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榮山江 流域 前方後圓墳을 통해 본 5~6세기 韓半島와 日本列島
박천수 충남대학교 백제연구소 2006 百濟硏究 Vol.43 No.-
古代 韓日關係史의 爭点으로 浮上된 榮山江流域 前方後圓墳 被葬者는 周邊의 在地 首長 系列과 전혀 關係없이 突然하게 出現하는 過程과 그 독특한 墓制로 볼 때, 在地首長으로 볼 수 없고 日本列島 출신의 倭人이라 할 수 있다. 그 被葬者는 九州北部에 분포하는 榮山江流域의 石室 類型과 海南郡 造山古墳에서 確認된 南島産 貝釧의 분포, 榮山江流域産 土器와 母 集團 고분에 副葬된 百濟 文物로 볼 때, 九州北部에서 有明海 沿岸地域에 걸친 複數의 有力豪族으로 파악된다. 榮山江流域 前方後圓墳 被葬者는 前方後圓墳이 百濟 熊津期의 後半에 限定되어 築造된 점, 의도적으로 分散되어 配置된 점, 百濟의 威信財가 副葬된 점 등에서 獨立的으로 割據한 것으로 볼 수 없고, 土着勢力의 牽制와 對倭 外交 및 對 大伽耶攻略을 위해 百濟 중앙에서 一時的으로 이 지역에 派遣된 倭系 百濟官人으로 본다. 百濟가 榮山江流域에 倭人을 派遣한 것은 漢城 陷落에 의해 一時的으로 統治 機構가 瓦解된 百濟가 熊津 遷都 직후 自力으로 南方을 統治할 수 있는 力量이 不足했기 때문이다. 4세기 후반 이래 교섭을 계속해 온 백제의 문물이 6世紀前葉이 되어서야 加耶地域의 文物을 교체하듯이 日本列島에 돌연 流入되는 것은 百濟문물의 先進性, 남해안의 교통의 要衝의 장악과 함께 遠洋 航海者인 有明海沿岸과 玄海灘沿岸의 豪族 勢力, 즉 榮山江流域의 前方後圓墳 被葬者들을 媒介로 加耶地域에 대한 相對的인 交通의 不利를 克服한 結果로 본다.이 시기 九州 勢力의 突然한 興起는 榮山江流域 前方後圓墳을 造營한 九州의 有力豪族이 百濟 王權에 臣屬하면서 百濟와 倭의 外交에 活躍하며, 그 先進 文物을 出身 集團과 日本列島 각지에 提供하고 그 대가로 軍事力을 지원받는 窓口의 役割을 배경으로 한다. 榮山江流域의 前方後圓墳은 이른바 「任那日本府」가 成立하고 發展하였다는 4世紀 後半부터 5世紀代에는 조영되지 않고 소멸해 가는 時期와 해당 地域에서 百濟 王權과 關聯하여 出現하였다는 점으로 미루어, 「任那日本府」와는 어떠한 關聯도 想定되지 않고 逆으로 그 存在를 否定하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