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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遺民墓誌로 본 고구려, 백제의 官制

        김영심(Kim, Young Shim) 한국고대사학회 2014 韓國古代史硏究 Vol.0 No.75

        본 논고에서는 유민 묘지의 주인공과 그 선조의 관직 및 관등명을 통해 6~7세기 고구려와 백제의 관제를 고찰하였다. 고구려 유민 <高慈墓誌> <李他仁墓誌>에 나오는 柵城[柵州]都督과 大相, 백제 유민 <陳法子墓誌>에 나오는 太學正과 佐官, 參司軍 등의 관명은 기존의 관제 연구를 수정?보완할 수 있는 중요한 자료이다. ‘大相’은 太大使者라는 관등의 이칭으로 관직적 성격을 함께 가지고 있었다. 유민 묘지의 발견으로 고구려 말기 이미 ‘-相’이라는 관등명이 병용되었을 가능성이 높아졌다. 柵州는 고구려 동북방의 정치?군사적 요충지인 柵城을 治所로 하여 일정한 영역을 거느린 광역의 행정구역이다. 그 장관인 柵州都督은 민정권과 군사권을 함께 가지고 휘하에 있는 지역을 관할하였다. 따라서 고구려 후기의 지방통치체제는 褥薩-處閭近支-婁肖라는 지방관으로 이어지는 3단계의 통할관계로 보는 것이 타당하다. <진법자묘지>에서는 ‘太學正’이라는 관직이 등장하여 ‘博士’ 관련 자료에 국한되던 백제의 교육기관과 관료의 양성?선발 문제를 좀 더 구체적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진법자의 조부가 역임한 ‘麻連大郡將’이라는 관직을 통해서는 郡에 등급의 차이가 있을 가능성 내지 3명의 군장 사이의 서열이 大郡將과 郡將이라는 형태로 나타났을 가능성을 상정해볼 수 있다. 郡 단위에도 佐官이 있다는 것이 ‘旣母郡佐官’이라는 표현으로 확인되는데, 나주 복암리 목간에 나오는 ‘郡佐’라는 표현과도 통하는 면이 있다. 실제로 郡이 민정 수행에 있어 핵심적인 행정단위였기 때문에 郡司조직이 발달했을 가능성이 있다. 묘지 자료는 편린에 불과하기 때문에 관제의 전모를 살필 수 없고, 또 여타 자료와 비교 검토할 필요가 있지만, 부족한 사료를 채울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 기존에 출토된 각 묘지명에 대한 정밀한 분석과 새로운 자료의 출현이 뒷받침된다면 관제에 대한 연구도 진전이 있을 것이다. This study shows the government organization of Goguryo and Baekje in the era of 6~7th century through the analysis of the government positions and official ranks of the owners of tombstone and their ancestors. Chaekju-Dodok(柵州都督) and Daesang(大相) appeared on the GojaMyoji(高慈墓誌) and the YitainMyoji(李他仁墓誌) of the refugees of Goguryo and the Governor of Education(太學正), Vice-minister(佐官) and the Vice-General(參司軍) on the JinbubjaMyoji(陳法子墓誌) of the refugees of Baekje are the titles of government position which can be used as the new evidences for the revision of existing studies of the government organization of Goguryo and Baekje. The title of Daesang(大相) is the another title of the the official rank of Taedaesaja(太大使者), and has the character of public office. After the discovery of refugees’ epitaphs, it became plausible to assume that the title of official rank ‘-sang(相)’ was used jointly in the era of late Goguryo. Chaekju State(柵州) is the broad administrative district, which placed its capital in Chaekseong(柵城) and governed neighboring regions. Chaekju-Dodok, the governor of Border State(柵州), has the civilian and military ruling rights. It is possible to assume that Goguryo’s local administration system in the late era was organized as three tier local officer system of Yoksal - Choryogunji - Rucho(褥薩-處閭近支-婁肖) The discovery of the title of public office, the Governor of Education, on the Jinbubja Myoji, we can enrich the understanding of Baekje’s educational institution, recruitment and training of public officer which were confined to the study of Baksa(博士, the expert of scripture). The fact that Jinbubja’s grandfather served the public position of Maryon Daegunjang(麻連大郡將) shows the difference in the hierachy among Gun(郡, the local region), or the ranks among three governors as the titles of senior governor of region[大郡將] and governor of region[郡將]. The title of Gimo-gun Jwagwan(旣母郡佐官) shows that there was vice-governor at the level of Gun(郡). Governor aide of Gun[郡佐] which were appeared on the wooden plate of Naju Bokam-ri(羅州伏岩里) might have the same meaning with vice-governor of region. By the fact that Gun was the core unit in the pursuit of civilian administration, we can infer the organizational development of regional assistance position[郡司]. Because the evidences from the memorial inscriptions are scarce in amount, we cannot see the whole picture of Government organization system through the analysis of them, and require the comparative analysis with the other references. In view of the scarcity of historical records, however, the evidences from the memorial inscriptions are very useful materials for refill the shortage of historical records. With the precise analysis on the existing memorial inscriptions and the discovery of new evidences, we can develop the research on the organizational system of public office.

      • KCI등재

        墓誌銘 자료를 통해 본 고려후기 官人의 생애 : 金?(1248~1301)의 사례

        李益柱(Lee Ik-joo) 고려사학회 2006 한국사학보 Vol.- No.23

        묘지명이란 사람이 죽었을 때, 그의 이름과 가족관계, 경력 등을 기록하여 함께 매장하는 것을 말한다. 지금까지 고려시대의 묘지명은 모두 322개가 발견되었으며, 이것들은 역사 연구에서 귀중한 자료로 이용되고 있다. 그러나 그 수가 너무 적어 아직까지는 본격적으로 활용되고 있지 못하다. 묘지명의 기록을 이용하여 고려시대 사람들의 평균 수명이나 평균 결혼연령 등을 통계적으로 조사한 연구도 있지만, 표본의 수가 너무 적기 때문에 그 결과를 신뢰하기 어렵다. 지금으로서는 각각의 묘지명에 대한 세밀한 분석을 통해 주인공 개개인의 생애를 구체적으로 복원하는 사례 연구를 모색할 필요가 있다. 이 경우 서로 관계가 있는 사람들의 묘지명을 연결하여 자료의 밀도를 높임으로써 개별 묘지명을 분석할 때보다 더 많은 자료를 찾아내는 것이 가능하다. 이러한 관점에서 고려시대 묘지명 가운데 金?의 墓誌銘과 그의 처 허씨의 묘지명, 김변의 아들 金倫의 墓誌銘과 그의 처 최씨의 묘지명, 김륜의 딸 김씨의 묘지명과 그녀의 남편인 閔思平의 墓誌銘 등 6개 묘지명이 주목된다. 김변과 김륜, 그리고 민사평 처 김씨 등 3대의 부부 묘지명이 온전하게 남아있는 경우이기 때문이다. 특히 여성의 묘지명이 이처럼 집중적으로 남아 있는 경우도 드물다. 이 논문은 이 6개의 묘지명을 이용하여 김변의 일상적인 생애를 복원한 것이다. 이를 위해서 먼저 김변이 살아가는 동안 관계를 맺고 있었던 친인척들에 대해 조사하였다. 고려시대의 친족관계망이 兩側的 親屬(bilateral kindred)으로 구성되었던 점에 주목하여, 당시 양측적 친속관계를 법제적으로 반영하고 있는 相避制의 규정을 기준으로 김변의 친인척을 조사한 결과 本族 40명(納足 36명, 外族 4명), 妻族 30명 등 모두 70명을 찾을 수 있었다. 이들과의 관계에 유의하면서 김변의 생애를 (1) 出生과 成長, (2) 出仕와 結婚, (3) 出産과 出世 등 세 단계로 나누어 살펴보았으며, 마지막으로 (4) 자녀들의 혼인 상황과 사망 당시의 家勢를 조사하였다. 이 과정에서 가족재구성(Family Reconstruction)의 방법을 사용하였으며, 김변과 관련된 각종 자료들을 미시적으로 분석하였다. 이 논문은 미시사의 방법론을 이용하여 고려 후기의 평범한 관인이었던 김변의 일상적인 생활을 재구성할 수 있었다. 그러나 친인척 이외에 일상생활에 중요한 영향을 끼쳤던 친구들에 대해서는 고려하지 못했고, 김변의 외형적인 삶을 재구성하였을 뿐 내면의 의식시계에는 접근하지 못하였다. 이는 묘지명 자료의 한계 때문으로, 앞으로는 개인 문집을 남기고 있는 고려 말의 인물들에 대해서 친인척관계와 교우관계를 모두 포함하는 인간 관계망(human network)을 구축하고, 그 안에서 개인의 일상적인 삶과 생각을 복원해보고자 한다.

      • 무연고묘와 죽음권

        강정원(Kang Jeong Won),이도정(Lee Dojung) 서울민속학회 2017 서울민속학 Vol.- No.4

        이 글은 한국의 급격한 도시화 과정에서 부각된 문제인 공동묘지와 무연고묘에 대한 민속학적 탐구이다. 현대 한국의 민속문화에는 개별화와 공동체화라는 양면적인 과정이 동시에 나타나고 있다. 이 과정에서 무연고시신의 처리 문제는 위생과 경제가 우선시되는 근대화의 여파로 사회적 관심에서 배제되었다. 이 글에서는 이러한 문제가 현대 한국의 촌락 보다는 도시에서 두드러지게 나타났다는 점에 주목하며, 촌락과 도시를 비교하고 이를 통해 무연고묘에 대한 관념의 변화를 드러내고자 하였다. 이 글에서는 첫째, 한국의 묘지제도 변화 속에서 공동묘지 제도의 등장과 확립을 살피는 것을 통해 논의의 기반을 삼고자 하였다. 이를 위해 일제강점기에 제정된「묘지화장장매장및화장취체규칙」, 해방 후 제정된「매장등및묘지등에관한법률」,「장사등에관한법률」에서 나타나는 공동묘지제도의 흐름과 양상을 정리하였다. 이러한 공동묘지의 전개 과정에서 “무연고묘”라는 문제가 어떤 방식으로 포착되었는가를 법률적 변화 과정 속에서 살펴보았다. 둘째, 제정된 제도가 도시와 촌락의 실제 맥락에서는 어떤 방식으로 전개되는가를 살펴보았다. 우선 촌락에서 공동묘지가 어떻게 설치되었는지를 살피고, 이렇게 설치된 공동묘지와 무연고묘에 부가된 인식을 함께 살폈다. 이를 위해 본 연구에서는 경기도 평택시, 화성시 제부도, 전라남도 진도군의 자료를 활용하였다. 이와 반대축이 되는 도시의 맥락에 대해서는 서울특별시, 경기도 평택시 개발지역, 천안공원묘원의 사례를 통해 살펴보았다. 특히 도시에서 공동묘지가 문제시 되는 이유와, 무연고묘지가 공동묘지와 연관되는 양상을 주로 살폈다. 셋째, 본 글에서는 이를 기반으로 현재의 묘지 정책에서 무연고묘의 문제가 회피되고 있으며, 그 결과 묘지 문제가 단순히 경제성과 시체의 위생적 처리라는 틀 내에서만 처리되고 있음에 이의를 제기했다. 또한 표방되는 경제성과 시체의 위생적 처리라는 틀 내에서도, 현실적인 구체성이 결여되어 있음을 지적했다. 따라서 연구자들은 무연고묘 문제의 해결을 위한 구체적 정책 제정의 필요성과 함께, 죽음권 즉 죽음에 대한 인간다운 존엄성이 보장되어야 하며 이를 위해 무연고자에 대한 집단적 의례에 대한 법적 토대가 마련되어야 함을 주장 했다. This thesis is a historical folkloristical exploration of the communal cemetery and the unclaimed corpse and tomb, which are the problems raised in Korea’s rapid urbanization process. Modern Korean folk is experiencing the two-sided process of individualization and communization at the same time. In this situation, the problems of disposing of unclaimed dead body was excluded from the social interest as a result of the modernization in which hygiene and economy were given priority. In this article, we have noted that these problems are more prominent in urban areas than in villages. So, we compared the villages with the cities and tried to show the change of the idea about the unclaimed corpse and tomb. First, this article tried to show how the communal cemetery was legislated and settled through the changes of the law. In the course of legal change, we examined how the problem of “unclaimed corpse and tomb” was captured in the course of settlement of the communal cemetery institution. Second, this article tried to examine how the cemetery system was settled in the context of actual cities and villages. In the villages, we looked at how the communal cemetery was actually installed, together with the impression attached to it through the data of Pyeongtaek, Hwaseong, Jindo-gun. In the cities, we examined why the cemetery is questioned in the city and how the communal cemetery is associated with the unclaimed corpse and tomb through the cases of Seoul, Pyeongtaek developed area, Cheonan memorial park. Third, in this article, we pointed out that the problem of unclaimed corpse and tomb is avoided in the law and policy. And the graveyard problem is treated only within the framework of economic efficiency and sanitation. As a result, the legal and policy content lacks realistic concreteness to deal with the problem of unclaimed corpse and tomb. Therefore, this thesis argues for the necessity of concrete polity formulation for solving the problem of unclaimed corpse and tomb and argues that the legal basis for ceremonies that can guarantee human dignity -death right - should be laid.

      • KCI등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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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禰軍 묘지 연구

        李成市,정동준(번역자) 한국목간학회 2013 목간과 문자 Vol.10 No.-

        2011년에 王連龍이 소개한 ?軍墓誌에 따르면, ?軍은 백제 멸망 때에 唐에 투항한 백제 고관이고, 묘지에는 그의 일족의 유래나 백제에서의 역대 활약, 唐에서의 신하로서의 활동이 기록되어 있다. 묘지의 발견은 도굴에 의하기 때문에 상세한 출토 경위나 소재에 대해서는 밝혀지지 않았고, 최근에 이르기까지 묘지 자체의 실재를 확인할 수 없는 상태였다. 최신의 정보에 따르면, 묘지의 소재가 확인되었지만 현재에 이르기까지 미공개이다. 그래서 이 글은 王連龍이 논문 속에 소개한 지석 및 탁본사진에 기초하여, 묘지에 기록된 전문의 내용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역주를 전제로, ?軍의 외교활동을 중심으로 묘지에 기록된 사적을 고증하였다. ?軍墓誌는 고전적을 구사하여 작성된 난삽한 문장이기 때문에, 지금까지 ?軍墓誌에 관한 연구는 자의적으로 묘지의 일부를 추려내어 논의하는 경향이 있어서, ?軍의 사적이나 시대배경은 분명하지 않았다. 그러나 묘지 전문의 이해를 전제로 하면,『日本書紀』·『三國史記』등의 편찬사료에서 알려져 있었던 ?軍의 倭나 신라에의 외교활동을 뒷받침할 뿐만 아니라, ?軍의 활동시기에 唐人의 동아시아 정세 인식을 알 수 있는 귀중한 동시대자료임을 이해할 수 있다. 특히 중요한 것은 묘지에 기록된 ‘日本’이어서, 지금까지 일본 국호의 최초 사례로서 주목을 모아 왔다. 그러나 ‘日本’은 ?軍墓誌속에서 ‘扶桑’?‘風谷’?‘盤桃’ 등 동방을 의미하는 어구와 함께 사용되고 있어, 그 문맥상 ‘日本’이 백제를 지칭하고 있음은 틀림없다. 일본은 동방을 지칭하는 어구와 함께 사용되고 있는 것이고, 묘지에는 동시대에 사용된 국호는 하나도 사용되고 있지 않는 것에서 묘지가 제작된 678년에 ‘日本’이 국호로서 성립되지 않았음이 판명되었다. 종래, 일본 국호의 유래를 아마테라스라는 태양신을 조상신으로 제사하는 천황가와 밀접하게 관계된다고 하는 설이 유력하였지만, 일본 국호는 그러한 고대 일본신화와는 직접적 관계가 없고, 중국의 동방을 가리키는 보통명사가 7세기 말에 국호로 전화하였음이 밝혀졌다. 묘지 속에 기록된 ?軍의 활동시기에 唐人의 동아시아 인식으로서 중요한 것은 묘지 속에 ‘백제의 잔당은 倭에 의거하여 주벌을 피하고 있었지만, 고구려의 잔당은 신라를 거점으로 하여 막는 모습이 견고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는 것이고, 이것은『日本書紀』나『三國史記』등이 전하는 백제?고구려 멸망 후 각각의 왕족이 倭國이나 신라의 왕권에 의해 책봉된 사실과 부합하고 있어서, 말하자면 제3자인 唐側의 동시대인식이 묘지에 반영되어 있는 것으로서 주목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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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宋代江南墓誌對高麗墓誌的影響

        ZHOU KUN 중국사학회 2023 中國史硏究 Vol.- No.142

        近年墓誌成為學界關注和研究的熱點. 但對於中國的墓誌文化如何傳播到域外的問題似乎暫未引起重視. 與宋代同一時期的高麗也有使用墓誌的文化. 對於高麗墓誌文化來源於中國的影響這個問題學界的觀點也基本一致, 但是中國的墓誌文化本身由於地域、年代、民族的不同又有著極為複雜的系統. 那麼宋代影響到高麗的墓誌文化是哪一支是需要進一步討論的問題. 就江南墓誌與高麗墓誌的外形比較而言, 江南墓誌中發現的較多大小不一形態各異的長方形墓誌在高麗墓誌中都可以找到. 而中國傳統正方形的“盝頂形墓誌”(或“覆斗形墓誌”)在高麗墓誌中一件也沒有發現. 同時, 五代以後中國江南地區佔比較大的無銘墓誌在高麗的墓誌中也佔據較高的比例. 即, 如果從外形特徵和文本結構比較的結果來看, 影響到高麗的墓誌文化指向的是中國江南地區的墓誌文化. 江南墓誌影響到高麗的方式有兩個. 一種方式是移住到高麗的江南人死後留下的墓誌, 如果時期劃分的話可分為11世紀上半葉的前半期和12世紀上半葉的後半期. 前半期的高麗墓誌文化主要在江南歸化人之間展開. 後半期是高麗進入門閥社會以後, 江南人的墓誌敘述是為了適應政治活動的需要而展開; 另一方式是高麗人撰述的墓誌中. 參考並靈活運用了宋代江南人的墓誌作品, 特別是蘇軾和王安石的作品成為當時高麗人的喜愛對象. 這一方式出現在12世紀上半葉. 江南墓誌能影響到高麗的原因大致有三個. 一是地理上的優勢為兩國的人員往來提供了便利, 高麗人能夠更加便利地接觸到與江南墓誌相關的文化產品. 二是高麗文壇對古文的提倡, 為墓誌的撰寫提供了契機, 而江南古文家的作品又被高麗人所參考. 三是江南文人的政治意識, 恰好迎合了當時高麗貴族社會中政治活動的需要. 把江南文人政治思想寫入墓誌, 表達自己在高麗社會中的政治立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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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에 보이는 ‘신라(新羅)’와 거란문자 ‘sh-ul-ó-úr’ 관계 일고찰

        류병재 한국몽골학회 2020 몽골학 Vol.0 No.63

        This study carried out Yeokju(譯註, translate and annotate) on the Chinese-language cemetery name dubbed 《Shang-guo-dou-jian-taifu Epitaph(上國都監太傅墓志銘)》 that is exhibited in the Chinese National Ancient-Writing Exhibition Hall on the third floor of the National Museum at MINZU UNIVERSITY OF CHINA(中央民族大学) in Beijing. The rubbing of an inscription(拓本) for the epitaph with Khitan large script(契丹大字)(《Heun-deuk-eun-tae-bu epitaph[痕得隐太傅墓志]》), which is presumed to be likely the same tomb occupant(墓主), is also displayed simultaneously. However, the real thing in these two rubbed copies cannot be currently known its whereabouts. Based on the contents of the rubbed copies, we can confirm that these two epitaphs were set up on May 28th(五月二十八日) in the 10th year of Eungryeok(應曆十年, Year in 960) during the reign of King Mokjong(穆宗) in the Liao Dynasty as the earliest era among epitaphs with Khitan large script that have been found so far. The epitaph with Khitan large script and the epitaph with Chinese character exist at the same time. But these two epitaph contents are not perfectly corresponded. Through the work of analyzing Yeokju(譯註, translate and annotate) in 《Shang-guo-dou-jian-taifu epitaph(上國都監太傅墓志銘)》, we could check a tomb occupant’s public service experience and merit based on the epitaph with Chinese character. These details were comparatively analyzed through Liao-shi(遼史). Also, the attempt was progressed for trying to compare Khitan large script, which corresponds to “Silla” of appearing in the texts, by searching it in the epitaph with Khitan large script(《Heun-deuk-eun-tae-bu epitaph[痕得隐太傅墓志]》). According to the prior research of Aisin Gioro Ulhichun(愛新覺羅 烏拉熙春), the epitaph with Khitan large script is being considered to be formed the mainstream by primarily recording a tomb occupant(墓主)’s ancestors and family members. And the epitaph with Khitan large script is being claimed that the Khitan large script of corresponding to ‘Silla’ is ‘Sulwur.’ Nevertheless, it was verified to be unreasonable to conclude that his assertion is right when comparing the epitaph with the previous Khitan large script and the epitaph with the relevant Khitan large script. A fact was verified to still require diverse comparative researches along with the excavation of more materials in order to accurately decode Khitan large script. 본 논문은 중국 북경 중앙민족대학 민족박물관 3층 중국민족고문자전시실에 전시되어 있는 《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이라는 한문 묘지명에 대한 역주를 수행하였다. 동일한 묘주(墓主)일 것으로 추정하는 거란대자 묘지명(《痕得隐太傅墓志》)의 탁본도 동시에 전시되어 있다. 그러나 이 두 탁본의 실물은 현재 그 행방을 알 수 없다. 우리는 탁본의 내용을 토대로 이 두 비문이 현재까지 발견된 거란대자 묘지 가운데 가장 이른 시대로 요나라 목종(穆宗) 응력10년(應曆十年, 960년) 5월 28일(五月二十八日)에 세워졌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거란대자 묘지와 한문비문이 동시에 존재하지만 이 두 묘지 내용이 완벽하게 대응되지는 않는다. 우리는《상국도감태부묘지명(上國都監太傅墓志銘)》의 역주분석 작업을 통해 한문 묘지명에는 묘주의 관직 경력과 공훈을 확인할 수 있었다. 이 내용을 遼史를 통해 비교분석하였다. 또한 그 내용에 등장하는 “신라”에 대응하는 거란대자를 거란대자 묘지명《痕得隐太傅墓志》에서 찾아 비교하려는 시도를 진행해 보았다. 愛新覺羅 烏拉熙春의 선행 연구에 따르면, 거란대자 묘지명에는 주로 묘주(墓主)의 선조와 가족들의 기록이 주를 이루고 있다고 보고 있다. 그리고 거란대자 묘지명에는 ‘신라’에 대응하는 거란대자가 ‘Sulwur’라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이전의 거란대자 묘지명의 해당 거란대자와 비교해 볼 때 그의 주장이 옳다고 결론짓기는 무리임을 확인하였다. 정확한 거란대자 해독을 위해서는 여전히 더 많은 자료 발굴과 다양한 비교 연구가 필요하다는 사실을 확인하였다.

      • KCI등재

        량대(梁代) 봉칙찬묘지(奉勅撰墓誌)를 통해 본 묘지명(墓誌銘)의 정형화(定型化)-묘지(墓誌)에 등장하는 왕언문서(王言文書) 운영방식(運營方式)의 분석(分析)을 겸(兼)하여-

        양진성 중국사학회 2016 中國史硏究 Vol.105 No.-

        現存的南朝時期墓誌中, 標注爲“奉勅撰”的共有3個. 具體來說就是《梁天監元年(502)蕭融墓誌》ㆍ《梁普通元年(520)蕭敷墓誌》和《梁普通元年(520)蕭敷妻王氏墓誌》等. 通過墓誌中標注的“奉勅撰”這個詞語可了解到這些文章也就是墓誌銘是受皇帝之命而制作的. 但“奉勅撰”中的“勅”字幷非代表皇帝命令的常用的說法. 也就是說, “勅”幷非“詔勅”的簡略語. 這裏的“勅”是與“詔”所不同系統和用途的?一種王言文書. 在南朝時期, 皇帝的文書行政方面作爲體現自身的意志的手段使用了詔與勅這兩個系統的王言文書. 詔就是詔書, ?是在中書書寫原案後經門下的審核後再傳達到尙書來執行, 而其使用在全國性公告以及需要執行的“大事”方面. 而與此相反, 勅是用於面向臣僚的皇帝個人私下的囑托或意見的交換, 器物的賜與以及詩文的撰述等這些“小事”中. 此外, 其傳送過程也是不經過門下的審核或尙書的執行, 而是由中書書寫後直接被執行. 因墓誌銘的制作也屬於詩文的撰述範疇, 皇帝通過勅來命令制作墓誌銘應符合當時勅的用途. 同時, 本稿中探討的3篇墓誌銘中詔與勅是嚴格區分開來的. 因而從以上事實來看, 墓誌銘中標注的“奉勅撰”的“勅”幷非對皇帝命令的總稱, 而指的是當時行政中使用的被稱爲飭的王言文書. 也就是說“奉勅撰”指的就是皇帝通過被稱爲“勅”的王言來發出制作墓誌銘的命令. 但皇帝發出飭來命令制作墓誌銘這件事從當時墓誌銘的制作慣例方面來看是相當破格的事情. 因爲, 一般此前的墓誌銘是由與亡者有著直接或間接關系的人們自發性制作的. 更何況本稿中列擧的蕭敷夫婦的墓誌銘雖均通過飭來制作, 但蕭融夫婦中只有丈夫蕭融獨自通過勅來制作墓誌銘, 而起妻子的《王纂韶墓誌銘》却幷非如此. 蕭敷與蕭融均在死後得到王的追封, 同時蕭敷的妻王氏與蕭融的妻王氏均在生前被冊封爲太妃, 從而?們二人的地位相同. 盡管如此, 從只有蕭敷夫妻與蕭融的墓誌銘通過勅制作來看, 可知勅撰的墓誌銘幷非因規定的制度而制作, 而是根據皇帝的本意來制作的. 換而言之, 勅撰的墓誌銘是需要皇帝特別的關心和關照才可以的. 從而可知, 墓主的家人正是爲了强調這一點而在墓誌銘中添加“奉勅撰”這個詞語. 而這一處理方式自然而然地使墓誌銘形式與此前的方式有所不同. 在“奉勅撰”這個詞語前列擧了撰者的官職和姓名. 這是在此前的墓誌銘中未得到確認的敍述方式. 記錄制作墓誌銘的人的官職和姓名, 幷標注其制作是經皇帝的飭所爲是在梁代首次得以確認的. 因此, 梁的奉勅撰墓誌從起制作經過與形式來看, ?在當時是屬於想到特殊的情況. 盡管如此, 也需要關注這一類型的墓誌銘幷未隨著梁的消失一同消失. 在墓誌銘的冒頭標注文章撰寫者的方式在此後陳的墓誌銘中也得到確認. 而唐的奉勅撰墓誌的形式與用途方面也與梁的奉勅撰墓誌類似. 墓誌銘的主人公主要局限於皇室的成員, “`奉勅撰”這個詞語的標注方式(標注撰寫者的官職及姓名以後, 按奉勅撰的順序列擧)等方面梁與唐是一致的. 因而, 可推斷出梁的奉勅撰墓誌是延續到唐朝, 給唐的奉勅撰墓誌的形成帶來了一定的影響. 從這一點來看, 可認爲梁的奉勅撰墓誌對中國墓誌銘的定型化起到了重要的作用. 與此相反, 至今未發現北朝的奉勅撰墓誌. 而且也未發現在北朝時期有皇帝命令朝臣制作墓誌銘的事例, 幷且在現存的宗室諸王的墓誌中幷無與奉勅撰墓誌形式類似的墓誌. 從而, 根據至今可確認的文物和記錄可知在梁首次出現的奉勅撰墓誌是越過北朝在唐再現的. 因此, 探究南朝奉勅撰墓誌是否對北朝有直接影響以及從北朝到唐的具體繼承關系將是今後的課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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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3세기 초 고려의 국제 환경 변화와 생애 기록 : 고려 墓誌를 중심으로

        이미지(LEE Miji) 고려사학회 2014 한국사학보 Vol.- No.55

        본고에서는 13세기 초에 고려의 변경을 넘어 온 거란 유종과 몽고, 두 집단과 고려간에 있었던 ‘거란 유종의 난’ 과 ‘형제 맹약’이 개인적 차원의 기록인 墓誌에서 어떻게 기억되었는지를 살펴보았다. 현재의 시각에서 볼 때 두 사건 모두 고려 사회에 매우 큰 영향을 주었으리라 생각되지만 본고에서 검토한 총 49편의 묘지 중 거란 유종의 난을 언급한 묘지는 10편에 불과했고, 형제의 맹을 언급한 묘지는 3편에 지나지 않았다. 21세기를 살면서 13세기 고려의 외교 관계를 바라보는 입장과 당시인의 시각이 얼마나 다른지 선명하게 보여주는 수치라고 생각된다. 또한, 현전하는 자료의 수가 워낙 적어 섣불리 일반화하기는 어렵지만 『고려사절요』혹은 『고려사』김취려전 등에 의해 현재의 우리는 거란 유종의 난의 마무리 단계로써 형제의 맹을 이해하는데 비해, 두 사건을 모두 언급한 묘지는 3편뿐이라는 사실로 짐작건대 당시 고려인들은 일반적으로 이 두 사건을 연관 짓지 않았다고 추측된다. 두 사건을 직접・간접적으로 겪었던 인물들의 묘지 속에서 각각의 사건 및 두 외부집단은 매우 다양하게 변주되어 기억되었다. 묘주를 위인화・영웅화하기 위해 같은 사건이라도 부분적 측면이 선택적으로 과장되기도 했고, 익히 알려져 있는 바와는 다른 인물이 해당 사건의 공로자로 부각되거나(최충헌,한광연), 숨은 공로가 밝혀지기도 했다(조충,최이). 또한 고인의 업적을 강조하기 위해 거란 유종이나 몽고와 같은 객체들이 폄하되거나 부정적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많았지만, 반대로 거란 유종을 遼兵・遼師(한광연 묘지)혹은 金人(김중구 묘지)등으로 지칭하는 경우도 있었다. 형제의 맹에 참여한 몽고 장수는 묘주의 영웅성을 알아보는 식견 있는 상대로 기억되기도 했고(김취려 묘지)몽고국은 외교 상대국으로서 언급되기도 했다(조충 묘지). 이처럼 기억의 편집 혹은 변용이 일어난 원인은 묘지 기록이 고인의 생애를 추모한다는 매우 강한 목적을 가진 글이기 때문일 것이다. 거의 같은 시기에 동일 작자에 의해 작성된 백분화 묘지와 이적 묘지에 나타난 거란 유종에 대한 적대감의 차이는 이러한 점을 잘 보여주었다. 아울러 왕조 차원에서는 중요한 외교 사건이라 하더라도 묘주 개인의 생애 속에서는 상대화되어 매우 소략하게 언급되는 경우가 상대적으로 많았다. 조충과 김취려는 모두 거란 유종의 난을 진압하고 몽고와 형제의 맹을 맺는데 가장 주도적인 역할을 한 인물로 평가받고 있다. 그러나 거란 유종의 난 진압 직후 사망한 조충의 묘지에서는 이 사건이 고인의 최대 공로로써 대대적으로 다루어진 반면, 그보다 14년을 더 산 김취려의 삶을 조망하는 글 속에서는 거란 유종의 난이나 형제의 맹 모두 묘주의 많은 업적 중 하나로써 다루어졌다. 묘지에 사용된 기년호를 통해 13세기 초 외교 환경의 변화가 고려인의 일상과 관련된 기년 방식에는 어떠한 영향을 주었는지에 대해서도 검토해 보았다. 1213년 이후에는 연호 사용이 줄고 고려 왕력, 고갑자, 고인의 연령 등이 활용되었다. 금의 改元여부와 상관없이 금의 貞祐연호가 1227년까지 사용되었음을 보았는데, 이는 국제 정세변동기에 고려인들이 익숙했던 기존의 외교 질서에 따라 공식적으로 전달된 가장 최근의 연호를 계속 사용한 것이라 정리해 보았다. In the beginning of the 13th century the Goryeo people encountered two unfamiliar groups; one group was the Khitan rebels who rose in revolt against the dominant Jin dynasty and another was the new rising power, the Mongols. Since the remaining official history accounts of the period record that the Mongols came into the Goryeo territory during their military operations on the Khitan rebels who had rejected to surrender to the Mongols, the observers of the 21st century sees these incidents in sequence. However, did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understand as we do? This paper has been developed during the process to understand how the contemporary Goryeo people perceived the diplomatic events that are assigned as so by the modern his torians. The Goryeo people composed a sort of biography when their loved one dies to remember and commemorate their lives. The biography was inscribed on a stone and they buried it. As the Goryeo epitaphs were enclosed inside the tomb it carries highly assessed contemporary information on the exact time at which the epitaphs were buried. Also the epitaphs were written within the ‘private" context rather than the dynastic or national level. Thus, I believe the Goryeo epitaphs of the 13th century would be the most proper primary sources to peruse the contemporary individuals" viewpoints on the world they belonged to. According to the epitaphs of this period it seems that the two incidents were seen as two independent events, which coincidently happened almost at the same time. We who live in the 21st century call the Khitans as ‘Khitan Rebels"(契丹遺種) as it is written in the Official History of Goryeo (『고려사』). But the contemporary Goryeo documented them, in the epitaphs, also as ‘the Liao soldiers"(遼兵・ 遼師) and even ‘the Jin citizens"(金人). The Mongols were usually described as ‘beasts"(禽獸) but also appeared as heroic figures. And the instances of year naming were only partly coherent to the ‘official" way of the dynasty. This paper construes that this discordance are the evidence of the diverse individual perceptions of the 13th century Gorye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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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구려 유민 高慈 墓誌에 대한 몇 가지 문제

        권덕영(Kwon, Deok-Young) 한국고대사학회 2021 韓國古代史硏究 Vol.- No.102

        高慈墓誌는 1917년 洛陽 邙山에서 출토되었다. 그후 언제인가 羅振玉이 그것을 求得하여 그가 죽은 1940년까지 요령성 旅順의 大雲書庫에 보관하고 있었다. 그러나 1945년 8월 일본의 패망으로 소련군이 여순에 진주하여 대운서고를 징발함으로써 고자묘지를 비롯한 그곳의 유물과 전적들이 뿔뿔이 흩어지고 망실되었다. 그후 중국 인민정부는 일부 온전하게 남은 자료와 앞서 반출된 유물을 회수하여 요령성도서관, 요령성박물관, 대련도서관, 여순박물관 등에 넘겼다. 따라서 고자묘지는 이들 기관에 소장되어 있을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다. 고자묘지에는 지문의 지은이와 글쓴이가 누구인지 밝히지 않았다. 고자는 아버지인 高質과 함께 만세통천 2년(697)에 磨米城에서 전사하여 성력 3년 같은 달 같은 날에 洛州 合宮縣 平樂鄕에 나란히 묻혔다. 그런데 고자묘지의 글씨는 고질묘지의 글씨와 매우 흡사하다. 특히 글쓴이의 글자 사용성향을 잘 보여주는 異體字를 비교해보면, 두 묘지는 최소 98.2% 최대 100%가 겹칠 뿐더러 글씨체도 완전히 일치한다. 따라서 두 묘지는 동일인이 쓴 것으로 판단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고자묘지는 고질묘지를 쓴 劉從一이 썼다고 하겠다. 고자는 성력 3년 臘月 17일 洛州 合宮縣 平樂鄕에 묻혔다. 따라서 고자묘지는 이즈음 제작되었을 터인데, 종전에는 모두 “성력 3년 臘月 17일”을 서기 700년 12월 17일로 이해하였다. 성력은 697년 11월 1일부터 700년 5월 4일까지 사용된 측천무후 치세의 연호이다. 측천무후는 載初 원년(690)부터 역법을 周曆으로 바꾸어, 11월을 正月로 하고 12월을 臘月, 종전의 정월을 1월이라 하였다. 성력은 바로 주력을 사용하던 시기였으므로 성력 3년 臘月은 699년 12월에 해당한다. 따라서 고자묘지는 서기 699년 12월경에 만들어졌다고 하겠다. The Epitaph of Goja(高慈墓誌) was excavated from Luoyang(洛陽) Mangshan Mountain in 1917. After that, Luozhenyu(羅振玉) collected and kept it his study in Lushun(旅順) Liaoning Province(遼寧 省) until his death in 1940. However, after the defeat of Japan in August 1945, the Soviet army captured Lushun and requisitioned his study, leaving the Epitaph of Goja and other relics and records scattered and lost. Afterwards, the Chinese People’s Government collected some intact materials and previously taken out artifacts and handed them over to Liaoning Province library, Liaoning Province museum, Lushun museum, and Daren library. Therefore, the possibility cannot be ruled out that the Epitaph of Goja is housed in these institutions. It did not reveal who the author and writer of the Epitaph of Goja were. Goja and his father Gojil(高質) were killed in the battle of Mamisung(磨米城) in 697 and buried in the same place on the same day. However, the handwriting of Epitaph of Goja is very similar to that of Epitaph of Gojil. In particular, when comparing the different styles that show the writer’s tendency to use letters, the two epitaphs not only overlap at least 98.2% but also completely match the handwriting. Then Liucongyi(劉從一), who wrote the Epitaph of Gojil, wrote the Epitaph of Goja. Goja was buried in Luoyang Mangshan Mountain in December the third year of Sungreok(성력), so his epitaph must have been built around this time. However, it was previously understood that December the third year of Sungreok were December 700 AD. However, December the third year of Sungreok was December 699 A.D. Therefore, it can be said that the Epitaph of Goja was made around December 699 A.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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