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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일상에서 읽는 한국인의 정체성

        황병기(黃昞起) 한국국학진흥원 2014 국학연구 Vol.0 No.24

        한국인의 문화유전자 연구는 문화체육관광부에서 후원하고 한국국학진흥원이 주관하며 2012년도부터 시작되어 연차적으로 진행되고 있다. 2012년도에는 설문조사를 바탕으로 ‘2012년에 주목할 한국인의 문화유전자’ 10가지를 선정하였다. 그 연구성과는 『한국인의 문화유전자』라는 책자로 발간되었다. 2013년도에는 20대부터 60대까지 10년 단위로 각 세대의 일상생활문화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한국인의 대표정서, 그리고 1970년 대부터 2000년대까지 10년 단위로 각 시대의 일상생활문화와 그 문화를 향유하는 한국인의 대표정서에 대해 설문조사를 실시하여, 그 결과에 근거해 분야별 전문가들이 세대별 특징과 각 세대의 청년기인 20대 시절의 특징을 연구하였다. 2013년도의 설문조사에서 각 세대별 설문결과와 시대별 설문결과가 약간의 차이가 있긴 하지만 전 연령층의 대표적인 일상문화에서 느껴지는 한국인 특유의 정서로 조화와 어울림이 15.4%로 높은 응답률을 보였다. 2위로 응답된 것이 공동체 문화로 8.9%니까 이것까지 합친다면 25% 가량으로 어울림/조화/공동체문화가 대표적인 문화유전자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한국인 개인의 일상문화는 각각 다양한 모습을 띤다. 그리고 동일한 일상문화라도 그것을 누리는 사람마다 다른 목적과 의미를 지니고 있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게임을 자신의 일상문화로 꼽은 젊은 20대의 한국인들 가운데는 의외로 그러한 문명의 이기를 통해 어울려 사는 공동체를 꿈꾸는 사람들이 많다는 것이 설문에서 드러났다. 일반적으로 컴퓨터와 인터넷에 몰두하는 젊은 학생들을 바라보는 성인들이 젊은 세대의 폐쇄적 인성을 탓하고 개인주의와 상업주의에 빠져 있다고 그들을 비평하는 사이에 그들은 오히려 현 사회의 팽배한 개인주의적 경향에서 벗어나는 수단으로 그러한 문명의 이기를 활용하고 있다는 점을 알 수 있다. 지난 반세기 동안 한국인의 일상문화는 그 방식과 수단의 많은 변화가 있었다. 청바지와 통키타에서 스마트폰으로 수단의 변화가 있었고, 저항과 시위에서 조화와 여유의 방식으로 변화하였다. 그러나 자연스러운 정의정서와 어울림과 상생의 정서는 면면히 한국인의 정서로 유지되고 있다. 최근 한류가 전세계인의 공감대를 얻고 있는 것은 한국인에게 만민공통의 정서가 존재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라 밖의 시청자가 대장금을 보면서 눈물을 흘리는 것은 정으로 가득한 가족애와 한 인물의 부단한 도전정신과 열정 등이 누구나 공감할 수 있는 인류공통의 정서이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가 간과할 수 없는 것은 특히 한국인에게 어울림, 상생, 정, 열정과 같은 정서가 마치 생물학적 유전자처럼 세대에서 세대로 유전되고 있는 것 같다는 점이다. This is an essay on Korean identity analyzed from mediocre life and culture, according to the 2013’s survey hosted by Advanced Center for Korean Studies. According to that, Korean youth life and culture have been changed, but National emotion(Culture DNA) does not. The unique emotion of Korean which is gained from typical mediocre culture of all ages is harmonized. That response rate is respectively 15.4%. The response rate of community is 8.9%. Because two emotions are similar to each other, we can judge harmony/community is Korean overwhelming cultural DNA. Korean mediocre culture over the last half century has changed in the way of life and the means. Changes have been made from jeans and guitar to smart phone, from resistance and protest to harmony and freedom in various ways. However the emotion of Jeong(情: sympathetic heart) and harmony ceaselessly is maintained. According to the survey, we can not be overlooked that, in Korean, the emotions of harmony, mutuality, positivity and passion were like a biological DNA from generation to generation.

      • KCI등재

        한국인의 항일투쟁과 현대 중국의 한국인 제재 시가 창작

        김재욱(Kim, Jae-ug)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

        중국에서 문학혁명이 시작된 1917년부터 일본이 패망한 1945년까지는 중국인에게 있어 생사존망의 시기였다. 가장 가까웠던 ‘조선’이 일본의 식민지가 되었으니 중국은 다음 차례였다. 이와 같은 특수한 시기 진행된 중국 작가의 한국인 관련 작품 창작은 단순한 한국인에 대한 감정 표현의 범위를 넘어섰다. 서로를 필요로 했던 양국 관계 외에 대체로 정치와 밀접한 관련을 맺으며 성장하였던 중국 작가의 어떤 희망과 설계도 반영되었다. ‘중국 현대 한국인 제재 시가’는 중국현대문학의 한 부분이다. 그래서 지금까지 이 연구는 주로 ‘항일’, ‘중한우의’, ‘약소민족’, ‘국제주의’, ‘인도주의’ 등으로 대표되는 중국현대문학의 주류 담론을 중심으로 관련 논의가 이루어졌다. 이러한 관점에서 진행된 연구에는 구조적인 문제점이 존재한다. 즉 중국 작가의 사상과 예술관은 주목을 받지만, 묘사 대상인 한국인은 객체 혹은 피동적인 요소로 취급받는다. 그런데 시가를 포함한 현대 중국의 한국인 제재 작품 창작은 국가의 위기에 반응한 중국 작가의 노력에 의해서만 진행된 것은 아니다. 국가 멸망 후 민족 부흥을 도모하는 한국인의 역할도 적지 않았다. 한국인을 묘사한 중국 현대 시가에 일찍이 중국문학사에 나타나지 않았던 중국 작가의 한반도인에 대한 극도의 우호적인 감정이 표현된 것은 한중 상호작용의 결과이다. ‘중국 현대 한국인 제재 시가’를 분석할 때 한국인의 항일투쟁이 일어나지 않았으면 한국인의 항일투쟁에 대한 찬양과 격려를 담은 한국인의 항일투쟁을 묘사한 시가가 중국문학사에서 사라진다는 사실을 인식하는 것은 중요하다. 필자는 중국현대문학의 주류 담론에 의한 연구에서 발견되지 않는 부분을 파악하기 위해 이 글에서 ‘3·1운동’, ‘윤봉길 의거’, ‘조선의용대와 한국광복군의 항일투쟁’을 중심으로 한국인의 항일투쟁과 중국 시인의 한국인 제재 시가 창작과의 관계에 대하여 논하여 보았다. In China, people were in a crisis of life or death between 1917 when the Literary Revolution started and 1945 when Japan collapsed. Its nearest neighbor “Joseon” became a colony of Japan, and China would have been the next. During these unique years, Chinese authors created works related to Korean people beyond the scope of simple emotional expressions about them. Growing up with close connections to politics in general in addition to the two nations’ relations that needed each other, these Chinese writers reflected their certain hopes and designs in such works. “Modern Chinese poems about Korean people” hold a place in modern Chinese literature. Previous studies on the topic usually discussed the mainstream discourses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represented by “anti-Japanese,” “friendship between China and Korea,” “weak and small people,” “internationalism” and “humanitarianism.” Researches conducted in this viewpoint had structural issues. That is, while Chinese writers receive attention for their ideas and artistic views, Korean people they depict are treated as objects or passive elements. Modern Chinese works were created about Korean people including poems not only by Chinese writers’ efforts in response to the national crisis, but also by Koreans’ roles to promote their revival after their country fell. It was an outcome of Korea-China interactions that Chinese writers created modern Chinese poems reflecting their extremely favorable emotions about the people of the Korean Peninsula, which were not found in the literary history of China before. When analyzing “modern Chinese poems about Korean people,” it is important to recognize that if there had not been Korean people’s anti-Japanese struggles, poems depicting their anti-Japanese struggles and containing admiration and encouragement for their struggles would have disappeared from the literary history of China. Trying to figure out what was not discovered in old researches based on the mainstream discourses of modern Chinese literature, the investigator discussed connections between Korean people’s anti-Japanese struggles and Chinese poets’ creation of poems about Korean people with a focus on “March 1 Movement,” “Yun Bong-gil’s heroic deed,” and “anti-Japanese struggle of Korean Volunteers Corps and Korea Liberation Army.”

      • 일제 강점기 부산지역의 여성교육

        이송희(Song Hee, Lee) 신라대학교 여성문제연구소 2013 젠더와 사회 Vol.24 No.-

        본고는 일제 강점기 부산 지역 여성교육의 실상과 지역의 특수성을 보기 위하여 당시 부산 지역의 한국인 여성교육과 일본인 여성교육을 살펴 보았다. Ⅱ장에서는 일제하 여성교육 정책의 변화를 보았다. 1911년의 교육령은 한국인 만의 것으로 조선의 여성을 부덕과 실용성을 갖춘 교육으로 무장시키고자 하였고, 특히 사립학교 종교학교까지 규제하여 민족교육이 실시되지 못하도록 하였다. 보통학교의 경우 일본어를 국어로 사용하도록 하였다. 1922년 신교육령에서 총독부는 ‘일본 교육의 제도주의를 조선으로 연장하겠다’ 고 하여 조선에 있는 국민은 일본인이건 한국인이건 모두 동일의 교육을 시키겠다는 것을 내세웠다. 하지만 학교의 명칭을 일본어를 상용하는 학교는 소학교, 중학교, 고등여학교로 그렇지 않는 학교는 보통학교, 고등보통학교, 여자고등보통학교라고 칭하였기에 한국인과 일본인은 전혀 다른 장에서 교육을 받았다. 1938년 교육령은 조선총독부의 황국신민화 정책을 보다 철저하게 드러낸 것으로 한국인 학교의 명칭과 일본인 학교의 명칭을 동일하게 하여 종래의 보통학교를 심상소학교로, 고등보통학교는 중학교로, 여자고등보통학교는 고등여학교로 바꾸도록 하였다. Ⅲ장에서는 여성 중등교육의 현황을 살펴 보았다. 한국인 학교는 부산여자고등보통학교, 일신여학교, 공생학교가 일본인 학교는 부산공립고등여학교, 부산실습여학교(삼도고등실업여학교), 대곡가정전수학교, 부산상업야학교 등이 있었다. 한국인 교육에서 볼 수 있는 것은 일신여학교가 일찍이 설립된 사립학교로서 1927년에 설립된 부산여고보에 못지 않은 많은 인재를 양성하였다는 점이다. 그리고 한국인 공립교육은 전문직 여성을 키워내는데 유리한 점을 갖지 못하였다고 할 수 있다. 일본인 교육은 상대적으로 전문화가 되어 있었다고 보인다. 부산공립고등여학교는 일찍이 1906년에 조선에서 최초로 설립된 여자학교로서 많은 부분이 정돈되어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나머지 일본 여성교육기관들은 직업학교로서의 특수성을 갖고 조선인도 받아들이면서 교육을 전개 나갔다. 부산에서의 여성 중등교육은 전문가를 키울 수 있는 부분에서는 한국인과 일본인의 경계가 뚜렷하여 한국인이 일본인의 영역으로 진입할 수 없었다. 다만 실업교육에서는 그 진입이 가능했음을 알 수 있다. Ⅳ장은 여성 초등교육의 현황을 살펴보았다. 부산 여성 초등교육은 공립교육이 주를 이루었기에 일본이 요구하는 교육 내용으로 이루어질 수 밖에 없었다. 특히 여성들에게는 가사와 재봉 시간을 많이 배정하였다. 일본인 여성들을 보면 교과내용에서는 1910년대는 수신, 역사, 지리 등에서 한국인의 보통교육과는 차이가 있었고, 소학교 남학생들과는 거의 같은 교과 내용으로 교육을 받았다. 제2차 교육령 이후에 일본인 소학교 여학생들에게도 가사와 재봉시간이 많이 배정되었고, ‘충군애국의 지기를 키워 충량한 국민을 육성한다’는 것이 교육의 목적이었고, 더 나아가 ‘양처현모’로서 키우고자 하였다. 하지만 한국인과 일본인이 별개의 학교에서 교육을 받았다. 단 1940년대에 가서 한국인들이 몇 명 정도 일본인 학교에서 공부하였는데, 고등소학교의 경우 한국인 학생이 13%(1940년) - 30%(1941년)정도였다. This study examines Korean and Japanese women’s education in Japanese colonial time to explore the regional characteristics of Busan education. Chapter II is focused on the changes of women’s education policies in the colonial time. Education Principles in 1911, made for Koreans exclusively, aimed to equip Korean women with womanly virtues and practicality. New principles in 1922 proclaimed Japanese education system would be extended to Korean one. It means that they would provide the same education for Koreans and Japanese in Korea. 1938 Principles more thoroughly revealed Japanization policies by making Korean school names the same as Japanese ones. Chapter III examines how secondary level education functioned for women’s profession. In comparision with Japanese women Korean women were much more disadvantaged in their educational preparation for the career. The border between Koreans and Japanese in the secondary schooling was so strict that Korean women could hardly enter the same space of career with Japanese women even after graduating from the same level schools. Vocational schools, however, sometimes promised the possibility of breaking the wall. Chapter IV examines how elementary schooling was in the colonial period. Korean children were educated in separate schools from Japanese ones. It was not until 1940s when a small number of Korean children began to go to the Japanese elementary schools.

      • KCI등재

        서비스주의 한국인 모델 연구

        김현수 서비스사이언스학회 2021 서비스연구 Vol.11 No.4

        본 연구는 대한민국을 영속적으로 유지 발전시킬 수 있는 한국인 모델 도출을 위해 수행되었다. 한국사회를 분석하고, 특히 대한민국 건국의 주역이 된 근대 한국의 한국인을 심층 분석한 후, 지속 가능한 인류사회로서의 중심으로서 한국사회를 이끌어갈 수 있는 한국인 모델을 도출하였다. 대한민국과 한국인의 상황을 근본적 차원에서 분석하였다. 분열과 갈등이 심화되고 있고 자유와 정의의 개념조차 모호해지는 근본 원인을 분석하고, 이러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헌법정신에 기반을 둔 대한민국의 한국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한국인으로서의 필요조건은 대한민국의 건국이념과 헌법정신, 한국의 고유사상과 한국인의 멋과 생활 등을 통해 도출하였으며, 한국인으로서의 충분조건은 인류사회의 리더 및 구성원으로서 한국인이 가져야하는 바람직한 사상을 기반으로 도출하였다. 또한 한국인 모델을 위한 기본 공리를 제시하고, 이를 기반으로 한국인 모델의 구조를 디자인하였다. 한국인이 인류사회를 이끌어가는 주체가 되어 오래도록 행복할 수 있도록 한국인 모델을 제시하였다. 현대 한국인의 사상적 기반에 대한 심층적 분석 결과를 반영하여, 다양한 사상을 가진 한국인들이 함께 잘 살 수 있는 장기 지속 가능한 새로운 구조를 제시하였다. 새로운 한국인 모델은 서비스주의 한국인 모델로 명명되었다. 모든 대립자들 간의 철저한 견제와 균형이 중심이 되는 모델이기 때문이며, 단순 선형 1차원 한국인 모델이 아니라 다차원 동태적 모델이기 때문이고, 또한 한국인의 정체성을 정확하게 표현하는 화쟁태극 모델이기 때문이다. 한국사회의 지속적 발전이 가능할 수 있는 모델로 제안되었다. 향후 구체적인 한국인 교육 프로그램에 대한 후속 연구가 필요하다.

      • KCI등재

        Korea and the Koreans in the Russian press of 1904-1905

        Igor Ermachenko(이고르 예르마첸코) 고려대학교 한국사연구소 2005 International Journal of Korean History Vol.8 No.-

        러일전쟁이 러시아 사회에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인상을 부각시키는데 얼마나 기여했는지를 평가하기란 쉽지 않다. 한국 관련 연구서들과 학술탐사보고서를 포함한 주목할만한 개설서들이 러시아에서 처음으로 등장한 것은 동아시아에서 서구열강의 세력권 확보를 위한 각축이 시작될 무렵이었다. 1900년 러시아 재무성은 1,250페이지 분량의 3부로 구성된 방대한 기초 연구서인 “韓國誌(Описание Кореи)”를 출간하였는데, 이는 당대의 여타국가에서도 유례를 찾아볼 수 없는 규모였다. 그러나 일반 독자들에게 거의 눈에 띄지 않았던 극동의 구석진 곳에 위치한 “이 이상한 나라” 한국이 일반 대중의 관심의 대상이 된 것은 바로 이 전쟁 덕분이었다. 러일전쟁(1904-1905)시기 러시아의 언론에 비친 한국은 교전 상대국 일본과 주요 전장이었던 만주를 묘사하면서 자연스럽게 언급되고 있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신문이나 저널에 남아있는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기록은 한국의 독특함에 대한 러시아 사회의 폭넓은 관심을 보여준다. 이 같은 독특함은 일본과 중국에 대한 묘사와 비교를 통해서만이 완전하게 평가될 수 있는 바, 그 차이점은 양면성이라는 특징이라 할 수 있다. 초기에는 교활하고 남의 흉내를 잘 내는 동양인의 모습과 의협심이 강한 일본의 적대자라는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으며, 그 다음 단계에서는 무고하게 고통당하고 있는 평화로운 주민의 모습과 혐오스러운 마적떼, 잠재적인 적국, 황화를 초래할 수 있는 가상의 적국 가운데 하나라는 모습 사이에서 진자운동을 하였다. 따라서 러일전쟁 직전과 개전초기의 상황을 통해 나타난 러시아의 한국인식에 대한 전통을 고찰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전쟁초반 러시아 언론에서는 한국을 당연한 중립국가로 묘사하기 시작했고, 한국의 중립에 관한 국제적 협약(시모노세끼 조약, 영일동맹 및 러불선언의 조문들 1902년)을 위반한 일본이 불법적으로 한국을 무력간섭함으로써 고통받고 있는 국가로 그리고 있었다. 이와 유사한 논조들은 육군성과 외무성의 공고문 및 훈령들을 게재한 공식적인 신문들이나 저널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이 경우 중국과 마찬가지로 대한제국 정부의 입장과 민중들의 성향간의 차이는 제대로 언급되지 않고 대체로 이 둘을 피해자로 인식하고 있었다. 러시아의 정기간행물에 소개된 1904년 2월 6일자 만주군 임시사령관 린네비치 장군의 전문에는 일본이 한국인들에게 적대적으로 대하고 있기 때문에 한국인들은 우리에게 각별한 신뢰와 호의를 보이고 있고, 러시아가 일본보다 강하다고 말하곤 한다고 보고하였다. 또한 한반도에 대규모 일본군이 상륙한 직후, 한국인 가운데 일부가 러시아 국경으로 달려와 러시아 육군지휘관들에게 일본군의 동정을 알려주었다는 언론 보도 역시 이 같은 평가에 기여하였다. 이후 한국인들의 정보제공에 대한 기사들은 지속적으로 게재되었다. 그러나 1904년 2월 9일자 외무성 회람문에서도 강조되었던 바와 같이, 러시아정부는 일본이 한국을 불법적으로 점령한 상황에서 한국정부의 명의로 생산되는 모든 훈령과 공고를 무효로 인정하기로 하였다. 유력한 신문의 주필들 역시 유럽열강의 전함들이 제물포로 파견된 명분이 되었던 무질서를 떠올리며 이미 러일개전 직전부터 한국 정치상황의 총체적인 불안정성을 지적하고 나섰다. 더욱이 여러 차례 일본인 첩자들이나 유격대원들이 한국인의 전통복장으로 갈아입고 그들의 임무를 수행해왔던 사실은 한국인들을 보다 조심스럽게 대하도록 만들었다. 또한 개별적으로 수집된 군사정보 속에도 일본을 위해 간첩활동을 한 한국인에 대한 소식도 포함되어 있었다. 따라서 러일전쟁 초기 러시아 언론에 나타난 한국인식은 양면성이라는 특징을 보이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국과 한국인들은 그들과 커다란 상관이 없는 외국의 분쟁에 휘말린 사례였기 때문에 전반적으로 러시아 여론의 동정과 공감을 얻고 있었다. 이 같은 여론은 예술문화 관련 저널에 실린 기사들을 통해 보다 확산되어 갔는데, 그 주인공들은 전쟁의 잔혹함에 몸으로 부딪힌 평화로운 한국인들이었다. 특히 눈에 보일 듯이 전쟁의 일화를 묘사한 울프슨의 작품 속에서 한국인의 모습은 일본과 중국인과들과는 달리 나름대로 양면성을 드러내고 있었다. 한국인들의 억울한 감정은그들을 흘러넘칠 정도로 과도하게 평화 애호적으로 만든 점과 일본에 대해 효과적으로 저항하지 못하는 그들의 무능함과 수동적 애국주의를 대비시키면서 분명하게 드러났다. 아울러 그의 저작에서는 한국인의 무능함과 수동성의 기원을 종교적 전통인 숙명론에서 찾고 있었다. 특히 한국인 주인공이 일본인들에게 보인 도덕적인 저항과 이에 대한 강조는 하나의 상징처럼 여겨질 정도로 당연시되었다. 한국과 관련된 주제들을 예술적으로 묘사한 대부분의 경우들은 惡에 대해 폭력으로 저항하면 안 된다는 톨스토이의 원칙과 논쟁해야할 잠재적인 여지를 남겨두고 있었다. 이울러 한국인 주인공들의 입을 통해 반전론을 얘기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러시아 언론에서 한국의 역사과 문화에 대해 언급한 것은 멀리 떨어진 이상한 나라에 대한 소개에 그치지 않고 러시아 사회로 하여금 자신의 문화 전통을 되돌아보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는 것이었다.

      • KCI등재

        1880년대 한국을 방문한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인식 : 10년 이상 장기체류자들을 중심으로

        이수기(Lee, Su-ki) 한국외국어대학교 역사문화연구소 2015 역사문화연구 Vol.55 No.-

        이 글은 개항 초기인 1880년대 한미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한 직후 한국을 방문한 미국인들 중에서 선교사를 중심으로 하여 한국에 대한 인식을 살펴보고자 한다. 외교관의 경우는 국제관계의 임무와 더불어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방식을 많이 가지고 있는 반면에, 선교사의 경우는 문명 전파의 사명감을 가지고 있지만 외교관에 비해 오랜 체류기간을 통해 한국을 이해하고자 노력한 선교사들이 많다. 이 시기 대부분의 서양인들이 짧은 체류기간과 오리엔탈리즘에 입각한 우월의식을 가지고 한국에 대해 부정적으로 본 것과 달리 장기 체류했던 미국인 선교사들은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점에서 차이가 있다고 생각한다. 또한 미국인 선교사들의 한국에 대한 인식을 통해 선교사라는 직업적 특성 또는 인식의 유사성을 찾아보고자 한다. 1880년대 방문한 미국인의 특징을 먼저 살펴보고, 본격적으로 1880년대 미국 선교사들의 한국인식에 대해 알렌, 언더우드, 헐버트, 다니엘 기포드 등 네 명의 장기체류자들을 중심으로 분석하였다. 알렌과 언더우드, 헐버트 등 세 선교사는 20년 이상 체류하면서 한국에 대한 애정과 함께 이해를 높이고자 하였고,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 또한 높았다. 알렌은 선교활동과 함께 의료활동과 외교활동을 병행하면서 한국이라는 나라와 한국인이라는 국민에 대해 관심을 가졌다. 언더우드는 의사였지만 한국에 입국해서는 주로 선교활동을 중심으로 활동하면서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많이 가졌다. 헐버트는 선교사이나 한국에 입국할 당시에는 교육자로 입국하여 선교활동과 교육활동을 병행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한 관심을 가져 그의 저서는 다른 선교사들에 비해 분량이 많은 편이다. 그만큼 한국과 한국에 대해 기록할 것이 많다는 것을 의미한다고 볼 수 있다. 하지만 다니엘 기포드의 경우에는 한국에 대한 애정과 이해가 없었다고는 할 수 없지만, 식민사관과 일본을 옹호하는 입장에 서서 서술한 부분이 있어 앞의 세 명의 선교사들과 구분되어진다. 이들은 미국인 선교사라는 점과 10년 이상의 장기체류자라는 공통점이 있지만 인식의 차이도 분명 존재한다는 것을 알게 해주었다. 개항기 초기에 입국한 미국 선교사들 대부분은 중산층 계층에 속하고 대학교 교육을 받은 엘리트라고 할 수 있다. 즉 이들은 서양의 우월주의의식과 오리엔탈리즘을 가지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는 이들을 무조건 오리엔탈리즘적 사고를 가진 제국주의 국가의 서양인들로 보기보다는 다르게 분류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10년 이상 체류한 미국 선교사들은 한국의 특징을 찾아내고 한국에 대해 사회적으로 문화적으로 이해하려고 노력하면서 살았다는 것이 기록에서 나타났다. 다니엘 기포드와 같이 식민사관을 가지고 있는 경우는 예외이다. 이들이 한국인처럼 되기는 어렵겠지만, 이들은 10년 이상 한국인들과 함께 생활하면서 한국과 한국인에 대해 동화되어갔을 것은 추정이 가능하다. 그렇기 때문에 이들에 대한 인식과 평가를 다르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또한 이러한 인식분석을 기반으로 하여 장기체류자와 단기체류자를 비교할 수 있고, 보다 다양한 분류화 작업을 진행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한다. This article is the missionary among the Americans who visit the Korea in the 1880s with priority given to the awareness of Korea, I am going to go through. In the case of a diplomat is an international relations has a lot of the mentality of the mission to Egypt, but also orientallijeum. On the other hand, civilization is the case of a missionary with the mission of spreading, but diplomats through her long stay period, compared with the a lot of Korean missionaries try to understand. Most Westerners are at this time period shorter stays and Orientalism have a sense of superiority based on and was deemed to be negative about Korea. But American missionaries who had been long term is recognized differently about Korea and Koreans think. Also, through awareness of Korea, American missionary, a professional quality or mutual recognition, we intend to find. First, the 1880's visit will see the features of the American. Then the 1880s, American missionary of Korean ceremony led by the long stay about Allen, Underwood, Hulbert, Daniel Gifford and analyzed. Allen and Underwood, Hulbert, such as a missionary does more than 20 years and visit his affection for Korea with understanding on. And they had a lot of interest in Korean and Korean. Daniel Gifford is his affection for Korea and can not do is they don't understand. He was the colonial view of history and Japan have parts that are described in the line to stand up for. So this is three missionaries of perception and distinct segments. They found an American missionary, a point and more than a decade of so much a extended stay in common. But exist differences in perception to recognize that was me. It is difficult to be like they are Korean. But they are more than 10 years Koreans by living with assimilating about Korea and Koreans would have believed was possible. Therefore, they think we should put in different public perception and assessment. In addition, these recognition analysis based on short-term and long-term resident immigrants can be compared and believes it will be, efforts will go ahead with a wider variety of classific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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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효과적인 일본선교를 위한 현지 사역자들의 제언 - 일본인목사와 현지 한국인 사역자들의 실증 사례 연구

        정근하 한국실천신학회 2013 신학과 실천 Vol.0 No.34

        본 연구는 문헌들을 중심으로 연구한 지금까지의 선행연구들과 달리, 현지인 목사들과 현지에서 활동 중인 한국인 사역자들을 대상으로 인터뷰 조사를 실시한 실증연구로서, 도쿄지역에 제한되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가지고 있지만, 실질적인 인터뷰 내용들을 소개하고 선교사들의 일본진출 사례와 해외 진출기업인들의 사례를 비교했다는 점에 의의가 있다. 본 연구를 통해 한국인의 독특한 문화적 습성을 확인 할 수 있었다. 첫째, 한국인들은 한국에서의 성공을 과신하여 "일단 가보면 어떻게 되겠지"라고 하는 막연한 자신감을 가지고 있었고, 둘째, 사업지와 선교지의 문화, 언어, 시장조사 등의 철저한 조사 없이 혼자서 돌진한다는 사실이었다. 많은 연구자들과 현지 사역자들은 한국인들의 치밀한 계획 없이 돌발적으로 일본진출을 결행하는 것이 걸림돌로 작용하고 있다고 지적하고 있다. 기업의 해외진출과 해외선교는 진출지역 사람들을 전인격적인 설득작업이 동반된다는 점과 그들의 실패가 많은 사람들에게 피해를 준다는 점에서 비슷하다. 그러므로 기업과 선교사가 해외로 진출하기 위해서는 전략적이어야 한다. 본 연구는 한국인 선교사의 해외 파송과 일본선교가 지속적으로 이루어질 것으로 예상됨으로 한국인 선교사들이 선교과정에서 겪게 될 시행착오들을 선행연구를 통해 망라하여 정리하였고 인터뷰조사를 통해 효과적인 선교적 제언들을 수록하였다. This positive research contains the interview survey of Japanese pastors and local Korean religious workers. The survey is limited to the country of Japan only, but it is significant as the research is based on the data with the substantive personal experience that is compared to the examples of companies extending their businesses abroad. Throughout the research, the Korean’s distinctive cultural habits were ascertained. First of all, Korean people have a stereotypical thought of being too generous about one’s success in Korea without definite plans. Secondly, Korean people tend to rush forward their business in a foreign business site and a mission field without studying about its local culture, language and market research. Many researchers and local religious workers point out that the Koreans’ indefinite plans with the sudden burst of culture are the barrier of entering Japan. One thing in common between enterprise’s moving oversea and oversea missionary is that both significantly need the full support of the local residents in their business site. Without the support, both sides, carrying on business oversea and oversea missionary trips, would fail deeply and harm a lot of people. Therefore, there must be a strategic approach for enterprises and missionaries to extend internationally. This research contains the expectation of seeing continuous Korean missionaries dispatching and missionary work in Japan. Besides, it includes the advanced research through the trials and errors that Korean missionaries have to undergo in their process of missionary and an effective missional proposal through interview survey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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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일 한국인 문학과 '집' : 이회성과 유미리 문학을 중심으로

        이미숙 이화여자대학교 한국문화연구원 2005 한국문화연구 Vol.8 No.-

        It is noticed in Lee Hoe Seong's work and Yu Mi Ri's work which were treated the motives of 'house' and Family in the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In this thesis, I'll consider a universality of Korean culture and a peculiarity by analyzing concretely the lif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Which spreads in 'house' space. It is noticed in Lee Hoe Seong's work and Yu Mi Ri's work which were teated the motives of 'house' and Family in the literatur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In this thesis, I'll consider a universality of Korean culture and a peculiarity by analyzing concretely the lif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Which spreads in 'house' space. First, there is a notice in 'house of a Korean' which is described repeatedly in Lee Hoe Seong's early work. It is a notice that they are coexisting together while contrasting a dark and a violent house which is symbolized with father against cordial house which is symbolized with mother. And his literary work has a growth novelistic structure which the second generation's son gets to realize a Korean who is represented with the first generation's father through the motive 'the disappearance from home' of the second generation's son. The second generation's son disappears to solve 'Korean negation is Self-denial' by negating the patriarch and violent father and his house. Then he get to understand father as a korean by perceiving the point which his own family discord and father's violence are the problems of Korean resident in Japan, they aren't the problems of an individual. In Lee Hoe Seong's early work, the hous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had keeping in the troubles between father and son owing to mother's buffering role. But 'house' is presenting to be dissolved in Yu Mi Ri's work. In Yu Mi Ri's work, it isn't a possibility of trying to search the contrast structure which a father as a outside, social political, violent and cold-hearted existence with a patriarch conservativeness against a mother as a inner, culture, emotional and warm existence. In :「Full House」 and 「Family Cinema」, it is embossing real image of the house which is opposed to the actual feature of the family. Her works isn't dealt the specific problem of a house which people can experience in a strange culture, Japan. It escapes rather from category of Korean of the house resident in Japan and it is exposed from the times conditions which is changing suddenly. Her works can acquire an universality by drawing the problem of the present-day family and a human estrangement. Writer Lee Hoe Seong insisted on the establishment national identity as a way for identity discovery of Korean resident in Japan. In his early work, the problem of 'house' of Korean resident in Japan is apprehended in history and the times as the problem of their own. And it is advancing forward the universal issue of a human. But Yu Mi Ri's work is based on existence conditions of Korean resident in Japan, It doesn't show the national identity. So the problem of 'house' that is called dissolution, it doesn't belong to Korean resident in Japan, it is presenting to the universal problem that is related with individual estrangement and the dissolution of the family which is a fundamental unit of society. 본고는 재일 한국인 문학 중 ‘집’또는 가족에 관한 모티프를 비중 있게 다루고 있는 이회성과 유미리의 작품에 주목해, ‘집’이라는 공간 속에서 펼쳐지는 재일 한국인의 삶을 구체적으로 분석함으로써 한국문화의 보편성과 특수성을 살펴보고자 한 것이다. 먼저, 이회성의 초기 작품에서 되풀이 묘사되고 있는 ‘한국사람의 집’에서 주목할 것은 아버지로 상징되는 어둡고 폭력적인 집과 어머니로 상징되는 따뜻한 집이 대비되면서도 공존하가 있다는 점이다. 그리고 이회성 문학은 재일 한국인 2세대 아들의 ‘가출’이라는 모티프를 통해, 1세대 아버지로 대표되는 한국사람을 2세대 아들이 이해하게 되고 ‘한국사람의 집’의 다른 모습을 발견하게 되는 성장 소설적인 구조 또한 지니고 있다. 가부장적이고 폭력적인 아버지 및 그 아버지의 집을 부정함으로써 ‘한국 부정=자기 부정’을 해소하고자 감행한 가출을 계기로 2세대 아들은, 자기 집의 불화와 아버지의 폭력성이 한 개인의 문제가 아닌 일본이라는 사회 속에서 살아가는 재일 한국인 전체의 문제라는 점을 인식함으로써 한국사람으로서의 아버지를 이해하게 되는 것이다. 그러나 이회성의 초기 작품에서 아버지와 아들 사이의 갈등 속에서도 어머니의 완충적인 역할에 힘입어 불안하게나마 유지되고 있었던 재일 한국인의 ‘집’은 유미리 작품에는 완전히 해체된 상태로 제시되고 있다. 따라서 가부장적 보수성을 특유의 배타적 속성으로 지니고 있는 외적·사회정치적·폭력적이며 비정한 존재로서의 아버지와, 내적·문화적·정서적이며 따뜻한 존재로서의 어머니라는 대비구조는 유미리의 작품 속에서는 찾아볼 수 없다. 가족의 실제 모습과는 반대되는 ‘완전한 집’이라는 아이러니한 제목을 통해 해체된 ‘집’의 실상을 상대적으로 부각시키고 있는 「풀 하우스」와「가족 시네마」라는 유미리의 작품에는 일본이라는 이문화 속에서 겪게 되는 재일 한국인의 ‘집’ 고유의 문제를 작품 표층에서 정면으로 다루고는 있지 안다. 오히려 재일 한국인 가족의 ‘집’의 범주에서 벗어나 급변하고 있는 시대적 상황 속에서 노정되고 있는 현대 가족의 문제 및 인간 소외를 그려냄으로써 보편성을 획득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재일 한국인의 정체성 회복을 위한 방법으로 민족적 주체성의 확립을 주장한 작가인 이회성의 초기 문학에 그려진 재일 한국인의 ‘집’ 문제는 재일 한국인 고유의 문제로서 시대와 역사라는 틀 속에서 파악되고 있으며 이를 통해 보편적인 인간의 문제로 나아가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러나 유미리 문학은 재일 한국인이라는 존재 상황을 밑바탕에 깔고는 있지만, 민족적 정체성을 뚜렷이 부각시키고 있지는 않다. 따라서 가족의 해체라는 ‘집’의 문제 또한 재일 한국인의 문제로 귀속되는 것이 아니라, 사회를 구성하는 기본 단위인 가족의 해체와 이로 인한 개인의 소외라는 보편적인 문제로 확대되 제시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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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고전서(四庫全書)≫와 ≪존목(存目)≫에 수록(收錄)된 한국인(韓國人) 저작(著作)과 그 문화의의(文化意義)

        김호 ( Ho Kim ) 한국중문학회 2010 中國文學硏究 Vol.40 No.-

        目前爲止, 國內有關≪四庫全書≫及其≪存目≫收錄的韓國人著作的數量問題, 沒有得到一致的看法。而且國外學者亦對於此問題的看法, 因爲篇幅的關係, 難免有所簡略, 加上學界對於≪四庫各省採進書目≫收錄的韓國人著作問題、≪四庫全書≫及其≪存目≫收錄的韓國人著作之文化內涵等, 均沒有進行討論。鑑於前人硏究的不足, 本文擬要對這些問題, 進行一番探討。本文經過一番討論,得到以下幾點結論: 第一、當編纂≪四庫全書≫時,向中央政府進程的韓國人著作共有五種, 就是≪朝鮮史略≫、≪朝鮮志≫、≪高麗世系≫、≪朝鮮國志≫、≪徐花潭集≫。第二、≪四庫全書≫及其≪存目≫收錄的韓國人著作共有六種: ≪朝鮮史略≫、≪朝鮮志≫和≪武英殿聚珍版程式≫三種收錄於≪四庫全書≫; ≪高麗史≫、≪朝鮮國志≫和≪徐花潭集≫三種收錄於≪存目≫。第三、≪四庫全書≫及其≪存目≫收錄韓國人著作的原則, 可分爲「以資參考」、「以資考證」、「取技能」和「表彰儒術」等。第四、≪四庫全書≫及其≪存目≫收錄韓國人著作有其獨特的文化內涵。首先,幾種韓國人著作收錄於≪四庫全書≫的事實可證明韓、中兩國的書籍交流倂不是只從中國流入韓國的單方面的,而是雙方面的。其次, 幾種韓國人著作收錄於≪四庫全書≫及其≪存目≫,這意味著幾種韓國人的著作引起傳統中國知識分子的關注,這種現象甚値得予以重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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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음악의 세계화 전략

        야마모토 하나코(Yamamoto Hanako)(山本華子) 국립국악원 2009 국악원논문집 Vol.19 No.-

        일본에서는 1965년 한일국교 정상화 이후, 여러 가지 형태로 한국음악이 소개되어 왔다. 더욱이 국교정상화 40주년을 맞이한 2005년은 한·일 우정의 해 2005 로 지정되어 전통음악 세계에서는 민간차원의 공연이 증가하면서 한일 교류연주회가 활발히 열리게 되었다. 본 논문에서는 2005년 이래 일본에서 한국음악이 어떠한 형태로 소개되어 왔는가를 개관하고, 그 현황을 파악한 후에 향후의 전략에 대해 제언하고자 한다. 한국음악에 바로 접할 수 있는 것은 일반적으로 공연과 강습회·워크숍을 꼽을 수 있다. 수도권을 대상으로 공연정보를 수집해서 분석한 결과, 2005년 1월부터 2008년 8월까지 이루어진 한국음악 공연 중 타악기가 가장 많고, 다음으로 현악기가 이어진다. 결국 단독 공연이 되면 사물놀이나 가야금 등이 많다는 것이다. 또한 일본 연주자와의 교류 무대로는, 2005년의 한일 우정의 해에 이루어진 교류공연이 가장 많았다. 연주가의 분야로서는 한국인·재일 한국인·일본인·기타 민족이 포함된다. 횟수가 많은 순으로 열거하면 한국인, 한국인과 일본인 혼합, 재일 한국인, 한국인과 일본인과 기타 민족, 한국인과 재일 한국인, 한국인과 일본인과 재일 한국인, 재일 한국인과 일본인으로 되어 있다. 이렇게 일본에서는 한국음악의 연주에 재일 한국인이 여러 형태로 활동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한편, 도쿄에서 강습회·워크숍이 행해지는 3개소를 개관한 결과 거론된 분야는 관악기(피리·단소), 현악기(가야금·해금), 타악기(장구·꽹과리), 소리(민요·판소리), 악기 수리 등으로 밝혀졌다. 주일 한국대사관 한국문화원은 국립국악원과 연계하여 본국에서 강사를 초빙하여 초심자를 대상으로 한 강좌를 개최하며, 재일본 한국YMCA는 초심자와 경험자 및 장기간 참가자들이 대상이었으며, 강사는 한국에서 초청하고 있다. BBD 한국전통악기 전문점은 워크숍 이후의 대응을 고려하여, 재일 연주가를 강사로 초빙하고 있다. 도쿄에서 계속적으로 한국음악을 배울 수 있는 기관으로 한국YMCA를 들 수 있겠다. 한국YMCA의 한국음악 강습이 거둔 효과로는 재일 한국인들의 정체성 확립과 지도자 양성을 들 수 있다. 수강생 중에는 프로를 목표로 하는 인재가 나타나 현재 장구 연주자로 활약하고 있는 이도 있다. 그리고 일본에 한국음악 보급에 이바지한 가야금연주자인 지성자의 역할 또한 컸다고 할 수 있다. 끝으로 지금까지의 조사결과를 바탕으로 해서 한국음악의 세계화를 위하여 5가지를 제안하였다. Since the no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 between Korea and Japan on 1965, many Korean music has been introduced in Japan. Moreover, the 40th anniversary of the normalization of diplomatic relation, as in year 2005, was announced as the fellowship year between the two countries. Performaces of Traditional music of two countries increased between the private organizations as well as musical interchanges. In this paper, I would like to examine the musical exchanges between two countries and how Korean Traditional Music introduced in Japan since year 2005. In conclusion, 5 different suggestions on the possible strategies on promoting Korean Traditional Music and its globalization will be provided at the end of the pap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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