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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율(Yul Kim) 한국철학회 2013 철학 Vol.0 No.116
이 논문의 목적은 개별 학문의 단일성에 대한 윌리엄 오캄의 이론을 고전적 학문 개념의 전승과 변용이라는 관점에서 설명하는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학문 개념이 중세철학에 수용된 이후, 중세 학문 개념에는 ‘지성 능력의 상태’라는 주관적 의미와 그 능력에 의해 소유되는 ‘지식 자체’라는 객관적 의미의 두 가지 해석 가능성이 생겨난다. 오캄의 선행자인 토마스 아퀴나스와 둔스 스코투스는 개별 학문의 단일성의 원리를 각각 ‘형상적 대상’과 ‘일차적 주제’라는 개념으로 설명하는데, 이는 공히 다수의 대상 가운데 특별한 어떤 하나의 대상을 가정함으로써 학문적 습성의 단일성을 설명하려는 태도다. 이러한 태도는 토마스와 스코투스가 학문 개념의 첫 번째 의미를 사유의 중심에 두고 있었다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다. 이에 비해, 오캄의 유명론은 학문의 대상이 사물이나 사태가 아닌 명사와 명제라고 주장함으로써 학문 개념의 두 번째 의미가 부각되는 계기를 만든다. 오캄에게서 학문의 대상은 명제이므로, 명사가 아닌 어떤 실재하는 단일한 대상을 찾음으로써 학문이라는 심적 습성의 단일성을 입증하려는 종래의 시도는 무의미해진다. 즉, 엄격한 의미에서 학문적 습성은 증명된 결론 명제의 소유이므로, 다수 명제들로 구성된 개별 학문은 결코 하나의 습성으로 환원되지 않으며 그 자체가 다수 습성의 집합으로 간주되어야 한다. 오캄은 각각의 학문에 집합의 단일성을 구성하는 질서가 있다고 가정함으로써 자신의 학문 단일성 이론에 완결성을 부여하고자 한다.
김율(Yul Kim) 한국철학회 2010 철학 Vol.0 No.104
오캄은 신앙과 이성을 분리함으로써 근대철학의 도래를 준비한 철학자로 평가된다. 이 논문은 오캄의 신앙-이성 분리주의가 구체적인 이론의 차원에서 드러나는 하나의 중요한 실례로서, 계시신학을 학문으로 간주할 수 없다는 그의 주장을 분석한다. 오캄은 엄격한 의미의 학문 개념을 증명된 명제가 지니는 필연성과 명증성의 성격을 통해 규정한다. 신앙의 조항을 원리로 하는 신학은 명증성의 요구를 충족시키지 못하므로 학문이 될 수 없다. 한 학문이 다른 학문으로부터 원리를 수용할 수도 있다는 사실에 의거하여 신학의 학문성을 옹호하려는 토마스 아퀴나스의 해결책은, 앞의 주체들 사이에서 명증성이 양도될 수는 없다는 원칙에 의해 기각된다. 신학의 비학문성에 대한 오캄의 이론은 인식의 명증성 및 학문성을 인식 대상의 객관적 가치와 분리하려는 태도와 결부되어 있으며, 더 나아가 신앙과 이성이 제각각 분리된 사고 형식을 구성해야 한다는 방법론적 원칙을 배경으로 하고 있다. 바로 여기서 우리는 자연적 이성의 한계에 대한 오캄의 철저한 자의식과 신앙-이성의 조화라는 중세적 기획에 대한 그의 반정립적 역할을 확인할 수 있다.
고단속 기어의 가공 시 진원도 향상을 위한 지그척 개발
김남경(Nam-Kyung Kim),배강열(Kang-Yul Bae),김남훈(Nam-Hoon Kim),장정환(Jeong-Hwan Jang) 한국기계가공학회 2016 한국기계가공학회지 Vol.15 No.1
Recently, the requirements for high precision and efficiency machining are gradually increased to raise international competitiveness at the industrial fields of automotive and gears. This trend had made effects on the industrial fields in Korea and which needs further studying of high accuracy and efficiency machining. This study is to investigate the effects of Jig type chuck for roundness improvement in CNC turning machining of high stage speed gear. After hobbing machining, Dimensional change before and after heat treatment was very largely generated. In order to solve this problem was to develop a jig type chuck. After the heat treatment, the operation of the chuck which was the most distinguished equipment among Jig type chuck(0.006mm), Scroll type chuck(0.05㎜) and Bolt type chuck(0.04㎜). Therefore, Jig type chuck was satisfied the requirement from the actual field(0.02㎜).
Bismarck와 식민지 : 1884년 식민지 정책 선회를 중심으로
김형률(Kim Hyung-Yul) 한국아프리카학회 2003 한국아프리카학회지 Vol.18 No.-
Before there was any intimation of that, as the Reich Chancellor Otto von Bismarck embarked upon a policy of colonial acquisition in 1884. So his motives for taking this abrupt reversal have been the subject of endless investigation of historians up to now. He was definitively skepsis about overseas activity until 1884, for the focus of his policy had always been continental. But he seems to have concluded as a pragmatist, in 1884, that the political capital that might be derived from the foundation of the overseas empire outweighed the risks involved, that such a political capital , if properly directed as the object of compensation, might even serve to strengthen the system of alliances that he had elaborated since 1879 in his search for national security, and that it might have some domestic advantages especially in terms of social disorder.
김율(Yul Kim) 한국현상학회 2005 철학과 현상학 연구 Vol.26 No.-
미의 문제에 대한 스콜라철학의 기본 관심은 미를 다른 형이상학적 가치들과의 통합적 관계 속에서 이해하려는 것이었다. 이러한 관심은 미의 초월성에 대한 물음으로 표현된다. 미의 초월성에 대한 물음에 영향을 미친 이론적 전제들로는 위 디오뉘시우스 아레오파기타의 『신명론(De divinis nominibus)』에서 제시된 선와 미의 동일성 테제와 13세기 스콜라철학자들에 의한 아리스토텔레스 『형이상학』의 존재론적 수용을 들 수 있다. 토마스 아퀴나스는 이러한 이론적 배경에서 미의 개념을 초월주 이론의 틀 내에서 규명하고 있다. 그는 ‘선과 미는 실제적으로는 동일하나 개념적으로 다르다’라고 하여 디오뉘시우스의 미와 선의 동일성 테제에 수정을 가하고, 미는 인식능력과의 관계를 선의 개념에 덧붙인다고 설명한다. 미를 특징짓는 인식이란, 진이 선의 의미를 지니는 한에서 그 진에 대해 생겨나는 ‘애착적 인식’을 말한다. 따라서 미는 선으로 확장된 진이라고 규정 될 수 있다. 그런 한에서, 토마스는 미의 존재론적 보편성과 실재성을 인정했을지 언정 결코 미 자체를 진이나 선의 동렬에 있는 또 하나의 초월주로 보지는 않았다. 미는 진이나 선의 의미로 환원되지 못할 궁극적인 고유한 의미 내용을 지니고 있지 않으며, 미에 대응하는 독자적은 제삼의 영혼능력도 존재하지 않기 때문이다. The interest of the scholasticism in the issue of beauty lies basically in understanding it in integration with other metaphysical values. Such interest was shown in a question about transcendentality of beauty, which was influenced by the following theoretical propositions: the these of identity of the good and the beautiful in De divinis nominibus and the ontological reception of Aristotle's Metaphysics by the thirteenth century's scholastics. Based on such a theoretical background Aquinas explains the concept of the beautiful within the frame of the theory of the transcendental. He modifies the these of identity of the good and the beautiful by saying that the good and the beautiful are identical in re but different ratione, and so he adds to concept of the good a relation with cognitive power. The knowledge characterizing the beautiful is the affective knowledge of the true as far as the true implies the beautiful. Therefore the beautiful can be considered the true extended to the good. In such a context Thomas does not regard the beautiful itself as another transcendental which is equivalent to the true or the good, although he acknowledges the ontological universality and reality of the beautiful. The beautiful does not have its own specific meaning that can be reduced to that of the true or the good, and there is no third power of the soul corresponding to the beautiful. either. In conclusion, the recent tendency to interpret that the thomas's concept of the beauty has a status of the transcendental is merely a subjective view with few historical and philological grounds.
김율(Yul Kim) 한국철학회 2005 철학 Vol.83 No.-
자기운동의 개념은 플라톤의 후기 영혼이론에서 처음 등장한다. 플라톤은 영혼을 자기 스스로 운동하는 것이라 정의한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부동의 원동자의 존재를 증명하는 자연학 8권에서 이러한 플라톤의 자기운동 개념을 비판적으로 검토하지 않을 수 없었다. 자기운동이 인정된다면 부동의 원동자 증명을 위한 필연적인 이론적 전제들이 충족되지 않기 때문이었다. 그리하여 아리스토텔레스는 자연학 8권에서 자기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세심하게 증명하고 '움직여지는 모든 것은 다른 어떤 것에 의해 움직여진다'는 운동공리를 표명한다. 이러한 증명 과정에서 아리스토텔레스는 일견 자기운동으로 보이는 생물체의 운동과 본성에 따라 일어나는 무생물체의 운동이 사실은 외적 원리로 소급될 수 있는 자연적 운동에 불과함을 주장한다. 이 논문에서 우리는 자기운통의 불가능성에 대한 아리스토텔레스의 논변의 구조와 그 의의를 역사적-이론적 맥락에서 규명할 것이다. 그리고 특히, 해석자들에게 논란의 소지를 제공하는 생물체의 자기운동이라는 표현이 자기운동이 불가능하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일관된 근본 입장을 침해하지 않는 지엽적인 표현에 불과함을 분명히 밝힐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