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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호공간에서 이동객체 스트림 데이터의 연속 시공간 셀프조인 질의
황병주,이기준,Hwang, Byung-Ju,Li, Ki-Joune 한국공간정보학회 2010 한국공간정보학회지 Vol.18 No.1
시공간 조인은 이동객체와 같이 시공간의 특성을 가지는 데이터를 처리할 때 요구되는 중요한 연산자로, 이동객체들의 움직임을 분석하거나 이동객체들의 시공간적 패턴을 찾는 것과 같이 다양하게 활용된다. 현재까지 실외공간에서의 시공간 조인 질의에 관한 연구는 많이 진행되어왔다. 최근에는 실내측위기술이 발전함에 따라 실외뿐만 아니라 실내에서도 다양한 위치기반 서비스가 점진적으로 제공되고 있으며, 특히 이동객체를 중심으로 다양한 응용 서비스들을 필요로 하게 된다. 하지만 실내공간에서의 시공간 조인에 관한 연구는 아직 전무하다. 본 논문에서는 실내공간에서 실시간으로 갱신되는 이동객체에 대한 연속 시공간 셀프조인 질의와 질의처리 방법론을 제안하였다. 연속 시공간 셀프조인 질의는 주어지는 특정 시간과 공간의 조건을 만족하는 모든 쌍들을 시간이 지남에 따라 지속적으로 갱신하는 질의이다. 본 논문에서는 방이나 복도와 같이 특정한 기호를 중심으로 이동객체의 위치를 표현하며 이러한 특징을 가지는 공간을 기호공간이라 한다. 그리고 방대한 스트림데이터를 효과적으로 필터링하고 관리하기 위한 후보쌍 버퍼 테이블이라는 자료구조와 이를 활용한 질의처리 방법론을 제안하였으며 실험을 통해 타당성을 검증하였다. Spatio-temporal join operators are essential to the management of spatio-temporal data such as moving objects. For example, the join operators are parts of processing to analyze movement of objects and search similar patterns of moving objects. Various studies on spatio-temporal join queries in outdoor space have been done. Recently with advance of indoor positioning techniques, location based services are required in indoor space as well as outdoor space. Nevertheless there is no one about processing of spatio-temporal join query in indoor space. In this paper, we introduce continuous spatio-temporal self-join queries in indoor space and propose a method of processing of the join queries over stream data of moving objects. The continuous spatio-temporal self-join query is to update the joined result set satisfying spatio-temporal predicates continuously. We assume that positions of moving objects are represented by symbols such as a room or corridor. This paper proposes a data structure, called Candidate Pairs Buffer, to filter and maintain massive stream data efficiently and we also investigate performance of proposed method in experimental study.
황병주,이준우,김동은,김장욱,Hwang, Byungju,Lee, Junwoo,Kim, Dongeun,Kim, Jangwook 한국재난정보학회 2021 한국재난정보학회 논문집 Vol.17 No.1
연구목적: 지속적으로 발생하는 태풍의 피해를 감소시키기 위해 태풍대응의 예방·대비 단계에서 적극적으로 활용할 수 있도록 표준화된 격자의 활용방안을 제안하였다. 태풍위험지역에 대한 격자 융합정보를 시범적으로 생성함으로써 태풍대응을 위한 격자의 실효성을 확인한다. 연구방법: 태풍 상황대응 시 유용하게 사용될 수 있는 태풍 위험지역에 대한 융합정보를 생성하기 위해 vector, raster 등 다양한 형태의 원천데이터를 사용하여 세밀한 공간 단위로 태풍 위험지역 격자 정보를 구축하였다. 기구축된 정보들과의 호환성 및 각 지자체별로 생성되는 격자 정보의 호환성을 위해 표준화된 격자모델을 적용하였다. 연구결과: 국가지점번호의 격자체계를 적용하여 태풍상황대응시 유용하게 활용될 수 있는 태풍위험지역 격자를 구축하였다. 국가지점번호 격자체계는 다차원 계층구조의 격자크기를 정의하고 있으며, 100m와 1,000m 크기의 격자를 활용하여 서울지역 태풍위험지역 격자를 구축하였다. 결론: 다양하고 조밀한 공간정보를 하나의 격자정보로 융합하여 가시화함으로써 재난 의사결정을 위한 정보의 단순화를 통해 신속한 재난대응을 지원할 수 있다. Purpose: To reduce the damage caused by continuously occurring typhoons, we proposed a standardized grid so that it could be actively utilized in the prevention and preparation stage of typhoon response. We established grid-based convergence information on the typhoon risk area so that we showed the effectiveness of information used in disaster response. Method: To generate convergent information on typhoon hazard areas that can be useful in responding to typhoon situation, we used various types of data such as vector and raster to establish typhoon hazard area small grid-based information. A standardized grid model was applied for compatibility with already produced information and for compatibility of grid information generated by each local government. Result: By applying the grid system of National branch license plates, a grid of typhoon risk areas in Seoul was constructed that can be usefully used when responding to typhoon situations. The grid system of National branch license plates defines the grid size of a multi-dimensional hierarchical structure. And a grid of typhoon risk areas in Seoul was constructed using grids of 100m and 1,000m. Conclusion: Using real-time 5km resolution grid based weather information provided by Korea Meteorological Administration, in the future, it is possible to derive near-future typhoon hazard areas according to typhoon travel route prediction. In addition, the national branch number grid system can be expanded to global grid systems for global response to various disasters.
황병주,황정래,김병선,Hwang, Byungju,Hwang, Jungrae,Kim, Byeongsun 한국국토정보공사 공간정보연구원 2016 지적과 국토정보 Vol.46 No.2
최근 들어 공간정보를 비롯하여 다양한 정보와 관련된 정책 동향은 개방과 공유로 변화하고 있다. 이러한 정책 동향에 맞춰서 개별 시스템에서 관리하는 공간정보를 체계적으로 공유하기 위해서는 공간정보표준을 반드시 준수해야 한다. 공간정보표준을 준수할 경우, 정보에 대한 접근성과 가독성, 정보처리 및 시스템 간의 상호운용성을 향상시킬 수 있다. 하지만 이러한 표준의 이점에도 불구하고, 공간정보표준에 대한 체계적인 관리가 이루어지지 않아 공간정보사업자들은 표준 적용에 많은 어려움을 겪고 있다. 따라서 본 연구에서는 국내외 표준 제정 현황을 조사하고, 국내 공간정보표준이 갖는 표준의 중복성, 버전 간 불일치, 유사 표준 제정 등의 문제점을 다각적으로 분석하여 이러한 문제점을 개선하기 위한 정책 방안을 제시하였다. 본 연구의 결과는 향후 국가공간정보체계에서 공간정보표준의 관리 운영, 조직 구성, 법제도 개선 등을 위한 기초 연구 자료로 활용될 수 있을 것으로 판단된다. Recently, policy trends related to various information including the geospatial information have changed to openness and sharing. Therefore, it is necessary to apply geospatial standards to ensure a high level interoperability across heterogeneous geospatial information systems. These geospatial standards are essential to advancing data access, query, management, processing and interoperability of geospatial information systems. However, geospatial information companies which provide GIS software and service or construct geospatial data have been many difficulties to implement and adopt geospatial standards, because the geospatial standards of Korea were not systematically managed. So this study analyzed the various problems such as redundancy, version-mismatch and similarity of domestic geospatial standards through reviewing the present status of domestic geospatial standards as well as the international geospatial standards. Moreover, it is judged that the result of this study will be able to efficiently contribute to the domestic policy on geospatial standards for management, organization and laws in the National Spatial Data Infrastructure.
황병주 ( Byoungjoo Hwang ) 한림과학원 2021 개념과 소통 Vol.- No.27
1920년대는 한국 자본주의 성립사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시기다. 1912년 조선 민사령 공포, 1918년 토지조사사업 완료 등을 거치면서 토지를 비롯한 주요 자산의 사적 소유권이 법적, 제도적으로 확립되었다. 사적 소유권과 사유재산은 오랜 관습이자 새로운 현실이기도 했다. 왕토사상에도 불구하고 이미 조선 중반부터 경작지와 대지 등에 대한 사적 소유권이 널리 확산되기 시작했다. 이것이 식민지 시기 제도적 변화와 맞물리면서 1920년대 초반은 소유 개념, 사유재산 등이 중요한 화두로 떠올랐다. 이를 주도한 것은 새롭게 유입되기 시작한 사회주의, 공산주의, 아나키즘 등의 좌파 이념들이었다. 이들 좌파 담론들은 자본주의 질서에 대한 가장 강력한 비판담론이었기에 사적 소유권에 대한 비판을 주도했다. 특히 1920년 노동공제회를 비롯한 노동 관련 단체들이 대거 출현했고 노동 개념은 소유 개념과 치열한 신성경쟁을 벌이기도 했다. 소유 대신 노동 개념이 세계를 창조하고 사회를 움직이는 기본적 동력이라는 주장은 부르주아 계몽 담론과 좌파 담론 모두에게 중요한 가치로 여겨졌다. 이러한 맥락에서 20년대 초반 유산과 무산의 대립구도가 등장했다. 이 역시 좌파담론이 주도했던 구도였고 사유재산을 둘러싼 대립을 배경으로 했다. 소유권을 중심으로 한 이 구도는 생산수단의 사회적 소유를 지향하는 共産의 상상력으로 집중되기 시작했다. 프루동이나 헨리 조지에 일본 귀족원까지 등장해 토지의 사적 소유문제에 대한 다양한 대안들이 족출하였다. 分産과 公産, 아나키즘과 사회주의는 물론 자유주의적 전망 하의 다양한 소유제도에 대한 전망들도 제시되었다. 그러나 혁명 이후 노농 러시아의 거대한 변화를 배경으로 共産의 헤게모니가 점점 더 강화되는 추세였다. 물산장려운동은 공산에 맞선 물산을 제시하는 도발적 전략이다. 이것이 마르크스에 의해 ‘인민의 아편’으로 지목된 기독교 세력으로부터 출발했다는 것은 우연이 아닐지도 모른다. 서북 기독교 및 유산집단으로부터 출발한 물산장려운동은 3년 여 시차를 두고 경성으로 확산되어 중앙의 유산계급으로 이어진다. 나아가 사회주의 세력 일부까지 규합하여 생산력주의 연합전선을 구축했다. 더 많은 물질적 재화, 더 높은 생산력에 대한 욕망의 정치가 좌우를 넘나들며 작동하기 시작한 순간이었다. The 1920s are a foundational period in the establishment of Korean capitalism. After the promulgation of the Joseon Civil Code in 1912 and the completion of the land survey project in 1918, private ownership of land and other major assets was established both legally and in practice. Private ownership and private property existed by traditional custom, and also as a new reality. Despite the prevailing Wangto (王土) ideology, private ownership of land, including arable land, began to spread widely in the middle of the Joseon Dynasty. When this was impacted by institutional changes during the colonial period, the concepts of ownership and private property emerged as important issues in the early 1920s. Criticism of private ownership arose from left-wing ideologies such as socialism, communism, and anarchism, which saw private property as the central critical discourse of capitalism. Many labor-related organizations emerged in the 1920s, including the Labor Credit Union, which were deeply hostile to the principle of private ownership. These organizations argued that it is not ownership but labor which drives economic development and social progress. A confrontation thus arose between bourgeois enlightenment discourses and proletariat discourses in the early 20s, and the primary field of conflict concerned private property. Left-wingers sought to establish social ownership of the means of production, arguing for a variety of alternative structures to the private ownership of land, including proposals inspired by Proudhon, Henry George, and the Japanese aristocracy. Following the Russian revolution, however, communist ideology became the dominant model. In response, Christian and bourgeois groups in the northwest started the ‘product encouragement’ movement, extolling the benefits of more material goods and higher productivity. This was a provocative strategy to counter Marx’s characterization of religion as “the opium of the people”. Within a few years the movement had spread to Seoul, and the most influential bourgeoisie, but it also helped to unite the socialists into a more effective coalition.
황병주 ( Hwang Byoung Joo ) 역사문제연구소 2017 역사문제연구 Vol.21 No.1
The aim of this study is focused on the transformation of poverty discourse of Korea in 1950s∼1960s. The introduction of the theory of modernization in Korea was not regularized untill 1960s. The theory of modernization overemphasized the impoverished reality of Korea for developement of it. In this context the poverty is a reality as well as a representation by discourse. In short the theory of modernization formed the poverty discourse which represent Korea as a poor and backward country. There were two politics of poverty in 1950s and 1960s. One is under the leadership of America globally and the other is national. The latter is a variation of the former. Especially the latter is differenciated two dimensions, inward and outward. The former is mingled with nationalistic discourse strongly the latter is a process of liberalization of Korea. There was demonization of poverty ethically in the process of diffusion of liberalism. The indigent was not only described as dangerous people who might be implicated with violence, crime and social evils but also represented as idle people who was in immoral. They were, therefore, the miserable who could not have self-regard for their poverty in itself. Poverty was a sensitive and dangerous thing. Elite intellectuals criticized the contradiction of gap and conflict between the rich and the poor. They also argued that the possession of means of production determined problem of poverty, and blamed government policies for their incompetence to solve it. But it was general trend to overcome poverty with development in 1960s.
황병주(Hwang Byeongju) 동북아역사재단 2018 東北亞歷史論叢 Vol.- No.59
이 논문의 목적은 해방 공간 한국민주당의 토지개혁 담론을 분석하는 것이다. 이 시기는 미소 간의 냉전체제가 형성되던 시기이기도 했다. 진영 간의 대립 속에서 동북아시아 지역의 공통적인 개혁 의제로 떠오른 것 중에 대표적인 것이 곧 토지개혁이었다. 토지개혁은 중국, 일본과 함께 남북한에서도 초미의 관심사로 대두되었다. 특히 중국과 한국은 농업이 사회의 근간을 이루던 상황이었기에 토지개혁은 향후 전개될 사회개혁의 방향은 물론 체제 성격을 규정짓는 핵심적인 문제였다. 북한의 토지개혁과 대비되는 남한의 농지개혁은 자유주의-자본주의 계열의 이념적·정치적 지향이 투영된 핵심 과제였기에 보수적인 지주 정당으로 여겨진 한민당의 역할을 검토해볼 필요가 있다. 한민당은 1945년 8월 해방 이후 애초 토지제도의 합리적 재편성 등의 주장을 펼치면서 분명한 토지개혁 입장을 정립하지 못했다. 이후 한민당을 주도하고 있던 송진우는 1945년 말 ‘토지국유화’를 주장하는 등 파격적인 토지정책을 주장했다. 그러나 한민당은 1946년 들어서면서 입장을 변경해 사유재산제에 입각한 유상몰수, 유상분배 정책을 추진하기 시작했다. 이후 1950년 농지개혁이 시행될 때까지 한민당의 정책기조는 변하지 않았다. 한민당의 입장 변화는 미군정이 주도한 자유주의적 개혁 정책과 연동되는 것이었다. 즉 미군정은 광범위한 지지기반 창출을 위하여 좌우합작과 함께 적산토지 불하를 준비했고 그 기본 골자는 사유재산제에 입각하여 자유 농민들을 대거 창출하는 것이었다. 요컨대 한민당으로 대표되는 한국의 보수 우익진영은 냉전체제 형성 과정 속에서 미국이 주도하고 있던 자유주의 프로그램을 내면화하는 정책 지향을 실천했다고 판단된다. The aim of this article is to verify the land reform discourse of the Korean Democratic Party (KDP) soon after World War II. Emerging in the Cold War system, land reform was one of the most important issues in East Asian countries such as China, Japan, and Korea. In particular, the issue of land reform in China and in Korea was critical because both countries essentially were agrarian societies. This was the key point for determining the orientation of social reform and the identity of the reforms. Land reform in South Korea was based on liberalism-capitalism, and differed from the land reform in North Korea, which was based on socialism. The KDP was a classic liberal party in South Korea. The party had no definite policy of land reform just after liberation. Song Chinwoo, the most prominent member of the KDP, began to insist on land nationalization from the end of 1945. But the KDP changed its policy on land reform in early 1946. The party began to insist on confiscation with compensation and an onerous distribution of land, which was based on the principle of private ownership. The KDP’s change of policy was related to the policy of the United States Army Military Government in Korea (USAMGIK). USAMGIK supported the Left-Right Coalition Committee and prepared the disposal of vested property for creating a foundation of support. The United States wanted to diffuse the right of private ownership in Korea. As a result, the KDP began to internalize the program of liberalism, which was under the aegis of the United States.
황병주(Hwang, Byoung-Joo) 역사학연구소 2016 역사연구 Vol.- No.31
박정희 체제는 민족중흥과 조국 근대화라는 슬로건을 내세우고 급속한 산업화를 추구했다. 산업화는 단지 경제 분야의 성장으로 국한되는 문제가 아니었고 사회 전체적으로 거대한 변화를 추동하는 것이었다. 특히 산업화 주체를 구성하기 위한 인식론적 전환이 강조되었는데, 주체의 의식 전환에 있어 근대적 시공간 인식을 확산시키는 것은 가장 기본적인 요소였다. 근대적 시간 리듬은 진보와 발전을 목표로 한 직선적 시간관이다. 이러한 시간관 하에서는 모든 지역과 사회가 발전의 정도에 따라 동일한 직선상에 배열되게 된다. 요컨대 미래의 발전은 곧 동일한 직선적 시간 선분에서 앞서는 것이 된다. 이 경쟁 구도 하에서 모든 긍정적 가치는 미래의 발전으로 집약되어야 하며 과거와 현재는 이 발전을 위해 극복되어야 하는, 또는 파괴되어야 하는 부정적 대상일 뿐이다. 서구가 구성해낸 근대성이 세계적 표준이자 세속적인 것의 근간을 이루었던 상황 하에서 한국의 근대화는 곧 서구의 세속화를 반복하는 것이어야 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으로 박정희 체제는 민족의 신성한 시공간을 창출하고자 했다. 서구 근대가 만들어낸 세속의 시공간이 발전을 의미했다면 그 발전은 타락이기도 했다. 특히 서구화의 첨단을 달리고 있던 도시가 그 타락의 주범처럼 여겨졌다. 도시의 타락이 외부로부터 유입된 위험이라면 그것을 교정하고 치유할 힘은 내부로부터 구해져야 했다. 이때 내부의 핵심적 시공간으로 재현된 것이 농촌이었다. 농촌은 애초 빈곤과 후진성, 전근대성과 봉건성의 상징으로 시급히 근대화해야 될 대상이었으나 1970년대 이후 역으로 도시의 타락을 구원할 수 있는 민족 전통의 저장소처럼 여겨졌다. 개인주의와 자유주의적 풍조를 교정할 수 있는 집단적이고 공동체적 규율과 윤리가 살아있는 곳이 농촌으로 여겨졌고 이것이 수천 년 간 내려온 민족의 전통이라는 설명체계가 등장했다. 즉 외부로부터 도래한 위협과 타락을 구원할 내부가 새롭게 구성되고 있었다고 하겠다. Park Chunghee regime propelled rapid industrialization with slogan of national restoration and modernization of nation. Industrialization meant not only economic growth but tremendous social transformation. For industrialization it was underlined that the formation of subject who had to be brainwashed with modern rationality. In this context it was important that the diffusion of modern time and space perception amongst mass. Modern time rhythm is lineal concept of time which is aimed progress and development. In this concept of time all countries of the world are arranged in the same line in accordance with the standard of development. There is a competitive composition that development of future monopolize positive value and the past and present are the negative target had to be overcame and destroyed through modernization. The modernization of Korea should be repetition of the west’s one because of modernity, composed by the west, has been hegemonic standard of the world. The other hand Park Chunghee regime had tried to compose divine space time of nation. The secular space time of the west mean development but it is also corruption. Especially the typical symbol of corruption was urban area which was on cutting edge of westernization. The corruption of urban area was caused from the outside and the remedy of it was from the inside. The core of the inside was rural area. The object of modernization was rural area which was a symbol of backwardness, pre-modernity and feudality. But it became a storage of national tradition to save the corruption of urban area in 1970s. The communal discipline and ethics being held in rural area was defined as a remedy to correct the problem of individualism and liberalism from the outside. Park Chunghee regime tried to explain that this was a national tradition to have been endured for thousands of years. As it were, the inside has been composed so as to save nation from the danger and corruption originated from the outside.
황병주(Hwang, Byoungjoo) 한국사학회 2020 史學硏究 Vol.0 No.140
1970년대 말 부동산 투기를 통해 등장한 복부인은 사회적 지탄의 대상이었지만 여성의 경제 주체화를 반영한 표상이기도 했다. 화폐흐름에 따른 남녀관계를 역전시키는 상징이었다. 화폐 취득을 주요 원천으로 했던 남성의 가부장 권력은 경제적으로 독립한 복부인의 출현으로 큰 위기를 맞이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는 곧 가정의 위기로 연결되었고 복부인은 윤리적 지탄의 대상이 되었다. 위기는 가정으로 국한되지 않았고 복부인은 사회경제적 재생산 전반의 무질서와 혼란을 초래하는 원흉으로까지 여겨졌다. 1970년대는 자본주의적 시장경제가 전면화되면서 화폐취득을 둘러싼 사회적 경쟁이 노골화되는 국면이었고 그것이 초래한 사회적 긴장과 갈등 역시 팽배해질 수밖에 없었다. 투기는 이러한 상황의 단면이었는데, 국가의 정책적 실패와 자본주의 시장의 구조적 문제를 안고 있는 문제였다. 복부인은 이를 은폐하고 희석시키는 소재로 적극적으로 부각되었다. 특히 윤리적 문제설정에 있어 복부인은 훌륭한 소재였다. 이 언설체계는 1980년대를 거치면서 더욱 확대되었고 사회적 영향력을 키워갔다. 어느 시점부터 복부인은 사회적 문제와 윤리적 타락을 상징하는 대표 명사가 되었고 현재까지도 그 영향력이 크다고 하겠다. In the late 1970s, Bokbuin(speculating woman), who appeared through real estate speculation, was the subject of social criticism, but it was also a reflection of women"s economic self-reliance. It was a symbol that reversed the relationship between men and women according to the flow of money. The patriarchal power of men, whose main source was money acquisition, is facing a major crisis due to the emergence of economically independent Bokbuin. This soon led to a family crisis, and the Bokbuin became the subject of ethical criticism. The crisis was not confined to the home, and the Bokbuin was considered a source of disorder and confusion throughout socioeconomic reproduction. In the 1970s, the social competition over the acquisition of money was becoming blatant as the capitalist market economy became sweeping, and the social tension and conflict it caused were also bound to proliferate. Speculation was a cross-section of this situation, with the government’s policy failures and the structural problems of the capitalist market. Bokbuin was actively highlighted as a material that covered up and diluted them. In particular, the Bokbuin was an excellent material for setting ethical problems. Throughout the 1980s, this system of speech became more widespread and developed social influence. From some point on, Bokbuin has become a representative noun that symbolizes social problems and ethical decline, and it is still highly influential.