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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邵雍의 先天易學에 대한 王夫之의 비판

        조우진 한국공자학회 2014 공자학 Vol.27 No.-

        본 논문의 목적은 소옹의 선천역학(先天易學)을 바탕으로 한 송대(宋代) 상수역(象數易)의 흐름을 살펴보고 왕부지의 비판적 입장을 고찰하는데 있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상수역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왕부지는 자신의 역학체계를 바탕으로 선천과 후천의 개념, 선천의 전수과정, 선천도(先天圖)의 체계, 선천역학의 원리, 괘(卦)의 형성의 과정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 논리는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왕부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옹의 선천역학과 관련된 이론이나 내용은 경전에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도가(道家)의 술수가들에 의해 전수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왕부지는 소옹의 선천역학을 비판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점(占)과 관련된다. 선천역학의 핵심원리인 가일배법(加一倍法)은 아래로부터 위로 쌓아서 괘(卦)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왕부지는 소옹의 선천역학을 술수학일 뿐만 아니라 점역(占易)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점학일리(占學一理)’를 주장한다. The object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urrent of Xiangshuyi(象數易) in Song dynasty(宋代) based on Shao-Yong(邵雍)’s Sunchenyeokhak(先天易學) and consider Wang-Fuzhi(王夫之)’s critical position. By this critical examination, we can ascertain the true features of Xiangshuyi. Wang-Fuzhi severely criticised the concept of Sunchen(先天) and Huchen(後天), the transmission process of Sunchen, the system of Sunchentu(先天圖), and the principle of Sunchenyeokhak, and the formation process of Gua(卦) through his Yeokhak(易學) system. His criticism is especially based on positivistic thinking on the contents of Jingzhuan(經傳). For Wang-Fuzhii, the content and theory concerning Shao-Yong’s Sunchenyeokhak aren’t found in Jingzhuan(經傳) and are nothing but brought by Zhushujia(術數家) in Daojia(道家). Wang-Fuzhi presents the several evidences of criticising Shao-Yong’s Xiangshuyi. Among them, the most decisive evidence is related to Zhan(占). Jiayibeifa(加一倍法) as the key principle of Sunchenyeokhak is a process of making Gua by stacking one on top of another and this process is the same as that of Zhan. In conclusion, Wang-Fuzhi maintains Zhanxueyili(占學一理) criticizing that Shao-Yong’s Sunchenyeokhak is only Zhushuxue and is biased toward Zhanyi.

      • KCI등재

        서명응의 『參同攷』에 나타난 『先天易』을 중심으로 한 단역참동론

        이봉호(李奉鎬) 한국도교문화학회 2004 道敎文化硏究 Vol.20 No.-

        1. 이 글은 徐命膺의 『參同攷』에 나타난 先天易과 內丹思想의 관련성을 해명하는 것이다. 서명응의 학문적 체계를 관통하는 것은 선천역이다. 그런데 선천역은 伏羲의 無文字 四圖여서, 이를 연역할 자료가 없었다. 그러나 서명응은 무문자 사도인 선천역을 演繹할 내용들이 『易參同契』에 있다고 인식한다. 서명응의 역참동계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先天圖와 그 연역의 법이 儒家에서 神仙家에게로 흘러 들어가서 丹?之秘訣이 되었다는 인식에 기초한다. 그래서 역참동계의 위치는 유가의 『중용』,『대학』, 『논어』의 중요성과 비교하면 뒤지지 않는다고 한다. 2. 서명응의 이러한 관점에 따라, 역 이론과 내단사상의 일치를 다루는 丹易參同論은 기존의 이해에서 더 나아가 선천역을 중심으로 한 단역참동론으로 정립된다. 일반적으로 내단사상이 純陽인 乾體를 회복하는 것이고, 후천적인 性을 단련하여 선천적인 命을 회복하는 것이라면, 서명응의 선천을 중심으로 한 단역참동론은 순건체의 회복이나, 선천적인 명을 회복하는 논리를 가장 쉽게 설명한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또한 서명응의 단역참동론은 先天四正卦를 중심으로 한 人身의 四正과 일치, 선천사정괘의 각 爻와 精氣神意의 일치를 통해 규명된다는 점에게 기존의 단역참동론과 다른 점이다.

      • KCI등재

        한대 천문역법 기록을 통해 본 ‘先天⋅後天’ 의미 고찰 — 易과 曆의 가름과 조합에 대한 비근의 이해를 모색하며 —

        서정화 동양고전학회 2021 東洋古典硏究 Vol.- No.84

        북송대 소옹에 의해 제시된 ‘선천역⋅후천역’이라는 철학적 세계관은 주자학의 범주 안에 수용 발전되었다. 이것은 『주역』의 「건괘 문언전」에 그 전거를 두는데, 天의 시간적⋅질적 편차를 전제한다. 소옹과 동시대 인물인 정이의 철학 속에서는 그와 같은 세계관을 찾을 수 없다. 당대의 공영달 역시 ‘선천(先天)’ ‘후천(後天)’을 단순히 ‘자연 절기의 일을 앞서 함’ ‘자연 절기의 일을 뒤에 함’으로 이해하여 그 문구 자체에 특별한 의미를 두지 않았다. 한나라 특히 후한대에는 책력 상에서의 날 수에 비해 실제 태양의 운행이 틀어져 있었던 상황을 토로하면서 「문언전」의 바로 그 선천 후천 문장이 인용된다. 이 경우 ‘천(天)’자는 ‘천시(天時: 자연 절기)에 따른 날짜’이고 ‘선천’과 ‘후천’ 구절은 ‘천시의 날짜보다 앞서다’ ‘천시의 날짜보다 뒤늦다’의 뜻이다. 역상(曆象)에서 선천 현상은 사실상 문제 될 일이 전혀 없는 명목상의 성어(成語)일 뿐이다. 반면 세차운동으로 인해 발생하는 후천 현상은 극미하게 진행되고 부지불식간에 심화되며, 또 당시로서는 그 원인을 분명하게 알 수 없었다는 점에서 최고 통치자의 근심이 컸다. 전한 후한의 사서와 그 시대의 전적을 통틀어 한나라의 시간을 알려주는 동지 성수(星宿) 경도가 모두 여섯 건이 있다. 그중 황·적경 두 가지 시간으로 갈리는 것까지 포함하면 모두 아홉 건으로 늘어난다. 이것들 모두 후한의 역사를 말하는 『후한서』에 수록된 것이지만, 정작 그것 대부분은 전한의 시간이고 멀게는 진 제국의 시간 한 건도 포함한다. The philosophical view of the world called ‘xiāntiān yì(先天易) and hòutiān yì(後天易)’ suggested by Shào Yōng(邵雍) in Song Dynasty was accepted and developed in the category of the Zhu Xi school of Neo-Confucianism. The reference of the letter is Chapter Wényán Zhuàn(「文言傳」) in the Zhōu Yì( 『周易』), and in the Zhu Xi school, the time-based and qualitative deviations of tiān(天) were presumed. It’s difficult to find the same view of the world in the philosophy of Chéng Yí(程頤), a contemporary figure with Shào Yōng(邵雍). Kǒng Yǐng Dá(孔穎達) in Tang Dynasty also understood ‘xiāntiān(先天)’ and ‘hòutiān(後天)’ simply as ‘doing what one does at each solar terms in advance’ and ‘doing what one does at each solar terms later’, and didn’t attach any special meanings to the letters themselves. In Han Dynasty, particularly in the Later Han Dynasty, the emperor explained about ‘the situation when the time of the actual movements of the sun was different from the dates of the solar terms in the book calendar, quoting the very sentence of the Wényán Zhuàn(「文言傳」) mentioning xiāntiān(先天) and hòutiān(後天). In this case, the letter, ‘tiān(天)’, means ‘the date following the actual solar terms’ while xiāntiān(先天) and hòutiān(後天) refer to ‘doing ahead of the solar terms’ and ‘doing after the solar terms’. In lìxiàng(曆象: diverse astronomical phenomena of the sun, the moon, stars and other celestial bodies), the phenomenon of xiāntiān(先天) was, in fact, just a nominal phrase without making any problems. On the other hand, the hòutiān(後天) phenomenon occurring because of precession progressed subtly, became intense unknowingly, and its reason was not clear at that time, so it caused the sovereign ruler to worry about it a lot. Among history books and all the other books of the Former Han and the Later Han, ‘the longitude degree of the twenty-eight solar stages along the zodiac(the twenty-eight lunar mansions, 28宿) on the winter solstice’ showing the time of Han Dynasty is mentioned six times in total. When those dividing into the two kinds of time, the celestial longitude and the right ascension, are included, it’s mentioned nine times in total. All of these are recorded in the Hòu Hàn Shū( 『後漢書』), a history book of the Later Han Dynasty, but when the precession values are calculated, most of the time directed by them is the time of the Former Han, and one case of the time as far as during Emperor Qín Shǐ Huáng(秦始皇)'s time is included.

      • KCI등재

        투고논문 : 소옹(邵雍)의 선천역학(先天易學)에 대한 王夫之의 비판

        조우진 ( Woo Jin Cho ) 한국공자학회 2014 공자학 Vol.27 No.-

        본 논문의 목적은 소옹의 선천역학(先天易學)을 바탕으로 한 송대(宋代) 상수역(象數易)의 흐름을 살펴보고 왕부지의 비판적 입장을 고찰하는데 있다. 필자는 이러한 과정에서 상수역의 본래 모습을 확인하고자 한다. 왕부지는 자신의 역학체계를 바탕으로 선천과 후천의 개념, 선천의 전수과정, 선천도(先天圖)의 체계, 선천역학의 원리, 괘(卦)의 형성의 과정 등을 신랄하게 비판하였다. 그의 비판 논리는 경전의 내용을 바탕으로 하는 실증주의적 사고방식에 근거하고 있다. 왕부지의 입장에서 보자면 소옹의 선천역학과 관련된 이론이나 내용은 경전에 전혀 찾아볼 수 없는 것이며, 도가(道家)의 술수가들에 의해 전수된 것에 불과할 따름이다. 왕부지는 소옹의 선천역학을 비판하는 근거를 여러 가지로 제시하는데, 가장 결정적인 것은 점(占)과 관련된다. 선천역학의 핵심원리인 가일배법(加一倍法)은 아래로부터 위로 쌓아서 괘(卦)를 만들어가는 과정으로 점치는 것과 같은 것이다. 그래서 왕부지는 소옹의 선천역학을 술수학일 뿐만 아니라 점역(占易)에 치우친 것이라고 비판하면서 ‘점학일리(占學一理)’를 주장한다. The object of this paper is to examine the current of Xiangshuyi(象數易) in Song dynasty(宋代) based on Shao-Yong(邵雍)’s Sunchenyeokhak(先天易學) and consider Wang-Fuzhi(王夫之)’s critical position. By this critical examination, we can ascertain the true features of Xiangshuyi. Wang-Fuzhi severely criticised the concept of Sunchen(先天) and Huchen(後天), the transmission process of Sunchen, the system of Sunchentu(先天圖), and the principle of Sunchenyeokhak, and the formation process of Gua(卦) through his Yeokhak(易學) system. His criticism is especially based on positivistic thinking on the contents of Jingzhuan(經傳). For Wang-Fuzhii, the content and theory concerning Shao-Yong’s Sunchenyeokhak aren’t found in Jingzhuan(經傳) and are nothing but brought by Zhushujia(術數家) in Daojia(道家). Wang-Fuzhi presents the several evidences of criticising Shao-Yong’s Xiangshuyi. Among them, the most decisive evidence is related to Zhan(占). Jiayibeifa(加一倍法) as the key principle of Sunchenyeokhak is a process of making Gua by stacking one on top of another and this process is the same as that of Zhan. In conclusion, Wang-Fuzhi maintains Zhanxueyili(占學一理) criticizing that Shao-Yong’s Sunchenyeokhak is only Zhushuxue and is biased toward Zhany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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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徐命膺의 先天易과 道敎思想

        이봉호(李奉?) 한국도교문화학회 2006 道敎文化硏究 Vol.24 No.-

        徐命膺의 先天易은 당시에 전래된 西法(西洋의 天文學파 曆法 및 幾何學)에 대한 對應의 論理이다. 그런데 서명응은 선천역의 淵源을 道敎의 思惟에서 끌어오고 있다. 이 점은 그의 사상적 특징으로 규명될 수 있는 것이다. 서명응이 도교의 사유를 끌어와 선천역을 해명하는 것은 도교적 사유에서 天文과 曆法에 관한 이론들을 많이 발견할 수 있다는 점 때문이다. 그리고 도교의 천문과 역법에 관한 이론이 그 연원을 伏犧에게 두고 있다는 점을 주장하는데, 이는 그의 사상이 象數學과 도교적 사유가 결합된 것으로 이를 통해 서법에 대응하고자 한 것이다. 따라서 필자는 서명응의 이러한 사유를 추적하기 위해 서명응이 구분하는 선천역과 후천역의 구분을 살펴보고, 선천역의 역사와 도교의 관련성을 살펴보았다. 서명응은 선천과 후천을 구분하면서 何圖를 중심측에 두는데, 하도와 洛書에 대한 역사적 불신을 상수학적인 논리로 극복한다. 그러면서 기존의 『주역/계사』에서 八卦가 생성되는 과정과 다르게 하도를 중심으로 팔괘를 그려내는 과정을 설명하고 있다. 또한 선천역이 전래되는 과정을 朱震의 『漢上易集傳』과 黃宗炎, 毛奇齡 등의 논리와 다르게 설명함으로써 자신만의 근거를 제시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서명응의 논리는 궁극적으로 선천역과 천문의 일치를 통해 서학의 천문과 역법에 대응하려고 한 점이다. 그래서 서명응은 하도의 상과 수를 천체의 구조와 지구설, 운행과 연결하여 설명하고 있다. 또한 노자와 참동계에 나타난 천체의 구조를 선천역과 연결시킴으로써 선천학이라는 사상적 체계를 완성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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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ㆍ1운동 이후 일제의 서북지방 기독교 통제와 ‘선천사건’

        송재원(Song Jae-Won) 한국기독교역사연구소 2010 한국기독교와 역사 Vol.33 No.-

        이 논문은 일제 강점기 평안북도 선천에서 발생한 기독교 관계 시국사건인 선천사건에 관한 것이다. 선천사건은 1920년 9월 발생한 경찰서 폭파사건이 발단이 되어 선천 기독교계에 대한 탄압으로 이어진 사건으로, 서북지방 기독교계에 대한 일제의 대표적인 통제 사례였다. 3ㆍ1운동에 대한 무력탄압 이후 문화통치를 표방하였던 일제는 그 동안 경계 대상이었던 기독교계에 대해서도 유화책을 시도하였다. 그러나 3ㆍ1운동 이후 서북지방에서는 기독교계 조직을 중심으로 임시정부의 연통제를 통한 항일운동이 전개되었다. 또한 이 시기 서북지방에서는 무장활동도 잇따르면서, 일제의 서북지방에 대한 통제가 강화되었다. 서북지방에 대한 일제의 통제가 강화되던 1920년 9월, 선천에서 경찰서 폭파 사건이 발생한다. 이 사건은 본래 대한광복군총영이 8월에 있었던 미국 의원단의 방한을 노린 의열활동의 일환이었다. 그런데 일제는 사건의 주동자 가운데 박치의라는 선천 기독교인이 있었던 사실을 구실로 삼아, 폭파사건을 선천 기독교인들이 조직적으로 가담한 테러활동으로 확대하였다. 이 선천사건의 원인으로는 우선 선천이 지닌 기독교적 성향과 항일운동의 전력이 크게 작용하였다. 바로 기독교 교세가 강한 서북지방 가운데서도 선천은 대표적인 기독교 강세 지역이었다. 특히 선천 기독교계는 그동안 105인사건을 비롯해 3ㆍ1운동에도 연관되면서 일제의 주요 경계 대상이었다. 결국 일제는 폭파사건을 구실로 선천 기독교에 대한 탄압은 물론, 선천을 본보기로 삼아 서북지방 기독교와 항일운동을 통제하고자 했다. 이에 선천사건에 연루된 인물들은 대부분 선천 기독교계의 대표적 인물들이 었다. 이들 대부분은 3ㆍ1운동에 가담한 전력이 있었고, 기타 항일운동에도 연관되었던 것이 특징이다. 경찰은 조작수사를 통해 선천 기독교 인사들을 폭파사건에 철저히 연루시켰고, 경찰의 수사결과를 토대로 진행된 재판에서 관련자들은 중형을 선고받았다. 당시 여론의 큰 반향을 불러일으켰던 선천사건에 대한 재판결과는 평양 등 다른 지역의 사건과 비교해도 분명 과중한 처벌이었다. 선천사건 이후 선천 기독교계는 교세의 성장에도 불구하고 항일운동에서는 위축된 모습을 보였다. 이전과 같이 기독교계가 항일운동을 주도하던 양상이 1920년대 이후로는 눈에 띄지 않았던 것이다. 기독교 강세 지역으로 유명했던 특성 상, 일제의 탄압으로 인한 기독교계의 위축이 선천 사회전반에 영향을 끼쳤던 것으로 여겨진다. This thesis examines the S?n-ch'?n Incident, a Christian-related episode which happened in S?n-ch'?n, North P'y?ng-an province during the Japanese occupation. The S?n-ch'?n Incident was triggered by the bombing of a police station in September 1920 and led to the oppression of Christians in the region, especially it is a representative case of the Japanese policies of oppression against Christians in the north-west region. After the oppression of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by military means,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tried to advocate cultural rule and displayed also a conciliatory gesture to Christians who had been watched closely until then. But, since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a system called Y?n-t'ong in the north-west region which is a secret network of communication created by the Korean provisional government centering the Christian organizations. And in the mean time, armed liberation movements followed one after another, which also intensified Japanese oppression. The bombing of a police station happened in S?n-ch'?n in september 1920 when the Japanese oppression to the north-west region was being reinforced. The incident was carried out as a part of activities of an independence movement, and it was coincided with the visit of members of American parliament to Korea in August that year, awaited by General Camp of the Korean Independence Army. Finding a Christian called Park Ch'i-?i from S?n-ch'?n among the masterminds of the incident, the Japanese rulers enlarged the bombing incident into a terrorist act, and accused the S?n-ch'?n's Christians of being systematically involved. In the reason of this S?n-ch'?n Incident, the history of S?n-ch'?n’s Christian propensity and their anti-Japanese movement played an important role. Among the relatively strong Christian communities in the north-west region, S?n-ch'?n had particularly strong Christian community. And because Christians of S?n-ch'?n had been involved in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as well as other incidents including the Incident of 105 people, they had become the main target of the Japanese rule. Therefore, the Japanese colonial government plotted to oppress the Christians in S?n-ch'?n to rule out the Christianity in the north-west region, setting the Incident as an example and tried to oppress the anti-Japanese movement altogether. So those who were involved with S?n-ch'?n incident were mostly representative Christians in S?n-ch'?n. Also to be noted was that most of them had a history of participating in the 1919 Independence Movement as well as being involved in other anti-Japanese movements. The police, through many false accusations, thoroughly related many of S?n-ch'?n’s Christians with the bombing incident. And in the court, based on the result of police investigation, those people were sentenced to a heavy penalty indeed. This court rule towards the people involved in S?n-ch'?n Incident caused a big sensation in the society and was definitely regarded as a cruel punishment compared to similar Incidents in other areas including P'y?ng-yang. After the S?n-ch'?n Incident, despite the continuing growth of Christianity in the region, the anti-Japanese movement did get shrunken. That is, the trend of Christians leading the anti-Japanese movements disappeared since 1920’s in the region. It is also clear that the in activeness of S?n-ch'?n’s Christians caused by the Japanese oppression influenced the general social aspects of S?n-ch'?n which had been renowned as a strong Christian community.

      • KCI등재후보

        保晩齋 徐命膺의 先天學 體系와 『老子』 이해

        이봉호(李奉鎬) 한국도교문화학회 2005 道敎文化硏究 Vol.22 No.-

        서명응의 사상은 선천학의 체계로 구성된다. 그의 사상이 선천학으로 확립된 것은 당시에 전래된 서양 천문학과 기하학에 대한 대응의 논리로 확립된 것이다. 그리고 서양 천문학과 기하학에 대한 대응의 논리로서 선천학은 하도를 중심으로 한 복희의 선천역이다. 그리고 선천학은 송대에 이르러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소강절의 『황극경세서』로 이어진다고 인식한다. 그리고 복희의 선천학이 송대로 전수될 수 있었던 이유로 노자와 『주역참동계』를 곱는다. 이러한 인식 때문에 서명응은 선천학의 핵심 내용을 연역하기 위해서 『노자』에 대한 주석 작업으로 『도덕지귀』를 완성하고, 내단사상의 핵심 경전인 『주역참동계』에 대한 주석서인 『참동고』를 주석한다. 서명응은 노자를 주렴계의 태극도설의 논리로 이해하고, 이를 통해서 “태극론”과 “하도론”, “대역론”을 연역해 낸다. 서명응은 노자의 도를 태극이며, 명은 음양이며, 무명은 무극이라고 이해하는데, 이는 태극론은 조화론과 하도의 중궁과 연결시키기 위함이다. 서학의 천문학과 관련해서는 태극을 행성의 운행과 절기의 유행에 기준이 되는 것이고 이러한 점에서 주렴계의 태극도 설이 하도의 내용을 간직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또한 하도의 선천학은 노자의 사유 속에서 깃들어 있다고 본 것이다. 또한 노자를 철저하게 상과 수로 분절하여 이해하고 있는데, 이 역시 하도의 선천사상을 기준으로 분절한 것으로 설명된다. 음양과 오행의 분기와 선천의 관련성을 기준으로 대역과 후천역을 구분하면서, 노자는 대역과 음양만을 말함으로써 선천학의 핵심인 대역에 정통한 것으로 이해한다. 서명응의 노자에 대한 이러한 이해는 당시에 전래된 서법에 대한 대응의 논리로서 선천학을 확립하기 위한 것이었고, 조선 사상사에서 노자에 관한 주석사 중에서 태극론의 관점에서 해석해 낸 유일한 주석서가 될 수 있었던 것이다.

      • KCI등재후보

        선천·후천론과 원불교 팔괘기의 의미

        이성전(李聖田) 원광대학교 원불교사상연구원 2010 원불교사상과 종교문화 Vol.44 No.-

        선천후천론의 연원은 주역에서 발견된다. 여기서 두 가지 개념은 성인이 하늘과 하나인 경지임을 설명하기 위해 활용되었다. 선천이란 성인이 천도를 자각하여 주체적으로 결단을 내리는 측면을 강조한 것이라면 후천이란 성인이 겸허하게 천지의 도를 따르려고 하는 측면을 강조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 후 당말 오대 무렵부터 도교사상사에서는 선천후천을 구별하고 선천으로의 복귀를 중시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이때부터 선천후천론은 중요한 철학적 논의의 주제로 떠오르게 되었다. 송대 소강절은 이러한 선천후천론을 유학적 시각에서 재구성하게 되며 그 과정에서 팔괘에 방위와 연결시키는 상수학적 논의를 시도하였다. 그는 『역(易』 설괘전에서 팔괘에 관해 설명한 내용에 근거하여 선천팔괘와 후천팔괘로 구분하고 복희역을 선천역, 문왕역을 후천역이라고 보았다. 그에 의하면 선천은 근원적 자연질서를 의미한다면 후천은 이에 바탕하여 인문의 질서를 형성해감을 상징한다. 나아가 그는 선천을 근원적 이상의 세계로, 후천을 그 질서가 제대로 실현되지 못하는 역사적 현실의 세계로 구분하고 시대구분에 적용하였다. 한국 신종교의 문을 연 동학은 선천을 지나간 어두운 시대로, 후천을 광대한 이상사회로 구분하고 후천개벽을 주창하였다. 소강절의 선후천 개념을 반대로 전환시킨 것이다. 소태산은 후천개벽을 주창한 신종교의 입장을 계승하고 후천에 관해 근원적 진리의 광명, 또는 인간본성이 바르게 실현되는 시대로 전망하였다. 이에 비해 선천은 근원적 진리가 제대로 드러나지 못해 사회적 갈등과 혼란과 민중의 고통이 심화된 시대라고 보았다. 그는 인도정의를 주체로 삼는 유학적 시각을 존중했다. 이와 관련하여 원불교 교단초기에는 궁극 진리의 상징으로 팔괘기를 활용한 일이 있다. 이는 주역의 세계관에 대한 공감한 것으로 이해된다. 그때 시용된 것은 문왕팔괘도이다. 이는 후천의 질서를 상징한다는 맥락에서 사용된 것은 아니다. 자연의 도를 바탕으로 문명세계를 건설해가는 유학적 성자정신과 맥락을 같이하는 것으로 추정된다.

      • KCI등재

        先天 개념의 형성ㆍ발전과 의미

        이대승(Lee, Daeseung) 한국도교문화학회 2013 道敎文化硏究 Vol.38 No.-

        본 글은 선천역학과 도교의 내단학의 주요 개념 중 하나인 ‘선천’ 개념에 대한 연구이다. 선천은 후천 용어와 함께 동아시아 전통시기의 핵심 개념 가운데 하나로서, 이는 유학에서 소옹의 선천역학을 다룰 때 주로 다루어지며, 이외 도가ㆍ도교 사상에서 내단학 이론을 해설할 때 일부 다루어진다. 두 개념은 유학과 도가ㆍ도교의 사유 양자 모두에서 중요하지만, 이 개념들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 어떤 사유의 노정을 거치면서 선천역학과 내단학에서 사용되게 되었는지, 역학과 내단학에서 사용될 때 의미의 차이는 무엇인지 등에 대한 전문적으로 다룬 연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이에 본 글에서는 선천 개념의 기원에서부터 선천 개념이 형성되고 발전되어 가는 과정을 살피고, 이를 통해 전통시대 선천 개념의 의미에 대한 종합적 고찰을 시도하였다. 결론적으로 선천 용어는 의미론적 맥락에서 ?노자?의 ‘先天地生’에 기원을 두고, 언어활용적 맥락에서『주역』의 ‘先天而天弗違, 後天而奉天時’에 기원을 둔다. 위진시기에 ‘伏羲의 易’을 ‘선천’의 시기라 보는 사유가 나타나며, 당대에 이르면 ‘先天之生’을 담지하는 ‘先天’용어가 독립적으로 사용된다. 이후 ‘선천’ 개념은 당말오대에 이르러 내단학의 핵심 용어로 사용되며, 오대송초의 진단에 이르면 ‘선천’ 개념이 역학과 결합하여 소옹의 선천역학의 전초를 알리는 사유가 등장한다. 그리고 주희의 선천역학 수용으로 선천역학이 동아시아 사유의 전면으로 떠오른 이후, 선천ㆍ후천에 대한 논의는 더욱 다양하게 확장되어 간다. This thesis aims to examine xiantian (先天) which is one of the main concepts of the East Asian thought. Xiantian with houtian (後天) are the key concepts of xiantian-yixue (先天易學) and neidan-xue (內丹學) in the Northern Song Dynasty, but these concepts have not yet studied in depth. For seeking the meaning of xiantian, this paper researched the origin of xiantian and the formulated process of the concept by diachronic approach from the Pre-Qin Dynasty to the Northern Song Dynasty. As a result, the xiantian concept have two origins, one of which is the phrase xian tiandi sheng (先天地生) in the Daode jing, and the other of which is the phrase xian tian er tian fu wei (先天而天弗違), hou tian er feng tian shi (後天而奉天時) in the Zhouyi: The former relates to the essential meaning, while the latter relates to the language form. From the Wei-Jin dynasty to the end of the Tang Dynasty and the Five Dynasties, the xiantian concept connected to the various meanings, such as I Ching of Fu xi, The period of before Heaven, and Taiji (太極), and also to the neidan-xue thought. Finally, the xiantian concept related to Yixue by Chen Tuan (陳?) in the Early Song Dynasty, which thought connected to xiantian-yixue of Shao Yong (邵雍). After Zhu Xi (朱熹)"s embracing of the xiantian-yixue, the theory relating xiantian and houtian were broadly spreaded out in the East Asian intellects.

      • KCI등재

        평안북도 선천지역 3 · 1운동의 전개와 성격

        이용철(Lee, Yong-Cheol) 독립기념관 한국독립운동사연구소 2021 한국독립운동사연구 Vol.- No.73

        본 논문은 평안북도 선천지역의 3·1운동을 살펴본 것이다. 선천은 3·1운동의 계획단계부터 운동이 준비된 지역이었고, 실제 전국에서 가장 먼저 운동이 시작된 곳이었으나 지금까지 개별연구조차 제대로 나오지 못했다. 선천군은 교통의 요지였고, 그로 인해 대한제국기 이래 일제의 극심한 침탈에 시달려야 했다. 이 같은 배경에서 선천지역 주민들은 일찍이 국권회복운동에 대해 관심을 가졌으며, 이는 실제 국채보상운동과 교육구국운동 같은 여러 활동으로 이어지고 있었다. 한편 선천지역은 ‘기독교의 왕국’이란 호칭이 있을 정도로 기독교 교세가 막강한 곳이었고, 기독교보다는 비교적 덜하지만 천도교세 역시 상당했다. 특히 기독교는 양전백 및 신성학교의 사례에서 알 수 있듯이 선천지역 3·1운동과 대단히 밀접한 관련성을 갖고 있으며, 실제 기독교도들은 「선언서」의 전파 및 확산, 운동의 계획과 전개에 있어 핵심적인 역할을 수행하고 있었다. 선천의 3·1운동은 3월 1일부터 3월 8일까지 연인원 1만 명 이상이 참여할 정도로 운동이 대단히 빨리 확산되었으며, 운동의 주도층은 신성학교의 교사와 학생으로 10~20대였다. 이는 일제에 대한 침탈로 인해 지역민의 독립의식이 고조된 가운데 기독교와 천도교 같은 종교조직이 이들을 조직해낸 결과였다. 하지만 선천지역의 3·1운동은 대단히 빨리 약화되었다. 실질적인 만세운동은 3월 8일을 기점으로 사실상 종료되는 것으로 보이는데, 이는 일제의 혹독한 감시와 탄압으로 운동을 주도하던 기독교와 천도교계 조직이 큰 타격을 받고, 일제의 봉쇄로 운동이 불가능하게 된 것과 관계가 있는 것이었다. 본 논문은 지금까지 연구가 미진했던 한강 이북의 3·1운동을 다루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갖는다. 하지만 한계도 있었다. 지방법원 및 복심법원 판결문이 발굴된다면 선천지역 3·1운동을 좀 더 구체적으로 밝힐 수 있을 것이다. This study investigates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that took place in the Seoncheon region of Pyeonganbukdo Province in Korea. The region was included from the early planning stage of the movement, and there the first movement took place. However, research has not been properly conducted on the region. The Seoncheon-gun was a transportation hub at the time, and as such, suffered from severe exploitation of the Japanese force ever since the era of Korean Empire. Against this background, people of the Seoncheon region took interest in efforts to restore national rights, leading to a movement to repay national debts and save the nation with education. Meanwhile, the influence of Christianity was exceptionally strong in the Seoncheon region as to being called ‘Kingdom of Christianity.’ The influence of Cheondogyo was also strong, although not as much as Christianity. Christianity in the region was closely tied to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as manifested by activities of minister Yang Jeonbaek and Shinseong School; in fact, Christians played a pivotal role in preaching and spreading the ‘Statement’ as well as in planning and deploying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grew fast as more than 10,000 people took part in between March first through eighth, led by teachers and students of Shinseong School who were in their teens and 20s. This was an outcome of organizing religious entities for Christianity and Cheondogyo, amid heightened yearning for national independence among local residents. However,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dissipated equally quickly. The actual protest is deemed to have ended on March 8, as Christian and Cheondogyo organizations were hit hard by severe watch and oppression by the Japanese force, and their blockade efforts made further gatherings impossible. This study has historical significance for investigating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north of the Han River, which has been neglected before. However, there are limitations as well. The March First Independence Movement in the Seoncheon region may be investigated further if related court rulings by regional courts and courts of review can be foun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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