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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기녀 수작시조의 표현 특성과 그 의미

        최지혜(Choi, Ji-hye) 한국고전여성문학회 2021 한국고전여성문학연구 Vol.- No.43

        기녀 수작시조에는 상대 남성과의 결연(結緣)을 위한 과감한 언어 표현 양상이 다양하게 드러난다. 본고에서는 이러한 점에 주목하여 기녀 수작시조에 나타난 표현 특성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자 하였다. 기녀 수작시조는 한우의 시조 1수, 진옥 1수, 금춘 2수, 다복 1수로 총 5수가 존재하지만, ‘주고받음’을 통해 내용 맥락이 완성되는 수작시조의 기능적 특성상 상대 남성인 임제, 정철, 박계숙, 김수장의 작품까지 포함하여 그 특성을 파악할 필요가 있다. 임제와 한우의 수작시조의 경우, 기녀의 이름을 활용하여 적극적으로 상대방과의 결연 의사를 타진하는 것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문학적 재치와 적극성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정철과 진옥의 수작시조의 경우, 이름을 활용한 노골적인 성애(性愛) 표현을 통해 작품에 나타난 과감하고 주도적인 모습을 확인해볼 수 있었다. 방직기의 신분이었던 기녀 금춘과 박계숙의 수작시조에서는 무반에 대한 희롱을 통해 관계의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주도해나갔던 기녀 시조의 면모를 확인해볼 수 있었다. 다복과 김수장의 시조는 다소 예외적이다. 한우나 진옥, 금춘의 작품과는 달리 다복의 시조에서는 적극적이거나 과감한 성애 표현 등이 잘 드러나지 않는다. 이는 다복이 해당 시조를 창작할 당시 수작을 반드시 의도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으로 보인다. 원망의 정서를 통해 그리움을 드러낸 다복의 시조에 김수장이 이후 화답시조를 지음으로써 결과적으로 수작시조로서의 기능을 획득하게 된 예외적 상황에 따라 다른 수작시조과는 그 표현 특성에 차이를 보이게 된 것이다. 기녀 수작시조의 경우 애정의 정서를 기반으로 한다는 점에서는 다른 기녀 시조와 유사하다고 볼 수 있지만 과감하고 노골적인 애욕(愛慾)의 표출이라는 점에서는 분명한 차이를 보였다. 이는 결연이나 동침 성사라는 수작시조의 목적에서 기인한 것으로 앞서 다루었던 표현 특성 역시 이러한 목적을 성사시키기 위한 것으로 볼 수 있다. In the Ginyeo (aka, giesaeng, entertaining lady) Sujak-sijo (sijo with a purpose to attract men), there is a trend of bold linguistic expressions for the close ties with the male partner in diverse ways. Under this article, such a point was carefully considered to take a look at the characteristics of expression and Its Implication for the Ginyeo Sujak-sijo. For the Ginyeo Sujak-sijo, there is a total of 5 sijos, including 1 sijo of Han Woo, 1 sijo of Jin Wook, 2 sijos of Geum Choon and 1 sijo of Da Bok, but through ‘give and take’, the works would be completed with the context of contents in its functional feature, there is a need to find out the characteristics with the work products of male partners, namely, Im Je, Jeong Cheol, Park Gye-sook and Kim Soo-jang. For the works of Im Je and Han Woo, the name of the Ginyeo was facilitated to actively knock on the intends of the counterpart for a romantic relationship in a way of confirming the wit and positive nature in literature as shown on the Sujak-sijo. For the works of Jeong Chel and Jin Wook, the erotic features of their Sujak-sijo could be learned through the explicit sexual expression by utilizing the name. In the Sujak-sijos of Ginyeo Geum Choon and Park Gye-sook who had the status of Bangjikgi, it disclosed the aspect of actively initiating the mood of relationship through the jeering against military nobility. For the case of the Ginyeo Sujak-sijo, in the aspect that it is based on the sentiment of affection, it could be seen as similar to other Ginyeo sijos, but in the aspect of expressing bold and explicit sexual desire, there is a clear difference. This is attributable to the fact that it is caused by the purpose of Sujak-sijo as the goal to have a relationship or sleeping together that the expression features as shown earlier was considered to accomplish such purpose as well.

      • KCI등재

        기녀 수작(酬酌)시조의 변모와 그 의미

        정흥모 ( Jung Heung-mo ) 한민족문화학회 2016 한민족문화연구 Vol.56 No.-

        이 글은 기녀 수작시조를 대상으로 하여, 이 작품들의 시대적 변모 양상과 그 의미를 검토한 것이다. 기녀수작시조란 ① 기녀와 특정한 남성이 서로 주고받은 시조, ② 기녀가 특정한 남성을 그리워하며 지은 시조, ③ 남성이 특정한 기녀(혹은 기녀들)를 그리워하거나 그들을 염두에 두고 지은 시조들을 총칭하는 넓은 의미의 개념이다. 조선 전기의 기녀 수작시조들은 ①번과 ②번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대부분이었으며, 특정한 기녀와 특정한 남성이 일대일의 정서적 교류를 하거나 관계를 가지고, 그 과정에서 일어나는 감정을 노래했다. 조선 후기의 기녀 수작시조들은 ③에 해당하는 작품들이 주류였으며, 한 명의 기녀와 정서적 교감을 하고 교류를 하기보다는 한 남성이 다수의 기녀들과 교류하거나, 한 명의 기녀를 대상으로 시조를 짓기도 하지만 한 작가가 다수의 기녀 수작시조를 지어서 한 남성과 한 기녀의 배타적인 일대일 관계는 찾아보기 어려웠다. 기녀 수작시조의 이러한 조선 후기적 변화는 무엇보다도 상업적 유흥문화의 발달에 원인이 있다. 유흥문화가 발달하여 다수의 인원이 참여하는 호탕하고 질펀한 술자리 풍류가 많아졌다. 이런 자리에서 기녀들은 일대일 교감의 대상이라기보다 다양한 방법으로 술자리 풍류의 흥을 돋우는 존재로 소비된다. 이런 분위기에서는 운명적인 사랑이나 개인에 대한 애틋한 감정보다는, 술자리 풍류의 보조재로서의 `기생 일반`으로 인식하거나 일반적인 정념(情念)의 대상으로서 인식될 수밖에 없다. 조선 후기 기녀 수작시조의 변모는 이처럼 유흥적인 술자리에서 즉흥적으로 창작된 상황을 반영한 것이다. This is the study on the periodical changing aspect of Ginyeo Sujak(exchanging) Sijo and its meaning. Ginyeo Sujak Sijo collectively covers ① exchanging Sijo between a Ginyeo and a certain male, ② Sijo composed by a Ginyeo who misses a certain male, ③ Sijo compoesd by a male who misses a certain Ginyeo or more than one Ginyeo and keeps her(or them) in his mind. Ginyeo Sujak Sijo from Early Joseon Dynasty come mostly under the third category, and it is hard to find exclusive one-to-one relationship between one male and one Ginyeo because a writer(male) interacted with many Ginyeo rather than interacted with one Ginyeo and had emotional connection with her, or one writer composed many Ginyeo Sujak Sijo, even though there is still a case that a writer composed a Sijo on one Ginyeo. Above all, this change of Ginyeo Sujak Sijo in the late Joseon Dynasty results from the development of commercial nightlife and drinking culture. As nightlife and drinking culture developed, there were many magnanimous and effusive drinking banquets of refined tastes consist of a number of persons. In this setting, Ginyeo is consumed as a being who spiced up the refined tastes of drinking banquets rather than the object of one-to-one connection. This atmosphere made people recognize Ginyeo as a general Gisaeng who is seen as a mere supplement spicing up the drinking party or as an object of common passion, not as the love meant to be or as someone who aroused personal and tender affection. The changing aspect of Ginyeo Sujak Sijo in the late Joseon Dynasty reflected this improvised situation at recrea-tional drinking banquets.

      • KCI등재

        조선 후기 수작ㆍ기지 시조의 행방

        이영태(Lee Young-Tae) 한국시조학회 2008 시조학논총 Vol.28 No.-

        이 글은 조선 후기 수작ㆍ기지 시조의 행방을 해명하기 위해 출발했다. 특히 기녀의 태생적인 부분에 해당하는 수작ㆍ기지의 관계, 가창환경의 변화, 안정적 진술과 모험적 진술의 갈등 등을 고려하였다. 명기와 그렇지 못한 기녀의 차이는 分別品流와 衝尺人物에 대한 소양의 유무에서 생기는 것이었다. 명기는 수작ㆍ기지라는 모험적인 진술을 할 수 있었다. 상사를 진술할 때에도 ‘쌍방적 사랑의 감정’을 구사할 수 있었다. 이러한 경향은 조선 전ㆍ중기 기녀시조에서도 여전하다가 후기에 이르러 행방이 묘연해졌다. 이에 대한 원인을 分別品流와 衝尺人物이라는 소양과 관련해 기녀의 내/외적 요인에서 찾을 수 있었다. 기녀가 지녔을 分別品流와 衝尺人物이라는 소양이 조선 전ㆍ중기에 비해 뒤쳐졌을 가능성과 또는 그들이 상대하던 자들이 ‘감성과 당당함의 약화’를 요구했을 가능성이다. 한편 모험적 진술과 안정적 진술 사이에서 갈등했던 기녀들 대부분 후자를 택할 수밖에 없었지만 그것에 안주하지 않고 명기다움과 관련된 分別品流와 衝尺人소양을 자신에게 투사했던 기녀들이 있었다. 다른 모색을 자신에게서 찾아 그것을 연작이나 삶을 성찰하는 시조를 지을 줄 아는 기녀는 명기의 소양을 지녔다고 할 수 있다. This piece of writing is intended to explain the traces of Sijo(時調) of the witty conversation during conviviality in the late Joseon Dynasty. Especially, this is focused on the nature of the witty conversation, the change of lyrics, and the safe and adventurous statements of Sijo, which can tell the identity of Ginyeo(妓女). The difference of the famous Ginyeo(名妓) and the absurd Ginyeo(妓女) is shown by the extent of the knowledge of Bunbyeolpumnyu(分別品流) and Hyeongcheoginmul(衡尺人物). The famous Ginyeos could make an adventurous statement during the conviviality. The Ginyeos could also express "the mutual feelings about love" through the series. This tendency continued during the early and middle Joseon Dynasty, but disappeared during the late Joseon Dynasty. The reason may be found from the interior and exterior nature of Ginyeo s lives. They says the possibility that the knowledge of Bunbyeolpumnyu(分別品流) and Hyeongcheoginmul(衡尺人物) of Ginyeo(妓女) in the late Joseon Dynasty remains behind by comparison with that in the early and middle Dynasty, and the status of Ginyeo during the latter period is asked to be weakened. In the mean time, Ginyeos who agonized between the adventurous and safe statements in the late Dynasty could help choosing the safe statement, but some Ginyeos made an effort to acquire the knowledge of Bunbyeolpumnyu分別品流) and Hyeongcheoginmul (衡尺人物) the famous Ginyeo(名妓). These Ginyeo(妓女)s can keep the knowledge of the famous Ginyeo(名妓) by composing Sijo which show the love song or the self-reflection.

      • 영조조(英祖朝) 궁중 연향 기록과 도상

        송혜진(Song, Hye-jin) 한국음악문화학회 2016 한국음악문화연구 Vol.8 No.-

        본고는 영조 재위 52년간의 연향 관련 기사와 연조 때에 간행된 의궤와 궁중기록화를 근거로 영조조 궁중연향 설행의 계기와 시행과정, 연향의 종류와 특징을 살폈다. 영조조에는 정미진연(4년, 1728, 戊申), 기미진연(15년, 1739, 己未), 계해진연(19년, 1743, 癸亥), 갑자 진연(20년, 1744, 甲子), 을유수작(41년, 1765, 乙酉), 병술진연(42년, 1766, 丙戌), 기축진연(45년, 1769, 己丑), 계사진연(49년, 1773, 癸巳)이 시행되었다. 이밖에도 영조 49년 이후부터 승하할 때까지는 작은 규모의 연향이 수차례 더 있었다. 영조는 진연을 설행할 때 전 시기의 문헌과 의주에 준거 하는 일을 중시하고, 연향의 과정을 의궤와 기록화로 남겼다. 현재 영조 때의 진연 중 1744년의 진연과 1765년의 수작연이 각각 (갑자)진연의궤와 (을유)수작의궤로 남아있다. 아울러 ≪기사경회첩(耆社慶會帖)≫(1744년), ≪갑자숭정전진연도(甲子崇政殿進宴圖)≫(1744년), ≪종친부사연도(宗親府賜宴圖)≫(1744년), ≪영조을유기로연․경현당수작연도(英祖乙酉耆老宴․景賢堂受爵宴圖)≫(1765년), ≪영조병술진연도(*英祖丙戌進宴圖)≫(1766년) 등 5종의 기록화도 전한다. 이상의 영조조의 연향 관련 의궤와 기록화는 임진왜란 이후 연향의 전승사를 뒷받침해주는 중요한 전거들이다. 특히 영조 20년 갑자년에 이루어진 대전진연과 대비전 진연은 숙종조의 전례를 따른 것이어서 진연 형태의 지속성을 살필 수 있으며, 대비전 진연은 인조대에 편찬된 대비를 위한 풍정도감의궤와 영조 이후 정조 때에 혜경궁 홍씨의 회갑연을 기해 시행된 을묘원행정리의궤의 봉수당 진찬 기록 사이의 대비를 위한 유일한 진연 기록이라는 점에서 공연사적 의의가 높다. 또한 영조는 재위 기간 동안 이전의 전적을 참고하여 악기(樂器)를 제작하게 하고, 악학(樂學)과 음악 실무에 밝은 신료들과 심도 있는 악론(樂論)을 펼쳐 음악 정책을 살폈으며, 직접 악장을 지어 노래 부르게 하면서 연향 문화의 전통을 이어가는데 심혈을 기울였다. 이에 따라 임진왜란 이후 숙종대를 거쳐 온 전통을 계승하는 한편, 단절된 주요 의례와 연향을 재현하였다. 이 과정에서 대비전 진연과 자신의 기로소 입사기념 진연 등은 숙종조의 전례를 많이 따랐다. 동시에 사치와 유연(遊宴)을 경계하여 자신을 위한 대전 진연에서는 몸소 검약의 모범을 보이기 위해 연향의 절차와 규모를 줄이고, 주악 면에서도 연향에서 폐지하였던 아악(雅樂)의 사용을 부활시켰다. 아악의 연주와 춤을 갖춘 어연(御宴)과 수작(受爵)의 연향 기록은 전승이 단절된 선대왕의 제도가 후대에 어떻게 재현되는지를 알려준다는 중요한 사례이다. This study aims to lay a foundational for the historical study of performing arts in the eighteen century by evaluating the historical significance of uigwe and court painting during the reign of king Youngjo. The main concern of this paper lies in observation whether the uigwes and the court paintings tell us the differential aspects of the periodical transition or not. In detail, my question goes if it is possible to make distinction some of periodical traits and from those materials. In order to try to answer this question, I mainly studied and analyzed the Royal Court celebration events and programs of Youngjo’s rein. In the latter of Joseon, while the country had been under the hard times and chaotic situation caused by quiet a few foreign invasions, it was inevitable that the tradition of the Royal Court celebrations were also weakened however, in the times of the late 17th~18th Century, throughout the regimes of the King Sookjong, King Yongjo and King Jeongjo, most of the National celebration programs were represented and restored. Among them, King Yeongjo’s achievement was impressive in terms of his long period of rein for 52years. The six kinds of ceremonies had been recorded as a detailed form of uigwe and court paintings. From the observation of the Royal Court celebration Paintings in the late era of Joseon, a several specific traits are discovered. Firstly, in the King Yongjo period, the Royal Court banquet programs were just mostly repeat and following the former King Sookjong periods" styles. In the contrast, from the period of Jeongjo, the musical performance paintings and records showed a substantially different features from that of before King Yongjo. In conclusion, it is possible to define the era of King Jeongjo as the starting point of new musical history in Joseon Dynasty. Therefore when we divide the latter times of Joseon into two parts, the first period can be considered the times after the Japanese Invasion in 1592 (壬辰倭亂) to the era of King Yongjo, and the second half period can be said ever since the era of King Jeongjo to the end of Joseon Dynasty in the 19th Century.

      • KCI등재후보

        고전 시가 작품 해석의 몇 가지 국면에 관한 고찰

        김석회 ( Kim Seok-hoi ) 한국문학치료학회 2011 문학치료연구 Vol.20 No.-

        본고는 고전 시가 작품 해석의 몇 가지 국면을 살핀 것이다. 먼저, `상호텍스트성의 문제와 관련하여` 검토해 보았다. 작품이란 창작의 국면에서나 수용의 국면에서 허다한 텍스트들이 서로 침투하고 간섭하면서 상호텍스트적 맥락을 형성한다. 그것을 어떻게 다루느냐가 작품이나 작가의 해명에 중요한 열쇠가 되는데, 송강의 시조 몇 편을 사례로 해석의 갈림길과 그것이 의미하는 바를 타진해 보았다. 다음으로 `연행 판의 관습적 측면과 관련하여` 살펴보았다. 서화담과 황진이가 주고받은 것으로 설정되어 있는 시조와, 유혹하는 남성과 이에 호응하는 여성이 주고받은 시조 등 수작시조들의 해석 문제를 다루었다. 수작시조라는 사실을 간과하거나, 상황이나 장면 설정의 관습과 관행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을 때 발생할 수 있는 해석의 왜곡상을 분석해 보았다. 아울러 최근 학회서 쟁점이 되었던 <권주가>의 사설 변용 및 창의 전승에 관한 해석의 문제도 이런 측면에서 검토 정리해 두었다. 마지막으로 `전고 참조의 문제와 관련하여` 논의하였다. 주해나 주석 작업이 그것 자체로, 특히 프로젝트 분담의 형태로 이루어질 때에 발생하는 문제점은 이미 널리 알려져 있고, 실제 어떤 주석서나 주해서는 오류의 온상이 되거나 텍스트 왜곡의 주범이 되기까지 한다. 그러나 시간에 쫓겨 논문 작업을 하는 연구자들은 손쉽게 써 먹을 수 있는 주해서나 주석서에 전적으로 의존하는 경우가 많다. 그러나 이것은 매우 위험할 수가 있다. 조금이라도 미심하다 싶으면 좀 더 철저히 사실 확인을 하고, 전고와 배경에 대하여, 텍스트 문맥에 대하여, 재삼재사 숙고할 필요가 있다. 여기서는 가벼운 사례 하나를 다룬 것이지만, 좀 더 본격적인 문학론의 심화를 위해서는 주해 작업이나 논문 작업 모두 성실한 반성적 성찰이 요청된다 할 수 있다. The aim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aspects of classical poem`s interpretation. We have examined and surveyed three aspects. First is the aspects of inter-textuality. Second is the custom of performance. Third is the problem of citing historical source and cultural or literary source. In this case using the commentary books often makes trouble. These three all, connects with the validity and consistency of classical poem`s interpretation. In the case of interpreting classical poem`s, we should be careful for these three aspects.

      • KCI등재
      • 알코올과 범죄와의 상관성에 관한 연구 : 음주범죄에 대한 허용성과 관용적 인식을 중심으로

        김형중 한국시민윤리학회 2012 한국시민윤리학회보 Vol.25 No.2

        술에 대한 한국 사람들의 일반적인 인식은 물질로서의 개념보다는 음식으로 보는 경향이 있고, 음주 및 만취행동에 대한 태도는 사회적으로 대단히 관대하고 허용적이라고 볼 수있다. 그러나 과도한 음주가 사회와 개인에게 어떤 폐해를 가져오는지 정확하게 인식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다. 특히 우리나라 알코올 소비량은 세계2위이며, 음주인구의 확산 과 음주연령의 저연령화, 여성음주자의 증가 등 사회전반적인 문제로 확산되고 있다는 점을 들 수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리나라의 경우 음주에 대하여 왜 관대하고 허용적인가? 하는 근본적인 문제에 대하여 연구한 논문은 거의 없다는 점이다. 따라서 본 연구는 음주에 대한 허용성과 관용성이 어디서부터 사회적·문화적으로 형성되어 오늘날까지 계승되었는지 그 과정을 살펴보고, 그 논의를 바탕으로 그 대안책을 제시하고자 하였다. 특히 본 연구의 핵심주제라 할 수 있는 음주에 대한 허용성과 관용적 인식에 대한 논의부분은 역사적 접근 방법을 통하여 사회적·문화적 측면에서 고찰하였다. 끝으로 음주문화에 대한 허용과 관용성 문제에 대하여 법·제도적 측면에서 통제와 규제강화 그리고 금주와 절주 캠페인 등 시민의식전환운동이 필요함을 제시하였다. 다만 연구주제가 주는 개념자체가 경험적·실증적으로 증명하기 어렵고 종국에 가서는 사변적으로 흐를 위험성마저 있기 때문에, 이러한 점에서 본 연구의 한계점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는 점을 밝혀둔다.

      • KCI등재

        正祖를 弔喪한 百韻挽詞

        여운필 국문학회 2014 국문학연구 Vol.0 No.30

        The Namin poets' tradition of a hundred rhymes elegy come from Hiam Chae Paeng-yoon's poem had condoled with Songgok Yi Seo-woo in the early eighteenth century is a great queer event in the history of Sino-Korean poetry. The existence of a hundred rhymes elegy become known written by Namin poets only. But the fact that a work by a Noron poet was solemnly is worth notice. <The Elegy for the Keonneung> is a hundred rhymes elegy written by Seokjae Yun Haeng-im. This poem is worth checking for the reason of a work written by Noronsipa poet and also that of a condoling the King Jeongjo clearly. This thesis is a research for translation with notes and a critical study for characteristics of form and contents in it. By checking formal apparatus, meaning structure and expressive merits, this long poem as seven letters Baeyeul is worth being estimated an excellent work with fulfilling the nessesary conditions for not only as an general elegy but also as a monody for condoling a great king. 18세기 초에 希菴 蔡彭胤이 松谷 李瑞雨를 조상한 <松坡李參判輓, 七言百韻>을 지은 데서 발원된 남인시인이 남인선배를 조상한 백운만사를 7수에 이르도록 이어진 전통은 우리 한시사의 一大奇事라 할 수 있다. 이로 말미암아 간과하기 어려운 시사적 의의를 지닌 백운만사는 남인에 의해서만 지어진 것으로 알려져 왔으나, 노론시인이 지은 작품도 확인된다는 점은 주목할 만하다. 18세기 말의 시인인 윤행임이 지은 7언배율 백운만사인 <健陵輓詞>는 노론시파에 속하는 시인이 지은 작품이라는 점뿐만 아니라 탁월한 군주였던 正祖를 곡만한 작품이라는 점에서 검토할 만한 가치가 크다. 이 논문은 석재 윤행임의 7언배율 백운만사인 <건릉만사>의 전편을 역주한 데 이어,작품이 지닌 형식적·내용적 특성을 비평적으로 자세히 검토하고자 한 것이다. 석재의 <건릉만사>가 지닌 압운·평측·대장 등 제반 형식적 측면, 의미구조 및 그 세부적 전개양상, 표현적 특성을 검토한 결과, 7언율시 25수로 이루어진 200구에 이르는 장편배율인 이 작품은 곡만시 일반은 물론이고 시인이 오래 近侍하였던 뛰어난 군주를 위한 애도시에 요구되는 여러 제약과 난점을 극복하고 수작으로서의 요건을 두루 갖춘 시편이라고 평가할 수 있다.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선비들의 풍류방식과 문화공간 만들기

        정우락 영남퇴계학연구원 2014 퇴계학논집 Vol.- No.15

        조선시대 선비들은 위기지학(爲己之學)과 관련된 긴수작(緊酬酌)만 공 부한 것이 아니라, 시문과 예술, 취미와 여행 등 한수작(閒酬酌)에 해당 하는 것도 그들의 일상 속에서 향유하였다. 본고는 이 한수작에 주목하 면서 조선조 선비들의 풍류방식과 문화공간 만들기를 집중적으로 다룬 것이다. 오늘날의 경우로 말한다면 논리에 입각한 관념적 철학적 사유에 의한 것이 아니라 선비들이 풍류를 일상 속에서 어떻게 향유하였던가 하 는 부분을 주로 논의하였다는 것이다. 풍류는 고대의 국중대회(國中大會)에서 그 기원을 찾을 수 있는데, 이 것이 신라와 고려를 거쳐, 조선시대에 이르러 성리학에 입각한 선비들의 풍류로 성장하게 된다. 특히 선비들은 참된 인생의 의미를 자연과 결부 시켜 이해하고 있었다. 선비들의 풍류방식은 홀로 즐기는 것과 함께 즐 기는 것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홀로 즐기는 독락의 풍류 세계는 자기 에게로의 고립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바로 이러한 점에서 조선조 선비들 의 풍류방식은 ‘홀로’와 ‘함께’를 모두 온전히 하는 방향으로 설정되었다 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선비들의 문화공간 만들기는 점과 선을 통해 해석할 수 있다. 점을 중 심으로 한 문화공간은 특정 사물에 대한 집약적 관심을 통해 나타났는 데, 8경이나 10경 등의 집경시(集景詩), 혹은 석각문화로 확장되기도 했 다. 선을 중심으로 한 문화공간은 계류를 중심으로 발달하였는데, 구곡 문화가 대표적이다. 그러나 하류에 9곡이 설정되거나, 두 개의 계류에 9 곡을 동시에 설정하거나, 9곡이 7곡으로 축소되는 등 주자의 <무이구 곡>과는 다른 조선적 변용이 나타나기도 했다. 나아가 점과 선이 같은 지역에 공존하는 복합공간도 확인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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