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펼치기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펼치기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근대 해항도시 안동(安東)의 일본불교

        김윤환(Kim, Yun-Hwan) 한국해양대학교 국제해양문제연구소 2017 해항도시문화교섭학 Vol.0 No.17

        본 연구는 20세기 초의 중국 동북부지역의 해항도시이자 국경도시인 안동(安東, 지금의 단둥)에 대한 연구이다. 해항도시이자 국경도시인 안동을 분석하기 위하여 일본불교를 제재(題材)로 이야기를 전개하고자 한다. 이러한 연구를 수행하는 목적은 일본불교의 제국포교에 대한 분석을 통하여 해항도시 안동이 가진 의미를 검토해 보는 것이다. 나아가 일본불교의 제국 내 포교활동을 통하여 근대 일본의 제국형성 과정을 살펴보기 위함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은 조선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함과 동시에 중국 동북부지역에서의 새로운 이권과 지배권을 획득하였다. 일본은 조선과 중국 동북부지역의 유지 발전을 동시에 이루어야 했다. 이러한 시기를 드러내는 가장 상징적인 지역이 해항도시 안동이다. 왜냐하면 조선의 접경도시였으며 중국 동북부지역의 요충지였기 때문이다. 러일전쟁 이후 일본불교 동 서본원사는 중국 동북부지역으로의 포교권 확대의 기회를 얻었다. 19세기 말에서 20세기 초 안동의 동·서본 원사의 포교소 형성과정과 포교루트를 살펴보면 서본원사는 포교권 확대의 기회를 잡아 중국 동북부 지역에 포교소를 건립하고 유지 확장 확산시켰다. 동본원사는 일본 국내의 본산 문제와 조선의 포교소유지 문제 등으로 안동에 포교소를 설치하여 유지하기는 하였지만 확장·확산시키지는 못하였다. 안동의 포교소 확대와 중국 동북부 지역으로의 포교소 확산할 수 기회가 일본과 조선의 상황에 의해 종속되었다고 할 수 있다. 안동은 이 시기를 시작으로 이후 일본제국 유지의 핵심이 되는 두 개의 식민공간 조선과 만주를 형성해 가는 길목이었다. 안동은 이러한 식민공간으로의 확대 확산과 종속이 혼종되어 나타나는 공간이었다. This study focuses on Andong (presently called Dandong 丹东) which was a seaport city in the northeastern part of China in the early 20th century as well as border city. It unfolds a story of Japanese Buddhism as a subject in order to analyze the seaport city and border city, Andong.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review the meaning of the seaport city, Andong, by analyzing the propagation of Japanese Buddhism in the regions occupied by the Japanese Empire. Further, the study aims to explore the process of empire formation in modern Japan in the light of the propagation activities of the Japanese Buddhism in the colonies established by Imperial Japan. Since the Russo-Japanese War, Japan has strengthened its dominance over Joseon and acquired new rights and dominance in northeastern China at the same time. Japan had to maintain and develop Joseon and northeastern China simultaneously. The most symbolic area that reveals this period is the seaport city, Andong. This is because it was a city that bordered on Joseon and an important location in northeastern China. After the Russo-Japanese War, Japanese Buddhist HigashiHonganji(Shinshū Ōtani-ha)and Nishihonganji(Shinshū Honganji-ha) had an opportunity to expand the propagation right to the northeastern part of China. Given the formation process of propagation center and propagation route of HigashiHonganji·Nishihonganji in Andong from the end of the 19th century to the early 20th century, Nishihonganji had anopportunity to expand the propagation and thus, established, expanded and spread propagation centers in the northeastern part of China. HigashiHonganji Temple built and maintained propagation centers in Andong. However, it was not able to expandor spread the propagation centers due to the head temple issue in Japan and the issue of maintaining the propagation centers in Joseon. The expansion of the propagation centers in Andong and the opportunity to expand the propagation centers to north eastern China can be attributed to the situation in Japan and Joseon. Beginning from this period onward, Andong was a pathway to forming two colonial spaces, Joseon and Manchuria, which were the key to maintaining the Japanese Empire. Andong was a space where a mix of expansion, spread and subordination as a colonial space was reflected.

      • KCI등재

        조선후기 안동 태사묘<SUP>太師廟</SUP>의 운영 양상과 그 역할

        김명자(金命子) 한국국학진흥원 2019 국학연구 Vol.0 No.39

        안동 태사묘는 고려 건국에 공을 세운 안동권씨, 안동김씨, 안동장씨의 시조를 모시는 사당으로, 천 년 이상의 역사를 갖는 안동의 상징적인 공간 가운데 하나이다. 이글은 묘임안廟任案 · 전답안田畓案 · 원생안院生案 · 묘직안廟直案 · 첨배록瞻拜錄 및 각종 일기류 등을 활용하여 조선후기 태사묘의 운영 양상과 그 역할을 살펴본 것이다. 조선후기 태사묘는 안동권씨 중심으로 운영되었으며, 태사묘 건물의 중수도 안동권씨가 앞장섰다. 오랜 갈등 끝에 19세기 중후반부터 태사묘의 묘임에는 삼공신의 후예가 참여했으며, 20세기 초반 태사묘 건물의 중건에도 세성씨가 공동으로 자금을 마련하였다. 안동권씨 중심의 태사묘 운영 방식이 19세기 중후반부터 세 성씨의 공동 운영 방식으로 바뀌었음을 확인하였다. 태사묘 운영을 위한 재원財源은 15~16세기 지방관이 지원해준 곡식 · 토지 · 노비가 바탕이 되었다. 17~20세기 초반 태사묘의 전답 규모는 2~5결이다. 이 밖에 태사묘의 운영 자금에는 후손들의 부조, 식리활동, 원생과 묘직의 신역 · 신공 등도 포함되었다. 태사묘의 가장 중요한 기능은 삼공신에 대한 제향으로, 1년에 5번 제향하던 것을 17세기 전후 춘추 향사로 바꾸었다. 성리학적 예제가 사회 전반으로 확대되는 것과 맥락을 같이 한 것이다. 태사묘에는 평소 삼공신의 후예 및 경상도 지방관의 방문이 잦았다. 태사묘는 지역 사족들의 회합 장소로도 이용되었으며, 향촌 활동에 필요한 자금을 제공하기도 하였다. 조선후기 태사묘의 운영은 안동권씨 혹은 삼공신의 후예들이 주도했지만, 태사묘는 지역 사족들의 향촌활동 조직의 기능도 하였다. Taesamyo (太師廟) Shrine in Andong is the shrine which keeps tablets of the progenitors of Andong Gwon Clan, Andong Kim Clan, and Andong Jang Clan who made a contribution to founding the Gorye Dynasty. It is one of the symbolic spaces of Andong which has a 1,000-year history. This writing studied the aspects of operating Taesamyo Shrine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the role by utilizing and Myoiman (廟任案), Jeondapan (田畓案), Wonsaengan (院生案), Myojikan (廟直案), Cheombaerok (瞻拜錄), and all kinds of diaries. Taesamyo Shrine was usually operated by Andong Gwon Clan in the late Joseon Dynasty and it also took the initiative in repairing the building. Descendents of the three contributors participated in Myoim of Taesamyo Shrine in the mid and late nineteenth century and the people of the three family names jointly raised funds to reconstruct the building. It has found that the aspects of the Andong Gwon Clan-centered operation of Taesamyo Shrine was changed to the system that the people of the three family names jointly operated it. Crops, land, and slaves supported by the provincial government office served as the foundation of finances for operating Taesamyo Shrine in the 15<SUP>th</SUP> and 16<SUP>th</SUP> centuries. The size of fields and paddies of Taesamyo Shrine was 2 to 5 gyeol. Besides, the descendants’ aid, activities to accumulate wealth and make profits, physical labor and tributes of students and grave keepers are included in the operating funds of Taesamyo Shrine. The most important function of Taesamyo Shrine is sacrificial rite for the three contributors. 5 sacrificial rites per year was changed to spring and fall ceremonial rites before and after the seventeenth century. It was in line with ancestral rites of Neo-Confucianism which spread around much of the society. The descendents of the three contributors and local governors in Gyeongsang-do usually and frequently visited Taesamyo Shrine. Taesamyo Shrine was also used as meeting places for local distinguished families. And local distinguished families in Andong prepared funds for spears by borrowing 20 bags of rice from the genealogy place of Taesamyo Shrine when the Musin Revolt took place in 1728. Andong Gwon Clan or the descendents of the three contributors took the lead in operating Taesamyo Shrine in the late Joseon Dynasty but this place was also the open space which was used for the country activities of the local distinguished families.

      • KCI등재후보

        안동지역 마을공동체 신앙의 성격과 별신굿의 위상

        조정현(Cho, Jung-hyun) 안동대학교 민속학연구소 2009 民俗硏究 Vol.0 No.19

        마을공동체의 신앙과 그 형상화 양식으로서 마을굿은 날로 변화해가는 사회경제적 흐름에 따라서 약화되고 있는 실정이다. 별신(別神)굿은 촌락 공동체의 큰굿이며, 매년 지내는 동제와는 달리 특별하게 몇 년 터울로 벌어지는 별제(別祭)이다. 모듬살이를 영위해온 마을 공동체들의 신앙이 구체적으로 표현되는 시공간이 바로 제의(祭儀)라고 한다면, 별신굿은 이러한 제의의 담론과 연행이 역사적ㆍ사회경제적ㆍ연행예술적으로 총체화되고 종합되는 공동체 제의의 장(場)이라고 할 수 있다. 안동지역에서 별신굿이 강성했던 데에는 안동이 가지고 있는 유교사회적 전통이 적지않게 작용했음을 알 수 있다. 별신굿에는 양반들과의 첨예한 대립 속에서 신앙과 대동(大同)으로 팽팽하게 맞섰던 안동지역 기층민들의 힘이 담겨 있으며, 여기에는 양반세력들과의 보이지 않는 긴장과 역동성이 내재되어 있는 것이다. 안동지역 별신굿은 제의성이 두드러진다. 하회마을에서 탈을 신성시하는 것에서도 알 수 있고, 신을 모셔서 자기 마을뿐만 아니라 이웃마을들까지 퍼레이드(순행)를 벌이는 형태 역시 가무오신의 제의 전통을 잘 드러내고 있다. 게다가 안동지역에서는 제의의 의미와 목적을 분명하고 구체적으로 형상화하기 위한 연행물들이 발달했다. 탈놀이, 진법희(陣法戱), 허재비(허수아비) 놀이, 범굿 등 다양하다. 안동지역 별신굿에서는 제의성의 강조와 함께 축제성을 중요한 특질로 꼽을 수 있다. 별신굿이 벌어지는 시공간 자체가 바로 축제의 현장이기 때문이다. 별신굿이 연행되었던 마을 촌로들은 별신굿이 시작되면 원근 마을 주민들이 몰려들어 인산인해를 이룰 정도였다고 증언한다. 많은 사람이 모이는 만큼 자연스레 난장이 형성되었다. 특별히 마련된 별신굿의 시공간에서는 마음껏 먹고, 놀고, 즐길 수 있었던 것이다. 게다가 평상시 볼 수 없었던 무당패와 마을주민들의 특별한 연행물이 볼거리로 제공되었다. 안동지역 별신굿은 제의성과 축제성이 행복한 조화를 이루면서 지역사회에 활력을 불어넣어주는 사회문화적 장치였음을 확인하였다. 현재는 대부분 전승이 중단되었지만 앞으로 마을주민들이 주체가 되는 현대적 마을축제로 거듭날 수 있기를 희망한다. Byulshin-gut is the special ritual of villages in local society. These rituals transmitted by three ways, that is, way of rural society, sea coast society and market place society. A network of local communities around this ritual involve several social aspect, economic aspect, historical aspect, cultural aspect, and art and so on. Byulshin-gut as ritual and festival is performed by variety purposes and patterns. Hahoe Byulshin-gut is the most representative traditional folk ritual in Korea. This ritual performed in the Poongsan area, Andong-city. Byulshin-gut is the special ritual of village in local society as like Hahoe, Byungsan, Sudong and so on in Andong. But present day, this traditional rituals are not performed or performed in the artificial stage as a selected or inventive folk art. I note in this article that next, what is a peculiarity of Byulshin-gut in Andong?, how this style ritual has been adapted in the local history? And I remarked a special aspects of Byulshin-gut. The peculiarities of Byulshin-gut in Andong are prescribed as next. A traditional ritual of communal society that has special aspects as distinct from general annual communal rituals, and has periodic pattern, that is, annual, three years, five years, and ten years, and festive ritual performed by the group of shaman and the maeul communities. Therefore a special elements of Byulshin-gut is summarized up three points. the first is a special character of holding circle, the second is a special character of the main performing people and main performing items, and the third is a peculiarity of open structure in this kind ritual. Conclusionally, I think that a original peculiarity of Andong communal ritual is caused by the ritual pattern of Byulshin-gut, and a history of Andong communal ritual is nothing but a adaptative process of Byulshin-gut in the context of several and changing condition.

      • KCI등재

        안동의 이미지, 농산물 공동브랜드 및 국가인증마크와의 관계 - 조선시대, 현재의 시공간과 종단적 연구를 중심으로 -

        권기대,권기백 한국브랜드디자인학회 2022 브랜드디자인학연구 Vol.20 No.2

        오늘날 긍정적 지역 브랜드의 이미지는 방문객들의 역내 유입으로 지역경제, 귀농귀촌, 지역(명) 인지도 확산 그리고 지역 농산물 공동브랜드 촉진의 마중물로 작용된다. 본 연구 는 조선시대(1608년), 오늘(2019년)의 안동 이미지, 지역 농산 물의 공동브랜드 및 국가인증마크와의 관계를 다룬다. 연구 방법은 조선(1608년) 및 안동시(2019년)를 기준연도로 종단 적 연구(Longitudinal Research)를 시도한다. 연구의 공간적 범위는 조선시대 안동대도호부 및 오늘의 안동시로 국한한 다. 내용적 범위는 조선시대 권기(權紀)의 「영가지(永嘉 誌)」및 안동시 통계연보의 자료를 활용한다. 연구결과는 첫 째, 권기의「영가지」에 따르면, 오늘의 안동은 역사성, 문화 성, 경관성 그리고 산업성을 조선시대부터 잉태되고, 일관되 게ㆍ지속적으로 관리되어 오면서 전통문화도시로서의 이미 지를 포지셔닝하였다. 둘째, 오늘의 안동 농산물은 조선시대 와 달리 공동브랜드의 이미지로 국내ㆍ해외시장으로의 유통 됨에 따라 구매자와의 파워있는 브랜드로 높여주었다. 셋째, 농산물 공동브랜드가 불특정 다수의 소비자들로부터 브랜드 의 신뢰를 얻는 첩경은 바로 정부가 관리하고 있는 농산물의 국가인증마크(GAP, GI) 획득이다. 그러한 결과는 지역의 농 산물이 오늘날 개성있는 안동의 식문화 브랜드로 주목받는 기회로 승화하였다. 즉, 안동지명 및 음식 간의 붙여진 브랜 드―소주, 식혜, 간고등어, 찜닭, 산약, 사과, 생강, 문어, 한우, 한지 등에서 전국적 경쟁우위의 브랜드로 자리 잡았다. 본 연 구의 제안은 향후 기초지방자치단체가 안동의 독보적 이미지 구축을 위해서라도 관계특유투자를 지속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 첫째, 지역의 이미지는 소비자들에게 어느 순간에 형성 되고 기억되는 것이 아니므로 역사성, 전통성 그리고 지역성 을 위해 투자되어야 비로소 차별성ㆍ우월성의 지역 이미지로 뿌리내릴 수 있다. 둘째, 지역에서 역사성, 전통성 그리고 지 역성의 농산물들은 ‘지리적 표시제(GI)’처럼 국가인증마크를 획득해야 브랜드자산으로서의 가치를 지니는 동시에 소비자 로부터 브랜드 충성도로 결속될 수 있다. This study deals with the relationship among Chosun(1 608 year), Andong's image(2019 year), co-brand and nati onal certification marks. That is, what image has Andong formed in the historical trend of 414 year? It has the back ground of the question. The method of this study attempt s a longitudinal study using literature based on Kwon Ki’ s 「Younggaji」(1608 year) and 2019 year’s the statistica l yearbook published in Andong. The spatial scope of the study is limited to Andong Daedohobu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Andong, Korea today. For the content rang e, statistical data from 1608 during the Chosun Dynasty and 2019 in Andong-city are used. The research results are as follows. First, according to Kwon Ki's 「Youngga ji」, In the Chosun Dynasty and today's Andong, you ca n find the image of a traditional cultural city with historic al, cultural, landscape and industrial characteristics. Seco nd, in Chosun and Andong today, agriculture is a liveliho od, but it has maintained its unique image of scholar cult ure in the region. Third, co-brands produced in Chosun and Andong fostered unique Andong food culture brands. In other words, these are the brands named Andong and between food, soju, sikhye, and salted mackerel. The impl ication of this study is that it is necessary to obtain a GI of national certification marks and co-brand.

      • KCI등재

        안동 현대문학사에서 박종우의 위상

        한경희(Kyunghee Han) 한국문화융합학회 2020 문화와 융합 Vol.42 No.4

        본고는 지역문학 연구의 일환으로 소외된 지역문학의 현장을 찾아 발굴하는 일에 목적을 두었다. 중앙문학사에 비해 인적 물적 기반이 부족한 지역문화 현실 속에서도 고군분투한 작가의 자취를 찾아내고 그들의 교류를 확인하여 문학사를 기술할 때 더욱 온전한 문학사를 갖출 수 있기 때문이다. 지역문학사 서술을 위해 안동지역에서 활동했던 작가와 작품을 발굴하는 일 이외에도 작가들의 활동사항을 잘 정리해서 그들의 역량이 지역사회에 어떤 의미로 작용했는지 살펴본 것이다. 안동에 아무 연고가 없는 박종우가 안동의 현대문학에서 중요한 위치를 갖게 된 것은 단순히 안동고등학교 교사였기 때문이 아니다. 당시 안동은 기성문단에 등단한 작가가 없었고 전쟁이후 폐허가 제대로 회복되지 않은 상황이었다. 작가적 역량이나 문학적 역량이 집중될 환경이 되지 못했다. 박종우가 안동에서 문학적 분위기를 주도하고 만들어갈 수 있었던 것은 안동의 현대문학판의 미형성에 큰 이유가 있다고 본다. 안동의 현대문학은 학생동인 중심으로 출발했다는 것은 안동문화의 한 특징을 드러낸다. 박종우의 영향력은 크게 두 가지로 언급한다. <맥향> 동인의 조직과 문예교사로서 시창작 지도이다. 전자는 현대문학이 전무한 안동에도 문학장에 새로운 기운을 불러낸 것이다. 전후 피폐한 지역문화현실을 극복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고 평가할 수 있다. 전쟁을 겪으며 폐허가 되었던 안동에 새로운 문화접변 현상을 박종우가 불러 일으켰고 그 결실로 학생문예운동이 일어난다. 후자는 안동에만 국한되는 것도 아니다. 박종우에게 시창작 지도를 받은 경상남북도 학생들은 오늘날 지역문학 현장에서 중심역할을 하고 있다. 특히, 안동의 경우는 당시 문예장학생 제도로 대학입학까지 하는 사례도 생겨나 문예창작 움직임이 활발해졌다. As part of regional literature research, this paper aims to find and discover scenes from marginalized regional literature to show that a more complete literary history can be gained through literary history descriptions that involve identifying traces of struggling writers and confirming their exchange, even in the local culture reality, which lacks a human and physical foundation compared with central literary history. In addition to discovering the artists that were active in the Andong area and examining their works in order to describe the history of the local literature, we also organized these artists’ activities to see how their capabilities operated within the community. Park Jong-woo, who has no connection with Andong, is not relevant simply because he was a teacher at Andong High School. At the time, Andong had no writer in terms of the ready-made paragraph, and the ruins had not been properly restored since the war. It was not an environment that was conducive for a concentration of artistic or literary competence. I think that the reason Park Jong-Woo was able to lead and create a literary atmosphere in Andong is because there is a great reason behind the formation of the region’s modern literature. The fact that Andong’s modern literature began with a focus on student drivers reveals an important regional cultural characteristic. Park’s influence is largely mentioned in two ways. Machyang is a literary teacher’s map of poetry creation as well as a method of group organization. The former brought a new energy to the literature hall in Andong, from which modern literature was absent. It can be said that it played an important role in overcoming the devastated post-war local cultural reality. In Andong, which was ruined during the war, Park Jong-woo evoked a new cultural transformation phenomenon, resulting in a student literature movement. The movement is not limited to Andong. Students from Gyeongsangnam-do, North Korea, who responded to Park Jong-woo’s guidance on poetry creation, play a central role in the field of local literature today. In the case of Andong, in particular, there are many students who were able to attend university through the literary scholarship system.

      • KCI등재

        도시 속 민속의 창출과 지방문화원

        이상현(Lee Sang-Hyun) 한국민속학회 2011 韓國民俗學 Vol.53 No.-

        본 연구는 안동시라는 도시 공간 속에서 민속의 창출에 큰 역할을 한 안동문화원을 분석하기 위하여 작성되었다. 이를 위하여 본 연구에서는 먼저 안동문화원의 임원들이 거주하고 있으며 주요 활동 공간이었던 안동시의 역사 그리고 임원들의 특징을 기술하였다. 다음으로 안동문화원 활동의 유형 그리고 민속과 관련된 활동 유형 구분하고 그 특징을 분석하였다. 이를 바탕으로 안동문화원이 민속에 관심을 갖는 배경은 우선 정부로부터 인정받은 민속을 지역 주민에게 소개하기 위한 목적이었다는 점을 제시하였고 이는 민속축제를 개최하고 운영하는 데 잘 함축되어 있다고 보았다. 민속축제가 확대 운영되고 참여 단체가 많아지면서 도시화로 전승이 단절된 민속의 발굴과 창출이라는 효과도 거두었으며 무형문화재와 관련된 민속에 관심을 갖고 있는 사람들이 중앙에 인정받기 위하여 본 행사에 참여했다는 점을 본 연구에서 밝혔다. 또한 안동문화원은 중앙에서 인정되었거나 인정받기 위한 민속만을 무대화시킨 행사에 머물지 않고 지역 주민들이 즐길 수 있는 민속을 경연대회 방식으로 운영하였다는 점도 본 연구에서 함께 제시하였다. 다만 본 연구에서는 안동문화원의 활동 시기를 제한하여 언급하였고 또한 민속 이외에 유교적 자원 혹은 역사적 자원 활용과 관련된 안동문화원 사업 혹은 활동에 관한 분석이 상대적으로 소홀하였다는 문제점을 비판받을 수 있다. 이에 대한 논의는 본 연구에서 제시된 안동문화원의 활동 중 민속의 창출과 관련된 논의를 마친 이후 지방문화원으로서 안동문화원의 전반적인 사업과 활동을 종합적 분석한 이후에 제시할 계획이다. This study has been composed to analyze the Andong Culture Center, which has performed a great tole in the creation of a folklore within the urban environment of Andong city, To achieve this, this study has foremost depicted the history of Andong city, which has been the wain space of activity and residence of the members of Andong Culture Center, and the properties of these members. Next the type of activities of Andong Culture Center and folk-related activities have been categorized, and their properties have been analyzed. Based on which, this study has suggested that the interest of Andong Culture Center towards folk culture has been derived from the purpose to introduce government-recognized folk to the regional residents, and this purpose is seen to be well implied in the organizing and operating of the folk festival. The effects of creation and discovery of folk culture severed from being passed down due to the urbanization has been displayed with the expanded operation of the folk festival and increased number of participating groups, and the fact that those with interest in folk-related intangible cultural assets have participated in this event to receive recognition within the center of the city has also been proposed by this study. However, this study has restrictively mentioned the term of activity of Andong Culture Center, and is receiving criticism on the problem of relatively neglecting analyses related to the projects or activities of Andong Culture Center concerned with historical resource activities or Confucian resources. Discussions on the topic is planned to be suggested after the combined analysis of the overall projects and activities of Andong Culture Center as a local cultural center, following the conclusion of discussion related to the creation of folklore with the activities of Andong Culture Center.

      • KCI등재

        경북 안동지역 佛塔의 편년과 특징

        신용철 부산대학교 한국민족문화연구소 2009 한국민족문화 Vol.34 No.-

        安東佛塔은 수량에 있어 古都 慶州를 제외하면 전국에서 가장 많은 양이 남아 있으며 형식에 있어서도 한국탑파의 전시장을 연상할 만큼 다양하다. 본 연구에서는 안동불탑의 현황과 편년 등을 검토하여 안동탑만이 갖는 특징에 대하여 살펴보았다. 현재 안동불탑은 9세기 이후 건립되어 10세기에 집중되는 양상을 보여 준다. 탑형별 특징을 살펴보면 전탑은 7층의 고층이 주류를 이루며, 벽돌에 있어서도 다른 지역 전탑과는 차별성을 띠고 있다. 조탑 위치에 있어 강변이나 넓은 들판을 내려다보는 경우가 많다. 특히 낙동강변에 위치했던 전탑은 기단부, 혹은 1층 탑신을 화강암으로 처리하여 특이성을 띠고 있는데, 이는 강변의 습기에 탑을 보호하려는 의도였을 가능성이 있다. 지금까지 연구에서는 전탑 지붕부분에 기와의 존재를 부정하였으나 문헌의 예와 조선시대에 수리되면서 기와를 올린 점 등을 고려하면 애초부터 기와가 있었을 가능성이 높다. 한편 문헌상으로만 존재하던 “一直三塔”이 최근 발굴결과로 확인된 점은 『永嘉誌』가 문헌상 갖는 정확성을 입증해주는 동시에 三塔에 대한 새로운 도상해석이 필요하게 되었다. 석탑은 소형 삼층이면서 표면장식, 즉 浮彫像을 배제한 탑들이 많다. 동시에 하층기단을 생략한 단층석탑이 많지만 기단을 높게 하여 상승감을 강조하려는 의식을 드러내고 있다. 안동석탑의 특이점은 1층 탑신에 門扉를 배치한 석탑이 많다는 점과 다른 지역에서는 그 유례를 찾기 어려운 2층 이상의 탑신에 柱間을 형성한 탑들이 존재한다는 것이다. 이처럼 안동석탑의 변화에 있어 단층기단석탑, 모전석탑의 유행과 발전은 경주에서 시작되어 안동 등 경북을 넘어 충북지역에 이르는 다양한 석탑문화 확산의 연결고리 역할을 한 점에서 중요시 된다. Andong(安東) offers the largest number of extant pagodas after Gyeongju in Korea, along with diverse types of pagodas. In this study, the status and chronicles of pagodas in Andong were examined, thus defining their unique characteristics. The construction of Buddhist pagodas in Andong began after the 9th century, and peaked in the 10th century, the early time of Goryeo Dynasty. This is attributable to Andong's particular situations, with the founding of Goryeo Dynasty. By the type of pagodas, brick pagodas in Andong are seven-storied in large numbers, differentiating their bricks from bricks in brick pagodas in other regions. Many pagodas are located on areas overlooking a riverside or plains. Notably, in the case of brick pagodas, which are located by the Nakdong riverside, their stylobates or first-floor pagoda bodies are made from granite, making them particular; this is thought to have protected the pagodas against river flooding and humidity. Existing researches denied the existence of tiles in rooftops of brick pagodas; however, in consideration of examples described in literature and the placement of tiles on rooftops during repair in the Joseon Dynasty period, tiles are believed to have existed from the beginning. In the meantime, the existence of Iljik three pagodas(一直三塔) whose existence was mentioned in literature, have recently been unearthed, proving the Yeonggaji(永嘉誌) Local Lifestyle Record to be accurate, and indicating the need to interpret the three-pagodas type afresh. Many stone pagodas are three-storied, and are not decorated on the surface. Also, many stone pagodas are one-storied without a stylobate, but have their base located on an elevated area in a bid to stress a sense of rising. Many stone pagodas in Andong have a gate installed at the first-floor pagoda body. They also have columns erected on the second-floor tower body. Single-floor stylobate pagodas and brick-shaped pagodas, which began in Gyeongju, became popular in the Andong areas, and then flowed into the Chungbuk region. In this development did Andong pagodas play a great role.

      • KCI등재

        압록강 하류지역 安東朝鮮人會의 活動과 性格

        吳秉漢(OH Byung-han) 한국근현대사학회 2021 한국 근현대사 연구 Vol.98 No.-

        본 연구는 1910년대부터 1930년대까지 압록강 연안의 대표적인 조선인 친일단체였던 안동조선인회의 압록강 하류지역에서의 활동과 그 성격을 규명하고자 한 것이다. 안동조선인회는 1913년 안동조선인조합를 전신으로 설립되어 상류지역까지 지회를 설립하였다. 하지만 안동현 북쪽 지역은 교통이 불편하여 일본의 세력이 미치지 못하였다. 1920년대 이후부터는 독립운동단체의 활동으로 이 지역에서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은 위축되었다. 반면 하류지역에서는 1920년대까지 회원 증가와 지부가 신설 등이 계속되었다. 그리고 안동조선인회의 지회 대부분은 조선인 거주 지역이자 일본의 경찰관주재소가 설치된 지역에 설립되었다. 안동조선인회의 활동은 1910년대부터 조선인들의 생계와 직결된 상조문제를 비롯하여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보조서당 설립, 소득 증대를 위한 부업 알선 등에 집중되었다. 이러한 활동을 통하여 안동조선인회는 1930년대까지 안정적인 활동을 계속하면서 조선인들에 대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러나 1930년대까지 안동을 비롯한 하류지역 조선인들 대부분은 여전히 소작인이나 일용직으로 생활고에 시달렸다. 학교 등 조선인 아동들을 위한 교육시설은 여전히 부족하였다. 단순 수공업 위주의 부업은 조선인들의 실질적인 소득 증대로 이어지지 않았다. 이는 10년 이상 지속된 안동조선인회 활동이 조선인들의 생계 혹은 생활수준 향상에는 효과가 없었다는 의미였다. 이러한 점에서 안동조선인회는 설립 당시 일본이 주장하였던 조선인들의 생활 향상 혹은 보호와는 관계가 멀었다. 하지만 일본은 안동조선인회를 통하여 조선인들 사이에 지속적으로 영향력을 확대할 수 있었다. 그리고 조선인 친일단체로써 안동조선인회의 성격은 일본의 영향력에 따라 그 활동이 좌우되었다는 사실에서 찾아야 할 것이다. This essay tried to explore the activity and character of Andong Chosun People’s Association(hereafter the Chosun Association) in the lower Aprok River area from 1910s to 1930s. The Chosun Association had been a representative Korean pro-Japanese organization since 1913. The most of immigrant Koreans in Aprok River area was influenced by Chosun Association. In particular, its influence was stronger in Andong and its surroundings than in other regions. However, Japanese influence did not reached to the northern area of Andong mainly because of traffic inconvenience. Following it, the activities in this region were reduced by independence movement groups in the 1920s. To the contrary, the members and the opening of branched in lower areas increased in the same period. And, most of branched was built where Japanese police boxes were. It mainly owe large part of its activities focused on immigrant Korean’s everyday life issue, such as land or house rental from Chinese, making of an auxiliary school for their children, and the arrangement of side jobs or works to increase income etc. It is why Chosun Association in lower area could continue to exist until the 1930s unlike the other area. Despite activities for 10 years, the lives of Koreans did not improve until 1930s. Most of the Koreans were suffering from hardship as a tenant or dialy worker. Educational facilities for Korean children, such as schools, were still lacking. Most of works centered on simple handscraft did not lead to income increasing. In this regard, the Chosun Association was far from improving or protecting the lives of Koreans that Japan claimed at the time of its opening. However, Chosun Association could be a way Japan was able to continuously expand its influence. It was the feature of Chosun Association as a Korean pro-Japanese organization should be found in the fact that its activities were influenced by Japanese power.

      • KCI등재

        안동의 지역성과 만주망명 관련 가사문학 -지역문화콘텐츠 제안

        고순희 ( Soon Hee Ko ) 한국고시가문화학회(구 한국고시가문학회) 2015 한국시가문화연구 Vol.0 No.35

        최근 소개된 13편의 만주망명 관련 가사문학 가운데 안동에서 창작한 작품이 7편이나 된다. 이 점은 안동의 지역성과 무관하지 않다. 이 연구는 안동의 지역성을 통합적으로 드러내고 있는 지역문화콘텐츠로 만주망명 관련 가사문학을 제안하는 데 목적을 두었다. 우선 안동의 지역성을 살폈다. 첫째, 안동은 규방가사 창작의 중심지였다. 필사본 규방가사 자료가 가장 많이 수집된 지역은 안동으로 나타난다. 안동여성은 가사 창작을 일상생활문화의 하나로 지니고 있었다. 둘째, 안동은 독립운동의 메카였다. 안동은 독립운동가를 가장 많이 배출한 지역이다. 특히 경술국치 후 안동유림은 만주로 망명해 독립운동을 전개했다. 안동유림은 만주로 망명할 때 문중 전체를, 특히 여성을 동반해 갔다. 다음으로 안동 여성이 창작한 만주망명 관련 가사문학을 살폈다. <위모사>, <간운사>, <조손별서>, <눈물뿌린이별가>와 <송교행>, <답사친가> 등의 작가는 모두 안동 명문대가에 속한 여성이었다. 이들 작가는 자신의 문중이 만주 독립운동에 가담함으로써 극적인 삶의 변화를 겪게 되었으며, 그것을 가사로 표현했다. 이들이 쓴 가사에는 고국을 떠나는 처참한 심경, 고국에 있는 부모·형제·동기에 대한 그리움, 만주에 가 있는 딸·친정식구 등에 대한 그리움, 나라를 빼앗긴 울분, 자신이나 육친이 만주로 망명하기까지의 과정, 만주생활, 독립운동의지의 고취 등이 서술되어 있다. 만주망명 관련 가사문학의 창작은 안동의 두 가지 지역성이 작용한 결과였다. 즉 안동이 규방가사 창작의 중심지였다는 점과 안동이 독립운동의 메카라는 점이 결합하여 나타날 수 있었다. 따라서 이들 가사는 안동의 지역성을 총체적으로 드러내주는 훌륭한 지역문화콘텐츠가 될 수 있다. 한편 이들 여성도 양반가 문중의 일원이었으므로 이들의 가사창작문화도 양반문화에 편입되어야 한다. Recentry as Gasa relating to Manchuria Exile 13 pieces were identified. Among 13 pieces, the gasa to create by Andong peoples are 7 pieces. The aim of this research is to exhibit Gasa relating to Manchuria Exile as the contents which well reveal the locality of Andong. Some researchers collected manuscripts of female Gasa. According to their statistics, manuscript Gasa materials are the most collected in Andong region. Andong was the center region to create and enjoy Gasa. Gasa creation of Andong women was one of the everyday life culture. But in the meantime studies on the nobility culture of Andong did not notice it. Andong is the famous city that hitorically there are many independence movement persons. The scholars spirit of Andong nobility have performed the dramatic role in the Colony Period. Especially after Japanese annexation of Korea Andong nobility have exiled to Manchuria, have involved the independence movement in there. The point worth noting is that Andong nobility have gone together in Manchuria with women. The female writers of these Gasa relating to Manchuria Exile are members of famous Andong nobility. Their life have dramatically changed because their family men had participated in the independence movement. They have expressed their new life by Gasa. Gasa relating to Manchuria Exile could be created in the condition of the combining two locality of Andong discussing earlier. Therefore Gasa relating to Manchuria Exile could be local culture contents to reveal comprehensively locality of Andong. And because of that these women are members of Andong nobility, their Gasa creation culture need to be incorporated in Andong nobility culture.

      • KCI등재

        安東의 關王廟를 통해 본 지역사회의 동향

        김명자(Kim Myung-Ja) 한국민속학회 2005 韓國民俗學 Vol.42 No.-

        이 글에서는 官의 안동 관왕묘의 건립에 대한 지역사회의 담론과 관왕묘 건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하여 어떠한 전략을 펼치는지를 중심으로 하여 안동 관왕묘의 존속 양상에 대해 살펴보았다. 임진왜란 이후 관왕묘의 건립에서부터 현재에 이르는 통시대적인 관점으로 신앙형태는 어떠한 변화와 지속을 거듭하였는지도 함께 논의하였다. 먼저. 선조 31년( 1598) 국가의 공적 廟로써 안동 관왕묘를 건립하게 된 시대적 배경을 검토했다. 다음에는 선조 39년(1606)에 안동 유림의 반발로 西嶽의 東臺 현 위치로 移安한 시기, 이어 숙종 37년(1711)에 이르러 명나라 군대의 철수 이후 황폐한 상태에 놓여진 관왕묘를 국가차원에서 정비를 하는 시기로 크게 나누어 지속과 변화의 양상을 짚어 보았다. 그 결과 안동의 관왕묘는 보편성과 함께 지역적 특수성을 가지고 있음을 확인하였다. 1598년 명나라의 眞定營都司 薛虎臣에 의해 城內 北山頂에 처음 세워진 국가차원의 안동 관왕묘가 건립된 후 8년만인 1606년에 안동향교와 대치되어 있다는 이유로 유림에서 관왕묘의 철수를 요구하게 되었다. 이에 官에서 현재의 위치인 西岳 東臺로 관왕묘를 이전할 수밖에 없었던 일련의 사건은 관왕묘에 대한 안동지역사회의 여론과 동향을 여실히 반영하고 있다. 관에서는 관왕묘를 이전하는 구실 즉, 정당성을 관왕의 현몽과 서악의 풍수지리적 형국에서 찾게 된다. 지역사회와 관 차원에서 풍수지리적 형국을 어떻게 자신에게 유리한 관점으로 해석하며, 이용하는가를 통해 관왕묘를 둘러싼 지역사회에서 야기되는 문제와 민간신앙으로 정착된 양상을 보다 정치(精緻)하게 살필 수 있었다. 요컨대 관왕묘를 이전하기 전, 관왕이 고을 원에게 좋은 자리로 옮겨달라는 설화가 동원되고, 다음으로는 서악산의 풍수지리적 형국이 虎頭穴이어서 虎食을 많이 당하기 때문에 軍神인 관왕의 氣로써 호두혈을 눌러야 한다는 풍수지리적 정당성이 동원된 것이다. 이처럼 국가차원의 관왕묘 건립과 안동 지역사회의 대응양상을 통해 볼 때 안동 관왕묘는 중요한 위치를 점하고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관왕묘가 국가 차원에서 중요한 위치를 점한다는 것은 관왕묘의 보편성이라 할 수 있지만 유림의 반대에 의해 관왕묘의 자리를 옮기는 것은 안동 관왕묘의 지역적 특수성이라 할 수 있다. 또한 관왕묘를 이전하는 구실을 관왕의 현몽과 풍수지리적 형국으로 해석하는 것 역시 특수성에 해당된다. 신앙대상으로서의 관우는 관성제군을 신으로 모시는 무속인들과 미륵불을 섬기며 관우를 협시보살로 모시는 관성교 등에 의해 신앙되어 왔다. 안동의 관왕묘 역시 후전도 미륵종불을 섬기는 이에 의해 현재 관리되고 있다. 관우의 財神ㆍ治病ㆍ祈福의 기능은 지속되고 있으나 실상 안동지역에서 관왕에 대한 신앙적 인식은 그리 강하지 못한 것으로 나타났다. This study gives an over view of a local community concerned with the establishment of Gwanwangmyo, an ancestral shrine worshiping Gwanu in the era of Three States, China, under the government in Andong and the existence legitimacy of Gwanwnagmyo in Andong, based on the strategy that was used to get legitimacy for its establishment. This study also shows how the form of a faith has changed and been sustained from the establishment of Gwanwangmyo after Imjin-waeran to the present. First, we looked into the historical background by which Gwanwangmyo was established as the public ancestral shrine in Seonjo 31, 1598. Next, we looked into the durability and the nature of the change, by dividing into two parts, Firstly, the time of moving an ancestral tablet or the scroll of a portrait to Dong-dae, Seo-ak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the Confucians at Andong in Seonjo 39, 1606. Secondly, the time of maintenance of the ruined Gwanwangmyo by the government after the withdrawal of the army of the Ming dynasty in Sukjeong 37, 1711. As the result, we found that Gwanwangmyo in Andong had a localized view as well as a general view. The Confucians demanded the withdrawal of Gwanwangmyo because it stood up against Andong Hyanggyo in 1606, eight years after Gwanwangmyo under the government was established at Buksanjeong by Seol Hosin who managed Jinjeong-yeong in the Ming dynasty, 1598. Accordingly the series of events by which people felt the need to move Gwanwangmyo to Dong-dae, Seo-ak showed the public opinion of Andong community about Gwangwangmyo clearly. The government set down the reasons for moving Gwangwangmyo according to Gwanwang’s dream and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he topography of Seoak. We were able to ascertain the problems caused by Gwangwangmyo in the local community and how it took root as a folk belief in detail, that is, understanding how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was viewed favorably and had an influence on the condition of the community and the government. In other words, people brought something into play as following: the tale, by which Gwanwang asked a country magistrate to move it into a good place, and the reasons on the theory of divination based on topography, according to which people suggested the need to control Hoduhyeol, the hole with the shape of a tiger, using Gwanwang’s strength because the appearance of Seoak-san was the shape of Hoduhyeol and had caused a tiger's attack. As a result, we could be sure that Gwanwangmyo in Andong held an important status as suggested above. We can consider it as a general view of Gwanwangmyo that it held an important status in the national situation, while we can also consider it as a localised view of Gwanwangmyo that it moved its place because of the opposition of the Confucians and the cause of its movement was considered as a result of Gwanwang’s dream and the geographical position. Gwanu was considered as the being like a faith by the person following the shamanist custom, who served Gwanseong-jegun as a god, and Gwanseonggyo, which served Maitraye and considered Gwanu as Hyeopsi-bosal. Gwanwangmyo in Andong was also managed by persons serving Maitraye of Hwucheondo. We found that Gwanu’s ability of being like a god, healing illnesses and granting wishes was sustained but the belief in considering Gwanwang a faith was poor.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