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Hosaka, Toshiko 한국일어일문학회 1996 日語日文學硏究 Vol.28 No.1
Since 1970's, to develop communicative competence, communicative approaches to language teaching have inovated methodology, materials, syllabus design, evaluation system and so on. Classroom activeties, such as role-playing, simulation. project work, are improved under this movement and applyed to teaching Japanese as a second language. Are there any effective way to design these activeties to acheive communicative competence? This paper proposes a framework of designing communication games, one of these activeties in language learning. Based on instructional design, I described how to design one exemple and tried to extract generalized components of flowchart
Hosaka, Yuji 한국일어일문학회 1999 日語日文學硏究 Vol.35 No.1
일제시대 한국에서의 동화정책은 특히 1930년대에 들어와서 「일선동조론(日鮮同祖論)」을 철저화시키는 가운데 진행되었다. 1937년에 조선총독에 취임한 미나미지로오(南次郎)는「내선일체」라는 슬로건을 내걸고, 한국에서의 총동원 체제를 만들어 나갔다. 그리하여 조선총독부는「內鮮史實의 再認識」을 실천정책 목표들 중 하나로 삼았다. 이러한 정책의 일환으로 한국에서의 국사 교과서가 수차례 개정되어,「일선동조론」 애 대한 기술이 점차 강화되어 갔다. 즉 일본의 국조신인 아마테라스 오오미카미(天照大神)의 동생 수사노오(소전명존)가 신라에 강림하여 한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내용이 국사교과서에 등장하게 되었다. 그 뿐만 아니라 수사노오와 檀君이 異名 同一神이라는 연구도 활발히 나와,「일선동조론」에 일조하고 있었다. 일제는「일선동조론」 에 반대하는 입장에서서 학설을 주장했던 츠다(津田左右吉)에게 유죄를 선고하는 등 언론탄압을 강화해 갔다. 「일선동조론」 은 조선총독이 공개적으로 말할 정도로 한국통치이념으로 작용되고 있었다. 그 당시 친일파들은 이러한 역사적 동화이념을 받아들이는 논리를 펴고 있었다. 그 논리는 다음과 같다. 한일은 고대에서 같은 신을 모신 같은 민족이었는데 한국이 중국의 영향을 받아 중국화되어 본연의 모습을 잃어 버렸다. 그래서 한일병합은 본연의 모습으로 회귀하는 것이고 일본과 하나가 되는 길만이 한국의 회생의 길이다. 3.1독립운동선언문을 쓴 최남선도 친일행각을 했으나, 「일선동조론」 의 핵심인 수사노오(소전명존) 한국시조설에는 반대하고 있었다. 그는 한국어 말살정책이 진행되던 일제말인 1943년에 한국어로 쓴 역사책을 펴내, 수사노오가 한국의 시조가 되었다는 「일선동조론」을 조용히 부정했다. 신화를 동원한 일제의 동화정책은 최남선과 같은 학자의 반대에 부딪치기도 하면서 여러가지 모순이 내재된 상태였다고 하겠다.
길전송음(吉田松陰) 사상의 근대적 전개 서설 -청일전쟁 직전까지의 일본군 정비과정과 첩보활동 고찰-
보판우이 ( Hosaka Yuji ) 한일군사문화학회 2007 한일군사문화연구 Vol.5 No.-
明治時代の日本軍創設に寄與した指導級の人物たちは吉田松陰の弟子である長州藩出身の場合が多かった。そのため明治の日本軍創設に吉田松陰の思想が影響を及ぼしたと言わざるを得ない。吉田松陰の草莽굴起論は高杉新作の奇兵隊創設、藩を超越した尊王壤夷派の全國的な組織化、明治日本軍の徵兵制實施などに影響を與え、彼の兵學思想、特に「敵を知り己を知れば百戰危うからず」という孫子の兵法の鐵則を實踐した姿勢は、日本軍の諜報活動活發化に大きな影響を及ぼした。明治の日本軍は日淸戰爭の勃發する前に、淸に多くのスパイを送った。彼らは淸と韓半島の正確な地圖を作成するところに目的を置いた。その結果、韓半島と淸の實測地圖が作成された。そしてスパイとして淸に派遣された軍人たちは、廣開土大王碑の碑文拓本を日本に持ち歸った。それは古代の日本が韓半島南部を支配·經營したという證據として利用された。明治の日本軍は多くの歷史書や地理書を出版して東アジアを支配するために必要な準備を進行させていた。吉田松陰の對朝鮮認識は山縣有朋をはじめとした當時の日本の指導者たちに、朝鮮を掌握せねばならないという觀念を植え付けた。吉田松陰の思想を受け繼いだ長州藩出身の明治新政府の官吏たちは、彼の思想と西歐的軍制とを組み合わせて近代日本軍の基礎を作り上げた。