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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후보

        조선시대 고지도에 나타나는 고대 도시 흔적에 관하여

        도도로키 히로시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18 한국고지도연구 Vol.10 No.2

        조선시대와 일제 강점기 고지도를 사용하여 고대 경관 복원의 실마리를 찾는 시도의 한 사례로서, 고지도에 나타난 신라 9주5소경 관련 정보 분석을 나성, 가로구획, 지명 등 세 가지 시각에서 검토를 하였다. 그 결과 이하와 같은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첫째, 축조시기를 고대로 소급할 수 있는 도시 나성의 존재를 일부 도시에서 고지도나 지리지를 통해 확인이 되는데, 그 대부분은 해당 도시의 상징적인 역사(수로왕의 성, 유인궤성, 예국고성, 무진도독고성 등)와 연계시켜 인식되어 있다. 둘째, 중/근세 읍성은 고대 나성보다 보통 규모가 훨씬 작고, 관아 등 공공시설의 방어 위주로 설계되었다. 발굴조사를 통해 대부분 도시에서 관아 터 자체는 크게 이동하지 않았던 가능성이 높아서, 결국 고대도시의 관아 주변 부분만을 둘러치고 읍성을 다시 만들었을 것이다. 셋째, 일부 고지도에서는 신라시대로부터 내려왔을 가능성이 있는 읍내 지명들을 확인할 수 있는데, 그것이 고대 방리 구획과 이에 상응한 행정구역을 복원하는 실마리가 될 가능성이 제기되었다.

      • KCI등재후보

        전국지리지에 나타난 제주도 위상 : 신경준의 산천도리(山川道里) 인식을 사례로

        도도로키 히로시(Todoroki Hiroshi) 제주학회 2021 濟州島硏究 Vol.56 No.-

        본 연구는 조선 영조대의 실학자인 신경준의 지리서들을 사례로, 조선시대 전국지리 지에 묘사된 제주도의 위상에 대하여, 특히 산줄기와 도로를 중심으로 살펴 본 것이다. 신경준이 『산수고』를 쓰면서, 제주 한라산을 마주 보는 해남 땅끝 부근의 달마산으로 가는 산줄기는 호남지방의 줄기들 중 백두대간 다음에 제일 중요하게 여겨졌다. 그러나 『산수고』가 보다 수경(물줄기)과의 대응관계를 중요시하는 『산경표』로 이식되는 과정에서, 호남정맥의 주된 줄기는 섬진강을 사이에 끼고 지리산과 대치되는 광양 백운산으로 가는 줄기로 변경되면서, 한라산으로 가는 줄기는 그 분기선으로 강등되었다. 도로 역시 『도로고』가 쓰여졌을 때는 제주로 가는 노선은 전국 6대로 중 하나였는 데, 『도리표』로 이식되면서 통영으로 가는 노선에서 분기하는 대로가 되고, 후대에 김정호 『대동지지』에서는 아예 대로도 아닌, 해남 우수영으로 가는 대로의 분기선으로 전락되었다. 한편 제주도내 도로 체계는 연안부를 일주하는 연포대로와, 제주 방영과 대정 정의 양 읍치를 직결하는 산록경로를 합하여, 제주목을 중심으로 네 개 방향으로 방사상 도로가 나가는, 육지 교통로의 축소판과 같은 체계가 만들어졌으며, 그것이 현재까지 이어지는 도내 도로체계의 뼈대가 되었다. This study analyzed how a Silhak scholar Sin Gyeong-jun of the Joseon Dynasty dealt with Jeju Island. First, in his Sansugo , he described the main watershed line in the Honam region to be connected to Mt. Halla in Jeju Island. However, in Sangyeongpyo , which made Sansugo into a table, the watershed to Jeju Island became just a branching line of Honam-Jeongmaek line. The same goes for road networks. First, in Dorogo , the terminal of arterial road no.5 was Jeju. However, in “Doripyo,” which charted “Dorogo,” the trunk line to Jeju Island became a branch line to the trunk line to Tongyeong. Moreover, in Daedongjiji of the 19th century, the road to Jeju was removed from the trunk line(Daero) network. On the other hand, the road network in Jeju Island had a centralized network centered on Jeju City, just like the road network on the Korean Peninsula was centered in Seoul.

      • KCI등재

        朝鮮時代 邑治의 領域性에 關한 一考察 - 慶尙道를 事例로 -

        도도로키 히로시(轟博志) 국토지리학회 2005 국토지리학회지 Vol.39 No.1

        'Eupchi' means county seat in Joseon dynasty generally. Nevertheless the definition of its detailedterritory had not been resolved so far. This thesis is aimed to suggest a hypothesis about this proposition, based onold maps and topographies. As a result, the territory of eupchi is not absolute but relative, depends on personal orstandpoint, and purpose of definition. Three concepts of territory could be proposed. First, from the viewpoint ofadministrative function, its territory is regarded as gwana or government office area. Second, from the viewpointof settlement, its territory is regarded as county seats settlement(town). Third, from the viewpoint of traditionalworld-view, its territory is regarded as eumnae-myeon area, a subcounty where county office locates. ‘읍치’란 용어의 사전적인 해석은 조선시대 군현의 중심행정기능의 소재지이다. 의미적으로는 그렇게정의가 되어도 지리적인 정의 즉 그 공간적인 영역성이 어떠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밝혀진 바가 없다. 가장의 영역일 것이다. 그리고 가장 넓은 의미로는 읍치 근교 농촌취락까지를 포함한 소위‘읍내면’영역일 것이다. 이처럼 읍치의 영역설정은 하나가 아닌 다층성을 띠고 있는 데 특징이 있다. 이는 읍치를 자연경관으로 인식하는가, 행정기능으로 인식하는가, 도시(취락)로 인식하는가에 따라, ‘읍치’된다. 즉 행정기능에 특화해서 생각하면 관아가 읍치가 되는 것이며, 취락으로 인식하면 읍취락이 영역이 되는 것이며, 자연적 영역을 생각하면 읍내면 전체가 되는 것이다. 이러한 입장에 따른 인식의 어긋남 자체가읍치의 영역성을 반영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 KCI등재

        시공간 미디어로서의 철도 역명에 대한 일고찰

        도도로키 히로시 경인교육대학교 기전문화연구소 2023 기전문화연구 Vol.44 No.2

        이 글은 철도 역명이 가지고 있는 표상의 미디어(매체)로서의 성격과 기능에 대해, 한국철도를 사례로 정성적인 시각에서 검토한 것이다. 특히 역명과지명의 상호작용, 시간축과 공간축 양면에서의 변화에 대해 집중적으로 알아보았다. 그 결과는 이하와 같다. 역명과 지명의 관계성은 역명 위주의 변화와 지명 위주의 변화에 나누어서볼 수 있다. 전자는 역명의 영향을 받아서 지명이 변경되거나, 이동하거나, 혹은 지명이 의미하는 영역이 변동되는 일을 가리킨다. 후자는 행정구역 개편이나 지자체명 변경 등 사유로 지명이 변경될 경우 역명이 그 영향으로 변경되는 경우이다. 이 같은 역명과 지명간 작용을 일으키는 계기는 철도노선의 개통, 행정구역의 변동, 행정 경제적 중심지의 이동 등을 들 수 있다. 역명은 지역을 대표하는 교통의 결절점이라는 사명상, 지역 정체성 형성에큰 영향력을 가지며, 역의 운영 주체가 공영인지 민영인지를 떠나 강한 공공성과 공익성이 요구된다. 한편 그 공익성 때문에 생겨날 권력과의 친화성이도로 공익성을 훼손할 재귀(再歸)적 가능성은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This paper is a semantic study of the relationship between Korean railway station names and place names where they locate. A railway station is a transportation node that represents identity of the region. Therefore, station names are required to be symbols that represent the area. Place names are sometimes changed to match station names. Conversely, sometimes station names are changed to match the place name. The triggers include changes in administrative areas, the opening of railway lines, or movement of urban areas, administrative centers. Station names must be able to appropriately guide domestic and foreign passengers. Therefore, a high degree of publicity and public benefit are naturally required. It has nothing to do with whether the railway company is publicly owned or privately owned. Therefore, deciding on or changing station names requires the involvement of not only railway companies, but also local communities and local governments, just as with place names. Therefore, they have a very close relationship with authority. On the other hand, it must be kept in mind that public interest can easily be undermined by authority, so as not to abuse it.

      • KCI등재

        신경준 『산수고』와 『산경표』의 내용비교

        도도로키 히로시(Todoroki, Hiroshi)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21 한국고지도연구 Vol.13 No.1

        본 연구는 연구자뿐 아니라 일반인들에게도 주목을 받고 있는 『산경표』와 달리, 그 저본 격이면서도 내용에 대한 연구가 진행되지 않고 있는 『산수고』의 산경 관련 부분에 대하여, 제시된 산경 체계와 서술 양식에 착안하여, 그 특성을 『산경표』와 비교하면서 살펴보았다. 『산경표』와 『산수고』는 이를 계승한 『동국문헌비고』 산천조를 포함해 서 산경에 관한 내용을 바탕으로 한 것은 틀림없다. 『산경표』와 『산수고』는 미시적인 경로 및 경유지명은 거의 일치 하지만, 거시적인 산경의 노선체계에 있어서는 큰 차이를 보인다. 우선 『산수고』에서는 국토의 산줄기를 12개로 구 분하여 이들을 기준점으로 한 ‘12종산’체계를 채택한 한편, 『산경표』에서는 백두대간과 그 지선이라는 단일체계로 변 경되었다. 또 『산수고』에서는 수도 한양의 삼각산(북한산)을 필두로 삼았는데, 『산경표』에서는 대신 백두산을 으뜸으 로 삼았다. 더구나 대간과 정맥, 기맥과 같은 구분은 양자에 있는데, 『산수고』에서는 각 12 권역마다 읍치까지의 연 결을 우선하는 한편, 『산경표』에서는 정맥의 구간을 더 엄선하면서 국토 분수계로서 수경(물줄기)과의 음양 관계를 더 중요시하여, 한북정맥, 낙남정맥 등 하천을 기준으로 명칭을 부여하였다. 이러한 차이는 『산경표』가 비단 『산수 고』를 휴대용 도표형식으로 변환했다는 의미 이상으로, 조선 영조대에 지정학적으로 강계 인식이 고양되면서 실학계 에서 공간성 영역성을 강하게 의식한 국토지리인식이 보급되고, 이에 따라 國山으로서의 백두산의 자리매김 및 이에 따른 백두대간 인식의 정착을 반영하고, 또 이를 촉진했다는 의미가 더 클 것으로 가설을 세울 수 있을 것이다. “Sangyeongpyo” is known to the general public well. In addition, its research has also been relatively intense. However, “Sansugo”, the origin of “Sangyeongpyo”, is not. In order to properly understand the “Sangyeongpyo”, it is necessary to analyze “Sansugo” too. In addition, comparative studies of both are also needed. They are the purpose of this study. The choice of watershed and the choice of land names are almost the same for both books. However, there is a difference as to which major mountain to take first. In addition, “Sansugo” divides the country into 12 major mountains. However, “Sangyeongpyo” was integrated into one “Baekdudaegan” watershed. Such a difference originated from the fact that “Sansugo” placed importance on the king and capital, while “Sankyeongpyo” placed importance on the integrity of whole country. At the age of the production of “Sangyeongpyo”, late 17th century, geopolitical tensions arose in East Asia. Therefore, it eems that it was necessary to specify the territory of the country as a system at that period.

      • KCI등재

        지적원도를 활용한 신라 무진주(무주) 경관 복원

        도도로키 히로시(Todoroki, Hiroshi) 한국고지도연구학회 2020 한국고지도연구 Vol.12 No.1

        본 논문은 신라 무진주 치소를 사례로, 지적원도를 활용한 고대 도시의 미시적 경관복원에 대해 시도해 보았다. 그 결과를 요약하면 이하와 같다. 무진주의 도시계획은 많은 신라 9주5소경 도시들과 마찬가지로, 격자형 방리를 사용해 정연하게 계획되었다. 방리는 1개 방 당 약 160m 사방이며, 정 동서남북을 보고 있지는 않고, 광주천 따라 서북서 쪽으로 크게 기울고 있었다. 방리는 광주천과 서방천 사이의 평지를 메우듯이 널리 분포하고 있는데, 주작대로에 해당될 간선가로가 백제 및 중국 방면으로 뻗어 있어서, 방리를 처음 만든 것은 백제나 당이었을 가능성이 제기되며, 출토 유구와 유물로 보아 백제 말기임이 유력하다. 제말나초로 걸쳐 무진주 도시계획은 연속되었다고 보는 것이 자연스러울 것이다. 그렇게 되면 신라 9주5소경의 방리식 도시계획은 신라 자체 계획된 것과 백제로부터 이어받은 것으로 나눌 수 있을 것이며, 향후 양자의 비교도 필요해질 것이다. 남원경과 무진주 도시계획의 공통점은 주작대로 너비가 80m로 1방 너비의 절반으로 달하는 점과 주작대로가 방리 구간을 관통하여 관아 위치가 막바지가 되지 않은 점인데, 이 공통점이 ‘백제식’일 가능성도 염두에 두어야 할 것이다. 신라 치하에 들어간 후에는 통일신라시기에 조성된 것으로 생각되는 나성인 무진도독고성을 경계로 한 대략 남북13방, 동서4방 정도의 도시구역이 존재했던 것으로 사려된다. 단 무진도독고성의 형태가 부정형이며, 남쪽에는 방향이 다른 방도 있어서, 정확가지는 않다. 백제 옛땅과 연결될 남북방향 대로와 왕경과 연결될 동서방향 대로가 무진도도고성 한가운데에서 교차하는데, 대로들로 4분할된 4개 방들이 조선시대까지도 기례방, 공수방, 부동방, 두방(편방) 등 경계선도 거의 그대로 방면 수준의 행정구역으로 존속되었다. 한편 편방에 있었던 관아 구역은 입지는 거의 그대로 고려말에 읍성으로 위곽되어, 그 부분에 방리의 교란이 생겼으며, 또 무진도독고성과 광주읍성 안에서도 도시 권역의 축소에 따라 농경지가 늘어났으나, 기본적인 도시안 구조는 조선시대까지 변화지 않았다. 더구나 관아 구역은 21세기 초까지 전남도청 자리로 같은 기능을 유지하였고, 현재 광주 구도심의 가로 구성은 옛 남북대로가 충장로로, 동서대로가 중앙로로 남는 등 방리제 당시의 흔적을 고스란히 전하며, 무진도독고성 역시 해자였던 동계천 복개도로를 비릇 지도상에 흔적을 남기고 있다. 다른 9주5소경 도시도 마찬가지지만, 현대 한국의 지방중심도시는 현대도시의 면모를 가지면서 확실히 고대도시 유전자 위에 입각하고 있는 것이다. 관아 입지의 불변성, 방리제 후에 만들어진 나성, 행정구역이나 가로망에 나타나는 도시계획의 현대까지의 계승 등은 다른 도시의 사례연구들과 종합할 때 거의 일반화될 사실로 보인다. 향후, 지적원도 수준의 전수조사를 통한 일반화의 완성, 그리고 9주5소경 아닌 군현 단위의 도시로의 부연 가능성 등 후속연구를 해 나가고자 한다. This article attempted to restore the microscopic landscape of the cities of Silla through land registration maps. The case city is the current Mujinju, Gwangju city as present. Mujinju s urban planning had used grid-like streets like other Silla’s major cities. The width of each grid was about 160m per block. Along the Gwangju River, it was leaning to the northwest. The main road stretched toward Baekje or Tang’s capital. Therefore, it is possible that they were the first to plan the city. In particular, it is probable that it was the end of Baekje, sccording to the relics and remains. The city plan was inherited to Silla. Under Silla’s reign, Mujin-Dodok Fortress was built around the city. Also, another trunk road was constructed along the highway leading to the capital of Silla. As a result, Mujinju was divided into four administrative districts by two trunk streets. At the end of the Goryeo Dynasty, a small Gwangju-eupseong Fortress surrounding government office was builed. But the four districts survived until the beginning of the 20th century. And the location of the government office was used as the same purpose until recently. The current urban planning in the center of Gwangju also reflects ancient urban plann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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