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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집과 같은 노인시설주거 디자인 특성에 관한 연구(Ⅲ) : 중년층의 선호하는 주택과 노후 주택의 물리적 특성을 중심으로
신영숙 대한가정학회 2002 Family and Environment Research Vol.40 No.9
The purpose of this study is to identify the homelike design characteristics of elderly housing facility. To investigate what preference of physical design characteristics are, interview was done by unstructured questionnaire to 30 middle aged and middle income group housewives living in Seoul. It was identified that preferred homelike physical characteristics of the houses were composed of 4 themes, housing types, building appearences and garden, floor plan and natural and social environments of its location. Their desirable housing standard was amenity which is the highest level of home environment. In their later life, they wanted to live in vicinity of Seoul to enjoy cultural benefits of the city and active outdoor activities in sunny, natural suburban environment. They liked a spacious, clean and bright color with natural material furnishings. Each architectural design expression of 4 themes was suggested.
신영숙,유해정,김미정 서울여자대학교 여성연구소 2002 여성연구논총 Vol.17 No.-
한국정신대연구소의 지난 2002년 10월 13-24일, 중국 하이난성(해남도)의 일본군 성노예피해자 실태 조사는 해구, 삼아시 등 거의 해남도 전역에 걸쳐 실시되었다. 이 조사는 현지의 하이난성 정치협상회의는 물론, 해구, 삼아시 등 주요 십 여 개 현을 비롯한 시, 진, 촌의 정협 문사자료연구위원들이 함께 당시의 일본군 주둔지와 위안소 등지를 답사하고, 성노예 피해자와 관련자들을 만나는 등 심층 조사로 이루어졌다. 즉 현지의 소수민족인 여족, 묘족 피해 여성 4명과 당시 목격자를 포함한 현지 연구자 등 수 십 명을 만나 증언을 청취하였다. 그러나 안타까웠던 점은 이미 별세한 한국인 피해자 박래순씨의 묘소와 그가 살던 집, 친구들만 만나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97년 중국 조사에 의하면 하이난성의 1939-1945, 피해 상황은 당시 총 인구의 5분의 1에 해당하는 40만명이 사망하였고, 위안소 67개에 성노예 약 1만명이 있었다. 그 중에는 한족과 현지의 소수 민족(여족, 묘족), 특히 조선인을 비롯한 외국인 여성이 다수였다. 즉 해구에 6개소, 삼아의 11개소 등 성노예 수 백명은 모두 주변에서 정기적으로 여성을 강제 동원되었거나 외국 여성 즉 일본, 한국, 대만, 필리핀, 홍콩, 싱가포르 등지에서 끌려온 사람들이었다. 그 중 한국에 귀국한 피해 여성은 현재 3명이 밝혀져 있으나 그 중 1명은 이미 별세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증언자들은 한결같이 한국인 여성이 많았다고 하였으나 현지에 남아 있는 생존자는 찾기 어려웠다. 우리 조사의 두 번째 목적이었던 일본군과 기업의 가해구조의 실상을 밝히는 작업은 비교적 성공적이었다. 즉 해남도에서 일본군과 기업이 긴밀한 연계 아래 철광석 등 자원과 노동력을 수탈하고, 여성을 성노예로 유린한 것은 이미 잘 알려진 바이다. 대표적인 예로 위안부의 징집도 대만의 척식주식회사를 통해 시작되었다. 대척은 대만총독부의 의뢰를 받아 위안소의 건설뿐만 아니라 위안부의 징집과 송출에도 깊게 관여하였다. 이번 조사에서 군부대와 비행장, 광산 등 기업과 그 시설물, 그리고 위안소는 한 곳에 모여 있었고, 그 이용조차 군인, 군속을 위한 군대위안부와 기업위안부의 구분이 명확하지 않을 만큼 밀접한 연관 관계를 갖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었다. 종전 후 해남도에서 계속 살았던 유일한 피해자 고 박래순씨는 호적상 1916년생으로 18세에 한국을 떠나 중국을 거쳐 1942년 26세에 이곳으로 왔다고 한다. 이후 내내 해남도를 떠돌다, 보정현 공로국에서 일하다 퇴직 후 2년 정도의 투병 생활 끝에 1995년 7월 별세하였다. 지금까지 묘소를 돌봐주는 할머니의 친구 등을 만나 감사를 드렸다. 박씨의 국적은 「남조선」으로 외국인 거류증을 가지고 살았다고 한다. 해남도에서 50년 이상 살았어도 그의 조국은 언제나 한국이었고, 그는 한국인으로 살았던 것이다. 현재 마산에 살고 있는 유족으로 큰 조카 며느리와 박씨 집안의 장손을 확인하여 할머니의 소식을 전하였다. 한편 중국의 한족 여성들은 아직도 자신을 잘 드러내지 않고 있고, 현지 묘족, 여족 피해자 4명을 만날 수 있었다. 이들의 피해는 어느 곳 여성보다 더 참담했다. 즉 그들은 주로 '전지후근복무대(후방 여성의 근로정신대와 흡사한 의미를 갖는다)'로 '쾌락원', 쾌락방, 낙원 등의 이름으로 불린 위안소(주로 민가 접수, 또는 겨우 야자수 정도로 설치)에서 아주 손쉽게 성노예로 쓰였던 것이다. 일본은 전쟁 말기에 현지 여성을 성노예로 이용하는 일을 노골적으로 행하였고, 이들은 부모와 자신의 생명을 담보로 그같은 상상도 할 수 없는 만행에 희생될 수밖에 없었다. 이들 중 몇 명은 현재 일본 도쿄지방재판소에 일본 국가(대표, 법무대신)를 상대로 전시여성인권 범죄, 즉 자신들이 당한 인권 유린과 트라우마에 대한 일본 국가의 사과와 배상을 청구하는 세계 최초의 소송을 제기하고 있다. 이름하여 「해남도 사죄문 교부 등 청구사건, 돌려달라 나의 명예와 존엄을!!」 소송이 2000년 7월부터 진행 중에 있다. 끝으로 조선보국대 등 강제 징용자의 대표적 학살지, 「조선촌」과 여러 곳의 만인갱을 답사하였다. 문제는 이들의 유골도, 유족도 확인되지 않은 채 구천을 떠도는 조선혼이 해남도의 조선촌, 팔소, 구소, 황류 등 도처에 존재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에 대한 한국 정부나 한국인의 관심은 화려한 관광지 해남도, 골프장이나 신혼 여행지로서의 해남도의 그늘에 영원히 가려 살아날 수 없는 것인지, 역사의 진실과 그 의미를 새삼스레 새겨보게 된다. 나아가 이번 조사가 한중일 3개국이 연대하여 실시됨으로써 앞으로 이 문제에 대한 더욱 깊은 관심과 조사, 연구가 계속하여 심층적으로 이뤄지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