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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의 거리, 정동하는 신체들 - 4월혁명 재현 서사를 중심으로 -

        이시성 ( Lee Si-seong ) 한국현대문예비평학회 2021 한국문예비평연구 Vol.- No.71

        최근의 4월혁명 문학에 대한 연구들에서는 작가 혹은 작품 속 주체가 가진 편향된 이데올로기로 인해 4월혁명 문학이 혁명의 진정한 주체였던 민중의 모습을 제대로 재현해내지 못했음이 지적되었다. 본 논문도 이와 같은 문제의식을 공유하고 있으나 문학이 본질적으로 불충분한 재현물임을 인지하고, 그 한계를 문학적 형태를 통해 보완할 수 있다는 피에르 마슈레의 말을 빌려와 4월혁명 문학에 내재된 문학적인 방식의 답변이 무엇인지를 살펴보고자 했다. 이를 위해서 주목한 것은 정동 개념으로, 마주침에 의해 발생하지만 곧 휘발되어 버린 후 잠재성으로만 남아 언제고 다시 도래할 때를 기다리는 정동의 속성은 혁명의 그것과 무척 닮아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 논문에서는 4월혁명 문학을 정동을 통해 다시 보면서 주체의 이데올로기에 의해 전유되지 않는 혁명의 원동력이 무엇이었는지 정동과 신체를 키워드로 탐색해보았다. 혁명이 일어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발표된 작품들 속에서 정동은 주로 혁명에 대한 신체적 반응으로, 시위대열 안에서 신체가 느끼는 감각으로 드러난다. 그리하여 정동될 수 있는 신체를 가졌다는 최소한의 조건에 의해 혁명의 대열에 속할 수 있었다. 그러나 혁명으로부터 시간이 지나고 정동이 휘발된 상황에서 이러한 신체적 감각은 사라지고, 문학은 새로운 이행의 방식을 보여준다. 본 논문은 이때 문학이 혁명을 기억하며 어떻게 새로운 혁명적 정동을 창안하는 장(場)으로 역할하는지 살펴보고자 한다. Recent studies on the literature of the April Revolution point out that the literature of the April Revolution did not properly represent the publi c, which was the real subject of the revolution, due to the biased ideolo gy of the writer. This paper also shares the same opinion. However, I wanted to take a look at the literary form that complements the limitati ons of April Revolution literature, referring to Pierre Macherey's discuss ion that literature is inherently insufficient but its limitations can be sup plemented through literary itself. What I noticed was the concept of affect. This is because the properti es of affect is very similar to the properties of revolution. Therefore, in this paper, I explored what was the driving force of the revolution by re -examining the literature of the April Revolution through the concept of affect. The central keywords for this work are affect, and the body. In addition, after time passed and the revolutionary affect disappeared, I loo ked at how literature remembered the revolution and created a new revo lutionary affec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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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二次革命 이후 革命派의 분열과 歐事硏究會

        이상구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8 No.-

        본 논문은 2차 혁명 이후 혁명파가 분열하게 된 원인을 추적하고, 그로 인해 구사연구회가 성립하게 된 배경을 설명하였다. 민국 원년, 정치적 혼란 속에 章士釗는 ‘毁黨造黨說’을 제안하여 兩大黨에 의한 의회정치가 실현되기를 희망하였다. 그러나 원세개의 북양정부는 총통을 중심으로 한 전제체제를 구축하여 외국으로부터 차관을 도입하고 정식정부로 승인받았으며, 심지어 국민당의 유력자였던 송교인을 암살하였다. 이에 구국민당을 중심으로 토원군을 일으켰으나 원세개에게 진압되면서 실패하였다. 2차 혁명의 실패는 혁명파의 분열을 야기하여 동맹회시기부터 이어진 손문과 황흥간의 분열이 극도로 표출되기에 이르렀다. 따라서 본고에서는 양자의 서신을 통해 혁명파의 분열을 검토하였다. 양자의 서신에는 세 가지 쟁점이 확인된다. 첫째, 2차 혁명의 실패원인에 대해 손문은 황흥의 책임을 추궁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국민당의 개혁을 목표로 개조한 중화혁명당에 황흥파의 참가여부였다. 셋째, 양자의 감정적인 모순이 극단적으로 표출되었다는 점이다. 이어서 본고에서는 구사연구회의 성립과 활동에 대해 검토했는데, 특히 구사연구회의 ‘協議條件’의 의미를 파악하고자 하였다. 그 중 중점적인 내용으로 두 가지를 꼽을 수 있는데, 첫째, “당파를 구분하지 않고 인재의 집중을 도모한다”에서는 이모임이 정치계파를 초월하여 반원세개 통일전선을 형성하고자 하였다는 점이다. 둘째, “군사진행에 대해서는 군사담당자들이 비밀로 상의한다”라는 것으로, 결국 손문과 황흥간의 서신에서 거론된 황파군인들의 불만을 반영한 것이라는 점을 주목하였다. 결국 황파군인들을 중심으로 중화혁명당의 참가를 거부하고 있었고, 이들이 구사연구회라는 별도의 조직을 만들게 되었다고 설명하였다. 따라서 구사연구회는 반원세개 통일전선을 형성하기 위해 다양한 정치세력과 협력했고, 이러한 노력으로 3차 혁명에 공헌할 수 있었다는 점을 확인하였다. 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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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 담론의 복수화(複數化)와 계급 서사의 복원

        권경미 상허학회 2014 상허학보 Vol.40 No.-

        4.19 and 5.16 in the present case, not only as a 360-degree 1960s literature, which led to the interference of the literature and add new literary status as dynamic and ultra meaning. Because of literary studies in the 1960s also tend to correlate around 4.19 and 5.16 back or cut off a military coup a revolution, a revolution will succeed to stop mourning, or to explore the spirit went out to look like. However, these studies tend to have 5·16 succeeded 4·19 looks that complement the development. 5.16 The military regime is finished. 4.19 compared to it is 'literary origins' is an ideological obtain honor. However, the literature toward freedom, symbolizing the indomitable will of the human being excludes individuals through a revolution occurs. Become more and more noble revolutionary spirit of those who did not participate in the revolution, a revolution against the people in the political discourse. Participate in the revolution, but has ruled out such a revolutionary spirit , but people who be edited. They are not for electoral fraud invalidity was involved for their livelihood. However, these actions are ignored and the Revolution offense is not worthy. This form of already-made for less than ideal situation and personal circumstances of the participants, and shout slogans are ignoring minor will fit. Participants participated in the revolution, but the other reason is that each one has a Park‘s system that promised relief 'bread' was also present. 4.19 However, such a unidirectional oriented multiple revolution did not listen to the voice of the main principles of the military coup, respectively. Therefore, to restore the voice of the revolution and the surrounding polyphonic discourse to produce multiple pay a revolution. So you need to create a variety of narrative. 4·19와 5·16은 사건으로서만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1960년대 문학에 전방위적으로 간섭해서 새로운 문학을 이끈 문학의 추동태이자 초극태로서의 의미를 지닌다. 그렇기 때문에 1960년대 문학 연구 경향 역시 4·19와 5·16을 둘러싼 상관관계를 돌아보거나 군사 쿠데타로 단절된 혁명 의지를 애도하거나 중단된 혁명을 계승해 나간 정신을 탐색하는 모습을 보인다. 그런데 이러한 연구 경향들이 간취하고 있는 태도는 혁명 이후의 쿠데타, 쿠데타 이후의 혁명 정신 등으로 쿠데타와의 관계 속에서 혁명을 이해하고자 한다. 그러한 태도는 자연 4·19혁명을 기발생한 쿠데타에 맞춰 군사정권이 앞세운 체제이념에 도달하지 못한 미숙한 혁명이라고 여기게 된다. 그렇기 때문에 군사정권이 청사진을 제시하면서 대중들에게 ‘빵’을 약속하였고 청년들과 지식인 집단이 주도한 혁명은 정치적인 억압으로부터의 ‘자유’를 성취했다고 본다. 그렇지만 이러한 관점들은 결국 군사쿠데타가 4,19를 계승하며 보완 발전했다는 논리 안으로 포섭 가능할 여지를 남겨두게 된다. 두 개의 사건이 연속적이며 시간차를 두고 전후에 벌어진 것이라는 인식은 계속 혁명을 혁명으로 인지하지 못하게 할 수 있다. 그렇게 된다면 결국 4·19를 계승, 발전해 나간 박정희체제가 혁명정신을 자양분으로 이념적으로나 제도적으로나 일견 완결되고 완성된 국가체로 인식하게 한다. 그리고 그로 인해 박정희체제에 대한 극복 역시 요원해질 수밖에 없게 된다. 그리고 갈등과 모순을 제조, 재생산해낸 박정희체제에 대한 비판하면 할수록 박정희체제에 대한 아우라는 더욱 더 공고화되며 강화되는 양상을 보인다. 그래서 박정희체제는 맞수가 없을 정도의 괴물로 묘사되는 경향을 보일 수 있다. 5·16이 군사정권 창출이라는 실리를 챙긴 것에 비해 4·19는 ‘문학의 기원’이라는 이념적인 명예를 획득한다. 4·19 주체의 탄생은 현대문학의 발견이며 자유에의 예찬은 시민의 각성이자 주체성 획득의 의미를 지닌다. 그래서 4·19혁명을 생생하게 증언하는 문학 작품에서도 혁명을 묘사하는 장면을 시민과 시위 진압대의 모습에 초점을 맞추는가 하면 시민들의 일관된 구호에 주목하는 경향을 보인다. 그리고 이와 같이 통일되고 관리된 시위대의 모습을 문학 안에 형상화함으로써 혁명 정신의 당위성과 고귀성을 부각하고자 한다. 그런데 이와 같이 문학에서 조명되는 현장의 모습이 비교적 통일된 형태로 자유를 향한 불굴의 인간 의지를 형상화냄으로써 혁명의 의의를 규명하고 정립하려는 태도는 자연스레 혁명을 통해 배제되는 개인들을 양산해낸다. 혁명 정신이 점점 더 숭고해질수록 혁명에의 비참여자, 관조자, 반대파들 등은 혁명을 기점으로 일거 정치 담론에서 타자화된다. 그리고 이들은 자신들의 비겁함과 부족한 용기를 고백하며 참회하거나 침묵할 수밖에 없다. 혁명을 통해 선취한 자유와 새시대에 대한 희망 이면에는 숭고한 역사적 사건에 동참하지 안/못함으로써 필연적으로 가질 수밖에 없는 타자의 배제가 선점되어 나타난다. 그런데 그러한 배제에는 혁명에는 참여했으나 혁명 정신에는 부합되지 못하다는 이유로 관리되어 편집된 이들도 있다. 이들은 부정선거 무효보다 당장의 생계가 급급하기에 가열된 시위 행렬에 투신해 자신의 욕망을 분출하기도 하지만 이러한 행위는 무시되고 혁명에 합당하지 못한 행위로 간주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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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혁명공화파 여성시민협회’ - 프랑스혁명기 여성 정치클럽과 ‘불가능한’ 여성 시민권 -

        양희영(Yang, Heeyoung) 호서사학회 2020 역사와 담론 Vol.0 No.96

        이 글은 프랑스혁명기 파리 유일의 여성 정치클럽 ‘혁명공화파 여성시민협회’의 역사를 살펴본다. 1793년 5월 10일 여성의 무장을 통한 조국 수호를 목적으로 창설된 ‘협회’의 역사는 세 시기로 나눠볼 수 있다. 첫째는 1793년 5월 31일·6월 2일 봉기로 정점에 달한 대(對)지롱드파 투쟁의 시기, 둘째는 1793년 6-8월, 산악파와의 짧은 밀월기를 거쳐 격앙파 르클레르와 함께 이후 공포정치에서 실현될 비상조치와 새 헌법의 시행을 요구한 시기, 셋째는 1793년 가을 자코뱅과 국민공회의 공격을 받고 해체되는 시기이다. 1848년 혁명기에 다시 등장한 파리의 여성 정치클럽 ‘여성의 목소리’ 협회는 대혁명기 ‘혁명공화파 여성시민협회’를 혁명기 정치활동의 롤 모델로 여기지 않았다. ‘1848년의 여성들’에게 있어 ‘혁명공화파 여성시민협회’는 난폭하고 무질서한 혁명기 여성 민중운동의 일부일 뿐이었다. 이 글은 혁명기 여성 민중운동에 대한 1848년 여성들의 기억에 기초한 다음과 같은 문제들에 답한다. ‘혁명공화파 여성시민협회’의 여성들은 무엇을 주장하고 어떻게 행동했는가? 그들은 제대로 교육받지도 조직되지도 않았는가? 그들은 난폭하고 폭력적이었는가? 그들의 행동은 무질서하고 비효율적이었는가? 그들은 특정 정파의 권력 장악을 위한 도구 혹은 정파 투쟁의 희생양이었는가? 그리고 ‘여성’의 조건과 지위를 개선하는 데 아무런 역할도 하지 못했는가? This article examines the history of the ‘Society of Revolutionary Republican Women’, the only women’s political club in Paris during the French Revolution. The history of the ‘Society’, which was founded on May 10, 1793 for the purpose of arming women to defend the country, is divided into three periods. The first is the period of the struggle against the Girondins, which culminated in the insurrection of 31 May to 2 June of that year. The second is the period from June to August 1793 in which, after the short honeymoon period with the Montagnards, the ‘Society’, together with Leclerc, an Enragé, demanded emergency measures, which would be realized in the ‘Terror’, and the enforcement of the new constitution. The third is the period in which the ‘Society’ was disbanded after being attacked by the Jacobins and by the National Convention in the fall of 1793. The ‘Society of the Women’s Voice’, a women’s political club which reappeared in Paris during the Revolution of 1848, did not regard the ‘Society of Revolutionary Republican Women’ as a role model for revolutionary political activities. For the ‘women of 1848’, the ‘Society of Revolutionary Republican Women’ was only part of the violent and disorderly revolutionary women’s popular movement. This article answers the following questions based on the memories of ‘women of 1848’ regarding the revolutionary women’s popular movement. What did the women of the ‘Society of Revolutionary Republican Women’ demand and how did they act? Were they not well educated and not well organized? Were they reckless and violent? Was their behavior disorderly and inefficient? Were they tools for the seizure of power by certain factions, or were they victims of the faction struggle? Moreover, did they play no part in improving the condition and status of ‘wom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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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슐레의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

        김응종(Kim, Eung-jong) 호서사학회 2019 역사와 담론 Vol.0 No.91

        미슐레가 시도한 공화주의 프랑스혁명사의 주인공은 민중이다. 민중이 주권자이기 때문이다. 미슐레의 혁명사가 나오기 전에는 아돌프티에르와 프랑수아 오귀스트 미녜만이 체계적인 혁명사 연구서를 발표했는데, 이들은 사회적 측면이나 경제적 측면은 무시했고 혁명을 부르주아지의 위업으로 파악했다. 미슐레는 부르주아지에서 민중으로 주인공을 이동했다는 점에서 사학사적 평가를 받을 수 있다. 미슐레는 민중이 혁명 전선에서 물러나고 엘리트 혁명가들이 혁명을 주도하면서 혁명이 탈선했다고 본다. 미슐레에게 있어서 로베스피에르가 주도하는 공포정치 시기는 혁명이 정치적 민주주의에서 사회적 민주주의로 심화되는 시기가 아니다. 미슐레가 그리는 로베스피에르는 민중의 염원을 실천하는 민중의 벗이 아니라 “군주”, “신”, “우상”과 다르지 않았다. 혁명과 전쟁이라는 위급한 상황에서 불안해하고, 의심하고, 고발하고, 감시하고, 처벌하는 인물이었다. “청렴자”요 ‘덕’의 정치가라기보다는 내적 정화에만 사로잡힌 중세의 이단재판관과 같은 인물일 뿐이었다. 미슐레에게 있어서 공포정치는 위기에 빠진 조국을 구하기 위한 비상조치이기는 했으나 ‘상황’의 산물인 동시에 자코뱅적 광신의 소산이었으며, 승리의 수단이었다기보다는 오히려 적을 만들어내었고 최종적으로는 혁명을 파괴하였다는 점에서 반혁명적이었다. 유명한 반교권주의자인 미슐레는 중세 가톨릭교회와 마찬가지로 선악이분법에 사로 잡혀 있었다. 혁명은 선이었고 반혁명은 악이었다. 미슐레는 가톨릭교회가 반혁명의 온상이었다고 비판할 뿐 그 가톨릭교회가 ‘인간과 시민의 권리선언’에서 보장한 재산권을 빼앗겼으며 세속 권력의 가혹한 탄압을 받았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았다. 미슐레는 방데의 농민들이 가톨릭 근왕군을 결성하여 반혁명에 나선 것에 대해서도 그들이 광신적인 신부들의 선전에 넘어가 야만적인 폭력을 행사한 무지몽매한 사람들이라는 점을 강조할 뿐 그들의 행동에 대해서 충분한 배려를 하고 있지 않다. It is the people who is the protagonist in the Michelet’s republican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This is because the people is sovereign. Before Michelet’s republican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came out, Adolphe Thiers and François-Auguste Mignet published a systematic study about the French Revolution, which neglected the social and economic aspects and identified the Revolution as a bourgeois feat. Michelet could be evaluated in historical terms for moving the protagonist of the French Revolution from the bourgeois to the people. Michelet maintains that the revolution has derailed as the people have stepped down from the revolutionary front and elite revolutionaries have led the revolution. For Michelet, the reign of the Terror led by Robespierre is not a time when revolutions escalate from political democracy to social democracy. Robespierre, described by Michelet, was not a friend of the people who practices the people’s aspirations and he was no other than “monarch,” “God,” and “idol.” Robespierre was a person who was anxious, suspicious, charged, watched and punished in the critical situation of the revolution and the revolutionary war. Rather than being a “integrity” and “good” politician, he was just a medieval heretic judge obsessed with internal cleansing. For Michelet, the reign of the Terror was an emergency measure to save his country from crisis, but it was also a product of “the situation” and a product of Jacobin fanaticism, creating enemies rather than a means of victory and ultimately destroying the revolution. Michelet, a famous anticlericalist, was obsessed with good and evil dichotomy, as was the case with the medieval Catholic Church. The revolution was good and the counter-revolution was evil. Michelet criticized the Catholic Church for being a hotbed of counter-revolution, but refused to acknowledge that the Catholic Church was deprived of the property rights guaranteed by the Declaration of Human and Civil Rights and that it was severely oppressed by secular power. Michelet did not give full consideration to the actions of peasants in Vendée anti-revolution, only stressing that they are ignorant people who used barbaric violence following fanatic priests" propagand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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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프랑스혁명기 슈앙(Chouans)의 반혁명의식

        김응종(Kim, Eung-jong) 호서사학회 2017 역사와 담론 Vol.0 No.81

        이글은 프랑스혁명기에 프랑스 서부 브르타뉴 지방을 중심으로 일어난 슈앙 운동이 불법적인 비적 활동도 농민들의 게릴라 운동으로만 그친 것도 아니었다는 점을 드러내기 위해 잠재적 슈앙이라 할 수 있는 브르타뉴 농민들의 반혁명의식, 장 슈앙 형제들의 ‘숭고한’ 게릴라 운동, 망명귀족으로서 슈앙 운동에 가담한 클로드 오귀스탱 테르시에의 활동, 브르타뉴 슈앙군 총사령관이었던 조르주 카두달의 불굴의 저항 등을, 관련 ‘회고록’을 중심으로 살펴본 것이다. 슈앙은 어느 단계에 있었든지 모두 ‘종교’와 ‘국왕’이라는 대의를 위해 헌신한 사람들이었다. 슈앙의 반혁명이념은 뚜렷하였으니, 그것은 ‘종교’와 ‘국왕’이었다. 그들은 명실상부한 ‘가톨릭근왕군’이었다. 이러한 점에서, 이들의 저항은 단순한 반혁명(anti-Revolution)을 넘어 정치적인 대응혁명(counter-Revolution)의 단계로 나아갔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이제까지 프랑스혁명사는 파리의 혁명가들 중심으로 짜여졌다. 그러나 파리의 혁명가들이 혁명사의 일부이듯이, 브르타뉴의 슈앙도 혁명사의 일부임은 분명하다. 그들의 증언을 경청하고 그들의 고통을 이해하는 것이 혁명에 대한 공정한 시각을 갖는데 필요할 것이다. This article aimed to examine the various facets of the Chouans mouvement by analysing the Memories written by the Chouans themselves. The Chouans was neither the illegal brigands nor the small sporadic guerilla groups. The Chouans were, no matter which stage they were on, devoted themselves to the cause of the catholic religion and king. It is evident that their counter-Revolutionary consciences were ‘religion’ and ‘king’. Their resistance is not a mere anti-Revolution but can be called as a Counter-Revolution. So far, in Korea, the history of the French Revolution centered around the parisian revolutionaries. But as they are a part of the history of the revolution, so the Chouans are sure to be a part of it. It is necessary to hear their testimony to have a fair understanding of the French Revolu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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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혁명음악의 선구자 최음파에 대하여

        남희철 한국음악학학회 2016 음악학 Vol.24 No.2

        이 글은 홍군시기(1927~1937)의 음악가 최음파(崔音波)에 대한 연구이다. 중국의 `3대 인민음악가` 중 네얼(?耳)은 홍군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센싱하이(?星海)와 정율성(鄭律成)은 8로군 시기를 대표하는 작곡가로 알려져 있다. 그런데 최음파는 이들보다 앞서 혁명음악활동에 뛰어든 한인음악가이다. 우선 최음파를 알게 된 경위와 확보된 자료들에 대한 검토를 통해 최음파에 대해 알아보겠다. 홍군시기에 중앙소비에트구역인 루이진(瑞金)에서 활동한 주요한 음악가로, 1931년에 쟝시성의 루이진에서 열린 제1차 전국노농대표대회를 경축하여 <전국노농대표대회옹호의 노래>를 작곡하였고, 노농극사의 성립을 경축하여 <노농극사사가>를, 장정도중에 마오쩌둥(毛澤東)이 지휘하는홍군 제1방면군과 짱궈토우(張國濤)가 지휘하는 홍군 제4방면군이 스촨성(四川省) 모궁(懋功)에서의 회합을 경축하여 <양대주력회합가>를, 같은 시기에<유격대행진곡>을 작곡하였다. 중앙혁명근거지에서의 최음파는 “조선적(籍) 작곡가”, “우리의 바이올린전문가”로 소문난 열정적인 음악가였는데, 그가 문예사업에 주력했다는 점, 광저우봉기에 참가한 한인들 중 “성이 최씨라는 바이올린 연주가”는 최음파일 가능성이 크다는 점, 2만5천리장정도중 1935년 6월 중순 이후에 서거하였을 것이라는 점을 확인할 수 있다. 중국현대음악사에서 “무산계급혁명음악의 발전을 위해 길을 개척한 사람”으로 거론되는 네얼(?耳)보다 먼저 혁명음악활동에 뛰어들었고 네얼보다 적어도 2년 앞서 혁명음악을 창작하였다는 사실을 통해, 최음파가 중국 주류음악이 개척되던 초기에 선두에서 활약한 중요한 음악가이며 무산계급혁명음악의 발전을 위해 길을 개척한 사람이라는 평가가 가능하다. 文是一篇關于紅軍時期(1927~1937)活躍在中央蘇區的音樂家崔音波的論文。?所周知, 中國有三大人民音樂家。其中, ?耳是紅軍時期代表性的作曲家,?星海和鄭律成是八路軍時期代表性的作曲家。而崔音波是比他們更早步入革命音樂活動的韓人音樂家。首先, 本文通過對已掌握的資料進行檢討,得知崔音波是紅軍時期中央根据地文藝活動的一員主將,他爲慶祝1931年在瑞金召開的第一屆全國工農代表大會譜寫了<擁護全國工農代表大會>,爲工農劇社的成立譜寫了<工農劇社社歌>,爲慶祝毛澤東領導的紅軍第一方面軍和張國濤指揮的紅軍第四方面軍在四川省懋功勝利?合譜寫了<兩大主力匯合歌>,同一時期又創作了<遊擊隊進行曲>。接下來,本文考證了被根据地軍民尊稱爲“朝鮮籍作曲家”、“我們的小提琴專家”的崔音波是熱情?滿的音樂家,是中央根据地文藝事業的一員主將;參加廣州起義的韓國人中“姓崔的小提琴家”?有可能是崔音波;崔音波是在1935年6月以后犧牲等事實。最后,本文對崔音波與中國音樂史上被認爲“爲中國无産階級革命音樂的發展開闢道路”的?耳做了比較,得知崔音波先于?耳參加了革命音樂活動,至少比?耳早二年創作了革命音樂作品的事實。總的來說,崔音波是中國主流音樂開拓初期活躍在紅軍隊伍中的重要音樂家, 是“爲中國无産階級革命音樂的發展開闢道路”的一位先驅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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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역사 발전에서 혁명(가)의 역할 -칸트와 헤겔에 대한 아렌트 논의에 기초하여

        이정은 ( Jeong Eun Lee ) 한국헤겔학회 2010 헤겔연구 Vol.0 No.28

        이 글은 기술 발달이 인류의 생존 자체를 위협할 만큼 심각한 상황에 이르렀기 때문에 20세기 후반의 새로운 세대가 진보에 대한 희망을 철저하게 상실했으며, 그로 인해 사회의 급격한 변화와 발전을 야기하는 혁명(가)에 대해 회의적 태도를 취하는 아렌트의 정치 철학에서 혁명의 의미, 혁명의 원동력과 혁명 주체를 탐구하는데 일차 목적이 있다. 분석 과정에서 아렌트는 혁명 문제를 둘러싼 칸트와 헤겔의 주장을 중요하게 도입하며, 그들의 역사 철학과 혁명의 관계를 활용하여 자신의 고유한 대안을 도출한다. 그러므로 세계사에 결정적 변화를 낳은 프랑스 혁명과 미국 혁명에 대해 칸트와 헤겔이 어떤 반응을 보이는지, 왜 이중적 태도를 취하는지, 혁명(가)의 역할이 역사 발전에서 어느 정도 비중을 차지하는지를 아렌트의 해석에 견주어서 살펴보는 것을 이 글의 궁극 목적으로 삼는다. 미래 예측이 불투명한 상태에서 미래 가능성과 미래에 대한 희망을 찾기 위해 칸트와 헤겔의 역사 발전의 원동력과 역사적 주체를 혁명의 원동력과 혁명적 주체와 연결하여 탐구하면서 현대 기술 발달이 낳은 문제점을 타개하는 주체적 힘을 추적해보겠다. This essay aim to seek for the meaning of revolution and the revolutionary subject in Arendt`s system of political philosophy in comparison with Kant and Hegel`s philosophy of history and theirs viewpoint of revolution(ist). She asserts that it is impossible to bring about revolution in future and there is no longer revolutionist for the present level of technological advance. Therefore, I want to suggest that there is an alternative left and to assert that it remains in the possibility of the revolution(ist)

      • KCI등재

        이차혁명(二次革命) 이후 혁명파(革命派)의 분열과 구사연구회(歐事硏究會)

        이상구 호남사학회 2015 역사학연구 Vol.58 No.-

        本文分析二次革命後革命派分裂的原因,說明由此成立的歐事硏究會的背景。民國元年在政治混亂的局面下,章士釗提出了“毁黨造黨說”,希望能구實現兩大黨組成的議會政治。然而,袁世凱的北洋政府構築以總統爲中心的專制體制,從外國借款,列强承認爲正式的合法政府,甚至暗殺國民黨的重要人物宋敎仁。對此,孫中山以舊國民黨爲中心發起討袁軍,被袁世凱鎭壓而失敗。 二次革命的失敗導致了革命派的分裂,顯露出同盟會時期開始出現的孫黃分岐極度惡化。由此,本文通過兩者往來的書信分析革命派分裂的問題。在兩者往來的書信中,確認了三點分岐。第一點是,對於二次革命失敗的原因孫中山追究黃興的責任。第二點是,以國民黨改革爲目標而改組的中華革命黨,黃興派的參加與否。第三點是,兩者間表露出情感上的矛盾。 本文分析歐事硏究會的成立和活動,特別是理解歐事硏究會“協議條件”的意義。其中重點內容主要有兩點,其一,從“圖人才集中、不分黨界”這一點來看,該組織超越了政治派別,號召形成反袁世凱的統一戰線。其二,從“關於軍事進行,由軍事人員秘密商橋之”這一點來看,正是反映了在孫黃之間往來的書信中討論的黃派軍人們的不滿。表明了最終以黃派軍人爲中心的革命派人士拒絶加入中華革命黨,他們령外成立了歐事硏究會。 由此闡明了歐事硏究會爲形成反袁世凱的統一戰線與不同的政治勢力合作,通過這樣的努力爲三次革命做出了貢獻。

      • KCI등재

        1960년대 이후 태안지역 동학농민혁명 기념(선양)사업 분석과 현대적 의의

        문영식 동학학회 2020 동학학보 Vol.0 No.57

        태안군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의 역사는 문원덕 선생으로부터 시작되었다. 문원덕 선생은 1894년 태안지역의 동학농민혁명을 주도하신 문장로 대접주의 손자로 부친이신 문병석 선생까지 3대가 모두 동학을 통한 민족운동과 항일운동을 이은 인물이다. 또한 연구자 역시 부친이신 문원덕 선생의 딸로 아버지와 함께 태안군의 동학농민혁명의 선양사업을 시작해 온지가 벌써 50년에 이르고 있다. 태안군의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은 먼저 동학농민혁명 기념사업을 위한 조직체를 구성하는 것으로부터였다. 유족회와 동학농민혁명군의 추모탑건립위원회를 발족하였고 기념사업회도 출범시켰다. 또한 기념탑 건립을 실시하여 구체적인 선양 사업을 실시하였다. 그리고 최종적으로는 기념관 건립을 실시하여 내년인 2021년 개관을 앞두고 있다. 또한 동학농민혁명의 참여자 명단 확보와 관련 기록물 발간, 선양사업 등을 진행하여 왔다. 그러나 최종적으로는 참여자와 가해자가 모두 화해와 상생의 길로 함께 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관과 민뿐 아니라 학계에서도 도움을 주어야 한다. 무엇보다도 동학농민혁명에 관한 왜곡된 역사는 시정되어야 한다. 비록 1894년의 동학농민혁명은 좌절되었지만 이후의 3.1 독립혁명과 항일운동, 4.19 혁명, 이후의 민주화운동의 든든한 토대가 되었다. 문제는 앞으로 이같이 훌륭한 혁명정신을 이어받아 후손들이 잘 실천하고 후대에도 계속 전승될 수 있도록 노력해야 한다. The history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mmemorative project in Taean-gun began with Moon Won-deok. Moon Won-deok is the grandson of Moon Jang-ro, who le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aean in 1894. He is the successor of the national movement through Donghak and the anti-Japanese movement, including his father, Moon Byung-seok. In addition, the researcher is also the daughter of his father, Moon Won-deok, and has been carrying on the Commemoration Project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in Taean-gun for 50 years with his father. Taean-gun’s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mmemoration project first started with the formation of an organization fo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mmemoration project. Taean-gun’s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mmemoration project first started with the formation of an organization for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commemoration project. The Bereaved Family Association and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ary Army commemorative tower construction committee was launched, and a commemorative project group was launched. In addition, the construction of a memorial tower was carried out to carry out a specific Commemoration project. In the end, the memorial hall was built and is about to open next year, 2021. In addition, it has secured a list of participants in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published related records, and conducted the Commemoration project. However, in the end, both the participant and the perpetrator must go along the path of reconciliation and coexistence. To this end, not only the government and the public, but also the academia must provide help. Above all, the distorted history of the Donghak Peasant Revolution must be corrected. In the future, we must take over this great revolutionary spirit and make efforts so that our descendants can practice it well and continue to pass on it to the future generati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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