http://chineseinput.net/에서 pinyin(병음)방식으로 중국어를 변환할 수 있습니다.
변환된 중국어를 복사하여 사용하시면 됩니다.
李漢祥 경주대학교 경주문화연구소 2002 慶州文化硏究 Vol.5 No.-
신라고분의 편년체계를 수립하기 위해서는 개별유물에 대한 세밀한 검토작업이 필요하다는 문제의식을 가지고 6세기대 태환이식을 분석하여 보았다. 그간 무덤에서 출토된 이 시기의 태환이식은 12쌍인데, 각 이식의 제작기법에 대하여 자세히 관찰해 본 결과 비교적 간소하게 만들어진 것과 화려하게 만들어진 것으로 대별할 수 있었고, 그 속에서 다시 몇 개의 그룹으로 세분이 가능하여 이를 기준으로 단계화하여 보았으며 백제유적 출토 자료를 비교하여 절대연대를 부여해보았다 세부편년안은 다음과 같다 - 1단계(6세기 1/4분기의 이른 단계) : 경주 천마총, 경주 황남리151호분 적석목곽분, 양산 금조총 시상 하부 - 2단계(6세기1/4분기의 늦은 단계) : 경주 황남리151호분 횡구식석실분, 양산 부부총 부인시상 - 3단계(6세기 2/4분기 이른 단계): 창녕 계성A지구 1호묘 1관. 양산 금조총 시상 - 4단계(6세기 2/4분기의 늦은 단계) : 경주 노서리215번지 고분, 경주 황오리52호분, 창녕 계성Ⅱ지구 1호묘 - 5단계(6세기 3/4분기의 빠른 단계) : 경주 보문리부부총 석실분 In attempting to establish a chronology of tomb constructions in 6th century Silla, I have carried out close analysis of earrings with thick hollow rings from the 6th century. To date, 12 pairs of such earrings have been excavated from 6th century Silla tombs. By focusing on manufacturing techniques, I have chided the earrings into two groups, these being : simple earrings and complex earrings. These two groups were further subdivided into smaller groups. Through comparisons with objects from Baekje sites, it was possible to carry out a chronology of earrings with thick hollow rings from the 6th century. A summary of the chronological outline presented in the article is as follows: - First stage (6th century, early first quarter) :Cheonmachong in Gyeongju ; a wooden chamber tomb with stone mound No.151 at Hwangnm-ri in Gyeongju ; the first stone bed for dead person at Geumjochong in Yangsan. - Second stage (6th century, late first quarter) : stone chamber tomb with horizontal entrance of tomb No.151 at Hwangnam-ri in Gyeongju ; a stone bed for the dead wife from a double tomb in Yangsan - Third stage (6th century, early second quarter) :coffin 1 of tomb No.1 at Gyeoseong A area in Changnyeong; second stone bed for dead person of Geumjochong in Yangsan - Fourth stage (6th century, late second quarter) : tomb at Noseo-ri 215 in Gyeongju tomb ; No.52 at Hwango-ri in Gyeongju; tomb No.1 at Gyeoseong Ⅱarea in Changnyeong - Fifth stage (6th century, early third quarter) : stone chamber tomb of double tomb at Bomun-ri in Gyeongju
이한상 한국고고미술연구소 2000 고고학지 Vol.11 No.-
관(冠)은 경주의 대형분 출토 유물 중 가장 신라적이며, 피장자의 사회적 지위를 잘 보여준다. 그간 신라 관에 대한 개략적인 연구는 다소 이루어졌으나, 체계적이고 실증적인 연구는 부족하다. 처음에는 특이한 형태를 지닌 신라 관의 기원에 연구가 집중되었고, 1980년대 이후에는 형식 검토와 제작기법의 분석이 이루어졌다. 특히 관 자체에 대한 분석보다는 시공(時空)을 고려하지 않고 기원에만 치중하여 연구하거나, 가야관(加耶冠)으로 잘못 파악하기도 하였다. 그리고 관의 편년을 시도하면서 구체적인 근거를 제시한 경우가 드물었다. 이 글에서는 기존연구 성과를 신라관의 특징별로 논점을 정리하여 검토하고 시론적인 접근을 시도하였다. 그 결과, 신라 황금문화는 고구려나 부여 혹은 중국 동북지방의 영향으로 4세기 어느 시점부터 시작된 것으로 보았다. 재료 조달에 있어서는 초기에는 외부에서 유입된 금을 사용하다 곧 자체 금광을 개발하였던 것으로 보았다. 신라관의 구조와 부장 양상을 종합적으로 검토한 결과, 모관(帽冠)이 일상용(日常用)일 가능성이 높고, 금제(金製) 대관(帶冠)은 장송용품(葬送用品)이라고 추정하였다. 신라 관은 왕경(王京)인 경주에서 일원적으로 제작하여 경주의 왕족과 귀족이 주로 사용하였고, 지방 통제를 효율적으로 수행하기 위하여 자율적인 기반을 갖춘 지방의 수장층(首長層)에게 하사하였던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