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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역사 속의 메가 이벤트 : 조선시대 강무(講武)

        이규철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2018 글로벌문화콘텐츠학회 학술대회 Vol.2018 No.1

        강무(講武)는 전근대 시기 국왕의 주도 아래 시행되었던 대규모 국가행사로 군사훈련과 사냥 등을 통해 이루어졌다. 한국사 속에서 강무 행사는 조선시대에 집중적으로 이루어졌으며, 특히 조선전기에 국왕의 권위와 위상을 나타내는 행사로 진행되었다. 한국의 전근대 시기에 많은 선수들이 참여하고 대중들이 응원하는 방식의 스포츠 행사와 같은 메가 이벤트는 없었다. 하지만 강무나 국왕의 행차 등이 메가 이벤트 역할을 수행했다. 조선시대 강무는 국왕의 권위는 물론 군사와 관련된 국가의례였기 때문에 매우 중요한 행사로 진행되었다. 특히 조선초기의 경우 새로 준비한 진법(陣法) 등을 강무를 통해 실제로 훈련했다. 따라서 조선시대의 강무는 단순한 국가의례 이상의 의미를 지닌 메가 이벤트라고 설명할 수 있다. 더욱이 조선시대의 백성들은 행사에 참여하는 국왕의 행차 때, 최고권력과 소통할 수 있는 기회를 제한적으로 가질 수 있었다. 조선시대의 강무 역시 현대의 대형 스포츠 이벤트처럼 국가 구성원 사이의 소통장 역할을 담당했던 것이다.

      • KCI등재

        한국사상(韓國思想)(사학(史學)) : 조선시대 국왕의례에 대한 연구 -강무(講武)를 중심으로-

        정재훈 ( Jae Hoon Jung )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본고는 조선시대 국왕의례 가운데 하나인 강무(講武)에 대한 연구이다. 강무는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로서 군례(軍禮)에 속하는 의례이다. 국왕이 직접 행하는 이 강무 의례는 국가를 무(武)로써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활발하게 시행되었던 이 의례가 조선 중기로 오면 급격하게 시행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국왕의 의례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의례라고 볼 수 있는 강무 의례가 이렇게 드물게 시행된 배경에는 국왕의 위상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강무는 사냥을 하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군사 훈련의 성격이 강하였고, 국왕이 주체가 되어 위엄 있게 치러진다면 그만큼 국왕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측면이 강했다. 강무가 줄어드는 데는 바로 이러한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즉 무(武)적인 요소보다 문(文)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사림의 등장과 그에 따라 국왕에게 성리학적 교양이 요청된 점이 중요한 변화의 요인이었다. 여기에 더해 장기간에 걸친 평화가 지속된 점도 배경이 된다. 조선후기에는 강무가 조선전기에 사냥과 군사훈련이 결합된 형태와는 다르게 사냥이 생략된 채로 열무(閱武) 위주의 행사로 치러졌다. 또 이는 국왕의 행차인 능행(陵幸)과 연결되었다. 이런 점은 영조와 정조 같은 탕평국왕들이 조선 초의 제도 회복을 통해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던 지향과 연결된다. 다만 조선 초의 제도와 반드시 같아질 수 없었던 것은 역시 조선 중기를 거치며 강무 제도 자체가 약화된 점에서 기인하며, 이를 완전하게 회복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This study is about the royal ritual Gangmu. Gangmu is one of the Orye(五禮), and ritual that is subject to Gunrye(軍禮). Gangmu ritual is very important in the defense of a country. But the performance number of Gangmu had been reduced seriously in the middle Choson dynasty. In this historical background, there was the fact that the status of king had gone through a lot of change. In Gangmu, it adopted the form of hunting, but had its military exercise. If the enforcement of Gangmu was carried out by King, the authority of king revealed itself. There was reason to be certain about its decrease. The main cause of changes was appearance of sarim(士林) and the request for the king. In late Chosun Gangmu was carried out mainly with Yeolmu(閱武) without hunting. And it were closely connected Neunghang(陵幸) that was king`s ceremonial walk. This characteristics were connected with the king who were Y대ngjo(英祖) and Jeongjo(正祖).

      • KCI등재

        조선 초기 국왕의 사냥에 대한 인식 변화와 ‘講武’의 의례화

        허대영 조선시대사학회 2023 朝鮮時代史學報 Vol.- No.106

        전근대 사회에서 국왕이 주도한 사냥은 공적인 군사훈련이자 국왕의 권위를 보이는 의례였다. 특히 조선에서는 1402년(태종 2) 국왕 주도의 사냥을 ‘講武’라 명명하고, 이를 하나의 군사훈련의례로서 정립하였다. 일반적으로 강무는 태종 초에 군사훈련의례로서 정립된 이후 세종대에 이르러 의례로서 여러 제도 정비를 통해 이상적인 의례로 구현된 것으로 이해되었다. 세종대를 강무 제도의 완성으로 보는 기존의 인식을 통해서는 이후 강무의 변화를 본질에서 벗어난 변질로 이해할 수밖에 없었고, 또한 고려 말 국왕의 사냥과 조선의 강무 역시 단절적으로만 이해하는 한계를 갖는다. 기존 연구의 한계를 극복하기 위해서 조선 초 국왕의 사냥이 의례로서 정립되는 과정 자체를 고찰하고, 이를 통해 국왕의 사냥에 대한 인식의 변화를 추적할 필요가 있다. 이를 통해 고려 말 국왕의 사냥은 국왕 주도의 정국 운영과 이를 위한 측근 세력을 양성시키는 정치 도구로 활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조선 건국 이후 국왕의 사냥은 국왕의 사적인 정치 도구에서 벗어나 공적인 명분과 기능을 확보할 필요가 있었고, 태조와 정도전은 이를 위해 고제의 이상을 따라 군사훈련의례로서 국왕의 사냥을 지향하였으나 이를 구현하지 못하였다. 이후 태종은 먼저 국왕의 사냥은 ‘사냥이 아니라 강무다.’라고 선언함으로써 국왕의 사냥을 군사훈련의례로 인식하도록 하고, 뒤이어서 군사훈련의례로서 제도를 정비하였다. 강무의 의례 절차는 고제를 따라 오례의 등에 의주로 정리되었지만, 태종과 세종대에 실제 시행되고 있었던 강무는 정해진 목적지를 왕복하는 일종의 순행에 가까웠다. 순행형 강무는 고제와는 차이가 있었음에도 고제를 계승한 것으로 이해되었고, 조선 강무의 전형으로 인식되었다. 세조대 이후 점차 국왕의 사냥은 강무보다는 순행의 성격이 강해졌고, 이에 따라 강무의 형태도 변화하였다. 성종대 강무는 그 규모가 줄어드는 동시에 도성 인근의 거점을 중심으로 행해졌고, 연산군대 이르면 국왕의례로서 강무는 거의 해체되어 군사들의 집중훈련과 같은 형식으로 변화하였다. 하지만 이러한 형식의 변화에도 불구하고 당대에는 이를 모두 강무로 인식하였다. The royal hunting is both a military training and a ritual to show the king's authority. In the case of Joseon, the royal hunting in 1402 (Taejong 2) was named 'Gangmu (講武)' and became a military training ritual. In general, it is understood that Gangmu was established during the early reign of King Taejong. Then,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ng, the institutional arrangement was completed, giving it an ideal form. According to the above understanding, the change of Gangmu after that time was understood only as a detoration, and it was understood that the royal hunting of Goryeo and the Gangmu of Joseon were also disconnected. In order to escape from this perspective, I paid attention to the process of royal hunting becoming a ritual in the early Joseon Dynasty, and in the process, I traced the change in perception of royal hunting. In the late Goryeo Dynasty, royal hunting was used as a political tool to nurture his aides, and after the founding of the Joseon Dynasty, royal hunting needed to secure a public justification away from the king's private political tool. Taejo and Jeong Do-jeon aimed for the royal hunting as a military training ritual that fit the ideal of the old system, but failed to realize it. King Taejong declared, "It's not hunting, it's 'gangmu'" regulating royal hunting as a military training ritual and then reorganizing the system as the military training ritual. The royal hunting had a ceremonial procedure that fit the ideal of the old system, but the Gangmu that was actually being performed was different from the procedure. It was round-trip type to and from a set destination. It is recognized as a typical Gangmu in Joseon.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the royal hunting began to change in form as its characteristics became stronger as a ceremonial tour rather than a military training ritual. In the reign of King Seongjong, Gangmu was mainly performed in bases near the capital city. However, during the Yeonsangun era, the royal rite of 'Gangmu' was almost dismantled and transformed into a form of intensive military training. Despite the change in the form of royal hunting, it was all recognized as Gangmu at the time.

      • KCI등재

        조선시대 국왕의례에 대한 연구 – 강무(講武)를 중심으로 –

        정재훈 한국사상문화학회 2009 韓國思想과 文化 Vol.50 No.-

        This study is about the royal ritual Gangmu. Gangmu is one of the Orye(五禮), and ritual that is subject to Gunrye(軍禮). Gangmu ritual is very important in the defense of a country. But the performance number of Gangmu had been reduced seriously in the middle Choson dynasty. In this historical background, there was the fact that the status of king had gone through a lot of change. In Gangmu, it adopted the form of hunting, but had its military exercise. If the enforcement of Gangmu was carried out by King, the authority of king revealed itself. There was reason to be certain about its decrease. The main cause of changes was appearance of sarim(士林) and the request for the king. In late Chosun Gangmu was carried out mainly with Yeolmu(閱武) without hunting. And it were closely connected Neunghang(陵幸) that was king's ceremonial walk. This characteristics were connected with the king who were Y대ngjo(英祖) and Jeongjo(正祖). 본고는 조선시대 국왕의례 가운데 하나인 강무(講武)에 대한 연구이다. 강무는 오례(五禮) 가운데 하나로서 군례(軍禮)에 속하는 의례이다. 국왕이 직접 행하는 이 강무 의례는 국가를 무(武)로써 지켜야 한다는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한 의미가 있는 의례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조선 전기에 활발하게 시행되었던 이 의례가 조선 중기로 오면 급격하게 시행 횟수가 줄어들게 되었다. 국왕의 의례 가운데에서도 핵심적인 의례라고 볼 수 있는 강무 의례가 이렇게 드물게 시행된 배경에는 국왕의 위상의 변화가 자리하고 있었다. 강무는 사냥을 하는 형식을 취하였지만 군사 훈련의 성격이 강하였고, 국왕이 주체가 되어 위엄 있게 치러진다면 그만큼 국왕의 권위를 드러낼 수 있는 측면이 강했다. 강무가 줄어드는 데는 바로 이러한 것이 이유가 될 수 있다. 즉 무(武)적인 요소보다 문(文)적인 요소를 강조하는 사림의 등장과 그에 따라 국왕에게 성리학적 교양이 요청된 점이 중요한 변화의 요인이었다. 여기에 더해 장기간에 걸친 평화가 지속된 점도 배경이 된다. 조선후기에는 강무가 조선전기에 사냥과 군사훈련이 결합된 형태와는 다르게 사냥이 생략된 채로 열무(閱武) 위주의 행사로 치러졌다. 또 이는 국왕의 행차인 능행(陵幸)과 연결되었다. 이런 점은 영조와 정조 같은 탕평국왕들이 조선 초의 제도 회복을 통해 국왕의 권위를 높이려고 하였던 지향과 연결된다. 다만 조선 초의 제도와 반드시 같아질 수 없었던 것은 역시 조선 중기를 거치며 강무 제도 자체가 약화된 점에서 기인하며, 이를 완전하게 회복하지는 못하였던 것이다.

      • KCI등재

        조선시대 강무(講武)의 메가이벤트적 성격과 강무콘텐츠 제작·활용 방안

        이규철,이종오 글로벌 문화콘텐츠학회 2018 글로벌문화콘텐츠 Vol.0 No.37

        The Military Training was a large-scaled national event which was executed under the lead of the King during the pre-modern period. The Military Training not only belonged to a national ceremony lead by the King, but also contained the events such as battle formation training & hunting. A type of sports event represented by national ceremony as well as military drill used to be processed in combination. The event of The Military Training was progressed intensively during the Joseon Dynasty Era in the Korean history. Therefore, it is sufficiently probable that it was explained as mega-event processed in the Korean history. The Military Training during the Joseon Dynasty Era was mobilized in a great scale for royal families, ministers, military officers and people including the King. They were all able to participate in the event in order as a rule. The Military Training was the very large-scaled national event in which all the people from the King to the general citizens could participate. Such Military Training can be a desirable material for making content through historical data. In spite of being confined, if you are available for reproducing the event through the historical data relevant to The Military Training as well as for the modern society, you can make content suitable for the reality in addition to revealing the historical truth through The Military Training. 강무(講武)는 전근대 시기 국왕 주도 아래 시행되었던 대규모 국가행사였다. 강무는 국왕이 주도했던 국가의례이면서도 행사 내용에 진법 훈련과 사냥 등이 포함되었다. 강무는 국가의례와 군사훈련은 물론 사냥으로 대표되는 일종의 스포츠 행사 등이 모두 포함되었다. 한국역사 속에서 강무 행사는 조선시대에 집중적으로 진행되었다. 따라서 강무는 한국의 역사 속에서 진행되었던 메가이벤트로 설명하는 것도 충분히 가능하다. 조선시대 강무는 국왕을 포함해서 왕족과 대신, 군관, 백성이 대규모로 참여했다. 이들은 제도상으로 모두 행사에 참여할 수 있었다. 국왕부터 일반 백성까지 함께 참여할 수 있는 대규모 행사가 바로 강무였다. 이러한 강무는 역사자료를 통해 콘텐츠화 할 수 있는 좋은 소재가 된다. 강무와 관련된 역사자료를 통해 행사를 재현하고, 현대의 국가 행사에 활용한다면 강무의 역사성과 활용성을 동시에 부각시키는 관련 콘텐츠를 만들 수 있을 것이다.

      • KCI등재

        朝鮮前期 講武의 施行과 捕虎政策

        김동진 조선시대사학회 2007 朝鮮時代史學報 Vol.40 No.-

        조선전기에 시행한 강무제는 외적의 침입에 대비하는 군사훈련을 넘어서서 범과 야생동물을 제거하여 백성의 안전을 도모하고 농지개간을 촉진하였다.즉, 조선이 중국의 고례에 따라 강무의를 제정하고 시행하면서 포호정책에서 강무의 역할이 증대되었다. 강무에서 시행한 타위훈련은 국왕이 참여하는 최고수준의 군사훈련으로 범의 포획에 매우 효율적이었다. 착호장, 착호갑사, 착호인는 범의 포획을 전담하였고, 범을 포획한 군사에게는 군공에 버금가는 포상을 시행하였다. ‘실록’에서는 범의 포획을 강무의 가장 중요한 성과로 기록하였다.조선전기에 강무장은 군사훈련과 천신물 마련을 위해 짐승이 잘 번식할 수 있는 구릉수택에 설정하여 운영하였다. 강무장이 설정된 지역의 생태환경적인 특성은 조선전기에 농경지로 개간하고자 하는 여타 지역과 대동소이하였다. 이곳에서 이루어지는 포호활동은 강무장에 서식하는 범의 개체수를 줄이는 직접적인 성과를 거둘 수 있었다.강무와 포호정책의 관계는 ‘실록’에 기록된 포호기록 중 82.3%가 강무나 타위활동과 관련된 사실에서 확인할 수 있다. 조선국가는 짐승을 수렵하는 군사적 활동과 수렵한 짐승을 宗社에 천신물로 바치는 제의가 포함된 강무의례를 주관하면서 ‘爲民除害’라는 민본주의적 이념의 구현자임을 확인하였다. 농병일치의 군사제도로 인하여 강무에 적용하는 병법과 무기는 지방의 군사와 백성들의 포호능력을 향상시켰다. 그리고 강무를 시행하면서 지방에서 개발한 새로운 포호기법을 널리 전습하기도 하였다. 그 결과 강무의 시행은 주기적으로 매우 넓은 영역에 서식하는 범과 범의 먹잇감을 제거해 궁극적으로 범의 서식지를 파괴하고 개체수를 감소시켰다. 군사정책의 수행공간인 강무장은 국가의 농지개간정책에 따라 적극적으로 개간이 추진되었고, 백성의 잠경을 용인하거나 권세가에 절수하였다. 조선국가는 강무라는 군사정책과 농지개간이라는 경제정책의 대립적 요소를 성리학적 민본주의에 기반한 농본주의를 바탕으로 수렴하고 있었던 것이다. The Operation of Gangmu and Tiger Hunting Policies in the Early Chosun DynastyKim, Dong-jin

      • KCI등재후보

        조선전기 세종의 강무시행 평가와 안보적 함의

        김지동 대한정치학회 2013 大韓政治學會報 Vol.21 No.2

        강무는 임금이 군사들을 동원하여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의 일종으로써 대규모의 야외기동훈련이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강무는 단순한 군사훈련만이 목적이 아니라 강 무에서 잡은 짐승은 종묘의 제사에 바침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지배층이 참여 하는 군사훈련의 양상을 띠고 있기 때문에 국왕의 권위와 통치체제의 기반을 조성하는데 큰 의의가 있었다고 볼 수 있으며, 강무장과 그 사이를 오가는 지역의 백성들에 게도 일정한 전시효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이다. 조선왕조 초기의 역대 국왕들은 왕권의 안정과 외침에 대비한 군사력 증대에 심대한 역량을 집중하였다. 사냥을 통한 군사훈련인 강무는 태종, 세종대를 거치면서 매우 널리 시행되었다. 세종은 22세의 젊은 나이로 보위에 올라 54세에 승하하실 때까지 32년간 우리 역사상 가장 위대한 문화적 업적을 많이 남겼지만 특히, 국방 분야에 대 해서도 역대 어떤 임금보다 투철한 안보의식을 갖고 철저하게 대비하였다. 이러한 세 종대의 강무제도를 평가해 보면, 첫째, 강무시에 군사동원제도를 적극 시행하였고, 둘 째, 강무를 통하여 왕권을 강화하고 국왕의 권위를 확보하였으며, 셋째, 강무를 진법훈 련의 숙달과 대규모 기동훈련 차원에서 실전적으로 시행하였다. 넷째, 매년 정례적으 로 강무를 시행하였고, 다섯째, 신하들의 극심한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무만큼은 절대 로 양보하지 않고 강력하게 시행하였으며, 여섯째, 원거리 강무장을 개척하여 백성들 의 편의를 도모하였다. 이와 같이 세종은 국가를 부국강병의 반석위에 올려놓기 위한 군사력의 확보와 군사훈련을 위해 강무를 신앙적으로 추진하였으나 국가의 제도와 체제가 안정되고 외침의 위협이 약화된 성종대에 이르러 강무의 시행빈도가 현저히 저하되었다. 세종의 협 력적 자주국방 사상과 외세의 침략에 대비한 국방 분야에 대한 치적은 매우 높이 평가되어야 하며, 우리는 조선 초기에 널리 시행하였던 강무제도의 역사를 통해서 다시 금 안보태세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그에 대한 대비를 철저히 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조선시대 강무(講武)의 역사적 의미와 콘텐츠화 방안

        이규철 동아시아고대학회 2018 동아시아고대학 Vol.0 No.52

        The Military Training in the Joseon Dynasty Era was mainly processed under the lead of the King, and they made it a rule to enforce the event twice during summer & fall in a year. The Military Training has the meaning that it was processed as a miliary drill during a summer break from farming, while it was confirmed as an event for mobilizing the military establishment. The Military Training basically had the feature of perfecting soldiers' battle formation as well as martial arts during the time of peace. This manuscript aims to explain the historical meaning of The Military Training and help to make the relevant event historical content. On the basis of the study for the meaning in the various ceremonies in the Korean history, I try to ponder on using plan to utilize it effectively in this modern world. I do believe that it is a historian's role to study various meaning of content as well as provide the people with content touched easily in the historical data. I hope that I will partly contribute to the task that I can utilize the plentiful cultural resources in the Korean history in a various method through this. 조선시대 강무(講武)는 주로 국왕의 주도 아래 진행되었고, 봄과 가을 1년에 두 차례 시행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다. 강무는 농한기에 군사훈련을 진행하고 군사동원체제를 확인하는 행사로 의의를 가지고 있다. 강무는 기본적으로 비전쟁시기 병사들의 진법과 무예를 연마하는 훈련의 성격을 가지고 있었다. 본고는 강무의 역사적 의의를 설명하면서 관련 의례를 하나의 역사콘텐츠로 만드는 작업에 도움을 주기 위한 목적을 가지고 있다. 한국사 속의 다양한 의례들이 가지고 있는 의의에 대한 연구를 바탕으로 현대사회에서 이를 보다 효과적으로 활용할 수 있는 방안도 함께 고민해보고자 한다. 역사자료 속에 남아 있는 다양한 콘텐츠들의 의미를 설명하는 연구는 물론 이를 대중들이 쉽게 접할 수 있는 콘텐츠로 제공하는 일 또한 역사학자들의 역할이라 생각한다. 이를 통해 한국역사 속에 있는 풍부한 문화자원들을 다양한 방식으로 활용하는 작업에 일정 부분 기여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 KCI등재

        조선시대 가동·무동의 개념 정립과 활동 ― 행행(行幸)·강무(講武)·사악(賜樂)을 중심으로 ―

        김종수 ( Kim Jong Su ) 온지학회 2018 溫知論叢 Vol.0 No.56

        조선 초기에 대비와 중궁 및 명부(命婦) 등이 참석하는 내연(內宴)이나 임금과 신하가 참석하는 외연(外宴)을 막론하고, 춤과 노래는 모두 여악이 담당했다. 그런데 여악으로 인한 풍기문란 등의 문제가 종종 발생하므로, 치인(治人)의 위치에 있는 위정자(爲政者)가 모범을 보이기 위해, 군신(君臣) 간의 예연(禮宴)에서는 종래 여악이 해오던 춤과 노래를 남자아이로 대체하기로 하고, 1431년(세종 13) 8월에 이들이 입을 관복에 대해 논의하는데, 이때 무동이란 호칭이 처음 등장했다. 1432년(세종 14)에 공천(公賤) 중에서 10세가량의 어린 소년 60명을 뽑아 1433년(세종 15) 정월 회례연에서 공연한 것이 조선시대 무동제도의 시작이다. 무동은 <몽금척>·<오양선>·<아박>·<무고> 등의 정재를 공연했는데, 이들 정재는 노래와 춤으로 구성되어 있으므로, 무동은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무동은 성인 남자의 체격과 목소리를 갖추기 전까지만 활동했으므로 대략 활동 상한선이 15살이었다. 무동을 뽑아서 교육시켜 익숙해질 만하면 또 다른 무동을 뽑아야 하는 어려움 때문에, 1447(세종 29)에 10대 초반의 남자아이로 구성되는 무동을 혁파하고, 노래와 춤에 능한 악공으로 하여금 정재를 공연하게 했다. 무동을 뽑지 않은 지 3년 남짓 지난 1450년(문종 즉위) 11월에 박연은 ‘외연과 객인연(客人宴)의 공연에, 아이가 아니면 노래가 맑지 못하고 춤이 볼품없으니 가동을 뽑아야한다’고 역설하였다. 박연이 말한 가동 또한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한다. 1447년에 무동을 혁파했으므로, ‘가동’이라는 이름을 쓴 것일 뿐, 실질적인 내용은 ‘무동’과 같다. 박연의 건의가 채택되었는데, 『악학궤범』에는 ‘경오년(1450)에 무동제도를 회복했다’라고 서술하였다. 즉, 가동이나 무동이 모두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이므로, 서로 통용되었으며 때로는 아예 가무동이라 불리기도 했다. 무동이나 가동은 여악을 대체하기 위해 설치한 것이므로, 여악과 대비하여 남악으로도 불렸다. 연향에서 가동·무동이 통용되었지만 ‘외연 남악제도’가 시행된 기간에는 노래하고 춤추는 소년을 뜻하는 용어로 무동이 주로 쓰였다. 태조·태종대는 행행·강무에 여악을 썼으나, 세종대에 이르러 가동을 썼다. 그러나 왕위를 찬탈하고 조카를 죽음에까지 내몬 세조대(1455~1468)에 성리학적 이념에 입각한 제도들이 퇴행되는 것과 더불어, 세조 중년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여악을 썼다. 성종대(1469~1494) 사림의 정계 진출과 맞물려 1473년(성종 4)부터 행행·강무에 다시 남악을 쓰게 되었고, 제도적으로 정립되었다. 비록 연산군대(1494~1506)에 일탈이 있긴 했으나, 중종대(1506~1544)에 다시 회복되어, 지속적으로 행행·강무에는 남악을 썼다. 외연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1433년(세종 15) 이후 25년가량과 1511년(중종 6) 이후 10여년간만 시행되었고, 선조대 후반에 정착될 듯하다가 광해군대(1608~1623)에 무너지고, 인조반정(1623) 이후에야 확립되었는데, 행행·강무에 남악을 쓰는 제도는 성종대에 정립되었고, 연산군대에 흔들렸다가 중종반정(1506년) 이후로 확립되었다. 한편, 2016년에 <뎡상공 희방긔록(鄭相公回榜紀錄)>을 근거로 ‘조선후기에 사악(賜樂)으로 무동과 함께 기녀를 내려준 것’을 시사하는 논문이 발표되어 위 논지와 정면배치 되는데, 정상공 즉 정원용(鄭元容, 1783~1873)이 회방(回榜)을 맞이한 1862년 일기의 어디에도 기녀를 내려주었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는데다, 다산 정약용(1762~1836)이 무동을 여자처럼 꾸민 것을 비난한 바 있으므로, <뎡상공 희방긔록>에 나오는 ‘일대명기 절대기녀 무산신녀 □려온듯’ ‘낙포선녀 하□□듯’이란 구절은 ‘녹의홍상을 입은 무동이 춤추는 자태가 기녀나 선녀처럼 아름다웠음’을 표현한 것으로 볼 수 있는 여지가 있음을 제기하였다. Gadong(歌童) and Mudong(舞童) are the output resulting from Joseon-era efforts to realize Neo-Confucian ideal society aimed at establishing decent customs. Relationships between men and women provide a strong base for home and society. Early Joseon period saw instrumental performance conducted by Akgong (樂工 musicians), and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Yeogi (女妓 female entertainers). To set up an example of separating men and women, king-hosted banquets from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excluded Yeogi, and made dance and singing conducted by male children, who were referred to as Mudong. About 10-year-old children were selected from public slaves, and the age limit was 15 years old when men began to develop their adult physique and voice. It was challenging to continue to select, train, abandon and replace Mudong. Thus, in 1447 (29th year of King Sejong reign), Mudong, consisting of 10 year old or so male children, were revamped to replace them with Akgong good at singing and dance in the events of royal-palace dance and singing. About three years later, in November 1450 (at the enthronement of King Munjong), Park Yeon(朴堧) emphasized: "Men other than children cannot offer clear voice in singing while perform dancing poorly, so Gadong must be selected." The term Gadong actually was used as a synonym of Mudong, boys who performed dancing and singing. As such, in banquets, Gadong or Mudong all meant boys who performed singing and dancing, so the two terms were interchangeably used, and sometimes, they were referred to as Gamudong and also Namak (male musicians) opposed to Yeoak (femal musicians). In the events of Cheoyong dance,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however, Gadong and Mudong were used as different meaning; Gadong undertook dancing, while Mudong undertook singing; they also wore different costumes. As banquets between the king and his subjects began to use Namak in 1433 (15th year of King Sejong reign), it began in the King Sejong period (1418~1450) to use Namak(男樂)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artial arts. During the reign of King Sejo (1455~1468), the trend declined, resulting in using Yeoak(女樂) until 1473 (4th year of King Seongjong reign) when Namak began to be used, resulting in establishing the system. Although the system was deviated during the reign of King Yeonsangun (1494~1506), it resumed during the reign of King Jungjong (1506~1544), allowing Namak to continue to be used in the events of royal parades and guidance on military arts practice. Musical performance was granted to celebrate ministers' congratulatory events or passers of the prestigious official examination Gwageo(科擧). As such, the first half of Joseon period generally saw Akgong and Yeogi granted, and the second half of Joseon period saw Akgong and Mudong granted.

      • KCI등재

        조선후기 국왕의 열무 시행과 그 성격

        백기인 한국정치외교사학회 2006 한국정치외교사논총 Vol.27 No.2

        조선왕조의 건국초부터 시행된 대표적인 군사훈련인 강무는 본질적으로 국왕이 군권을 장악하고, 국왕의 위엄을 높이려는 정치적인 목적이 있었다. 그리고 강무에서 잡은 짐승은 종묘에 제사지냄으로써 왕실의 권위를 높이고, 강무장과 그 사이를 오가는 지역의 백성들에게는 일정한 시위효과가 있었다. 그러나 정치적인 안정기에 접어든 성종대 이후에는 강무나 대열이 점차 약화된 반면 열무가 비중있게 시행되었다. 열무는 대체로 국왕의 능행과 연계되었지만 군사적 성격에 충실한 것이었다. 강무가 정기적이었으나 열무는 불시에 실시하는 경우가 많아 국왕의 직접적인 통수체계의 확인과 군사점열의 성격을 보다 강하게 드러냈다. 강무가 황해도, 경기 및 강원도에서 시행된 것이라면 열무는 대체로 동교ㆍ중량포ㆍ살곶이ㆍ춘당대ㆍ노량 등 일반 열병이 시행된 곳에서 크게 벗어나지 않았다. 이러한 열무의 시행은 조선중기 이후 왕조의 법제와 정치ㆍ제도적인 안정으로 인하여 국왕의 열병은 종래의 정치적 시위효과라는 명분적인 측면보다 군권 장악과 통수권 확립이라는 보다 현실적인 정치적 목적을 지향하게 되었다. 그 규모는 대체로 2천명에서 최대 1만명으로 강무나 대열보다는 적은 규모라고 하겠으며, 새로운 무기체계나 군사전략상의 문제를 결합시켜 과목을 변경하면서 일반적인 군사훈련의 목적도 달성하고자 했다. 조선후기에 들어와서 더욱 활발하게 시행된 열무는 왕조의 기반이 안정화된 중기 이후 도성수비 확립 차원에서 군사점열을 도모하면서 통시에 국왕의 군권장악과 통수체계를 확립하는 실질적인 정치적 목적을 실현하는 장치였다고 이해된다. Gang-mu, a principal military exercise that began with the founding of Chosun dynasty, had its political purpose in affirming the king s military might and exhibiting his glory. The animals hunted during Gang-mu were sacrificed at the royal cemetery to emphasize royal authority, and there was an effect of processional display to those in the area of the Gang-mu field. But from the King Sungjong on, when the nation entered a period of political stability, Gang-mu and Dae-yeol became gradually neglected, and Yeol-mu instead was maintained in practice. Yeol-mu was typically accompanied by the king s visits to royal mausoleums, but was faithful to military training. Gang-mu was performed at regular intervals, but Yeol-mu was frequently ordered without notice, and had a prominent emphasis on affirming the line of command and on the inspection of the soldiers. And while Gang-mu took place in Hwanghae, Kyoungki and Kangwon provinces, Yeol-mu was for the most part limited to the vicinities of walled fortifications where standard inspections were performed, such as Dongkyo, Joongryangpo, Salgoji, Chundangdae and Noryang. The scale of forces involved in Yeol-mu was typically from two to ten thousand men, smaller than those of Gang-mu or Dae-yeol, and according to the changes in weapon systems and strategies, the subjects of inspections were modified. Because the royal power s foundation was stable in the late Chosun period, instead of arduous large-scale mobilizations like Gang-mu or Dae-yeol were avoided, and in their stead Yeol-mu offered an expedient form of military inspection which stressed practical military training while demonstrating the royal line of command. But since it too was performed following the royal visits to the mausoleums of previous kings, temporally and spiritually its enactment took on the meaning of Gang-mu. The practice became the archetype the general military processions and demonstrations towards the end of Chosu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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