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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원도 화교사회의 형성과 변화 : 1900년대∼1940년대를 중심으로

        이정희 ( Jung-hee Yi ) 한림대학교 일본학연구소 2017 翰林日本學 Vol.0 No.30

        본고는 1900년대부터 1940년대까지 약 50년에 걸친 근대시기 강원도 화교의 형성과 역사를 인구의 추이, 경제활동, 그리고 화교배척사건과 중일전쟁의 영향을 중심으로 검토했다. 이를 통해 분명히 밝혀진 것은 다음의 세 가지이다. 첫째, 화교의 강원도 정착은 대체로 1900년대에 이뤄졌으며 1920년대 타 지역에 비해 높은 인구 증가율을 보였다. 그러나 조선화교 전체에서 강원도 화교가 차지하는 비중은 1-3%에 불과, 화교의 거주가 희박한 지역의 하나였다. 강원도 화교는 다른 지역과 마찬가지로 산동성 출신이 대부분을 차지했다. 둘째, 강원도 화교의 직업은 상인, 노동자, 농민이 중심이었으며, 타 지역에 비해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다. 화상은 포목상점과 잡화점을 경영하여 각 군에서 상당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으며 노동자는 수리조합, 철도, 도로공사의 노동자로 일했다. 농민은 상업 목적의 야채재배를 활발히 전개, 춘천의 경우 야채시장을 독점하는 지위를 차지했다. 또한 화교건축청부업자는 1910년대 풍수원성당, 용소막성당, 원주성당의 고딕식 붉은 벽돌 건물을 시공했다. 셋째, 강원도화교는 1931년 7월 발생한 화교배척사건으로 큰 인적, 물적 피해를 입었으며 타 지역보다 중국으로 귀국한 화교가 많았다. 그것은 강원도 화교 가운데 노동자의 비중이 높았기 때문이었다. 중일전쟁 때도 타 지역에 비해 많은 화교가 귀국하여 화교의 경제활동이 많이 위축되었다. 1938년 이후 인구가 점차 회복되었지만 이전의 인구를 완전히 회복하지 못한 채 해방을 맞이했다. This paper examined mainly on the population transition of Overseas Chinese , their economic activities and anti-Chinese movement in Gangwon Province during 50 years from the 1900`s through the 1940`s. The analysis gives the following results. First of all, overseas Chinese started to settle down in Gangwon Province in 1900s, their population increased rapidly compared with other regions in the 1920s. But, Gangwon Province was a lower density of population that accounted for only 1-3% in the population of overseas Chinese in Korea. They were mainly from Shantung Province in China. Secondly, their main job was merchants, workers, and farmers. Compared with other regions, worker`s share in their population was high. Chinese merchants managed dry-goods stores and general stores which formed influential force in respective areas in Gangwon Province. Chinese workers worked in the workplace of reservoirs, railroads, and roads as a coolie. Chinese farmers mainly cultivated vegetables and especially made a monopoly of supplying commercial vegetables in Chuncheon region. Chinese building contractors constructed religious building in the Gothic style with red bricks like this Pungsuwon, Yongsomak and Wonju Catholic Church in the 1910s. Thirdly, they were severely damaged by Korean rioters in anti-Chinese movement of 1931, and a great number returned home in china. The reason to have high ratio of returning home compared with other regions has relation to the high ratio of workers in their population. The Second Sino-Japanese War brought about much damage to weaken their economic activities. Their population started to recovery from 1938 according to their returning to Gangwon Province, but never amounted to their population of the previous war.

      • KCI등재

        화교기업의 대중국 투자 현황과 특징

        허흥호(許興鎬) 신아시아연구소(구 신아세아질서연구회) 2007 신아세아 Vol.14 No.3

        이 글은 중국에 진출 한 외자기업 중 가장 많이 진출하고 또 성공적인 것으로 평가되고 있는 화교기업의 투자 현황과 특징을 분석하였다. 화교기업의 중국 진출은 중국정부가 화교자본을 적극적으로 끌어들이기 위해 다른 외자기업들보다 많은 우대조치를 제공해준 것 외에 화교권 국가와 중국간의 경제적 보완성 그리고 민족ㆍ문화적 동질성 및 동일언어를 사용하고 있는 요인이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이러한 요인은 분명히 화교기업들로 하여금 중국에서의 경제활동에서 다른 외자기업보다 유리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화교기업의 중국진출 성공요인이 이러한 환경적 요인에 의해서만 이루어진 것은 아니다. 화교기업의 성공요인에는 이러한 환경적 요인 외에 철저한 준비와 치밀한 전략이 중요한 역할을 하였다. 즉 화교기업은 혈연과 지연관계가 있는 광뚱성과 푸젠성 지역에 우선 진출하여 인적네트워크를 활용하였을 뿐 아니라 그곳을 중국 이해의 학습장으로 삼은 후 다양한 지역으로 확대해 나가는 전략을 추진하였다. 또한 전통적으로 화교기업의 주력 업종인 부동산과 금융 분야도 다른 외자기업에 비해 많은 투자를 하고 있을 정도로 결코 소홀하지 않았다. 특히 화교기업은 거점을 통한 진출과 다양한 기업들과의 협력을 통한 진출을 추진하는 등 다른 외자기업과는 확연하게 다른 진출방법을 추진하였다. 화교기업의 이러한 진출은 위험 분산과 중국 진출을 더욱 용이하게 하여 중국투자를 성공적으로 이끄는 중요한 요인이 되었다. This article analyzes the current situation and characteristics of investment of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which are regarded as the top ranked and the most successful ones among the foreign investor companies entering China’s economy. First, the government of China has offered more favorable treatment to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than any other foreign investor company to draw in their capital to China. The economically complementary relation between China and Overseas Chinese countries also plays an important role to lead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to China. Furthermore, the fact that they share the same culture, language, and race gives more better conditions to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which conduct economic activity in mainland China. However, these environmental factors are not only the things that enable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succeed in China. Their thorough preparation and rigorous strategies are also powerful factors for their economic success. At first, overseas Chinese enterprises chose Gaungdong and Fujian where they have ties of kinship and regionalism. There, they utilize networking between people, have experiences of understanding China better, and then expand their business to other regions. Also, real estate and finance which have been traditionally mainly important business were not neglected, so that Overseas Chinese invest a lot on them, compared with other foreign investor company. Their business strategies are definitely different from other foreign investors company in the point of proceeding their business through utilizing the stronghold and cooperating with a variety of enterprises. These ways leads their investment to the risk distribution and enable Overseas Chinese to enter China’s economy more easily. As the result, they can get to the successful investment to China.

      • KCI등재

        한국화교집단에 대한 분석: 정체성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중심으로

        정회옥,윤종빈,김진주 서강대학교 사회과학연구소 2015 社會科學硏究 Vol.23 No.1

        본 연구는 한국에 거주하는 화교의 정체성과 사회경제적 배경을 질적 및 양적 방법론을 활용하여 살펴보았다. 구 화교와 신 화교로 분류하여, 인터뷰와 여론조사 분석을 통해 실제적이고 경험적 분석을 실시하였다. 분석 결과는 다음과 같다. 첫째, 구 화교와 신 화교는 정체성 측면에서 차이가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정체성 인식에 있어 구 화교의 경우 한국인으로서의 정체성이 중국인으로서의 정체성보다 높았으며 한국에 대해 강한 애착을 가지고 있었으나, 신 화교는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과 정체성이 매우 높은 것을 발견하였다. 둘째, 화교의 거주지 선택 이유는 구 화교, 신 화교 모두 삶의 편이성과 저렴한 집세 등의 실질적이고 경제적인 이유가 주를 이루는 것으로 나타났다. 셋째, 구 화교는 한국 사람들과 유사한 빈부격차를 보이며, 신 화교의 경우 다른 외국인 이주자 집단보다 소득이 다소 높았다. 넷째, 구 화교는 한국 정부의 정책에 대해 제도적 보완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반면 신 화교는 긍정도 부정도 아닌 중립적인 태도를 보이는 것으로 나타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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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화교의 생활사와 정체성의 변화과정

        김중규(Kim Joong Kyoo) 역사문화학회 2007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10 No.2

        이 글은 우리 민족 최초의 외국인노동자 집단이었으며 길게는 4대째 이 땅에서 뿌리내리고 살아온 군산지역 화교들의 일상사와 생애사를 확인함으로써 화교들의 정체성 변화 원인으로 화교의 생활문화의 변화가 일정부분 작용했음을 확인하고자 한다. 글의 순서는 화교의 군산 이주역사를 먼저 알아보았다. 이를 통하여 초창기 군산 각국조계지역 내에서 일본인의 경제력에 결코 뒤지지 않는 청나라 상인들의 면모를 밝힘으로서 일제강점기 군산에 거주한 한, 중, 일 삼국 국민들의 생활을 확인하고자 하였다. 다음으로 화교의 생활사를 확인하기 위하여 여씨 집안에 대한 구술사를 근거로 화교의 생애사를 재현해 보았다. 화교의 생애사를 통한 연구는 ‘화교들이 어떻게 살아 왔는가’ 하는 문제에 관심을 가지고 화교의 마시적인 생활상에 주목하는 연구로 화교들이 한국의 역사와 맞물려가면서 특히 군산이라고 하는 지방사 속에 어떻게 연루되어 살아왔는지, 또 그 과정에서 화교들이 스스로 개척해온 생활사의 진면목은 어떤 것들인지 등을 살펴보고자 하였다. 이러한 연구를 통하여 화교의 생활문화의 변화가 화교 정체성 변화를 가져온 원인 중에 하나 였으며, 그러한 변화의 사례로 화교들이 수용한 음식문화인 김장 김치 담그기와 중국에는 없는 한국식 자장면의 개발 그리고 종족문제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결혼문화의 변화와 정체성 보존의 보루라고 할 수 있는 2세 교육에 대한 인식의 변화과정을 살펴보았다. 이 글에서 지역을 중심으로 화교의 정착과정을 살펴보는 이유는 화교의 1, 2세대의 삶을 살펴봄으로서 그들의 생활공간이 우리의 공간과 중첩되어 있고 우리의 시간 속에 그들도 함께 해왔음을 확인하고자 했기 때문이다. 더불어 화교 3, 4세대 가치관의 변화과정과 변화의 원인을 확인하며 그들만 변화하는 것이 아니고 우리도 함께 변해가야 하며, 이러한 변화는 다문화, 다민족시대 우리 사회가 풀어야 할 과제라는 생각을 해본다. This paper explores the history of Chinese who migrated to Korea as laborers one hundred years ago and have lived for the 4th generation in the area of Gunsan. The contents of this paper consist of the migration process, job, marriage, family, childhood and funeral rites. It delineates the Chinese identity, its generational differences, and the reasons of changes. First, I study the history of Chinese immigrants in Gunsan and describe how flourishing Chinese merchant class were working in the foreign settlements at the turn of the century. The Japanese colonialism did not much affect their business activities. Second, I explore the lives of Chinese immigrants by collecting life histories of Yeo family. My study of Yeo family focuses on the subject matter how they have lived in Gunsan and witnesses the intensive interactions with the local people and their histories. It furthers the concrete and actual family history on the basis of individuals' memories. photos, and documents. Third, I analyze the Korean government policy on foreign immigrants. The Korean government has long either ignored or strictly controlled over them. It has forced Chinese people to become naturalized as Korean citizens. Nevertheless, it turned out to be ineffective. However, as times went by, the inter-cultural marriage between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 Chinese and Korean has increased. Also, the young Chinese actively become participated in the Korean society after the graduation from Korean schools. It has been done through a difficult but natural process of the history of immigration. This paper stresses the fact that the first and second generations of Chinese immigrants have long lived with Koreans, not being as aliens living in an island. Their living space and time have been overlapped those of Koreans. Futhermore, the third and fourth generations are changing in their identities and values. The fact gives us to rethink the direction of multi-ethnic society and multi-culturalis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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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 및 일제 강점기 전기(前期, 1893~1924년) 목포화교의 경제 · 사회적 활동에 관한 연구

        양세영(Yang, Se-Young) 역사문화학회 2018 지방사와 지방문화 Vol.21 No.2

        본 연구는 개항기와 일제 강점기 전기(1893~1924)의 목포 화교들의 경제 및 사회적 활동을 조명함으로서 지역화교 연구의 지경을 확대하고자 하였다. 이 시기의 목포화교는 한국 화교의 일부로서 갖는 공통적 맥락 외에 차별화되는 몇 가지 특징을 갖고 있다. 첫째, 일제의 집중적인 견제 속에서 화교사회를 구축했다는 것이다. 일제는 목포 개항 직후부터 인천과 원산에서 청국에 뺏긴 경제적 주도권을 되찾고자 청국상인들의 이주를 철저히 방해하였다. 둘째, 목포화교는 전국에서 포목업 비중이 가장 높은 수준을 보이며 활발하게 상업 활동을 전개하였다. 셋째, 목포 화상들은 전국에서 재무적으로 가장 견실한 영업을 영위하였다. 1920년대 1인당 저축금액이 전국적으로 압도적인 1위를 차지하였고 예금액이 대출액을 크게 상회하였다. 넷째, 단신 거주자의 비율이 전국에서 가장 높은 수준을 보였다. 다섯째, 목포화교는 전남지역 화교 확산의 허브 역할을 하였다. 목포는 전남의 관문도시로서 호남선과 영산강 뱃길 등을 통해 도청 소재지인 광주와 나주 등 전남내륙과 정기노선을 통해 제주 등으로 화교가 진출하는데 교두보 역할을 하였다. 동 기간 중 목포화교의 활동이 주는 가장 큰 시사점은 기업가정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는 것이다. 목포화교가 처음 이주한 1893년은 개항 전으로 교통과 도시기반 등의 여건이 거의 갖추어지지 않은 상황이었다. 기존 개항장의 안정된 사업환경을 벗어나 새로운 경제적 기회를 찾아 과감하게 목포에 진출하였다는 점과 일제의 지속적인 견제 속에서도 왕성한 사업활동을 추진했다는 점은 새로운 기회를 찾아 도전과 혁신을 추구한다는 현대의 기업가정신의 개념과도 부합되며 최근 목포-중국 간 경제교류 활성화의 필요성과 관련하여 시사하는 바가 크다. This study was intended to examine mainly the economic and social activities of overseas chinese in Mokpo(Mokpo Hwagyo) during the period to opening ports toward foreign countries and Japanese occupation(1893~1924), which was expected to expand scope of research on Hwagyo in major cities of Korea. Mokpo Hwagyo during this period have several distinctive characteristics, sharing common characteristics of Korean overseas chinese. First, they built a their community and carried out a vigorous commercial activity under the intense oppression of Japanese colonial rule. Second, they actively engaged in economic activities, especially in silk fabric industry with the highest proportion of their businesses in comparison to other regions. Third, they had the strongest financial structure in Korean overseas chinese society. In the 1920s, their per capita savings topped the list nationwide, and deposits surpassed lending. Fourth, the ratio of single male residents was the highest compared to other regions in the country. Fifth, Mokpo Hwagyo served as a hub for the spread of overseas Chinese in Chonnam Province such as Gwangju, Naju, and Jeju. The biggest implication of Mokpo Hwagyo’s activities during this period is that it is necessary to pay attention to their entrepreneurship. They first came to Mokpo in 1893 before opening it’s port toward Foreign countries, when there were few conditions such as transportation and urban infrastructure. Japanese held back their activities while in Mokpo. Despite these bad conditions, they challenged to find a new opportunity and continued their business until Sino-Japanese War(193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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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경위와 운영: 대구화교협회소장 편액을 근거로

        이정희 재단법인 대구경북연구원 2020 대구경북연구 Vol.19 No.3

        This paper is to analyze the establishing details and operation of overseas Chinese elementary school in Daegu through framed pictures possessed by Overseas Chinese Association of Daege. Overseas Chinese Association of Daege is possessing four framed pictures produced in 1930, 1943, 1950, and 1957. These framed pictures is very useful to analyse Overseas Chinese society and Overseas Chinese elementary school in Daegu. Overseas Chinese Chamber of Commerce in Daegu(OCCCD) got started their activities to establish elementary school in 1941 with increasing of children of school age. The OCCCD obtained certification of school establishment from Kyengsangbuk-do Provincial government on August in 1941. As a result of appealing for fund-raising targeting at Overseas Chinese in Daegu, 6,350 Japanese Yen was collected. Overseas Chinese elementary school of Daegu was opened using the building of OCCCD in 1943. The school’s two classrooms was not able to accept increased students after Liberation in 1945. the OCCCD purchased Seo Byongkook’s House as a new school building. 본고는 대구화교협회가 소장하고 있는 각종 편액을 통해 대구화교소학의 설립 경과 및 운영의 실태를 분석한 것이다. 대구화교협회는 1930년, 1943년, 1950년, 1957년에 각각 제작한 목판 편액을 소장하고 있으며, 이들 편액은 대구화교사회와 대구화교소학의 역사를 밝히는데 매우 중요한 자료이다. 본고는 이들 자료를 충분히 활용하여 대구화교소학이 구체적으로 어떻게 설립되었고, 설립 초기 어떻게 운영되었는지 검토했다. 대구중화상회의 임원이 중심이 되어 학령 아동의 인구가 급증한 1941년부터 화교소학 설립을 위한 활동을 개시했으며, 그해 8월 경상북도 당국으로부터 설립인가를 받았다. 대구와 경북의 화교가 화교소학 운영을 위한 모금활동을 전개, 136명으로부터 6,350원을 모금했다. 이러한 절차를 거쳐 대구화교소학은 1943년 2월 대구중화상회의 방 2칸을 빌어 정식으로 개학했다. 해방 후 대구화교의 인구 증가로 기존의 교사로는 학생을 수용하는데 한계가 있어, 모금활동을 펼쳐 서병조주택(현 대구화교협회 건물)을 매입하여 새로운 교사로 사용했다. 한국전쟁 때 대구로 피난 온 화교인구의 증가로 대구화교소학의 학생수는 1957년 329명에 달해, 한성, 인천, 부산화교소학에 이어 4번째로 많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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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냉전시기 한국 사회의 화교 차별과 경계인으로서의 화교의 삶

        이상록 한국구술사학회 2020 구술사연구 Vol.11 No.2

        이 연구는 냉전과 탈냉전이 한반도 이남에 거주했던 화교들의 삶에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를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남북한 정권의 수립, 중화인민공화국의 수립, 한국전쟁의 과정에서 재한화교들은 중화민국과 긴밀한 관계를 맺었고, 생존 전략의 차원에서 반공주의적 주체로 거듭났다. 반공주의적 주체로서의 화교는 한국과 대만 사이의 반공동맹을 강화하는 상징적 존재였으나, 한국사회는 화교를 법적․문화적․일상 적 차원에서 차별해왔다. 화교에 대한 차별이라는 ‘구조적 부정의’ 속에서 일부 화교 들은 이주를 선택하기도 했지만, 남은 화교들은 분노․체념․무기력 등의 감정을 느꼈다. 1980년대 이후 한국과 중공의 관계가 가까워지면서 한국-대만 반공동맹에는 균열이 발생했고, 재한화교들은 한국의 ‘배신’에 대해 강하게 반발했다. 한중수교 이후 재한 화교들의 경계인 정체성은 대만-중국-한국 어느 특정 국가로 수렴되지 않는 혼종적 특징이 강화되었다. 한국사회는 화교 차별의 해소를 위해 ‘동화주의’를 강화할 것이 아니라, 화교의 경계인 정체성을 존중하고 그 차이를 긍정하는 ‘차이의 정치로서의 민 주주의’를 지향해야 할 것이다. This study aims to analyze how the Cold War and the post-Cold War affected the lives of Chinese residents on the southern half of the Korean Peninsula. In the course of the establishment of the South and North Korean regime, the establishment of the People's Republic of China(PRC), and the Korean War, Chinese in Korea formed close relations with the Republic of China and were reborn as anti-communist subjects as a survival strategy. As anti-communist subjects, Chinese in Korea have been symbols of strengthening anti-communism alliance between Korea and Taiwan. Nevertheless, Korean society has discriminated against Chinese on legal, cultural, and daily life dimensions. In the “structural injustice” of discrimination against Chinese in Korea, some Chinese people chose to migrate, but the remaining Chinese felt anger, resignation, and powerlessness. Since the 1980s, as the relationship between ROK and PRC drew closer, a crack broke out in the Korea-Taiwan anti-communist alliance, and Chinese in Korea strongly opposed the “betrayal” of Korea. After the diplomatic relations between ROK and PRC, the ‘marginal people’ identity has increased in its hybrid characteristic that does not converge to either Taiwan, China, or Korea. Korean society should not strengthen ‘assimilationism’ to eliminate the discrimination against Chinese, but instead should pursue ‘democracy as a politics of difference’ in respecting the ‘marginal people’ identity and accepting the differen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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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2년 이전 인천의 화교학교 교육 -‘인천화교소학’과 ‘인천노교소학’-

        김희신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9 No.-

        본 논문은 한국화교들이 이질적인 한국사회에서 화교교육을 통해 어떻게 중국 문화를 유지하고 자신에 대한 인식을 강화하는지에 대한 화교 교육사의 일환으로 시도되었다. 인천은 서울과 함께 한국화교사회에서 근대 교육의 발상지라 인식된다. 기존의 화교교육사에서 ‘1902년 인천화교소학의 설립’이 통설로 받아 들여지고 있지만 지금까지 이를 입증할 만한 어떠한 근거도 찾지 못했다. 또 1906년경 인천중화회관에서 운영하던 학당을 인천화교소학의 전신으로 간주할 수 있는지에 대해서도 신중한 검토가 필요하다. 오히려 민국 수립 이후까지 시대의 요구를 반영하지 못한 채 구식교육을 답습하거나 아예 교육의 기회조차 없는 인천 화교교육의 현실을 동정하여 1914년 인천영사와 각 동향방이 공동으로 학교를 개설했다는 사실은 분명하게 확인되었다. 인천중화회관에 개설된 ‘인천화교공립소학교’는 현재 인천화교교육의 중심축인 인천화교소학의 전신이다. 설립 당초에는 修身 과목이 여전히 교과내용에 포함되었지만 화교교육이 근대적인 학교체제내로 편입되는 단서를 마련했다. 또 과거 교육에서 소외되었던 빈곤층이나 여아 등도 교육대상에 포함될 수 있도록 규정되었다. 특히 여학생의‘반값 학비’ 규정은 서울 화교소학 규정에도 포함되지 않았다는 점에서 주목할 만하다. 한편 1930년 1월 인천산동동향회는 동향회관내에 의무교육으로 ‘인천 노교소학’을 세웠다. 일반적으로 인천화교소학을 둘러싼 남방과 북방 지도 그룹간의 세력 다툼과 대립이 노교소학의 설립 배경으로 설명되곤 한다. 원래 동향방의 활동은 자선구제나 학교설립지원 등을 통해 상호 부조와 단결력을 공고히 하는데 있다. 이에 인천화교소학의 학비는 학부형의 경제력에 따라 차등을 두도록 규정되었다. 다만 재정상 학비 면제의 대상을 확대하는 것도, 또 교동을 통해 자금 조달을 확대하는 것도 한계가 있었다. 이로부터 산동동향회는 스스로 학교를 설립하여 빈곤한 동향인 자제에 대한 의무교육을 지원하고자 했을 가능성이 크다. 한국화교사회의 성장배경에는 지역을 불문하고 동향방과 상회라는 지연, 업연의 사회단체가 주된 역할을 했다. 처음에는 위의 두 단체가 주를 이루다가 이민인구가 많아지고 직업도 다양화하면서 다양한 화교사회단체가 출현했다. 중화노공협회, 농업공의회 등은 1920년대까지 화교사회에서 상회와 같은 적극적 역할은 없었다고 보이지만, 1931년 중화노공협회 인천지부장이 인천화교소학의 교동으로 추대되었다. 이러한 사실은 적어도 상인을 중심으로 한 인천화교사회의 구성에 점차 변화가 있었으며, 이러한 변화가 화교학교의 교동구성이나 운영구조에도 영향을 미치고 있음을 보여준다. 마지막으로 화교사회와 화교교육을 이해하는데 중국 본국정부와의 관계를 간과할 수 없다. 중국 정부의 해외화교에 대한 정책은 인천의 화교학교 설립, 지도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1913년 12월 북경정부 교육부가 각지 영사에게 화교학교 전반에 대해 지도하고 개입, 처리할 수 있는 권리를 부여한 것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1914년 인천영사와 각 幇이 공동으로 인천화교소학을 세웠고, 설립 당초 학교 규모나 교학 설비 면에서는 부족했지만 영사관 수입의 보조를 기반으로 1930년에 이르기까지 경상경비를 안정적으로 확보할 수 있었다. 1928년 국민정부 수립 이후에는 국민당의 통치이념을 교육체제 내에 구현하려는 목표가 인천의 화교학교에도 그대로 반영되었다. 총영사관부설의 한성화교학교와 마찬가지로 ‘공립 성질’의 인천화교소학도, ‘사립’의 인천노교소학도 교과과정에 당의과목이 추가되었다. 삼민주의 교육이 법규정에 따라 정규학교 체계로 들어왔고, 삼민주의 국민교육은 한국화교들에게 중국인 의식을 불어넣고 민족적 정체성을 강화시키는데 유리했다. 本次論文將作爲華僑敎育史的一部分,通過韓國華僑敎育去硏究?樣維持中國文化和加强對自身的認知。仁川與首爾一起被認爲是韓國華僑社會的近代敎育的發祥地。在現有的華僑敎育史當中,‘1902年仁川華僑小學的建立’是至今爲止被認可最早的華僑敎育起源,但是幷沒有?到任何依据來證明。幷且1906年左右,在仁川中華會館運營的學堂是否是仁川華僑小學的前身這也需要愼重的硏討。民國成立后,沒有反應時代的要求, 由于華僑敎育卽承襲舊敎育方式,也沒有獲得敎育机會,因此1914年仁川領事與同鄕幇共同建立了。在仁川中華會館建立的’仁川華僑公立小學’是現在華僑敎育的中心――仁川華僑小學的前身。學校建立的時候,敎課內容已然包含着’修身’課程,這提供了華僑敎育編入到近代學校體制內的重要線索。幷且之前被排斥的貧困階層或女孩等也被規定成爲敎育對象。値得注意的是女學生的’半价學費’規定是首爾華僑小學也沒有的特例。1930年1月,仁川山東同鄕會在同鄕會館內建立了‘仁川魯橋小學’作爲義務敎育。一般來說魯橋小學成立的背景說明了當時仁川華僑小學的南北幇指導群間存在勢力之爭與矛盾。値得認可的是同鄕幇活動是通過慈善救濟或設立學校來相互幇扶和凝聚團結力。仁川華僑小學的學費是根据家長的經濟實力來差別對待的。但是擴大免除學費的人數,或者通過校董籌措資金都是有局限性的。因此山東同鄕會主動成立學校來支援貧困同鄕家庭的接受義務敎育的可能性比較大。韓國華僑社會的成長不同地區的間的同鄕幇和商會等社會團體發揮了主要作用。先是兩個組織爲主, 之后隨着職業多樣化出現的其他組織有中華勞工協會,農業公議會等. 這些組織雖然沒有商會的活動積極,但中華勞工協會仁川支部長在1931年被擁戴爲仁川華僑小學的校董。這意味着商人爲主的仁川華僑社會的構成有逐漸開始變化,幷且這樣的變化影響到華僑學校的校董構成和運營構造。最后,對于對華僑社會和華僑敎育的認知不可避免的是本國政府的關系。中國政府的海外華僑政策對仁川華僑學校成立和指導有了決定性的影響。1913年12月北京政府敎育部賦予各地領事介入華僑學校全面性指導與處理的權利。1914年仁川領事與各幇共同成立仁川華僑小學。雖然成立當時學校規模和敎學設備都不足,但是由于有着領事館收入爲基礎,所以到1930年一直確保有着穩定的經費。1928年國民政府成立后國民黨的統治理念與敎育體制內的目標也反映到仁川華僑小學。總領事館附屬漢城華僑小學同樣與‘公立性質’的仁川華僑小學和‘私立’仁川魯敎小學同樣與總領事館附屬漢城華僑小學都追加了黨義課程.三民主義敎育根据法律規定被納入正規學校的敎育體系,幷且三民主義國民敎育政策有利于加强韓國華僑灌輸中國人意識和民族認同性。

      • 일본 화교학교의 교육과정에 나타난 문화정체성 연구

        김홍매(金?梅),심약남(沈若楠) 전남대학교 글로벌디아스포라연구소 2009 전남대학교 세계한상문화연구단 국제학술회의 Vol.2009 No.1

        정체성은 문화적 특성 혹은 관련 있는 일련의 문화특질의 기초 상 구축되어진 의의의 과정에 있으며, 이러한 문화특질은 여러 의의의 근원 중에 가장 우선적인 위치를 차지한다. 이때 정체성 구축을 위해 활용되는 자료는 역사, 지리, 생물, 생산과 재생산제도, 집단기억과 개인의 환상, 권력기구와 종교계시 등이 있다. 정체성을 구성하는 요인 중 문화를 빠뜨릴 수는 없을 것이다. 문화란 우리가 일상생활에서 생존해가는 여러 가지 학문을 종합해내는 합성물이다. 즉 정치, 경제, 문화 등 여러 가지 요인들을 문화는 포함하고 있다. 그 가운데 교육은 내면적으로 스며들면서도 가장 중요한 한 부분이라 할 것이다. 일본은 이민을 비교적 일찍 받아들인 나라이다. 근대에 들어서서 세계 각국 특히 아시아 국가의 이민 수가 부단히 증가하여 2007년 통계에 의하면 일본의 화교, 화인은 70여만 명으로 알려지고 있다. 화교교육은 해외 중국교민들이 자발적으로 학교를 설립하여 그 자녀들을 교육시키는 것에서 출발하고 있다. 19세기말, 재일화교의 증가와 사회의 발전에 따라, 사숙(私塾)형 교육모식이 화교의 자녀교육의 수요를 만족시킬 수 없었다. 그들은 자녀가 근대의 새로운 학교교육을 받을 것을 갈망하였다. 손중산의 구국구민사상의 영향 하에 강유위, 양계초 등 유신파의 직접적 참여하에, 1898년 일본 요코하마(??)에 ‘대동학교’를 설립하였다. 그 뒤로 일본 각 지역의 화교들은 자기의 힘으로 고베, 도쿄, 오사카 등 지역에 화교자녀가 민족문화를 전수받는 것을 목적으로 한 화교학교를 설립했고 일정한 규모를 갖추었다. 화교학교는 모국의 언어와 역사, 그리고 문화적 전통에 대한 교육을 담당함으로써 중화민족으로서의 정체성을 유지하는데 결정적으로 중요한 작용을 하므로 그 자체가 민족성의 상징으로 간주된다. 무엇보다도, 같은 조상의 후손들끼리 화교학교에서 중국어로 수업을 받고 중국의 역사와 지리, 그리고 문화적 전통에 대해 배우는 것 자체가 학생들에게 중국인으로서의 민족정체성을 일깨워주었다. 더 나아가 화교학교는 민족정신을 고취시키고 중국 문화의 유구성과 위대성을 알게 하여 학생들에게 중국인으로서의 자부심을 키워주는 것을 교육 목표로 삼고 그를 위한 노력을 다각적으로 기울였다. 일본사회의 국제화에 따라, 화교학교의 사회적 환경은 큰 변화를 가져 왔다. 특히 화교학교를 뒤받침하고 있는 화교사회 내부구조의 변화이다. 이는 화교학교로 하여였다. 예하면 학교의 운영, 학교의 규모, 교사대오 등에서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총적으로 경제세계화의 작동 하에, 봉폐적인 문화교육사상은 점차 다문화, 개방적 교육사상으로 교체되었다. 때문에 일본 화교학교는 부단히 개혁을 진행하여 중화문화를 계승하고 전파하는 동시에, 국제적인 우수한 인재배양에 중시를 돌려야만 중화문화가 해외 전파의 중요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다. 이러한 일본화교학교의 발전은 또한 오늘날 세계로 매진하는 화교학교에 있어서도 좋은 시사점을 제공할 것이다.

      • KCI등재

        일제하(日帝下) 조선(朝鮮) 개항장(開港場) 도시(都市)에서 화교(華僑)의 정주화(定住化) 양상(樣相)과 연망(緣網)의 변동(變動) : 인천(仁川), 신의주(新義州), 부산(釜山)을 중심으로

        金泰雄 ( Kim Tae-woong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2 한국학연구 Vol.0 No.26

        조선 내 개항장 도시에 거류하는 華僑의 定住化 양상과 緣網의 변동은1931년 萬寶山 事件과 화교배척 사건을 분기로 시기별 그 특징을 보여준다. 우선 1931년 이전에는 仁川府, 新義州府, 釜山府 華僑의 정주화가 진전되었다. 인천부의 화교는 商人들을 중심으로, 신의주부의 화교는 華工들의 급속한 유입으로 상인과 화공을 중심으로 정주화가 진행되었다. 다만 부산부의 경우는 지리적으로 일본과 가깝고 일본인 상인의 영향권 아래에 있었기 때문에 정주화가 앞의 두 도시에 비해 별로 진전되지 못했다. 다음 華僑 緣網도 이러한 정주화 과정에서 親姻戚과 同鄕 조직을 근간으로 삼아 地域內ㆍ地域間, 同業別 連繫 組織으로 발전되거나 확장되었고 나아가 조선내 전국적 조직이라는 民族 緣網의 구성 요소로 자리잡기 시작하였다. 이러한 추세는 재조선 화교들이 타자와 주변인으로 내몰릴 수밖에 없는 정착지의 구조적 조건 속에서 중국 재래의 客幇이라는 연망을 활용하는 생존 전략에서 비롯된 자연스러운 귀결이었다. 그러나 1931년 萬寶山 事件과 조선인의 화교배척운동이 일어나고 곧이어 1937년 中日戰爭이 발발한 가운데 일제의 關稅統制로 인해 화교 경제가 난국에 처하면서 정주화의 양상이 달라지고 기존의 연망이 동요되기 시작하였다. 우선 화교 상인에 기반한 인천부의 경우, 무역 부진에 따라 화교 상인들이 대거 본국으로 귀환함으로써 화교 연망이 점차 영세 소상인 중심으로 재편되었다. 또한 신의주부의 경우, 일시적으로 쇠퇴하였지만 화공에 대한 일본인 자본가들의 요구로 인해 이후 꾸준히 유입되면서 화공 위주의 화교 정주화가 진전되었다. 한편, 일본의 중국 침략과 중국의 분열은 재조선 화교 사회를 龜裂시켰다. 즉 일부 화교 조직은 일제의 강압에 못이겨 친일 활동에 나선 반면에 다른 조직은 여기에 반발하여 본국으로 돌아갔다. 따라서 화교 조직은 지속적인 정주화에도 불구하고 외부 정치적 요인에 의해 영세화되어 가는 가운데 1945년 해방을 맞기에 이르렀다. 그리고 냉전질서의 강화로 인해 더욱더 그 기반을 상실해 갔다 The aspect of settlement and network of the overseas Chinese who live in the open port city in Korea changed after Wanpaosan Incident(萬寶山 事件) in 1931. First of all, the settlement had been making progress in Incheon, Sinuiju and Busan before 1931. In particular, traders mainly make the settlement in Incheon. Similarly, the settlement in Sinuiju is almost made by overseas Chinese merchants and Chinese laborers because of inflow of Chinese laborers. Only those who live in Busan couldn't settle well because of Japanese commercial supremacy. Due to these settlements, another settlements of overseas Chinese can be formed and expanded through the native place associations. But these overseas Chinese was also depressed after Wanpaosan Incident in 1931, and the Sino-Japanese War in 1937. In particular, ones who engaged in trade in Incheon did, too. Sinuiju, however, standed out as the center of settlement through inflow of Chinese laborers caused by Northern industrialization. Of course, despite these political and economic fluctuations, the progress of settlement was lasted. But it had started to change the character of the settlement. Small traders and Chinese laborers became main group of the settlement contrast of Big traders, Chinese laborers and other people before. While the settlement has been progressed, the networks of the settlement has been weakened. It means individual distribution of the overseas Chinese. It is because influence of political and military event such as Wanpaosan Incident, Korean's reject event to overseas Chinese, Japanese invasion to China and establishment of pro-Japanese government in China divided the overseas Chinese to pro-Japanese and anti-Japanese. With the advent of the Cold War order, this split has deepen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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