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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KCI등재

        江華 禪源寺와 神泥洞 假闕의 位置 比定을 위한 基礎 資料의 分析

        김병곤 진단학회 2007 진단학보 Vol.- No.104

        주지하다시피 學界에서는 禪源寺址(史蹟 제259호) 위치 비정에 대한 논쟁이 계속되고 있다. 이론을 제기하는 학자들은 續修增補江都誌의 기사를 바탕으로 忠烈祠 전면 터나 그 주변 지역을 선원사 터로 주장하며 현재 사적지는 神泥洞 假闕 터라고 한다. 그러므로 신니동 가궐은 본 논쟁에 있어 중요한 위치를 가지나 지금까지 신니동 가궐에 대한 고찰은 이루어진 바조차 없었다. 이러한 입장에서 필자는 선원사와 신니동 가궐이 고려사에서 차지하는 시대적 역할과 운영 상황을 문헌 자료를 통해 분석해 보았다. 그 결과 江都 第一 寺刹이자 八萬大藏經의 奉安處였던 선원사와 단기간에 조성된 기도처인 신니동 가궐은 사적 위상이나 외형적 규모가 비교될 수 없음을 알 수 있었다. 한편 충렬사 주변을 선원사 터로 주장하는 논자들은 ‘花山 禪源寺’라는 기록과 1932년 간행된 속수증보강도지의 ‘선원사 터는 충렬사의 문전 일대지’라는 기사를 주요 근거로 한다. 그러나 상대적으로 신뢰할 수 있는 新增東國輿地勝覽(1530년)와 江都志(1693년)에 비추어 볼 때, 속수증보강도지의 관련 기사는 오류가 있어 결코 신뢰할 수 없다. 이에 필자는 朴憲用이 1932년 속수증보강도지를 편찬하며 왜 오류를 범할 수밖에 없었는가를 살펴보았다. 당시 박헌용은 고려시대와 조선시대의 차별적인 ‘화산’ 용례를 구별하지 못했고, 선원이라는 호를 가진 金尙容의 舊宅(충렬사)이 선원사 터와 인접했다고 오해했으며, 杏村 李이 세운 선원사 경내의 海雲堂을 그의 거주처로 착각하여 충렬사 일대의 仙杏里가 과거 이암이 살던 행촌으로 판단했다. 그 결과 최종적으로 선원사를 충렬사 전면 터에 비정하는 오류를 야기했던 것이다. 필자는 이상과 같은 기초 사료의 분석을 바탕으로 조만간 別稿를 통해 선원사지와 신니동 가궐 터에 대한 蓋然性있는 위치 비정을 시도해 보겠다.

      • KCI등재

        전자상거래 활성화 방안 분석 프레임워크의 개발에 관한 연구

        김병곤,김종욱,정경수 한국정보시스템학회 1999 情報시스템硏究 Vol.8 No.1

        Today, information society is affected by new technologies including Electronic Commerce(EC), Electronic Data Interchange(EDI), Commerce At Light Speed(CALS), multimedia and teleconferencing. Electronic Commerce is believed to be a field that will bring about a huge revolution of human life in the 21st century and thus its industry will give greatly influential effect on other industries. In this paper, we have surveyed and studied through the internet and related materials for the development of framework of Electronic Commerce. It is required that we need the leading role of our government for the earlier activation of Electronic Commerce usage and have to establish the solid background of EC technology creation of our nation's originality and to activate the venture industry oriented for idea and technology rather than the industries in the form of larger enterprises. In conclusion, we have to expand our own ability of research and development to keep the continuous growth of our Electronic Commerce market and industries through the development of new product and prior acquisition of market as well as to expand the path of various technology aquisition by the strategic M&A and capital investment with the leading foreign enterprises.

      • 2021년 강원 영동지역 강설 및 눈결정 주요 특성

        김병곤,채유진,정지훈,최영길,박준철,김백조,이용희,한윤덕 한국기상학회 2021 한국기상학회 학술대회 논문집 Vol.2021 No.10

        2019년부터 올해 2021년까지 강원 영동지역에서는 강원지방기상청, 국립기상과학원 그리고 강릉원주대학교 등이 공동으로 2월부터 4월까지 강설 및 강풍 현상에 대한 입체공동관측을 수행해 오고 있다. 주요 성과중 일례를 들면, 2019년 2월 14일과 2020년 2월 6일에 강설예보가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무강설이거나 해안선 부근에만 적은 양의 눈이 관측되었는데, 이는 태백산맥 동쪽 산사면과 해안선 부근에 한기가 축적되어 동해상에서 발달한 눈구름대가 내륙으로 진입하지 못하는 한기축적과 연관된 현상임을 집중 관측캠페인으로 확인한 바 있다. 올해에도 지난 캠페인과 같이 강설 빈도는 많지 않았지만 3월 1일에 온도의 급격한 하강과 함께 12시부터 폭설이 시작되어 고속도로가 마비되는 큰 피해를 초래하였다. 이 당시 강릉에서 수행된 레윈존데 대기연직구조를 살펴보면 아침 9시에는 820 750 hPa 부근에 0℃ 이상의 면적이 존재하다가 12시에는 이 면적이 줄어들면서 800 hPa 이하 고도에서 0℃ 이하 면적이 크게 증가하면서 점차 빗방울이 얼음알갱이(ice pellet)로 바뀌는 게 관측되었다. 이후 시간대부터는 녹은 상태의 부착형 입자들이 서로 달라붙어 최대 8mm까지 큰 그리고 무거운 눈결정들이 주로 관측되었다. 실제 예보는 저녁부터 강설이 시작된다고 하였으나 온도의 급격한 하강으로 예상보다 이른 시간에 강설이 시작되었다. 또한 본 사례 초반부에는 기존 강설 사례 평균 가강수량(8.5mm)에 비해 두 배 이상 증가한 수증기(최대 21mm)가 유입되어 3월 2일까지 누적 적설량이 43cm 기록되었다. 그리고 3월 6일에 관측된 두 번째 사례는 전형적인 동해효과 강설로써 전반적으로 1.5mm 이하의 작은 싸락눈(graupel)들이 다수 관측되었고 누적 적설량은 2.3cm로 적었다. 두 번째 사례도 첫 번째 사례와 같이 12시간 동안 대략 10℃ 정도의 급격한 온도 하강이 있었지만 강설 기간중 800 hPa 이하 고도에서 모두 영하의 분포를 보였다. 이상의 결과는 하층 온도 구조 파악이 눈결정의 성상과 종류를 결정하는 데에 중요한 작용을 하고 있음을 시사하고 있어 강설의 정확한 예보를 위해서는 하층 온도 예보 정확성 향상이 동반되어야 할 것이다.

      • KCI등재

        『삼국유사』 찬자의 상고기 정치체에 대한 계승 인식 : 논문

        김병곤 한국사학사학회 2011 韓國史學史學報 Vol.0 No.23

        『삼국유사』가 김부식의 『삼국사기』를 本史로 적기하며 ‘遺事’를 서명으로 채용한 것은 『삼국사기』가 누락시킨 삼국사를 서술하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다. 더불어 首篇이나 다름없는 기이편의 自敍에서 신이사를 기록하겠다는 방침을 천명하기도 했다. 그러나 『삼국유사』는 처음부터 서명에서 주창한 ‘삼국’의 범위를 벗어나, 삼국과 공존하거나 상고 시대의 여러 정치체에 대해 독립전을 설정하고 신이사와 상관없는 내용을 상당 부분 기술했다. 이는 본서의 찬자인 일연이 상고시대 정치체가 삼국과 상관성이 있음을 주목하고 상호 관계를 구체화하려 했던 것으로, 이 과정에서 ‘二府’ㆍ‘七十二國’등이 전례없이 독립전으로 설정되며 의도적인 개작도 존재했다. 이러한 과정에서 설정된 각 정치체간의 계승 관계는 정치적 계승 〈정치적 이계(단군고조선→기자조선→위만조선)와 동일 왕계 계승(단군고조선→북부여, 북부여→동부여, 기자조선→마한, 고구려→백제)〉과 지리적 계승(위만조선→한사군→이부→삼한→삼국, 북부여→졸본부여) 그리고 기층집단의 유입에 따른 인적 계승(위만조선→이부, 낙랑국ㆍ북대방→신라)으로 구분된다. 그리고 이러한 계승 관계 속에서 주목되는 찬자의 상고사 인식을 보면, 우선 (단군)고조선에서부터 삼한을 지나 삼국에 이르기까지 어느 한나라로 연결되는 일관된 계승관계나 역사적 정통성이 부재한다는 것이다. 또한 민족적 시조로 설정된 단군의 혈연적 계승이 불분명한 까닭이겠지만 정치적 계승자로서 기자의 존재를 긍정하고 중시하였다. 이후 다양한 경로와 개작을 통해 기자조선으로부터 삼국에 이르는 계승관계를 주장하였다. 다만 이 과정에서 일부 인위적인 개작이 일어나며, 세부 내용에 오류(기준의 남하→마한의 등장, 한사군→이부→삼한 78국, 삼한→삼국)가 발생했지만, 이는 당대 지식인의 사적 인식에서 유래했던 까닭에 큰 결함이 되기 어렵다. 오히려 일연은 한국사에 포함되나 이전 사서에서 소외되었던 여러 정치체에 대해 뚜렷한 귀속 의식을 가지고 이를 정리해 민족사의 범위를 확장했다. 동시에 다양한 경로를 통해 각 정치체들의 상호 관계를 구체화하여 상고기부터 고대에 이르는 민족사의 계승을 명확히 했던 것이다. 『三国遺事』で金富軾の『三国史記』を木史と摘記して、‘遺事’を書名として採用したのは『三国史記』に漏落された三国史を叙述するという意志の表明である。これに首篇とも言える紀異扁の自叙で、神異事を記録しようとする方針を闡明した。しかし、『三国遺事』では初めから書名で主唱した‘三国’の範囲を外れて三国と共存し、以前時代のいろいろな政治体について独立伝を設定して神異社と関係のない内容を多数記述した。これは本書の撰者である一然が、上古時代の政治体が三国と相関性があることに注目して相互関係を具休化しようとしたことで、その過程で‘二府’ㆍ‘七十二国’などが前例なしに独立伝に設定され、意図的な改作も存在した。 その過程で設定された各政治体の間の継承関係は政治的継承〈異系(檀君朝鮮→箕子朝鮮→衛満朝鮮)と、同一王系(檀君朝鮮→北夫余、北夫余→東夫余、箕子朝鮮→馬韓、高句麗→百済)〉と、地理的継承(衛満朝鮮→漢四郡→二部→三韓→三国、北夫余→卒本夫余)、そして基層集団の流入による人的継承(衛満朝鮮→二部、楽浪国ㆍ北带方→新羅)に区分される。このような継承関係で注目される撰者の上古史についての認識には、まず(檀君)朝鮮から三韓を経て三国に いたるまで一国につながる一貫した継承関係か歴史的正統性が不在する。また民族的始祖として設定された檀君の血縁的継承が不分明な理由からであるが、政治的継承者として箕子の存在を肯定した。以後、多様な経路と改作を通して箕子朝鮮から三国にいたる継承関係を主張した。 ただ、その過程で一部人為的な改作(箕準の南下→馬韓の登場、漢四郡→二部→三韓 七十八国)と誤謬(三韓→三国)が発生したが、これは当代の知識人の通念から起因したので大きな欠陥になるとはいえない。むしろ一然は韓国史には含まれるが、以前史書から疏外させたいろいろな政治体について明らかな帰属意識をもち、これを整理して民族史の範囲を拡張した。同時に多くの経路を通して各政治体らの相互関係を具体化して上古期から三国にいたる民族史の継承を明確にしようとした試図自体は高く三価されるべきである。

      • KCI등재

        The Present and Future of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in Korea: between the West and the Past

        김병곤 동아시아국제정치학회 2014 국제정치연구 Vol.17 No.2

        t is generally found to be true that the position of political thought has been continuously reduced as political science has become more scientific. Despite that, we cannot deny the necessity of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while studying political science. The main purpose of this paper is to examine what kind of effort historians of political thought have contributed to Korean political science and whether that effort was enough. I explained what kind of effect and meaning the development of the history of political thought will have on the advancement of Korean political science. As discussed here, many challenges still remain in order for historians of political thought to contribute to the development of Korean political science. In order to efficiently meet these challenges and to achieve practical results, a realistic complement that can be resolved together must be created.

      • KCI등재

        신라 헌덕왕대의 副君 秀宗의 정체성과 太子

        김병곤 동국역사문화연구소 2013 동국사학 Vol.55 No.-

        신라 제42대 헌덕왕이 재위 후반 동모제 수종을 부군으로 삼아 월지궁에 거하게 하였는데, 학계에서는 수종의 부군 임명을 태자 책봉으로 이해해 왔다. 그러나 그의 부군 임명 직후 맞이한 태자비 정교가 수종(흥덕왕)의 비와 동일인이 아니며 이외에도 수종이 태자를 관칭하며 주인공처럼 등장한 「녹진전」의 작위적 구성이나, 「민애왕 석탑기」에 헌덕왕의 왕자로 파악되는 心智의 존재 등은 부군 수종과 구별되는 정당한 왕위계승권자인 태자의 존재를 충분히 인정할 수 있게 한다. 더욱이 『삼국사기』의 태자 책봉시 표기 방식은 ‘立인명爲(王)太子’, ‘封인명爲(王)太子’로 인명 앞에 ‘立’과 ‘封’을 적기하는데, 수종은 일반 관직자의 임명시 표기 방식인 ‘以母弟秀宗爲副君’으로 기록되어 있다. 또한 신라의 태자 책봉은 혈연관계를 포함한 ‘태손’이나 ‘태제’ 등의 중국식 표기가 아닌 일괄 ‘태자’로 일관하는 독자성이 존재한다. 만일 헌덕왕이 처음부터 수종을 계위권자로 인정했다면 당연히 태자로 책봉했을 것이나 부군으로 임명했음은 태자와 차별적인 그의 정체성을 단적으로 보여준다. 그럼에도 부군 수종은 정치력을 꾸준히 확장시켰고 결정적으로 자신의 동생이자 현 상대등인 충공을 포섭하여 계위에 성공했다. 당시 상대등 충공은 태자의 장인이자 숙부로서 태자의 후원자가 될 수 있었지만, 수종이 무자인 까닭에 그 뒤를 이어 계위의 여지가 있었던 까닭에 최종적으로 수종의 편에 섰던 결과였다. 결국 계위에 실패한 헌덕왕의 태자는 책봉 행적은 물론 관련 기록이 모두 탈락하며 이름조차 전하지 않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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