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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沈遠悅 산문의 公安派 受容樣相 연구

        이준규 한국한자한문교육학회 2010 漢字 漢文敎育 Vol.24 No.-

        Shim Won Yeol(沈遠悅) is a mid nineteenth century literary man who adopted a experimental and experience centered sources and way of think. His work "HakEumSanGo"(鶴陰散稿) which has unique and original thinking has been studied from the point of his personal characteristics, friend relations and time, but there are still many matters that haven't been resolved yet. Thus this study attempted to place his literary work in the stream of the late Chosun chinese literature that was under the influence of Kong-An-Pa(公安派) because his literary criticism has a similar focus with that of GongAn School. Won Guing Do(袁宏道), a representative figure of Kong-An-Pa(公安派) suggested time relativism, criticizing all kinds of "ancient respect" attitude to pursue truth from the ancient things. He remarked that "past is just past and present is just present. To say that it is a courtesy if you follow the old trace of ancient people's language is just like to wear a thin shirt in very cold winter. Shim Won Yeol also remarks that "what on earth ancient narratives(古談)! There are only present affairs(近事)," pointing out that the wornout ancient theory does not fir for present and that try to speak about the "Now and Here". It is exactly the same way of thinking with that of Won Guing Do who allegorizes the ancient things with the unfit clothes and he tries to seek the present subject. In particular Shim Won Yeol's relativistic way of thinking extends widely to highly value on particular experience, to deny the a priory truth and to be skeptical on the absolutism in canon and saints, and there are many writings to show this idea. It is worth remarking that Shom Won Yeol's perception blossomed out of much agony to accept the vivid present with humbleness while struggling in the contemporary nineteenth century, and that he emphasized that either canon or classics is no longer valid unless the value is based on the present. 沈遠悅은 실험적이고 경험중심적인 소재와 사유를 다양한 문학 장르에 구사했던 19세기 중엽의 문인이다. 그의 鶴陰散稿에 담겨있는 독창적이고 개성적인 작품들을 개인적인 성향에서 발로한 것으로, 또는 교유관계, 시대상과 관련지어 살펴보기도 했지만, 해결되지 않은 문제들이 많았다. 이에 본고에서는 심원열의 문학비평론이 公安派의 그것과 상당 부분 유사함에 주목하여, 조선후기 한문학이 중국 공안파의 영향으로 일정하게 변모되는 흐름 속에서 심원열의 산문을 살펴보았다. 公安派의 핵심인물인 袁宏道는 “옛날은 옛날일 뿐이고, 지금은 지금일 뿐이다. 옛 사람의 언어의 묵은 자취를 답습해 뒤집어쓰고는 예스럽다 하는 것은, 엄동설한에 여름의 베옷을 입는 것과 같은 격이다”고 하면서 옛것에서 진리를 추구하는 일체의 상고주의적 사고를 비판하며 시간 상대론을 제출하였다. 심원열 또한, “하필 古談이리오? 近事가 있을 따름이오”라고 하며 진부한 옛날이야기는 현실을 살아가는데 적절하지 않음을 지적하고, ‘지금 여기’에서의 이야기를 하고자한다. 원굉도가 옛것을 맞지 않는 옷에 비유해서 벗어던지고, 현재의 주체에 꼭 맞는 것을 추구한 사유방식과 일치하는 것이다. 특히, 심원열에게 있어 이러한 상대주의적 사고는 구체적 경험 중시와 선험적 진리의 부정, 경전과 성인의 절대성에 대한 회의로 폭넓게 작용하고 있으며, 이를 예증하는 많은 글도 있다. 이는 결국, 심원열이 격변하는 19세기 당대를 살아가면서 생동감 넘치는 현실을 겸허한 자세로 받아들이려는 고뇌에서 산생된 인식으로, 경전이든 한문고전이든지 추구한 바가 현실과 유리되어 화석화되어서는 안됨을 보여준다는 점에서 시사하는 바가 크다.

      • KCI등재

        남극관(南克寬)의 「사시자(謝施子)」에 나타난 문학의식(文學意識)

        박수천 ( Soo Cheon Park ) 한국한시학회 2013 韓國漢詩硏究 Vol.21 No.-

        남극관은 오랜 질병으로 인해 26세의 이른 나이로 생을 마감한 인물이다. 그는 주변 사람들에게 일찍부터 문학적 재능을 인정받았고, 20세 때에는 生員試에 2등으로 급제해 장래가 촉망되었다. 그러나 그는 자신의 신병으로 인해 立身의 꿈을 접고 집안에서 칩거하며 괴롭고 힘든 투병 생활을 하였다. 이 시기에 그는 많은 독서를 하면서 자신의 문학의식을 다듬어 나갔고, 그것을 잡록의 형식으로 기록해 놓은 것이 「謝施子」이다. 「謝施子」는 제명의 뜻처럼 쓸모없는 시시한 이야기가 아니라, 상당한 수준의 학문세계를 드러낸 저작이었다. 남극관은 성품이 곧고 깨끗해 별다른 욕심을 갖지 않았으나, 침식을 잊어 버릴 정도로 책읽기만 극히 좋아했다고 한다. 여러 잡기적 기술을 모은 「謝施子」에는 문학 분야 외에도 천문, 역법, 지리, 역사, 서법, 금석학, 언어, 문자 등 다양한 주제에 관한 견해를 두루 담고 있어 그의 평소 독서가 아주 광범위했음을 증명해 보여준다. 「謝施子」에는 중국 문단에 대한 관심과 문학 비평의 기사가 비교적 많은 편이다. 그 당시 조선 문단에 큰 영향을 미치고 있던 公安派와 竟陵派의 문학론에 대한 전체적 평가를 내리고, 그 중 竟陵派를 주도한 鍾惺의 논의가 더 우월하다고 말했다. 남극관은 문장이란 세상의 治亂을 따라 그 盛衰를 같이 한다는 생각을 가졌다. 나라의 흥망에 따라 그 문장의 성쇠가 나타나니 明나라 말기의 문학이 그렇게 낮을 수밖에 없었다고 말하였다. 문학과 時運의 관계를 그가 처음 거론한 것은 아니지만, 이런 견해가 남극관의 문학에 대한 기본 인식이었던 점은 지적해 둘 필요가 있다. 남극관의 문학적 관점은 公安派의 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한 측면이 있다. 남극관은 袁宏道의 논의를 수용하면서 일단 적극적인 찬동의 뜻을 표하였다. 문학이 개인의 정감과 얽매이지 않는 개성을 드러내야 한다는 데에 생각을 같이하고, 각 시대의 변화를 따라 문학도 변화하고 발전한다는 견해에도 동감을 했다. 그러나 남극관은 袁宏道의 시작품이 복고론자들이 썼던 일상의 恒語를 애써 기피하느라, 도리어 辭語의 편폭이 좁아져 진실한 개성의 표현에 어려움이 많았음을 지적하면서 비판적인 시각을 보였다. 公安派와 竟陵派가 제시한 문학론을 남극관이 긍정적으로 수용하면서도 또한 그들의 미흡한 측면을 간과하지 않았던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의 문학과 문학론을 거론하면서도 그의 비판적 견해를 제시하였다. 남극관의 집안은 소론의 명문가라 노론계 인사들과는 政論이나 문학론에서 의견을 같이 하기 어려워 그의 논의에서 黨論의 감정을 완전히 배제할 수는 없었겠지만, 일단은 남극관이 자신의 문학론적 견지에서 비판론을 개진한 것이라 하겠다. 金昌協이 주안점을 둔 것은 작품에 표현된 意趣였는데 비해, 남극관이 작품 평가의 기준으로 삼은 것은 氣格이었다. 남극관은 문장의 경우 體裁가 갖추어져야 한다고 말했고, 시에서는 우선 氣格이 중심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한 것이다. 남극관은 金昌協 시론의 성취를 일부 인정하면서도, 鄭斗卿 평가의 경우 그의 氣格이 가장 뛰어난데 단지 思致만으로 그를 낮추어 말한 것은 작품의 한 측면만을 본 편협한 처사였다고 비판했다. 작품의 평가는 다각적인 접근이 필요하며 또한 그 작품에서 가장 높은 성취를 이룬 측면에 중점을 두어야 올바른 비평이 될 수 있다는 것이 남극관의 생각이었다. 남극관의 문학의식은 前後七子의 의고적 문학론을 기반으로 公安派와 竟陵派가 주장한 개성 발현 중시의 문학론을 함께 수용하고 있다. 公安派와 竟陵派는 의고론을 강력히 부정했지만, 남극관은 그들 이론의 장점을 아울러 자신의 문학론으로 발전시키고자 하였다. 작품의 氣格을 중시하면서 그것의 전범으로 盛唐을 존숭하였고, 지나친 擬古에 빠져 개성과 독창성을 잃어버리게 되는 것을 경계했다. 그러나 「謝施子」에서 남극관은 그의 문학적 지향을 구체적으로 밝히지도 않았고, 또한 자신의 문학의식을 체계적으로 이론화하지도 않아, 그의 문학론은 실제 미완의 단계에 머무르고 말았다 하겠다. 그가 일찍 요절하지 않고 在世의 기간이 좀 더 길었다면 더욱 심도 있고 독창적인 문학론을 형성했을 것이라 여겨진다. Nam, Keug-Kwan(南克寬) died at the age of 26 from his disease. He was recognized his literary talents from the people around him. But he stayed indoors to overcome his disease almost everyday. During these days he had many times for reading books, and he made his own literary thoughts. He wrote his several thoughts as a form of miscellaneous notes, named 『Sasija(謝施子)』. 『Sasija(謝施子)』 was a kind of book which showed his high level study. He wrote several subject besides literature such as astronomy, calender, geography, history, calligraphy, language. In the book 『Sasija(謝施子)』, there are many articles about literary critique and Chinese literary circles. Nam, Keug-Kwan(南克寬) thought that the trend of literature followed the flourish of the society. As his view of literature, he accepted the theory of Kong-An group(公安派) critically. He had same opinion that literary works expressed individuality without any restricting. Besides he accepted the theory of Kong-An group(公安派), he didn`t passing over their weak points. Nam, Keug-Kwan(南克寬) criticized the works and literary theory of Kim, Chang-Hyub(金昌協). Kim, Chang-Hyub(金昌協). estimated the intention of writres(意趣), but Nam, Keug-Kwan(南克寬) showed the energetic spirit(氣格) of writers as his critique standard. To evaluating literary works, it needs diversified investigation. And it must focus on the excellent side of the works. That was Nam, Keug-Kwan(南克寬)`s literary thoughts. He estimated the best T`ang Style(盛唐) highly, and he insisted the originality(獨創性) of literature.

      • KCI등재후보

        李鈺이 注目한 晩明淸初文人들

        손병국(Son Byung Kook) 동악어문학회 2009 동악어문학 Vol.53 No.-

        이 논문은 조선 후기 문학사의 이해를 심화하기 위해 이옥의 문학에 만명청초의 문인들의 문학이 어떻게 수용되었는가 하는 양상을 해명하는데 주안점을 두었다. 이옥의 글을 통해 확인되는 만명청초 문인들의 문학에서 드러나는 부분은 當代의 문학, 童心의 문을 할 것을 주장하고 소설, 희곡, 시가 등에 대해 肯定的認識을 가졌다는 것으로 대별될 수 있다. 當代의 文學이란 復古主義 文學에 대항하는 ‘今文’ 또는 ‘時文’을 의미한다. 그는 전통의 사대부에 의한 불변의, 또는 규범적인 도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았으며, 자신만의 格式을 개척하는데 있다고 하고 그 스스로의 개성을 표현하고 그 개성을 드러내 보인 글이 眞率한 글이라고 보았다. 童心의 문학은 明代 李贄의 童心說에 근거한 것으로 童心은 어린아이의 마음과 같이 거짓이 없는 진솔한 마음을 가리킨다. 이는 模倣을 거부하고 眞實에 접근하는 眞情의 문학이라 할 수 있다. 공안파가 全的으로 ‘創新論’을 강조했던 반면, 李鈺은 前後七子의 의고와 공안파의 창신론의 ‘折衷論’을 주장하였다. 즉 공안파가 典範의 모방을 거부하고 다른 사람이 표현할 수 없는 것을 창조해내는 데 큰 의미를 두었지만, 이옥은 전후 칠자의 의고와 공안파의 창신론의 지나 친 점은 버리고 좋은 점을 취하여 이를 통합ㆍ조화하는 과정에서 스스로 터득하여 독창적으로 창조할 것을 역설하였다. 이러한 창신론과 절충론의 차이는 李鈺이 공안파의 영향을 지대하게 받았으면서도 공안파의 문학이론을 비판적으로 수용했음을 보여준다. 이옥은 25편의 傳을 지었는데 양적인 면에서 朴趾源보다 많으며, 소설적 성향이 높은 작품은 그 문예적 성과가 높이 평가되었다. 이옥은 우리의 소설인 『蘇大成傳』을 중국소설과 관련하여 언급하면서 이 작품이 稗史보다 낫다고 하고 있는데 이것은 소설에서의 쾌락적 기능을 인식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고『傳燈新話句解』를 쓴 垂胡子 林?의 註釋 중에서 「謂塘奇遇記」 안에 들어있는 「秋景詩」에 대해 정정하고, 明末의 통속작가인 馮蒙龍의『情史類略』에 대한 언급한것이라든지, 梁나라 任昉이 중국의 신화를 모아놓은 책인『述異記』와 金聖嘆의『西廂記』를 모방하여 『東相記』를 지은 것 등은 소설과 희곡에 대한 관심이 대단하였음을 확인시켜 주는 부분이다. 이옥이 가진 이러한 문학의식은 당시 중국문화의 고전적 규범에 빠진 文士들의 모화적 의고에 충실한 사대부문인들과는 角을 세울 수밖에 없었으며 그의 이러한 모습에서 그가 같은 시대를 살아가는 實學派 文人들과 견주어 보더라도 전혀 뒤지지 않은 문화적 自矜心의 소유자였음을 알 수 있다. 이렇게 이옥이 민명청초의 문학에 경도된 것은 성균관 유생으로 있으면서 주목받지 못한 대상에 주목하면서 이들에 대해 진보적이면서도 동시에 첨예한 문제의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의 이러한 성향은 당대의 문예론과 문체론에 있어 새로운 방향을 모색하게 되는 결과를 가져오고 이를 문학을 통해 구체적으로 수용하는 모습을 보인다. 따라서 그의 문학에서 나타난 결과로 볼때 그것은 바로 주자학적 문학관에서 벗어나 문학작품이 주는 快樂的 기능과 나아가 문학의 藝術性, 審美的인 것을 인정하는 進步的인 思考와 純正文學에 權威에 대한 도전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앞으로 있을 조선후기 民族文學論의 擴散과 그 궤를 같이하는 것이었다. In this thesis I have characterized the literary point of view of the Kungan School(公安派) represented by Yuan Hong-Do(袁宏道) and evaluated the li terary works written by men of noble birtnew sth in the period of Yong Jo ng-jo(英正朝), Lee-ok's new style of writing and his literary point of view. He had a great concern in the philosophy of Ku Yen-wu(顧炎武) and Lee Zi who were among the leading scolars of th Ching Dynasty and follow ed the scholars belonging to the who respected truth and ejected the res torative wiew point which was prevalent during the Ming Dynasty. The literary works of men who belonged to the nobilities may be classfi ed into three. The movement of in promoting the new style of writing in which the Pookhak group tried to describe the real meaning of life, the tr uth in nature was initiated conducted during the time when King Chong-jo took a measure against the plaintive style of writings appearing in the Folk tales prevalent in those days. Thus thair movement was criticized and even reprimanded, rather than appreciated as it was. Lee ok found the principles of creative writing in reality, innocence, and contemporary writting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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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안파(公安派)의 시론 다시 읽기 - 마음의 시화(詩化) 과정에 대한 점검

        이주현 한국중국어문학회 2016 中國文學 Vol.86 No.-

        . 이 글은 공안파의 시론을 상세히 독해함으로써 그 의의를 재조명했다. 흔히 성령론, 개성론, 자아표현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공안파의 시론은 시의성과 혁신성을 인정받아왔다. 그들은 진정한 시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옮긴 것이라고 말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팔이 움직이는 대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 입과 팔을 거쳐 시로 이루어진다고는 것, 즉 마음의 시화(詩化)는 내면의 발현에 중점으로 둔 것이다. 그들의 시는 비록 중국고전시의 형식적 제약과 구체적 방법론의 부재로 그 시론을 온전히 구현하기 어려웠지만, 평이한 언사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입말 투가 삽입되는 등 파격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구를 최대한 다듬지 않고 글자나 구절 수 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입과 팔에 내맡긴다는 말의 실천이었다. 그들은 자동적인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시(唐詩)로부터 멀어지기를 의도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공안파가 자신의 시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시를 썼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론과 실천을 함께 조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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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안파(公安派)의 시론 다시 읽기 ― 마음의 시화(詩化) 과정에 대한 점검

        이주현 ( Lee Juhyun ) 한국중국어문학회 2016 中國文學 Vol.86 No.-

        이 글은 공안파의 시론을 상세히 독해함으로써 그 의의를 재조명했다. 흔히 성령론, 개성론, 자아표현론이라고 일컬어지는 공안파의 시론은 시의성과 혁신성을 인정받아왔다. 그들은 진정한 시는 마음에서 흘러나오는 것을 옮긴 것이라고 말하며 입에서 나오는 대로, 팔이 움직이는 대로 시를 써야 한다고 주장했다. 마음에서 흘러나온 것이 입과 팔을 거쳐 시로 이루어진다고는 것, 즉 마음의 시화(詩化)는 내면의 발현에 중점으로 둔 것이다. 그들의 시는 비록 중국고전시의 형식적 제약과 구체적 방법론의 부재로 그 시론을 온전히 구현하기 어려웠지만, 평이한 언사로 자연스럽게 쓰이고 입말 투가 삽입되는 등 파격을 보였다는 점에서 의의가 있다. 자구를 최대한 다듬지 않고 글자나 구절 수 가 일정하지 않은 것은 입과 팔에 내맡긴다는 말의 실천이었다. 그들은 자동적인 시 쓰기를 추구했다고 볼 수 있으나 당시(唐詩)로부터 멀어지기를 의도했다는 점에서 한계가 있었다. 공안파가 자신의 시론을 바탕으로 어떻게 시를 썼는지 살펴봄으로써 이론과 실천을 함께 조망할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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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李建昌의 「李卓吾贊」에 대하여

        김용태(Kim Yang-Tae) 동양한문학회(구 부산한문학회) 2008 동양한문학연구 Vol.26 No.-

          본고는 이희목 교수에 의해 십수년 전에 보고되었으나, 그 사이 학계에서 ‘잊혀진’ 자료였던 이건창의 「이탁오찬」이란 글의 존재를 학계에 환기하고, 그 내용과 의의를 검토하여 이건창 문학을 새롭게 이해하는 시각을 제시하려는 목적에서 집필되었다. 「이탁오찬」은 陽明左派의 성립에 중요한 역할을 하였던 李贄를 칭송하는 내용을 담은 글이기에, 최근 들어 그 열기가 더해지고 있는 양명좌파와 公安派의 수용에 대한 연구에 있어 매우 중요한 자료가 아닐 수 없다.<BR>  「이탁오찬」은 이건창이 20대에 지은 글인데, 이 당시 내면적으로 울분상태에 있던 이건창은 양명좌파 및 공안파를 접하면서 많은 위안을 받을 수 있었다. 이후 이건창은 양명좌파 및 공안파와 일정한 거리를 두게 되지만, 양명좌파 및 공안파의 사유를 자신의 문학적 목표와 실천의 자양분으로 적절히 활용하였다. 이러한 점은 이건창 문학을 주로 ‘古文’적 관점에서 접근 하였던 기존의 연구에서 주목하지 못했던 부분이라 할 수 있는데, 실상 이건창 문학이 위대한 까닭은 양명좌파, 공안파, 동성파 등등의 외부적 요인을 주체적으로 활용하여 자신만의 독특한 색깔로 재창조했다는 점에서 찾아져야 할 것이다. 그리고 이러한 점은 양명좌파와 공안파의 수용에 있어 ‘주체’의 측면을 제대로 고려하지 않는 최근의 연구경향에 대해서도 시사하는 바가 적지 않다고 할 수 있다.   The material, 「lee tak oh chan(李卓吾贊)」, was reported approximately a dozen years ago by a Professor Lee, Hee-mok. But this material has been "forgotten" in the academic society. This abstract has been created with an aim to propose a new point of view to understand the literature of Lee, Kun-chang(李建昌) by reviewing the 「lee tak oh chan」. 「lee tak oh chan」 contains materials that look up to Li zh? who had played an important role in establishing a Radical Yang-ming school, which cannot be a crucial material in the sense that recently its academic heat has been increasing toward Radical Yang-ming school and Gong-an School.<BR>  「Lee tak oh chan」 was made by Lee, Kun-chang in his twenties. At the time, Lee, Kun-chang who was in depression of his days had been consoled much by Radical Yang-ming school and Gong-an School. Since then, he placed a certain distance to Radical Yang-ming school and Gong-an School, however he applied appropriately Radical Yang-ming school and Gong-an School to sources of nutrition of literary object and performance. These points were something that at-the-time research hardly took notice of having the viewpoint to access to Lee, Kun-chang literature based upon "Guwen(Classical literary Style 古文)". In fact, the reason, we have to understand, that the greatness of Lee, Kun-chang literature is that it recreated outer factors of Radical Yang-ming school, Gong-an School, Dong-sung School, etc subjectively in its unique color.<BR>  And, in this respect, it suggests us a lot in the sense that even recent research trend tends to hardly focus upon "subjectivity" in the absorbtion of Radical Yang-ming school and Gong-an Schoo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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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덕무(李德懋)의 명대문학(明代文學) 비평에 대한 일고찰

        이학당 ( Xue Tang Li ),위홍 ( Hong Wei ) 한국실학학회 2011 한국실학연구 Vol.0 No.21

        본고에서는 이덕무의 명대문학 비평 중에서 의고파와 공안파의 대표 작가들에 대한 비평을 위주로 검토를 하였다. 조선후기 저명한 문학비평가인 이덕무는 명대 문단에 대해서 깊이 있게 파악하고 있었다. 그는 우선 명대 문단에서 가장 큰 영향력을 발휘했던 의고파의 대표 인물들에 대해서 많은 기술을 하였다. 그가 남긴 명대 문학비평 자료에서 가장 많이 언급된 인물은 바로 이반룡과 왕세정이다. 그들의 시(詩), 문(文)뿐만 아니라 의고파의 문학이론에 대해서도 깊이 있는 비평을 가하였다. 둘째는 공안파의 대표인물인 원굉도에 대한 중점적인 검토이다. 원굉도의 시와 문에 대하여 흥미있게 감상하고 인용했으며 공안파가 제창한 ``독서성령(獨抒性靈)``의 문학주장에 대해서도 의고파와 견주면서 논평하기도 하였다. 이덕무는 청나라 당대의 문단보다는 오히려 명대의 문단에 대하여 더 많은 관심을 갖고 주목하여 다양한 논술과 비평 내용을 남겼다. 이덕무는 왜 명대 문인들과 그들의 문학을 이렇듯 중요시하였는가. 그 이유는 다음과 같은 세 가지 측면에서 분석할 수 있다. 첫째, 이덕무의 정통 사상과 의리 정신에서 찾을 수 있다. 그는 연암을 대표로 하는 북학파의 일원으로서 북학사상을 공유한 것이 사실이다. 그러나 이덕무는 연암과 마찬가지로 내심에는 아직 명대가 한족이 통치하는 정통국가이고 청나라는 이방인이 잠시 중국을 장악하는 이민족 국가에 불과하다는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둘째, 이덕무는 중국의 문학 발전에 있어, 명대 문학 자체의 특성에 주목하여, 이 시기의 문학에 대하여 특별한 관심을 가지게 됐다고 생각한다. 셋째, 명대의 많은 문학이론과 그 성과들이 이덕무 본인의 심미(審美)취향, 창작 실천과 맞아떨어졌다고 할 수 있다. 물론 문학론에 있어서 전후 칠자와 공안파는 서로 대립적인 것이다. 그렇지만 각자의 문학론은 꼭 누가 옳고 누가 그르다고 할 수 없을 것이다. 이덕무의 전후칠자 및 공안파의 주장에 대한 평가도 공정하고 객관적이다. 개인적인 취향에 있어서 이 두 부류의 주장과 겹치는 면이 적지 않아, 그들 주장의 심층적인 면에 대해서 더욱 연구해보려는 의도가 있었다고 본다. Lee Demoo(1741~1793)is a famous scholar in the late Joseon Dynasty. As a literary critic, most of Chinese scholars and works he mentioned is about Ming Dynasty, which shows his great attention on the literary world of Ming Dynasty. Some relevant discussion and critical content can be looked as precious data for researching on his literary thought. In the literary world of Ming Dynasty, all kind of new literary current took shape by carrying on previous work, such as classicist school who advocated learning from ancients by QianHouQiZi, anti-classicist School who advocated innovation by Gong an School, Tang-Song School and Jing Ling School. Also the artistic expression means are more rich and varied, and prose, poem and drama competed with each other for beauty. The reasons he pays attention to the literary world of Ming Dynasty focused on three aspects-traditional ideology and argumentation, characteristics of the literary world, the inosculation of his aethestic standard and creation practice to the theory and literature achievements in Ming Dynasty. Lee Demoo thinks highly of the literary theory and achievements in literary world of Ming Dynasty. There are two features of his criticism on literature of that period. First of all, the style of his criticism developed from subjectivity to objectivity, from what we can realize the process of his increased knowledge and experience in literature of Ming Dynasty. Secondly, he made some key criticism by classifying on works or viewpoints of representative figures, such as Lee Panlong and Wang Shizhen in QianHouQiZi School, Yuan Hongdao in Gong an School, Zhong Xing in JingLing School and Critic, Jing Shengtan. The content of his criticism on literature of Ming Dynasty focused on three aspects. The first one is criticism on writer. For example, he summarized some writers` biography and clarified their poems viewpoints and achievements in Mini Biography of Poems Observed, such as Liu Ji, Song Lian, Gao Bing, Li Dongyang in the early of dynasty, Li Mengyang, He Jingming and Li Panlong in the middle period, Gu Yanwu and Zhu Yizun in transitional period. Second, criticism on various kinds of schools. The main issue of fact in literature of Ming Dynasty is about the classicist and anti-classicist. He gave highly appreciate to the vigorous and hsingling literature of the classicist school, while pointing out the disadvantages because of persistent on their own concept. The third is criticism on novels. He did some specific analysis on Zhong Xing`s comment about Water Margin and Jin Shengtan`s novel notion when he wrote his SuiJingXiTan. He did a certain textual research on Shi Naian`s novel from the standpoint of social origin theory, and approved its artistic quality. However, he proposed the useless and harmful theory of novel when he compared novel to the other literary forms, which showed his limitation on literary concep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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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三淵 金昌翕의 성리학과 시문학

        정혜린(Jung, He-rin) 대동한문학회 2011 大東漢文學 Vol.34 No.-

        三淵 金昌翕(1653∼1722)은 17세기 말에서 18세기 초 조선의 문화적 변혁의 핵심으로 지적된다. 특히 그는 18세기 화려한 시단의 개창자로 꾸준히 연구되어 왔다. 그 중요한 연구 중 하나는 그의 시문학의 배경에 관한 것이었으며, 특히 명대 前後七子와 公案派의 영향력 여부를 논증하는데 촛점이 두어졌다. 이에 양 문예사조에 대한 김창흡의 진술은 매우 미미하지만, 그의 작품 경향과 주변의 문헌들을 통해 볼 때 그가 두 문예사조의 영향을 받았을 것이라고 논의되었다. 본 논문은 그러한 수용 가능성을 긍정하되 양 문예사조에 대한 그의 언급이 왜 미미한데 그쳤는가 하는 점도 간과할 수 없다는데 주목하여, 김창흡이 두 문예사조를 어떻게 변형하여 자신을 이들로부터 차별화시켰는지를 고찰하였다. 김창흡과 명대 문학사조를 비교하자면, 먼저 그가 조선시대 보기 드믄 성리학자이자 시인이었다는 점을 환기할 필요가 있다. 우선 공안파의 영향력 문제에서, 그는 公案派와 ‘性靈’이라는 어휘를 공유하지만, 공안파의 그것과 달리 인위적인 노력을 통해 수양되는 것이라는 전통적인 성령의 의미를 계승했고 아울러 성리학적 윤리에 저촉되는 의미를 부여하지 않았다. 그는 성리학적 심성론을 토대로 전통적인 성령 개념을 성리학화한 것이다. 그는 현실 세계의 본체인 태극을 체인할 수 있다고 확신했고, 체인을 담당하는 마음의 知覺 활동을 확신했다. 이는 당시 모든 조선 성리학자들이 공유하는 바가 아니다. 호론에서는 미발과 이발에서 태극을 체인하는 길을 축소했고, 낙학의 수장격이었던 그의 형 김창협은 끝내 자신의 지각론을 확신하지 못한 여운을 남겼다. 그러나 김창흡은 미발과 이발에서 태극을 체인하는 지각의 기능을 확신했다. 아울러 그는 성리학적 논증보다는 그 실천에 주력했다. 이는 그가 주자학 외에 조성기를 통해 태극을 체인하는 관물설에 큰 관심을 두고 박학 정신을 계승했다는 점에서 분명해진다. 그는 주자의 道文本末論적 문예론과 박학 정신을 보다 적극적으로 해석하여, 성령으로 하여금 여러 시 체제들로부터 두루 진실을 섭렵할 수 있는 자유를 부여했다. 그는 『시경』으로부터 명대 소품까지 섭렵한 후 시의 길이, 운율 등 여러 측면에서 절충과 파격을 통한 실험을 행했고, 시의 내용에서도 이전의 관습을 넘어 사상, 경제, 군사, 토지, 사소한 주변사물까지로 적극적으로 확대했다. 그의 모든 시적 실험은 18세기 정리할 수 없을 만큼 다양한 시단 전개 양상의 시발점으로 주목된다. 그러나 정서를 배제한 산수시, 철리시, 운율의 파괴와 혼융, 산문적인 어구의 사용 등은, 성령으로 하여금 시의 체제라는 구속을 넘는 자유를 얻게하는데서 나아가 시와 산문의 경계에 다가가게 했다. 성리학을 통해 김창흡의 시에는 시의 정체성을 위협하는 긴장감이 조성되는 것이다. 김창흡에게서 성리학적 지각의 세례를 받은 성령은, 시와 사상이 긴밀한 관계를 지님으로써 수반되는 명ㆍ암을 뚜렷이 보여준다. Kim, Changheup(金昌翕,1653-1722) has been watched as the pioneer of diverse tendencies of literary world in 18th Joseon(朝鮮) Dynasty. One of the issues of the investigation on his literature is whether he was influenced by two literary school of Ming Dynasty, qianhouqizi(前後七子) and gonganpai(公案派). A few investigators said he must be influenced by them as some evidence of the texts telling him, though he never said about the schools. This dissertation presents that he made his works differentiated from their works. Kim noted the characteristic word, xingling(性靈) of gonganpai as the human ability creating poems. However the relation between xingling and moral is different from that of gonganpai. He never bestowed the vocabulary the meaning trespassing morals he was confident as inviolable. He reinterpreted traditional meaning from Han Dynasty, numinous human ability creating poems which had ever been hostile to morals to one as one in Neo-Confucianism in Song Dynasty. He said xingling as acquired though cultivation as well as inherent contrary to xingling of gonganpai, which is valuable for its uncultivated honesty. The moral characteristic of xingling seems resulted from his Neo-Confucianism and the cognitive ability of Xin, mind which is called zhijue(知覺). Poeple can recognize the ultimate oneness of the universe, taiji(太極) with the help of zhijue. He tries new rhyme mixing or destructing rhymes from past, very long series of over 100 pieces of poems, and new subject matters like economic issues, the land management, the military and other trifling stuffs. He never set the ideal rules of poem from past, which was done by qianhouqizi. His various experiments on poem inspired poets of 18th of Joseon Dynasty. However the new characteristics means his works out of boundary not allowed to all the poems. His thoughts made his works free from traditional rules as well as destructing identities of poem itsel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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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반논문 : 사시자(謝施子) 남극관(南克寬)의 시문학

        박수천 ( Soo Cheon Park ) 동아대학교 석당학술원 2011 石堂論叢 Vol.0 No.50

        남극관은 조선 숙종조의 문인으로 26세의 짧은 인생을 살았던 사람이다. 늘 병고에 시달려 집안에서 소일하는 날이 많아 자연히 독서에 침잠할 수 있었다. 그의 깊고 다양한 독서체험은 그의 문학의식을 형성하게 했고 또한 그의 문학 작품의 문학성을 높이기도 했다. 그는 20세 때 生員試에 나가 2등으로 급제를 해 주변 사람들로부터 그의 문학적 역량을 인정받았다. 그러나 그 이후 지병이 악화되어 집안에 칩거하며 치병에 전심을 하게 되었다. 신병이 깊어진 이후 남극관에게 독서는 거의 일상생활이었다. 독서를 하면서 그는 그것을 孔子의 學琴 태도에 비유하며 이면의 깊은 뜻까지 파악하고자 하는 태도를 가졌다. 남극관은 평소의 깊은 독서에 기반해 명대 公安派의 袁宏道가 개진한 문학론에 상당한 관심을 표명하였다. 그때 당시에 조선의 문단에는 公安派의 문학론이 매우 넓게 퍼져 있었는데, 남극관도 袁宏道의 글을 읽고 그에 대한 자신의 생각을 기록해 놓았다. 袁宏道가 擬古派를 비판하며 작품의 개성과 독창성을 강조한 논리에는 동조를 했지만, 그 논의의 부정적 측면을 함께 거론하였다. 남극관은 이런 자신의 관점을 확장하여 당대 老論가의 핵심 인물인 金昌協의 문학론에도 거침없는 비판을 하였다. 金昌協의 문학론이 작품의 思致에만 치우쳐 그 氣格을 중시하지 않았던 점을 지적해 반박을 한 것이다. 公安派들이 擬古論을 부정하면서 宋詩에 대한 가치가 재조명되었는데, 남극관은 公安派의 논리에 공감을 가지면서도, 宋詩의 문학성에 대해서는 긍정적 태도를 갖지 않았다. 그는 唐詩를 전범으로 하면서 唐詩의 단순한 모방을 지양하고 그 본래의 정신인 개성과 독창성의 모습을 중시하였다. 남극관의 시작품에는 대체로 밝은 이미지가 많이 나타나지 않는다. 그가 남긴 작품수가 많지도 않거니와 그의 평생 신병에 의한 답답함과 우울함이 자주 작품에 드러났기 때문이다. 자신은 生員試 이후 大科에 나아가 입신을 하고 싶었으나 병으로 인해 그런 희망을 접고 집안에 칩거해야 했기에, 작품의 전체적 意境에 이런 작가적 모습이 반영된 것이다. 남극관은 기본적으로 시는 氣格을 중시해야 한다는 주장을 단언적으로 제시했다. 金昌協이 鄭斗卿의 시를 낮게 품평한 것에 대해 반론을 펼치면서 氣格의 측면으로 보아 鄭斗卿이 우리나라 조선조 삼백 년 이래 최고의 시인이라는 비평을 하기도 했다. 남극관은 氣格과 함께 시작품에서 자신만의 개성적 정감을 표출하고자 하였다. 때문에 남극관 시작품의 문학성은 그의 작품에 나타난 풍부한 서정성에서 독자적 면모를 찾아볼 수 있다. 타고난 문사의 감수성으로 주변의 경물을 포착하고 이를 자신의 언어로 조탁해 내는 재능은 당대의 문인들 중에서도 매우 높은 수준의 작품을 보여주었던 것이다. Sasija(謝施子) Nam, Keug-kwan(南克寬) was a famous poet during King Sookjong(肅宗) period in Chosun(朝鮮) dynasty. He lived only 26years, but his poems and his literary thoughts were received attention between literary writers. He had suffered a deep disease, he was restricted in his behavior he couldn`t go outside freely. He liked reading all the days remaining his room. His wide reading made his study and knowledge very deeply. He had concerned literary as an excellent writer, and he accepted Chinese literary thoughts. He had criticized Chosun(朝鮮)`s current literary trend, and he showed his own thoughts about literary criticism. He understood Tang style(唐風) as a highest state on the poem, but he rejected immoderate imitation. He accepted the theory of personalism and originality, he wanted to show his own personalism with significant and aftertaste by Tang style(唐風). He put emphasis on the personalism and originality writing his poems, and he expressed his own abundant individual emo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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