyeongyang, Daegu, and Seoncheon, and out of the schools, Sinsung Hakkyo and Bosung Girls’ School in Seoncheon had close bonds with the local residents. While the schools in the other three branches were established by missionaries, Sinsung Hakkyo was established by mainly the public-spirited men of the locality in Seoncheon. When in 1927 the school faced a crisis of its closing due to reduction in cost of missionary work, Pyungbuk Presbytery and Euisan Presbytery in addition of the missionary board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of the schools as the board of directors, and a Korean principal was taken office the same year. Movement for raising of Sinsung Hakkyo to a designated school was started in 1923, and the school was raised to a designated school in March 1931 due to participation of Koreans in its management, inauguration of principal Jang Lee Uk, and leading of the movement by residents in Seoncheon. Meanwhile, fund-raising for completing the foundation was actively conducted. When in 1930s schools managed by the Presbyterian Church U.S.A. were on the verge of their closing due to refusal of Shinto shrine worship, Sinsung Hakkyo and Bosung Girls’ School were transferred to and managed by Koreans. As Koreans participated in the management of the schools, transferring and managing of the schools were conducted relatively easily by the three Pyungbuk, Euisan, and Youngchun Presbyteries when the Presbyterian Church U.S.A. decided to withdraw from Korean educational projects. As in other schools managed by the Presbyterian Church U.S.A., Sinsung Hakkyo and Bosung Girls’ School sent a petition for transfer of all the school assets free of charge to the Board of Foreign Mission in the US via the Seoncheon station. Requests from all social standings such as the school boards of directors, the alumni associations, and residents in Seoncheon were acquired, and Sinsung Hakkyo with a honorarium of 50,000 won and Bosung Girls’ School with a honorarium of 7,000 won were transferred to the three Pyungbuk, Euisan, and Youngchun Presbyteries. The two schools suffered from financial problems after the transfer but were maintained after Oh Family of Chulsan supported Sinsung Hakkyo and Koreans including Rho Chung Rin and Paik Hyung Duk supported Bosung Girls’ School. In 1940s, the Japanese imperialism changed the names of the schools, and Sinsung Hakkyo became Seoncheon Middle School and Bosung Girls’ School became Seoncheon Girls' Commercial School. However, it may be considerably significant that Koreans participated in management of schools managed by Presbyterian Church and that the residents in Seoncheon voluntarily and leadingly moved to transfer the schools to the Korean presbyteries. 미북장로회선교부는 서울·평양·대구·선천의 네 선교지부에서 8개의 남녀 중등학교를 경영하였다. 그 가운데 선천지역에 설립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는 지역민들과의 유대가 긴밀한 곳이었다. 서울·평양·대구의 학교들을 선교사들이 설립했던 것과는 달리 신성학교는 선천지역 유지들이 설립을 주도하였다. 그리고 1927년 선교비가 축소되어 학교가 폐교 위기에 몰리자, 선교부 외에 평북·의산노회가 학교 운영에 이사로 참여하게 되었고, 그 해에 한국인 교장이 취임하였다. 신성학교의 지정학교 승격운동은 1923년부터 시작되었는데 한국인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장리욱 교장의 취임과 선천 시민들의 주도적 운동으로 1931년 3월에 지정학교로 승격되었다. 그리고 재단법인을 완성하기 위한 모금운동이 활발히 진행되었다. 1930년대 신사참배 거부로 인해 북장로회선교부 경영 학교들이 폐교의 위기에 닥쳤을 때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는 한국인들의 손으로 인계 경영되었다. 1920년대부터 한국인들이 학교 운영에 참여하고 있었기 때문에, 북장로회선교부가 한국의 교육사업에서 철수를 결정했을 때 비교적 쉽게 평북·의산·용천 3노회로 인계경영이 이루어질 수 있었던 것이다. 북장로회선교부 경영 다른 학교들과 마찬가지로 신성학교와 보성여학교도 학교재산 일체를 무상으로 양도해 달라는 내용의 청원을 선천선교지부를 거쳐 미국 선교본부에 보냈다. 학교 이사회, 동문회, 선천 시민 등 각계 각층의 요구가 받아들여져 신성학교는 5만원의 사례금으로, 보성여학교는 7천원의 사례금으로 평북·의산·용천 3노회로 인계되었다. 인계된 이후 경영난에 빠지자 철산 오씨 문중이 신성학교를, 노정린·백형덕 등 한국인들이 보성여학교를 지원하여 두 학교가 유지되었다. 1940년대 일제에 의해 신성학교는 선천중학교로, 보성여학교는 선천여자상업학교로 교명이 변경되었다. 그러나 선교부 경영이었던 학교에 한국인이 참여하고, 또한 한국인 노회 앞으로 인계되는 과정에서 보여준 선천 지역민들의 자발적이고 주도적인 움직임은 매우 의미가 컸다고 할 수 있다.
이용철(Lee, Yong-Cheol)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3
본 논문은 평안북도 선천지역의 3·1운동을 살펴본 것이다. 선천은 3·1운동의 계획단계부터 운동이 준비된 지역이었고, 실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으나 지금까지 개별연구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선천군은 교통의 요지였고, 그로 인해 대한제국기 이래 일제의 극심한 침탈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선천지역 주민들은 일찍이 국권회복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실제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 같은 여러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선천지역은 ‘기독교의 왕국’이란 호칭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교세가 막강한 곳이었고, 기독교보다는 비교적 덜하지만 천도교세 역시 상당했다. 특히 기독교는 양전백 및 신성학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선천지역 3·1운동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실제 기독교도들은 「선언서」의 전파 및 확산, 운동의 계획과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선천의 3·1운동은 3월 1일부터 3월 8일까지 연인원 1만 명 이상이 참여할 정도로 운동이 대단히 빨리 확산되었으며, 운동의 주도층은 신성학교의 교사와 학생으로 10~20대였다. 이는 일제에 대한 침탈로 인해 지역민의 독립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기독교와 천도교 같은 종교조직이 이들을 조직해낸 결과였다. 하지만 선천지역의 3·1운동은 대단히 빨리 약화되었다. 실질적인 만세운동은 3월 8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종료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으로 운동을 주도하던 기독교와 천도교계 조직이 큰 타격을 받고, 일제의 봉쇄로 운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연구가 미진했던 한강 이북의 3·1운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지방법원 및 복심법원 판결문이 발굴된다면 선천지역 3·1운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at took place in the Seoncheon region of Pyeonganbukdo Province in Korea. The region was included from the early planning stage of the movement, and there the first movement took place. However, research has not been properly conducted on the region. The Seoncheon-gun was a transportation hub at the time, and as such, suffered from severe exploitation of the Japanese force ever since the era of Korean Empire. Against this background, people of the Seoncheon region took interest in efforts to restore national rights, leading to a movement to repay national debts and save the nation with education. Meanwhile,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was exceptionally strong in the Seoncheon region as to being called ‘Kingdom of Christianity.’ The influence of Cheondogyo was also strong, although not as much as Christianity. Christianity in the region was closely tied to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s manifested by activities of minister Yang Jeonbaek and Shinseong School; in fact, Christians played a pivotal role in preaching and spreading the ‘Statement’ as well as in planning and deploy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grew fast as more than 10,000 people took part in between March first through eighth, led by teachers and students of Shinseong School who were in their teens and 20s. This was an outcome of organizing religious entities for Christianity and Cheondogyo, amid heightened yearning for national independence among local residents. Howev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dissipated equally quickly. The actual protest is deemed to have ended on March 8, as Christian and Cheondogyo organizations were hit hard by severe watch and oppression by the Japanese force, and their blockade efforts made further gatherings impossible. This study has historical significance for investigating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north of the Han River, which has been neglected before. However, there are limitations as well.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may be investigated further if related court rulings by regional courts and courts of review can be found.
설성경 ( Sung Gyung Sul ) 택민국학연구원 2010 국학연구론총 Vol.0 No.6
17세기의 소설 작가 김만중은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창작하였다. 그런데, 이들 두 작품 중에서 「사씨남정기」는 남해에서 창작한 것이 분명하지만, 「구운몽」은 그 창작지에 대한 학자들 사이에 이견이 있다. 그 결과, 김만중의 「구운몽」이 언제 어디에서 창작되었는가 하는 것은 고전소설 연구의 과제가 되어왔다. 이 문제에 대하여, 1960~70년대에는 김태준, 김무조, 설성경 등은 남해에서의 창작을 주장하였고, 이가원, 김병국 등은 선천에서의 창작을 주장하였다. 그런데, 1988년 『서포년보』가 발견된 이후, 김병국은 『서포년보』에 있는 “김만중이 선천 유배 시절에 ‘몽환’이라는 저서를 모친에게 보내어, 모친을 위로하였다‘는 기록을 근거로 구운몽은 선천 창작을 주장하게 되었다. 이 논문이 발표된 이후, 국문학계에서는 「구운몽」의 창작지는 선천이며, 그 시기는 숙종 13년에서 14년 사이로 보는 것이 통설이 되었다. 그런데, 현재 김무조와 남해의 일부 향토학자는 『서포년보』의 ‘몽환’을 「구운몽」으로 해석할 수 없고, 『서포년보』를 신뢰할 수 없는 기록으로 파악하여 선천 창작을 부정하고 있지만, 이것은 오류라고 판단된다. 그 이유는 『서포년보』는 18세의 기록물로는 신뢰도가 높으며, ‘몽환’은 「구운몽」의 주제가 분명하기 때문이다. 그러함에도 김무조가 남해 창작설을 거듭 강조하는 것은 남해 지역의 관광문화 자원 개발을 계기로 이런 주장을 남해 지역의 일부 향토 역사연구가들이 활용하여 구운몽은 남해에서 창작되었다는 점을특별히 부각시키면서 왜곡된 애향심을 발휘하는 쪽으로 나아가게 되어, 남해설과 선천설이 대등하게 맞서는 것으로 군민들이 오해하게 하는 지경에 이르게 되었다. 이제 필자는 남해 지역에서는 조선조의 대학자요 한국 최고 수준의 소설가인 서포 김만중이 유배라는 절망적 상황 속에서도 좌절하지 않고 시시비비를 가렸던 「사씨남정기」를 창작한 문학정신을 재현시키기 위해서도 더 이상의 불필요한 창작지 논란을 잠재우고, 정통학자들의 정설 내지 통설을 수용하는 겸허한 자세가 필요한 때라고 판단한다. 왜냐하면, 그 길은 곧 민족문학을 높인 서포의 업적으로, 한국 최초의 남해유배문학관을 세웠고, 다시 이어서 서포의 유배지인 남해군상주면 노도에 <문학의 섬>을 조성하는 거대한 관광문화 사업을 시작하고 있기 때문이다. Kim Man Jung, a 17th-century author wrote novels ‘Guunmong’and ‘Sassinamjeonggi (Ms.Sa’s Conquest of the South). However, among the two, Sassinamjeonggi is almost sure written in Namhae, but for Guunmong’s place of writing there is debate among scholars. As a result, it has been a subject of classical novel research where Guunmong was written by Kim Man Jung. On this, in 1960s to 70s, Kim Tae Jun, Kim Mu Jo and Seol Sang Gyeong argued for writing in Namhae, and Lee Ga Won and Kim Byeong Guk supported writing in Seoncheon. However, in 1988, as ‘Seoponyeonbo (Log in Seopo)’ was found, Kim Byeong Guk started argue that Guunmong was written in Seoncheon, quoting “Kim Man Jung wrote Monghwan and sent the work to his mother to console her, while he was exiled in Seoncheon.” After the thesis was released, in the literature area, a theory that says Guunmong was written in Seoncheon and between 13thyear to 14thyear of King Sukjong’s rule became wide spread. However, currently, Kim Mu Jo and some local scholars in Namhae argue that the ‘Monghwan’ in ‘Seoponyeonbo’ cannot be interpreted as Guunmong, and Seoponyeonbo is not a credible, denying the Seoncheon theory, but this is deemed as error. The reason is that ‘Seopomanpil’ is a credible source in 18thcentury,and Monghwan is theme of Guunmong, for sure.
최지녀 한국어문교육연구회 2014 어문연구(語文硏究) Vol.42 No.2
Hangjangmu項莊舞 is one of the popular performance played at local government office in Choseon Dynasty. It was dramatic by accepting the old story of Hongmunyeon鴻門宴 and characteristic by women’s personating men. Especially it caused aesthetic characteristics that men-spectators saw actresses played full-masculined men in the performance. Existences of real women under the Hongmunyeon’s historical men gave double pleas- ures to the men-spectators. In other words, they felt beauty of male and female at the same time on the women’s body. This is aesthetics of Hang- jangmu different from other performances. 項莊舞는 조선 후기에 敎坊에서 유행한 演戱의 하나로, 鴻門宴 故事를 차용하여 연극적인 요소가 두드러지며, 남성 배역을 여성이 연기한다는 점에서 특징적이다. 특히 남성적 특성이 극대화된 인물을 여성 배우가 연기하며, 남성 관객이 그것을 관람한다는 공연 상황으로 인해 독특한 美的 특질을 지닌다. 무대에서는 홍문연의 남성이 재현되고, 그 재현의 裏面에는 남성이 慾望하는 아름다운 여성이 존재함으로써 관객은 二重的 快感을 느끼게 된다. 다시 말해 남성적 悲壯美와 여성적 아름다움이 여성 배우를 통해 동시에 체현됨으로써 항장무는 남성의 세계와 여성의 세계가 주는 정서적 만족을 동시에 획득하게 되며, 이것이 전근대의 다른 공연물과는 구별되는 항장무의 미학을 형성한다.
투고논문 : 『파조록(罷釣錄)』과 『파조속록(罷釣續錄)』에 나타난 이덕수(李德壽)의 심학적(心學的) 경향
조창록 ( Chang Roc Jo ) 동방한문학회 2013 東方漢文學 Vol.0 No.54
西堂 李德壽(1673∼1744)는 영조 대에 수년간 文衡을 역임하였으며, 5대에 걸쳐 문과에 급제한 집안 출신이다. 그는 스스로 ``18세까지 읽은 책이 3천 권이요 그 뒤 40년 동안 읽은 책이 7,8천 권``이라고 말할 만큼 다독으로 유명하였으며, 저술로는 『西堂私載』, 『釋褐錄』, 『罷釣錄』 등이 전한다. 본고에서 살펴본 『파조록』과 『파조속록』에는 이덕수의 독서와 견문, 그리고 노년의 사색이 담겼는데, 특히 『파조속록』은 이 논문을 통해 처음 소개하는 것이다. 이 두 가지 서책에는 『노자』와 『장자』, 불경과 역경에 관련된 평설이 많은데, 인간의 心性과 그 수양에 관한 생각을 피력한 대목이 많다는 점이 특징이다. 이 논문은 이점에 착안하여 작성된 것으로, 여기서 논의된 내용들을 정리해보면 다음과 같다. 이덕수는 ``16자 心法``의 그것처럼 人心을 위태로운 것으로 파악했으며, 독서를 통해 옛 사람의 心에 다가가고자 하였다. 또 章句에 치중하는 유가의 心性論보다는 簡妙하게 이치를 설파하고 있는 도가와 불가의 그것을 선호했다는 특색이 있다. 그것은 특히 유가의 심성론과 道·佛의 그것을 비교한 논의에서 잘 드러나고 있는데, ``靜``과 ``虛``로 일컬어지는 만세 심학의 綱要를 노자와 불가에 연원을 둔 것으로 파악하고 있다. 또 이덕수는 노년에 역학을 공부하였는데, 그것은 유가의 義理易이 아니라 河圖洛書와 方圓圖로 대표되는 先天易學을 탐구한 것이었다. 그는 선천역의 원류를 도가 계열의 은사인 陳단으로 보았으며, 이를 전수받아 계승한 이를 邵雍으로 파악하였다. 또 이러한 심학 이해는 조선의 소옹이라 불리는 徐敬德에 대한 관심으로 이어진다. 한편 소옹의 선천역은 흔히 心法이라고 불리며, 마음을 전일하게 하는 것을 ``심학의 요체``로 삼고 있다. 이런 측면에서 이덕수의 先天易 또한 心學의 연장선상에 있다고 할 것이다. 이상을 놓고 볼 때, 이덕수는 유가의 格物이나 불가의 참선보다는 독서를 心學의 주요 수단으로 하고 있으며, 도·불을 심학적 바탕으로 하여 진단과 소옹, 그리고 서경덕으로 이어지는 先天心學의 한 계보를 계승하고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Seodang Lee, Deok-Su (1673∼1744), from the family that passed the civil service exams for five successive generations, had successively filled Daejehak positions for many years in the Yeongjo era of the Joseon Dynasty. He was famous of extensive reading to mention that he had read three thousand books until the age of 18 and seven to eight thousand books for 40 years after that. His writings include 『Seodang Sajae』, 『Seokgalrok』, 『Pajorok』 etc. The 『Pajorok』 and 『PajoSokrok』 contain his reading, knowledge and meditation in his old age, and in particular, the 『PajoSokrok』 is first introduced by this article. The two books have many reviews on 『Noja (Lao-tzu)』, 『Jangja (Chuang-tzu)』, Bulgyeong and Yeokgyeong, and the expression of opinions on human nature and self-discipline. The discussions in this thesis are as followings; Lee, Deok-Su found the human mind precarious as it was in ``16-ja Simbeop`` and attempted to approach ``the mind`` of the ancient people via bookreading. Besides he preferred the Simseongron (the theory of mind and nature) of Taoism and Buddhism, which briefly pointed out the reasons, to that of Confucian that simply focused on Janggu writing style. This is more evident in the discussion of comparison between the Simseongron of Confucian and that of Taoism/Buddhism and he traced the origin of the institutes of Manse Simhak which was referred to as Jeong (靜) and Heo (虛), in Lao-tzu and Buddhism. Lee had studied Yeokhak in his old age, by researching on Seoncheon Yeokhak which was represented by Hadorakseo(河圖洛書) and Bangwondo(方圓圖), not on Yili-yi of Confucian. He determined that Seoncheonyeok was originated from Jin Dan, the teacher of Taoism and So Ong learned and succeeded it, and which led to the interest in Seo, Gyeong-Deok who was called So Ong of Joseon. So Ong`s Seoncheonyeok, so-called Simhak, viewed concentrating the whole mind as ``the key of simhak``. In this respect, Lee`s Seoncheonyeok is also an extension of Simhak. In conclusion, Lee found the major means of Simhak in bookreading rather than in gyeokmul (investigation of things) of Confucian or chamseon (Buddhist meditations) of Bulga, and he continued the tradition of Seoncheon Simhak(先天心學) that had been led by Jin Dan, So Ong and Seo, Gyeong-Deok based on the Simhak of Taoism and Buddhism.
정영문 ( Young Moon Jeong ) 온지학회 2012 溫知論叢 Vol.0 No.31
조선시대 지방에서 생성된 공연물 중에서 관객의 호응을 얻어 궁중에서 정재된 대표적인 공연물로 <항장무>가 있다. <항장무>는 고종 계유년(癸酉, 1873)에 평안북도 宣川지방에서 雜劇의 형태로 연희되다가 궁중에 유입된 것으로 대사가 있는 舞劇이다. <항장무>는 조선후기에 연출되어 궁중정재로 편입되면서 전통적인 공연방식에 새로운 변화를 가져왔다. 본 논문에서는 <항장무>가 전통적인 공연형태로 고착화된 것이 아니라, 새로운 변화를 모색하는 과정에 현대의 연극적인 요소를 지닌 공연물로 변화하고 있음을 밝히고자 하였다. <항장무>의 출발은 춤과 연주가 결합된 검무형식이었다. 이 공연물이 관객과 호흡하면서 의미를 구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한 방법으로 노래 대신에 대화체를 사용하게 되었다. 이런 방법을 도입하고 관변공연물로 정착하면서 전통적인 연희에서 연극으로 변화하게 되었지만, 악·가·무의 결합이라는 복합적인 성격은 변하지 않았다. As the representative performance that was locally generated and then polished at the royal court by means of good responses of audiences in the Choseon Dynasty(朝鮮), there was Hangjangmu(項莊舞). Hangjangmu is a dance play with dialogues that had been performed as a miscellaneous play at Seoncheon(宣川, Pyunganbuk-Do(平安北道) at the year of Gyeyu(癸酉) (1873) of King Gojong(高宗) and then introduced into the royal court. As Hangjangmu was introduced as a court votive offering in the latter period of the Choseon Dynasty, there were new changes in the performance. In this study, the researcher intended to clarify that Hangjangmu was not fixed as a traditional performance type but was changed as performances with the modern dramatic elements in the course of groping for new changes. Hangjangmu started as combination of dances and music like sword dance(劍舞). As the result of contacting with audiences, these performances reflected their requests, and Hangjangmu became to emphasize dialogues instead of songs in order to deliver meaning concretely. In the course, changes of styles demonstrate the course of changing from traditional entertaining to a play. But Hangjangmu make a composite personality as combination of dances and music performances.
역학의 선후천과 최수운의 다시개벽 -『주역』과 『정역』의 비교를 중심으로-
이찬구 ( Chan Goo Lee ) 한국신종교학회 2010 신종교연구 Vol.22 No.-
동학의 창시자인 최수운은 송나라 소강절이 천지 순환의 이치에 따라 설정한 `개벽(開闢)`이라는 말을 수용하면서도 정작 `다시개벽`이라 새로운 말을 사용하였다. 수운이 개벽이라는 말에 `다시`를 덧붙여 `다시개벽`이라고 말한 까닭은 『주역』에서 말하는 선후천(先後天)의 교역과는 차원을 달리하는, 수운 특유의 인간개벽에 특별히 주목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러니까 수운은 천개벽에 이어 인간개벽을 위해 지(地)와 합일하는 개벽을 통해 우주가 완성되어야 한다는 관점이다. 그래서 `다시개벽`이라 말한 것이며, 굳이 이런 새로운 용어를 만들어 쓴 것은 하날님의 수고를 끝내고, 천지인 중에 마지막 개벽대상인 인간의 주체적 역할을 강조하기 위한 것으로 보인다. 그것은 김일부의 『정역』과 같이 도상(圖上)개벽으로는 축미(丑未)선상의 다시개벽인 것이다. 지금은 수운의 말처럼 목운(木運)이 도래하는 선후천 음양 교체기이다. 양적(陽的) 생장(生長)의 기운이 음적(陰的) 수장(收藏)의 새 기운으로 바뀌는 때에 인간은 우주의 변화에 순응하는 도덕적 책임을 부여받지 않을 수 없다. 특히 천인이 합일하는 새로운 선경세계를 건설하고, 지상에 실질적인 태평성세를 펼치는 데는 무엇보다도 민(民)의 주체적 자각이 요청되는 것이다. 민이 그것을 감당할 수 있는 것은 생명소생의 기운인 목운 도래라는 우주적 변화와 천도에의 복귀를 통해 하늘을 스스로 체험하고 스스로 실천하는 최령자(最靈者)이기 때문이다. 천지인이 함께 아우르고 소통하는 그런 우주적 체험을 통해 민은 주체적으로 다시개벽을 열어가며, 스스로 진정한 의미의 국태민안을 성취할 수 있을 것이다. 끝으로 필자는 선-후천 이분법보다는 선천-중천-후천이라는 삼분법에 의한 3단계 개벽으로 이해함이 어떨까 제안해 보는 것이다. 이는 인간의 수련수도를 더 강조하기 위해서라고 할 수 있다. Choe Suwoon, founder of Donghak (Estern Learning), accepted the term `Gaebyeok (Opening of a New Beginning)` proposed by a Chinese philosopher Shao Yung (So gang-jeol) according to the theory of the cycle of the heaven and earth. However, he often used a new term Dasi-gaebyeok (Reopening of a New Beginning). The reason why he added `Dasi (re-)` on the term `Gaebyeok (Opening of a New Beginning)` is because he specially focused on the new beginning of human beings unlike the theory of the pre-heaven (Seoncheon) and post-heaven (Hucheon) trade. His idea is that the universe should be completed through the unification between the earth and men following the opening of a new beginning of the heaven. The reason why he used this new term was because he intended to emphasize the role of human beings as the subjects of new beginning out of the heaven, earth and men and help the work of Hanalim. Like the Jeongyeok (Correction of Yijing) proposed by Kim Il-bu, it is the reopening of a new beginning according to Chukmi. Today is the timing of the replacement between pre-heaven and post-heaven and Yin and Yang as the fate of wood returns. As the energy of the growth of Yang is being replaced with the dressing of Yin, it is inevitable that men need to receive the moral responsibility to comply with the changes of the universe. In particular, self-comprehension is particularly required to construct the new beautiful world where the heaven and men are unified and to open the actual peace and happiness. The reason how men can realize this is because they can experience the heaven through the change of the universe, return of the fate of Wood, and return to the heaven`s way. Through the experience of universal experience where the heaven, earth and men communicate, men will walk the way of Dasi-gaebyeok and achieve actual meaning of national prosperity and the welfare of the people. Finally, the author of this study proposes trichotomy `Pre-heaven, Mid-heaven and Post-heaven` instead of dichotomy to understand the three phases of the opening of a new beginning. The purpose of this proposal is to emphasize men`s practice and discipline.
김철수 영남대학교 민족문화연구소 2016 민족문화논총 Vol.62 No.-
The Thought of 『Jeung-York』 is centered on the ‘Hucheon-Gaebyeok (Opening of a New Beginning. Re-Beginning of Post-Heaven and Earth)’ on the advent of a new world. It was a religious alternative to overcome the whole difficulties, particularly the infiltration of Western powers, the horrific reality, and the state of anomie that the Chosun society faced in the 19th century. It is very difficult to understand the actual meaning of Kim Il-bu(author of 『Jeung-York』)’s thought of the Gaebyeok which means, in fact, the ‘Interchange of Metal and Fire’. This paper tries to analyze concretely why and how the Gaebyeok is realized by referring to the contents of ‘Interchange of Metal and Fire’ theory together with the contents analysis of 『Jeung-York』(Right Change). Kim Il-bu accepted the term ‘Gaebyeok’ proposed by a Chinese philosopher So Gang-jeol according to the theory of a cycle of the heaven and earth, and explained ‘Gaebyeok(Re-Beginning of Heaven and Earth)’ as the mutation toward ‘Right Change’ by accomplishing ‘Interchange of Metal and Fire’ theory, far different from the explanations of existing science of ‘Change’. And in according to Kim Il-bu, this time(today) is the timing of the replacement between Seoncheon(pre-heaven) and Hucheon(post-heaven). This thought has influence on the religious topography of that times. 종교는 그 사회의 존재조건과 밀접한 관련을 맺으면서 전개된다. 근대 한국종교사의 걸출한 세 인물인 최수운과 김일부 그리고 강증산은 현재의 고난의 시대가 가고 새로운 시대가 도래한다는 희망의 믿음을 주고 있었다. 이들의 공통된 사상은 한 마디로 간명하게 축약할 때 ‘개벽’[다시개벽, 선후천교역, 후천개벽]이라 해도 무리가 없을 것이다. 김일부는 개벽사상에 대한 이론적 체계화를 달성하여 종교지형의 심화와 양적 확대에 기여하였다. 정역사상의 근간은 선・후천 교역론, 곧 금화교역에 있었다. 김일부는 금화교역의 과정을 통해 상극에서 상생으로, 선천에서 후천으로, 세상이 전환됨을 밝혀주었다. 후천세계는 1년 360일의 시간질서로 완결되며 정음정양의 세상이 이루어진다. 이렇게 개벽에 대한 이론적 근거를 정역에서 밝혀 준 점은 종교사회학적 의의를 갖는다. 19세기는 격동의 시대였다. 그만큼 새로운 세상의 도래를 알려주는 종교들이 전개되면서 조선조말 종교지형은 복잡하게 형성되고 있었다. 정역사상은 당시의 동학이나 증산사상과도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후천개벽 사상뿐만 아니라 후천의 상생사상, 상제사상, 정음정양 사상, 인간중심 사상, 한국중심주의 등으로 교리화가 진전됨으로써 종교지형의 질적 깊이를 심화시켜 주었다. 정역사상이 조선조 말 종교적 관심과 연계되었다는 점을 불편한 시각으로 바라볼 수도 있지만, 당시 민중들의 무력감이 확대되고 회복 가능성이 보이지 않는 절망 상태에서 정역은 종교적 임무를 완수하였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