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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청년 도쿠토미 소호의 정치사상: 『메이지 23년 후의 정치가의 자격을 논함』을 중심으로

        류애림(Ryu, Ae Rim) 한국동양정치사상사학회 2022 한국동양정치사상사연구 Vol.21 No.1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1863~1957)는 메이지 시대부터 전후까지, 오랜 세월동안 활약한 인물로, 역사가, 평론가, 시인으로 이름을 날렸다. 무엇보다 『국민의 벗(國民之友)』과 『국민신문』을 창간한 언론인으로 알려진 소호는 1910년 9월부터는 데라우치 마사타케 당시 총독의 요청으로 조선총독부 기관지인 경성일보의 감독을 맡기도 했다. 이러한 이유로 우리에게 도쿠토미 소호는 제국주의자, 또는 팽창주의자, 언론인으로 잘 알려져 있다. 이 글에서는 정치사상가 도쿠토미 소호에 초점을 맞추고자 한다. 청년기 저작 『메이지 23년 후의 정치가의 자격을 논함(明治二十三年後ノ政治家ノ資格ヲ論ス)』(1884)을 중심으로 소호가 인용하고 있는, 휘그 사관의 대표적 저술가 토머스 배빙턴 매콜리(Thomas Babington Macaulay, 1800~1859)의 저작을 함께 살펴본다. 이를 통해 휘그 사관의 특징 즉, 상황과 시세에의 적응, 대립적 관계의 두 개념의 투쟁으로서 역사를 보는 시각이 청년 소호의 사상 형성에 영향을 끼쳤음을 밝힌다. 나아가 매콜리의 영향을 받아 형성된 정치사상이 청년기 이후, 즉 제국주의자로 탈바꿈한 이후의 소호에게도 지속적으로 존재했음을 보이고자 한다. Tokutomi Soho (德富蘇峰, 1863-1957), one of the most eminent figures who played a remarkable part in Japanese history from Meiji era to the post-war period, was known as a historian, critic, and poet. Above all, Soho, a journalist who founded the magazine “Kokumin no tomo(国民之友)” and the newspaper “Kokumin Shimbun(国民新聞)”, also took over the supervision of the Gyeongseong Ilbo, the newspaper of the Japanese Government-General of Korea, at the request of then-Governor Terauchi Masatake from September 1910. For this reason, in Korea, Tokutomi Soho is known to us as an imperialist, or expansionist, journalist. In this article, I focus on the ‘political thinker’ Tokutomi Soho. With Soho’s early work “Discussing the Qualifications of Politicians after Meiji 23”(明治二十三年後ノ政治家ノ資格ヲ論ス, 1884), I discuss Thomas Babington Macaulay (1800~1859)’s works. Macaulay was the representative writer of the Whigs history, and his works were cited voraciously in Soho’s early works. Through this, I argue that the characteristics of whig historiography, understanding history as a struggle between the two concepts, emphasis on the adaptation to the current situation and the circumstance, had a great influence on the formation of Soho’s political thought. Furthermore, I intend to show that Sohos’s political thought formed under the influence of Macaulay continued to exist even after his early period of life, that is, after he transformed into an imperialis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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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書物 道樂家’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와 한국본

        박영미 ( Park Youngmi ) 우리한문학회 2021 漢文學報 Vol.45 No.-

        ‘書物道樂家’ 도쿠토미 소호는 1910년 언론통폐합을 위해 조선에 왔다. 도쿠토미는 1906년 창간된 『京城日報』 감독직으로 부임한 이후, 일본어 신문 『京城日報』, 조선어 신문 『每日申報』, 영자 신문 『Seoul press』만을 남겨 놓고 통폐합하여 버렸다. 조선에 체류하는 동안 도쿠토미는 한국본을 수집, 구매하였으며 이를 成簣堂文庫에 소장하였다. 성궤당문고 소장 한국본은 일찍부터 그 존재가 알려져 있었다. 그러나 실사가 이루어지지 않아 구체적인 전모를 지금까지 파악하지 못하고 있다. 본고는 성궤당문고 소장 한국본 조사를 위한 예비 단계로 이루어졌다. 본 고에서는 도쿠토미의 한국본 수집 경위, 소장한 한국본의 특징을 개관하며 아울러 도쿠토미의 한국본에 대한 연구 등에 대하여 알아보고자 하였다. 기존의 연구는 ‘일본 제국의 괴벨스’인 저널리스트 도쿠토미 소호에 집중되어 이루어졌다. 본고에서는 道樂이라고 할 정도로 책을 사랑한다고 했던 도쿠토미의 장서와 그의 목록, 관련 논저를 통해 그의 수집과 연구를 살펴 보았다. 도쿠토미의 수집과 연구 활동은 1910년 전후의 조선총독부의 고적조사 사업, 在朝재일본인들의 한국본 수집 및 연구도 동시에 고려하여 살펴보아야 할 것이다. 그리고 향후, 소장 서목의 목록화 작업을 통해 일본 제국의 지식인들이 가진 한국본 수집과 그 의미를 통찰할 필요가 있다. Tokutomi Soho came to Joseon in 1910 to merge the media. After Tokutomi took over as the director of 『京城日報』의, which was founded in 1906, it merged with only 『Kyozo Press(京城日報)』 in Japanese, 『Daily press(每日申報)』in Joseon, and 『Seoul press』 in English. Before this, Tokutomi purchased a collection of Shimada Khan and laid the foundation for the Seonggwedang(成簣堂文庫) Library. In addition, he expanded his books by collecting Chinese characters stored in Japanese temples and purchasing Western books. And a large amount of Joseon books were collected from Joseon. Joseon books, the collection of Seonggwedange, has been known for its existence since early on. However, as due It has not yet been properly investigated, the specific scale has not yet been identified. This study was conducted as the first step to investigate Joseon books housed in the Seonggwedang Library. We learned about the old books of Joseon collected by Tokutomi and the knowledge of the old books of Joseon and the inspection to find out about them. In addition, I tried to find the characteristics of several examples of Joseon books owned by Seonggwedang. Previous studies was focused on journalist Tokutomi Soho, Goebbels of the Japanese Empire. This paper attempted to show the appearance of Tokutomi, a collection and a reading. Tokutomi's collection and research were examined through his books, his list, and related thesis, which he said he loved books to the extent that it was called ‘enjoy good book’. Tokutomi's collection and research activities should be considered at the same time as the Joseon Governor-General's historical investigation project around 1910, and the collection and research of Joseon books by the Japanese. In addition, due investigation and cataloging of the Seonggwedang Library must be carried out in the fu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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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초기 『매일신보』 연재소설 삽화면의 풍경 (1)-최초의 삽화가 야마시타 히토시(山下鈞)-

        송민호 ( 宋敏昊 )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6 한국학연구 Vol.0 No.43

        본 논문은 일제 강점이후, 도쿠토미 소호 감독 체제 하의 『매일신보』에서 이루어진 연재소설과 삽화의 도입이라는 국면에 주목하여, 감독인 도쿠토미의 주선 하에 조선에 건너와 삽화를 그렸던 일본인 화가들의 삽화 활동 양상을 다룬 것이다. 지금까지 선행 연구를 통해, 식민지 조선에서 최초의 신문연재소설 삽화는 1912년 1월 1일 이해조의 소설인 「춘외춘」에 삽입된 것이라는 사실 정도는 알려져 있었으나, 이 삽화가 어떤 일본인 작가에 의해 그려진 것인가 하는 사실이라든가, 당시 이 신문에 삽화가 도입된 도쿠토미가 행했던 일련의 언론 정책과 어떤 관련성을 갖는가 하는 문제 등은 거의 해명된 바 없었다. 본 논문은 『매일신보』 초창기 연재소설에 도입된 삽화를 담당했던 일본인 화가들의 활동 양상과 배경, 당시 이 신문 연재소설의 작가였던 이해조, 조중환, 이상협 등과의 상관성을 밝히기 위한 일련의 연구의 첫 번째로, 가능한 실증적인 접근을 통해 당시 연재소설 삽화를 그렸던 일본인 작가들의 면면을 밝히고, 그들의 상세한 활동 내역을 밝히는 것을 목적으로 하였다. 본 논문에서는 지금까지 선행 연구에서 구체적으로 확정되지 않았던 바 1912년부터 최초로 『매일신보』 연재소설에 삽화를 그린 것이 도쿠토미 소호의 영향 하에 일본에서 건너와 『경성일보』 회화부에 근무하고 있던 야마시타 히토시라는 사실을 밝혔고, 아울러, 야마시타 이후 『매일신보』 연재소설 삽화란을 채웠던 이들의 활동양상이나 내용에 대해 확정하였다. 그간의 선행 연구를 통해 삽화를 그렸던 일본인 화가인 쓰루타 고로라든가 마에카와 센빤 등의 활동에 대해서는 부분적으로 확인된 바 있었으나 구체적으로 어떤 작가들이 어떤 삽화를 그렸는가 하는 문제라든가 그들의 작품 경향이 환기하는 면면에 대해서는 명확히 확정된 바없었다. 특히 야마시타 이후 부임한 쓰루타 고로, 야나기타 겐키치, 마에카와 센빤 등의 서양화가들은 대부분 도쿠토미 소호가 경영하던 도쿄의 『국민신문』 회화부의 주임인 히라후쿠 햐쿠스이의 추천으로 부임하였는데, 야나기타 겐키치의 경우에는 도쿄에서 근무하다가 쓰루타를 돕기 위해 조수로 왔다가 조중환, 이상협의 소설 몇 편의 삽화를 맡았고, 마에카와 센빤은 조선에 와서 1편의 소설 삽화를 그렸으나 그 뒤에는 아직 확정되지 않은 사정에 의해 더 이상 삽화를 그리지 않았던 것이다. 본 연구는 『매일신보』 삽화란에서 일어난 국적과 언어를 넘어선 협업 양상이라든가 글쓰기와 이미지 사이의 교호 관계를 살피는 단계로 나아가기 위한 첫 번째 단계의 것으로, 향후 강점 초기 일본의 식민지 언론 정책과 당시 신문 연재소설 삽화란에서 일어난 다각적인 현상들의 의미를 밝히는 방향으로 나아가고자 한다. 本研究は日帝強占以降、徳富蘇峰監督体制下の『毎日新報』で行われた一連のメディア戦略の一つである連載小説と挿絵の導入という局面に注目して、監督である徳富が斡旋して朝鮮に渡り、挿絵を描いた日本人画家たちの挿絵の活動について扱ったものである。 今までの関連研究を通して、植民地朝鮮での新聞連載小説挿絵は李海朝の小説である。「春外春」の1回(1912年1月1日)に初めて挿入されたという事実が知られているが、この挿絵を描いた人は誰なのかという問題や、そしてその挿絵は徳富蘇峰のメディア政策とどのような関連性を持つのかという問題などはほとんど解明されたことはなかった。この論文では、1912年に当時の連載小説挿絵を描いたのが山下鈞だったことを明らかにし、彼が徳富蘇峰の影響を受けていた『京城日報』絵画部に勤務している途中に挿絵を描くようになったという状況を解明した。 また本論文では、これに合わせて、『毎日新報』連載小説挿絵と描いた人々の活動や内容に関しても調査した。これまで山下鈞、鶴田吾郞や前川千帆などの活動については、部分的に知られていたが、具体的にどのような作家がどのような挿絵を描いたのかという問題は明確に確定されたことはなかった。山下以降『京城日報』絵画部に赴任した鶴田吾郞、前川千帆などの洋画家たちは、ほとんど徳富蘇峰が経営していた東京の『国民日報』絵画部の主任であった平福百穗の推薦で赴任したが、柳田謙吉の場合には、『国民日報』に勤務し、鶴田吾郞を支援するために助手として来た。そして、趙重桓(1863~1944)、李相協(1893~1957)のいくつかの小説挿絵を引き受た。前川千帆は朝鮮に来て、ただ小説1篇の挿絵だけを描いた。しかしその後事情は明確でわないが、それ以後は挿絵は描かなかた。 本研究では、後に毎日新報の揷絵欄で起きた国籍と言語を超えたコラボレーションやエクリチュール(écriture)とイメージ(image)との間の関係を探るための最初の段階ながら、今後には主しとして植民初期の日本の対植民地言論政策に最も大きな影響を与えた徳富蘇峰についての研究を進めていくための基礎としての意味を持つものであ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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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도쿠토미 형제와 『불여귀』에 대한 고찰 -애정과 불신으로 이루어진 이례적인 출판-

        이시즈카 유카 한국일본어교육학회 2022 日本語敎育 Vol.- No.100

        도쿠토미 로카의 베스터셀러 소설 『호토토기스』(1898-1899)는 1912년 한국에서 『불여귀』로 번역출판되었으며 큰 인기를 얻었다. 그러나 『불여귀』는 기존 출판물과는 다른 형태를 보였다. 본 논문에서는 『불여귀』의 출판에 대해서 토쿠토미 로카와 그의 형인 소호의 관점에서 『불여귀』와 기존 출판물과의 차이점을 알아보고자 한다. 2장에서는 기존 자료를 토대로 로카, 소호, 한국과의 관련성에 대해 조사하였다. 3장에서는 『호토토기스』가 한국에서 출판된 이유를 로카의 한국관 등을 기반으로 분석하였다. 4장에서는 『불여귀』 기존의 작품들과 다른 3가지 수수께끼, 즉 1) 단행본으로 출판된 점, 2)일본에서 인쇄 및 발행된 점, 3)번역소설이라는 점에 대해 조사하였다. 그 결과 다음의 사항을 알게 되었다. 단행본으로 출판된 이유는 당시 출판법으로 인한 출판사의 경영난 악화로 인해 수익 증가를 위한 단행본 출판이 급증하였다. 『불여귀』를 상하편으로 구성하여 하편까지 독자들이 보도록 유인하였으며 당시 해외에서 단행본 출판을 참고로 하였을 것으로 판단된다. 두 번째로 일본에서 인쇄 및 발행된 이유로 로카의 의향이 강하게 반영된 것으로 보인다. 마지막으로 불여귀가 예외적으로 번역의 형식을 선택한 원인으로 소호의 영향력이 크게 작용하였을 것으로 보인다. 소호는 번역, 번안에 능숙하였으며 번역 방법에 대해서 자세하게 지시한 가능성이 생각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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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소년』의 "영웅" 서사와 동아시아적 맥락

        윤영실 고려대학교 민족문화연구원 2010 民族文化硏究 Vol.53 No.-

        이 논문은 『소년』에 흔적을 남긴 여러 겹의 동아시아 텍스트들을 더듬어, '국가적 영웅'과 '산업적 영웅', '영적 영웅'이라는 근대의 세 가지 영웅상이 제국에서 식민지로 '번역'되는 양상을 살펴보았다. 근대 국민국가의 '국가적 영웅'을 기념함으로써 국민의 일체감을 다졌던 19세기 유럽의 건국서사들은 1900년대 각기 제국, 반식민지, 식민지로 이행하고 있던 일본, 중국, 조선에서 서로 다른 방식으로 변용된다. 도쿠토미 소호가 메이지 20년대의 무명영웅론을 폐기하고 '국가적 영웅'의 추구로 돌아선 것에 비해, 양계초의 무명영웅은 혁명의 열사를, 신채호와 최남선의 무명영웅은 국망 이후에도 존속할 '정신적 국민'을 지시하고 있었다. 한편 최남선이 정신적 국민의 양성을 위해 도입한 수신담론은 후쿠자와 유키치의 '독립'을 수신의 목표로, 도쿠토미 평민사회론의 '자조'와 '노력'을 수신의 방법으로 강조하는 가운데 점차 '산업적 영웅'론에 근접해갔다. 1900년대 말 도쿠토미와 우치무라 간조의 복합적 영향 아래 제기된 최남선의 지리론에서 '식민지 민족'은 세계 구원의 사명을 띠고 고난당하는 '영적 영웅'의 형상으로 발견된다. 이 일련의 번역을 통해 식민지는 제국의 담론을 탈구시키고 전유하면서, 제국의 모순(이데올로기의 균열)과 그 모순 너머(유토피아 충동)를 비추는 '깨진 거울'로 기능하고 있다. This article examines 'national', 'industrial' and 'spiritual' heroes in Sonyeon(『少年』), each of which was 'translated' from the west through Japan to Joseon(Korea). Admiring and commemorating 'national heroes' to enforce national solidarity in the 19th century Europe was replaced by the attempt to form 'unknown heroes' in the early 20th century East Asia. Although the idea of 'unknown heroes' was abolished by its first advocate, Tokutomi Soho(德富蘇峰) after he converted from democratism(平民主義) into imperial nationalism, it was appropriated by Liang Ch'ich'ao(梁啓超) to indicate patriotic martyrs and by Sin Cheho and Choi Namsun to interpellate 'the mental nation' without the nation-state. In order to form 'the mental nation', Choi introduced moral disciplines and, as a result, his heroism could encompass 'industrial heroes.' 'Independence' and 'endeavor' which Choi regarded as the object and the means of the moral discipline originated from Fukuzawa Yukichi(福澤諭吉)and Tokutomi Soho. However, the two Japanese intended to make 'civil subjects' with those virtues while Choi focused on them to make subjects protesting against the colonial regime. Finally, under the influence of Uchimura Kanzo(內村鑑三)', Choi discovered the colonial nation(民族) as a kind of 'spiritual hero', who suffered ordeals to accomplish god's mission of saving the world. Through a series of 'translation', the colony dislocated and appropriated imperial discourses and functioned as a broken mirror which reflected both contradiction of the empire(fissure of ideology) and its frustrated possibility(drive for Utop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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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성일보,매일신보 사장 시절(1914.8-1918.6)의 아베 미쓰이에(阿部充家)

        이형식 ( Hyoung-sik Lee ) 고려대학교 역사연구소(구 역사학연구회) 2016 사총 Vol.87 No.-

        1914년 8월 아베는 요시노 다자에몬의 후임으로 4대 경성일보 사장에 취임했다. 조선총독부의 요시노 사장에 대한 불만이 팽배해지자 조선총독부와의 의사소통을 강화하고자 도쿠토미는 국민신문에서 가장신뢰한 인물이자 총독과 경무총장들과 친분이 있었던 아베를 후임 사장으로 발탁하였다. 그러나 취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요시노 사장 시절의 방만경영과 재정적자가 총독부에 발각되었다. 조선총독부는 경성일보, 매일신보에 대한 본격적인 개혁을 검토하고 도쿠토미로 하여금 개혁안을 제출하게 하였다. 1915년 3월 완성된 개혁안은 데라우치 총독이 추천한 아베 쓰루노스케 주간 주도하에 진행되었고, 총독부의 긴축재정방침이 반영된 것이었다. 이로 인해 아베는 경성일보 경영에서는 조선총독, 고문(총무국장), 경무총장(검열), 감독(도쿠토미), 주간(아베 쓰루노스케:재무담당)이라는 조선총독부와 국민신문 간부의 중층적인 관리체제 하에서 많은 제약과 간섭을 받아 능력을 제대로 발휘할수 없었다. 반면에 아베는 매일신보 경영에서는 최남선, 이광수, 진학문, 심우섭등과 같은 유학생 출신 ‘신지식인층’을 발탁, 등용해서 지면을 쇄신하고 지방기사를 늘리는 등 다각적인 ‘경영혁신’을 통해서 매일신보의 판매부수를 늘릴 수 있었다. 반대로 이들 신진 ‘문학 청년’들은 아베를 통해서 1910년대 최대의 대중매체인 매일신보라는 활약무대에 설 수 있었다. 1910년대 아베와 ‘신지식인층’ 사이의 이러한 ‘밀월관계’, ‘접근’은 1920년대 문화통치에서 식민지권력과 피통치자(특히 민족주의세력) 사이에 전개되는 비대칭적이면서도 불균등한 ‘접근전’ ‘바게닝’(bargaining)의 기본적인 토양이 되었다고 할 수 있겠다. 아베는 ‘접근전’ ‘바게닝’을 매개하는 ‘제국의 브로커’, ‘비정식접촉자’로서 조선에서 비로소 그 존재감을 점차 높여가게 된다. 즉 조선은 아베에게 도쿠토미의 그늘에서 벗어나 자신의 독자적인 역량을 발휘할 수 있는 무대가 되었던 것이다. In August, 1914, Abe was appointed as the 4th president of Kyungsung Ilbo as Yosino Dajaemon``s successor. As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s dissatisfaction with president Yosino increased, Tokutomi selected Abe as the incoming president, who had been most trusted by National Newspaper and acquainted with the governor and presidents of police affairs, in order to reinforce communication with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However, soon after his inauguration, the reckless management and financial loss during president Yosino``s days were discovered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considered reformation of Kyungsung Ilbo and Maeil Shinbo in a full-scale, and made Tokutomi submit a reform bill. The reformation proposal completed in March, 1915, was proceeded with the lead by an editor-in-chief, Abe Tsurunosuke, recommended by governor Terauchi, and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s policy of fiscal austerity was reflected. Because of which, regarding Abe``s management of Kyungsung Ilbo, he couldn``t use his abilities fully because of a lot of restrict and interference under the multi-level management system by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executives of National Newspaper including the Japanese Governor of Korea, advisor(a director of general affairs bureau), presidents of police affairs(censorship), a supervisor (Tokutoki), and an editor-in-chief(Abe Tsurunosuke: in charge of finance). On the other hand, as for Abe``s management of Maeil Shinbo, he succeeded in increasing its daily circulation through multiple ‘management innovation’ by selecting and appointing ‘new intellectuals’ with the experiences of studyingabroad, such as Choi Nam-seon, Lee Gwang-su, Jin Hak-mun, and Shim Woo-seop, renovating spaces on paper, increasing local articles, and so on. In other words, these rising ‘young lovers of literature’ could appear on the stage of Maeil Shinbo, the biggest mass media in 1910s, through Abe. This ‘cozy relationship’ and ‘approach’ between Abe and ‘new intellectuals’ in 1910s can be said to have been the foundation for the asymmetric and inequal ‘infighting’ and bargaining developed between the colonial power and the governed (particularly the nationalist group) during the cultural rule in 1920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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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운양집(雲養集)』의 중간(重刊)에 대한 문화사적 탐색 -김윤식(金允植)과 『운양집(雲養集)』, 그리고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 -

        박영미 ( Park¸ Young-mi ) 한국한문학회 2020 韓國漢文學硏究 Vol.0 No.80

        이 논문은 김윤식의 『운양집』 간행에 관한 연구이다. 본고는 『운양집』 중간본을 대상으로 그 특징과 의미를 밝히고자 하였다. 『운양집』 초간본은 김윤식이 식민지 직후, 자편으로 편찬한 것으로, 1915년 석판본으로 간행되었다. 『운양집』 초간본은 김윤식의 자서 이외의 자서는 없으며 약 230질 만을 간행하여 지인과 친구들에게 배포하였다. 1914년 김윤식과 교류가 있었던 일본의 언론인이자 정치가인 도쿠토미 소호가 『매일신보』에 「讀雲養集」(총 6회)을 연재하며 김윤식과 『운양집』에 대하여 높이 평가하였다. 이어 1915년 일본제국학사원은 『운양집』에 학사원상을 수상하였다. 이 소식은 조선과 일본에 대대적으로 보도되었고 학계에 주목을 받게 되었다. 김윤식의 학사원상 수상을 기념하여 축하연이 총독부 주최로 열렸고, 이어 총독부로부터 『운양집』 중간을 요청받게 되었다. 이 시기에, 일본은 다이쇼 데모크라시로 인한 사회적인 불안이 이어졌고, 1차 대전에 참전하여 칭다오를 점령하고 있었다. 또한 조선총독부는 시정 5주년을 맞아 이를 대대적으로 선전하며 조선물산공진회를 개최하여 식민지 정책의 성과를 과시하고자 하였다. 김윤식은 총독부의 요청을 받아들여 교정본으로서 중간본을 간행하고자 하였다. 그러나 간행된 중간본은 일본의 한학자, 학자, 관료를 롯하여 조선의 유학자, 김윤식의 제자 등 김윤식과 연을 맺은 사람들의 제사와 서발, 그리고 제국학사원의 상패가 수록되었다. 내선일체의 식민지 정책이 잘 실천되고 있는듯한 상징으로 작동하였다. 김윤식의 사후, 중간본 간행에 참여한 이빈승은 초간본에서 산삭된 시문, 초간본 이후의 시문 - 특히, 일본인의 시문이 다량 포함 - 을 편집하여 『속운양집』을 간행하였다. 현재 문집총간 속의 『운양집』은 중간본 『운양집』과 『속운양집』을 저본으로 한 것이다. 특히, 간행 과정과 특징을 간과한 채 운양집의 정본이 되었기에 이에 대한 재고가 필요하다. This study is on the publication of Yunsik Kim's Woonyang Book(雲養集). This paper aims to clarify its publication process, its characteristics, and its meaning. The first published book of Woonyang Book(雲養集) was edited by Kim Yoon-sik around 1910, by himself. Yunsik Kim published this book as a lithograph in 1915. The first published book of Woonyang Book(雲養集) contained only the preface by Kim Yoon-sik. Only 230 copies were published and distributed among acquaintances and friends. In 1914, Tokutomi serialized the Reading Woonyang Book(讀雲養集) in the Daily News. Tokutomi was a Japanese journalist and politician who had interacted with Kim Yoon-sik. Tokutomi praised Yun-sik Kim and his book. In 1915, the Japanese Imperial Academy won the Bachelor's Degree Award in Woonyang Book(雲養集). This news was widely reported to Chosen and Japan. The Chosun Governor-General held a feast to celebrate this, and the Government-General of Chosen demanded that Yun-sik Kim re-publish Woonyang Book(雲養集). During this period, Japan was socially uneasy due to the Taisho Democracy, and Japan entered World War I and occupied Qingdao. In addition, the Government-General of Chosen commemorated the 5th anniversary of its reign, and attempted to publicize it extensively. It was intended to show off the achievements of the colonial policy by holding the Chosen Products Association. Yunsik Kim accepted the request of the Governor-General and attempted to publish republishing version, which is a correction. However, the republishing version book contains rituals and ceremonies of people associated with Kim Yun-sik, including Japanese and Chosen confucian, scholars, officials, and Kim Yun-sik's disciple. It worked as a symbol, that seemed to be well-executed by the colonial policy. Lee Bin-seung, who participated in the publication of Kim Yun-sik's the republishing version book, edited the poetry that was scattered from the first edition and the poetry texts after the first edition, especially including a large amount of Japanese poetry, and published Sequel Woonyang Book. Woonyang Book in the Korean classic series (Munjip Chonggan) is based on the republishing version book and Sequel Woonyang Book.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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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의 생애 기초 연구

        심원섭 인하대학교 한국학연구소 2011 한국학연구 Vol.0 No.25

        이 논문은 『古稀之無佛翁』(1931)과 『無佛翁偲び草』(1936.3) 등 일본 측 자료들을 기반으로, 아베 미츠이에(阿部充家)의 생애의 중요 국면들과 그 쟁점들을 정리하고 그의 후반기 생애 중 학계에 소개되지 않은 에피소드들을 선택적으로 제시해 본 것이다. 아베는 근대 일본 정치사의 격동의 현장에서 출생ㆍ성장했다. 백부와 스승이 죠슈 정벌과 서남전쟁에 참가한 당사자였다. 서남전쟁 후 구마모토인들이 걸어 간 두 가지 경로―자유민권 운동과 국수주의적 팽창주의―속에 그의 인생 행로 역시도 가로 놓여 있었다. 이 갈림길 속에서 그가 선택하게 된 것은, 자유민권론에서 팽창주의로 전향해 간 도쿠토미 소호(德富蘇峰)와의 합류였다. 청일전쟁 시 종군을 했으며 김옥균과 ‘체맹’을 하던시기의 아베는 당시 도쿠토미의 행보와 유사한 길을 걸었을 것으로 추측해 볼 수 있다. 『경성일보』 시기 그의 생애와 관련해서는, 노다 우타로(野田又太郞)와의 긴밀한 네트워킹 관계, 이들이 경성 묘심사 별원 및 무문회의 운영 주체였던 점, 무문회의 구성원들이 재경 일본인들을 망라한 성격이었음을 추가로 확인할 수 있었다. 『국민신문』 부사장 시대 및 중앙조선협회 활동기의 아베 이미지는, 이광수를 포함한 일본인 지인들이 한결같이 ‘조선에 대한 이해자’, ‘헌신적인 조선인 지원자’ 등의 방식으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사이토마코토 측근에서 문화통치 정책의 입안 및 시행과 관련된 책사ㆍ정략가로 활약하는 한편, 통치 당국 및 도쿠토미와의 갈등을 야기할 정도로 조선인을 위해 ‘헌신’하는 면모들을 그의 지인들 사이에 각인시켰음이 확인된다. 아베의 인생이 갖고 있는 이 상호 대립적인 면모는, 후일 아베의 전체상을 종합하는 시도가 필요한 국면에서 핵심적인 검토 과제가 될 것이다. 『古稀之無佛翁』(1931)と『無佛翁偲び草』(1936)等の資料を基盤とし、 阿部充家の生涯の様々な争点及び学界に公開されていない彼の生涯の様々な局面を提示してみた。 最初に、 阿部が近代日本政治史の最激動の現場で生まれ、 成長したの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伯父と師が、 中央権力と地方士族間の戦争に参加した当事者であること、 西南戦争後の熊本人が歩んでいた二種類の経路(自由民権運動及び国粋主義的膨張主義)の中に彼の人生経路も横たわっていることを確認することができた。 この岐路で彼が出会い、 一生を共ににしたのは、 自由民権論から膨張主義へ転向していた德富蘇峰であった。 日清戦争期に従軍をし、 金玉均らとの‘締盟’を行った『国民新聞』時代の阿部は、 徳富の行歩と類似した道を歩んだと推測される。 『京城日報』をへて中央朝鮮協会時代に至るまでの阿部は以前とは別の観点でみる必要がある。 文化統治政策の策士乃至政略家として活躍する一方、 彼は朝鮮に対する‘理解者’、 ‘献身的な支援者’としての姿、 統治当局及び徳富との葛藤をも辞さない程、 朝鮮人のために献身する面貌を広汎に残し、 彼を知っている日本人や朝鮮人はこのイメージを持って阿部の生涯を特徴つけた。 姜東慎を通して立証された通り、 阿部の生涯の中には、 有能な植民地経営戦略家としての経歴がある。 彼は、 日本の朝鮮支配が、 朝鮮の‘独立’と近代国家建設のための最適な方便であると信じている人物であった可能性もある。 しかし、本論文のエピソードを通して確認されたように、 彼の生涯には、 政治的な行動の発露のみに判断し難い、 個人的な熱意の実践とも言える面貌が確認される。それは彼の禅修行者としての面貌と深い関わりがあるかもしれない 。この相互矛盾の側面が複合されているのが、阿部という人物の本質にみなし、 アプローチしていくことも一つの代案になり得るだろう。 すなわち彼の政治観と彼の禅と人道主義が、 阿部個人のレベルでは‘幸福な同居’関係にあったかも知れない可能性がそれである。 もちろん、 基盤資料の発掘が顕著に足りない現在の時点で、 総合的な結論を下すのは避けたい。 今後必要な研究課題は山積しているが、 一番緊急な調査課題は、 徳富と阿部が関与した熊本新聞、 国民新聞に対する全面的な調査作業である。 この作業を通して当時の徳富と阿部がどれほどの共通性と差別性を持っていたかを判断する作業に挑戦してみたい。

      • KCI등재

        德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 - 청일전쟁부터 한국병합 시기를 중심으로-

        방광석 동북아역사재단 2010 東北亞歷史論叢 Vol.- No.27

        The study examines the views on East Asia held by Tokutomi Soho (1863-1957), an influential journalist and historian in modern Japan. This study focuses on his views of East Asian countries like China and Korea especially from the Sino-Japanese War (1894-95) to the annexation of Korea (1910), when he shifted to nationalistic and imperialist logics. Tokutomi's views on East Asia were related to the Datsuaron (Advocacy of Escape from Asia) He argued that Japan equipped with Western civilization could be separated from its East Asian neighbors like China and Korea, which were still barbaric and lacked the ability to transform themselves into civilized countries. Then, China and Korea were seen not so much a part of alliance with Japan in resistance against the inroad of Western powers as an object of Japanese expansionism. As an influential journalist, Tokutomi played a leading role in promoting these imperialist views. Such Tokutomi's views remained unchanged even after his firsthand contacts with China and Korea. He travelled China for a long time in 1906 (right after the Russo-Japanese War) and again in 1917 (right after the World War I). Although, he subscribed to the policy of friendly relation with China, rescinding the idea of dividing China, he repeated his unchanging views on China that the Chinese lacked modern consciousness of nation, and that they were imbued with debilitating literary values and private personal interests, which hindered them from reforming their country and society. With regard to Korea, he maintained that Koreans were so corrupt and lazy that they were unable to achieve civilization on their own, thus justifying its annexation by Japan. In justifying Japan's aggression against Korea by its role of civilizing mission, lied his deep sense of disdain and discrimination against Korea, which remained uncivilized to his eyes. The views of Tokutomi were also shared by contemporary Japanese leaders and intellectuals. He tried to be an initiator in proposing a variety of imperialist foreign policy suited to changing circumstances. Therefore, he put forth the theory of harmony of Eastern and Western civilizations, when his Datsuaron lost practical significance due to the Russo-Japanese War and the theory of yellow peril. Later, when Japan pursued with expansionist policy after the World War I, he advanced pan-Asianism, departing from the idea of Peaceful expansionism. His views on East Asia were in line with the course of Japanese imperialism, maintaining consistency in rationalizing and theorizing the expansionism of Japanese empire. 본 연구에서는 언론인자 역사가로서 근대일본의 전반에 큰 영향력을 미친 도쿠토미 소호(徳富蘇峰)의 동아시아 인식을 살펴본 것이다. 특히 청일전쟁 이후 한국병합 시기에 걸쳐 도쿠토미가 국가주의, 제국주의의 입장으로 선회하면서 조선과 중국 등 동아시아에 대한 인식을 어떻게 구체화시켜 나갔는지를 추적하였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脫亞論’에 근거를 두고 있었다. 일본은 서양과 같은 문명을 구비하고 있어 ‘아시아적’이지 않으며, 중국과 조선 등 주변 아시아 국가는 기본적으로 야만적이어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다고 보았다. 따라서 주변 나라가 일본과 마찬가지로 구미열강의 침략에 대항하는 동일한 입장을 갖고 있다는 측면은 무시되고 구미열강과 일본의 팽창의 대상으로만 파악했다. 도쿠토미는 언론활동을 통해 이러한 제국주의적 동아시아 인식을 주도했다. 도쿠토미의 동아시아 인식은 직접적인 견문을 통해서도 크게 바뀌지 않았다. 그는 러일전쟁 직후인 1906년과 제1차 세계대전 후인 1917년 두 차례에 걸쳐 장기간 중국을 여행했다. 그 사이 ‘지나분할론’에서 ‘지나친선’론으로 대외정책론은 변모를 보였으나 중국과 중국인에 대한 기본적 인식은 변하지 않았다. 중국인에게는 근대적인 국가의식이 없다든가 중국은 ‘文弱’하고 개인의 ‘이해관계’만 앞세워 스스로 개혁의 가능성이 없다고 파악했다. 조선에 관해서도 조선은 매우 부패하고 조선인은 게으르므로 스스로 문명화할 수 없으며 시대의 대세로 보아 일본에 의한 병합은 어쩔 수 없다며 식민통치를 정당화했다. 그 밑바탕에는 조선사회를 ‘야만’사회로 보는 멸시감과 차별의식이 뿌리 깊게 깔려 있었다. 따라서 일본에 의한 ‘문명화’를 강조하며 침략을 합리화해 나갔던 것이다. 이러한 인식은 당시 일본정부나 대부분의 일본지식인의 생각과 크게 다르지 않았다. 오히려 도쿠토미는 ‘제국주의’국가 일본의 전략을 미리 제시하고 그것을 선도하려고 하였다. 따라서 상황에 따라 구체적인 대외정책론을 변화시켜 나갔다. 러일전쟁과 ‘황화론’을 통해 ‘탈아론’이 논리적 현실성을 잃자 ‘동서문명조화론’을 내세웠으며, 제1차대전 후 일본이 중국에 대한 침략을 실행해나가자 ‘평화적 팽창주의’에서 ‘아시아주의’로 나아갔다. 그는 꾸준히 일본의 대외팽창을 합리화하고 이론화하며 일본제국주의와 운명을 같이했다고 볼 수 있다.

      • KCI등재

        논문 : 식민지 문화전략과 복고의 식민성 ; 이해조를 중심으로

        구장률 ( Jang Yul Koo ) 민족문학사학회·민족문학사연구소 2012 민족문학사연구 Vol.49 No.-

        이 글의 목적은 이해조를 중심으로 강제병합 직후 식민지 규율권력의 문화전략 일단을 살피는 것이다. 이 글에서는 이인직이 선취한 신문소설의 지향과 작법을 이해조가 공유했다는 관점을 취했으며, 도쿠토미 소호와 나카무라 겐타로를 통해 식민화 전략의 구체적 양상을 이해하고자 했다. 총독부는 언론 통폐합과 검열로 공론을 직접 통제하는 방법, 고등교육을 허가하지 않음으로써 식민지배에 대해 비판적 사유를 원천적으로 차단하는 정책, 유교의 도덕률을 복권시켜 자발적 동의를 구하는 가운데 신민(臣民)을 양성하는 전략을 시행했다. 『매일신보』는 이러한 문화전략을 실천한 핵심기구였으며, 초기 『매일신보』 소설연재를 전담했던 이해조는 정책입안자들의 구상을 크게 벗어나지 않았던 것으로 판단된다. 1910년대 이해조의 소설은 새로운 지식과 사상이 소거되고 충군애국의 신민의식을 내장한 복고의 양상을 보인다는 점에서 1900년대의 작품과 구별된다. 그런 점에서 이해조가 『매일신보』에 연재한 소설들은 결과적으로 식민화를 위한 부지불식간의 계도를 수행하는 효과를 산출했다. This paper aims to examine the interrelationship between colonial cultural strategy of the Japanese Government General of Korea and the case of reality of new-style novels focused on Lee Haejo. For this, we were to understand one aspect of the colonial cultural strategy through the directory of 『Mailsinbo』, Tokutomi Soho and the auditor, Nakamura Kentaro. Tokutomi Soho pursued literature of awakening the world which coincided with a direction proposed by 「Chosun Tongchi Yoeui」, and it is thought that as Nakamura Kentaro held real power of operating and editing who had inspected Korean newspapers even before Korea-Japan Annexation, he realized what had been designed before. Works of Lee Haejo who kept publishing novels serially in 『Mailsinbo』 right from the Korea-Japan Annexation are differentiated from works in 1900s in that they pursued sentimentalism and revivalism. The sentimentalism which urged Koreans to repent and reflect on themselves is combined with revivalism by proposing passive Confucian ethics as a way of salvation. Lee Haejo`s adaption of Korean old novels can be understood in the same context as revivalism of Ecriture pursued by 『Mailsinbo』 and 『Sinmungye』 etc. Popularity of the new novels was based on this sentimentalism and revivalism, and in particular, the colonial nature of sentimentalism is continued also in adapted novels of 『Mailsinb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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