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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스테리화된 히스테리: 들뢰즈의 히스테리

        김남이 ( Kim¸ Namyi ) 서양근대철학회 2017 근대철학 Vol.9 No.-

        들뢰즈는 『감각의 논리』에서 예술을 통해 이루어지는 감각의 생성 및 그것의 논리를 보여주고 있다. 『감각의 논리』에서 들뢰즈는 이러한 감각을 베이컨의 회화가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고 주장한다. 들뢰즈에 따르면 감각이란 몸의 “파동과 몸에 작용하는 힘들의 만남”, 다시 말해 기관 없는 몸과 외부의 힘들 간의 만남이라고 할 수 있다. 베이컨의 회화가 이 감각을 탁월하게 보여주고 있다는 것은 그의 회화가 저 힘들을 포획하는 데에 성공적이었음을 의미한다. 그리고 들뢰즈는 이러한 회화의 본질을 히스테리와 동일시한다. 그러나 히스테리와 회화의 본질을 동일시하는 들뢰즈에게 더욱 중요한 것은, 그 둘의 단순한 외양적 닮음을 넘어서서, 그 둘 모두가 보이지 않는 힘들이 육체에 가하는 작용을 보여준다는 점일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관점은, 오늘날의 히스테리에 관한 설명과는 들어맞지 않는다. 그렇다면 들뢰즈가 ‘히스테리’를 통해서 회화를 설명하는 것이 오늘날 어떤 의미가 있는가하는 문제가 제기될 수 있다. 필자는 들뢰즈가 몸의 현존과 감각에 대한 설명에서 히스테리를 끌어들인 이유로 다음을 들 수 있다고 생각한다: 들뢰즈는 정신분석학이 왜곡한 ‘심인성’ 질병으로서의 히스테리에 몸의 차원을 되돌려 주고 있다. 그럼으로써 정신분석학에 대한 비판을 행하고, 몸의 물질적이고 감각적인 차원을 열어놓는 일을 수행하는 것이다. 그러나 들뢰즈의 히스테리는 들뢰즈만의 완전히 새로운 히스테리가 아니다. 오히려 들뢰즈의 히스테리는 본래 히스테리가 갖고 있었던, 그리고 정신분석학이 간과했던, 히스테리의 물질적이고 육체적인 측면으로의 회귀를 보여주고 있다고 할 수 있다. 따라서 본 글은 정신 분석학에서 다뤄지는 히스테리뿐만 아니라 오래전부터 제기된 본래적 히스테리의 ‘쓰임새’를 추적함으로써, 들뢰즈의 히스테리가 어떤 면에서 오늘날의 히스테리와 관련할 수 있는지를 더욱 잘 확인할 것이다. 그리고 이를 통해 들뢰즈의 히스테리는 결국 정신분석의 신경증적 히스테리를 다시 히스테리화 하고 히스테리에 물질과 감각의 차원을 돌려주었음을 보일 것이다. 나아가 이와 같이 히스테리를 이해할 때 들뢰즈가 말하는 회화의 미학적/감각적 임상진단의 의미를 밝힐 수 있음을 주장할 것이다. In The Logic of Sensation, Deleuze shows the becoming of sensation and its logic caused through arts. Here lies that this logic is, although irrational, ‘logical.’ This logic is a specific logic only of sensation and presents itself wherever the sensation comes about. In The Logic of Sensation, Deleuze argues that Bacon’s paintings eminently show this sensation. The sensation in his term is “produced when the [corporeal] wave encounters the forces acting on the body”, that is, the encounter between “the body without organs” and forces outside. The fact that Bacon’s paintings proves this sensation implies his success in his capturing these forces. With this, Deleuze suggests: “With painting, hysteria becomes art. Or rather, with the painter, hysteria becomes painting. What the hysteric is incapable of doing - a little art - is accomplished in painting.” What does Deleuze insist by showing how Bacon’s paintings, or rather the essence of paintings are related in hysteria? Does he just compare the Figures in Bacon’s painting to the bodies which is twisted, distorted, epileptically convulsing and in state of attack, of hysteria? Although this may be true, it is more essential, identifying the essence of art to hysteria, that both visualize the invisible forces exerted upon bodies. However, considering the recent explanation of hysteria in psychiatric and psychoanalytic perspective, this seems beyond understanding, for hysteria is dominantly regarded not as physical disease but as psychogenic (yet of course there are a few exceptions in terms of psychiatry). Furthermore, contemporary hysteria shows different symptoms from the above. At the dawn of psychoanalysis when Charcot had introduced scientific treatment for hysteria, he had observed that hysteria’s major symptoms were the series of spastics and paralytics, hyperesthetics, anesthetics and grand attack as Deleuze mentioned.(50) But now these symptoms are hardly found. For this reason, many studies ask where all that hysteria has disappeared. If so, we can also ask what his argument for paintings with hysteria implies. Here I argue the reason for his introduction of hysteria into sensation and Bacon’s painting. First, he return the corporeal dimension to hysteria as psychogenic distorted by psychoanalysis. Thereby he criticize the psychoanalytic-clinical hysteria, opening sensitive and material level of body. Second, he reveals the aesthetic-clinic common in hysteria and aesthe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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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질 들뢰즈와 무용: 한국무용학의 들뢰즈 수용방식

        조남규 ( Cho Nam-gyu ),배은주 ( Pae Eun-joo ) 한국무용과학회 2018 한국무용과학회지 Vol.35 No.4

        들뢰즈는 현재 전 세계적으로 가장 영향력 있는 사상가 가운데 한 명이며, 한국에서도 여러 분야에 걸쳐 폭넓게 그의 사상이 검토되고 있다. 이런 추세와 함께 2000년대 초부터 한국의 무용 연구자들도 들뢰즈 사상에 주목하고, 그 관계를 탐구하고 있다. 본 연구는 그동안 연구자들이 들뢰즈 사상과 무용 사이의 관계를 어떻게 파악하고 있는지에 관해 살펴보는 리뷰 논문의 성격을 띠고 있다. 리뷰 대상은 2000년대 초부터 지금까지 한국의 무용관련 학술지에 게재된 논문이며, 집중적으로 이 주제에 관해 천착한 연구자 3명을 선정하였다. 단수의 논문 집필자를 검토 대상에서 제외한 것은 결코 가치가 없기 때문이 아니라, 다른 기회에 논의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우선 김정은은 이 주제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대체적인 윤곽을 마련하였다는 점에서 의미를 지니는 반면, 들뢰즈 사상의 난해함을 뚫고 독자에게 전달하는 면에서 아쉬운 점이 있다. 들뢰즈와 동양사상과의 관련성을 검토한 것은 적절하지만, 자칫 신비적 원초성을 인정하는 쪽으로 갈 위험성도 없지 않다는 문제가 있다. 들뢰즈와 무용이라는 주제에 관한 한, 중심적인 위치에 있는 나일화는 무용 연구가 들뢰즈 사상에 관심을 기울여야 할 이유를 잘 보여 주고 있다. 그는 들뢰즈 사상 가운데 무용 연구에 적합한 여러 측면을 검토하는 한편, 그런 사상과 어울릴 수 있는 무용계의 다양한 사례를 함께 서술하여 독자의 이해를 증진하고 있다. 하지만 나일화가 묻지 않고 있는 것은 한국을 비롯한 비(非)서구 무용계에서 들뢰즈 사상이 과연 어떤 의미를 지니는지에 관한 물음이다. 세 명 중에서 가장 후발 주자인인 이나현은 앞선 연구를 이어받으면서 보다 심화해 가고 있다. 이나현이 주장하고 싶은 바는 들뢰즈의 주요 사상이 서구 무용계에서 이미 실천하고 있는 방법, 예컨대 접촉 즉흥의 방법과 훌륭하게 연결될 수 있으며 서로 상생할 수 있다는 것이다. 이나현이 기여하고 있는 것은 들뢰즈 사상을 정확하게 파악하고 이를 무용계에서 행한 실험적 시도와 구체적이고, 설득력 있게 접속하고 있다는 점이다. 하지만 이나현도 나일화처럼 한국 무용계에서 들뢰즈가 지닌 의미에 대해서는 아직 물음을 던지지 않고 있다. 이 물음에 대해서는 앞으로 들뢰즈 사상과 무용을 연결 짓는 연구자가 진지하게 논의해야 할 문제라고 본다. Gilles Deleuze(1925-1995) is one of the most influential thinkers in the world. In the Korean academic field, many scholars have interpreted Deleuze's thought in their own way. Since 2000s, the relationship between Deleuze's thought and Dance Studies has been discussed, and as a result several papers were published. This article aims to review the important papers on this subject and discuss their contributions and some remaining questions. Three researchers are chosen in terms of their focus on the relationship: Kim Jeong-Un, Na Il-Wha and Lee Na-hyun. After reviewing the works of three researchers, I summarized their strong points and posed the question that some of them didn't as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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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식 수용과 번역의 사회적 조건

        채웅준(Chae, Woong-Jun) 한국이론사회학회 2017 사회와 이론 Vol.31 No.1

        이 연구는 지식 수용과 번역에 관한 사회학적 연구의 필요성을 제기하고 1990년대 이후 학계에 지대한 영향을 미친 포스트 담론 가운데 들뢰즈의 사례를 집중적으로 분석한다. 분석은 번역사회학적 관점에서 들뢰즈의 저작의 번역 추이와 번역서에 수록된 역자의 글, 「교수신문」 등의 자료를 활용하여 들뢰즈 수용과 번역의 사회적 맥락화를 시도한다. 1980년대 말 일련의 국내외의 사회적 · 정치적 변동에 따라 진보적 지식인의 표상이었던 맑스주의는 쇠락하고, 들뢰즈는 이를 대체할 이론으로 여겨지면서 사회학에서 활발하게 독해되었다. 그러나 1997년 한국의 금융위기 이후 포스트 담론을 전유하고자 하는 사회학의 관심은 간헐적이 된다. 그럼에도 들뢰즈를 이단으로 독해하려는 시도는 꾸준히 이루어지는데, 이는 그의 횡단적 방법론과도 상응한다. 횡단적 움직임은 들뢰즈 역자들에게 학술적 전략이었다. 들뢰즈는 ‘인문학의 위기’에 마주하여 제도를 비판하거나 새로운 지식 생산을 도모하기 위한 이론적 준거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1990년대 말, 주저가 제대로 번역되지 못했을 만큼 연구가 불충분했던 이른 시기에 한국 지식장의 급격한 구조변동이 이루어지고, 이는 들뢰즈를 통한 학문적 실험의 조건을 저해했다. 들뢰즈 연구가 상징적 권위를 확보하기 위해서 그는 점차 전문적인 형이상학으로 재위치되어야 했다. 이 연구는 학술 번역과 지식 수용을 사회적으로 맥락화함으로써, 전지구화의 추세가 가속화되는 동시대 이론문화의 사회적 조건에 대한 성찰을 요구한다. This paper attempts to contextualize the reception of foreign theories in Korea by analyzing the reception and translation of Deleuze’s philosophy through the objective tendencies of the translations, the para-texts in the translations and other sources from newspapers. In the late 1980’s and the beginning of the 1990’s, Deleuze’s philosophy was actively comprehended in the discipline of sociology as a substitution goods for Marxism which had been an emblem of the progressive intellectuals in 1980’s. The field’s attention to Deleuze, however, had become sporadic in the aftermath the Korean financial crisis in 1997. But the point here is that Deleuze has been characterized as a heresy, regardless of the period. For the translators, Deleuze’s transversal methodology was academic strategies to criticize the academic institution at ‘the crisis of Humanities’ and to promote the new production of knowledge. However, in the late 1990s, there was a drastic structural change in the field of knowledge in Korea, which hindered the conditions of academic experimentation through Deleuze. In order for the studies on Deleuze to secure the symbolic authority, he had to be repositioned in a professional metaphysics. This study calls for a reflexivity on the social conditions for contemporary theoretical culture in Korea by socially contextualizing the academic translation and reception of knowled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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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의 미학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가? - 랑시에르의 「들뢰즈의 미학은 존재하는가?」에 대한 반론

        성기현 ( Seong Gihyeon ) 한국미학회 2017 美學 Vol.83 No.3

        랑시에르는 들뢰즈의 미학을 미학적 예술 체제의 한 극단적인 형태로 간주하면서 예술의 자율성 문제와 관련하여 고찰한다. 그에 따르면, 들뢰즈의 미학은 다음의 특징을 갖는다. 첫째, 들뢰즈는 재현(모방적·유기적 구상화)과 순수 감각을 이원론적으로 대립시키는 가운데 전자를 거부하고 후자로 나아간다. 하지만 둘째, 무제약적인 순수 감각으로는 예술작품을 구성할 수 없다. 따라서 들뢰즈는 부득이하게 반재현의 재현으로, 예술작품을 반재현의 알레고리로 만드는 상징주의로 후퇴하게 된다. 셋째, 이렇듯 예술작품에다 자신의 형이상학을 예증할 것을 강요한다는 점에서 들뢰즈는 예술을 철학에 종속시킨다. 하지만 랑시에르의 이러한 독해는 들뢰즈의 사상 일반 및 미학의 새로움을 과거의 논리적 도식으로 환원하는 것으로서, 다음과 같이 교정되어야 한다. 첫째, 들뢰즈의 형이상학은 (이원론이 아니라) 발생론적 일원론이다. 둘째, 들뢰즈에게 예술작품은 (알레고리가 아니라) 감각적 발생을 기록하고 전달하는 실험기록이자 실험장치다. 셋째, 들뢰즈에게 예술은 철학의 개념적 응답을 요청하는 초월론적 경험의 한 사례로서, (철학에 종속되는 것이 아니라) 철학과 비평행적 진화의 관계를 맺는다. 들뢰즈의 미학은 어떤 의미에서 존재하는가? 그것은 감각 발생의 학문인 한에서 감성론으로, 예술을 감각 발생의 실험기록/실험장치로 다루는 한에서 예술론으로 존재한다. 즉 들뢰즈의 미학은 감각의 논리에 따라 통일된 감성론이자 예술론이다. Considering Deleuzian aesthetics as an extreme type of Aesthetic Regime of Art, Jacques Ranciere examines it in relation to the problem of autonomy of art. According to him, Deleuzian aesthetics has three characteristics: First, opposing pure sensation to representation(imitative and organic figuration), Deleuze refuses the latter and goes forward to the former. Second, however, pure sensation which is nothing but chaos by no means composes a work of art. So he unavoidably retrogrades to the representation of anti-representation, i.e. the symbolism which makes a work of art an allegory of anti-representation. Third, in this way, he subordinates art to philosophy forcing a work of art to illustrate his own metaphysics. But Ranciere`s reading like this cannot grasp the newness of Deleuzian metaphysics and aesthetics. In my opinion, his arguing points should be corrected in the next three points of view. Firstly, Deleuzian metaphysics is a genetic monism, not a dualism of pure sensation and representation. In the second place, a work of art is a device of experiments, which records and transmits the genesis of sensation. Lastly, art is a provider of transcendental experience, which demands the conceptual response of philosophy. Deleuzian aesthetics, how does it exist? It exists not only as theory of the sensible (inasmuch as that of genesis of sensation), but also as theory of art (inasmuch as art is a device of sensible experimen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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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Deleuze in the Age of the Theological Turn

        Myoung Ah Shin(신명아) 한국비평이론학회 2017 비평과이론 Vol.22 No.3

        헨트 드 브리스는 데리다의 ‘믿음과 지식’이라는 논문을 예로 들면서, 현대 철학에서 ‘종교로의 회귀’를 지적한다. 종교적 전회 혹은 신학적 전회는 도미니크 쟈니코가 이 전회가 레비나스, 미쉘 앙리, 장-뤽 마리옹 등과 같은 프랑스 철학자들이 예증한다고 불평할 때도 드러난다. 슬라보예 지젝과 알렝 바디우도 그들의 철학 담론에서 사도 바울을 특별히 취급하고 있다. 이 신학적 전회의 시대에서 들뢰즈의 위치는 어떠한가를 연구하는 것이 이 논문의 목표이다. 잘 알려진 바와 같이 들뢰즈는 신학, 예술 그리고 과학과 대조적 위치에 있는 것으로서의 종교에 대한 그의 공격에서 무신론자적 위치를 표방하였다. 이런 메시지들 때문에, 신학의 측면에서 들뢰즈를 접근하는 학자들은 자신들의 접근이 모순어법적이라는 변명을 표현한다. 린제이 파월-존스가 레온 슐츠와 함께 편집한 저서, 들뢰즈와 종교의 분열분석 에 서 다음과 같은 말의 경고로 책을 시작한다: “메리 브라이든이 들뢰즈와 종교를 쓸 때, 이 토픽은 도착적인 것처럼 보일 수 있다.” 이 논문은 들뢰즈의 철학이 종교와 긍정적인 관계를 가질 수 있음을 보여주고자 한다: 이런 긍정적 관계는 이미 들뢰즈의 스피노자 설명에서도 드러난다 : “예수는 불가능의 가능성을 보여 주시기 위해 한번 육화하셨다. 스피노자는 철학자들 중의 예수이며, 위대한 철학자들은 이 신비와 거리를 두거나 가까이 하려는 사도들과 다름 아니다.” 특히 이번 논문은 어떻게 들뢰즈의 철학이 신학과 밀접한 관계인지를 그의 되기 개념과 연결하여 신적으로 되기, 신이 되기의 과정이 인간의 차원을 넘어 모든 흐름 속에 있는 요소들에 어떠한 매개적 초월의 가치 없이 열려 있는 들뢰즈적 생성과 직결됨을 밝히고자 한다. 이 논문은 들뢰즈의 내재성의 철학이 하느님, 아들, 성령이라는 신적 차원의 세 요소들의 역동적 관계 (페리코레시스)와 밀접한 것으로 해석할 수 있음을 스피노자의 입장과 연결하여 보여줄 것이다. 결론적으로 이 논문은 신학은 앞으로 초월성과 추상성을 극복하고 만물의 요소를 다 아우르는 진정한 신학으로 탈바꿈하기 위해 들뢰즈의 철학을 유념하여야 함을 설득하고자 한다. Hent de Vries points out the ‘Turn to Religion’ in contemporary philosophy, selecting a typical case of Derrida’s essay, “Faith and Knowledge”. The religious turn or the theological turn is also revealed in Dominique Janicaud’s complaint against this turn exemplified by French philosophers such as Levinas, Michel Henry, Jean-Luc Marion, etc. Where does Gilles Deleuze stand in this age of the theological turn? As is well known, Deleuze manifests his atheist position in his attacks on religion in contrast with philosophy, art and science. Because of these messages, those who approach Deleuze in terms of theology express their apologies that this kind of approach may sound oxymoronic. Lindsay Powell-Jones starts the book she edited with F. LeRon Shults, Deleuze and the Schizoanalysis of Religion, with the remark that “As Mary Bryden writes in Deleuze and Religion, the topic might even appear to be a perverse one.” In this paper, Deleuze’s theoretical views will be revealed to be helpful to construct a positive relation between Deleuze and theology as is reflected in Deleuze’s remark on Spinoza: “Christ was incarnated once, in order to show, that one time, the possibility of the impossible. Thus Spinoza is the Christ of philosophers, and the greatest philosophers are hardly more than apostles who distance themselves from or draw near to this mystery.” Specifically this paper will deal with Deleuze’s notions of the plane of immanence, the concept of the body without organs, etc. to show how Deleuze’s philosophy reveals to be theological and his concept of becoming can be interpreted as becoming-divine, becoming-God, both of which mean to go beyond the human so that this becoming-divine comprises all the elements of the world in flux. This paper will also show how Deleuzian philosophy of immanence inspired by Spinoza reflects perichoresis of the dynamic relation among the Father, the Son, and the Holy Spirit in immanence being ever being open to the eternal return of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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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들뢰즈 철학에서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와 관계 탐색

        김재춘,배지현 한국교육학회 2012 敎育學硏究 Vol.50 No.3

        This study aims to explore the meaning of learning and teaching expressed in G. Deleuze's philosophy. Deleuze uses the word of learning in his works「Proust and Signs」 and「Difference and Repetition」 and uses the word of teaching in his works 「Difference and Repetition」and「Cinema 2: Time-image」. First, Deleuze defines learning not only as an activity triggered by an encounter with signs but also as an activity of exploring into the world of ideas where every being is in a constant genesis. Deleuze’s learning, which is described as both an encounter with signs and exploration into ideas, includes a cycle of the following two stages: ① collapse of the existing understanding through an encounter with signs; ② genesis of a new understanding through an exploration into ideas. Deleuze’s learning implies the creation of a newness in the learner’s body and mind through an infinite repetition of difference. Second, Deleuze defines teaching as an activity of learning on the part of teacher with students. An activity of teaching can be well exemplified in his phrases such as "Do with me" rather than "Do as I show". In 「Cinema2: Time -image」, Deleuze also regards teaching as an activity of showing strangeness so that people can come out of their preexisting ways of feeling and thinking. After exploring a new meaning of learning and teaching in Deleuze's philosophy, the researcher drew three implications for education First, learning should be understood as an activity triggered inadvertently, not as an activity introduced intentionally or consciously by the teacher. Second, learning activities of the teacher with the student are to be emphasized in the context of teaching. Third, learning as an activity of creating a newness presupposes a special type of ‘learning-teaching relationship', where learning plays a key role, in even defining the meaning of teaching itself. 이 연구는 들뢰즈의 철학적 논의에 나타난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를 탐색하기 위한 것이다. 들뢰즈는 「프루스트와 기호들」과「차이와 반복」에서 ‘배움’에 대해 종종 언급하고 있으며,「차이와 반복」과「시네마 2: 시간 이미지」에서는 ‘가르침’에 대해서도 언급하고 있다. 들뢰즈의 배움과 가르침에 대한 논의는 다음과 같다. 첫째, 들뢰즈는 배움을 한편으로는 ‘기호와의 우연한 마주침’에 의해 촉발되는 활동으로 정의하면서 다른 한편으로는 존재가 끊임없이 새롭게 발생되는 ‘이념의 세계에로 탐험’하는 행위로 정의한다. 들뢰즈의 배움은 기호와의 마주침과 이념에의 탐험이라는 두 요소/단계로 구성된 하나의 사이클의 성격을 지닌다고 볼 수도 있다. ① 기호와의 만남을 통해 기존에 현실화되었던 인식틀이 파괴되는 ‘와해’의 단계, ② 이념에의 탐험을 통해 새로운 인식틀이 발생되는 ‘생성’의 단계가 배움의 구조를 형성한다. 이 구조를 바탕으로 한 들뢰즈의 배움은 무한한 차이의 반복을 통해 학습자의 신체와 정신에 새로움이 계속해서 창조되는 것을 의미한다. 둘째, 들뢰즈는 가르침을 학생과 ‘함께’ 하는 교사 자신의 ‘배움’의 행위로 정의한다. 들뢰즈에게 있어 가르침의 행위는 “나처럼 해봐” 보다는 “나와 함께 해보자”로 표현될 수 있다.「시네마 2: 시간 이미지」에서 들뢰즈는 가르침을 기존의 감각·사유 방식으로부터 빠져나와 강도 높은 차이를 창조하도록 하는 활동으로 규정한다. 들뢰즈 철학에서 추출한 배움과 가르침의 의미로부터 우리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교육적 함의를 끌어낼 수 있다. 첫째, 배움은 교사에 의해 이끌어지는 계획적·의도적 행위의 결과라기보다 우연한 계기에 의해 학습자에게 촉발되는 행위이다. 둘째, 가르침은 학습자와 함께하는 ‘교사의 배움의 활동’이기 때문에 학습자의 교육에 있어서 교사 자신의 배움 활동이 중요하다. 셋째, 새로움의 창조 행위인 배움은 특정한 형태의 배움과 가르침의 관계를 전제하는데, 이 관계에서는 배움이 가르침의 의미를 규정한다는 점에서 배움의 가치와 역할이 가르침의 그것보다 더 우선하고 중요하다고 볼 수 있다.

      • 오늘의 자연주의와 유신론

        장왕식(Jang, Wang-Shik) 감리교신학대학교 2016 신학과세계 Vol.- No.88

        본 논문은 자연주의 철학의 추세를 소개하고 그것과 화이트헤드의 유신론을 비교하는 것이다. 특히 화이트헤드의 철학이 전형적 인 자연주의 철학의 하나라는 가정 하에 자연주의자 화이트헤드가 어떤 근거에서 신을 들여 오는지 탐구하는 것이기도 하다. 논자는 먼저 자연주의의 일반적 현황에 대해 소개하겠다. 자연주의는 동아시아에서 가장 먼저 발달했는데 따라서 불교,유교 및 도교 등에서 자연주의가 어떻게 꽃피웠는지 간단히 살펴본다. 그 후 서구의 자연주의 철학에 대해서 살펴보겠는데 우리는 주로 스피노자와 들뢰즈가 발전시킨 자연주의 철학의 특색에 대해서 알아보겠다. 전형적인 자연주의자였던 스피노자의 ‘‘신 즉 자연’’이라는 명제에 집중하면서 들뢰즈는 스피노자를 철학계의 그리스도라 칭하기도 한다. 들뢰즈는 스피노자의 자연주의에 매료되면서 그를 새로운 유형의 사상으로 인류를 구원할 구세주로 치켜세우고 있는 것이다. 들뢰즈 스스로는 20세기가들뢰즈의 세기가 될 것이라고 푸코로부터 칭찬을 받을 만큼, 서구 철학사에 대한 꼼꼼한 연구와 새로운 해석을 통해 그 만의 독자적 인 철학을 구축하면서 최근 동서에서 가장 많은 인기를 끌고 있는 했는데, 들뢰즈를 그토록 유명하게 만든 것도 한마디로 말하면 그가 택한 스피노자식의 유물론적 자연주의 때문이다. 이에 따라,나는 여기서 들뢰즈 철학의 특징을 일의성 존재론(一義性 存在論,univocity ontology)과 내재성의 철학,그리고 잠재성의 철학이라고 놓고서,들뢰즈의 자연주의가 이런 철학적 개념들을 통해서 어떻게 세공 되는지 살펴보려 한다. 자연주의에 대한 일반적 인 특징들을 규명한 후 화이트헤드 철학의 그것과 비교해 보는 것이 본 논문의 두 번째 작업이다. 화이트헤드는 유신론의 철학을 전개한 것으로 유명한데 하지만 최근에는 그의 철학을 자연주의로 해석하려는 움직 임이 강하다. 따라서 유신론자로서의 화이트헤드가 어떻게 자연주의자로 해석될 수 있는지를 보는 것은 철학적으로 매우 흥미로운 토론거 리라 하지 않을수 없다. 화이트헤드는분명히 하나의 자연주의자로 해석할수 있다는 사실에 동의하면서 먼저 그것에 대해 펼쳐 보이겠다. 하지만 화이트헤드의 자연주의는 최근에 인기를 끌고 있는 유물론적 자연주의나 환원주의적 자연주의와는 상반되며,특히 질 들뢰즈가 강조하는 일의성 존재론이나 내재성과 잠재성의 철학과는 여러 면에서 차별된다는 사실을 보여주는 것이 논자의 또 다른 목적이다. 자연주의 철학이 어떤 면에서 한계를 지니는지에 대해 유신론적 관점에서 비판해 보는 작업도 부수적으로 병행될 것이다.

      • KCI등재

        스크린 댄스를 읽는 방법론으로서의 들뢰즈의 영화 철학

        이은이 ( Eun Yi Lee ) 한양대학교 현대영화연구소 2014 현대영화연구 Vol.10 No.1

        오늘날 우리는 대부분의 문화 이벤트를 미디어 스크린을 통해 경험한다. 라이브로 진행되는 퍼포먼스도 예외는 아니다. 댄스와 미디어 스크린의 결합으로 탄생된 스크린 댄스는 이러한 문화 현상의 대표적인 예다. 이러한 맥락에서 영화 이론 혹은 철학은 오늘날 시청각 문화를 이해하는 방법론으로 새롭게 제시될 수 있다. 본 연구는 일종의 영화 형식의 댄스인 스크린 댄스의 이미지를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들뢰즈의 영화 철학을 고찰한다. 과연 들뢰즈영화 철학의 운동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의 분류체계가 스크린 댄스의 ‘생성(becomingness)’과 ‘퍼포먼스적인 특성’을 드러내고 해석하는 방법론으로 활용될 수 있을까? 본 연구는 들뢰즈의 영화 철학과 이미지 분류체계를 연구하고, 들뢰즈의 영화 철학에 근거해 댄스와 스크린 댄스를 이해함으로써 그 질문에 대한 긍정적인 대답을 도출한다. 들뢰즈는 소쉬르의 언어기호학 대신 이미지 중심의 비언어적 기호학을 발전시킨 퍼스의 이론과 베르그송의 움직임과 시간 철학을 바탕으로 자신만의 고유한 영화 이미지 분류체계를 발전시켰다. 그리고 언어와 내러티브가 아니라 시각 이미지와 기호를 영화의 기본적인 요소로 간주했다. 들뢰즈에게 있어 영화의 운동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는 탐구되지 않았던 삶의 잠재력을 드러낼 뿐 아니라, 서로 관련 없는 이질적인 이미지들의 재결합을 통해 삶을 새롭게 보도록 고무하는 매개였다. 이러한 들뢰즈의 아이디어는 스크린 댄스를 이해하는 개념으로 확장될 수 있다. 우선 들뢰즈가 영화에서 보았던 것처럼, 댄스는 순수한 움직임 혹은 리듬으로 표현되는 예술형식으로서 그 자체가 하나의 생성의 과정으로 볼 수 있다. 이 과정에서 육체의 탐구되지 않은 잠재력들이 실체화 된다. 따라서 들뢰즈가 발전시킨 영화 철학에 근거해 본다면, 영화와 댄스는 어떠한 역설 없이도 새로운 관계를 정립할 수 있다. 스크린 댄스의 가능성과 힘은 들뢰즈의 영화 철학을 통해 보다 명확하게 이해될 수 있다. 스크린 댄스는 비언어적 표현인 육체의 움직임 이미지와 시간 이미지를 중심으로 표현되는 예술형식이다. 또 일종의 ‘기계적 눈’인 카메라에 의해 숨겨져 있는 혹은 잠재해 있는 육체가 스크린 표면 위에 드러날 뿐 아니라 클로즈업, 편집 등의 영화 기법에 의해 ‘미세 움직임(micro-movement)’이 시각화 될 수 있다. 이런 것들은 우리로 하여금 새로운 생각을 하고, 우리 안에 내재해 있는 동물성, 타자, 기계성을 마주하도록 고무하면서 우리의 잠재력들을 깨닫게 한다.

      • KCI등재

        들뢰즈 마르크스주의는 가능한가?

        신지영 대한철학회 2019 哲學硏究 Vol.151 No.-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dentify the meaning of dispute; if Deleuze is The purpose of this paper is to identify the meaning of the dispute whether Deleuze is Marxist or not, and to propose an answer to this question, with examining the Deleuze-Marxism developped by Negri, Hardt and Guattari etc. The social political philosophy of Gilles Deleuze is developed in two books about capitalism in collaboration with Felix Guattari, of which Deleuze sums up three thesis as follows; society is determined by lines of flight rather than contradiction, minor rather than class, war machine rather than war. This theory summarized with these lines is far from that of Marx. Even so, the reason why many political theorists efforts to reposition Deleuze as a Marxist is that the name of Marx guarantees the progressivity in political thinking and that we have no other political theoretical position established in a progressive orientation. We come to conclude that it may be necessary to establish another theory of supporting the minor, the poor and the weak etc., while recognizing the role and the achievement of Marx in this area at the same time. 이 논문은 들뢰즈 이후, 들뢰즈의 공저자 가타리 그리고 네그리와 하트 등 몇몇 들뢰즈주의 정치철학자들에 의하여 만들어진 들뢰즈마르크스주의라는 하나의 현대 정치철학적 입장을 검토하면서,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자이냐 그렇지 않느냐 하는 논쟁의 의미를 짚어보고, 그에 대한 해답이 있다면 어떤 형태를 띠어야 하는지를 다루어보고자 한다. 들뢰즈의 정치사회철학은 가타리와 함께 쓴 자본주의에 대한 두권의 저서에서 주로 전개되어 있는데, 들뢰즈 본인이 제시한 이 저서에서의 기획은 <사회란 자체의 모순보다 도주선에 의해 규정된다>, <계급보다는 소수>, <전쟁이 아니라 전쟁기계>로 요약되며, 이는 명백히 마르크스주의와는 거리가 있는 혹은 반대되는 노선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다수의 정치철학자들에 의해 들뢰즈가 마르크스주의자로 재정위되는 것은, 마르크스라는 이름이 갖는 진보적 상징성 때문이 아닌가 진단하게 된다. 이에 우리는 고전적인 마르크스의 역할과 업적을 인정하면서도, 들뢰즈로 대변되는 차이의 시대인 현대에 적용되는 새로운 진보이론을 정립하는 일이 필요하다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 KCI등재

        들뢰즈의 흄론에 관한 연구

        진기행(Jin Gi heang) 대한철학회 2014 哲學硏究 Vol.132 No.-

        21세기를 살고 있는 우리에게 18세기 철학자 흄(David Hume, 1711~1776)이 왜 논의의 대상이 되는가? 다시 말하면 오늘날 우리에게 흄은 어떤 의미와 가치를 가지고 있는가? 이에 대해 흄을 직접 연구하여 그 답을 제시할 수 있겠지만, 우리는 그보다는 우회로를 택하려고 한다. 즉 들뢰즈(G. Deleuze, 1925~1995)라는 우회로를 통하여 그에 대한 답을 찾고자 한다. 들뢰즈의 『경험주의와 주체성 Empirisme et subjectivité』은 그의 첫 단독저서이다. 그 책의 주제는 제목에 나와 있듯이 경험과 함께 주체성이 어떻게 구성되는가를 기술(記述)하는 것인데, 이 주체성이라는 문제는 들뢰즈의 말년의 저서 『철학이란 무엇인가 Qu'est-ce que la philosophie?』에 이르기까지 지속적으로 논의되고 있다. '상상력 imagination'과 '정념 passion' 개념이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이론화되고 있는 주체구성의 과정에서 중심적인 역할을 하고 있는데, 본 논문에서는 '상상력'에 한정하여 논의하였다. 『경험주의와 주체성』에서 들뢰즈는 상상력의 성장을 통한 주체구성의 이야기로서 흄을 읽고 있다. 들뢰즈가 흄론 속에서 일관되게 주장하고 있는 것은 어떻게 하여 정신이 주체로서 생성하는가, 착란délire된 상상력은 어떻게 하여 일정한 인식능력으로 되는가 하는 주체형성의 문제이다. 들뢰즈에 있어서 주체화의 핵심은 바로 미래로 향하는 무수한 습관 habitude의 다발 그 자체이며, 과거를 현재 그리고 미래로 연결 짓는 것이야말로 주체성의 구성의 가능 조건이라고 할 수 있다. 또한 들뢰즈에 있어서 주체성의 문제는 바로 경험과 습관이 본질적으로 계보를 달리하는 것이면서도 불가피하게 공존하고 있다는 점으로 집약된다. 단적으로 말해서 주체성이란 현전성에 의거하는 경험과, 현전성을 필요로 하지 않는 습관과의 접합에 불과한 것이다. 따라서 습관의 문제, 주체성의 문제는 매우 이중적이다. 이상과 같은 논의와 함께 우리는 결론부분에서 들뢰즈의 논문 「흄 Hume」을 간략하게 정리하면서 들뢰즈의 흄론의 의미를 살펴보았다. Pourquoi veut-on soulever la problématique concernant David Hum, un philosophe du XVIIIème déphasée par rapport au XXIème? Autrement dit, chez nous qu'est-ce qu'il y a une dimention et une valeur? Pour cela on peut répondre en recherchant Hume, mais nous allons emprunter une déviation: à travers G. Deleuze. Empirisme et subjectivité de Deleuze est son premier livre. Comme son titre ce thème est faire une decription de subjectivité composante avec un empirisme. Le questionnement de subjectivité est discuté jusqu'au Qu'est-ce que la philosophie?, son ouvrage des dernières années de sa vie. La notion de l'imagination et de la passion est théorisée dans Empirisme et subjectivité et son processus de sujet composé a le rôle centre. Et ainsi de suite, dans cet article nous nous penchons plus particulièrement sur l'imagination. Deleuze dans Empirisme et subjectivité lit Hum en tant qu'une histoire du sujet composé par le développement de l'imagination. Ce que Deleuze affirme conséquement est la problématique de la formation du sujet: comment l'esprit est écloré comme un sujet et comment l'imagination délirée est devenue comme une faculté cognitive constante. Chez Deleuze le nœud de la subjectivation est habitude sériel en soi dans le fufur et aussi ce qu'on relie au passe, au présent et au futur sont vraiment des conditions susceptibles pour former la subjectivation. Ainsi que le questionnement de la subjectivation est distillé sa pensée que l'expérience et l'habitude sont essentiellement en désaccord avec leur généalogie et coexistent inéluctablement. A franchement parler, la subjectivité n'a que peu de la jonction de l'expérience qui est référée au futur proche et l'habitude qui n'est pas nécessaire au futur proche. Par conséquent le questionnement de l'habitude et de la subjectivation joue très un double jeu. Dans le même cadre, nous concluons une dimention de Deleuze Hum en élucidant brièvement Hum, l'article de Deleuz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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