RISS 학술연구정보서비스

검색
다국어 입력

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예시)
  • 中文 을 입력하시려면 zhongwen을 입력하시고 space를누르시면됩니다.
  • 北京 을 입력하시려면 beijing을 입력하시고 space를 누르시면 됩니다.
닫기
    인기검색어 순위 펼치기

    RISS 인기검색어

      검색결과 좁혀 보기

      선택해제
      • 좁혀본 항목 보기순서

        • 원문유무
        • 음성지원유무
        • 원문제공처
          펼치기
        • 등재정보
        • 학술지명
          펼치기
        • 주제분류
        • 발행연도
          펼치기
        • 작성언어
        • 저자
          펼치기

      오늘 본 자료

      • 오늘 본 자료가 없습니다.
      더보기
      • 무료
      • 기관 내 무료
      • 유료
      • KCI등재
      • KCI등재

        唐代 高句麗 표기 기피현상 - 隋唐 墓誌銘의 國名 표기 분석을 중심으로 -

        최진열 동북아역사재단 2012 東北亞歷史論叢 Vol.- No.38

        In this paper, I analyzed the memorial inscriptions from the Tang Period and found avoidance of country names such as Koguryo, Turk (突厥),Baekje, and others. The Chinese officials, scholars, and intellectuals wrote the epitaphs of their own, which included the generals and colonels who participated in the invasion of Koguryo, Turk (突厥),Baekje, Kochang, and other areas. I found that there were few examples of designating Koguryo as Koguryo or as Koyo, which was the Koguryo name during the Tang Period. This name appeared in 3.8% of 79 expressions. Instead, Koguryo was expressed as Koguryo, Joseon,Samhan, Buyeo, Jinhan, Dongyi, Hyeondo, Gujong, Doyi, Baekrang,Gyeru, Guyi, Laklang, Hyeoyi, Mahan, Yemaek, Chenggu, Obu,Yocheon, Yohae, and others, or in 96.2% of the 79 examples. This trend of naming the country through other names in the Tang Period also applied to Turk, Baekje, and the Sogdians. For example, in the memorial inscriptions in the Tang Period. Turk was expressed as Hiungno (Xiongnu), Heomyun, Hunyung, and Hunro. Baekje was expressed as Yo, Yoyang, and Samhan. But Tibet (Tobeon), Georan (Qitai), and Hai were called by their own names, and other names and the country name appeared frequently. The trend to latter. Koguryo by other names was due to the Chinese avoidance and hatred of Koguryo, which had defeated Chinese dynasties, such as Sui and T’ang, in the sixth and seventh centuries. And the Chinese acknowledged Koguryo and considered Koguryo,Chosun, Samhan, Buyo, Jinhan as the same country which had the history. 필자는 당대 묘지명의 고구려 관련 기록에서 고구려의 당대 표기인 ‘고려(高麗)’라는 단어가 거의 보이지 않았던 현상에 주목하였다. 본고는 이 기록을 정리하고 통계적으로 분석해볼 필요성을 느끼고 관련 자료를 정리하여 분석하고 정리한 것이다. 당대에 편찬된 『수서』와 당대를 다룬 『구당서』, 『신당서』, 『당회요』의 고구려 표기를 살펴보면, 고구려의 실제 국호를 언급한 사료는 『구당서』와 『신당서』에 각각 36개와 19개였다. 양자를 합하면 55개로 전체의 33.7%이다. 반면 “요(遼)를 정벌한다”는 뜻을 지닌 “伐遼”, “征遼”, “요동을 정벌한다”라는 뜻을 지닌 “伐遼東”, “伐遼左”, “征遼東” 등 고구려를 “요”, “요동” 등 다른 별칭으로 표기한 기록은 모두 107개이며 65.6%이다. 唐代 묘지명에서도 삼한(18회), 九種(9회), 현도(7회), 遼(5회), 동이(4회), 요갈(遼碣)․조선․鳥夷․진한(3회), 白狼․요양․요좌(2회), 계루․九夷․낙랑․島夷․玄夷․마한․小貊․鴨錄․예맥․朱蒙之緖․청구․五部․遼川․遼海(1회) 등 다양한 별칭이 사용되었고 고구려의 唐代 표기인 ‘고려’는 단 세 차례만 사용되었음을 확인하였다. 이는 돌궐을 흉노․獫狁․葷戎․獯戎․山戎 등으로 표기한 것과 일치한다. 고구려와 돌궐은 망국이었기 때문에 실명보다 별칭을 사용했을 것이라는 가능성도 있지만, 같은 상황의 고창이 실명으로 표기되었고, 唐에 복속된 거란과 奚도 실명 표기가 보인다는 점에서 망국을 별칭으로 보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구려를 지칭하는 단어가 다른 국가의 별칭에서 볼 수 없을 정도로 다양한 표현이 묘지명에 사용되었음은 주목할 만하다. 유형별로 보면 예맥․소맥․계루․오부처럼 고구려를 연상시키는 단어도 있지만, 동이․도이․조이․현이․구이처럼 동방의 이민족을 지칭하거나 낙랑․현도․백랑․요․요갈․요양․요좌․요천․요해 등 전한 이래의 군현명이나 각종 지명을 사용한 예가 많았다. 전자는 동방 이민족에 대한 蔑稱이고 후자는 고구려의 영토가 중국의 옛 군현이었음을 상기시키는 표현인 것 같다. 반면 고구려를 삼한․마한․진한․조선 등으로 칭한 것은 당대 중국인들이 고구려가 한국고대의 여러 나라와 역사적 친연성 혹은 연속성을 인정한 것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이 점은 고구려 유민에 대한 본적 표기 원칙과 일치한다. 즉 당대 조정과 지배층 사회에서 고구려가 고대한국의 여러 나라와 역사적․문화적 친연성 혹은 계승관계에 있음을 인정했던 증거였다.

      • KCI등재후보

        唐人들이 인정한 高句麗人의 正體性 - 唐代墓誌銘에 보이는 高句麗의 別稱(朝鮮·三韓·扶餘) 分析을 중심으로 -

        최진열 동북아역사재단 2009 東北亞歷史論叢 Vol.- No.24

        In this paper, I analized the identification of the Ruined Koguryo People using the memorial inscription in Tang period, and proved that the Chinese in Tang Period acknowledged Koguryo People as the Korean ancesters identifying the one with Chosun, Samhan, Buyo and Jinhan, which meant that Koguryo belonged to the Korean history. I analized epitaph of the Ruined Koguryo People which showed birthplace or identity, family histoy of the dead. A few Korean and Chinese students argued that some Ruined Koguryo People were assimilated by Chinese, because they insisted that they are a distinguished family of Bohai (渤海), i.e. Bohai Gao family (渤海高氏). But I maintained that it is not absolutely true because it was related with non-Chinese people or census registration policy. First, Tang government recognied that the second generation of non-Chinese people imigrated or moved by conquest were Chinese subject at law. So they have one’s legal domicile designated by Chinese province or county names. Second, Chinese government disagreed that the conquered identifed their ex-independent country. So it insisted that ex-opponent never used their country name, which applied to Koguryo as well as Turk and Uighur. Third, Some conquored Koguryo People were general or soldiers, so they moved the army posts in capital or frontiers, which was reconied their birth place or registered domicile. Some Chinese wrote epitaph of the Ruined Koguryo People and identfied the other with people of Chosun, Samhan, Buyo and Jinhan, which were ancestrial Korean countries. they were synonyms of Koguryo in context of the memorial inscription. This proved that Chinese in Tang Period recognized both have same historical identity as well as ethnic, cutural, or social similarity. Many contemporary Chinese insisted Koguryo pertained to Chinese history, but their ancesrter in Tang period already agreed that Koguryo was one of the Korean ancient countries in Korean History. 본 논문에서 唐에서 활동했던 高句麗 遺民들의 墓誌銘의 본적 표기 등을 중심으로 高句麗 遺民들의 정체성 문제를 고찰하였다. 먼저 선행연구성과와 唐代 墓誌銘을 분석하면 15인이 高句麗 遺民으로 확인된다. 먼저 필자가 遺民 세대별로 작성한 표를 보면, 선행연구처럼 遺民 3대와 4대인 高震․高氏夫人 모녀와 高欽德은 高句麗 遺民이 아니라 ‘渤海人’을 자칭하였는데, 魏晉南北朝부터 唐代까지 高氏 가운데 최고 名門인 渤海高氏의 本籍을 冒稱한 것이었다. 그러나 필자는 唐代 혹은 이전에 중국에서 거주했던 이민족들의 門閥 冒稱이 보이므로 墓誌銘에 사용하는 상투적인 표현이며, 정체성 약화로 단정할 수 없다고 보았다. 왜냐하면 墓誌銘에 보이는 高句麗 遺民들의 출신 혹은 본적 표기는 자신 혹은 유가족들의 뜻뿐만 아니라 당시 唐의 이민족 정책 및 戶籍 정책과 관련 있었기 때문이다. 唐代 唐代 이민족과 戶籍에 관한 법률을 검토하면, 蕃戶(內附한 이민족들)은 唐에 귀부한 후 두 번째 세대에 唐의 百姓들과 동일하게 취급되었다. 이는 호적상 중국의 州縣名 혹은 郡縣名을 본적으로 부여받아 編戶로 등록되어야 함을 보여준다. 唐代에 內附하거나 唐의 지배를 받은 突厥․鐵勒 등의 이민족 출신 墓誌銘의 표기에서도 이 점이 확인된다. 또 唐代 이민족 출신들의 墓誌銘에 표기된 출신과 본적을 살펴보면, 高句麗와 突厥처럼 唐에 강력히 대항했거나 唐에서 다루기 어려웠던 나라의 內附民 혹은 遺民에게는 자신의 國名을 사용하지 못하게 했다. 반면 唐에게 만만했던 중앙아시아 각국이나 百濟人들은 자신의 國名을 墓誌銘에 표기할 수 있었다. 이는 唐朝廷의 정책 때문에 일률적이고 차별적인 표기가 가능했음을 시사한다. 다음으로 일부 高句麗 遺民들의 墓誌銘에 보이는 唐代 郡縣名의 本籍을 살펴보면, 당시 遺民들이 군인으로 주둔하던 지역이나 거주하던 지역이었다. 예컨대 營州城傍 高句麗人으로 표기된 王思禮처럼 唐의 변방에 근무했던 高句麗人들은 근무 지역의 州郡縣 명칭을 딴 本籍을 취하였다. 요컨대 高句麗 遺民들의 본적 표기는 당시 이민족의 戶籍 규정에 따랐을 가능성이 높으며, 墓誌銘에 ‘高句麗’라는 국명이 없거나 중국식 郡縣名으로 표기되었다고 해서 특히 遺民 3-4세대가 高句麗人이라는 정체성이 희미해졌거나 혹은 中國人으로 동화된 것은 아니었다. 마지막으로 高句麗 遺民들의 墓誌銘에 이들을 ‘朝鮮人’, 혹은 ‘三韓人’ 등으로 기록하고 글의 문맥상 高句麗 대신 別稱으로 ‘朝鮮’, ‘三韓’, ‘辰韓’, ‘扶餘’ 등을 사용한 점이 주목된다. 高句麗의 별칭으로 사용된 ‘朝鮮’, ‘三韓’, ‘辰韓’, ‘扶餘’는 모두 ‘高句麗’의 동의어로 사용되었으는데, 이는 唐代 중국인들이 高句麗와 朝鮮․三韓․辰韓․扶餘를 동일시했던 증거였다. 唐代 中國人들은 왜 高句麗를 ‘朝鮮’과 ‘三韓’, ‘辰韓’, ‘扶餘’ 등과 동일한 이유는 먼저 唐代 중국인들이 ‘朝鮮’과 ‘扶餘’는 高句麗와 역사적 계승관계, 혹은 宗主國과 屬國의 관계였음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唐代 중국인들이 ‘三韓’과 ‘辰韓’이 高句麗와 동일시한 것은 墓誌銘뿐만 아니라 『隋書』와 『舊唐書』 등지의 문헌에도 보인다. 이는 기존의 연구에서 지적한 것처럼 高句麗․百濟․新羅를 三韓으로 표기하여 역사적․사회적․문화적․인종적으로 동질적인 국가 ...

      • KCI등재

        北魏의 律令 수용과 그 실상

        최진열 중국고중세사학회 2015 중국고중세사연구 Vol.37 No.-

        ≪魏書≫卷111≪刑罰志≫記錄了在‘序紀時代’拓跋部的法律在: “昭成建國二年: 當死者, 聽其家獻金馬以贖; 犯大逆者, 親族男女無少長皆斬; 男女不以禮交皆死; 民相殺者, 聽與死家馬牛四十九頭, 及送葬器物以平之; 無繫訊連逮之坐; 盜官物, 一備五, 私則備十. 法令明白, 百姓晏然.” 什翼犍(昭成帝)統治的拓跋部法律跟別的遊牧民或者遊牧國家一樣, 是遊牧民的慣習法保留了復讎法和X倍倍償. 這是跟中國的律令, 特別是中國的刑罰不一樣, 比較拓跋部建國二年的刑罰跟前漢呂太后二年的張家山漢簡≪二年律令≫和唐代, 對中國人適用的肉刑, 勞役刑, 笞․杖․徒․流․死等多种多样刑罰跟對鮮卑等遊牧民適用的對殺人罪的物的賠償代贖, 對偷盗或者强盜的X倍倍償不一樣. 所以, 北魏建國以後北魏皇帝們把中國的律令不可能實施鮮卑,烏桓,匈奴,丁零等多种多样的遊牧民或者騎馬民. 在北魏前期可汗(相當于中國的皇帝),可敦(相當于中國的皇后),直勤(可汗氏族男性稱號),胡族的官制,胡族的軍鎭和護軍,俸祿制的未實施是制度方面不實施律令的證據. 在孝文帝時期馮太后和孝文帝把胡族的政治制度改變了中國的律令和法律, 可是反映遊牧,牧畜,日常生活的遊牧民特有慣習法不可能代替反映農耕生活的中國刑律, 所以拓跋部的不文慣習法或者中國的成文法律,卽律令不可能田賦胡人(鮮卑,烏桓,匈奴,丁零等多种多样的遊牧民或者騎馬民)和漢人(中國人). 北魏後期胡人官吏們按照中國刑律被處罰, 所以孝文帝以後對胡人支配層適用中國式律令, 可是住在六鎭和平城一帶的胡人們保持了胡俗, 可能是循遊牧民固有的慣習法. 除了北魏以外, 遼,金,元等其他異民族王朝都使用二元的法律體系, 比如說≪遼史≫卷61≪刑法志≫上, “乃詔大臣定治契丹及諸夷之法, 漢人則斷以律令, 仍置鐘院以達民寃.” 因爲北魏的狀況跟其他異民族王朝一樣, 支配了遊牧民和農耕民, 所以北魏也可能運用二元的法律體系, 可是≪魏書≫沒有記錄關于這個狀況. 除了拓跋鮮卑人以外, 特別是漢人(中國人),西域人,阿拉伯人,非洲人,土耳其系遊牧民,高句麗人也住在北魏後期都城洛陽. 北魏後期洛陽的人口, 在≪洛陽伽藍記≫卷5≪城北≫ “京師東西二十里, 南北十五里, 戶十萬九千餘.” 同書卷3≪城南≫宣陽門條說: “東夷來附者處扶桑館, 賜宅慕化里. 西夷來附者處崦嵫館, 賜宅慕義里. 自葱嶺已西, 至於大秦, 百國千城, 莫不歡附, 商胡販客, 日奔塞下, 所謂盡天地之區已. 樂中國土風, 因而宅者, 不可勝數. 是以附化之民, 萬有餘家.” “萬有餘家”是住在洛陽的西域人, 占了洛陽戶口的9%. 包括其他非漢族或者外國人, 住在洛陽的非漢族占了11.9. 至少北魏政府在‘國際城市’洛陽不可能適用對經驗自己的法律體系的漢人和非漢族一元的中國式律令體系. ≪唐律疏議≫卷6≪名例≫化外人相犯條, “諸化外人, 同類自相犯者, 各依本俗法, 異類相犯者, 以法律論.” 這可能是至少適用北魏後期‘國際都市’洛陽的.

      • KCI등재
      • KCI등재

        東魏・北齊 수도 鄴 거주 非漢族 이민족의 多文化 공존 ― 皇室과 鮮卑支配層의 생활을 중심으로 ―

        최진열 중국고중세사학회 2022 중국고중세사연구 Vol.64 No.-

        笔者硏究东魏北齐时期都城邺的多文化共存,反对了东魏北齐时期皇室和鲜卑人的汉化,强调鲜卑人、汉人、西域人的文化共存。高欢与其家族,宫中和朝廷的鲜卑、汉人官吏们说了鲜卑语。可贺敦、乌贺眞、大贤眞、库直什幺的鲜卑语官名也是东魏北齐时期皇室和鲜卑、汉人支配层说了语言的证据。住在邺的鲜卑人和汉人穿了鲜卑服和汉服,鲜卑风俗比如袒裸、相偸戱、收继婚流行在东魏北齐都城邺城。西域的音乐和美术也流行在东魏北齐都城邺城,与游牧民的草塬文化和汉文化在一起。茹茹公主的周边人们穿了鲜卑服和汉服, 茹茹公主与其党与信了萨满信仰,进行了萨满仪式,喜欢了西域商品和西域文化。她虽然穿了汉服,仍然保持了柔然的草塬文化和风习。从茹茹公主墓出土的东罗马金币看,她喜欢了西域商品和珍宝。从高润墓的遗物看,高润享有了不旦鲜卑文化、西域文化而且南朝的汉文化,比如说靑黄釉龙把鷄首壶跟浙江黄巖秀岭水库9号墓、南京蔡家塘一号墓出土的鷄首壶差不多一样,可是北朝墓葬稀有发见。从现在河北省邯郸市磁县、河南省安阳市等邺城墓葬比如元良、元祜、和绍隆看,我们知道了草塬游牧文化、汉文化、西域文化的共存现状,多文化共存不是汉化,也不是胡化(鲜卑化),多文化共存的程度也是各色各样。

      • KCI등재

        十六國前期 諸國의 流民 대책 ― 流民의 郡縣 編制와 編戶化를 중심으로 ―

        최진열 중국고중세사학회 2020 중국고중세사연구 Vol.56 No.-

        侨州郡县主要是东晋南朝时期出现的, 所以东晋南朝侨州郡县硏究很多, 十六国北朝时期的硏究不多, 只有几篇文章. 还有先行硏究的规定侨州郡县不对, 以五胡诸国没有统治的州郡名为侨州郡县, 或者以安置没有地图籍贯的流民和设置郡县之措施为设置侨州郡县. 可是前者一般叫遥领, 后者的状况不太淸楚, 关于侨州郡县的定义, 《隋书・食货志》正确地说明了, “晋自中塬丧乱, 元帝寓居江左, 百姓之自拔南奔者, 并谓之侨人. 皆取旧壤之名, 侨立郡县, 往往散居, 无有土着. ” 笔者发现了很多先行硏究误认到侨州郡县的规定和与其性格, 所以笔者纠正到十六国前期侨州郡县的内容、数量、命名方式, 論究到统治中塬(黄河流域)或者边境(遼西、遼东或者河西走廊)的国家对侨州郡县和流民的态度、对待政策. 十六国前期诸国, 对侨州郡县的命名有叁个类型: 第一, 以塬来郡县名为侨州郡县的名字, 比如慕容部(前燕)的遼东、乐浪、带方、玄菟四郡与吴县一县. 第二, 以州郡县的别称或者寓意地名为侨州郡县的名字, 比如慕容部(前燕)的冀阳、成周、营丘、唐国四郡. 第叁, 看起来郡县的名字, 非常难区别跟一般郡县名的例子, 比如慕容部(前燕)的和阳、武次、西乐、兴集、宁集、兴平、育黎七县与前凉的武兴郡. 东晋南朝的命名侨州郡县方法, 除了不是流民籍贯的怀德县以外, 主要是使用了中塬(华北)地区塬来州郡县名, 比如雍州、瑯琊郡, 或者把“东、西、南、北”字加上到塬来州郡县名, 比如南徐州、南兖州什幺的. 慕容部(前燕)借用了塬来州郡县名的类型, 统治中塬的五胡诸国, 比如前赵、后赵、前燕、前秦, 没有使用这个命名方式. 东晋设置了侨州郡县, 允许中塬流民的阴庇户口, 叫白籍, 他们没有纳捐、当役. 可是统治中塬的五胡诸国比如前赵、后赵、前燕、前秦把流民安置了当地的州郡县, 上把握到流民的税, 没有允许白籍或者让流民们旋乡, 安置了他们的籍贯乡里. 边境国家比如慕容部(前燕)、前凉虽然设置了侨郡县, 不允许白籍, 中塬流民没有免税特权, 没有放弃收取租税和徭役. 总而言之, 十六国前期的大部分国家没有设置侨州郡县, 不允许流民的免税、免役特权, 尽管兩个国家设置了侨州郡县, 佗们也不允许白籍和流民的免税、免役特权.

      • KCI등재

        16국·北魏時代 梯形棺 - 鮮卑葬俗의 확산과 수용

        최진열 단국대학교 동양학연구원 2023 東洋學 Vol.- No.92

        This thesis analyzes the distribution and patterns of trapezoid coffins in the 16th kingdom period and the Northern Wei period. The trapezoid coffin is a unique funeral custom of the Xianbei and Wuhuan People. The Xianbei-style trapezoid coffins in the Sixteen Kingdoms period were excavated from 43 sites in the Liaoxi and Liaodong regions, Yangdun, Zhaoyang, Chang’an, and the Corridor of Hexi. They were excavated in the commanderies of Hongnong, hedong, Jingzhao as well as Pengcheng, present Dadong, Shanzi Province, and Luoyang, the capital of Northern Wei. Not only Non-chinese people including Xianbei, Wuhuan, Xianbei and Wuhuan Xiongnu People, but also a sort of Chinese ruling-class, including Cui Yu, Fenf Sufo, Fei Jing, The Family of Zhou, Fang Xing used the Xianbei-style trapezoid coffins. The Xianbei-style grave goods were excavated from the tombs of Fei Jing and Fang Xing, which meant some persons of Chinese ruling-class were greatly influenced by the Xianbei culture and the culture of Western Region. This study breaks the stereotype that the Chinese people did not accept the culture of foreign peoples and that only the foreign peoples unilaterally accepted the Chinese culture during the period of the Sixteen Kingdoms and Northern Wei, and discovered and introduced the fact that the Chinese people also accepted the nomadic culture including Xianbei culture. It has research significance. 이 논문은 16국시대와 北魏時代 鮮卑人들의 독특한 葬俗인 梯形棺의 분포와 양상을 분석한 논문이다. 16국 시대 梯形棺은 遼西·遼東(43座), 鄴 지역(4座), 洛陽(1座), 長安과 그 주변 지역(13座, 19棺), 河西回 廊(2座)에서 출토되었다. 北魏平城時代에 수도인 平城에 梯形棺이 다수 출현하였고 盛樂 일대(현재의 呼和浩 特 美岱村 北魏初期 무덤)과 夏州, 高平鎭에서도 梯形棺이 발견되었다. 北魏洛陽時代에 수도 洛陽(3件)과 平城 (1件), 弘農郡(1件), 河東郡(4件), 鄕郡(1件), 京兆郡(2件)에서 梯形棺이 발견되었다. 16국시대에 漢人의 무덤은 11座였고, 北魏洛陽時代에 8座(梯形石棺을 포함하면 9座)였다. 16국시대 後燕의 관리 崔遹과 北燕의 王室 일족인 馮素佛의 무덤에서 梯形棺이 발견되었다. 漢人들이 鮮卑의 葬俗인 梯形棺으 로 매장한 사실은 일부 지배층 漢人이 鮮卑文化를 받아들였던 증거이다. 본고는 漢族이 이민족의 문화를 받아들이지 않았고 十六國·北魏時代에 이민족만 일방적으로 漢文化를 받 아들였다는 고정관념을 깨고 華北 지역의 漢族도 유목문화(鮮卑文化)를 수용했던 실례를 발견하고 소개했다는 점에서 연구사적 의의를 지닌다.

      연관 검색어 추천

      이 검색어로 많이 본 자료

      활용도 높은 자료

      해외이동버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