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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승하 한국문학과종교학회 2017 문학과종교 Vol.22 No.4
Since Siddhartha, numerous Buddhist monks have written Ohdosong. Ohdosong is the Buddhists’ poems which embodies their strange fate and spiritual enlightenment. This study examines what the contents of enlightenment are and what the poems convey through Odosong. The meaning of Siddhartha’s Odosong is about an initiative of Buddhism. He decided to propagate doctrines which he had realized through Buddhism. His poems indicate that how he has changed after his awakening. Odosong of Haenueng, Choju, and Dongsan from China shows the characteristics of Buddhism. Once Buddhism limited to the concept of only the Buddhist saint, which has extend to everyone who recognizes the possibility of being a Buddha. The Odosong of Wonhoe, Haekuen, Huechung indicates that they are humble about their enlightenment. There is no intention to spread their religion widely in public. The Odosong of Haknuel, Kyungbong, Sungcheol indicates that whether it is accidental or inevitable, the realization of enlightenment is not easy. Reaching nirvana by the asceticism is not for oneself, but it can be completed when the enlightenment is also ready for the public. 불교 창시자 싯다르타 이래 수많은 승려가 오도송을 남겼다. 오도송이란 깨달음을 이루게 된 기연(機緣)과 깨달음의 내용을 선시로 쓴 것이다. 본고에서는 깨달음의 내용이 무엇인지, 즉 오도송을 통해 무엇을 전하고 싶었는지를 살펴보았다. 싯다르타의 오도송은 불교의 창시를 선포한다는 뜻이다. 깨달음으로써 내가 이전과 어떻게 달라졌고, 앞으로 이전과 어떻게 달리 살아가겠다는 결심을 천명하고 있다. 중국 혜능ㆍ조주ㆍ동산의 오도송은 중국 불교(대승불교)의 특징을 그대로 보여준다. 인도에서 중국으로 넘어온 불교는 붓다에게만 한정하던 보살의 개념을 넓혀 모든 중생이 부처가 될 수 있다는 가능성을 인정함으로써 중생을 보살로 보았다. 원효ㆍ혜근ㆍ휴정의 오도송을 보면 진리를 깨달았다고 자랑하거나 내 깨달음의 내용이 대단한 것이라고 득의양양해하지 않았음을 알 수 있다. 또한 널리 알리겠다는 포교의식이 없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학눌ㆍ경봉ㆍ성철의 오도송을 보면 우연이건 필연이건 깨달음의 과정이 쉽지 않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수행과 깨달음을 통해 스스로 만족하는 해탈이 아니라 그 깨달음을 대중을 위해 쓰겠다는 각오도 느낄 수 있었다.
이승하 배달말학회 2005 배달말 Vol.36 No.-
'Jesus Christ' in the modern Korean poetry 기독교의 한국 전래 이후, 수에 있어서는 적지 않은 기독교 시인이 있었다. 그러나 문학사적으로 거론이 가능한 시인 가운데 '예수'를 자신의 시 속에 등장시킨 시인을 찾아본 결과 윤동주·박두진·김현승·김춘수 시인이 있었기에 이들의 시에 나타난 예수관을 살펴보았다. 윤동주는 예수가 십자가형이라는 끔찍한 고통을 겪었기에 인류의 구세주로 나설 수 있었다고 보았다. 윤동주에게 있어서 예수는 수난자인 동시에 구세주였다. 또한 사람의 아들이면서 신의 아들이었다. 식민지 시대 지식인의 고통이 그대로 투영된 작품이 바로 「십자가」였다. 박두진은 사람의 아들, 즉 지극히 인간적인 예수의 정신적 고뇌와 육신의 고통에 초점을 맞추었다. 그러다 말년에 이르러서는 예수의 신성에만 초점을 맞추게 되는데, 이때의 시는 찬송가와 별반 다를 바가 없어 시적 완성도가 현저히 떨어진다. 김현승에게는 예수라는 존재가 별다른 의미를 지니지 못하다가 말년에 이르러서야 시의 전면에 몇 차례 나타나는데, 무조건적인 찬양과 경배의 대상이라 깊은 감동을 이끌어내지는 못한다. 김춘수는 예수를 기적을 행하는 불가사의한 이로 간주하여 신앙심으로 접하지 못하고서 연구 대상으로 삼았다. 그러다 나중에 가서는 자신의 고통에 아랑곳하지 않고 타인의 고통을 애통해하는 자로 보았다. 김춘수는 기독교인이 아니었음에도 오랜 기간 예수를 탐구한 점에서 우리 시단에서 이색적인 작업을 한 시인으로 간주할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