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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충렬왕의 케시크(怯薛, kesig)제 도입과 그 의도

        金甫?(Kim, Bo-kwang) 한국사학회 2012 史學硏究 Vol.- No.107

        이 글은 케시크라는 몽골제국의 제도가 고려에 갑작스럽게 등장하게된 배경과 그 의미는 무엇인지를 파악하기 위한 것이다. 케시크의 등장을 전후한 13세기 후반의 고려 상황은 정치적으로 복잡하였다. 대내적으로 무신정권이 100년이라는 장기간 지속되면서 정치를 주도한 탓에, 국왕의 권위가 심각하게 하락하여 국왕은 정치권력구조에서 사실상 배제된 상황이었다. 대외적으로 고려는 몽골과 30년에 가까운 전쟁을 하였으면서도 끝내 항복을 하고 강화도에서 개경으로 還都하게 되어, 고려는 몽골제국으로부터 국가를 유지해야만 하는 위기 상황에 놓여 있었다. 이러한 때에 1269년 임연에 의해 벌어진 원종 폐위 사건은 당시 세자이던 충렬왕에게 왕권 강화의 필요성을 더욱 절실하게 느끼게 하였다. 동시에 자신의 요청을 수용하여 원종의 복위를 도와준 몽골제국에 대해서는 고려(왕실)가 도움 받을 수 있는 우방이라는 인식도 충렬왕은 갖게 되었다. 세자 시절에 이미 몽골에 호의적인 인상을 갖게 된 충렬왕은 몽골제국의 정복지에 대한 전통적인 지배방식에 따라 몽골의 수도에서 숙위를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몽골제국의 世祖쿠빌라이의 딸인 쿠툴룩 케이미실 공주와 혼인을 하였으며, 숙위의 과정에서 황제를 비롯하여 諸王, 公主, 駙馬등이 운영하던 측근 조직인 케시크제를 경험하였다. 이들을 통해 황제는 公的국가기구를 장악할 수 있었다. 충렬왕은 몽골의 지배층이 측근을 어떻게 정치적으로 활용하는가에 대해서 배울 수 있었으며, 자신도 몽골제국의 부마라는 자각을 하였다. 1274년에 元宗의 뒤를 이어 즉위하게 되자, 충렬왕은 몽골의 풍습을 적극적으로 수용하는 태도를 취한다. 몽골제국의 요구에 의해 정치제도가 개편되기도 하였지만, 그와는 상관없이 코르치와 응방, 비칙치가 충렬왕의 즉위 직후부터 4년에 걸쳐 차례로 설치된 것이다. 충렬왕은 비칙치가 ‘별청재추’라고 불릴 정도로 이들을 통해 ‘緊要한 일’을 처리하여 국정을 장악하고자 하였다. 또 코르치 등을 통해서는 신변의 안전을 확보하고 더 나아가 시위조직의 확충을 통해 국왕 직속의 무력을 손에 넣고자 하였던 것이다. 그리고 응방은 매의 포집과 진상을 담당하면서 그를 매개로 몽골에 대한 별도의 교섭창구를 마련하고 동시에 해외무역에 나설 자본금을 확보하는 등 경제력을 확보하는 수단으로 활용하고자 하였다. 이 과정에서 충렬왕은 측근을 이들 조직에 임명하여 운영하도록 하였는데, 그들은 케시크 조직의 운영과정에서 불법이나 비리를 저지르는 경우가 많았다. 이 때문에 관료조직과 케시크 조직 사이에 갈등이 심해졌지만, 충렬왕은 케시크 조직을 적극적으로 옹호하였다. 응방을 운영하던 핵심 측근인 윤수가 죽고(1283) 측근들이 관료조직에서도 고위직을 점차 차지하여 인사권 등을 장악하게 되면서 충렬왕에게 케시크의 효용성은 이전보다 줄어들었다. 이에 응방을 응방도감으로 바뀌고 비칙치는 정방에 흡수시키는 등의 개편이 이루어지게 되면서 케시크 조직은 국가의 공적 기구(제도)화 하는 방향으로 변화하게 된다. 이처럼 충렬왕은 정치적, 군사적, 경제적(재정)의 핵심을 자신과 私的으로 유대 관계가 깊은 이들을 중심으로 장악하게 하여 왕권을 강화하고자 하였다. 그 달성을 위해서 국왕 자신이 주도적으로 운영할 수 있으면서 정치적으로 효용성이 큰 몽골제국의 케시크제를 도입하였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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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왕대 文散階의 복원과 운영

        이정훈(Lee, Joung-hoon) 역사실학회 2016 역사와실학 Vol.59 No.-

        본고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묘지명을 토대로 충렬왕 원년 및 7년의 문산계, 그 중에서도 11등급의 대부계를 복원하고 그 운영방식을 고찰한 것이다. 충렬왕 원년, 원에 의해 관제가 격하되는 가운데, 문산계도 개정되었다. 그리하여 금자광록대부는 광정대부, 은청광록대부는 봉익대부, 광록대부는 중의대부로 바뀌었고, 대중대부 이하 중대부, 중산대부, 조의대부, 조청대부, 조산대부는 문종 30년의 문산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편 충렬왕 6년 2차 일본 정벌과 관련하여, 원에서는 고려의 관료들에게 원의 관직을 하사하고 일본 정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려의 문산계는 원의 문산계와 그 명칭이 같은 것이 많았었다. 고려의 관료이면서 원으로부터 관직을 받게 됨에 따라, 양자간의 충돌, 즉 위계질서 상의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충렬왕 7년, 다시 문산계를 개정하였다. 그 결과 대부계는 광정 · 봉익 · 정헌 · 정승 · 조의 · 영렬 · 중렬 · 조봉 · 조현 · 조청 · 조산대부로 변화되었다. 충렬왕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문산계가 변화되었다. 충렬왕대 문산계는 그 명칭이 고려전기와 많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충렬왕대 문산계는 문산계와 관직의 품계가 일치하지 않고, 11등급의 대부계를 차례차례 모두 받지 못하고, 같은 관직이라도 서로 다른 문산계를 받는 등 그 운영 방식은 고려전기와 같았다. This article attempts to restore the Mun’san-gye rank system in the first and seven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and among them, the Dae’bu-gye section of eleven ranks, on the basis of in-grave epitaphs from the Goryeo dynasty. In the first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the Mun’san-gye rank system was revised in midst of the demotion of the political system by Yuan. Therefore, Geumja-gwang-rok-daebu(金紫光祿大夫) was changed into Gwangjeong-daebu(匡靖大夫), Eun-cheong-gwang-rok-daebu(銀靑光祿大夫) was into Bongik-daebu, and Gwang-rok-daebu(光祿大夫) into Jung-ui-daebu(中義大夫). Below Daejung-daebu(大中大夫), Jungdaebu(中大夫), Jungsan-daebu(中散大夫), Joui-deabu(朝議大夫), Jocheong-daebu(朝請大夫), and Josan-Daebu(中散大夫) used the same Mun’san-gye rank system from the thirtieth year of the reign of Munjong. Meanwhile, in relation to the second conquest of Japan in the six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Yuan awarded the public offices of the dynasty to the governmental officials in Goryeo and made them join the conquest. At that time, the Mun’san gye rank system in Goryeo had many same titles with the Mun’san-gye rank system in the Yuan dynasty. As they received the public offices of Yuan as Goryeo officials, there might be mutual conflicts, such as clashes between the two hierarchies. Therefore, in the seven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the Mun’san-gye rank system was revised again. As a result, the Dae’bu-gye class was changed into Gwangjeong · Bongik · Jeonghun(正憲) · Jeongseung(正承) · Joui · Yeongryoel(榮烈) · Jungryeol(中烈) · Jobong(朝奉) · Johyeon(朝顯) · Jocheong and Josan-dae’bu. There were two revisions in the Mun’san-gye rank system during the reign of Chung’ryeol-wang. The titles in the Mun’san-gye system during Chung’ryeol-wang’s reign were much changed from the early Goryeo dynasty. However, its operation ways were same as the early Goryeo dynasty in the following ways: the ranks of the offices in the Mun’san-gye rank system were not identical with the Mun’san-gye rank system, the Dae’bu-gye class of 11 ranks was not received sequentially by all, and same offices received separate Mun’san-gye rank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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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알레고리로 읽는 <쌍화점> -충렬왕 복위 전후 정치사와의 관련을 중심으로-

        신영명 ( Young Myoung Shin ) 한국시가학회 2014 韓國 詩歌硏究 Vol.36 No.-

        <쌍화점>은 남녀상열지사 또는 음사의 문학으로 널리 알려져 있다. 그러나 <쌍화점>은 기본적으로 악장이다. 그러므로 거기에 충렬왕 시기의 왕업과 관련된 정치적 상황이 개재해 있지 않다고 말하기는 어렵다. 충렬왕의 정치적 문제의식은 왕권 강화를 통한 국가 통합에서 찾을 수 있다. 이 과업을 달성하기 위해 혼인 정책을 통한 대원 관계 개선 및 측근 세력 구축에 의한 국내 정치 안정을 추구한다. 그러나 복위 전후 이 정치적 구도는 깨어진다. <쌍화점>은 바로 그것을 되살리고자 한 충렬왕의 의도와 연관되어 있다. 예컨대 회회아비에게 손목을 잡히는 불륜의 상황에 처해 있으면서도 그것을 냉소적으로 바라보는 시각이 그것을 보여주는 증거가 된다. 한편 오잠과 같은 족당 세력은 비유력 출신 중심 측근 세력의 이탈을 계기로 그 빈자리를 메우고 들어가 권력을 차지한다. 충렬왕의 목소리를 통해 이탈 세력인 새끼 광대에게 위협적 경고를 보내는 것이 그 작품적 증거가 된다. 곧 그들과 대비를 이루면서 족당 세력은 충렬왕과의 문제의식 공유를 통해 충성 서약을 공표한다. 후소절의 잠자리 동석 의지 표명이 그것이다. 이에 충렬왕은 그 충성 서약을 재차 확인한다. 이것이 <쌍화점>의 작품적 대강이다. <쌍화점>은 원 간섭기, 특히 충렬왕 복위 전후의 정치사를 상징적으로 드러낸 한 편의 알레고리 작품에 해당한다. 쌍화점은 원 제국을, 회회아비는 원 황제를, 쌍화는 고려의 정치적 실리를, 전대절의 나는 충렬왕을, 새끼 광대는 그로부터 이탈한 측근 세력을, 후소절의 여성 화자는 충렬왕 복위 이후 정국을 운영한 족당 세력을 각각 가리킨다. This paper aims to reveal a structural homology between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late King Chungyeol`s period and "The Turkish Bakery".So far "The Turkish Bakery" has been known as the obscene song, but it is one of the ceremony song. Therefore, there is a political intention inside the obscenity."The Turkish Bakery" is the song of pledge of allegiance. In other words, it is a song in which the family faction like O Cham(1259~1336) devotes loyalty to King Chungyeol. In this song, the family faction browbeats the faction which is seceded from the inner court officials. In this case, the little actor in the song represents the latter.In conclusion, "The Turkish Bakery" is a allegory which contains the political history of the late King Chungyeol`s perio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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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쌍화점>의 역사학 - 충렬왕을 위한 변론

        최범영 한국전통문화대학교 한국전통문화연구소 2014 한국전통문화연구 Vol.13 No.-

        고려가요의 형성에 대한 음악적, 역사적 배경에 접근하기 위해 가장 선정적인 가요 로 분류되는 <쌍화점>에 대해 가사, 시가 형식, 고려시대 및 조선시대 관련 역사 기 록 등을 분석하였으며 그 결과 다음과 같은 결론을 얻었다. ① <쌍화점>의 초기 작 품은 <쌍화점>의 2연과 3연에 해당되는 부분만 공연되었던 것으로 보이며 뒤로 가면서 원곡처럼 4연의 체계로 갖추게 되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② <쌍화점>의 주요 어휘 대응 구조를 살필 때 <쌍화점> 가사(문구)의 작자는 가정생활에 충실했던 가 정주부일 가능성이 높으며 시가 구성상 2인~4인이 나누어 부른 노래의 성격을 갖는 다. ③ 고려와 원나라 사이 국제관계의 축소판인 충렬왕과 왕비 사이 원만한 부부관 계가 이루어지지 않았고 서른아홉의 왕족과 열여섯 살에 시집 온 쿠두르게르미실 사이 극복되지 못하는 부분을 채우기 위해 충렬왕은 자주 사냥을 나갔고 마제산 부 근에 위치한 별궁인 수강궁에서 새로운 섹스파트너를 만난 것으로도 보인다. 쿠두 르게르미실과 애첩이었던 무비가 세상을 떠난 지 2년 뒤, 세자에게 왕위를 선위해야 했던 사건이 있던 다음 해, <쌍화점>이 수강궁에서 처음으로 공연되었으며 충렬왕 의 심리적 침몰을 나타낸 것으로 추정된다. ④ 충렬왕이 서른아홉에 쿠두르게르미 실과 국제 정략결혼을 하기 이전에 이미 그는 부인이 있었으며 스물다섯에 신종의 증손녀이고 왕인의 딸을 태자비로 맞았으며 쿠두르게르미실과 혼인 후 그녀는 정화 궁주라는 후궁으로 강등된다. ⑤ 유가 사상을 바탕으로 건국한 조선이지만 <쌍화 점>을 비롯한 고려가요를 남녀상열지사로 분류하기까지 건국 후 약 100년이 걸렸으 며 퇴계문집에서 언급된 바와 같이 조선 중기에도 쌍화점은 공연되고 적어도 귀족 들에게 향유되었던 것으로 보인다. In order to approach to the musical and historical aspects of Goryeogayo songs popular in the late Goryeo dynasty, the paper attempted to analyze the lyric words, musical type and historical records of Ssanghwajeom (a type of obscene songs). According to the results, the followings are concluded : (1) Ssanghwajeom displayed two stanzas in the initial stage of the song performance, and seems to have changed into four stanzas later presumably under the influence of the Yuan and Islam musics. (2) The word correlation between four stanzas reveals that the author of the lyrics seems to be a normal housewife who is responsible for the daily family life, and the number of singers or parts in the song seems to be two to four. (3) King Chungnyeolwang in 39 years of age should politically marry Küdürgermišiil (literally, the smile of strong house), the Khubilai Khan's daughter who was then sixteen years old. The relationship between King Chungnyeolwang and his Queen, Küdürgermišiil prince was not in conjugal harmony, corresponding to the small edition of that between Goryeo dynasty and the Yuan empire. In order to compensate for man's want, the King usually organized hunting at the Majesan mountain, south of the capital city and stayed with his new partners in the Suganggung palace constructed there. After the death of his queen and Mubi (one of his concubines) and after the episode of abdication and regaining of the throne to and from his son, Ssanghwajeom was firstly performed in this royal villa, possibly indicating the psychological decay of the king. (4) King Chungnyeolwang married a royal member when he was twenty five years old, and in marriage with Khubilai Khan's daughter, he should demote his original spouse into king's concubine, newly named Jeonghwagungju. (5) The Joseon dynasty succeeding the Goryeo dynasty was built on the basis of Confucianism, but it takes about one hundred years to take Ssanghwajeom for vulgar song. Nevertheless, this Goryeogayo song was also performed between the noblesse in the middle Joseon dynasty as found in Toegye's antholog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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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윈 제국의 다르칸 제도가 고려에 유입된 양상 -고려 후기 김여우(金汝盂) 공신교서(功臣敎書)의 분석을 중심으로-

        권용철 ( Kwon¸ Yong Cheol ) 연세사학연구회( 구 연세대학교 사학연구회 ) 2021 學林 Vol.47 No.-

        본고에서는 고려 후기의 신료인 김여우가 받은 공신교서의 내용을 검토하고, 그 내용 중에서 충렬왕이 ‘上國之制’, 즉 元朝의 다르칸 제도를 수용하여 공신에게 면죄의 특권을 내린 것의 연원을 상세하게 살펴보았다. 김여우의 공신교서는 고려 후기의 얼마 남지 않은 문서 자료 중 하나로 매우 중요한 사료적 가치를 지니고 있는데, 이에 대한 연구는 역사학계와 한문학계에서 별도로 이루어져 있었다. 이에 두 연구 성과에서 제시한 김여우 공신교서의 판독을 비교하면서 분석했고, 그 결과 조금 더 정확한 원문판독을 제안할 수 있었다. 김여우가 충렬왕으로부터 공신녹권 및 공신교서를 받게 된 것은 충렬왕이 세자의 신분으로 원에 들어갔을 때, 김여우가 충렬왕을 호종했기 때문이었다. 특히 충렬왕이 쿠빌라이의 딸과 혼인을 하면서 고려왕권을 강화할 수 있었던 것은 충렬왕이 김여우에게 특별한 포상을 내린 배경으로 작용했다. 여러 측면에서 원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었던 충렬왕은 공신 포상을 내릴 때에 원조의 제도를 활용하여 김여우에게 면죄의 특권을 부여하는 조치를 시행했음이 공신교서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있다. 그 주요 내용은 죄를 9번 범할 때까지는 벌을 주지 않고, 10번 죄를 범할 때부터 처벌을 한다는 것이었다. 이러한 ‘九宥’ 제도는 몽골-원 제국 시기의 공신들에게 특별히 부여했던 다르칸이라는 개념과 연결되는 것이었다. 다르칸은 칭기스 칸이 자신을 호종하면서 목숨을 살렸던 공신들에게 내린 호칭이었고, 충렬왕도 김여우에게 공신교서를 하사하면서 다르칸이 가지고 있던 제도적 성격을 그대로 도입했다. 충렬왕이 원으로부터 도입한 다르칸제도는 고려 후기 공신 포상에서 지속적인 영향력을 발휘했고, 심지어 조선시대에도 공신의 면죄 특권 조항이 지속되었다. 이는 몽골-원 제국의 독특한 제도가 고려와 조선에 영향을 준 하나의 사례라고도 평가할 수 있고, 이러한 사례가 생길 수 있었던 근본적인 원인은 충렬왕 시기에 형성된 고려-원 관계의 독특한 성격 때문이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This article reviews the contents of the meritorious contributor document given to Yeo-woo Kim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xamines the history of King Chungnyeol (reign: 1274-1308) granting immunity to the meritorious subject by accepting the Yuan Empire's Darqan system. This piece is one of the few documents remaining from the late Goryeo dynasty, is of significant historical value, and was studied separately. This article compares the results of the two studies to develop a more accurate reading of the document. Kim received the meritorious contributor document from King Chungnyeol while Kim was his attendant when he visited the Yuan Empire to marry the daughter of Qubilai (reign: 1260-1294) to ultimately strengthen his sovereign power. The document states that King Chungryeol, who was influenced by the Yuan Empire in many ways, implemented measures to grant immunity to Yeo-woo Kim by utilizing the Darqan system. He decided not to punish him until he had committed the same crime nine times and to then punish him beginning with his commission of the tenth crime. This procedure was linked to the title of Darqan, an honor which was bestowed on meritorious subjects during the Mongol-Yuan period who saved Genghis Khan’s life. King Chungryeol introduced the concept of Darqan when he presented the document to Kim. The Darqan system, adopted by King Chungryeol from the Yuan Empire, continued to be influential in indulging meritorious subjects in the late Goryeo dynasty and even into the Joseon dynasty. This system’s influence shows how the unique Mongol-Yuan system influenced the Goryeo and Joseon dynasties. However, this influence was only possible because of the relationship formed between the Goryeo dynasty and the Yuan Empire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rye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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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왕대 文散階의 복원과 운영 –大夫階를 중심으로

        이정훈 역사실학회 2016 역사와실학 Vol.59 No.-

        본고는 현존하는 고려시대 묘지명을 토대로 충렬왕 원년 및 7년의 문산계, 그 중 에서도 11등급의 대부계를 복원하고 그 운영방식을 고찰한 것이다. 충렬왕 원년, 원에 의해 관제가 격하되는 가운데, 문산계도 개정되었다. 그리하여 금자광록대부는 광정대부, 은청광록대부는 봉익대부, 광록대부는 중의대부로 바뀌었 고, 대중대부 이하 중대부, 중산대부, 조의대부, 조청대부, 조산대부는 문종 30년의 문산계를 그대로 사용하였다. 한편 충렬왕 6년 2차 일본 정벌과 관련하여, 원에서는 고려의 관료들에게 원의 관 직을 하사하고 일본 정벌에 참여하도록 하였다. 당시 고려의 문산계는 원의 문산계와 그 명칭이 같은 것이 많았었다. 고려의 관료이면서 원으로부터 관직을 받게 됨에 따 라, 양자간의 충돌, 즉 위계질서 상의 문제가 생길 여지가 있었다. 그리하여 충렬왕 7년, 다시 문산계를 개정하였다. 그 결과 대부계는 광정․봉익․정헌․정승․조의․영렬․중렬․ 조봉․조현․조청․조산대부로 변화되었다. 충렬왕대에는 두 차례에 걸쳐 문산계가 변화되었다. 충렬왕대 문산계는 그 명칭이 고려전기와 많이 달라졌다. 그렇지만, 충렬왕대 문산계는 문산계와 관직의 품계가 일 치하지 않고, 11등급의 대부계를 차례차례 모두 받지 못하고, 같은 관직이라도 서로 다른 문산계를 받는 등 그 운영 방식은 고려전기와 같았다 This article attempts to restore the Mun’san-gye rank system in the first and seven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and among them, the Dae’bu-gye section of eleven ranks, on the basis of in-grave epitaphs from the Goryeo dynasty. In the first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the Mun’san-gye rank system was revised in midst of the demotion of the political system by Yuan. Therefore, Geumja-gwang-rok-daebu(金紫光祿大夫) was changed into Gwangjeong-daebu(匡靖大夫), Eun-cheong-gwang-rok-daebu(銀靑光祿大夫) was into Bongik-daebu, and Gwang-rok-daebu(光祿大夫) into Jung-ui-daebu(中義大夫). Below Daejung-daebu(大中大夫), Jungdaebu(中大夫), Jungsan-daebu(中散大夫), Joui-deabu(朝議大夫), Jocheong-daebu(朝請大夫), and Josan-Daebu(中散 大夫) used the same Mun’san-gye rank system from the thirtieth year of the reign of Munjong. Meanwhile, in relation to the second conquest of Japan in the six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Yuan awarded the public offices of the dynasty to the governmental officials in Goryeo and made them join the conquest. At that time, the Mun’san gye rank system in Goryeo had many same titles with the Mun’san-gye rank system in the Yuan dynasty. As they received the public offices of Yuan as Goryeo officials, there might be mutual conflicts, such as clashes between the two hierarchies. Therefore, in the seventh year of Chung’ryeol-wang’s reign, the Mun’san-gye rank system was revised again. As a result, the Dae’bu-gye class was changed into Gwangjeong․Bongik․ Jeonghun(正憲)․Jeongseung(正承)․Joui․Yeongryoel(榮烈)․ Jungryeol(中烈)․Jobong(朝奉)․Johyeon(朝顯)․Jocheong and Josan-dae’bu. There were two revisions in the Mun’san-gye rank system during the reign of Chung’ryeol-wang. The titles in the Mun’san-gye system during Chung’ryeol-wang’s reign were much changed from the early Goryeo dynasty. However, its operation ways were same as the early Goryeo dynasty in the following ways: the ranks of the offices in the Mun’san-gye rank system were not identical with the Mun’san-gye rank system, the Dae’bu-gye class of 11 ranks was not received sequentially by all, and same offices received separate Mun’san-gye rank syste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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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충렬왕대의 시대상황과 음악정책

        이강한(Lee Kang Hahn) 고려사학회 2014 한국사학보 Vol.- No.55

        고려후기 충렬왕의 재위기간(1275-1307)에는 여러 다양한 악곡과 가무가 창작, 연주되었고, 이에 대해 국문학계와 국악학계가 여러 다양한 연구를 진행해 왔다. 그를 통해 충렬왕대의 음악이 전란과 사회분열을 극복하고, 이전 상황의 회복을 기도한 것이었음이 지적된 바 있다. 다만 음악정책의 맥락 변화를 따지기 위해서는, 당시의 여러 상황들에 대한 역사적 진단이 필요하다. 본고에서는 <쌍화점>으로 대변되는 1270년대말의 시대상황과 과제, <태평곡>과 “상화”관행에서 드러나는 1290년대 중~후반 충렬왕과 신료들의 문제의식, 그리고 <쌍연곡>에서 드러나는 13세기말~14세기초의 상황 등을 검토하였다. 충렬왕대 30여년을 시기구분해 본다면, 원제국과의 관계가 시작되던 혼선기, 전란종식후 외교관계가 형성되던 안정기, 그리고 원제국 중심의 질서가 구축 되고 그러한 세계질서의 일부분으로서의 고려의 위상이 정립되던 시기 등으로 세분될 수 있다. 충렬왕대의 음악정책은 각각의 시기에 전통 수호, 국정 세련화, 외교관계 정립 등에 기여한 것으로 판단되며, 시기별로 속악(향악), 당악, 아악이 차례로 활용되었음이 흥미롭다. 아울러 충렬왕의 음악정책이 원제국 음악정책의 개시에 발맞춰 시작된 후, 시기별로 나름의 연동성을 보였던 점도 주목된다. 1270년대의 향악 및 1290년대의 당악 정비는 고려 속악 및 의종대 당악이 고려말 공민왕대로 이어지는 것을 가능케 하였고, 1300년대의 양상 변화는 충선왕대 음악정책의 ‘아악’으로의 중심 이동을 추동한 것으로 생각된다. 그런 점에서 충렬왕대를 고려후기 음악정책사의 시발점으로 평가할 수 있을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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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후기 ‘충렬왕대 문산계(文散階)’의 구조와 운용 - 대부계(大夫階)에 대한 검토를 중심으로 -

        이강한 진단학회 2012 진단학보 Vol.- No.116

        Past studies of the Goryeo dynasty's Mun'san-gye(文散階) Rank System have concentrated their attention upon the “early days" rank system(the 11th and 12th centuries), and not the “later" ones. But the “new" rank system of the 13th and 14th centuries, which continued to change 3 or 4 times, lasted over a century, and therefore deserves better attention. In this article, the Mun'san-gye system that was launched during the reign of King Chung'ryeol-wang, and which also initiated the ‘Later days'Mun'san-gye system in general, is examined. First, partial restoration of the Chung'ryeol-wang Mun'san-gye structure, the Dae'bu-gye section to be exact, is attempted. Other than Gwang’jeong and Bong'ik Dae'bu figures, which are confirmed by official records such as Goryeo-sa(History of Goryeo), we can determine the existence of other ranks such as Jeong'heon, Jeong'yun,Yeong'ryeol, Jung'ryeol, Bong'ryeol, Jo'eui, Jo'bong, Jo'jeong, and Jo'hyeon Dae'bu figures,by examination of all the in-grave epitaphs that remain today. Second, examination of the operations and their meaning of the Chung'ryeol-wang Mun'san-gye system reveals that it changed the past system considerably, mostly in two ways. It rectified the age-old problem of the early days rank system, which continued to show a rather huge discrepancy between the grade of the posts(“Gwan'jik, 官職") and grade of the ranks(“Gwan'gye, 官階"). Also, due to some changes made to the authority and status of the officials of the Mil'jik-sa office(“Chu'shin, 樞臣" and “Seung'ji, 承旨")in the 13th century, not only the highest part of the Dae'bu-gye section but the other parts as well were ‘elevated' during king Chung'ryeol-wang's reign in the end of the 13th century, and led to a noticeable phenomenon in the early 14th century, in which the Dae'bu-gye section was literally 'compressed,' compared to its early standards. 종래의 문산계 연구는 주로 고려 전기에 집중돼 왔다. 고려후기에 대한 주목은 상당히 적었다. 그러나 ‘고려후기형’ 문산계의 존속기간이 100여년이 넘었음을 고려할 때, 후기 문산계에 대한 검토가 시급한 상황이다. 본고에서는 고려후기 문산계의 시초 격이라고 할 수 있을 ‘충렬왕대’의 문산계를 검토하였다. 우선 충렬왕대 문산계 중 대부계의 구조를 복원해 보고자 하였다. 『고려사』에 남아 있는 광정대부와 봉익대부 이외에, 고려 묘지명 자료를 통해 정헌, 정윤, 영렬, 정승, 중렬, 봉렬, 조의, 조봉, 조정, 조현대부 등을 확인하였다. 아울러 그 운용 및 의미에 대한 검토를 통해, 충렬왕대의 문산계가 크게 2가지 지점에서 종래의 문산계를 크게 바꾸어 놓았음을 확인하였다. 충렬왕대 문산계는 종래 문산계 운용상의 오랜 고질 증상이었던 관계-관직 간 품급차를 현저하게 줄였다. 아울러 13세기 이래 추신과 승지들의 위상이 상승한 결과 충렬왕대 상, 하위권 관계들의 위상이 변동한 것으로 보이는데, 그 결과 14세기 이후 ‘대부계’의 하한이 상향 조정되어 대부계가 전반적으로 압축되는 배경이 마련된 것으로 평가된다.

      • KCI등재후보

        원 간섭기 원종ㆍ충렬왕의 정치적 행적 –김방경의 삼별초 정벌, 일본원정을 중심으로–

        이정신 (사)한국인물사연구회 2008 한국인물사연구 Vol.10 No.-

        고려왕조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황제국으로 칭하고 요, 송, 금과의 외교에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는 당당함을 지닌 국가였다. 그러나 몽고가 침략하여 강화를 맺으면서 상황은 달라져 고려는 복속국의 형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의 고려국왕은 원종과 충렬왕이었다. 원종 은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을 끝맺고 원 간섭기에 들어선 이후 최초의 군주이다. 그는 1235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259년 강화를 요청하러 몽고에 갔다가 고종의 죽음으로 이듬 해 귀국해 즉위하였다. 1260년에는 아들 諶을 태자에 책봉하여 몽고에 보내는 등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종의 정책은 당시 무신집정자 임연의 반대에 부딪혀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원의 도움으로 임유무를 제거하고 개경환도를 실현하였다. 이에 고려가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데에 삼별초가 반발했으나 3년 만에 진압하였다. 그는 재위 중에 무신집정자들의 전횡을 벗어났으며,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였지만 모두 몽고의 힘을 빌렸다. 이로서 원종은 몽고의 군사력으로 왕권을 지탱함으로서 원 복속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도 원종대가 강압적이며 외면적인 지배를 당했다면 충렬왕대에는 부마국이 되어 일본정벌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원의 복속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 뒤를 이은 충렬왕대에는 일본정벌에 필요한 제반 경비와 인원을 부담해야 했다. 몽고의 1차 東征 목표는 일본이라기 보다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지만 고려는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2차 東征도 충렬왕이 앞장서서 주도하였는데 기왕 함께 정벌할 것이라면 적극 나섬으로서 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몽고의 1‧2차 일본정벌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가 원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원의 고려간섭을 보다 유연하게 하였으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충렬왕은 부마지위를 이용하여 국왕측근세력과 재추 및 일부 신진관료들을 기반으로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원은 고려 왕을 견제하기 위해 책봉권을 강화하였다. 충렬왕 이후 고려는 원에 의존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김방경 등 고려 관원 또한 이에 대한 저항의식은 보여지지 않는다. 고려는 이제 내재적으로까지 원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 KCI등재후보

        원 간섭기 원종·충렬왕의 정치적 행적 : 김방경의 삼별초 정벌 일본원정을 중심으로

        이정신(Lee Jung-Shin) 한국인물사연구소 2008 한국인물사연구 Vol.10 No.-

        고려왕조는 원 간섭기 이전까지는 황제국으로 칭하고 요, 송, 금과의 외교에서도 조금도 굽힘이 없는 당당함을 지닌 국가였다. 그러나 몽고가 침략하여 강화를 맺으면서 상황은 달라져 고려는 복속국의 형태로 들어가게 되었다. 이때의 고려국왕은 원종과 충렬왕이었다. 원종 은 고려가 몽고와의 전쟁을 끝맺고 원 간섭기에 들어선 이후 최초의 군주이다. 그는 1235년 태자로 책봉되었으며 1259년 강화를 요청하러 몽고에 갔다가 고종의 죽음으로 이듬 해 귀국해 즉위하였다. 1260년에는 아들 諶을 태자에 책봉하여 몽고에 보내는 등 원활하게 국교를 수립하고자 노력하였다. 그러나 원종의 정책은 당시 무신집정자 임연의 반대에 부딪혀 폐위당하는 수모를 겪기도 했다. 그는 원의 도움으로 임유무를 제거하고 개경환도를 실현하였다. 이에 고려가 원의 속국으로 전락하는 데에 삼별초가 반발했으나 3년 만에 진압하였다. 그는 재위 중에 무신집정자들의 전횡을 벗어났으며, 삼별초의 항쟁을 진압하였지만 모두 몽고의 힘을 빌렸다. 이로서 원종은 봉고의 군사력으로 왕권을 지탱함으로서 원 복속의 시발점이 되었다. 그래도 원종대가 강압적이며 외면적인 지배를 당했다면 충렬왕대에는 부마국이 되어 일본정벌에 동참하는 과정을 통해 원의 복속이 더욱 강화되어 갔다. 그 뒤를 이은 충렬왕대에는 일본정벌에 필요한 제반 경비와 인원을 부담해야 했다. 몽고의 1차 東征 목표는 일본이라기 보다 고려의 군사력을 약화시키려는 것이었지만 고려는 그대로 따르지 않을 수 없었다. 이어서 2차 東征도 충렬왕이 앞장서서 주도하였는데 기왕 함께 정벌 할 것이라면 적극 나섬으로서 원의 전폭적인 지지를 이끌어내고자 하였다. 몽고의 1·2차 일본정벌은 비록 실패했지만 고려가 원의 정책에 적극 호응하는 모습을 보여주어 원의 고려간섭을 보다 유연하게 하였으며 왕권을 강화시켰다. 충렬왕은 부마지위를 이용하여 국왕측근세력과 재추 및 일부 신진관료들을 기반으로 왕권을 확립하였으며, 원은고려 왕을 견제하기 위해 책봉권을 강화하였다. 충렬왕 이후 고려는 원에 의존하는 자세가 더욱 심화되어 갔으며 김방경 등 고려 관원 또한 이에 대한 저항의식은 보여지지 않는다. 고려는 이제 내재적으로까지 원 지배하에 들어가게 되었던 것이다. Koryŏ Dynasty had been the kingdom which, claiming to empire, had continued its unyielding stances toward the northern dynasties of Khitan Liao, Chinese Sung and Jurchen Kum. With the formation of 'harmonious relation' with invading Mongolian empire, however, Koryŏ kingdom got subordinated to the empire and remained so under the reign of Koryŏ Wŏnjong and Chungryŏrwang. Wŏnjong was the king who concluded the war with Mongolian empire, resulting in the subordination of his own kingdom to the empire. He earned the title of prince in the year of 1235. Five years later, he went to Mongo to form the new, harmonious relation with Mongolian empire only to, next year, come back to his country because of the death of reigning Kojong. In 1260, right after his enthronement, Wŏnjong, bestowing the princeship upon his son Shim, dispatched the prince to Mongolian empire to establish the formal dynastic relation with the empire. This police let the king face his humiliating dethronement forced by contemporary military governor Yim Yŏn. In this situation, Wŏnjong, getting rid of powering general Yim Yu-mu with the aid from Mongolian empire, recovered his throne and moved the capital city back to Kaesŏng. Also, he quelled the upnsmg of Sambyŏlch'o which remained opposed to and fighting, for three years, against the subordination of Koryŏ dynasty to Mongolian empire. Then he succeeded in recovering his kingly power from military hands with great miliary helps from the empire, leading to the subordination of his own kingdom to the empire. In the reigning years of succeeding Ch'ungryŏrwang, Koryŏ became Pumaguk meaning son-in-law kingdom, subordinating itself to Mongolian empire more than ever. Koryŏ had, to bear almost all the burdens required for Mongolian subjugation of Japanese kingdom. The first campaign was aimed at the attrition of Koryŏ military potentials rather than the conquering of Japan. Despite this, Koryŏ had to engage itself in the first campaign. The second campaign was initiated by Ch'ungryŏrwang with the expectation that his active engagement in the forced war would benefit him with the full support from Mongolian empire. Setting apart the progress of the campaigns which ended with the ultimate failure, the active engagements of Koryŏ dynasty eased the Mongolian grip on the dynasty while strengthening Ch'ungryŏrwang's royal power and authority. The king took the advantage of his matrimonial relation with Mongolian royal family to establish his own power and authority which was supported by his near relations and figures, top-rank officials, and a few of young officials. This domestic progress was checked by the Mongolian authoritative power for granting the royal title or Ch'aekbonggwŏn in Korean. This resulted in the increasing dependency of Koryŏ kingdom after Ch'ungryŏrwang upon Mongolian empire. Now the kingdom, including its officials such as Kim Pang-kyŏng and others, showed no opposition to not only Mongolian empire but also the contemporary situation. This tells us that Koryŏ kingdom after Chungryŏrwang came to be internally mastered by Mongolian empire unlike Koryŏ before the king such as the Koryŏ reigned by Wŏnjong where the kingdom got under the forced but external controls by Mongolian empi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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