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당사주(唐四柱)』의 문헌학적 접근 - 중ㆍ일 문헌과의 비교를 통하여 -

        김시덕 한국서지학회 2011 서지학보 Vol.0 No.37

        『당사주』는 친숙함과 높은 활용도에 비하여 성립연대, 전래, 유형 등의 서지사항이 불분명하다. 이는 현존 『당사주』사본들에 필사기가 남아있는 경우가 거의 없다는 사실에도 기인한다. 이러한 문제점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당사주』에 실려 있는 문장/도상의 내용 및 배치를 검토할 필요가 있다. 졸고에서는 송-명대에 성립한 『연금두수삼세상』및, 중국에서 성립하여 일본에서 16세기말-17세기초에 필사된 『대역단례복서원귀』와의 비교를 통하여 『당사주』의 성립연대를 추정하고 유형을 분류하였다. <당사주 A형> 계통에 실려 있는 삽화의 구도 및 채색의 고졸함으로 미루어 보아, <당사주 A형> 계통은 <당사주 B형> 즉 유포본보다 이른 시기에 성립되었을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당사주 A형>과 <당사주 B형>은 모두, 송-명대에 성립되어 중국과 일본에서 유행한 『연금두수삼세상』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보인다. <당사주 A형>과 <당사주 B형>이 단일한 계통의 선후관계에 놓여있는지 아니면 서로 독립적으로 『연금두수삼세상』의 흐름에서 갈라져 나왔는지에 대해서는 향후 고찰이 필요하다. 또한, 국립중앙도서관 소장본 『당사주』(<당사주 A형>)의 삽화에서 16세기말-17세기초에 일본에서 필사된 중국본 『대역단례복서원귀』의 삽화와 공통되는 특성이 발견되는 것으로 보아, 16세기말-17세기초 이전에 두 문헌의 공통 조본이 존재하였음이 추정된다. Dangsaju has been familiar to ordinary korean people and, even today, is often used as fortune book in Korean. But it is not certain when Dangsaju was written, how the copies were spreaded and how many types of it exist. These problems come from that most of the extant copies don't have any information about when and how these were written. To solve these problems, I compared illustrations in Dangsaju with those in Yeongeum Dusu Samsesang, made in Song~Ming China, and Daieki Danrei Bokusei Genki, also made in China and copied in late 16~early 17 century Japan. From the comparison, I propose two hypotheses. First, the extant copies of Dangsaju can be divided into two types; Type-A and Type-B. The fact that the forms and colors of illustrations in Type-A are older than those of Type-B show that Type-A was formed earlier than Type-B. But it seems that Type-B, not only Type-A, comes from Yeongeum Dusu Samsesang made in Song~Ming China and popular in China and Japan. It is uncertain whether Type-A and Type-B come from Yeongeum Dusu Samsesang together or indi- vidually. Second, illustrations in Dangsaju(Type-A) from Korean National Library, are similar to those in Daieki Danrei Bokusei Genki from Shido library of Keio University. This similarity suggests that two copies came from the same book formed earlier than late 16~early 17 century.

      • KCI등재

        특허쟁송과 당업자의 기술수준

        조영선(Cho Youngsun) 한국법학원 2005 저스티스 Vol.- No.86

        (1)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발명의 진보성 판단, 명세서의 기재요건 구비 여부, 기능식 청구항의 적법 여부, 출원보정에 있어 신규사항 추가 여부의 판단기준이 될 뿐 아니라, 특허침해를 둘러싼 청구범위의 해석과 권리범위의 확정, 균등침해 판단 등 특허법 전반의 쟁점들을 관통하는 핵심적인 개념이자 대표적인 불확정개념이기 때문에 가급적 특허법의 명문 규정에 부합하고 법적 안정성을 도모할 수 있는 해석론이 필요하다. 그 가운에 가장 중요한 것은 발명의 진보성과 명세서의 기재요건 구비 여부를 판단하기 위한 기준이 되는 당업자의 기술수준 문제, 특히 이를 동질적인 것으로 보아야 할 지 여부와 그 필요성이라 할 것인데, 발명의 진보성 판단의 기준이 되는 당업자의 기술수준을 명세서 기재요건으로서의 그것과 이질적인 것으로 이해하여 전자를 일률적으로 높게 설정하는 것은 특허법 명문의 규정에 반할 뿐 아니라 발명의 진보성 판단의 자료로 삼을 수 있는 선행기술의 ‘범위’와 이를 기초로 용이하게 발명에 이를 수 있는 지 여부에 관한 당업자의 ‘수준’을 동일시 한 문제점이 있다. 당업자의 수준이 높은 것을 전제로 하여 어렵게 진보성의 관문을 통과한 발명의 경우, 명세서를 이해할 수 있는 당업자의 수준 또한 높게 보아 상대적으로 폭넓은 기재를 인정함으로써 넓은 권리범위를 보장하여야 하고, 반대의 경우 진보성 관문의 통과가 쉬운 대신 발명의 명세서 역시 기술 수준이 낮은 당업자들을 이해시킬 수 있을 정도로 구체적이고 상세하게 하도록 함으로써 좁은 권리범위를 인정하는 것이 논리적으로 타당하고 형평에 부합하며, 나아가 정책적으로 연구개발에 대한 투자가 필요한 분야나 기초과학적 성격, 공익적 성격이 강한 분야에서의 기술적 도전을 장려하는 기능을 수행할 수 있다. 뿐만 아니라 청구항의 보정 등에 있어 신규사항 추가와 당업자의 기술수준, 기능식 청구항과 당업자의 기술수준, 특허청구범위 해석, 치환자명성에 있어서의 각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이를 모두 동일하게 이해하는 것이 법적 예측가능성이라는 면에서 타당하다고 생각된다. (2) 당업자의 기술수준은 소송법상의 요건사실로서, 사실의 문제이지 신규성, 진보성 판단 등과 같은 법률 판단의 문제가 아닌 이상, 이를 막연히 심사관, 심판관이 가진 기술수준과 동일시하거나 변론의 전취지에 의하여 형성된 심증만으로 확정하여서는 곤란하고, 당해 기술분야에서 활동하는 기술자가 가지는 학력이나 자격의 정도, 당해 기술분야에서 마주치게 되는 문제점들에 관한 선행기술의 해결 례, 당해 기술분야의 속성으로서의 유추가능성(Predictability) 등 당업자의 수준을 객관적으로 추단할 수 있는 간접사실들의 목록을 충실히 해 나가는 한편, 심판, 소송에 있어서도 당사자에게 그 주장, 입증을 촉구하는 노력을 게을리 하지 말아야 한다.

      • KCI등재

        『唐會要』의 한국고대사 기사 비교와 분석

        송영대 동아시아고대학회 2020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60

        『唐會要』는 唐代 중반부터 수집한 각종 官文書를 종합하여 편찬한 會要體 史書이다. 본래는 당대의 蘇冕이 『會要』 40권을 편찬하였고, 이를 이후 崔鉉이 감수하여 『續會要』 40권을 지었으며, 宋 初에 王溥가 이를 합치고 보충하여 『唐會要』 100권을 편찬하였다. 『唐會要』의 마지막에는 당대의 주변국 정황이 기재되었는데, 이 중에서는 한국 고대 국가들도 포함되었다. 『唐會要』에는 고구려ㆍ백제ㆍ신라ㆍ발해ㆍ탐라에 대한 정보가 수록되었다. 분량은 간략한 편이며 국가별로 국가 소개와 연혁의 비중이 서로 다르게 나타난다. 이번 논문에서는 『唐會要』와 『通典』을 비롯하여 각종 중국 정사도 함께 비교하여 고찰하였다. 그 결과 『唐會要』는 『隋書』까지의 中國 正史보다, 『舊唐書』의 기록과 더 유사한 점이 많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이는 당대 중후반까지의 자료를 섭렵하면서 내용이 보강된 결과이며, 당대의 史館에서 확보한 각종 자료가 典據가 되었을 것으로 보인다. 『通典』과 비교해서는 자료 모음의 성격이 강하며, 기존에 알려진 내용을 요약하면서 한국 고대 국가와 당과의 관계를 최대한 반영하려는 시도가 이루어졌다. ≪Tang Huiyao(唐會要)≫ is a Huiyao-style(會要體) history compiled from various official documents collected from the middle Tang(唐) period. 40 volumes of ≪Huiyao(會要)≫ were originally compiled by Sumian(蘇冕), and later 40 volumes of ≪Xu Huiyao(續會要)≫ were created under the supervision of Cuixuan(崔鉉). The compilation was finished by Wangpu(王溥) who supplemented and then compiled 100 volumes of ≪Tang Huiyao≫ in the early Song(宋) Dynasty. In the last section of ≪Tang Huiyao≫, the circumstances of neighboring countries of Tang were described including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The book contains information on Goguryeo(高句麗), Baekje(百濟), Silla(新羅), Balhae(渤海), and Tamra(耽羅). The volume is brief and it places different importance on each country introduction and history. In this study, a comparative study on various Chinese official histories(中國 正史) including ≪Tang Huiyao≫ and ≪Tongdian(通典)≫ was made. As a result, it is found that ≪Tang Huiyao≫ has more similarities with the contents of ≪Jiu Tangshu(舊唐書)≫ than in Chinese official histories up to ≪Suishu(隋書)≫. This is the result of reinforcing the contents of the data up to the mid-to-late Tang dynasty. Besides, it seems that various data obtained by Tang's History Center(史館) would have become references. Compared to ≪Tongdian≫, it mainly focuses on data collection and attempts to reflect the relationship between the ancient Korean countries and Tang as much as possible while summarizing the previously known contents.

      • KCI등재

        일반 논문 : 당(幢)과 당간(幢竿)의 의미 재고찰

        양경인 한국불교선리연구원 2009 禪文化硏究 Vol.6 No.-

        불교, 힌두교를 막론하고 인도의 사원건축을 살펴보면 사원의 입구에 기둥 (stambha)을 건립하는 경우가 많다. 불교의 발생 이전부터 혹은 고대 베다와 그 이전부터 이어온 고대 우주수(skambha)인 아슈밧타(asavattha)신앙으로 건립되기 시작한 기둥은 깃발을 의미하는 dhvaja와 결합하여 사원건축의 일부가 되었다. 깃발을 달기위한 조형물을 건물 외부나 건물의 일부에 조성하여 장엄하던 것이 점차 상징화 되어 건축물의 구성요소로 전환되었다. 한국에서는 통일신라에서 고려 시대에 지어진 한국의 사찰들은 대부분 사역(寺域)의 표시로 입구에 당간을 세웠다. 이들은 대체로 2개의 석주형의 당간지주에 원형 철통을 이어붙인 철 당간과 돌을 블록처럼 쌓아 올린 석당간, 그리고 석당간과 철당간을 쌓아 올린 형태를 하고 있다. 한국 독자적인 형태로 조성된 당간 지주와 당간의 건립은 언제 어떻게 이루어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신라시대부터 고려시대 말까지 성행했다. 그러나 지면에서 수직으로 건립하는 장대와 같은 당간의 형식은 불교가 전래되기 이전에 이미소도 신앙에서 솟대의 형태로 신라에 존재했기 때문에 여기서 유래했을 것이라는 설이 통용되고 있다. 당간과 당간지주는 불교의 유입과 함께 불교문화의 영향을 받은 만큼 그 시원에 있어 고대 인도의 영향을 간과할 수 없다. 당간과 당간지주는 Dhvaja-stambha와 같은 성역(聖域)과 번영, 항마(降魔)의 상징적 조형물로서 당간 지주와 당간이라는 한국에서 독자적인 형태인 발달한 것이다.

      • KCI등재

        渤海古墳 出土 唐式 帶裝飾具의 基礎的 檢討와 意味

        Jung Bum Choi(崔正凡) 한국상고사학회 2018 한국상고사학보 Vol.102 No.102

        당 왕조에 널리 사용된 당식 대장식구는 관인을 상징하는 허리띠로서 당 왕조는 물론이고, 발해와 신라, 일본에서도 널리 사용되어 동아시아 문화권의 구성요소 중 하나인 율령을 나타내는 고고 자료로 그 중요성이 높다. 이를 염두에 두고 그동안 연구가 활발히 이루어지지 못한 발해에서의 당식 대장식구 출토 양상을 살피고, 그 의미에 대한 기초적 검토를 시도한다. 발해 내에서 출토되는 당식 대장식구는 중국 당 왕조에서의 변화과정과 동일한 변화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또한 대장식구를 착용할 때 배열되는 방형과판과 반원형 과판의 위치 역시 당 왕조, 신라와 같이 강한 규칙성과 정형성을 보여준다. 아울러 홍준어장 고분군에서 당식 대장식구와 공반된 발해토기의 상대서열, 북대 고분군에서 출토된 중국 자기, 동경과의 교차연대를 통해 실연대 도출이 가능하였다. 이에 발해에서 사용된 당식 대장식구는 중국에서의 변천과정과 그 궤를 함께 하며, 시간의 흐름에 따른 형태의 변화 역시 동일하다. 발해 내부에서 당식 대장식구는 발해의 중심지였던 5경 인근의 고분군뿐만 아니라 발해의 주요 지역에 고루 분포하고 있어 관인의 존재를 유추할 수 있다. 한편 발해 영역서 출토되는 이른바 ‘말갈패식’이 공존한다. 발해의 주민구성에 말갈족이 포함되는 점에 미루어 말갈패식은 말갈인들의 정체성을 나타내는 상징표상이자 발해 지방사회에 존재했던 수령의 존재가능성을 나타내는 것으로 판단된다. 이와 같은 당식 대장식구와 말갈패식의 공존은 당 왕조 및 신라와 차별성을 보임과 동시에 발해 문화의 다원성을 엿볼 수 있는 자료라는 점에서 주목된다. As they were used frequently during the as well as in the Parhae and Silla kingdoms and across Japan, Tang-style metal belt ornaments are important archaeological artifacts and symbolic of the East Asian cultural sphere. This article discusses the littleresearched topic of Tang-style metal belt ornaments unearthed from the Balhae kingdom and provides an initial analysis of their historical significance. The belt ornaments of this style that have been excavated from Balhae domains to date exhibit the same patterns of change as those known from the Tang dynasty. The rectangular and semicircular belt brooches of these ornaments were aligned in the same regular sequence as those known from both the Tang dynasty and the Silla kingdom. Thus, these Balhae ornaments can be dated by comparing them to the hierarchy of pottery from this region excavated from the tomb site as well as with Chinese porcelain and bronze mirrors excavated from the Bukdae tomb site. This analysis shows that ornaments of this type used in Balhae underwent the same temporal stylistic changes as their counterparts in China. The Tang-style metal belt ornaments that have been collected from within the Balhae kingdom evidence the presence of state officials as they have been excavated from tomb sites near to the Five Capitals as well as uniformly across the major regions of the country. In addition to these artifacts, so-called Malgal belt ornaments have also been excavated from the territory of the Parhae. Judging from the fact that the Malgals comprised part of the Parhae demographic make-up, ornaments of the former style were likely identity symbols and raise the possibility that Malgal chiefs were also present within provinces controlled by the Balhae. The coexistence of Tang- and Malgalstyle metal belt ornaments therefore reflects the heterogeneity of Balhae culture and demonstrates its distinctiveness compared to the Tang dynasty and Silla kingdom.

      • KCI등재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 변화와 그 배경

        김진한(KIM Jin-han) 고구려발해학회 2011 고구려발해연구 Vol.39 No.-

        보장왕대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안팎의 정세와 연동하며 小康과 反轉을 거듭하였다. 이러한 변화과정을 고려할 때, 양국관계는 크게 세 시기로 나누어 살펴볼 수 있다. 보장왕대 전기(642~649),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신라문제로 촉발된 양국의 갈등이 高句麗?唐戰爭으로 비화되었다. 연개소문은 정변을 통해 집권하였으며 자신의 일족을 중심으로 독재체제를 구축해나갔다. 이와 함께 대당온건책을 통해 보장왕의 책봉을 이끌어 내기도 하였다. 하지만 당 태종은 힘의 우위를 바탕으로 적극적인 대외팽창정책을 추진하였으며 신속시켜야할 대상으로 고구려가 설정됨으로써 대고구려원정은 정당화되었다. 특히 신라의 請兵外交는 양국관계가 전쟁으로 비화되는 촉매제 역할을 하였다. 보장왕 중기(649~658),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당 태종의 죽음으로 새로운 국면을 맞았다. 당 내부의 모반사건과 황후교체사건이 잇달았으며 서돌궐 阿史那賀魯의 반란 등으로 양국관계는 소강상태에 있었다. 아울러 이 시기 국제관계는 고구려?백제 대 신라?당의 대립구도로 고착화되었다. 보장왕 후기(658~668), 고구려의 대당관계는 당의 내부갈등이 마무리되고, 아사나하로의 반란도 진압되면서 양국간 마찰로 이어졌다. 양국관계는 당이 백제를 멸망시킨 여세를 몰아 고구려를 압박하였지만 철륵의 침입과 토욕혼?토번의 전쟁으로 고구려원정에 나섰던 지휘관이 차출되면서 잠시 소강국면을 맞기도 하였다. 그런 가운데 연개소문 정변 이후, 연씨세력 대 反연씨세력이라는 정국구도는 독재정권이 자리를 잡아가면서 체제를 이탈하는 세력과‘포스트 연개소문’을 염두에 둔 연씨세력의 분화현상이 점차 두드러져 갔다. 고구려의 정국불안은 665년 연개소문의 죽음과 함께 연씨형제들간 내분으로 치닫고 말았다. 그 결과, 고구려는 내분을 틈탄 신라?당연합군의 침입을 맞아 멸망하였다. Koguryo-Tang relations during the reign of King Bojang was dynamic with a lot of changes in accordance with domestic and foreign circumstances. I wish to study the occasion and background which brought about these changes. The reign of King Bojang of Koguryo will be divided into three periods in consideration of the reigning Tang emperors. Chapter two discusses Koguryo-Tang relations during the early period of King Bojang’ s reign. Yeongaesomun(淵蓋蘇文) assassinated King Yeongryu(榮留王) in A.D. 642 and seized power through a coup, imposing one-man rule. Koguryo adopted a moderate policy toward the Tang which resulted in the investiture of King Bojang from Tang. However, with Silla’s request for a dispatch of troops from the Tang, Koguryo-Tang relations worsened, resulting in Tang Tai-tsung(太宗)’s invasion of Koguryo on the pretext of the king’s assassination in A.D. 645. Koguryo also took a hard-line policy toward the Tang. Chapter three examines Koguryo-Tang relations during the middle term of King Bojang’s reign. After Tang Gaozong(高宗) succeeded to the throne, relations with Koguryo entered a new phase. Tang fell into internal and external confusion resulting from rebellion and the change of the Empress Wu. This caused Koguryo-Tang relations to come to a lull for several years. Chapter four studies Koguryo-Tang relations during the latter term of King Bojang’s reign. Silla(新羅) joined hands with Tang to destroy Baekjae(百濟) in A.D. 660. Koguryo fell into internal confusion after Yeongaesomun’s death in A.D. 665. As a result, Koguryo was destroyed by the allied Silla-Tang forces in A.D. 668.

      • 高麗時代 六尙書 硏究 : 唐 六尙書와 高麗 六尙書의 比較硏究

        류정수 경원전문대학 1997 論文集 Vol.19 No.2

        『高麗史』 百官志 I 序文에 太祖 2年에 唐制度를 模倣하여 三省 ·六尙書 ·六衛制度를 설정하였다는 기사에 따라 우선 唐의 中央官制인 六尙書를 고찰해보고 이어서 高麗의 六尙書에 대하서도 成立過程과 唐의 六尙書와 組織의 차이점 및 그 연관성을 검토하여 高麗 六尙書를 이해하는데 도움이 되고자 한다. 唐의 六尙書는 『舊唐書』 職官志와 『新唐書』 百官志에 상세히 나타나 있다 『舊唐書』 職官志를 중심으로 唐의 六尙書制度를 열거하여 보면 六尙書를 총괄하는尙書都省 및 吏部 ·戶部 ·禮部 ·兵部 ·刑部 ·工部 둥이 있다. 唐의 六尙書는 制度的으로 완전하게 조직되어 있었으며 內容도 상세하게 잘 나타나있다. 이를 모두고찰해보기로 한다. 高麗의 六尙書도 『高麗史』 百官志에 尙書都省과 六尙書制度가 기록되어있다.『高麗史』 百官志를 중심으로 高麗의 六尙書를 검토하여 보고자한다. 高麗의 六尙書를 열거하여 보면, 高麗에서도 六尙書를 총괄하는 尙書都省이 있었고 六部로는吏部 ·兵部 ·戶部 ·刑部 ·禮部 ·工部 둥이 있었다. 高麗의 六尙書는 成立 過程에서 太祖 2年에 설정되었다하나 그것이 太祖 2年이아닌 後代에 설정되었음을 살펴볼 것이다. 또한 唐의 六尙書와 高麗의 六尙書를比較·分析하여 그 차이점과 唐制度의 영향을 밝혀 보고자한다. 高麗의 六尙書制度는 唐의 六尙書 制度와 달리 설치 이후부터 六尙書의 명칭변화와 구성인원의 변경, 官職 명칭변경, 직급의 격상 격하, 폐합 등의 변천이 많았다. 그 변천 내역을 표로 작성하여 일목요연하게 제시하여 보겠다.

      • 당뇨병이 없는 성인에서의 당화 혈색소 농도와 관련된 인자

        황승욱 제주대학교 생명과학기술혁신센터 2002 제주생명과학연구 Vol.5 No.-

        연구배경 : 당화 혈색소는 최근 2∼3개월 동안의 혈당 농도를 반영하며, 당뇨병 환자들에서의 심혈관 질환의 발생과 미세혈관 합병증의 예측인자이기도 하다. 최근 연구들에서 당화 혈색소 농도가 당뇨병 환자들 뿐만 아니라 일반인들에 있어서 사망률을 예측하는 중요한 인자임이 밝혀졌다. 본 연구는 당뇨병이 없는 성인들에서 당화 혈색소 농도와 관련된 인자들을 심혈관 위험인자를 중심으로 알아보고자 한다. 방법 : 2001년 4월 1일에서부터 2001년 7월 31일까지 일개 대학 병원의 건강 증진 센터를 방문하여 진료를 받은 20세 이상의 수진자 중 당뇨병이 없고 혈중 당화 혈색소 농도가 본 건강 증진센터의 정상 상한수치인 7.1%이하인 1,778명을 대상으로 하였다. 모든 대상들은 성명, 연령, 신장, 체중, 혈압, 공복시 혈당, 총콜레스테롤, 중성지방, 고밀도콜레스테롤, 당화 혈색소가 측정되었고 자가 기입식 설문조사를 통하여 흡연력이 조사되었다. 당화 혈색소와 관련된 인자들에 대하여 성별로 t-test또는 ANOVA test로 평균값 비교를 한 후 유의한 차이를 보인 인자들에 대하여 당화 혈색소를 4분위수로 나눈 후 중회귀 로짓 분석(multiple logistic regression analysis)으로 가장 낮은 당화 혈색소의 제1구간에 대한 가장 높은 제 4간의 당화 혈색소의 교차비를 구하였다. 결과 : 성별로 각 인자들에 대한 당화 혈색소 농도의 평균값 분석시 남성과 여성 모두에서 연령과 체질량 지수가 증가함에 따라 당화 혈색소 농도의 평균의 유의하게 증가하였고(P<0.05), 남성에서는 총콜레스테롤 240㎎/㎗ 이상, 중성지방 200㎎/㎗ 이상, 고밀도콜레스테롤, 공복시 혈당 110㎎/㎗ 이상에서 평균값이 유의하게 높았으며, 고밀도 콜레스테롤 35㎎/㎗ 이상에서 평균값이 유의하게 낮았고(P<0.05), 여성에서는 고혈압, 총콜레스테롤 240㎎/㎗ 이상, 중성지방 200㎎/㎗ 이상, 공복시 혈당 110㎎/㎗ 이상에서 평균값이 유의하게 높았고(P<0.05). 남성에서의 흡연, 고혈압, 여성에서의 흡연, 고밀도콜레스테롤에 대한 당화 혈색소 농도의 평균값에서는 유의한 차이가 없었다(P<0.05). 로지스틱 다중회귀 분석으로 교차비를 구하였을 때, 남성과 여성에서 연령이 증가할수록 당화 혈색소 농도에 대한 교차비가 유의하게 증가하였고(P<0.05), 비만, 총콜레스테롤 240㎎/㎗ 이상, 공복시 혈당 110㎎/㎗ 이상의 변수들에서 당화 혈색소 농도에 대한 교차비가 유의하게 높았으며(P<0.05), 남서에서는 고밀도콜레스테롤 35㎎/㎗ 이상에 대한 교차비가 유의하게 낮았다(P<0.05). 결론 : 본 연구에서 당뇨병이 없는 성인에서 당화 혈색소 농도와 관련된 인자로 남성과 여성 모두에서는 연령의 증가, 비만, 고콜레스테롤혈증, 공복시 혈당능 장애이며, 남성에서의 저고밀도콜레스테롤혈증도 관련이 있었다. Backgroud : Glycated hemoglobin concentration(HbA1c) is an indicator of average blood glucose concentration over 2-3 months, and in diabetes patients, it is a predictor of cardiovascular disease and microvascular complication. In recent studies, Glycated hemoglobin concentration is predictor of mortality in diabetes patient and people without diabetes. Our study is designed to obtain factors associated glycated hemoglobin in adults without diabetes. Methods : We screened 1778 adults over 20 years who were visited the Health Promotion Center in a university hospital from April 2001 to July 2001, had no diabetes and had HbA1c below 7.1%. Every subjects were assessed with respect to gender, age, height, weight, blood pressure, fasting blood glucose(FBS), total cholesterol, high density lipoprotein(HDL)-cholesterol, triglyceride, HbA1c and smoking were assessed by self-administered questionnaires. factors associated HbA1c were analyzed by t-test and ANOVA test, multiple logistic regression. Results : In men and women, as age and BMI were increased. the means of HbA1c is increased and that of HbA1c was higher in higher total cholesterol(≥100㎎/㎗). In men, the means of HbA1c was lower in higher HDL cholesterol(<35㎎/㎗) and in women, that of HbA1c was higher in hypertension. By multiple logistic regression, in men and women as age is increased, the odd ratio of HbA1c is increased, and that of HbA1c was higher in obesity, higher total cholesterol(≥240㎎/㎗), higher FBS(<110㎎/㎗). In men, the odd ratio of HbA1c was lower in higher HDL cholesterol(<35㎎/㎗). Conclusion : factors associated glycated hemoglobin(HbA1c) in adults without diabetes were increasing age, obesity, hypercholesterolemia, impaired fasting glucose in both sex and in men, low HDL cholesterolemia is too associated.

      • KCI등재

        白村江戰鬪 이전 倭國의 遣唐使 -唐의 서북방 정세변화를 중심으로-

        서영교 경북대학교 영남문화연구원 2018 嶺南學 Vol.0 No.67

        Although Japan was an island nation, it was aware of China's change of situation through the missions of Goguryeo and Baekje. In 623 students who studied in China suggested exchanges with China, but Japanese rulers were indifferent. At that time, China was not an economic or military power. In 626, Dang Tae-jong also bought peace by giving a large fortune to Dongdol-dong. The change came suddenly. In 627 a rebellion broke out against the Dongdol stream, and a number of livestock died in the event of a dzud. In February, 630, the Chinese military defeated the main force of Dongdol, which weakened. Koguryo envoys reported the news to Japan in March, 630. This is why Japan sent its first envoy to China that year In 631, Japanese envoys returned to Japan and Chinese envoys came to Japan with them. But they had an argument with the Japanese king, and the relationship was severed. Twenty-three years later, the Japanese government sent envoys to China twice. On May 26, 649, Tang Tae-jong died. His son, Tang Koajung, had no charisma. Many powerful nations have turned against China. In October of 649, Tibet threatened to invade China, and Asana-Haro completed the reunification of the Western TÜRK. Koguryeo also encroached on the East Mongolia area. Then, China tried to improve the situation by offering cultural benefits to neighboring countries. The Emperor presented Tibet with enormous supplies and engineers. He also donated goods to the Far West countries, Kucha. Japan, which is located behind China's enemy Koguryeo, would also benefit from the Emperor. In April 653, Japan dispatched envoys to China. They returned home with a large collection of documents and treasures from the emperor. In February 654, the Japanese government sent envoys to China again. The Japanese envoy, who met the emperor, received an unexpected letter. As Silla was invaded by Baekje and Goguryeo, a nearby Japanese kingdom was urged to send troops to save. However, Japan ignored the order of the Chinese emperor and maintained a close relationship with Goguryeo and Baekje. The Chinese emperor opened his eyes to hostility toward Japan, and Silla's relationship with Japan was also cooled. ​In December 657, there was a major change in the international situation. The Chinese army defeated the West Turk. Tang Dynasty became the sole superpower again. In April 659, King Silla made a military request to China, and the Chinese emperor decided to dispatch troops to the Korean Peninsula at the end of that year. Later that year, Japanese envoys appeared in the Chinese capital. Immediately after December 3, the Japanese envoys were put in jail on orders from the emperor. They had to prevent the discovery of China's plan to invade Baekje. 倭國은 섬나라였지만, 三國의 사절들을 통해 중국의 정세변화를 인지하고 있었다. 623년 귀국한 大唐留學生 惠日이 당과의 교류를 건의했지만 왜조정은 무관심했다. 隋末 내란을 막 수습한 당나라는 강국이 아니었다. 특히 東突闕에게 약자였다. 626년 쿠테타로 즉위한 唐太宗도 東突闕에 막대한 재물을 주고 강화를 할 수 밖에 없었다. 변화는 갑자기 찾아왔다. 627년 薛延陀와 回紇이 東突闕에 대하여 반란을 일으켜 頡利可汗의 군대 일부를 격파했다. 동시에 몽골고원에 天災(dzud)가 일어나 東突闕의 수많은 가축들이 죽었다. 이듬해 奚 ․ 霫 ․ 契丹족과 인근의 고구려도 당에 줄을 섰다. 628년 9월 營留王(建武)이 당에 封域圖를 바쳤다. 630년 2월 李靖이 陰山에서 頡利可汗의 주력을 격파하여 東突闕을 완전히 무너트렸다. 3월 유목군장들이 스스로 唐太宗에게 ‘天可汗’이라는 존호를 올렸다. 630년 3월 奈良에 도착한 고구려 사신은 이 소식을 倭國에 전했다. 막 즉위한 舒明天皇이 같은 해 8월에 1차 遣唐使를 파견한 이유는 여기에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31년 倭國사신은 唐太宗을 알현했고 귀국길에 당의 遣倭使 高表仁과 동행했다. 그러나 高表仁은 의례를 두고 倭國 왕과 다투었고, 관계가 단절되었다. 이로부터 23년 후 倭國은 갑자기 2차례(653년 2차·654년 2차)에 걸쳐 당에 사신을 파견한다. 649년 5월 26일 唐太宗이 죽고 아들 李治가 즉위했다. 唐高宗은 아버지의 카리스마를 상속받을 수 없었다. 주변 강국들이 일어섰다. 649년 10월 토번왕 승쩬깐포가 唐高宗의 외삼촌 長孫無忌 등에게 불충한 짓을 하면 장안에 군대를 보내 토벌할 것이라고 협박했다. 阿史那賀魯는 1년 6개월 만 西突闕의 재통일을 완수했고, 타림분지와 파미르 고원을 넘는 광대한 영토를 차지했다. 고구려 역시 동몽골 지역에 영향력을 확대했다. 그러자 당은 주변 나라들에게 문화적 혜택을 베풀어 상황을 호전시키려 했다. 唐高宗은 토번에게 雜綵 3천단과 養蠶 종자 및 술・맷돌・종이・먹을 만드는 장인들을 보내 주었다. 西突闕과 가까운 龜玆國에도 자치권을 주고 물자를 증여했다. 고구려 배후에 위치한 倭國도 이러한 혜택을 받을 터였다. 倭國의 孝德天皇은 호기를 놓치려고 하지 않았다. 653년 夏4월 倭國은 2차 遣唐使를 파견했다. 그들은 이듬해 황제가 내린 다량의 문서와 보물을 가지고 귀국했다. 孝德天皇은 654년 2월에 3차 遣唐使를 파견한다. 唐高宗을 만난 倭國사절은 예상치 못한 唐高宗의 璽書를 받았다. 신라가 백제 ․ 고구려로부터 침공을 받아 위급하니 가까이 있는 倭國이 군대를 보내 구원하라는 것이다. 655년 倭國 사신이 귀국했을 때 150명에 달하는 대규모 백제 사절단이 와 있었다. 璽書에 대한 관심은 고구려에게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656년 8월 8일 고구려는 倭國에 81명에 달하는 사절단을 파견하였다. 바로 다음 달에 倭國의 답사가 고구려로 파견되었다. 倭國은 고구려·백제와 돈독한 관계를 지속하여 황제의 뜻과 배치되는 길로 가고 있었다. 그것은 唐帝國으로 하여금 倭國에 대한 적개심에 눈을 뜨게 했고, 결국 신라와 倭國의 관계도 냉각되었다. 657년 12월 중대한 국제정세 변화가 있었다. 蘇定方이 이끄는 당군이 西突闕 주력을 격파하여 당나라가 다시 유일강대국의 자리에 복귀했다. 659년 4월 김춘추는 당에 청병을 했고, 唐高宗은 그해 연말에 백제파병을 결정했다. 마침 그해 말 倭國의 4 ...

      • KCI등재후보

        당의 해양력과 고구려 - 당의 2차 침공(647년) 이후를 중심으로

        서영교 한국유라시아연구원 2023 유라시아문화 Vol.8 No.-

        645년 고구려 정복에 실패한 당태종은 2년 후 신하들과 고구려 재침을 위한 논의를 했다. 수군으로 지속적인 상륙전을 감행하여 고구려를 약화시킨 후에 전면 공격을 하자는 결론을 내렸다. 647년 5월 이적의 육군이 고구려 남소성 등을 공격하였다. 고구려 지원군이 그쪽으로 진군해갔고, 이는 당 수군의 작전에 양호한 여건을 제공했다. 그해 7월에 우진달의 함대가 요동반도의 석성(장하의 성산산성 부근에 상륙하여 그 지역을 일대 혼란의 도가니로 만들어 놓았다. 648년 설만철의 함대가 압록강에 들어섰고 강을 거슬러 올라가 박작성에 도착하였다. 고구려군이 패배하여 박작성주 소부손이 전사했다. 그 와중에 오골성과 안시성에서 출발한 고구려 구원군이 도착하면서 6만의 병력이 뒤엉켜 싸우는 난투극이 벌어졌다. 같은 해 4월 오호도(발해만 황성도)의 진장 고신감이 고구려 역산 지역에 상륙하여 싸움이 벌어졌다. 당의 무작위 공격은 고구려를 곤란하게 만들었다. 육지에서 적의 공격을 기다리는 것은 수동적이었다. 어디를 공격해 올지 몰라 방어의 밀도와 효율성이 저하되었다. 예상 방어지역은 확장되어 갔고, 그러면서 거의 모든 해안지역이 소모를 강요받았다. 동시에 당은 대규모의 수군 증강을 단행했다. 648년 7월-8월 검남도(사천성)와 월주, 무주, 홍주에 황제의 선박 건조 명령이 하달되었다. 해선과 쌍방선 1100척을 건조하게 했으며, 9월에 강남 12주에서해선 3백 50척을 더 만들게 했다. 당의 수군 증강이 인위적인 후천적 요인이라면 그것을 가능하게 한 선천적 요소도 당 내부에 있었다. 중국은 항구에 적합하고 해양개척에 용이한 배후지가 매우 거대하다. 강회지역에는 수상업에 종사하는 인구가 많고, 그들은 수로를 통해 부를 추구하고자 하는 습성이 있었다. 649년 5월 29일 당태종이 사망하면서 수군 증강은 일시 정지되었지만, 아버지로부터 잘 훈련된 수군, 적재적소에 건설된 해상병참기지들, 숙련된 선박공장들로 들어찬 거대한 조선소들과 이를 운영ㆍ관리하는 시스템을 물려받은 당고종은 그것을 더욱 발전시켰다. 660년 당고종은 병력 13만을 태운 1800척의 함대를 보내 10일만에 백제를 멸망시켰고, 661년 7월에 소정방이 이끄는 수군을 대동강에 상륙시켜 평양성을 포위했다. 그리고 663년 8월 28일 당수군은 백촌강에서 왜국함대 400척을 전소시켰다. 당수군에 대항한 고구려 수군 활동이 어느 기록에도 보이지 않는 것은 무엇을 반영하는 것인가. 647-648년 당수군이 고구려 연안지역을 유린하고 다녔고, 661년 대동강을 거슬러 올라가 평양성을 포위했는데도 그러했다. 수군 증강은 막대한 재정이 소요된다. 수명이 7년 정도인 선박은 요새보다 소모성이 강하며, 일정 수를 유지하기 위해 지속적인 조선을 해야 한다. 고구려가 당과 함대 건조경쟁을 할 수 없다. 연개소문은 수군 증강을 국정과제로 선택하지 않고 비대칭적 대항책으로 일관했다. 그는 새로 성을 쌓고 성책을 증설ㆍ수리하는데 열중했다. 그 결과 해상에서 불확실성이 증가했다. 이는 수로로 연결된 대성(건안ㆍ비사ㆍ욕이ㆍ평양)들 사이의 물류에 타격을 주어 사회적 비용을 증가시켰을 것이다. 당의 제해권 장악이 고구려가 기울어지는 요인 가운데 하나였다고 생각한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