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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霞谷 鄭齊斗와 白雲 沈大允의 經學 비교

        장병한(Byeong Han Jang) 한국양명학회 2007 陽明學 Vol.0 No.18

        霞谷 鄭齊斗(1649-1736)와 白雲 沈大允(1806-1872)은 대략 150여년 시대의 간격을 두고 살았지만, 이들은 학연과 혈연으로 인해 소론ㆍ양명학파ㆍ강화학이란 세 가지 연을 함께 하면서 살았다. 특히 19세기 중반 安城에서는 이미 落拓한 少論의 후예들 즉 沈氏, 東萊 鄭氏, 柳氏, 李氏 등이 하곡의 강화학파의 정신세계에 기초하면서 백운을 중심으로 하여 근대 마지막 강화학파의 맥을 이어 가고 있었다. 하지만 이어 백운이 逝去하면서 그 맥은 끊어지게 된다. 그렇지만 經學에 있어 하곡과 백운은 朱子의 성리학적 학문태도와 방법에 대한 비판과 변석의 입장은 기본적으로 그 궤를 같이하고 있지만, 그 구체적인 논의 전개 양상은 많은 부분 달리하고 있다. 예컨대 『大學』 ‘格致章’의 해석에 있어, 하곡은 王陽明의 공부론에 입각하여 ‘致知’ 즉 ‘至善의 발현’에 도달하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物物마다에 있는 그 事를 바로 잡는 格物 공부를 역설하고, 格物은 誠意의 일(事)이고 致知는 誠意의 근본이 된다고 하였다. 이에 비해 백운은 양명학과는 많은 정도의 거리를 둔 즉 독자적인 경전 해석체계를 전개하려는 의식이 강하게 작용하고 있다. 그래서 그는 유학 본원 경전에 근거하려는 崇經의식에 기초하여 孔子의 실천적인 道 즉 ‘忠恕’를 ‘格致’章의 본원적 의미로 규정하고 있다. 그런데 한국 근대 양명학자로서 크게 공헌하였으며 백운의 저술서에 대해 깊은 관심을 가지고 그의 경학 사상을 극찬하기도 했던 鄭寅普(본관: 東萊, 爲堂, 1892- ?)는 앞서 일본 학자 다까하시 도루(高橋亨, 1878-1967)가 『조선유학사』에서 ‘백운 심대윤의 학문적 원류가 하곡 정제두에 있다’는 주장에도 불구하고, 위당은 『양명학 연론』에서의 〈조선 양명학파〉 그룹에는 백운을 소속시키지 않고 있다. 이는 여러 가지 정황이 있을 수 있지만, 위당이 백운의 反性理學的 思惟세계와 어느 정도 양명학과 실학의 사상 체계에 대한 端緖에 많은 부분 학문적 魅了를 가졌지만, 백운을 조선의 양명학자로 규정하기에는 일정 부분 無理가 따른다는 판단이 있지 않았는가 한다. There has been estimated l50-year-long gap between the era of Hagok Jae Doo Jeong(1649-l736) & that of Baekwoon Dae Yun Shim(1806-l872), however they had to live with surroundings of soronㆍyang-myeong-hak factionㆍgang-hwa-hak due to different academic connection and blood connection. In particular, soron's descendants such as Mr. shim, Mr. Dongrae Jeong, Mr. Ryu, Mr. Lee who had failed in an nomination had been inheriting mainstream of modem last gang-hwa-hak faction based upon Hagok's gang-hwa-hak faction's spiritual world centered by Baekwoon in Ansung in the middle of the 19th century. However, its mainstream had been cut off due to demise of Baekwoon. Nevertheless, Hagok and Baekwoon had, criticism and interpreting about methodology and academic attitude to seong-ri-hak of Juja, in common, but they were totally different from their concrete logic development in light of Chinese classics. For example, from the aspect of interpretation of the Great Learning 'gyeok-chi-jang', Hagok interpreted 'gyeok-mool-chi-ji' based upon Yang Myeong Wang's learning theory, on the contrary Baekwoon had a strong willingness to develop interpreting system of scriptures independent from that of yang-myeong-hak, further he described 'choong-seo' of the Confucius practicing morality as fundamental meaning of 'gyeok-chi-jang'. By the way, In Bo Jeong(a place of origin: Dongrae, Widang, 1892- ?), once spoke highly of thoughts of Baekwoon's Chinese classics as a scholar of modem yang-myeong-hak, didn't include Baekwoon in the group of 〈Joseon yang-myeong-hak faction〉 in his book of yang-myeong-bak-yeon-rom even though Japanese scholar, Dakagashi Doru (Gyo Hyeong Goh, 1878-1967) asserted that original academic mainstream of 'Baekwoon Dae Yun Shim had been from Hagok Jae Doo Jeong' in the jo-seon-yu-bak-sab. There might have been several reasons for that, but it is, in my opinion, more likely that Widang were academically fairly interested in many parts about thinking system of yang-myeong-hak and practical learning and speculative world of seong-ri-hak of Baekwoon, however he judged that it was rather unreasonable to look upon Baekwoon as Joseon's yang-myeong-hak schola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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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僧肇 選 『注維摩詰經』, 「弟子品」에 대한 연구

        장병한(Jang Beoung Han) 한국도교문화학회 2017 道敎文化硏究 Vol.47 No.-

        중국 5세기 초기에 저작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는 僧肇 選 『注維摩詰經』, 「弟子品」에서의 승조 주해에서, 특히 승조의 小乘 批判을 통한 大乘 讚揚의 전개 논의에는 중국 전통의 老莊과 유가 『주역』의 사상체계가 일정 부분 섭용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 그리고 인도의 대승가이며 그의 스승인 구마라집의 주해 역시 일정 부분 引據되고 있음도 확인되었다. 後秦 5세기 초, 구마라집은 대승불교의 모체인 『般若經』과 용수의 中觀계열의 論書를 傳譯하고 강설하여 般若 中觀사상의 正法性을 일깨워 대승사상을 전파하는 데 힘쓰고 있었다. 그가 중국에 오기 전까지 중국의 불교도들은 대승과 소승불교에 대한 인식이 확실치 않았으며, 대승의 空사상에 대한 이해 또한 명확치 못했다. 이때 승조는 스승 구마라집의 인도 대승의 제법 실상론을 계승하는 동시에 중국 전통 유가와 도가의 사상체계를 섭용하여, 소승 비판을 통한 중국의 창의적 대승불교 정신을 정립 확산하였다. 그래서 그는 인도의 대승 사상을 정립한 용수와 이를 계승 발전시킨 구마라집의 般若·空·中觀·諸法實相의 대승 사상체계를 수용하는 가운데, 중국의 전통 사상으로서 당시에 三玄學으로 손꼽히는 노자의 『도덕경』과 莊周의 『莊子』 및 유가의 『周易』에 담지되어 있는 대승적인 논의들을 그의 소승 비판을 통한 대승 실상론의 전개에 일정 부분 攝合하여 활용하였다. 특히 승조는 『莊子』의 ‘枯木死灰’의 수양론을 사리불의 소승 좌선법에 비유하며 비판하는 반면, 老子 『道德經』의 ‘和光同塵’의 수양론을 유마힐의 대승적 좌선법에 비유하며 찬양하고 있다는 것과 『莊子』, 「齊物論」의 ‘天地一指’, ‘萬物一觀’, "萬物與我爲一"론을 섭용하여 대승 불교의 一指·一觀·一相의 정신에 기초한 즉, ‘平等正化法’과 莫二의 道(不二의 道)를 제안하고 있다는 것에서, 승조의 불교학에서 중국 전통의 노장사상이 차지하고 있는 비중의 정도를 읽을 수 있다. 이에 승조의 『주유마힐경』에 함의되어 있을 그의 중국적인 불교 세계관에는 그의 천재적 저술로 일컬어지고 있는 즉, 조론에 못지않은 학술적 가치를 지니고 있을 것으로 사료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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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6세기 江右 南冥 道學의 性格 규정 일고찰

        張炳漢(Jang, Byeong-Han) 영남대학교 인문과학연구소 2007 人文硏究 Vol.- No.53

        김충열이 『학기류편』의 「학기도』 분석을 통해 남명의 도체 즉 心과 誠을 주요하게 제시하고 있다. 이 「학기도」와 함께 有機的인 관계 속에서, 더 나아가 편찬자의 意圖的인 伏線의 潛在性까지 깃들어 있을 「학기」의 선편의식을 고찰해 보았다. 남명 또는 남명학 (남명에서 정인홍에 이르는 학문체계)으로서의 「학기」 선편 의식 구조에는 기존 성리학에서의 性卽理ㆍ天卽理와 같은 理學의 거대 질서는 많은 부분 약화되고, 그 대신 心과 誠이 중심이 되는 즉 ‘性郞誠’, ‘聖郞誠’, 先天學=心學 등이 그 중심 위치를 차지하고 있다. 또 기존 성리학 질서에서 주렴계의 『태극도설』과 太極卽理 및 정자의 天卽理가 우세했다고 한다면, 「학기」에서는 주렴계의 「통서」와 誠論, 장재의 氣와 神 소옹의 心學이 우뚝하게 자리하고 있다. 그런 가운데 본원 유학으로서의 『맹자』ㆍ『주역』ㆍ『중용』등의 사상이 강력하게 또한 작용하고 있다. 주지하듯, 「학기」의 선편 내용 중 많은 부분은 『성리대전』에 속해 있다. 남명학의 원류인 『학기류편』의 「학기」는 남명이 25세 전후부터 『성리대전』에 침잠하여 ‘述而不作’의 원칙에 근거하여 주요한 내용만을 箚記한 것이다. 남명의 首弟子 정인홍이 이를 전수 받아 문인들과 함께 스승 死後에 『학기류편』을 편찬하고, 그 서문에서 “이 책은 선생(남명)이 다만 덕을 닦기 위한 것이고 후일을 기약한 것은 아니다”고 하였다. 필자는 정인홍의 이 말을 역설적으로 이해하고 싶다. 남명은 『성리대전』을 근간으로 하여 『근사록』의 체제에 따라 기존의 성리학의 이기론적 모순 구조와 性郞理의 관념적이고 공허한 이론과는 차별되는 즉 다른 도학의 개념으로서 자신 실천적 공부론의 요체인 敬ㆍ義의 도체가 될 수 있는 “氣와 神(鬼神), 心과 誠”을 수립하여 독자적이고 새로운 도학 체계를 기획하였다. 이러한 강우 남명학의 새로운 도학 체계는 당시 16세기 朱子 性理學의 확장을 통한 정치 사회적 헤게모니를 장악 하고 있던 강좌 퇴계학파의 학풍이 지나치게 관념적이고 공허한 이론에 빠져드는 것으로 인한 국민 사회적 폐해성을 진단하고 이를 극복하려는 경학적 대응 전략에서 비롯된 것이라 할 수 있다. The thesis is focused on what is “Seonpyeon” or “Seongi recongnition” of “HakGiYuPyeon” from which NamMyeong school was originated. A large part of “Seonpyeon” of “HakGi” belongs to “SeongLiDaeJeon (Collection of Neo Confucianism).” “HakGi” of “HakGiYuPyeon”, the origin of NamMyeong school is the book Nam Myeong wrote by coping the major parts of “SeongLiDaeJeon” under the principle of “SulEiBuJak(Accept as it is)” since he was 25 year old or so. Nam Myeong’s best student Jeong In-hong succeeded this and published “HakGiYuPyeon” with other writers. The core concept of then-established Neo Confucianism that “Confucianism is the principle” almost disappeared here while most discriminatory structure of the “Theory of Principle and Psycho”, the philosophical foundation as the cosmology of Neo Confucianism, was eradicated or resolved to become equal structure between the principle and the psycho. Further more, it sent a signal that it was on the verge of transition from “the Theory of Principle and Psycho” into “Essence Function Theory”. Therefore, the great orders of “principle-centered studies”, such as “Confucianism is the principle” and “the heaven is the principle,” were dropped in his “HakGi” Seonpyeon recognition structure of Nam Myeong school. Instead, mind and sincerity emerged as important concepts. The concepts included “nature is sincerity,” “divineness is sincerity” and “Seoncheonhak is mind philosophy.” If Juryeomgye’s theory, “TaeGeukDo Seol”, and “TaeGeuk(The Greate Absolute) is the principle” and Chuang Tzu’s theory, “the heaven is the principle.” were dominant in then established Neo-Confucianism, Juryeomgye’s “TongSeo” and sincerity theory, Chang Tsai’s energy and diety, and Shao Yung’s “Sohak” prevailed in “HakGi.” In “HakGi”, “the Works of Mencius”, “Classic of Changes” and “the Doctrine of the Golden Mean” took strong presence. As seen here, Nam Myeong school is a practice-oriented philosophical Taoism, centering on mind and sincerity. It is fair to say the school was created to overcome the negative social influence of 16th century’s dominant Toegye school which was dominating political and social hegemony by spreading Zhuxi’s Neo­Confucianism but was going so ideological and non-practica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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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茶山學에서의 佛敎 敎學의 意味와 工夫論

        張炳漢(Jang Beoung han) 대동한문학회 2016 大東漢文學 Vol.48 No.-

        다산은 유배 초기에서부터 두 가지 難題 즉 성리학 중심의 이단정책의 해체와 그 이론 체계의 비판과 극복에 대한 해법을 찾기 위해 고심하였다. 그는 이단 개념과 범주의 희석화 또는 해체화 작업에 착수하여, 사환기 때는 불교, 좌천기 때는 천주학의 이단성을 공격하는 가운데, 유배기에서는 짧은 성현의 警句를 입론하여 그것을 자신 종파나 학파의 교의로 삼는 모든 학적 체계와 사상은 모두 이단이라고 규정한다. 뿐만 아니라 민생의 일상생활에 도움이 되는 학문이나 사상체계라도 군자가 추구하는 학문에 害가 되면 무조건 이단의 범주에 속한다고 하여, 이단의 개념과 범주가 거의 有名無實하게 될 정도에 이르게 된다. 따라서 그는 기존의 송학 특히 정주학자들이 이단으로 주장하는 바, 즉 楊朱・墨翟・老子・佛氏만을 이르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그런 가운데 다산은 정주 성리학의 주요 철학과 사상 체계들이 유학의 이단인 불교 교학에 근거 또는 근접하고 있다는 사실을 밝혀내기에 집중한다. 예컨대, 정주학의 舊染・仁義禮智 四德・性卽理・明鏡止水의 해석 체계가 불교의 新薰・佛性・眞如本體・明鏡止水說에 근거하고 있음을 변석한다. 그는 이를 통해 정주 성리학 역시 유교 전통의 이단학인 불교학의 한 연장선 상에 자리하고 있는 즉, 또 다른 유학의 이단학임을 고발한다. 그런 과정에서 또 다산은 유학의 육경 사서의 경전 내용을 근거로 하여 정주 성리학의 해석 체계 역시 孔子 洙泗之學과도 어긋나고 있음을 입증한다. 이어 다산은 다시 수사학의 경전적 권위에 의지하여 인간 중심의 실천・실용・현실적인 공부론을 제안한다. 즉 ◯1 ‘蒙養以正’論 : 오직 어릴 때부터 바른[正] 것으로써 양육한다면 오염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2 ‘傳種・靈明’論 : 일반적인 동물과 식물은 種子에 의해 번식되어 轉生을 하지만, 이와 달리 인간은 인의예지의 사덕을 실현할 수 있는 가능성으로의 靈明性만을 하늘로부터 부여받았다. ◯3 ‘用力執持’論 : 인간은 후천적으로 끊임없는공부와 수양을 통해 성인의 경지를 획득하는 것이다. 위에서 본 바와 같이, 다산은 암울한 질곡의 사상 체계인 이단 정책을 해체하고 성리학의 이단성을 고발함을 통해 구시대의 강압적이고 폐쇄적인 사상 통제에서의 해방을 기획하였다. 이어 다산보다 한 세대 뒤를 살면서 다산의 欽欽新書 에 대한 반론격의 논문으로서 欽書駁論 을 저술하였던 沈大允(1806~1872) 역시 다산과는 또 다르게 周易 과 氣學에 근간하여 성리학의 비판과 극복에 競走하였다. 19세기 이 두 위대한 학자의 실학적체계에 힘입어 그 오랫동안 滔滔하게 君臨하였던 성리학의 威勢는 마침내 19세기 말에 이르면서 그 힘을 잃게 되어 시대와 사상의 뒷전으로 밀려나게 되었다. Dasan Jeong Yak-yong(1762~1836), during his exile period, conducted a Confucian criticism and interpretation of the cosmogony, the nature of mind, and theory of self-cultivation of the Song Learning and the Neo- Confucianism of Chengzi. Dasan thus focused on revealing that the major philosophies and thoughts system of Neo-Confucianism of Chengzi were closer to Buddhist teachings, a heresy of Confucianism. For instance, he suggested that the calmness and tranquility of Chengzi Learning s “old staining,” the four virtues of benevolence, justice, courtesy and wisdom, and “nature is reason” was founded on Buddhism s new perfume theory, Buddha nature theory, and the calmness and tranquility theory of true suchness and fundamental substance, revealing that Neo-Confucianism is also an heresy of Buddhism. Yet, Dasan, borrowing the scriptural authority of the rhetorics of Confucius and Mencius and quoting relevant references, suggested that such classics are different from the philosophical system of Neo-Confucianism. He further, using the scriptural authority of rhetorics, proposed a humanoriented, practical, pragmatic and realistic theory of study. In other words, such theories included the theory of ‘if one studies what is right from childhood, he will not be tainted,’ the theory of ‘things are transferred by means of seed, while humans have received spiritual luminosity,’ and the theory of ‘one can reach the realm of sainthood through efforts and studying.’ Through the dilution or dismantling of hereditary policies, and criticism and interpretation of the philosophical system of Song Learning and Neo-Confucianism, Dasan overcame all ideologies, thoughts and religious systems of the bleak and trying old-era, endeavoring to promoting a new Joseon. As such, Dasan was indeed a pioneer of philosophical thought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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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企劃論文 : 건학이념 원융무애의 이해; “원융무애”의 경전적 근거와 그 의미에 대한 일고찰

        장병한 ( Byoung Han Jang ) 영산대학교 동양문화연구원 2010 동양문화연구 Vol.5 No.-

        동아시아 불교학 전통에 있어, 소승과 대승의 교리 체계의 발전과 전변의 역사 가운데, 하나의 주요한 사상체계로서 불교학의 중심에 자리하고 있는 것으로 ‘원융무애’론을 들 수 있다. ‘원융무애’론은 ‘무애’→‘원융’→‘원융무애’라는 일단의 공식적 단계를 거치면서, 또한 다양한 의미의 전변을 겪으면서 구체화되기에 이른다. ‘무애’의 의미로는 초기경전인 『중아함경』: 해탈의 정신경계로서의 ‘심무애’, 『잡아함경』: 존자의 정도(正道) 수행을 통해 획득한 ‘무애변’, 『장아함경』: 삼매의 경지에서의 ‘석벽무애’로서 자리하고 있다. 이어 대승경전에서는 『화엄경』: ‘여래의 법신=허공=무애무차별’, 『능가경』: ‘무애=불생불멸=석제환인=손톱=신체=땅=허공’ 등의 의미가 특이하게 자리하고 있다. ‘원융’의 의미와 관련해서는 『능엄경』의 ‘불생불멸의 청정자성한 불성인 여래장의 본성적 의미와 천태학의 확립자인 지의의 ‘원융삼제론’이 크게 자리하고 있다. 이들 무애와 원융사상은 뒤이어 전개되는 법장의 화엄학의 교리서의 하나인 『화엄경탐현기(華嚴經探玄記)』에서 주요한 경전적 의미를 가지면서 명실상부한 ``원융무애’론이 정립되게 된다. 여기‘원융무애’론은 부처의 덕의 출세간적 원리로서 전제되는 한편, 현실적인 원리로서는 ``리(理)``의 주도하의 ``이사무애(理事無?)``에서 ``사사무애(事事無?)``로의 완전한 현실세계의 전환을 기획하고 있다. 세간과 출세간, 이상과 현실은 불이(不二)와 불일(不一)의 연속선상에 놓여 있다. 우리는 이들 이상과 현실, 세간과 출세간의 연속선 위에 서있는 하나의 연기적 존재로서, 이 심오하고 오묘한 ‘원융무애’의 사상 세계의 현실적 실천성과 관련하여 끊임없는 고민이 요구될 것이다. The theory of Wongyung-mue developed as it underwent a series of Muye (boundlessness), Wonyung (fullness) and Wongyung-mue (fullness and boundlessness), as well as diverse meanings. The meaning of Muye is closely related to "Buddha`s enlightened being=emptiness=boundless and indiscriminate" in the Avatamska Sutra, as well as to "boundless=not live not perish= ?akrodev?n?m Indrah=nail=body=earth=emptiness" in the Lankavatara Sutra. Wonyung is closely related to the essential meaning of "Tathata-garba who does not live nor die, and that is a purified Buddha in Lakvatra Stra, as well as to the theory of perfect interpretation of the triple truth of Zhiyi, the founder of Consciousness-only School. These Muye and Wonyung thoughts were combined with the ensuing Hwaeom school doctrine of the sutra, and established the true theory of Wonyung-muye. While the theory of Wonyung-muye is based on the supra-ordinary world of the virtue of Buddha, it, in a realistic principle, attempts to completely convert itself from Isa-muye (the realm of principles and facts harmonized) to Sasa-muye (the realm of all facts interwoven and mutually identified). Based on the Wonyung-muye theory of Isa-seongsa (fulfilling work through reasoning), the mutual principle between the whole and individuals attempts at mutual survival and coexistence of individuals and the whole. Between the world and the supra-ordinary world, the ideal and the reality lie at the extended line of not being two and not being one. We are a fog-like being that stands on the extended point of the ideal and reality, and the world and the supra-ordinary world, and in connection with the practice of this in-depth, mysterious Wonyung-muye thought world, we are required to continuously train ourselv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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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鄭齊斗에서 沈大允에로의 근대적 전이양상

        장병한(Jang, Byeong-han) 한국양명학회 2012 陽明學 Vol.0 No.33

        18세기 초반 하곡학에서 19세기 중반 백운학에 이르는 과정에서의 한국 양명학적 정신세계는 많은 부분 질적·양적으로 轉移되고 있다. 이와 같은 전이양상들은 시대 환경의 변천에 따른 대응 방안의 차이에 기인하고 있음은 물론이다. 그렇지만 이러한 사상의 전이들이 한국 양명학의 실학적 의미와 관련한 근대적 지향성에 비추어, 어떤 의미를 가지는 지에 대한 점검은 필요하다. 하곡학에서 백운학에 이르는 전반적인 과정에서, 1) 주자의 理氣 二元論의 구도에서 一元論으로 기획되는 가운데, 형이상학에서 형이하학적 氣學으로의 전이가 이루어지고 있는 것, 2) 주자의 관념적 理에 의한 인간의 몰주체적인 기존 질서에서, 하곡학이 인간의 개인적 주체성을 天論에 근거하여 강하게 어필하면서, 이는 백운학에 이르러서는 역사의 주체로서 인간의 사회성, 대중성, 공동성이 주요하게 자리매김 되고 있는것. 3) 기존의 주자학적 질서에서의 天道로 인식되었던 聖人이 땅으로 내려와 인간과 人道의 한객체로서 자리잡게 되는 것, 4) 주자의 이분법적 도의 체용론적 구도가 깨어지고 道의 用만의 대소 범위로서 규정되고 있는 것, 5) 性卽理에 기반한 人과 物의 동등한 본성론의 가치주장에서 人과 物, 人과 人의 차이를 인정하게 되는 것, 6) 하곡학에 의해 인간의 후천적인 修道 문제가 주요하게 대두되면서, 백운학에 이르러서는 충서와 중용의 실천을 통해서만이 仁·義·禮·智 四德이 획득될 수 있음을 주장하는 것, 7) 하곡학에서 차단되었던 인간의 利에 대한 욕구 문제가 백운학에 이르러서 인간 본연의 가치로 인정되고 있는 것 등이다. 위의 경학적 전이 양상 중에서, 특히 형이하학적 氣學 대두, 인간의 주체성 강조, 대중성과 공공성의 어필, 聖人의 인간화, 仁義禮智의 덕의 후천적 획득 강조, 修道의 강조, 이분법적 체용론에서의 用만의 수용으로 전이, 인간의 利에 대한 본원적 가치 인정 등에서, 우리는 18세기 초반 하곡학의 일진보된 양명학적 가치들이 19세기 중반 백운학에 이르면서 양명학적 실학의 특성들로 구도화 되는 한편, 이는 곧 한국 근대성의 추이로 전환되는 일련의 전이 과정을 그려낼 수 있다. 물론 필자의 이러한 주장은 극히 개인적인 잠정적 결론에 의한 것임을 밝혀둔다. 그리고 특히 백운학이 利에 대한 욕구를 인간 본연의 당연한 가치로 긍정하는 가운데, 정주학도들의 虛僞적 假道學性을 비판하고 있는 것은 양명좌파적 가치에 가까운 것으로, 이는 뒤이어 백운의 저작들을 전반적으로 살펴보고 그의 경학 세계를 극찬하였던 爲堂鄭寅普(본관: 東萊, 1892~?)의 양명학적 정신세계 즉, 實心에 기초한 假道學의 비판론에 맥이 닿고 있으며, 또 백운학의 與人同利, 與衆同行에 기초한 대동사상은 국망의 일제하의 양명학자로서 양명학을 통한 대중의 통합과 사회질서를 확립하려 하며 대동교를 창설하였던 白巖 朴殷植(1859~1925)의 정신세계와 맥이 닿고 있는 점을 밝혀 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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