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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日本의 中國占領地 阿片政策의 諸樣相; 中日戰爭期를 중심으로>

        박강 釜山外國語大學校 1998 外大論叢 Vol.18 No.3

        日本在中國占領區所實行的鴉片政策是根據中日戰爭爆發之前在日本植民地所實行的鴉片消費地和生産地分離結構而模倣的. 卽把各占領區分成生産地, 生産消費地和消費地而實行的鴉片政策. 中日戰爭之前蒙疆地區不僅是鴉片的消費和通過地區戰略上也是重要地區, 因而日本爲了解決僞蒙疆政權的財源不足問題而被重視成鴉片生産地 華北占領區雖然是主要鴉片消費地, 可是在華北的日本統治力量不穩定而無可奈何在華北叉採用消費地和生産地的分離結構. 因華北占領區所需要的鴉片消費量太多, 不得己讓華北的一定地區內生産鴉片了. 華中占領區雖然興華北占領區相似, 而在這地區內不生産鴉片是興英美化國際社會(흔)有關. 卽這地區過去以來因英美的利益非常多的關係, 不得己抛棄生産鴉片而採用消費爲主的鴉片政策 總之在中日戰爭時期日本爲了確保財源而在中國占領區所旅行的鴉片政策是在當地日本統治力量的不穩定和國際社會的批判等變數所反映出來的. 在這鴉片政策所獲得的鴉片收入不僅有志日本的中國占領區也在日本的侵略戰爭中做了一定的作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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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조선의 지방 의료체계와 모르핀 오남용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20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104

        Among the social problems of colonial Joseon in the 1920s, the spread of morphine was at a serious stage. Various causes were mixed and worked to lead to the spread of morphine to a serious social problem. Among them, it is worth paying attention to the medical system of Joseon and the role of medical personnel. Until now, studies on the morphine problem in colonial Joseon have been mostly approached through Japanese policy. It has been studied in relation to Japan's overall opium drug policy or in relation to the Joseon Government-General's morphine countermeasures. The government-general cited individual sexual pursuit as the internal cause of Joseon. They thought that was the main cause of spreading morphine. Therefore, the Government-General emphasized that public opinion and social sanctions should be imposed rather than enacting laws. However, at the time, the media, including the Dong-A Ilbo, and intellectuals and civic groups had different opinions from the Government-General. They pointed out the lack of legislation and the lack of crackdown by police authorities, and paid more attention to the abuse of morphine injections by medical personnel. There is already some research results on the lack of legislation and the lack of crackdown by the police authorities. On the other hand, no specific research has been done on the misuse of morphine by medical personnel. Therefore, this paper attempts to examine the problem of morphine in colonial Joseon through the poor medical system in the region and the abuse of morphine by medical personnel. In short, Japan professed to spread the advanced medical system centered on Western medicine while colonizing Joseon. However, the local medical system in the 1920s was still insufficient. Rather, it has resulted in providing an environment that allows some insensitive medical personnels to spread morphine without hesitation. There was still a misconception about the efficacy of morphine, and the local medical system was inadequate. Unconscious medical personnel could easily fall into the temptation of morphine abuse. In addition, the government's light penalties for morphine and the lack of crackdown have also encouraged morphine abuse. Morphine abuse by not a few local medical personnel served as one of the main causes of morphine spread in the 1920s, and added social severity. 1920년대 식민지 조선의 사회문제 가운데 모르핀의 확산은 심각한 단계였다. 모르핀의 확산이 심각한 사회문제에 이르는데 여러 가지 원인들이 혼재되어 작용하였다. 그중 조선의 의료체계와 의료인들의 역할에 주목할 필요가 있다. 조선 내부의 원인으로 조선총독부는 당초 개인의 성적 추구를 모르핀 확산의 주요 원인으로 여기고 그 대책으로 법 제정보다는 여론 또는 사회적 제재를 강조하였다. 그러나 당시 동아일보 등 언론과 지식인, 시민단체 등에서는 개인의 성적 추구보다는 법 제정의 미비, 경찰 당국의 단속 부족과 더불어 의료인들의 모르핀 주사 오남용 등에 더 주목하였다. 조선총독부의 법 제정 미비와 경찰 당국의 단속 부족에 대해서는 이미 일정한 연구 성과가 있다. 반면 의료인들의 모르핀 오남용과 관련해서는 아직까지 구체적인 연구가 이루어지지 않았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식민지 조선의 모르핀 문제를 지방의 열악한 의료체계와 의료인들의 모르핀 오남용 문제를 통해 살펴보고자 하였다.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대외적 정당성 확보를 위해 서양의학 중심의 선진 의료체계의 보급을 내세웠다. 그러나 20년이 지난 시점에도 지방의 의료체계는 매우 열악하였다. 1910년대 조선총독부가 지방에 시행한 의료정책으로 13개 도에 慈惠醫院이 설치되었고 보완책으로 公醫제도가 마련되었다. 그럼에도 의료혜택은 여전히 도청소재지 등 일부 지역에 한정되어 있었다. 1925년에는 일본 정부의 재정 긴축의 영향으로 자혜의원이 道立醫院으로 변경되고 경영방식 또한 진료비에 의존하는 방식으로 전환되면서 시료환자 비율이 대폭 감소되었다. 곤궁한 지방민의 의료혜택은 더욱 저조할 수밖에 없었다. 의료 소외지역을 위해 마련된 공의제도 역시 당초의 목적을 달성하지 못하였다. 농촌의 경우는 의료 환경이 더욱 열악하여 한의사인 의생의 역할이 압도적이었으며, 지방 벽촌의 경우에는 의생의 혜택도 쉽지 않았다. 이러한 의료 현실 속에서 1920년대에 모르핀이 전국적으로 확산되어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하였다. 모르핀의 확산에는 부도덕한 의료인들의 모르핀 오남용이라는 문제가 작용하고 있었다. 의료인들의 오남용이 빈발한 데에는 지방의 열악한 의료 현실이라는 환경이 있었다. 우선 개항 이래 지금까지 모르핀이 질병 치료에 효과가 있다고 믿는 사람들이 여전히 존재하였다. 이로 인해 의료인의 모르핀 주사 오남용이 쉽게 이루어졌다. 또한 1920년대 조선의 의료체계는 미비했고 의료인 수는 매우 부족한 상황이었다. 여기에 본연의 사명을 망각한 채 돈벌이 수단으로 활용한 몰지각한 의료인들이 적지 않았다는 점이다. 이들 의료인에 의해 돈 없는 환자는 치료를 거부당하기 일쑤였고 돈 있는 환자는 모르핀 만성 중독에 빠져 가산을 탕진하게 되었다. 여기에 이 시기 모르핀과 관련한 처벌규정이 가벼웠다는 점은 의료인들의 몰상식한 행위가 도를 넘게 하였다. 모르핀을 오남용하는 행위에 두려움을 갖지 않았다는 것이다. 조선의 미비한 지방 의료체계를 보완하기 위해 조선총독부에서는 공의와 의생을 파견하였지만 이들 역시 처벌을 두려워하지 않으면서 모르핀이 오남용 되는데 일조하였다. 요컨대 일본은 조선을 식민지화하면서 서양의학 중심의 선진 의료체계의 보급을 공언하였지만 1920년대 지방의 의료체계는 여전히 미비하였고 오히려 일부 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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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개항기(1876~1910) 조선의 아편확산과 청국 상인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4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0

        During more than a century after Opium War the opium raised a serious problem in chinese society. Over chinese border opium had an evil influence on neighboring Joseon. In Joseon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began as soon as ports were opened. Especially chinese merchants related to the inflow and spread of opium from 1882 upward, when economic relations and trade between the two countries were active. Throughout the nineteenth century China was having a serious social problem caused by opium. The two country, Joseon and Qing, maintained the close exchange each other and were border countries. So there was hige probability of opium's inflow into Joseon by China. After opening port the opium problem of Joseon reached a serious standard by interchange between two countries, Joseon and Qing, though the government of Joseon took warning. At first glance, it was expected that the serious situation of opium spread occurred by illegal activities of chinese merchants taking advantage of consular jurisdiction when they gained through regulations for maritime and overland trade between Chinese and Korean subjects in 1882. Actually the curse of opium occurred after the Sino­Japanese War. Especially after treaty for commerce between Korea and Qing in 1899 as bilateral consular jurisdiction was maintained and a lot of chinese people such as small merchants and coolies moved to Joseon, most of them engaged in illegal activities referring to opium. As a result around 1910 opium spreaded across the nation. the main culprit of opium diffusion was chinese merchants. With this negative recognition on chinese people was stamped on korean. That affected the exclusion of overseas chinese in japanese colonial era. 아편전쟁 전후 이래 100여 년 동안 중국사회에 심각한 사회문제를 야기했던 아편문제는 비단 중국만의 문제에 그치지 않고 이웃한 조선에도 영향을 미쳤다. 조선의 아편유입과 확산은 조선이 개항되면서 시작되었으며, 특히 1882년 이후 활발해진 청국과의 경제교류 속에서 청국 상인과 관련이 깊었다. 그러나 지금까지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련성을 심도 있게 다룬 연구는 거의 없다. 따라서 본 논문에서는 조선의 아편유입 및 확산과 청국 상인과의 관계에 대해 중점적으로 살펴보았다. 동아시아 최대 강국인 청조가 영국과의 아편전쟁에서 패하였음에도 불구하고 조선정부는 외세의 침략보다는 아편의 유입을 더 경계하였다. 조선정부는 연행사절을 통해 아편전쟁 전후 이래 중국의 아편문제와 아편전쟁에 관한 소식을 전해 듣고 있었다. 청조가 1,2차 아편전쟁에서 패한 사실에 대해 조선정부는 당초 위기감을 가지기도 하였으나 정보를 자의적으로 해석하고 위기의식을 가급적 축소하여 감추고자 하면서 위기의식은 점차 완화되었다. 그러나 아편문제에 대해서는 경계심을 늦추지 않았다. 청조와 국경을 접한 조선에 영향을 미칠 것에 대해 크게 우려하였다. 이에 따라 아편전쟁 이후는 물론 1876년 이래 조선정부는 각국과의 개항 과정에서도 아편의 유입 및 판매를 차단하기 위해 노력하였다. 그러나 1882년 조선정부와 청정부 간에 조청무역장정이 체결되고, 이어서 1899년 대한제국과 청정부 간에 한청통상조약이 체결되면서 아편의 유입 및 판매가 우려되었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당시 이미 중국에서는 아편이 합법화되어 사회적으로 심각한 상황에 놓여 있었다. 뿐만 아니라 당시 일반 중국인들은 아편의 해독에 대한 정확한 인식이 결여되어 있었다. 이러한 상황에서 조청무역장정을 통해 청국 상인들이 개항장은 물론 한성에서 거주하게 되었고 내지에서의 상업활동이 이루어졌으며, 조선의 북부 국경지대인 의주와 회령에서도 수시로 교역이 가능해졌다. 이로써 아편의 유입 및 판매 가능성이 높아지게 되었다. 더욱이 중국인과 관련된 사건에서 원피고 여부를 불문하고 단독 혹은 공동으로 영사재판권을 행사할 수 있게 되어 아편범죄가 더욱 우려되었다. 아울러 청일전쟁 이후 1899년에 대한제국과 청정부 사이에 체결된 한청통상조약이 비록 불평등성이 완화된 조약이었지만 쌍무적인 영사재판권이 그대로 존속되면서 청국 상인들의 불법을 차단하기에는 한계가 있었다. 조청무역장정의 우려와는 달리 청일전쟁 이전 청국 상인들을 통한 조선으로의 아편유입 및 판매는 의외로 심각하게 드러나지 않았다. 조청무역장정 체결 이후 한성과 개항장에 들어온 청국 상인들은 청정부나 조선정부로부터 공식적인 허가를 받고 들어온 사람들로 대체로 정상적인 상업활동에 종사하던 유력 상인들이 많았기 때문이다. 청일전쟁 이전까지 조선의 언론 등에서도 청국 상인에 의한 아편유입 및 판매와 관련된 기사 역시 찾아보기 힘들다. 그렇지만 당시 조선에서의 청국의 위세 등을 감안해 볼 때 청일전쟁 이전 조선의 언론 등에서 청국 상인들의 아편 관련 기사가 없다고 해서 조선에서 청국인의 아편문제가 없었다고 볼 수는 없다. 청일전쟁 직후 여러 언론과 재판문서 등에 청국 상인들의 아편판매 폐단에 관한 내용들이 제기되는 것을 보면 더욱이 그렇다. 청일전쟁에서 청조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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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만주국'의 아편마약 밀매대책과 재만 한인

        박강 한중인문학회 2006 한중인문학연구 Vol.19 No.-

        만주국 수립이전부터 만주지역의 주요 도시에는 아편마약의 밀거래와 아편 연관업에 종사하는 한인들이 있었다. 이들 한인들은 외국인으로서 일본, 러시아인과 함께 아편마약 밀매로 주목을 받았다. 재만 한인의 아편마약업 종사는 이중국적에 따른 불안정한 법적지위와 생계유지문제, 그리고 일본 영사관의 암묵적인 묵시 내지 지지와 관련이 깊었다. 전체 만주거주 한인의 수와 비교해 보면 수적으로는 소수이지만 그들의 활동이 일본의 주구로 비춰져 만주 지역의 중국인과 중국당국의 비난을 감수해야 했다. 만주국 수립 이전 일본정부의 암묵적인 묵인과 지지 하에 아편과 마약밀매 등에 종사했던 재만 한인들은 만주국 수립 이후 어떤 상황에 처하게 되었을까? 즉 만주국의 건국으로 일본의 한인에 대한 태도나 인식이 그 전과 다른 상황에서 재만 한인 아편마약 밀매업자들에게 어떤 변화가 일어났을까? 만주국 수립 전후 만주의 도시지역을 중심으로 아편마약업에 종사했던 한인들은 만주국 아편전매제도의 확립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이용되었다가 배제되는 운명을 겪었다. 일본의 만주침략 과정에서 만주침략의 도구로 이용되었던 아편마약 밀매업 종사 한인들은 만주국 수립 이후 전매아편의 조속한 확립과 밀매의 단속 과정에서 일시적으로 필요에 의해 다시 이용되었다. 그러나 중일전쟁 발발 이후 완전한 전매제 시행에 따라 아편업에 종사한 한인들은 다시 배제될 수밖에 없었다. 결국 일본의 만주침략 과정에서 한인들이 침략의 도구로 이용되었듯이 만주국의 아편전매 과정에서도 역시 비슷한 전철을 겪었다고 하겠다. Since former times before establishment of Manchukuo there were the Koreans engaged in illicit drug trafficking and management of opium den in the main cities of Manchuria. These Koreans as foreigner were recognized as illicit drug trafficking with Japanes and Russians. Before establishment of manchukuo the Korean residents were engaged in illicit sale of opium and narcotics with the convivance of Japanese government. After establishment of Manchukuo. After establishment of Manchuguo what condition were they placed in? In the process of establishing opium monopoly the Koreans engaged in illicite sale of drug in the main cities of Manchuia were utilized temporary. Soon they were faced with being excluded. Japan used them as the tools of invasion in china. And after establishment of Manchuguo for the purpose of easy keeping opium monopoly on stalilty japan used them again. But occurring the Sino-Japanese War(1937-45), carrying out whole opium monopoly, the Koreans engaged in sale of opium completely were excluded. Finally as they were used as the tools of invasion, the Koreans took the same neckless course in the process of opium monopoly in manchur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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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년대 마적과 한인, 그리고 아편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16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88

        Looking at the historical records about bandits and immigration Koreans of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of Siveria in the 1920's, we can see that they were partly related to each other. Bandits worked in the border area or the surrounding area. So did immigration Koreans. For bandits opium money from the main income could not be ignored. The recordings about immigration Koreans in the border commented on the opium. In the 1920's immigration Koreans of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of Siveria or the border were able to avoid exploitation of Japanese that they had suffered in the country. But on the ground, another type of difficulties were waiting. In the 1920s, China was in an era of warlord rule. At that time mounted bandits were rampant in Manchuria and the maritime province of Siveria. The border region many Koreans moved to and activitis area of bandits were the same area. The main income of bandits was opium money. Some poverty-stricken of immigration Koreans was involved in opium cultivation. So through opium, bandits and immigration Koreans were linked regardless of their will. Avoiding suppression by the army, the bandits were after Opium money that can be gained easily. Some of the immigration Koreans grew opium for a living because they were destitute situation. This was the situations they shared. 1920년대 만주 및 연해주지역의 마적과 이 지역 이주 한인 관련 사료들을 살펴보면 일부 연관되는 부분들이 눈에 들어온다. 마적이나 이주 한인들 가운데는 대체로 국경지역 또는 그 인근지역에서 마적활동을 행하거나 이주하여 생활하는 경우가 많았다. 또한 국경지역 마적의 주요 수입으로 아편수입을 무시할 수 없었는데 이 지역 한인 관련 사료에서도 아편 관련 언급들이 눈에 띤다. 1920년대 마적과 한인, 그리고 아편은 상호 어떤 연관성이 있었던 것일까? 본 논문은 위와 같은 의문점에서 출발하여 1920년대 국경지역 또는 변경지역에서 활동한 마적과 이주 한인과의 관계, 그 속에서 아편은 어떠한 관련성이 있었는지 등을 고찰해 보고자 하였다. 중국 근대사에 있어서 만주하면 빼놓을 수 없는 문제 가운데 하나가 마적이다. 마적의 활동은 군벌통치시기의 잦은 전란과 변경지구의 불안정한 생활조건과 관련이 있었다. 1920년대 만주지역은 장쭤린 동북군벌이 북경으로 입성함에 따라 군벌 간의 전쟁에 얽히게 되었고 이로 인한 재정적 곤란도 야기되었다. 이러한 만주의 정치적 공백은 마적이 창궐할 수 있는 공간을 제공하였다. 아울러 만주에는 식민지 조선과 러시아간 국경을 이루는 변경지역이 있었고 이에 인접한 산맥 등이 있었다. 이러한 지리조건은 마적이 활동하거나 은거하기에 유리한 장소를 제공하였다. 특히 길림성은 이러한 조건에 가장 부합되는 곳이었고 마적의 활동도 가장 왕성하였다. 마적의 횡행과 증가에 대해 동북군벌정권은 여러 가지 대책을 강구하였지만 해결이 쉽지 않았다. 만주에서 횡행했던 마적들이 그 집단을 유지할 수 있었던 것은 일정 수입원이 확보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치적 기타 특별한 목적이 없는 마적에게 있어 주요 수입 활동의 하나는 인질 납치를 통한 금품 강탈이었다. 또 다른 수입원은 촌락이나 현성, 대도시의 습격을 통한 재물 강탈이었다. 특히 현성이나 대도시에 대한 습격은 위험성이 매우 높았기 때문에 다양한 전술이 요구되었다. 마적의 수입원과 관련해서 불가분에 관계에 있는 또 다른 것으로 아편수입을 들 수 있다. 아편수입은 길림, 흑룡강 일대에 발호하는 마적과 그 관계가 매우 긴밀하였다. 언론이나 사료에서는 만주 변경지역에 이주한 한인과의 관련성도 시사하였다. 사실 식민지 조선이나 러시아 연해주와 인접한 만주 일대의 변경지역은 마적의 활동이 활발한 지역이었을 뿐 아니라 아편의 재배와 한인의 이주도 활발한 지역이었다. 국내 언론기사와 일본 외무성의 사료를 통해 볼 때, 마적과 한인 그리고 아편 재배의 관련성은 무시하기 어렵다. 1924년의 통계를 보면 한인의 만주 이주 인구는 길림성이 약 38만 명으로 가장 많았으며 두만강 대안인 간도에 집중해 있었다. 그 다음이 봉천성으로, 약 17만 명이 압록강 대안에 많이 거주하였다. 길림성 동부지역과 접한 연해주에도 약 15만 명의 한인이 이주하여 거주하고 있었다. 언론 보도를 통해 볼 때 마적들은 두만강과 압록강 대안의 변경지역을 중심으로 약탈을 일삼았다. 압록강 대안에서는 집안, 두만강 대안에서는 간도, 그리고 연해주에 대한 피해가 컸다. 변경 일대에 대한 마적의 피해는 중국인과 함께 이들 지역에 이주한 한인들의 피해 역시 적지 않았다. 언론 보도를 통해 볼 때 이들 변경지역 일대에서 활동한 마적들은 대체로 아편수입과 관련이 깊었으며 한인들의 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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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菊地酉治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

        박강 한국민족운동사학회 2009 한국민족운동사연구 Vol.0 No.60

        Yuchi Kikuchi was a Japanese expert on opium in 1920s and 30s. Unlike most researchers he was a distinctive figure in that he himself was an onetime addict, and that he was involved in drug trafficking while he was in China. His experiences had an influence on his understanding and activities of opium problem. Researches on Japanese policy on drugs have been concentrated on the necessity and the goal of the policy in the colonies. But now, it is necessary to have an approach to the Japanese opium problem from the perspectives of political history and institutional history. Understanding of Japanese opium expert and his activities in the period of Japan’s promotion of opium in its colonies will contribute to enrich our perspective on Japanese opium policy. Examining this matter from a Japanese civil viewpoint, and also from an addict and drug dealer’s viewpoint will contribute to a new and better understanding of Japan’s opium policy. For the purpose of researching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above all things his life and relief activities for opium addicts were scanned on this paper. And then through Yuchi Kikuchi’s talks and contributions, at one time he was opium addict and dealer, it was revealed what he thought about Japan’s opium policy. finally the distinction and limit of Yuchi Kikuchi’s thinking were pointed out. This paper on Yuchi Kikuchi’s understanding and relief activities of opium problem is significant in that it focuses on the opium policy in the civil level. Previous research mostly viewed the problem in the level of policy makers. Yuchi Kikuchi’s critical position with regard to Japanese colonies reveals the reality of Japan’s opium policy. He specifically points out the problems of Japan’s opium policy. His understanding of the opium problem and relief activities were distinct from those of government and policy makers. 이 논문은 기쿠치 유지(菊地酉治)라는 일본의 아편마약 문제 전문가의 인식과 구제활동을 살펴보았다. 러일전쟁 이후 중국으로 건너간 기쿠치 유지는 중국에 거주하면서 아편중독에 빠지고 모르핀을 판매한 경력도 있어 누구보다 아편과 마약의 해독에 대해 잘 이해하고 있었다. 또한 일본인의 아편마약 판매가 일본의 대중국 관계에도 얼마나 악영향을 미치는지에 대해서도 잘 알고 있었다. 이에 그는 예방과 치료의 절실함을 깨닫고 日本基督敎聯盟과 외무성 산하의 國際聯盟協會와 연계하여 연구와 구제활동에 노력하였지만 변화하는 일본의 대외관계 속에서 한 개인의 노력만으로는 한계가 있었다. 다양한 경험을 가진 기쿠치는 일본의 식민지 등에 대한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서도 비판적인 견해를 갖고 있었다. 대만의 경우 30년 동안 점금주의 아편 전매제도를 시행했으면서도 성과가 의심되며 관동주의 경우 오히려 안전한 아편 흡연지로서 인식되었다고 하였다. 그리고 두 지역 모두 아편전매를 통해 막대한 수입을 누려왔음을 지적하였다. 식민지 조선의 경우 아편이나 마약 모두 밀매가 성행하고 있지만 마약문제에 대해서는 단속법규와 노력이 부족하여 심각한 상황을 야기하였다고 보았다. 또한 일본의 상인들은 식민지 외에 중국 각지에서도 아편과 마약을 밀매하였는데 근본 원인에 대해 일본정부(외무성과 내무성)의 단속 불이행과 일본의 경제인 및 아편 상인들의 이윤추구에 기인하였다고 하였다. 이와 같이 기쿠치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에 대해 동시대 일본인에 비해 남다른 인식을 갖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당시 일본의 중요 지위에 있는 인사들 대부분이 아편마약 문제와 관련하여 국가 이익을 우선시한 데 비해 그는 오히려 사회적ㆍ인도적 문제를 강조하여 중독자의 구제대상을 일본 내 중독자는 물론 중국을 포함한 일본의 전 식민지의 중독자를 포함시켜야한다고 주장하였다. 이같은 주장은 인도적인 차원은 물론 현실적으로도 일본에게 매우 중요하였다. 당시 아편마약 문제의 폐해는 중국이나 일본 식민지만의 문제가 아니라 인구이동으로 인해 일본 내부에도 확산되고 있었기 때문이다. 또한 일본인들의 중국 내 아편마약 판매는 중국인들의 극심한 반일감정을 야기시켜 중일관계의 악화는 물론 군사적 충돌의 근본적인 원인이 되었음을 지적하였다. 한편 중독자 구제를 위한 해결방법에 있어서도 그는 민과의 연계는 물론 식민지 각지에도 민간단체를 조직케 하여 적극 활용할 것을 주장하였다. 기쿠치 유지의 아편마약 문제에 대한 인식과 구제활동에 대한 본 연구는 일본의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과 문제점들이 기존에 정책 추진자의 시각 중심이었다는 것에 반해 민간 차원의 시각이 어떠하였는가를 살펴볼 수 있다는데 의미가 있다. 기쿠치 유지의 일본 식민지 등에 대한 비판적 견해는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실상을 드러내는 것이었으며, 그의 남다른 인식은 일본 아편마약 정책의 문제점들을 구체적으로 지적하고 있었다. 일부 인식의 한계에도 불구하고 기쿠치 유지의 인식과 구제활동은 정책 추진자들의 시각과의 차별성이 있었음은 물론이고 당시 민간 차원의 시각에서도 독보적인 면을 보유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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